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여행 가서 누가 관광을 해 (7/11)

7화. 여행 가서 누가 관광을 해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녀석과의 관계에 이렇게 도움이 되어 본 적이 없었는데 확실히 오늘 공항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대형 연예인의 존재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옆에 서 있는 나에게는 하등의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뭐 매니저거나 친구라고 생각했겠지. 덕분에 우리는 순조롭게 도항에 성공했다.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할 때만 해도 여전히 한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스톡홀름 공항에 도착한 뒤로는 녀석에게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최수혁의 텐션이 올라갔다.

“여기도 한국 사람 이천 명 넘게 산다는데 굳이 이런 짓은 호텔 가서 해도 되지 않을까?”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녀석의 손을 뿌리쳤더니 이번엔 어깨로 올라왔다. 그래 그나마 이건 좀 괜찮겠다.

공항 안에 있던 렌터카 업체에서 차량 픽업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우리는 한국과는 달리 더딘 일 처리 속도에 생경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걸 보니 여기가 유럽이 확실하구나. 10분이나 기다린 끝에 직원이 키를 주며 932번에 주차된 차라고 알려 주었다.

렌터카 주차장으로 올라가 932번을 찾아 헤맸다.

“구백삼십사 번… 구백삼십삼… 구백삼십… 이… 번. 헉!!!”

뜬금없이 932번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신형 포르쉐를 보고 놀라움과 감동에 우뚝 서 버렸다. 차는 굳이 자기가 예약하겠다더니 포르쉐를 예약한 거였냐.

“너… 독일 차 싫어한다더니.”

나의 눈이 하트로 변했다. 매끈하게 몰딩된 포르쉐 라인을 앞에서부터 뒤까지 손으로 훑었다.

“니가 좋아한다는데 별수 있나.”

뜻밖의 선물로 감동을 먹은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넣으니 미친 듯이 섹시한 엔진 소리가 주차장에 울렸다. 나도 모르게 물개박수를 칠 뻔했다. 그렇게 기분이 한층 업된 채 호텔에 도착했다.

재원 선배의 이름을 팔아서인지 정말 뷰가 멋진 방을 배정받았다. 스톡홀름의 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준 스위트룸급이었고 침실과 라운지가 분리되어 공간이 넓었다.

라운지에 이어져 있는 테라스로 나왔다. 가로등이 켜진 저녁 거리에 똑같은 높이의 건물들이 운치를 더했다. 역시 여기는 벌써 공기가 쌀쌀하다.

“나 오래 기다렸는데.”

나를 따라 테라스로 나온 녀석이 뒤에서 허리를 감고 숨을 부딪쳤다.

“뭘?”

“굳이 이런 짓.”

목덜미에 입술을 묻더니 뱀파이어처럼 나를 물었다. 호텔 가서 하랬더니 오자마자 시작하는구나. 뒤를 돌아 녀석의 입술을 바로 받았다. 감겨 오는 녀석의 혀를 느껴 보니 내가 더 기다린 게 틀림없었다.

웰컴 섹스를 끝낸 우리는 시차 때문인지 그대로 뻗어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새벽 3시에 눈이 말똥말똥하게 떠졌다. 뭐 하지. 이 새벽에 관광을 하러 갈 수도 없고. 더 자고 일어났어야 하는데 타임존이 완전히 꼬여 버린 우리는 고민 고민 끝에, 섹스를 한 번 더 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녀석이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벌써 세 번째다. 더는 못하겠다. 짐승도 아니고, 아니 짐승도 이렇게는 안 산다. 문명인으로서 나는 일단 뭘 좀 먹어야겠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라운지로 가려고 했는데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인해 허리가 아팠다. 엉거주춤한 상태로 라운지 카운터에 마련된 스낵 한 봉지를 집었다. 맛이 드럽게 없었다. 재원 선배의 스웨덴 음식 지뢰설이 신빙성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아침 식사는 6시부터라고 했으니 1시간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았다.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려 침실로 가져갔다.

“땡큐.”

내가 건넨 커피를 받아 든 녀석이 침대 시트 밖으로 상반신을 드러냈다. 순간 아랫도리에서 휙 하고 지나가는 어떤 느낌이 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했다. 나는 문명인이야.

