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명절은 가족이랑 보내야지
허지환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딱 4일 뒤였다. 팀장 회의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니 책상 위에 작은 마들렌 한 박스가 놓여 있었다.
“팀장님, 기현이가 주고 갔어요. 못 뵙고 가서 섭섭하대요.”
“어.”
워크샵이 끝나고 잠깐 들렀나 보다. 팀원들 책상에 똑같이 놓인 마들렌 상자가 보였다. 휴대폰으로 김기현의 번호를 찾아 [고맙다 잘 먹을게] 하고 문자를 보냈다.
[아 방금 지하철 탔어요, 못 뵙고 가서 아쉬워요! 감사했습니다.]
답 메시지가 바로 도착했다. 확인만 한 뒤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 화면에 다시 메시지가 떴다.
[지환이 군대 간대요.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해 달래요.]
역시 거기에도 답장은 하지 않았지만, 알려 줘서 고마웠다.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2년 차 팀원 한 명이 일어나 데스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향 집이 땅끝 마을 수준이라며 하루 먼저 연차를 냈다. 대부분의 팀원들은 내일 오후 반차를 시작으로 귀향길에 오르겠다 했고 한국에 부모도 친척도 없는 나는 올해도 혼자 연휴를 보내야 했다.
띠링.
[정성택배 송장번호 *** ]
[수취인 부재중으로 경비실에 맡겼습니다]
회사에서 준비한 추석 선물 세트가 도착했나 보다. 역시 한국에 부모도 친척도 없는 나는 선물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쓸 물건을 골라 두었다. 올해 추석은 그렇게 길지 않아 딱 3일 후 다시 출근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연예인들은 명절에도 바쁜가?
-한가위 노래자랑 나갈 것도 아닌데 내가 바쁠 게 뭐가 있어.
“하긴, 넌 TV 쪽은 아니니까.”
-그러는 정세연 팀장님 스케줄은 어떻게 되시는데.
“나야 뭐 집에서 뒹굴뒹굴.”
-같이 뒹굴면 되겠네 그럼.
그 말이 어째 야하게 들리는 걸 보니 나도 이제 슬슬 미쳐 가는구나 싶었다.
“세연아 여기!”
동기 녀석이 로비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 점심 먹으러 간다. 집에서 봐.”
최수혁과의 통화를 종료하고 동기 녀석과 발걸음을 맞추었다. 입사 동기에 1년 차까지는 같은 기획부에서 신재식이 밑에서 굴렀던 놈이다. 나는 버텼고 동기 놈은 고객 관리부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점심 같이하자는 메시지에 별 생각 없이 나왔는데 수저를 챙기던 내 손이 잠깐 멈칫했다.
“사표 썼다고?”
“뭘 그렇게 놀래냐. 나 작년부터 계속 노래 불렀잖냐. 때려치고 싶다고.”
“능력자네? 때려치고 싶다고 진짜 때려치는 거 보니. 이직하는 거야?”
“어, 그냥 좀 작은 데로 옮겨서 스트레스 덜 받고 살려고.”
“연봉은 좀 올렸어?”
“올리긴, 맞춰 주는 데 찾는 것도 힘들더라.”
그렇겠지. 우리 회사가 일은 쌍욕 나오게 힘들어도 챙겨 주는 건 빠방하니까. 동기 놈은 작년에 결혼을 했다. 우리 중에서는 일찍 한 편이었는데 승진을 꽤 오랫동안 못 했다. 나와 같이 주임을 달았었지만 얼마 안 가 직급 체제가 축소되는 바람에 일반 사원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아마 이직의 이유에는 그런 것도 있지 않았겠나 싶었다.
“그릇 뜨겁습니다.”
주문한 육개장이 나왔다. 커다란 놋그릇에 고명과 고기가 푸짐하게 올라가 먹음직스럽다. 동기 놈 말이 이 집은 고기 좋은 거 쓰는 거로 유명한 집이란다.
“너 팀장 달고 축하주도 못 샀네.”
“내가 사야지 니가 왜 사냐.”
뜨끈한 육개장 국물을 마시니 소주 생각이 났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가끔 점심시간에 술을 한잔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날씨가 너무 기똥차게 좋거나, 생각만 해도 열 뻗치는 놈이 있다거나.
“오늘 저녁에라도 한잔할까?”
“와이프한테 이혼당할 일 있냐. 내일 연차 냈어. 두 집 뛰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해.”
아, 그렇구나. 명절이었지. 유부남의 삶은 고되네. 명품 고기라고 하더니 진짜 맛있었다. 한 그릇을 깨끗하게 다 비우고 커피 마시는 곳으로 향했다.
