소설리스트

9화. 우리가 말했던 그 각오와 (9/11)

9화. 우리가 말했던 그 각오와 

이동재가 데려다준 회의실에 혼자 갇힌 채 최수혁의 이야기를 휴대폰 너머로 들었다. 이미 변호사와 이야기했고 피고용인의 개인 사생활에 관한 일로 인해 어떤 불이익도 회사에게서 받을 수 없으니, 나는 이 스캔들에 관해서 노코멘트로 일관하는 것이 좋겠다고 녀석이 전했다.

그렇다. 오늘 나는 최수혁과 스캔들이 터졌다.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은 정말 별것 아닌 곳에서 시작되었다. 어제 늦은 시각 직장인들의 애환을 성토하는 익명의 앱 게시판에 누군가 생각 없이 글을 올렸다.

[나 디자이너인데 스웨덴 친구가 재밌는 얘기 해 줌]

다니엘에게는 악의가 없었고 한국이 이렇게까지 보수적인지 몰랐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었다. 디자이너인 그가 우연히 보게 된 QG 한국판에 나와 최수혁이 나란히 찍혀 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한국 친구에게 자랑을 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너무 많은 정보들이 오갔다.

하필이면 그 글을 삼류 인터넷 신문사에서 그대로 긁어 가 그날의 할당 클릭 수를 채웠다. 평소에도 루머가 많은 최수혁의 사생활 관련 짤막한 보도였다. 상대가 보통 사람이었으면 거기서 묻혔을 일이었지만, 나라는 인간과의 접점은 새로운 정국을 끌어냈다.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으레 있었던 게이 루머가 다시 떠돈다는 정도로 치부했지만 우리 회사 직원들의 관심도는 남달랐다. 자신들과 눈동자 색이 다른 나는 입사 때부터 모두에게 얼굴이 팔려 있었고 그중 상당수가 회사로 자주 찾아왔던 최수혁을 기억하고 있었다.

밤사이 이루어진 루신 그룹 직원 수십 명의 생각 없는 익명 증언에 아침부터 인터넷 신문사들이 달려들었다. 최수혁은 물어뜯겼고 나는 단 한 시간 만에 신상이 모두 털려 버렸다.

-기사는 바로 내리라고 할 거야. 듣고 있어?”

“응.”

-집에 가서 얘기해. 퇴근 언제야.

“나 바쁜데.”

-정세연.

“일찍 할게.”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서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닐 수 있었다. 이상한 사진이 찍힌 것도 아니다. 익명들이 떠드는 말이 기사화되어 커진 것뿐이다. 최수혁의 기획사는 입장 표명할 것이 없다는 말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었고 어쩌면 며칠 내로 묻힐 수도 있다.

문제는 나였다. 저 문 너머로 ‘어쩐지….’ 라는 말 줄임과 함께 수천 가지의 의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멍하게 서 있다 회의실 문을 열었다.

다들 제 할 일을 하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바쁘게 굴러가는 중이다. 오고 가던 대화는 중단된 채 온 사방의 신경이 나에게 곤두세워졌다. 토 나올 것 같았다.

“세연 팀장, 우리 미팅 30분만 땡겨서 할 수 있어요?”

박건희가 평소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어차피 붕 떠 버린 시간대라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대회의실로 노트북을 들고 따라간 곳에 있어야 할 마케팅 팀원들은 없었다.

“…좀 앉아 있어요. 30분 후에 애들 데리고 올 테니까.”

어깨를 툭툭 치며 나를 대회의실에 내버려 둔 그가 문을 닫고 나갔다. 그대로 회의실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깊은숨을 쉬었다. 아직도 3시 반. 퇴근까지의 시간은 멀고도 험했다.

박건희가 한 소리를 해 둔 건지 마케팅 팀과의 미팅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누구도 내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았고 실례되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일 얘기만 했고 신제품 기획안에 관한 좋은 피드백들이 오고 갔다.

팀원들도 하등의 다를 바 없는 태도로 나를 대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묻지도 않았고 불편한 배려 역시 없었다. 그런 것들은 퇴근 시간까지도 내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문제는 나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직원들이었다. 나는 항상 생긴 것 때문에 불필요한 주목을 받아야 했다. 임원도 아닌데 우리 회사 누구라도 이름과 얼굴을 매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원 중 한 명이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까지 끊임없이 돌아보는 시선들을 여러 번 느꼈다. 새끼 그럴 줄 알았다는 조롱 섞인 표정도 시야에 들어왔다.

퇴근길이 무거웠다.

녀석의 집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최수혁은 귀가 전이다. 용기를 내 다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이제는 아예 메인 뉴스란에 자리를 잡았다.

[영화배우 최수혁, 장서희와의 스캔들은 위장? 숨겨 둔 남자 애인 있었다.]

꽤나 긴 장문의 소설을 써 내려간 연예 기사에서 우리는 이미 동거중이었고 나는 이태원에 자주 등장하는 탑게이가 되어 있었다. 댓글란이 없어져서 다행이네. 안 봐도 끔찍했을 것 같다.

그 디자이너 친구가 글을 올린 게시판을 다시 확인했다. 글은 이미 지워져 있었지만 또 다른 누군가 ‘삭제 복구’ 라는 타이틀로, 캡쳐된 원글을 올려 준 탓에 다시 댓글들이 주렁주렁 달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최수혁이 귀가했다. 녀석이 식탁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선뜻 말을 걸지도 않고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나를 쳐다본다.

“쓸데없이 왜 이렇게 멋있게 하고 나갔어.”

내 농담이 조금 반가웠던지 녀석이 한숨을 쉬며 웃었다. 사는 거 참 거지 같네. 나는 그 말에 동조했다.

“저녁은.”

“생각 없네.”

“시켜 줄게, 먹어. 또 몸 상한다.”

“내 아이디에 내 카드로 시키는 건데 왜 니가 생색내냐.”

녀석이 익숙하게 휴대폰으로 적당한 저녁거리를 주문했다. 술 마실까? 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 술 마신 적이 거의 없네. 맥주는 없어서 녀석이 선물 받은 사케를 꺼냈다.

“이리 줘 봐. 내가 신의 경지에 오른 미즈와리를 만들어 주지.”

일본 교환학생 때 동네 바 마스터에게서 직접 배운 대로 커다란 얼음을 녹여 물과 비율을 맞춰 두 잔 만들었다.

“교환학생 얘기는 처음 듣네.”

최수혁이 잔을 돌리며 얼음을 녹였다. 내가 지구에 태어난 지 서른한 해가 지났는데 너는 어떻게 겨우 4개월 만에 날 다 파악할 거라고 생각했냐.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다녀왔던 도쿄 라이프를 생각나는 대로 풀어 줬다. 친구 놈이 라멘집에서 만난 여자를 나를 이용해 헌팅하려다 실패한 이야기쯤 되었을 때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

전화로는 집에서 얘기하자던 최수혁도, 그러자고 일찍 퇴근해 온 나도, 차마 그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쓸데없는 어린 시절 얘기들만 늘어놓았고 최수혁은 나만 쳐다보았다.

그냥 버티자. 그때까지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다음 날부터 내게는 하나의 버릇이 생겼다. 가능하면 자리에 앉아서 업무를 보는 것을 줄였다. 닥치는 대로 회의를 잡았고 팀장급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회의까지 참석했다. 숨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혼자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나의 태도에 수군거림은 잦아들고 있었다. 나는 그게 내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했고 곧 지나가리라 믿었다.

이동재가 데스크에 앉아 휴대폰을 어깨와 턱 사이에 끼운 채 키보드를 두드렸다.

“아오 저희야 항상 좋죠. 제가 좋은 데로 모시겠습니다. 네네. 네에,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하며 동시에 이메일 쓰기 신공이다. 새끼 재주가 많이 늘었네.

“아 왜 또 술을 먹재.”

항상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전화를 끊자마자 신경질을 내었다. 분위기를 보니 거래처 접대가 잡혔나 보다. 우리가 을이 되어 접대를 해야 하는 건 딱 한 군데밖에 없다. 백화점 쪽이다.

“H야? 아님S?”

“S.”

“지난번에도 S 아니었어? 또 먹재?”

“와 새끼, 은근히 매장 리모델링 얘기하면서 눈치를 주네. 팀장님 같이 가실 거죠?”