“웬만하면 옷 좀 입어 줄 수 없을까?”

나의 간청에 녀석도 더 이상의 노동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아예 샤워를 하러 가겠다고 했다. 전라로 걸어 나가는 최수혁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안 돼, 나는 문명인이야.

씻고 나온 녀석과 함께 2층 식당으로 향했다. 검은색 진에 스트라이프 셔츠, 레이밴을 쓰고 테라스에 손을 올린 채 아침 식사를 하는 최수혁을 보니 진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호텔 안에 더 있다가는 이 녀석에게 복상사 당할 것 같다.

“먹고 바로 나가자.”

“어디로.”

“아무 데나. 여행 왔잖아. 관광하러 가야지.”

“난 이대로도 좋은데.”

녀석이 턱을 괴고 웃으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녀석의 선글라스에는 햇빛에 반사된 내 얼굴만 보이고 긴 입술이 나를 놀리듯 꼬리를 올렸다.

“More coffee? (커피 더 하시겠어요?)”

커피포트를 들고 온 서버가 녀석의 빈 잔을 보고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 말없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렸다. 따뜻한 김이 다시 올라오는 잔을 천천히 가져가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신다.

“너 자꾸 혼자 CF 찍을래?”

자신은 죄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입맛이 별로 없었는지 우리는 식사를 별로 하지 못했고 룸으로 올라갔다 곧바로 호텔 밖으로 나왔다.

호텔 주변을 걸었다. 베이커리를 지날 때마다 빵 굽는 냄새가 퍼져 나왔다. 오픈 준비를 하는 상점들과 관광용 투어 선박들이 운하 위에 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산책하기에 좋았다. 호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난간 위에 서서 물결이 일렁이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커플이 다가와 사진을 찍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프레임에 둘을 담았다.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근교에 있는 로컬 식당을 찾아 차를 몰았다. 최수혁이 괜히 포르쉐를 빌려 오는 바람에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계속 운전기사를 자처하게 되었다. 혹시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작은 광장에 테이블을 깔아 놓고 이태리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에 왔다. 스웨덴 와서 웬 이태리 음식이냐 하겠지만 와 보면 알 것이다. 이렇게 해야 연명이 가능하다.

적당히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는데 광장을 지나치던 행인 두 명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최수혁을 알아보고 물어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했더니 ‘싸랑해요. 코리아’를 외치며 짧은 한국어를 해 댄다. 둘 다 아랍계 남자였는데 K pop이 어쩌고 한류 드라마가 어쩌고 하더니 한참을 떠들었다. 내 반응이 시큰둥해서였는지 둘이서 떠들다 지쳐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갑자기 최수혁이 일어나 두 명 중 한 사람의 어깨를 잡았다.

“이 새끼가 니 휴대폰 가져간 거 같은데.”

녀석의 말대로 아까부터 테이블 위에 별 생각 없이 얹어 두었던 휴대폰이 없어졌다. 어깨가 잡힌 남자는 저항하기 시작했고 남자의 다른 일행 역시 최수혁의 어깨를 치며 시비를 걸었다. 소란이 일어나자 웨이터가 달려왔다.

“He took my cell phone, search his pocket. (이 사람이 내 휴대폰을 가져갔어, 주머니 뒤져 봐.)”

그 말에 우리를 번갈아 보던 웨이터가 어쩔 줄 몰라 하자 남자의 일행이 빠른 스웨덴어로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발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러자 웨이터가 동의하는 듯하더니 나에게 영어로 자신은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몸을 뒤질 수 없다고 했다. 아오, 이 답답아. 그럼 경찰에 신고를 하든가. 나의 말에 다시 휴대폰을 가져간 남자의 일행이 다시 빠르게 뭔가를 말한다.

“Damn it, speak in English! (젠장, 영어로 하라고!)”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때 어떤 현지인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스웨덴어로 뭔가를 설명하자 웨이터의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그들끼리 뭔가를 말하는 듯하더니 우리를 도와준 현지인이 나를 향해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경찰을 부르지 않는다면 휴대폰을 주겠다고 한다고 했다. 내 참, 뻔뻔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도둑들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일행이 유명인인지라 일 크게 벌여 봐야 이쪽도 곤란했다. 경찰이 영사관 사람이라도 부르게 되면 일이 더 꼬일 게 뻔했고.