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에는 듣는 귀가 너무 많아서 1년 차 때 발굴해 놓은 테이크 아웃 전문점이 있다. 유독 친했던 놈들 4명이서 매일 손에 드립 커피 한 잔씩을 쥐고 선배 욕, 상사 욕을 해 댔었다. 덕분에 커피는 마시기도 전에 늘 식어 버렸었지. 그때의 우리는 더럽게 바빴지만, 또 더럽게 일도 못했다.
“그래도 그때가 재밌긴 했는데.”
“미친… 재밌으면 다시 입사해.”
“정은아가 그때 성상식이한테 들이받은 거 생각난다.”
“와… 걔 진짜 머리 풀고 대들었지, 제대로 걸크러쉬.”
“성상식이가 상식이 많이 부족했지.”
“그래도 부장 달았네 그 새끼 벌써.”
“은아랑 연락하냐?”
“아니, 그때 퇴사하고는 한 번도 못 봤지.”
“나도.”
우리는 풋풋했던 신입사원 시절의 이야기로 한참을 열 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드립 커피는 손을 허전하지 않게 하는 도구에 불과했고, 왔던 길을 빙빙 돌아다니며 옛날 얘기에 낄낄거렸다.
“너만 보면 얼굴 벌게져서 말 더듬던 팀장 기억나?”
“아. 뭐지. 승… 뭐였는데. 승혜? 승희?”
“전승희 팀장.”
“아 맞다.”
신입사원 시절 구르기도 많이 굴렀지만 지금보다 이쁨도 훨씬 많이 받았었다. 대부분의 여자 상사들은 나에게 친절했고 그와 동시에 바라는 것들이 많았다. 전승희 팀장은 바라는 게 있었지만 말을 못 하고 속으로 앓는 사람이었고 얼굴에 티가 나는 체질이라 동기 놈들이 더 심하게 놀렸다.
당시 유일하게 나를 똑같이 굴려 주던 사람이 조소영 팀장이었고 나는 히스테릭한 그녀의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녀 밑에 남기로 결심했다. 덕분에 정말 많이 까였고 정말 많이 배웠다.
“전승희 팀장 계열사로 옮기고 지금 임원 달았어 인마. 아깝다 정세연. 그때 확 코 꿰였으면 인생 더 편하게 살 텐데.”
미안한데 지금 꿰인 코도 상당히 괜찮거든. 추억은 가슴에 묻고 지나간 버스에는 미련을 버리라고 그랬다, 병헌이 형이.
“암튼 그때 너 진짜 대단했는데. 많이 죽었네, 정세연 인기도.”
“세월에 장사 없다.”
스물여섯 살의 나는 지금의 이런 상황을 예상이나 했었을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지만 그때 정말 잘 버텨 줘서 고맙다고 전해 주고 싶었다.
***
점심으로 먹은 육개장이 체했는지 오후 내내 속이 계속 좋지 않았다. 퇴근 전 약국에 들러 소화제를 사고 나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콜라도 한 병 샀다. 이게 원래 원조 소화제 아니냐. 뚜껑을 따서 몇 모금 들이켰는데 그다지 효과가 없는 듯하다.
집으로 돌아와 소화제를 먹었는데도 계속 속이 좋지 않다. 그 기분 나쁜 느낌이 다음 날까지 계속 이어졌다.
팀원들이 모두들 귀향길에 오르기 위해 조기 퇴근하는 동안에도 나는 의자에 몸을 구겨 넣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팀장님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어, 조심히 내려가라. 해피추석.”
“넵, 팀장님도 얼른 퇴근하세요.”
“어.”
점심을 대충 먹어서 배가 고픈 건지 어제 체한 것 때문에 배가 아픈 건지 구분이 안 된다. 구부정하게 앉아서 마우스만 딸깍거리며 밀린 결재를 시작했다. 대부분이 연차 신청이었는데 그중 불순물이 끼어 있다.
‘사내 복지 프로그램 영어 회화 코스 지원 - 신청자 이동재’.
이 새끼 작년에도 신청해서 돈만 날리더니 또 작심삼일 시작했다. 확 반려 버튼을 누를까 하다 그냥 승인해 줬다. 대충 일이 다 끝난 거 같다. 사무실에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저녁 같이해]
휴대폰 화면에 뜬 최수혁의 문자에 대답이 좀 망설여졌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나 속이 좀 안 좋은데. 너 혼자 먹고 들어올래?]
[알았어]
어디가 안 좋은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이 냉정한 놈.
데스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겉옷을 챙겨 나가는 길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들과 명절 인사를 나누었다.
연휴가 짧은 탓에 오늘부터 귀향길이 시작된 건지 차가 밀렸다. 이젠 두통도 좀 있는 것 같고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듯했다.