“나까지 껴야 될 정도야?”

“그럼 나 혼자 갑니까? 의리 없네.”

하… 지금 접대까지 할 정신은 없는데. 이동재의 표정을 보니 일부러 저러는 것 같았다.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나의 의지를 서포트하려는 의도인 것 같아서 일단 알겠다고 했다. 딱히 다른 보낼 만한 사람이 없었기도 했고.

“팀장님! 점심 사 주세요.”

내 데스크에서 두 칸 떨어져 앉은 김시은이 초롱초롱한 눈을 밝히며 웃었다. 한동안 빌붙는 걸 중단하더니 간만에 점심을 먹자고 한다. 알았다고 대답하고 지금 나갈까 물었더니 자신은 화장실 갔다 갈 테니 로비에서 보자고 한다.

나도 화장실을 들렀다 가야겠다 싶어 재킷을 들고 나가는 길에 조소영 본부장과 마주쳤다. 가볍게 인사를 했다.

“어- 점심 맛있게 먹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인사를 받아 주는 그녀의 모습에 안심했다. 녀석의 팬이라고 했는데 여태 기사를 읽지 않았을 리 없다. 나를 대하는 모든 이들의 반응이 정상에 가까웠다.

손을 씻고 나오려는데 셔츠에 물이 튀었다. 휴지를 찾으니 마침 떨어졌다. 가까운 화장실 칸에 들어가 휴지를 뜯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남자 직원 두 명의 대화 내용에 놀라 얼른 화장실 칸 손잡이를 잡았다.

“존나… 입사 때부터 잘난 척하면서 여자 직원들 다 후리고 다니더니. 페이크였어?”

“야 우리 팀 막내가 그러는데 그 새끼 이번에 남자 인턴하고도 썸씽 있었다더라.”

“와 시발… 그것만 달렸으면 다 대 주나 보네? 화장실 같이 쓰기 찝찝하지 않냐. 막 슬쩍 내 거 보는 거 아니야?”

“아이 새끼야, 드러워. 시발. 크크크.”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험담을 직접 듣고 나니 화가 난다기보다 가슴이 떨렸다.

말이 너무 심하잖아….

화장실 칸 손잡이를 놓을 수가 없었다. 물 내리는 소리가 두 번 나고 세면대에서 손 씻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도 나는 혼자 화장실 안에 갇혀 있었다.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이름이 뜨는 순간 울컥하고 감정이 터져 나왔다.

[점심시간이지?]

[통화할까?]

답장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제멋대로 휴대폰은 벌써 울리고 있다. 숨을 한 번 크게 쉬었다. 화장실을 나가며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계단을 내려가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해.”

-뭐 먹는데.

“글쎄 김시은이 좀 초딩 입맛이라서 어디로 끌고 갈지 모르겠네.”

-왜 이렇게 목소리가 울려. 계단이야?

“어. 내려가면서 통화하려고.”

-오늘은 좀 늦을 거 같은데. 우리 개봉 날짜 잡혔거든.

아… 녀석이 그 여름 그렇게 고생했던 결과물이 이제 나오는구나. 나도 기뻤다. 정식 홍보 기간에 들어가면 녀석도 다시 바빠지겠다.

-내일은 일찍 들어갈 거야, 저녁 같이해.

“내일 회식 있는데.”

-많이 마실 거 아니잖아.

“좀 달려 줘야 해, 접대 자리라서. 아예 차도 두고 가려고.”

-그래 그럼. 나 아침에 스케줄 없어, 출근할 때 데려다줄게.

“…….”

그 말에 나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칫했다. 데려다준다는 녀석의 말에 자연스럽게 긍정할 수 없는 나를 깨달았다.

-…아니다. 다른 스케줄 있었네. 택시 타고 가.

녀석이 나를 위해 한 발을 뺐다. 누가 그 바쁜 출근 시간에 일일이 운전석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겠냐마는 지은 죄가 많아 제 발이 저리는 도둑놈들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데 그 죄가 유죄냐고.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데려다줘. 얼마 안 걸리잖아.”

최수혁이 눈치를 보는 것이 싫다. 그 성격에 어울리지도 않는 배려를 한답시고 거짓말을 둘러대는 꼴도 보기 싫다.

-그래 그럼.

나는 이미 녀석에게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렇게 한 며칠 더 씩씩하게 버텨 냈다. 루머는 최수혁의 유명세만큼의 크기로 굴러갔다. 동성애를 극렬히 반대하는 단체들이 아동 청소년 보호법 등을 들먹이며 녀석의 연예계 활동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보통 영화배우로는 가지기 힘들다는 안티 세력들도 등장했다. 대부분은 젊은 남성들이었고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최수혁의 필모그래피가 그들에 의해 물어뜯기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혐오 이미지들과 합성된 최수혁의 사진들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10년간을 지켜 왔던 이미지가 말도 안 되게 추락하고 있었다.

기획사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악의적인 이미지 훼손과 근거 없는 루머 유포에는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는 공식 입장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최수혁 본인이었다.

새로 개봉될 영화의 기자회견이 열린 날, 오랜만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최수혁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쏠렸다. 제작사 측에서는 하지 말아야 할 질문 리스트를 미리 기자들에게 내밀었지만, 클릭 수에 눈이 먼 일부 신문사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L모 그룹에 다니는 정모씨와 동성 연인 관계라는 루머에 관해 한 말씀만 해 달라.’

대답하지 않겠다.

‘같이 스웨덴으로 밀월여행을 다녀왔다던데 사실인가.’

대답하지 않겠다.

간단하게 ‘아무 사이 아니다’ 라고 부정하면 해결될 일을 계속해서 녀석은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쓸데없는 직업 정신이 발휘된 기자 한 명이 집요하게 녀석을 괴롭혔다. 그러다 인내심이 끊어져 버린 최수혁이 본래 성질머리를 못 이기고 회견장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제작사는 녀석의 기획사에 항의했고, 최수혁 측은 현장에서 제지하지 않은 제작사 쪽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먼저 무례하게 군 건 그 새끼 아니야? 그딴 쓰레기 같은 놈 끌어내지도 않고 일부러 놔뒀어! 내가 뭐라고 하는지 다들 궁금했나 보지? 시발….”

“그래도 그냥 앉아만 있지 왜 먼저 빌미를 줬어. 대표님한테까지 전화 오고 난리 났어.”

“나 원래 이런 거 몰라? 내 성격 모르고 계약했냐고! 연기만 하라며! 다른 건 다 알아서 막아 준다고 한 게 형 아니었나?”

“그래도 좀 참지 왜 일을 크게 키워. 대놓고 게이냐고 물어본 것도 아니잖아.”

“시발… 차라리 그랬으면 더 쉬웠어.”

나는 소파에 앉아 둘의 대화를 들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기자회견이 파투 나자마자 최수혁의 매니저가 집으로 찾아왔다. 문제는 녀석이 우리 집에 있었기 때문에 여기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싸우려면 녀석의 집에서 싸우지 나 듣는 데서 계속 저러고 있는 게 괴로웠다.

내가 자리를 피해 주려고 일어서면,

“앉아 있어. 너도 관계자잖아.”

하며 녀석이 도로 주저앉혔다. 야 인마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나는 관계자가 아니고 당사자라고.

당사자로서 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저 매니저는 언제부터 나를 알고 있었을까.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녀석의 기획사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우리의 뒤치다꺼리를 해 줘야 했을까.

“내일 회사로 나와. 니가 대표님이랑 직접 얘기해. 난 모르겠다 이제.”

드디어 가려나 보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다가가 매니저에게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니가 왜 사과를 해. 죄지었어?”

아오… 진짜…

화산 터지듯 활활 타오르는 최수혁이 불을 뿜었다. 문을 잡아 주고 있던 나와 신발을 신은 매니저가 한숨을 쉬며 눈빛을 교환했다. ‘진정 좀 시켜서 내일 회사로 보내 주세요.’ 그런 무언의 부탁을 하고는 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문을 잠그고 거실로 들어왔다. 이런 놈을 지금까지 데리고 있는 기획사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하면 되잖아.”

“아니긴 뭐가 아닌데. 너랑 내가 아무 사이가 아니야?”

“그런 게 아니잖아. 니가 거기서 날 부정한다고 해서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거기에 삐쳐 맘 상할 놈으로 보여?”