알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바지 주머니에서 내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최수혁이 잡았던 어깨를 놓아주었다. 남자 둘은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짜증이 솟구쳤다.

“You guys need to be more careful in here. (니네 여기선 더 조심해야 돼.)”

우리를 도와준 현지인이 영어로 말을 걸어 주었다. 그제서야 그가 운하에서 내가 사진을 찍어 준 커플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가 중재해 주지 않았다면 정말 일이 귀찮게 될 뻔했다.

“No problem. You guys really stand out. That’s why I was keep looking at you. Lucky. (별거 아니야. 니네 정말 눈에 띄어. 그래서 계속 쳐다보고 있었어. 운이 좋았지.)”

그가 가리킨 테이블에는 운하에서 만난 여자친구가 앉아 있었다.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눈인사를 했다. 보답으로 우리가 점심이라도 사게 해 달라고 했다. 더 넓은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현지인의 이름은 다니엘이었다. 그는 의자에 앉자마자 최수혁에게 혹시 모델이냐고 물었고 녀석은 일부러 거짓말할 필요 없이 ‘No’라고 답했다. 다니엘은 디자이너였다. 물어볼 만했다.

그는 오랜만에 스톡홀름으로 자기를 보러 온 여자친구와 휴가를 보내는 중이었다. 우리도 휴가중이라고 하자 혹시 둘이 사귀는 거냐고 물었다. 그의 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워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답해 버렸다.

“Super cool! (진짜 멋지다!)”

남자끼리 사귄다고 하면 super cool 소리를 듣는 나라였구나. 재원 선배, 왜 혼자 이렇게 좋은 나라에서 살다 왔어요. 혹시나 싶어 최수혁의 눈치를 슬쩍 보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니 더 신경 쓰지 않게 된 듯 자연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We have a party tomorrow. Come and join if you want. (우리 오늘 밤 파티가 있어. 원한다면 와도 돼.)”

다니엘이 클럽 위치가 적힌 카드를 건네주었다. 나의 눈썹은 꿈틀거렸다. 솔직히 심심할 거다. 박물관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때우는 건 내 스타일과도 맞지 않았고 가뜩이나 내일부터 뭘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는데 가 볼까 생각이 들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최수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러고 보니 둘이서 뭔가를 같이해 본 적이 없어 녀석이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나는 모른다. 최수혁의 직업으로 인해 한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밖에서는 고작 밥을 먹는 것이 다였다. 둘이서 술을 마셔 본 적도 취미 생활을 공유해 본 적도 없었다.

“Will think about it. Thanks anyway. (생각해 볼게, 어쨌든 고마워.)”

다니엘 커플과 식사가 끝나고 차로 돌아오는 길에 녀석에게 물었다. 넌 뭘 좋아하냐. 여기서는 일반인처럼 싸돌아다닐 수도 있는데 기왕이면 좋아하는 걸 했으면 싶었다.

“하고 싶은 게 있긴 한데.”

녀석이 말끝을 흐리며 나를 돌아본다. 뭔데. 가자. 배도 부르겠다 어디 관광이라도 하러 가는 건가 싶었다. 최수혁의 텐션이 다시 올라갔다.

***

“좀 과한가? 그 옆에 거로 다시 입고 나와 봐.”

드레스룸에 쌓인 세 벌의 수트를 한 차례씩 입었는데 녀석의 만족도가 100을 찍지 못했나 보다. 내가 혼자 패션쇼를 벌이고 있는 이곳은 디자이너 샵이었는데, 최수혁의 손에 끌려 들어오자마자 피팅룸으로 반 감금당한 상태였다. 자기 옷은 대충 눈대중으로 한 벌 사 놓고 이미 좋은 고객 행세를 하고 있는 녀석에게 매장 직원은 친절하게 피팅룸 옆 소파를 권해 주었다.

“사이즈가 큰 거 같은데.”

친절한 매장 직원이 곧바로 작은 사이즈를 가져다주었다.