콘솔박스에 있던 생수를 마셨더니 좀 나아지는 듯하다. 예상보다 늦게 집에 도착했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소파에 누워 버렸다.
휴대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 비밀번호를 여는 소리가 난다. 엄마 아니면 최수혁이겠지만 엄마는 미국에 계시니 당연히 최수혁이겠지.
“저녁 먹고 온다더니.”
소파에 누운 채 시선은 여전히 휴대폰에 가 있다. 익숙한 발걸음이 최수혁이 맞긴 한데 잡음도 좀 들린다? 비닐봉투 소리?
“너 장 봐 왔냐?!”
아일랜드 식탁 위에 녀석이 늘어놓은 비닐봉투에는 과일과 채소, 대파, 생닭 등등 최수혁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잔뜩 담겨 있었다. 뭔 연예인이 마트 가서 장을 봐 왔어. 놀라서 몸을 일으킨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향해 녀석이 어이 터지는 말을 내뱉었다.
“속 안 좋다며. 죽 먹으라고.”
“그냥 사 오면 되잖아.”
“계속 밖에 음식 먹고 탈 난 거 같은데. 내가 해 줄게.”
“뭘.”
“이거.”
“그게 뭔데. 닭죽?”
“응.”
“…너 요리란 걸 해 본 적은 있어?”
내 물음에 답은 하지 않고 최수혁이 씨익 웃었다. 뭐야 뭐. 해 본 적 있다는 거야 아님 없다는 거야. 갑자기 체한 게 다 사라진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하나는 확실했다. 최수혁은 직접 장을 봐 온 것이 아니다. 누굴 시킨 건지 몰라도 비닐봉투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꺼내며 이건 왜 들어 있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늘을 어떻게 까야 하는 건지도 몰랐고 쌀을 불려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럼 그렇지.
부엌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재료를 늘어놓기만 하는 녀석을 보니 구경하는 맛이 쏠쏠했다. 그 와중에도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며 레시피를 맞추는 걸 보니 오늘 진짜 귀한 음식 구경하겠다 싶었다.
“닭을 먼저 익혀야 한다는 건 알지?”
나도 요리에 영 소질은 없는 놈이지만 설마 닭죽 끓이는데 생닭과 쌀을 처음부터 같이 넣고 끓일 건가 싶어 무서워졌다.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냄비에 물을 올렸다. 아이고 참…. 이거 고맙긴 한데 점점 사양하고 싶어졌다.
녀석이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썰기에 들어가려 했다. 앞치마라도 입혀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개쌍욕을 먹을지도 모른다. 닭과 같이 끓일 각종 야채들이 도마 위에 올려졌다. 미간을 찌푸리며 식칼을 쥐고서는 이리저리 야채들을 돌려 본다.
생각 좀 해 봐라. 최수혁, 니가 지금 뭘 먼저 해야 하는지. 녀석의 시선이 뒤에 있던 싱크대로 향했다. 그래, 그래 거기! 내 텔레파시가 통한 건지 드디어 녀석이 야채를 싱크대로 옮겼다. 그래 인마 썰기 전에 일단 씻고 다듬어야 하는 거야.
녀석이 물을 틀고 야채들을 씻었다. 자신의 키보다 조금 낮게 설계된 싱크대에 몸을 숙이니 흰색 보스 셔츠가 팽팽하게 잡혀 옆선이 드러났다. 그 바람에 나도 모르게 뒤돌아 서 있는 녀석의 허리와 힙 라인을 훑게 되었다. 저분은 요리하시는데도 핏이 아주 예술이네요.
최수혁의 엉망진창 요리쇼를 공짜로 시청하고 있던 나는 조금씩 풍겨 오는 음식 냄새에 허기가 졌다. 영 못 먹을 걸 만드는 건 아니었는지 제법 익숙한 냄새다. 벌써 1시간이 지났다.
혼자 소파에서 흐느적거리던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아일랜드 바 스톨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턱을 괴었다.
배고프다 그만 끓이고 이리 가져와. 퉁퉁거리며 숟가락 끝을 테이블에 찍고 있었더니 녀석이 드디어 그릇에 뭔가를 담았다. 그리고 내 앞에 그 그릇을 내밀었다. 응? 안을 살펴본 나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뭐야 이게.”
“닭죽.”
“닭탕 아니고?”
녀석이 내민 그릇에는 닭고기만 수북이 쌓여 죽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고기는 또 얼마나 크게 썰었는지 결대로 찢어져야 하는데 뭉텅이로 들어가 있다.
나 고기 많이 먹으라는 니 마음은 알겠는데 내가 지금 체했다고.