“정세연.”

녀석이 정색하며 쳐다본다.

“내가 부정해서 니 맘이 편하다면 그렇게 할게. 니 회사 생활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진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한다고.”

그 말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과연 그렇게 될까. 최수혁이 아니라고 입장 표명하면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아, 아니라더라.’ ‘우리가 오해했네.’라고 생각해 줄까. 나는 이미 회사 인턴한테까지 대 주는 쓰레기 같은 놈이 되어 버렸는데.

녀석은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다. 믿고 안 믿고는 각자의 사정이겠지만 공식 입장이란 것은 나름의 힘이 있다. 본인이 분명 아니라고 했으니 더 이상 그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말라. 연예인은 그런 게 허락되는 사람들이지만 일반인은 아니다.

그 누구도 나에게 당신 게이냐고 물은 적이 없고 따라서 나는 내 입장을 표명할 곳이 없었다. 소문과 뒷담화는 실어 나르는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너는 편해질 거 아니야. 불편한 질문 안 받아도 되고.”

“그런 거로 마음 불편한 적 없어, 신경 쓰지 마.”

녀석이 옷 갈아입고 오겠다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내게 뭐라고 한 적은 없다. 직속 상사도 모른 척 넘어가 주고 있는 상황이다. 화장실에서의 날 서린 대화들이 신경 쓰였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다.

최수혁이 정말 나와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부정했다면 내 기분이 어땠을까. 혼자 루머 속에 남겨진 외톨이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나를 두고 혼자 도망가기 싫었던 최수혁이 이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 내 옆에 있어 주겠다고 한다. 미친 새끼. 인생 진짜 막무가내로 사는구나. 나중에 무슨 후회를 하려고 이렇게 막 나가냐.

어느새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최수혁이 다시 우리 집 거실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배 안 고파? 파스타 먹을래?”

갑자기 녀석에게 요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토마토소스 사다 놓은 게 있으니 면만 삶으면 될 것 같았다.

최수혁을 식탁 의자에 앉혀 놓고 냄비에 물을 올렸다.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마늘을 볶았다. 냉동실에 있던 다진 고기를 해동해서 마늘 기름 위에 볶은 뒤 토마토소스를 부어 함께 끓였다.

“도와줄게.”

소스 끓이기에 바쁜 나 대신 녀석이 의자에서 일어나 끓어오르는 물에 파스타 면을 넣었다.

“소금 넣어.”

내 말에 최수혁이 면수에 소금을 넣는다.

“이걸로 저어.”

또 고분고분 내가 시키는 대로 집게를 받아 들고 파스타 면을 휘휘 저어 준다. 갑자기 확 올라온 거품에 깜짝 놀란 최수혁이 연기를 후후 불며 온도를 낮추었다. 아씨… 너 좀 귀엽다.

“왜 쳐다봐. 내가 뭐 또 잘못한 건가?”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더니 지가 뭔가 실수한 게 있는가 싶어 물어본다.

“아니. 잘했어. 소스는 다 됐으니 면 다 삶으면 바로 넣고 먹음 되겠다.”

으레 하던 대로 수저에 소스를 묻힌 뒤 새끼손가락으로 토마토소스 맛을 보니 이쪽은 다 된 것 같다. 볼로네제는 정말 순식간에 만들 수 있는 내 몇 안 되는 레시피 중의 하나이다.

싱크대에 손을 씻으려는데 녀석이 다가와 방금 내가 맛봤던 새끼손가락을 지 입에도 쏙 넣는다. 왜 이래 또 갑자기.

“맛을 잘 모르겠는데.”

“수작 부리지 마.”

내 새끼손가락을 쪽쪽 빨던 녀석이 이번엔 입술을 침범했다. 두 혀가 섞이며 같은 향과 맛을 공유한다. 삼킬 듯 내 혀를 빨던 최수혁에게 어느 순간 아랫입술을 깨물렸다. 잇! 하는 소리를 내자 녀석이 작게 웃으며 나를 놔주었다.

“맛있게 된 거 같네.”

“비켜라.”

녀석을 밀어내고 파스타 면을 확인했다. 짧은 키스의 시간 동안 알맞게, 적당한 알 덴테로 익었다. 그대로 프라이팬에 덜어 소스에 넣고 볶았다. 가능한 한 빠르게, 습기가 날아가지 않게 볶아야 한다.

“저쪽에 접시.”

녀석이 다시 고분고분 내가 가리킨 곳에서 접시 두 장을 꺼내 왔다.

“아냐, 그냥 들고 있어.”

한 손에 접시 한 장씩 녀석이 양손으로 나에게 배급을 받았다.

“잠깐, 잠깐.”

식탁으로 움직이려던 녀석을 멈춰 세워 냉장고에서 꺼낸 치즈 가루를 뿌렸다. 자 어떠냐, 요리는 이렇게 하는 거야 인마.

식탁 위에 2인분의 파스타를 놓고 마주 보며 앉았다. 맛은 뭐 당연히 맛있겠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한 놈이라도 제대로 요리할 줄 알아서 다행이네. 평생 굶어 죽을 일은 없겠어.”

요리 실력을 칭찬 받은 것보다 ‘평생’이라는 단어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는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고 최수혁은 기획사 대표를 만나러 가야 할 것이다.

가서 뭐라고 할 거냐고 물었더니 대충 둘러대겠다고 했다. 우리 관계에 관해 대표까지 알고 있었던 것이었냐고 물으니 또 ‘대충은’이라고 대답했다.

녀석에게 대충이란 건 대체 어떤 의미인 건지 모르겠다.

***

최수혁은 아침 일찍 나갔다. 나는 좀 더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나체로 있는 것이 무안해져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동재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괜찮아?

기자회견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

“내가 뭐 안 괜찮을 게 있나. 사고 치신 분이 곤란한 거지.”

-와, 최수혁 의리 있데? 형 동생으로서 나 좀 감동했잖아.

“그게 무슨 의리야. 지 무덤 판 거지. 안 그래도 기획사 대표한테 불려 갔어 오늘.”

-뭐야 그럼 혼자 있어?

“어.”

-나와 그럼. 점심 먹자.

나쁘지 않은 생각인 것 같아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처음 글이 올라왔던 그 앱을 다시 확인했다. 이제는 아예 우리 회사 이름으로 스레드가 세워져 나와 녀석의 목격담들이 앞다투어 올라왔다.

나와 말 한 번 섞어 본 적도 없던 사람들이 자신이 같은 회사 직원이라는 사실만으로 꽤나 큰 비밀을 알고 있는 듯 사실을 과장하고 부풀렸다. 밥 먹는 걸 봤다. 키스하는 걸 봤다. 점심시간인데 호텔로 들어가는 걸 봤다. 그 팀장 밑에 있는 팀원들이 불쌍하다.

졸지에 나 때문에 허지환까지 아웃팅당했다. 허씨라는 성씨는 누구에게나 기억에 남은 탓이었다. 인사팀에서 왜 아무런 조치를 안 하는지에 관한 성토 글까지 올라왔다. 정호민 대리가 떠올랐다.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기분을 뒤로하고 샤워를 한 뒤 나갈 준비를 했다. 녀석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짧게 외출한다는 문자를 보내 놓고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12층에 선 엘리베이터에서 1206호 딸래미가 내렸다. ‘안녕’ 하니 저도 꾸벅 인사를 하며 내렸다.

“아저씨.”

문이 저절로 닫히려고 하는 바람에 다시 열림 버튼을 두세 번 빠르게 눌렀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1206호 딸래미가 제 휴대폰을 건네 준다.

뭐지 싶어서 화면을 보니 최수혁의 팬들이 상주하는 인터넷 사이트가 띄워져 있었다. 거기 있는 게시글들과 댓글들을 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남이사 남자를 사귀든 여자를 사귀든 무슨 상관임? 조선 시대야?’

‘저런 놈들이 꼭 지 돈 주고 영화 안 보고 불법 사이트만 찾아다닌다고.’

‘기자회견에서는 최수가 화낼 만 했다 진짜.’

‘나 열 받아서 그 신문사에 항의 전화했어. 대한민국 아직 멀었다 진짜.’

‘나는 최수가 이제 한 사람한테 정착하는 것 같아서 오히려 기분 좋은데.’