“다시 입고 나와. 재킷은 지금 걸로 유지하고.”

“사 줄 것도 아니면서 자꾸 이래라저래라 할래?”

“사 줄게, 원하면.”

가격표를 보니 혹했다. 진짜로 사 달라 할까 3초쯤 고민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꾹 참고, 됐네요 하고 다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사실 녀석의 안목은 정말 좋았다. 픽을 해 준 스타일마다 속으로 감탄을 하고 있던 차였다.

셋 중 가격도 그나마 착하고 한국에서도 입을 수 있을 만한 걸로 마음의 결정을 했다. 원래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녀석이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미소 가득 먹은 매장 직원의 손에는 아까 고른 세 벌의 수트 백이 들려 있었다.

“미쳤어?”

“내가 보기엔 다 괜찮았거든.”

“그래서 세 벌 다 샀다고? 돈 자랑하냐 지금? 내 앞에서?”

“저녁 사, 그럼.”

700만 원짜리 저녁을 내가 어떻게 사냐고 인마. 직원이 우리를 따라 나와 포르쉐 뒷좌석에 총 네 벌의 수트 백을 넣어 주었다. 기분이 오묘하다. 좋았다가 드러웠다가, 한편으로는 기뻤다가 또 바로 자존심이 상했다.

시차 적응이 아직 되지 않아 둘 다 룸에 도착하자마자 잠이 들어 버렸다. 일어나니 벌써 저녁 9시였고 배가 좀 고팠다. 녀석을 깨우자니 미안했고 혼자 뭘 먹으러 가기도 애매했다.

침대 위에서 10분쯤 멍을 때리다 밖으로 나왔다. 꽤나 쌀쌀했다. 본의 아니게 밤도깨비가 되어 버린 탓에 혼자 운하 위를 좀 걸었다. 몸을 피곤하게 한 뒤 바로 들어가서 다시 자야지. 어제처럼 새벽 3시에 깨는 불상사가 없도록 하려면 가능한 늦게 잠들어야 했다.

저녁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도시는 조용했다. 여긴 주류세가 비싸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문화가 없어졌다는 재원 선배의 말을 실감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몇 명 사람들이 나처럼 산책을 하고 있을 뿐, 금요일인데도 거리가 고요하다.

“Excuse me. (저기요.)”

갑자기 누군가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걸었다.

“A… Are you from Korea? (한국 분이세요?)”

말을 건 사람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동양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린 내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더니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혹시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순간 망설였다. 여기서 괜히 한국 사람이라고 했다가 오늘 낮에처럼 몰상식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고, 혹시 뭐 같은 민족 운운하면서 돈이라도 빌려 달라고 하면 귀찮아지긴 하는데…

망설이는 나의 표정을 보는 남자의 표정이 꽤나 절박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Well… somehow. (뭐, 어떻게 보면 그렇죠.) 무슨 일이신데요.”

마지막에 붙어 나온 나의 한국어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터져 나오는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이놈의 오지랖 또 발동했다. 옷차림을 보니 사기꾼 같지는 않았고 배낭여행 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청년인데 얼마나 급한 일이었으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겠나 싶었다.

“아 진짜 너무 반갑네요! 멀리서는 어두워서 긴가민가했는데 또 가까이서 보니 외국 분이신 거 같아서 실수했다 생각했거든요. 아 반갑습니다, 한국 분 맞으셨구나!”

“그런데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호들갑 떨었죠. 저는 허지환이라고 합니다. 강동대학교 경영학부 3학년 재학중입니다. 사는 곳은 서울시 용산구 보광동, 아버지는 제일은행 아차산역 지점장이시구요, 어머니는 한평 중학교 수학 교사십니다.”

이렇게 신상명세를 줄줄 읊는 거 보니 답은 딱 하나로군.

“저… 돈 좀 빌려주십쇼. 죄송합니다. 오늘 투어 하고 돌아오는 길에 흑형님들한테 지갑이랑 스마트폰을 뺏겼어요….”

에이씨, 이럴 줄 알았다. 알면서도 오지랖 부린 내가 미친놈이지 뭐.