숟가락으로 닭고기를 걷어 내니 밑에 죽이 얕게 깔려 있긴 했다. 녀석이 제 몫으로 챙긴 듯한 그릇에 닭고기를 다 덜어 주고 죽만 떠서 한 숟가락 입에 넣었다. 어?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맛이 좀 있다.
“인터넷의 힘은 위대하구나.”
내 매마른 칭찬에 녀석이 웃었다.
나쁘지 않다. 허기진 탓에 좀 부풀려진 의미도 있었겠지만, 또한 아무래도 만든 사람이 최수혁이다 보니 기대치가 제로에 가까웠던 상대적 의미도 있었겠지만, 객관적으로 맛은 먹을 만했다.
손목에 힘이 없었지만 나름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오히려 맞은편에서 깨작깨작거리고 있는 건 녀석이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녀석의 휴대폰에 매니저의 이름이 떴다. 연휴에도 수고가 많으시네.
“응 형. 어. 그래? CT를 찍었다고? 한 달 넘게 지났잖아. 하…. 어이가 없네. 어. 알았어. 고마워. 응.”
전화를 끊으며 작게 욕을 삼키는 녀석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다.
“매니저 형이 어디 아프대?”
나를 쳐다보더니 잠시 망설이는 눈치다. 음…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게 확실하다.
“병원 가서 CT를 찍었다는데? 그 비 오던 날 내 차에 치일 뻔했던 사람.”
시발… 나 역시 욕이 나왔다. 한 달 반이 훌쩍 넘게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더니 이제 와서 무슨 개짓거리인가 싶었다. 상대가 연예인이어서 한몫 잡으라고 뒤늦게 누가 훈수라도 둔 모양이지? 운전은 내가 했는데 나한테는 연락도 없이 녀석의 매니저에게 바로 연락한 걸 보니 눈치가 빤했다.
“돈 달래?”
“니가 신경 쓸 건 아니고.”
“야 최수혁.”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혼자 멋있는 척하지 말고 나랑 오래 볼 거면 인격체로 대해.”
밥맛이 뚝 떨어져 숟가락을 놓고 물을 마셨다.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모르는 거 또 있어?”
“없어. 이쪽도 병원 영수증 첨부한 것만 처리할 거니까 오버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너랑 나 그날 차 안에서 이상한 짓 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난 그냥 매니저 아니면 친구로 분류될 텐데.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고 불안했다.
“상당히 예민하네, 정세연.”
녀석이 맞은편에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표정을 살폈다.
갑자기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물을 한 모금 들이켰더니 차마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역류하는 게 느껴졌다.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에 방금 먹은 음식물을 게워 냈다.
“따라 들어오면… 윽… 죽을 줄 알아.”
토를 하면서도 나를 따라 화장실로 들어오려던 녀석에게 경고를 했다. 그대로 물을 내렸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생전 처음 요리란 걸 해 본 사람이 만들어 준 건데 소화도 못 시키고 그대로 쏟아 냈다. 그게 미안했고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쪽팔렸다.
최수혁은 내 의사를 존중해 화장실 문밖에서 지켜만 봐 줬다. 혼자 한 번 더 게워 낸 나는 세면대로 몸을 일으켜 입속을 씻었다. 고개를 드니 거울 뒤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보인다. 그렇게 찌푸리면 주름 생긴다 인마.
“대체 뭘 잘못 먹었길래 이래.”
“알면 내가 의사지.”
“병원 가자.”
“귀찮아, 누워 있을래.”
그 말을 하며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시선만 나를 향해 돌아가는 녀석이 신경 쓰여 걸음을 멈추고 어깨를 잡았다.
“미안, 모처럼 만들어 준 건데.”
“상관없어.”
지가 1시간 동안 투닥거린 결과물을 내가 몇 숟가락 먹지도 못하고 쏟아 냈는데 녀석은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침대로 쓰러졌다. 졸린 건 아닌데 힘이 쭉 빠져서 시체처럼 엎드린 채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말없이 자기네 집으로 갔다 다시 돌아온 최수혁이 부엌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놔두지- 하며 부엌에 들리게끔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답도 없다.
한참 후 젖은 손으로 침실에 들어온 녀석이 나를 벽 쪽으로 굴렸다. 시트에 돌돌 말려 굴러간 내 옆에 쿠션 두 개를 등에 대고 녀석이 몸을 기댄다. 뭐 읽는 건데.
“시나리오.”
표지를 보니 그런 듯했다. 유명한 사람이냐고 물으니 독립 영화 감독이란다. 각본을 감독이 직접 썼는데 최수혁 이미지랑 너무 딱 맞는 캐릭터라 안 되는 거 알면서도 기획사에 무턱대고 찔러봤단다.