‘게다가 완전 미남.’

‘나는 지인특집 기사 때부터 눈치 깠음. 둘은 절대 그냥 지인처럼 안 보였어.’

‘솔직히 우리 다 알고 있었는데 일부러 티 안 냈잖아. 엄한 데서 터지네.’

‘다 필요 없고 L그룹 직원들한테 완전 실망함. 배운 것들이 더하네.’

‘회사 망신은 오히려 지들이 다 시키고 있음.’

‘최수 애인 힘내라 진짜.’

대충 그런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더럽다는 말이나 실망했다는 말은 없었다. 여기서는 이미 나를 녀석의 공식 애인으로 지칭하고 있었다. 만약 녀석이 아무 사이 아니라고 부정했다면 오히려 팬들에게는 비웃음을 살 뻔했다.

“거지 같은 것들 말하는 거 너무 신경 쓰지 마요, 아저씨.”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인다. 와… 이게 무슨 냄새야. 1206호 셜록 아줌마의 따님에게서 쿨내가 진동했다. 진심으로 이 녀석이 수능을 잘 치러서 서울대 가기를 바랐다. 그래야 이 나라가 좀 더 살기 좋아지지 않겠어?

내 대답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 ‘그럼 이만’ 하며 자기네 집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지하로 내려가는 동안 그 게시판에서 최수혁의 팬들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모두가 욕하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 익명의 누군가들이 건네는 위로가 이렇게 힘이 되는 줄 몰랐다. 회사 동료들에게서 받은 상처를 녀석의 팬들에게서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

어쩐지 이동재가 고른 장소가 너무 힙스럽고 세련된 곳이라 했다. 혹처럼 달고 나온 김시은이 ‘팀장님!’ 하며 이동재 차에서 같이 내리니 모든 것이 설명되는군.

“둘이 사귀냐.”

“팀장님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데요.”

“야, 다 듣고 있거든?”

스읍… 이상하다. 둘이 분명히 존댓말 쓰며 내외하던 사이였는데 반말을 하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나를 보며 김시은이 테이블 예약해 두었으니 얼른 들어가자고 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인데 내부는 정원처럼 뚫려 있었다. 김시은이 예약해 둔 테라스석 테이블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는 탓에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져 왔다. 조용히 불어오는 늦가을 바람에 정원 안에 있는 큰 버드나무가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여기 파스타가 맛있어요.”

“나 어제저녁에 파스타 먹었어.”

“저녁 나가서 먹었어?!”

이동재의 질문은 이 시국에 둘이 밖에서 데이트했냐 라는 말로 들렸다.

“아니, 내가 만들었지.”

“현실 부부네.”

“까불지 마 이동재.”

“팀장님은 그러면 티본 스테이크 드세요. 여기 그것도 잘해요.”

“단골인가 보네?”

“네 여기 사장님이랑 친해요.”

친한 게 아니고 친오빠였다. 분명 시킨 게 아닌 메뉴들이 자꾸만 소량으로 담아져 나오는데, 얼마나 친해서 이렇게 서비스가 줄줄 나오는지 궁금했던 차에 사장님이 직접 테이블로 와서 그 정체를 밝혔다.

“시은이 상사분이 오셨다고 해서요.”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나니 그가 ‘동재씨도 많이 드세요’ 한다. 이것들 봐라? 오빠 되는 사람이 이름까지 아네? 그가 돌아가고 난 뒤 가느다랗게 뜬 내 눈을 보며 이동재가 오버하지 말라며 타박을 줬다.

“한 번 왔었어. 그때도 이렇게 막 서비스를 주시더라니까. 시은이 직장 선배라고.”

“팀장님 진짜 아니에요. 저 따로 썸남 있어요.”

김시은이 쿡쿡 웃으며 전면 부정을 했다. 일단 믿어 주기로 하고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었다. 오 맛집이네. 내 표정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김시은이 이것저것 서비스로 나온 접시들을 내 쪽으로 밀어 넣었다.

배부르다는데도 계속해서 음식을 밀어 넣던 김시은이 나를 쳐다보며 살이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아… 추석 때 장염이랑 위염이 겹쳐서 고생 좀 했거든.”

“형 응급실 실려 갔었대.”

“헉! 진짜요?”

야, 실려 갔다니까 꼭 무슨 기절한 뒤 앰뷸런스 타고 간 것 같잖아. 그런 게 아니고 스트레스성이라 수액 맞고 하루 만에 괜찮아졌다고 변명을 했다. 그랬더니 더 난리다.

“어떡해… 그렇게 스트레스받으신 것도 모르고 제가 막 오지랖 부려서….”

“허지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형 요새 너무 이벤트가 많았어. 어머니 오셔서 벌거벗고 커밍아웃했지, 거머리 같은 놈 떼어 내느라 고생했지.”

“팀장님 어머니한테 벌거벗고 커밍아웃하셨어요?!”

“야 이동재.”

니가 스트레스를 키우는구나 진짜. 동재 녀석의 말을 들은 김시은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더 알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다. 내가 너 그런 쪽으로 심하게 관심 많다는 건 아는데 선 넘지 마라 제발.

점심을 다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레스토랑 매니저가 필요 없다며 그냥 가시란다. 저쪽에서 손을 흔들며 웃고 있는 김시은의 친오빠가 보였다. 구성원으로 보면 당연히 내가 계산해야 하는 자리인데 생각지도 못하게 돈이 굳었네. 그에게 짧은 목례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즐거웠던 점심 회동이 끝이 난 뒤 나는 최수혁이 집에 왔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지만 통화중이었다. 대부분은 통화를 끊고 내 전화를 먼저 당겨 받거나 곧바로 콜백을 넣어 주는데 30분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대표한테 심하게 깨지고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아파트 입구 앞에서 좌회전 신호를 받으려고 서 있는데 맞은편 차선에서 페라리가 우회전으로 먼저 들어갔다. 호랑이가 제 말을 듣고 찾아왔나 보다.

신호를 받고 움직이려는데 갑자기 2차선에서 검은색 SUV가 끼어들기를 하며 위험하게 먼저 좌회전을 했다. 미친놈… 사고 내려고 작정을 했나. 급브레이크로 해당 차량을 먼저 보낸 뒤 천천히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지정된 주차 자리로 서행을 하는 도중 맞은편에서 후진 주차를 끝낸 페라리의 운전석에 최수혁이 보였다. 나도 후진으로 차를 넣은 뒤 웃으며 녀석을 쳐다보았다. 내리지도 않고 거기 앉아서 뭐 하냐.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전화가 왔다.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웬 전화야.”

-정세연 나오지 마. 여기 기자 와 있어.

차문을 열려던 내 손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앞 유리로 보이는 최수혁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금방이라도 만져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차문 밖으로 나오지 말라며 경고를 한다.

“나한테 볼일이 있는 건지 너한테 볼일이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내가 먼저 나갈 테니까 좀 있다 나와. 혹시 너한테 붙으면 가능한 무시하고 상대를 안 하는 게 좋겠고. 그게 어려우면 그냥 전부 부정해. 나에 대해서 전부.”

엔진이 꺼진 페라리에서 녀석이 내렸다. 여전히 선글라스를 낀 채였지만 큰 키와 실루엣이 숨길 수 없는 최수혁이었다. 검은색 SUV는 미동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유리문을 열고 녀석이 내부로 들어갔다. 내 차례가 되자 은근히 긴장된다. 녀석의 말대로 가능한 무시해야지. 아우디 문을 열고 나갔다.

“정세연씨? 안녕하세요. 스타뉴스 이상태 기자입니다. 정세연씨 맞죠?”

씨발… SUV 차량에서 내린 놈은 기자회견에서 최수혁을 괴롭히던 바로 그놈이었다. 차라리 아까 좌회전 신호에서 들이받을걸. 전치 4주쯤 내 주고 싶었는데 운명이 허락을 안 해 주네.

“여기 사시나요? 최수혁씨랑 같이 동거하시는 건가요?”

한 번 째려봐 주고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무시, 또 무시가 최선이었다.

“사귄 지 얼마나 되셨어요? 스웨덴에서는 애인이라고 커밍아웃하셨다면서요. 부정하시는 겁니까?”

조금만 더 가면 입주자들만 통과하는 공간이다. 나는 그를 계속 무시하고 걸었다.