“처음 뵙는 분께 이런 말씀 드려 정말 죄송한데… 제가 한국 가서 꼭 갚겠습니다. 오늘 날짜 환율로 쳐서. 아니 이자까지 쳐서 꼭 갚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돈이 한 푼도 없어요….”

거짓말일 수도 있다. 원래 외국 나오면 한국 사람을 제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그런데 뭐 거짓말이고 아니고는 별로 상관없었고 나는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500크로나 지폐 한 장을 청년에게 건네주고 발길을 돌렸다. 한국 돈으로 6만원 조금 넘는다. 현금을 쓸 일이 없어 작은 단위의 지폐가 없었기도 했고 저 정도는 있어야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을 것 같기도 했다.

“와, 감사합니다. 제가 갚을게요,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

“갚을 필요 없어요. 거짓말이면 오늘은 나 하나로 끝내고, 사실이면 앞으로는 조심해요.”

그대로 지나쳐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팔이 잡혔다. 어랍쇼?

“저… 진짜 죄송한데요. 혹시 전화 한 통만 쓸 수 있을까요? 집에 전화해야 할 거 같은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또 울상이 되었다. 키는 나보다도 큰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이고 집에 전화를 꼭 좀 해야겠단다. 한숨을 푹 쉬고 휴대폰을 꺼냈다. 설마 가지고 튀어 버리진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자기가 번호를 말할 테니 그대로 스피커 폰으로 연결해 주시면 된단다. 개념 있는 청년일세.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하긴, 한국은 지금 새벽 6시다. 내가 한숨을 쉬자 청년이 더 큰 한숨을 쉬었다. 세 번 정도 더 연결을 시도했지만 받지를 않는다.

“숙소가 어디에요? 거기 가서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아 저. 딱 5분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저희 아버지가 딱 6시에 운동 가신다고 일어나시는데 그땐 받으실 거예요. 죄송합니다….”

“나 졸린데….”

“죄송합니다. 딱 5분만요. 어, 어! 전화 왔어요 전화!”

청년이 윙- 거리며 몸을 떠는 내 휴대폰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미안한데 이 남자는 니네 아빠 아니야. 살짝 몸을 돌려 전화를 받았다.

“응.”

-여행 왔는데 자고 일어나니 너는 사라지고 휴대폰은 계속 통화중이야. 어떻게 해석해야 해.

잠깐 옆으로 고개를 돌려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물이 글썽글썽하게 고여서는 ‘이봐 같은 민족끼리 이역만리 땅에서 이렇게 매정하게 굴 건가.’ 라는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아… 5분만 더 기다려. 바로 올라가서 설명해 줄게.”

전화를 끊고 그래 딱 5분 기다려 주고 가차 없이 나는 호텔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글썽거리던 눈빛이 다시 환희로 바뀌고 감사하다는 말을 세 번쯤 더 했다.

그 5분 동안 청년은 자신이 흑형님들께 어떻게 당했는가에 관해 썰을 풀었다. 막 한국 좋아요 K-pop 최고 하면서 아는 척을 하길래 진짜 한류 팬인 줄 알았단다. 정신 차려 보니 지갑과 휴대폰이 사라졌고 여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이미 날은 저물었고 배가 너무 고파서 자신도 모르게 나에게 말을 걸 용기가 생겼다고 했다.

“저 진짜 바보 같죠. 하… 인터넷에 찾아보면 이렇게 당한다고 후기 엄청 많이 올라와 있는데. 멍청하게 진짜….”

청년이 계속 자신을 힐책하는 소리가 마치 나에게 하는 소리 같아서 민망해졌다. 뭐… 누구나 당할 수 있다, 다들 당하는 수법이니 자꾸 하는 거 아니겠냐며 슬쩍 달래 주었다. 그는 내 말에 고맙다는 얘기를 또 세 번쯤 했다.

“여보세요, 아빠!”

드디어 청년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전화를 받았다.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아버지 되시는 분께서는 스피커 폰으로 쩌렁쩌렁 울릴 만큼 문책을 심하게 하셨다. 너처럼 멍청하게 그런 거에 속는 사람이 또 있겠냐며 열을 올리시는데 나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아빠, 통화 오래 못 해요. 어떤 형이 휴대폰 빌려주신 거라 로밍비 많이 나와요. 누나한테 메신저 좀 들어오라고 해 줘요, 나 숙소까지 걸어서 한 시간이면 간다고.”