대표실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흥미가 생겨 집으로 가져왔다고 했다. 뭐 얼마나 딱 맞는 캐릭터길래 그러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웃겼다. 주인공 직업이 파일럿이란다.
“독립 영화라더니 항공물을 어떻게 찍어. 어디서 예산도 독립적으로 따 오나 보네?”
“내가 캐스팅되면 투자는 받을 테니까.”
“노렸네 노렸어. 캐릭터가 맞는다는 건 그냥 핑계고.”
녀석의 무릎에 놓여 있던 1권을 들었다. 가끔 최수혁 집에서 굴러다니는 대본들을 보긴 했지만 제작을 위해 감독이 돌리는 시나리오 책을 읽어 본 적은 없었다. 이런 걸 이쪽 업계에서는 ‘책’이라고 한다고 했다. 지문과 대사들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들이 읽기 꽤 편하다. 그런데 이거 참… 주인공이 정말 최수혁과 빼박이었다.
“하하. 어디가 그런데?”
“이 말투 봐라. 이거 이거 싸가지 없는 거 하며, 버릇없이 기장한테 대드는 거 하며. 지 맘에 안 든다고 막 들이받는 거 하며.”
젠틀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는 최수혁의 진짜 모습을 이 감독은 어떻게 안 건지 대사들이 온통 쌍욕의 향연이었다. 하면 정말 대박 날 것 같은데 녀석의 이미지는 개판 날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말리는 게 당연하겠다. 근데 이거 왜 여자 등장인물들은 별로 없냐. 주변 인물들이 다 남자네. 시발.
“이거 하지 마.”
시나리오 책을 다시 녀석에게 돌려주고 시트를 끌어 올려 눈을 감았다. 녀석이 실내등을 꺼 주고 침대 옆 작은 스탠드 램프를 켰다. 커다란 최수혁의 상체와 침대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는데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아 30분이나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이상한 내용이었던 것이 확실했다. 등이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깼다. 옆에서는 어느새 스탠드 불을 끄고 잠든 최수혁이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순간 훅하고 뭔가가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게워 낼 게 없어서 위액만 쏟았다. 아오… 진짜. 다시 한 번 더 속에서 뜨끈한 것이 올라왔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위액은 쓰렸다. 진정하고 세면대에서 입을 게워 냈는데 최수혁이 거실에 서 있었다.
“옷 입어. 차 키 어딨어.”
“됐거든.”
“옷 입으라고, 119 부르기 전에.”
녀석이 화났다. 말다툼할 기운도 없어서 대충 옷을 껴입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어질어질하고 식은땀이 났다. 이거 식중독인가? 가을에도 식중독이 걸리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녀석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 손에서 차 키를 뺏어간 녀석이 마치 지 차인 듯 운전석에 올라탔다. 계약할 때 거진 반은 최수혁이 탈 거라고 했던 게 진짜 팩트가 되어 버렸다.
가까운 대학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혼자 갈 테니 차에 있든가 집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기로 작정을 한 건지 내 팔을 잡아 끌고 응급실 입구로 향한다.
둘 다 자다 일어난 덕에 녀석의 행색도 그리 삐까번쩍하지는 못했다. 앞머리가 그대로 이마까지 내려와 눈을 좀 덮고 있던 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라봤다. 아니 딱히 몰라봤다기보다는 다들 환자에, 보호자에, 정신없는 상황이라 그랬을 것이다.
접수대로 가서 접수를 하고 와서 대기 의자에 앉았다. 하루 종일 먹지 못했고 먹다가 다 토해 낸 탓인지 기운이 너무 없었다. 녀석에게 기대고 싶었지만 눈이 너무 많았다. 몸도 아픈데 마음도 아팠다.
30분쯤 지나니 당직 의사인 듯한 사람이 다가왔다. 긴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그녀는 증상을 물었고 진찰을 했다. 스트레스성 장염에 위염까지 겹친 것 같다고 했다. 일단 탈수 증상이 심하니 수액을 맞으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들은 최수혁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녀석이 입원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묻자 일단 오늘 밤만 지나 보고 판단하자고 한다. 별 생각 없이 보호자의 물음에 답하던 의사의 말 끝에는 어?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란 표정의 의사를 올려다보는 최수혁의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롭게 선 콧날이 눈에 띄었다. 쉿- 긴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눈빛으로 양해를 구했다. 눈치가 빠른 의사가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병상이 비는 대로 안내해 주겠다고 하고는 다른 환자에게 갔다.
그녀가 특별히 신경을 써 준 건지 병상은 생각보다 빨리 나왔고 직접 들어와 수액을 놓아 주고 커튼도 쳐 주고 갔다. 그제서야 몸에 긴장감이 풀렸다. 녀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다 머리를 넘기고 나를 쳐다보았다.