“정세연씨, 이렇게 말씀 안 하시면 손해예요. 입장 표명을 안 하시면 회사로 전화하겠습니다.”

발걸음이 뚝 멈춰졌다. 뭐? 다시 말해 봐라 이 새끼야.

“루신 그룹 홍보팀에서 곧 입장 표명할 거 같은데 먼저 하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최수혁씨와의 관계 전면 부정하시나요?”

“먼저 확실하게 해 둘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그가 화색을 띠며 휴대폰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그러면서 뱀 같은 혓바닥을 핥는다.

“제가 여기 입주민입니다. 이사 온 지 3년 되었구요.”

“아 그럼 최수혁씨가 정세연씨 집으로 들어온 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 씨발… 나도 모르게 계속 답변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나를 도발하기 위해 회사 얘기를 꺼낸 게 분명했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빌 수 있으면 빌고 싶었다. 제발 관심 꺼 달라고.

“네. 그런 게 아니고 뭔가요? 최수혁씨가 자주 가는 이태원 바 단골 손님으로 만났다는 건 사실인가요?”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와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럼 어디서 만나셨나요? 사귄 지 얼마나 되셨나요?”

“그만하세요.”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입주자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기자 놈이 같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거 주거 침입 아니야?

“여기 입주자만 들어오는 공간입니다.”

“그런 게 어딨어요. 택배도 들어오고 배달음식도 들어오는데. 루신 그룹 익명 게시판에 나오는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입니까? 인턴 얘기는 사실이에요?”

이 미친 새끼가.

“사실이면 동시에 만나신 거예요? 최수혁씨는 대신 장서희씨 동시에 만나고 그랬다는데 두 분은 그럼 뭐 파트너 그런 겁니까? 어디까지가 진실입니까?”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기자를 쳐다본 채 할 말을 잃었다.

“최근에 고속 승진했다는 말이 있던데, 거기에 떠도는 루머에 대해서도 해명하시겠어요? 루신 그룹 임원하고도 그렇고 그렇다는.”

퍽!

갑자기 기자 양반이 시멘트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쓰고 있던 안경이 깨진 채 바닥에 굴렀고 그 옆으로 액정이 나간 휴대폰이 떨어졌다. 으… 하는 신음과 함께 손으로 코를 만지더니 피를 훔쳐 낸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벌써 집에 올라가 있어야 할 최수혁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고는 저벅저벅 다가가서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다시 바닥에 집어 던졌다. 완전히 박살이 났는지 부속품들이 튀어나왔다.

“고소해, 개새끼야.”

지갑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를 쓰러진 기자 얼굴에 던지며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아끌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곧장 12층으로 올라간다. 요즘 같은 시대에 백만 원짜리 수표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싶어 최수혁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엘리베이터 벽에 몸을 기대었다. 녀석의 표정은 여전히 잔뜩 굳어진 채로 말이 없었다. 손목은 아직 잡힌 채였다.

12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도 우리는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게 서 있었다. 자동으로 다시 닫히려는 문을 잡은 최수혁이 나를 다시 잡아끌었다.

우리 집을 지나쳐 제집으로 나를 들여보낸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면서 왜 그랬어. 도발하려고 한 질문인 거 알잖아.”

나는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녀석에게 지껄였다. 이런 일 수십 번은 더 겪었을 톱스타에게 훈수를 둘 만한 처지도 아니었다. 녀석은 알면서도 그냥 참지 않은 거다. 그러게 왜 안 올라가고 그걸 다 듣고 있었냐. 바보같이.

“미안해.”

최수혁이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자신의 참을성에 대해 사과를 했다. 나도 고개를 소파 위로 젖히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이 신파극은 어디까지 갈 셈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둘이서 나란히 앉아 한동안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도 최수혁은 정신 나갔다. 내일이 없는 놈 같았다. 그래도, 속은 좀 후련했다는 건 감출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을 종잡을 수 없어 괜히 한숨만 나왔다.

“휴… 이 미친놈아.”

내 욕설에 최수혁이 헛웃음을 뿜었다.

“내가 원래 미친놈이 맞긴 한데, 정세연 만나고 나서는 자꾸 들키게 되는 게 꽤 곤란하네.”

“니네 대표님이 또 호출하시겠네.”

“호출은 무슨.”

“오늘은 뭐라셔?”

“성질 조금만 줄이라고. 나머지는 회사에서 알아서 한다고.”

“전혀 효과가 없는 거 아니냐.”

“그러네. 내가 유일하게 말 듣는 사람은 지구상에 딱 한 사람뿐이라서.”

녀석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까부터 녀석을 보고 있었다. 그 잘난 콧대와 턱선을 감상하며, 제멋대로 내뱉는 싸가지 없는 말투를 들으며.

“정세연.”

“응.”

“도망가지 마.”

어쩐지 녀석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다. 자신이 유일하게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의 권력 앞에서 불안한 마음을 내비치는 것 같았다. 오른손으로 녀석의 뺨을 훑었다. 턱선을 타고 목으로 흐르는 내 손길에도 녀석의 시선은 나를 향한 채 흔들리지 않았다.

“말했잖아. 내가 좀 용기 있는 남자라고.”

서로의 비싼 감정을 지불하기 위해 우리는 가진 걸 몽땅 팔아 던지고 있었다.

***

그 문제의 기자는 역시나 기사를 크게 때렸다. ‘최수혁, 기자 폭행. 이미지 끝없이 실추하나.’ 이런 식의 제목을 달고 나와서는 결국 내용을 보면 녀석과 나의 관계가 사실이라는 결말로 끝을 맺었다.

최수혁의 기획사는 생각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 기사가 뜬 다음 날 곧바로 공식 성명을 냈다. 해당 기자는 소속사의 연예인 집까지 찾아가 무례한 질문을 했으며 도를 넘는 사생활 침해로 인해 당사자에게 심각한 정신적 피해를 줬다며 명예훼손과 주거 침입죄로 고소를 하겠다고 했다.

폭행죄로 맞고소를 하겠다며 주장하던 기자를 상대로 다시 한 번 기획사에서 내놓은 것은 녹취록이었다. 그가 했던 무례하고 도발적인 질문들이 일부 공개되자 여론이 조금씩 들끓었다. 연예인의 사생활이 어디까지 대중의 알 권리에 해당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최수혁과 내가 사귀는지 아닌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것과 별개로 내 회사 생활은 더욱 피폐해져 갔다. 루신 그룹 직원들은 애초에 최수혁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기자를 폭행하면서까지 나서 준 나에 대한 배려를 빌미로 이제는 포르노 소설을 써 댔다.

“아예 같이 산다던데? 제대로 물었나 봐.”

“야, 원래 뒤로 한번 해 보면 잘 못 빠져나온다더라.”

“아 씨… 우리 회사에 진짜 탑게이 있었네. 크크크.”

나는 요즘 화장실을 들어가기 전 항상 밖에서 잠깐 기다려야 했다. 나는 마치 같은 화장실을 쓰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여기만 왔다 하면 더러운 가십거리들이 쏟아졌다. 오늘은 좀 심했고 기다리는 시간도 너무 길어졌다.

“팀장 일찍 단 것도 존나 이상하다 했다 진짜.”

“크크크 나는 후장 대 주는 재주가 없어서 여태 대리….”

쾅!

“시발… 회사에 쓰레기들 존나 많네. 할 짓이 없어서 화장실에서 남 사생활 뒷담화나 하고. 개념들은 어디다 쳐 말아 드신 걸까요.”

허스키한 목소리의 거침없는 대거리에 쑥덕거리던 목소리들이 사라졌다. 황급히 화장실을 나오던 두 명의 남자 직원들이 화장실 밖에 서 있던 나를 보고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더 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뒤로 박건희 팀장이 나왔다. 내 얼굴을 보더니 씩 웃으며 깔끔하게 볼일 보고 나오란다. 점심 같이하자는 말도 덧붙였다.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목격한 것만도 세 번째다. 박건희는 자신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 내 뒷담화를 까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대놓고 뭐라 했고 그 수위에 따라서는 쌍욕도 서슴지 않았다.

“자꾸 그러시면 팀장님도 뒤에서 욕먹어요.”