숙소에는 인터넷이 되나 보다. 다행이네. 그럼 그냥 첨부터 숙소 가서 인터넷으로 연락할 것이지 사람 귀찮게.

전화를 끊고 청년이 꾸벅 인사를 했다. 졸리신데 정말 죄송하고 고마웠다며 끝까지 연락처를 물었지만 됐다고 했다.

그 청년이 생각보다 통화를 길게 하는 바람에 5분 기다리라고 한 것이 10분이 넘었다. 호텔로 올라가 룸으로 들어가니 최수혁이 편안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아까 낮에 들어와 그대로 쓰러져 버린 탓에 나 역시 그 외출복 그대로 나갔다 온 것이었다. 반라 상태의 녀석이 집어 든 티셔츠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걸었다.

“그거. 굳이 다시 입을 필요 있을까?”

“언제는 옷 좀 입고 있으라더니.”

“24시간 지났잖아.”

최수혁이 손에 들었던 티셔츠를 다시 내려놓고 다가왔다.

“그건 그렇고, 어디 갔다 온 건데.”

“나중에 설명해 줄게. 일단 급한 불 먼저 끌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이 허리를 감고 키스를 해왔다. 나는 곧바로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했다.

***

3일째 되는 날이다. 거듭된 섹스로 드디어 시차를 맞추는 데 성공한 우리는 아침 9시쯤 눈을 떴다. 컨디션 최고다. 이제 제대로 된 관광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커피로 대충 아침을 때우고 호텔 1층에서 샌드위치와 물을 샀다. 전화로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포르쉐에 올라 지붕을 오픈했다. 청량한 가을 공기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어 드라이브하기에 완벽한 날이다. 도시를 빠져나가 시골 외곽으로 드라이브하기로 했다. 갑자기 친절해진 최수혁이 운전대를 잡았다. 덕분에 거리도 구경하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저기 좀 세워 봐.”

시골길로 들어서니 군데군데 가족 농장처럼 보이는 곳에서 작은 트럭을 세워 놓고 각종 작물들을 팔고 있었다. 파는 사람은 없고 가판대 위에 농작물과 돈을 놓고 가는 그릇이 놓여 있었다. 사과 2알과 딸기 한 팩을 집어 들었다.

“동전 없어?”

나의 말에 최수혁이 말없이 100크로나를 넣었다. 그건 너무 많은데. 소소한 시골 농장 매매에 자본주의 망령을 끼얹은 녀석을 말없이 째려보다 다시 차에 올랐다.

적당한 곳에 차를 주차시키고 호텔에서 사 온 샌드위치와 방금 사 온 과일을 함께 먹었다. 가을바람이 쏠쏠히 불어오는 게 적당히 마음이 설레었다.

“마지막으로 여행 가 본 게 언제야?”

손끝이 발갛게 딸기 물이 들어 휴지를 꺼냈다. 내 질문에 녀석은 글쎄 하며 한참을 생각했다.

“촬영이 아니고 개인적으로 온 건 거의 5년 만인 거 같은데.”

“5년 전엔 누구랑 어디 갔었는데?”

“호주. 가족 여행이었고 중간에 일정 때문에 먼저 들어왔어. 뭐, 진짜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는 거야?”

“맞아. 알아서 생각해서 알아서 대답해 봐.”

최수혁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애인이랑 여행 온 건 처음이야. 대답이 됐나?”

충분히 되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손을 털었다. 일단 애인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고, 처음이라는 팩트도 마음에 들었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어진 나는 헛기침을 하며 출발하지? 했다. 포르쉐에 다시 시동이 걸렸다.