“하… 진짜 미치겠다. 너 때문에.”
녀석의 불평에 내가 웃었다. 나도 내가 이 정도로 스트레스받고 있는 줄은 몰랐지. 그 인턴 개새끼 죽여 버리고 싶다고 하는 욕설에 내가 녀석의 팔을 잡았다. 나 그거 때문에 스트레스받은 거 아니거든. 그럼 뭐냐고 녀석이 물었다.
“너랑 나. 진짜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어서.”
“헤어지고 싶다는 얘기 할 거면 장소가 좋네. 목숨 걸고 얘기해.”
“내가 니 커리어 망칠까 봐 계속 겁난다.”
“헛소리하지 말고 잠이나 자.”
녀석이 병상 시트를 덮었다. 야 숨은 쉴 수 있게 해 줘야지. 왼손으로 시트를 내렸다. 오른손은 이미 최수혁에게 잡힌 지 오래였다. 손을 잡아 주니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수액이 효과가 나타나는 건지 두통도 곧 멎었다. 파르르 떨리던 감각도 사라지고 잠이 쏟아졌다.
왼쪽 팔을 누군가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이 떠졌다. 아까 그 의사가 와서 다른 수액으로 갈아 주고 있는 중이었다. 간호사를 시키지 왜 직접 오나 싶었다.
희미하게 눈을 뜬 나를 보고 그녀가 똑같이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한다. 그 시선 끝은 내 오른손을 여전히 잡은 채로 잠이 들어 버린 최수혁을 향해 있었다. 그녀가 다시 미소 지으며 커튼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뭐지 천사인가. 잠결에 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아침 9시쯤 눈을 떴다. 왼쪽 손목에 들어가 있던 주삿바늘은 어느새 정리되어 있었고 그런 나를 최수혁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힘없이 손을 들어 녀석을 불렀다. 이리 가까이 오게.
“내 유언은….”
“헛소리하지 말고. 몸은 좀 어때.”
“한결 나아졌어. 집에 가도 되겠어.”
몸을 일으켰다. 마침 누군가 커튼을 확 젖히며 정세연님 하고 불렀다. 의사가 바뀌었네. 간단히 체크를 마치자 집으로 가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새로운 의사는 옆에 앉아 있던 덩치 큰 보호자를 신경 쓸 틈도 없이 다음 병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최수혁은 차를 빼러 갔고 나는 수납을 하러 갔다. 명절 연휴에 응급실 신세를 지다니. 매달 기부금처럼 내던 건강보험료를 이제야 한번 써 보는구나. 응급실 문밖으로 나가자 녀석이 곧바로 입구에 차를 정차시켰다.
“종종 아파야겠다. 너한테 이런 풀서비스를 다 받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말지 그래. 어제 하루 동안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기분이거든.”
녀석은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운전대를 잡았다. 뭘 좀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묻는 말에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걸 말했다. 그건 바로,
“니가 만든 닭죽.”
그걸 꼭 먹어야 완쾌될 것 같다고 했더니 최수혁의 기분이 좀 풀어졌다. 밤새 땀을 더 흘린 탓인지 몸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샤워를 했고 맞춰서 데워져 나온 죽을 먹었다.
점심때가 지나자 확실히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었다. 둘이서 소파에 몸을 겹쳐 누웠다. 티비를 틀었더니 때마침 녀석의 데뷔 작품이었던 영화가 추석 특집으로 방영중이었다.
22살의 최수혁은 앳돼 보였다. 지금보다 짧게 깎은 머리를 하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고백을 했다.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는데 떨어지지는 않았다.
“저거 진짜 운 거야?”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는 내 뒤통수에 녀석이 코를 쿵 박아 왔다. 당연하지 한다.
“연기파네. 울 수 있을 때 우는 거 능력 아니냐. 저때 무슨 생각 하면서 울었어?”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
여전히 내 뒤통수에 코를 박은 채 녀석이 중얼거렸다. 할머니 생각하기에는 상대 배우가 젊고 예쁘지 않니. TV 화면 속의 최수혁이 여배우를 향해 다가갔다. 고개가 떨어지며 두 배우의 입술이 조심스레 닿았다.
“여기 봐.”
느닷없이 녀석이 몸을 일으켜 입술을 포개어 왔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내가 입술을 다문 채 똥그랗게 쳐다보자 내 손에 들린 TV 리모컨을 가져가서는 전원을 꺼 버린다. 따뜻하게 핥아 오는 최수혁의 혀끝에 곧바로 입술이 열렸다. 우리는 꽤 오래, 조용히 키스를 나누었다.