펄펄 끓는 순댓국에 장을 섞으며 내가 말했다.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먹는 욕, 자신은 신경도 안 쓴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신입사원 시절에는 박건희 팀장 욕을 하는 동기 놈들 편을 들어 줬지. 그것도 화장실에서. 젊은 시절의 나를 반성했다.

“벌레 새끼들이 너무 많아서 퇴치가 힘들어 보여도, 눈에 보이는 족족 약을 쳐 주면 언젠가는 없어져요. 세연 팀장 진짜 생긴 거랑 다르게 너무 물러 사람이.”

“모든 사람이 박팀장님 같지는 않아요.”

정호민 대리가 내 편을 들어 줬다. 오늘은 셋이서 국밥이나 말자며 허스키가 멋대로 둘을 끌고 들어온 탓이었다. 인사과 귀염둥이가 얼굴을 붉히며 제 연인의 터프함을 부각시켰다.

그런 그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쳐다보는 대형견. 나도 모르게 엄마 미소가 입에 걸렸다. 이런 기분이구나. 김시은이가 나를 볼 때의 감정이.

“난 근데. 그 뭐냐, 좀 놀랐어요.”

순대만 따로 덜어 새우젓을 찍어 먹던 나는 음? 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니 지난번에 부대찌개 집에서 애인 있다고 할 때 내가 잘생겼냐고 물어봤잖아. 아무 말도 안 하길래 그냥 평타치쯤 되는 줄 알았지. 이렇게 스케일이 큰 줄도 모르고. 나 참….”

“그러니 저도 자랑하고 싶어 죽겠는데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때는 또 이렇게 될 줄 모르고 박건희 팀장에게도 한 꺼풀 숨겨야 했다. 이제 다 오픈하게 되니 이 두 사람 앞에서는 마음이 정말 편했다. 자주 밥을 같이 먹게 될 것 같았다.

“그래요, 세연 팀장 많이 먹어. 오늘은 내가 살게요. 아줌마 여기 모둠 순대 한 접시 추가합시다!”

터프하게 주문을 하는 제 애인을 보며 정호민 대리가 또 얼굴을 붉혔다. 둘이 진짜 귀엽네.

모둠 순대가 나오자 몇 개 툭툭 자신의 그릇에 넣고 말아 먹던 박건희 팀장이 회의가 있다며 먼저 일어섰다. 그래서 정호민 대리를 같이 데리고 나왔나 보다. 아마 오늘 밥 먹을 생각도 애초에 없었을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시간을 쪼개 굳이 여기까지 온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떠나고 나니 동기끼리의 편안한 대화가 이어졌다. 나는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동기들이 뭐라 안 해? 너랑 나 말 튼 사이라는 거 모를 거 아니야.”

“뭐… 원래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는 너 질투하는 애들 좀 있었어. 그런 애들이 몇 번 떠들긴 했지.”

이동재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회사 사람들 욕만 해 대었고 김시은은 눈시울까지 붉혔다. 정호민 대리가 제일 객관적이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퇴근하는 길에 녀석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기자회견 이후 최수혁은 내내 집에만 있었다. 당분간만 조심하라는 대표의 당부였고 운 좋게 애인도 옆집에 사는 덕분에 녀석은 고분고분 그 말을 들었다. 그 덕에 나는 며칠째 칼퇴근 중이었다.

“다 와 가. 저녁은?”

-아직.

“뭐 사 갈까?”

-아니, 나가서 먹자.

하… 나는 내 남자의 터프함에 다시 한 번 반했다. 이 시국에 나가서 밥을 먹자니. 점심시간 내내 보고 있었던 정호민 대리의 붉어진 얼굴이 떠올랐다.

“대표님께 나는 한 번 말렸다고 전해 줄래?”

-최선을 다했다고 해 줄게.

“나 거의 다 왔어. 내려올 거야?”

-응. 20분 줘.

뭔 20분씩이나 달래, 10분이면 도착할 거 같은데. 일부러 정속을 지키며 천천히 운전했다. 뒤차가 빵빵거리며 클락션을 울렸다. 우회전하고 싶은데 내가 비켜 주질 않는다는 불만 표시였다. 횡단보도에 사람들이 건너고 있는데도 이런다. 나더러 사람을 치고 가라는 거야 뭐야.

느릿느릿 아파트 입구로 들어왔다. 5분 정도 기다리니 녀석이 내려왔다. 뒷좌석에 겉옷을 던져 두고 갑자기 운전석 문을 열었다.

“자리 바꿔, 내가 운전하게.”

“내 차인데 왜 니가 자꾸 운전하려 해.”

“어디 가는지 모르잖아. 내비 찍는 거 귀찮아.”

에이씨 진짜. 안전 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녀석이 제 키에 맞게 좌석을 조금 더 낮추었다. 조수석에 들어오니 이미 녀석의 향수 냄새가 차 안에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금방 샤워를 한 듯한 잘생긴 그 얼굴이 옆 시야에 들어온다. 잠깐 올라갈걸 그랬네. 주차하기 귀찮아서 그냥 지하에서 기다린 내 자신을 원망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뭐 했냐?”

“그냥. 인생을 좀 돌아봤지.”

“그랬더니?”

“너무 개차반처럼 살아서 후회가 막심하네. 잘한 일은 몇 개 없던데.”

녀석의 후회라는 말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니가 잘한 일이 왜 없냐. 어린 나이에 데뷔 성공했지. 히트작도 많지. 영화 한 편 찍으면 9억 5천만 원이나 받는데 그 정도면 성공한 인생 아니냐. 나의 말에 녀석이 웃었다.

“살다 보니 정세연 팀장님 칭찬을 다 들어 보네.”

“더 해 줄까?”

“응. 듣기 좋은데.”

“얼굴도 잘생겼지. 키도 크고 몸도 좋지. 벌어 놓은 돈도 많고. 하물며 잘나가는 애인도 있지.”

그 대목에서 녀석이 다시 한 번 소리를 내 웃었다.

“연기도 잘하지. 또 어찌나 프로페셔널 하신지 애인이랑 첫 키스 하다 말고 제작사 미팅 참석하러 가시지.”

주렁주렁 늘어놓는 나의 칭찬을 들으며 녀석이 기분 좋게 청담동으로 차를 몰았다. 지난번 왔던 오마카세 집이구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때와 같은 쉐프가 웃으며 반겼다.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다. 카운터 나란히 양옆으로 앉았다. 얼굴이 더 가까이 보였다. 이 집은 좌석 배치가 참 좋다.

차가운 문어숙회를 시작으로 사시미의 향연이 이어졌다. 우리는 큰 주제 없이 소소한 이야기만을 나누었다. 미소타레로 구워진 농어 요리가 나온 뒤 쉐프가 잠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최수혁이 말차를 마시고 입을 헹구었다.

“힘들어?”

입속에 들어간 젓가락을 빼지 못하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분위기를 잡고 목소리를 까는 최수혁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좋은 요리를 먹으며 누구보다 멋진 차림을 하고서는, 녀석이 나를 걱정했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회사에 개념 없는 인간들이 있어서 좆같긴 하지만 괜찮아. 그러다 말겠지 뭐. 넌 어때? 그 기자 진짜 고소하겠대?”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변호사 통해서는 합의하겠다고 연락 왔다던데.”

“결국 돈이구나.”

“결국 돈이지.”

녀석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쉽게 번 돈이라 생각하고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이라도 전면 부정하면 일이 더 깔끔할 텐데 녀석이 굳이 먼 길을 돌아서 간다.

“다 먹고 갈 데가 있는데, 너 시간 괜찮을까.”

“내일 주말인데 뭐. 어디 가는데?”

녀석이 대답 대신 차 키를 흔들었다. 또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둘이서 비밀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디저트는 사양하고 계산을 마쳤다. 주차해 놓은 곳까지 가기 위해 둘이서 조용히 주택가를 걸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걸어가는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를 돌아보며 씩 웃어 주는 그 모습에 다시 가슴이 뛴다.

이렇게나 멋지고 다정한 최수혁이 나는 분에 넘쳐 견딜 수 없었다.

녀석이 데려간 곳은 자신의 기획사였다. 가는 방향이 그러해서 설마 했는데 역시 입구에 차를 세우고 닫힌 문을 열었다. 2층과 3층은 아직 직원들이 있는지 불이 켜진 채였지만 녀석은 나를 데리고 곧바로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에는 작은 오디트리움이 있었다. 가끔 소속사 기자회견이나 내부 시사회를 할 때 쓰는 곳이라고 했다. 의미를 물어 오는 내게 녀석이 조금 망설이며 대답했다.