도시 근교에 있는 바다로 향했다. 비릿한 바다 냄새 없이 청량했다. 몇몇 한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들이 녀석을 알아본 듯했지만 개인 일정인 게 뻔히 보이는데 굳이 다가와 아는 척을 할 만큼의 개념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박물관이나 관광명소는 모두 생략했다. 녀석은 불편할 것이고 나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저렇게 드라이브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둘 다 졸음이 쏟아지는 바람에 차를 세워 놓고 낮잠을 잤고, 오후에는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지나가는 현지인들의 생김새와 그네들이 하는 행동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관찰당하는 입장에서 관찰하는 쪽으로 바뀐 최수혁은 이런 시간을 꽤나 즐거워했다.

저녁 시간이 되어 호텔로 돌아온 뒤부터는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룸서비스나 시킬까 메뉴를 훑어보던 나에게 녀석이 다니엘이 준 클럽 명함을 건넸다.

“안 내킨다며.”

“잠깐이면 나도 괜찮을 거 같아.”

하루 종일 자기 테이스트에 맞춰 준 것이 고마웠는지 녀석이 먼저 권했다. 그리고 나는 사양이란 걸 모르는 남자다.

***

“You guys ROCK!! (니네 진짜 쩐다!!)”

최수혁은 올 블랙 수트를 갖춰 입었다. 머리카락 한 올 빠짐없이 왁스로 넘긴 포마드에 넥타이도 검은색, 베스트도 검은색인데 아직 근육이 다 빠지지 않은 탓인지 팔뚝과 가슴 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녀석의 진짜 직업을 알 리 없는 다니엘은 난리가 났다.

그의 안내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니 한쪽에서는 세 명의 바텐더가 술이나 음료를 팔고 있었고 라운지 소파들과 카드 게임을 하는 테이블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친구들끼리 여는 파티라고 하더니 꽤나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진토닉을 약하게 부탁했고 잔을 들고 자리를 옮기려는 도중 다니엘의 여자친구가 다가왔다. 자기 친구들은 저쪽에서 이미 한차례 난리가 났다고 했다. 정말 모델 아니냐고 다시 한 번 최수혁에게 물었고 녀석은 Absolutely no 라고 고개를 저었다.

취기가 살짝 오르자 각 잡힌 목 카라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단추는 두 개쯤 풀어 헤치고 넥타이를 조금 당겨 내리다 바에 앉아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싱긋 웃었다. 전형적인 금발의 북유럽 미남이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수혁이 갑자기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바에서 일어나려던 남자는 겸연쩍게 다시 앉았고 다니엘의 여자친구 일행들은 아쉬운 눈빛을 날렸다.

서로 몸이 닿는 거리가 되자 최수혁의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진토닉을 한 번에 비워 버린 녀석이 내 어깨를 치며 어디론가를 가리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Can we join? (같이할 수 있을까요?)”

“Sure. (물론이죠.)”

한쪽 구석에서 남자 둘이서 진행중이던 빌리어드 게임이 끝이 나자 녀석이 참전을 선언했다. 8번 블랙 솔리드가 있는 에이트볼이었다. 큐대 잡아 본 지가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최수혁이 자연스레 초크를 문지르며 테이블 중앙으로 이동했다.

긴 다리를 빼어 허리를 숙인 녀석이 망설임 없이 첫 브레이크 샷을 넣었다. 큰 타격 소리와 함께 정확하게 중앙을 깨고 들어간 큐볼이 스트라이프 14번을 포켓으로 밀어 넣었다.

“Not bad. (나쁘지 않은데.)”

대적할 만한 적수를 만났다는 듯 상대 팀 둘이서 눈빛을 교환하며 웃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 완전 허당이야.”

녀석에게 다가가 조용히 고해성사를 마쳤다.

“상관없어.”

어차피 내게 바라는 건 별로 없었다는 듯 녀석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 나간 큐볼이 10번 스트라이프를 다시 포켓으로 정확히 밀어 넣었다.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쫓던 많은 시선들이 이제 빌리어드 테이블로 향했다.

미친 듯이 볼을 집어넣던 녀석의 질주가 네 번째 턴에서야 멈춰졌다. 테이블 모서리에 쿠션을 먹고 들어간 큐볼은 아슬아슬하게 15번 스프라이프를 비켜 나갔다. 상대 팀 중 갈색 머리 남자가 먼저 큐대를 잡았다. 허공에서 각도를 한 번 재어 보던 남자는 곧바로 4번과 5번 솔리드를 연속으로 넣었다.