***
추석 당일이 되었을 때 녀석이 아침 일찍 부모님께 전화를 했다. 자기네 집은 제사를 안 지내서 괜찮다고 하더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그게 아닌 게 분명했다. 경기도 광주면 먼 것도 아닌데 가서 찾아뵙고 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같이 가자는 녀석의 말에 미친 거 아니냐며 정색을 했다.
“나 미친놈인 거 다 아신다니까.”
“1년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부모 맘은 다 똑같다. 그저 내 자식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
“난 불효자 새끼네 그럼.”
“우리 둘 다 그래. 얼른 다녀와.”
다시 등을 떠밀어 현관문 밖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나는 청소에 돌입했다.
집이 엉망이었다. 청소 도우미 아주머니가 이번 주는 추석이라 쉰다고 하셨고, 나는 내내 아팠기에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녀석이 없을 때 얼른 치워야지 싶어서 오랜만에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까지 스스로 했다. 2시간쯤 지나니 다시 할 일이 없어졌다.
혼자 점심을 시켜 먹었다. 연휴인데 배달해 주시는 라이더분께 미안해져서 팁을 드렸다. 그러다 다시 최수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은 거기서 자고 와야 할 것 같단다. 그렇겠지 뭐, 오랜만에 본 아들인데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 아무렇지 않게 내일 오라고 하고 나는 다시 소파로 향했다.
녀석이 없는 틈을 타 최수혁 영화 특집의 밤을 준비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바빴고 또 계속 같이 있는 바람에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 그전에는 최수혁이란 배우에게 관심이 없었고.
TV에서 온디맨드 영화 서비스를 찾아 최수혁이란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본다. 총 6편의 영화가 떴다. 두 개는 영화관에서 봤고 하나는 어제 보다가 방해를 받았지. 연상의 여자에게 키스하는 22살의 최수혁이 다시 화면 가득 채워졌다.
역시 녀석의 필모그래피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저 수트빨 날리며 차에서 내려 여주인공을 태워 주는 재벌남 최수혁이 잘생겨서 보고 있는 것일 뿐. 배드신이 나올 때는 쿨하지 못하게 빠른 재생으로 넘겨 버렸다. 마지막 작품을 볼 때쯤 되니 벌써 밤 10시가 넘었다. 몸 자랑은 지겹게도 해 대는구나. 굳이 웃통을 벗지 않아도 되는데 또 벗고 나오네…
그러다 나는 칠십 넘은 노인처럼 리모컨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깜빡 졸았나 보군. 손에서 떨어진 리모컨을 수소문하며 손을 뻗었는데 영화 속에서 최수혁이 걸어 나왔다. 어? 만찢남 아니고 영찢남이야?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자세히 보니 실제 인물이다.
“너 자고 온다며.”
내 말에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니가 생각해도 니가 미친 게 확실해 보이지?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새벽에 굳이 부모님 집에서 차 몰고 집에 돌아올 이유는 없는 거잖아. 이 불효막심한 새끼야.
몸을 숙여 소파로 다가왔다. 녀석의 트렌치코트에서 차가운 가을 공기가 느껴진다. 누워 있는 내 얼굴을 감싸 쥐고 이마를 맞대고 중얼거린다. 열은 안 나고.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배를 만진다. 밥도 먹은 거 같고. 뭐? 나 배 나왔나? 녀석이 씩 웃으며 손을 뻗어 나를 일으켰다.
“침대 가서 자.”
너는? 하고 물으니 잠깐 집에서 옷 갈아입고 다시 오겠다고 했다. 현관문 닫는 소리가 들리는 걸 확인하고 침대 시트 속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혼자 자는 줄 알았더니. 나도 모르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쿡쿡거렸다.
***
짧은 연휴가 끝나고 금요일 하루 다시 출근했다. 많은 직원들이 오늘까지 연차를 연달아 쓰는 바람에 사무실은 좀 휑한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이동재랑 둘이서 점심을 먹으러 갔다.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이 근처 회사원들의 절반은 출근을 안 한 것 같다. 적당히 손님 들어찬 백반집에 널찍한 6인용 테이블을 둘이서 차지하고 앉았다.
“요즘 이 집 주방 아줌마 바뀐 거 같지 않아?”
“형도 느꼈어?”
“어, 여기 불백 진짜 괜찮았는데. 이렇게 또 한 집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회사 주변 식당들은 자주 주인이 바뀌었고, 간판이 바뀌었다. 내부를 그대로 인수해서 영업하는 경우도 있었고 주방장이 바뀌는 게 느껴지는 집도 있었다. 주문한 지 오 분 만에 음식이 나왔다.
“연휴 때 뭐 했어?”