“다음 주에 첫 시사회가 있어. 니가 왔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양쪽 다 힘들겠지.”

그랬구나. 온 사방의 눈이 집중될 텐데 거기 내가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정말 괜찮았다. 그런 것까지 녀석이 신경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해 두었다.

“먼저 보라고 데려왔어. 내 영화… 니 취향에 안 맞아 하는 거 알지만, 그냥 참고 봐 줬으면 좋겠는데.”

“영광이네.”

나는 기꺼이 자리에 앉아 최수혁의 영화 첫 번째 관객이 되었다. 스크린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도 내 옆자리에 앉아 함께 감상을 했다.

1930년대 경성 한복판에 모던 보이의 탈을 쓴 독립군 최수혁이 등장했다.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나 보겠다고 쫓아와 겨우 주차장에서 10분간 키스하고 돌아갔던 최수혁이, 바로 거기 서 있었다.

그래서인지 멜로 영화가 아닌데 나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나를 만난 이후의 최수혁이 하는 연기가 하나같이 황홀했다. 녀석이 울고 피를 흘리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장면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와씨… 나 완전 취향 저격당했어.

“너 이제 멜로는 하지 마라. 적성을 찾은 거 같네.”

자막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자 빨개진 눈을 들킬까 싶어서 얼른 농담을 쳤다. 녀석에게는 멜로 영화가 아닌 첫 도전이었고 나에게는 녀석의 필모그래피 중 맘에 드는 첫 작품이었다.

“뿌듯한데. 작품 망해도 여한이 없겠어.”

살짝 긴장되었던 목소리가 이제야 안정적인 톤을 되찾았다. 녀석이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처음 우리 회사로 찾아왔을 때, 녀석은 자신도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이제 보니 순 거짓말이었구만. 최수혁은 좋은 연기자가 되려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는 배우였다.

“관객들이 내게 기대하는 장면들이 있잖아. 몸 파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러웠거든. 그런 거 없어서 하겠다고 한 작품이었는데, 솔직히 자신 없었어.”

가진 것이 많아서 시작이 쉬웠던 만큼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었나 보다. 세상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천하무적 같았던 너도 고민이 많았었구나.

“진짜 좋았어. 대박 날 거 같아.”

“고마워.”

“나는 니가 진짜, 진짜 오랫동안 영화 했으면 좋겠어.”

“……?”

“더 이상 나 때문에 니 이름 안 좋은 뉴스에 거론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그냥 그렇다고. 니 판단에 도움 되라고 어필해 두는 거야.”

“정세연. 니가 어떤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꿈 깨. 나는 너를 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헤어지자는 얘기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왜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기분을 망치는 건데.”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냐. 미안해.”

미안하다고. 잔뜩 미간을 찌푸린 최수혁을 끌어안았다. 애인이 특별 이벤트까지 만들어서 감동시켜 줬는데 나는 마지막에 분위기를 망치는 눈치 없는 인간이었네.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미안하다고 계속해서 되풀이했다.

녀석도 나를 의지해야 하는데 내가 약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

힐끔힐끔 돌아보던 시선들은 많이 줄었다. 이슈가 많이 가라앉은 덕도 있었고 또 다른 톱스타의 마약 복용 소식에 연예계 뉴스의 시선은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나는 이제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어떤 대화가 오고 가든 망설임 없이 들어가 얼굴을 보여 주었고, 애당초 당사자 앞에서까지 음담패설을 할 만한 강심장이 아니었던 대부분의 사람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떴다.

지금도 화장실 안에서 낄낄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나는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엔 나보다 이동재가 한발 앞서 나갔다.

“시발… 박대리님이 봤습니까? 진짜 해도 해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이동재가 화장실 칸 안에 있었던 것을 모르고 심한 말이 오간 듯했다. 참을 수 없었던 동재 녀석이 화장실 칸에서 박차고 나와 기어코 한 놈의 멱살을 잡았다.

“여기 전세 냈어요? 뻔히 여기 화장실 쓰는 거 알면서 본인 들으라고 일부러 지랄하는 거야 뭐야.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같은 기획부 식구끼리 시발… 사과하세요!”

난리가 났다. 이동재의 성격은 대부분이 날 닮았지만 참을성이 조금 부족한 것만은 자명했다. 사람들이 몰려와 싸움을 말리고 중재에 나섰다.

그래도 이동재는 멱살을 놓지 않았다. 상대는 얼굴이 벌게져 컥컥거리고 있었고 농담을 받아 주고 같이 킬킬거리던 총무팀 사원은 마치 제3자처럼 둘을 말리는 척하고 있었다.

“일단 놓고. 놓고 얘기합시다.”

“사과하세요. 사과 먼저 하면 놓는다고”

“미안 미안. 나도 들은 얘기라니까요.”

“들은 얘기를 왜 본 것처럼 합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시발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이동재가 주변을 둘러보며 성질을 내자 그 말에 찔리는 몇 명은 자리로 슬그머니 돌아갔다.

“왜 이래, 미쳤어? 야, 여기 회사거든?! 니들 이제 다 막 나가니? 내가 우스워?!”

졸지에 조소영 본부장까지 등판했다. 하… 마음은 고마운데 일을 또 크게 벌이냐 이동재.

“기획부 망신 다 시키고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이동재 대리 당장 그 멱살 안 놓니?!”

그녀의 히스테릭한 명령에 일단 이동재가 손을 털고 물러섰다. 인사고과에 영향을 주는 인물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자리로 돌아가 다들! 뭐 해. 안 가?!”

그녀의 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자리로 돌아갔다.

“박창진 대리, 내일까지 시말서 써 와. 거기, 같이 뒷담화하신 분. 부서장 누구예요?”

“네?! 아… 저 총무부… 이상욱 부장님이십니다.”

“이부장한테 얘기해서 인사팀으로 넘길 거에요. 각오하세요.”

조소영이 직급과 권력으로 철퇴를 내렸다. 다른 부서 들으라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당사자인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다 화장실 가려고 나왔었던 것을 기억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연 팀장, 나 좀 봐.”

조소영 본부장이 나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대로 방향을 돌려 그녀를 따라갔다.

소회의실로 들어간 그녀는 의자를 빼 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목소리가 채 가라앉지 못한 탓인지 히스테릭한 말투가 자동으로 삐져나왔다.

“뭐니 진짜. 차라리 커밍아웃을 해. 시원하게. 정세연 게이라고 내가 자르기라도 한대?”

헉… 역시 그녀는 세다. 화날 때만큼은 정말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해. 저런 애들 있으면 인사팀에 고발해. 너 혼자 20세기 소년이니? 아님 나한테라도 얘기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남자 화장실 안 쓰니까 몰랐잖아.”

그녀는 정말 몰랐던 듯했다. 싸움이 일어나자 김시은이 조소영에게 달려갔고. 대충 이런 상황임을 암시해 준 탓에 일단 부리나케 뛰어와서 사태를 수습한 것인 것 같았다.

스캔들이 터지고 난 뒤 처음으로 직속 상사와의 면담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할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가 사실 궁금하긴 했었다.

“나 솔직히 무지하게 섭섭했거든? 내가 최수혁 팬인 거 알면서. 둘이 사귀는 거면 사귀는 거라고 얘기를 해 주지. 나 바보 만드니까 좋디?”

“쉬운 일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알지. 아니까 뭐라 안 하고 모른 척해 줬잖아 내가.”

그랬지. 그녀는 줄곧 모른 척해 주고 나를 따로 불러서 눈치를 준 적도 없었다.

“소란만 피우지 마. 이대리한테도 잘 말해. 지금 안 그래도 위에서 굉장히 민감하단 말이야.”

“네?”

“상무님이 굉장히 언짢아하셨어. 회사 이름 연예 기사에 계속 오르락내리락하고, 홍보팀으로 이상한 전화 계속 온다고. 내가 커버 친다고 쳤는데 알잖아, 상무님은 아직 옛날 분이신 거. 이런 거 이해 못하셔.”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본부장이 나를 커버한다고 한 게 너무 심하게 커버를 해 줬나 보다. 나는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임원들 보기 좀 그러신가 봐. 그래서 신제품 기획 A안도 다시 올려서 같이 검토하래.”

?!!!

“본부장님 그거 이미 임원 회의에서 결정 난 거….”

“내가 모르니? 근데 그대로 개발 들어가기가 껄끄러우신가 봐. 아 진짜 나도 몰라. 미친 새끼 촌스럽게 이딴 거로 진짜….”

우리가 낸 B안은 아직 개발에 들어가지 않았다. 유관 부서들과 스케줄 조정한 것이 다였고 지금은 아직 10월 중순이다. 재작년 신제품도 크리스마스 전에 겨우 개발 들어갔던 걸 고려하면 A안으로 중간에 방향을 바꾸어도 심하게 늦은 것은 아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제품 출시까지 온전히 내가 리드할 것이었다. 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도 해야 할 것이고 매체 인터뷰와 외부 행사에도 내 얼굴이 팔릴 것이다. 고현성 상무는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비겁하고 치졸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임원이란 그런 자리이다. 멋대로 사람을 올릴 수도 있고 멋대로 다시 내려보낼 수도 있다. 만약 정말 A안으로 방향을 틀고 우리 팀의 기획이 취소된다면 내게는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언제… 결정 나나요?”

“몰라. 이제부터 신재식 팀장 불러서 조져 봐야지. 그 팀에서 빨리 다듬어서 올리면 2주 내로 결정되겠지 뭐.”

“본부장님, 저희 이미 TF 구성하고 디자인까지 들어갔는데….”

“누가 모르니? 정세연 빠릿빠릿한 거? 일단 계속 진행해. 내가 알아서 조정해 볼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옆에서 원래 안이 역시 더 좋다는 입발린 소리 정도? 아니면 일부러 신재식 팀장에게 데드라인을 당겨서 퀄리티 떨어지는 기획서가 나오게 한다는 거 정도?

고현성 상무가 결정하면 끝나는 일이다. 정말 지옥에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회의실을 나오며 다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내 얼굴이 외부에 팔리는 것이 싫어진 회사가 비열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거로도 고발이 되나. 뭘 고발하나. 왜 우리 팀 아이디어를 중간에 캔슬했냐고? 이런 일은 매년, 거의 모든 부서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 게임에서 나는 철저하게 약자였다.

자리로 돌아오니 이동재가 여전히 똥 씹은 표정을 하고는 싸구려 캔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내 눈치를 보며 말을 아끼고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오바해서 팀장님 또 불려 가셨네요.”

전혀 미안한 것 같지 않은 표정을 하고서는 꼬박꼬박 존대하는 동재 녀석이 우스웠다. 이게 다 무슨 짓인가 싶었다.

“그래도 저는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똑같이 멱살 잡을 겁니다. 시말서 까짓 거 쓰지 뭐.”

“잘났다 그래. 존나 고맙네요.”

“에이씨 내일 휴일인데 오늘 회식이나 한 번 합시다! 어째 팀장이 돼 가지고 술 한 번을 안 쏘냐.”

“그래요! 저희 회식해요!”

김시은이 벌떡 일어나 찬성했다.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싶었는지 다른 팀원들도 동조하며 술을 마시자고 했다. 요즘 애들은 회식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나 보네. 내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박수를 치며 장소 물색에 들어갔다.

역시 좋은 회식 장소는 2년 차가 제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적당히 젊고 경험이 쌓인 2년 차 팀원이 횟집을 추천했다. 소주로 달리자는 뜻과 다름없었다.

***

“짠하시죠. 짠!”

김시은이 취했다. 취하면 귀여워지는 스타일이란 걸 나는 몰랐다. 한 번도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던 탓이었다. 계속해서 짠을 하자며 제 잔을 부딪쳐 온다. 안 보는 사이에 그녀의 술잔에 맹물을 부어 주었다. 그것도 모르고 맹물을 들이켜며 캬- 하고 혼자 추임새를 넣는다.

“저희끼리 더 뭉쳐야겠어요. 정기적으로 한 달에 한 번씩 회식합시다 팀장님!”

“돈 없어.”

“회식비 나오잖아요.”

“아, 나는 솔직히 아까 동재 대리님이 박대리 멱살 잡았을 때 통쾌했어요. 그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요. 우리 팀이 이번에 제품안 리드하게 된 게 아니꼬워서 맨날 우리 팀 뒷담화나 하고 씨….”

“아닌 말로 우리 팀이 좀 어벤져스 아닙니까? 능력 있는 팀장 밑에!”

“개념 있는 팀원들까지!”

“옳소! 짠해요 짠! 자, 대리님도 짠! 팀장님도 짠! 헤헤헤.”

“얘 좀 누가 집에 보내라.”

1년 차 막내가 내 눈치를 보며 ‘언니….’ 하고 김시은의 팔을 붙잡았다.

“뭣도 아닌 것들이 시비를 거는 거는 다 부러워서 그런 거지. 이제 연말부터 우리가 시키는 일 보조할 생각 하니 열불 터져서 기 싸움 하는 거야.”

“그런 거죠? 저도 그런 거 같더라구요. 와 진짜 오팀장님 쪽에 있는 동기 한 놈은 이제 인사도 씹더라니깐요?”

“우리 이번 거 진짜 잘 끝내면 다들 내년에는 승진각 나오는 거 아니에요? 크크크.”

“야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니가 승진하면 나랑 대리 맞붙자는 거야?”

“아닙니다! 크크크. 한 잔 받으세요. 대리님.”

“오냐.”

모두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은근히 이동재의 멱살잡이에 다들 속이 후련했었나 보다. 경쟁 상대에 있던 팀들과의 관계가 원래 좋지 않았던지 너 나 할 것 없이 그런 이야기들만 풀어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 속은 재가 되어 타들어 갔다. 팀원들이 웃으며 제품 기획 얘기를 할 때마다 10톤 트럭에 치여 죽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너덜너덜해졌다.

“팀장님 왜 혼자 자작하슈? 조용하게 달리시네.”

“놔둬. 나 2병까지는 괜찮잖아, 원래.”

“이 양반 왜 목소리는 깔고 이래. 본부장한테 많이 까였어요? 미안하다니까 내가.”

이동재가 말없이 비운 내 술잔에 다시 소주를 채워 넣었다.

“팀장님 짠!”

김시은의 맹물 잔이 다시 다가와 부딪혔다.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짠 해 주고 한 번에 입에 털었다. 그녀는 발갛게 부풀어 오른 뺨에 미소를 걸고 팀장니임- 우리 팀장님- 하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계속해서 팀장님 팀장님 하며 되풀이하다 표정이 점점 슬프게 바뀐다. 김시은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리 팀장님… 엉엉… 사람이 왜 이렇게 엉엉… 착해 빠져서… 어어어어엉엉엉….”

나는 당황했다.

“시은씨 왜 이래.”

“야 김시은. 왜 그래, 분위기 싸하게.”

“언니….”

“엉엉… 팀장님은 왜 매번… 당해요… 엉엉… 왜…. 왜 이렇게 바보같이 착하기만 해요… 엉엉엉….”

갑자기 김시은이 울어 버리는 바람에 회식 자리는 급히 정리되었다. 맨정신에는 할 수 없는 위로를 하며 김시은이 오열을 했다. 등을 투닥거려 주며 괜찮다고 했다. 니가 대신 울어 줘서 오늘 나는 안 울어도 되겠네.

1년차 막내가 김시은과 같이 택시를 탔다. 잘 데려다주라는 말과 함께 택시 번호를 찍어 두었다. 그냥 술주정이었다면 쟤 왜 저러냐 하며 그냥 보냈을 텐데. 한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모두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팀장님, 저희가 혹시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게 더 불편하시면….”

“됐어. 다 아니까 그냥 가라. 내일 하루 푹 쉬고.”

팀원들은 내게 미안해했고 나는 그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이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나 때문에 기획안이 엎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말하기에 소주 2병은 한참 모자란다.

대리기사가 도착해서 집으로 올 때까지 최수혁의 전화가 수도 없이 울렸다. 문자는 더했다.

[어디냐고]

[왜 답장이 없어]

[정세연]

[무슨 일 생긴 거야?]

[정세연]

[세연아]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