수저를 건네주며 이동재가 인사치레로 물었다.
“나 응급실 갔다 왔잖아.”
“뭐? 왜? 어디 아팠어?
에휴 하고 한숨을 쉬고 시작한 나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어’ 내지는 ‘그랬어?’ 정도의 추임새만 넣어 주던 이동재의 밥그릇이 빠르게 비워졌다. 나는 아직 반도 못 먹었는데.
“그러고 보면 ‘그분’이 옆집 살아서 진짜 다행 아니야? 만나기도 편하고.”
“응, 장점이 많아.”
“같이 살아. 뭐하러 둘이서 집세를 따로 내고 있어? 돈이 썩어 남아 돌아?”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살림을 합치냐.”
“합칠 살림도 없잖아. 형 몸만 들어가면 되겠구만.”
“합쳐도 우리 집으로 합치지 내가 왜 거기로 들어가.”
“형 진짜 어떨 때 보면 쓸데없이 자존감만 너무 높은 거 알지?”
“다 먹었냐? 말 그만 시켜라. 나도 밥 좀 먹자.”
이번에는 이동재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내가 간간이 추임새만 넣었다. 5분 만에 나온 밥을 15분 만에 다 먹고 회사까지 걸어가니 점심시간이 아직 20분이나 남았다. 이럴 땐 참 별것도 아닌데 세상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따뜻한 카페라떼요, 우유는 두유로 바꿔 주세요.”
주문을 하고 카드를 내려는데 이동재가 손을 막았다.
“됐어, 형 하우스 푸어로 고생이 많은데 내가 사 줄게. 이걸로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한 잔이랑 같이 계산해 주세요.”
“존나 고맙네요.”
계산하는 이동재를 버려 두고 테이블로 이동했다. 월요일부터 팀원들이 돌아오면 다시 스케줄이 빡빡하게 돌아갈 것이다. 관련 부서들과 미팅들이 수두룩했다. 다들 이번 신제품 기획안을 낸 우리 팀에 기대하는 눈치였고 나는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칼퇴근할 수 있는 직장이지만, 열심히 하려고 하면 야근이 필수인 회사다. 벌써 6년째가 되었다.
그렇게 진짜 한 주가 시작되었다. 똑같은 프레젠테이션을 반복해야 했지만 미팅에 참석한 부서마다 질문의 방향성은 매우 달랐다. 각자의 사정들에 맞춘 스케줄을 원했고 우리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계열사 프로덕트 팀과 TF를 구성했다.
일 잘하기로 소문난 프로덕트실 우기준 실장과 끊임없이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러다 대면 회의가 필요해졌다. 처음엔 내가 찾아갔고 오늘은 그가 본사로 와 주었다. 딱딱한 회의실에 마주 앉아 얘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그가 1층 로비 카페에서 보기를 원했다.
누가 볼 새라 조심조심 노트북 모니터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려 주었다. 1차 시안 디자인이 잘 뽑혀 나온 듯했다. 1시간여를 주거니 받거니 논의를 하다 내일 다시 한 번 만나는 것으로 결정했다. 내가 가겠다고 했더니 흔쾌히 고맙다며 악수를 청했다.
그를 돌려보내고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주변의 과한 시선이 조금 불편했다. 1층으로 떨어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중에는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맞지? 맞지?”
속삭임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돌아보니 그녀들은 아닌 척 딴청을 피웠고 엘리베이터 내부는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불편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보지 않는 척하고 있었지만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용을 들을 수 있을 만큼의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내가 옆을 지나갈 때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쳐다보지는 않는다. 딴청을 피우는 게 오히려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내가 오는 걸 보고 있던 김시은과 눈이 마주쳤다.
너 왜 그런 표정 짓고 있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최수혁이다. 나 근무 시간인 걸 알면서 문자도 아니고 전화를 했네?
“형.”
이동재가 다가와 형이라고 불렀다. 회사에서 사적인 호칭을 쓰는 녀석의 눈빛이 흔들렸다. 휴대전화가 계속 울린다.
“형, 잠깐 회의실에서 얘….”
“잠깐만. 어 말해.”
최수혁의 전화를 일단 받았다. 그나저나 왜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거냐. 뭐야, 전화 받는 거 처음 봐?
“형, 잠깐 회의실로 일단 가서….”
“기다려.”
나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단호하게 이동재를 제지했다. 그런 와중에 그가 들고 있던 휴대폰 화면 속 기사 제목을 보았다. ‘영화배우 최수혁, 무성했던 소문의 진실 드러나나.’
시발…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세연. 내 얘기 먼저 들어.
무섭도록 침착한 최수혁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사태의 원인을 곧바로 짐작하기에는, 우리가 저질러 놓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