와, 이 사람들 완전 꾼이네?

나는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상대 팀의 마지막 샷에 미는 힘이 모자라 멈춰진 2번 솔리드가 내가 노리고 있던 9번 스트라이프의 각도를 틀어 버렸다. 그래도 나름 만족한다는 표정을 지은 갈색 머리가 뒤로 물러서고 내가 큐대를 잡았다.

뭐야, 뭐 이렇게 보는 눈이 많아졌어? 뒤를 돌아보니 다들 의자를 이쪽으로 틀어잡고 구경중이었다. 부담이 500배가 되어 돌아왔다.

“아니. 이쪽에서 해.”

나름 자리를 잡고 큐볼을 겨냥하는 내게 최수혁이 틀렸다며 자신이 있는 쪽으로 오라고 했다.

네, 고수님 말을 들어야겠죠. 녀석이 가리키는 곳에서 자리를 잡고 세게 샷을 날렸다. 큐볼에 부딪혀 크게 소리를 내고 굴러가던 9번 스트라이프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다. 구경꾼들의 표정이 재미있어졌다.

그래요, 내가 이 팀의 구멍입니다.

상대 쪽 금발 남자가 거침없이 테이블 앞으로 나와 무방비 상태로 나와 있던 7번 솔리드를 깔끔하게 밀어 넣었다. 이제 더 이상 노릴 만한 볼이 없어진 상대 팀이 모험을 감행했다. 사이좋게 붙어 있는 12번 스트라이프와 2번 솔리드 중앙으로 샷을 넣고 오른쪽 포켓으로 2번 솔리드가 떨어지는 것을 노렸다.

하지만 각이 모자랐고 2번 볼은 포켓 앞에서 모서리에 부딪혀 방향을 틀어 버렸다. 그 덕에 12번 스트라이프는 그대로 밀기만 하면 되는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우리 턴이다.

최수혁이 재킷을 벗어 옆에 있던 소파 위로 던졌다. 이번엔 중앙이 아닌 테이블 왼쪽 모서리쯤에 섰다. 응? 거기 아니지 않나?

이제 보니 노리기 쉬운 12번은 그대로 두고 아까 각도가 틀어진 15번 스트라이프를 노리는 듯했다. 큐대를 조준한 녀석이 몸을 숙이자 아찔한 허리선이 드러났다. 깊이 숙인 녀석의 등을 감싸고 있던 실크 베스트가 더 탄탄하게 조여지며 조각 같은 실루엣이 불빛에 드러났다.

내가 볼 땐 전혀 안 들어갈 것 같은 각도로 녀석이 샷을 넣었다.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딪힌 볼이 15번 볼을 구석에서 끌어내며 오히려 옆에 있던 11번 볼을 집어넣었다. 아, 그런 거였어?

“That was awesome. (방금 거 멋진데.)”

갈색 머리가 최수혁의 실력을 칭찬했다. 초짜인 내가 봐도 멋진 샷이었다. 다시 15번 스트라이프는 완전 구석에 혼자 놀고 있었다. 큐볼과의 거리가 너무 길어 한 번에 넣기는 힘들어 보인다. 역시나 중간까지 끌어오는 데 만족한 최수혁이 큐대를 놓았다.

갈색 머리가 나왔다. 남은 볼은 2개씩.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순식간에 금발 남자가 실패했던 2번 솔리드를 해치웠다. 남은 16번은 애매하게 8번 솔리드와 붙어 있다. 8번이 먼저 들어가면 무조건 지는 게임이다. 예상대로 각을 만들 면이 부족했던 갈색 머리는 두 볼을 떨어트려 놓는 데만 성공했다. 다시 내 차례가 돌아왔다.

“Can we replace the player? (선수 교체해도 될까?)”

“Nope. (안 돼.)”

갈색 머리는 단호했다. 에이씨, 부담스러워. 그나마 최수혁이 나를 위해 남겨 준 12번 공은 해 볼 만한 것 같았다. 설마 니가 이것도 못 넣진 않겠지? 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는 녀석에게 보란 듯이 자리를 잡고 큐대를 올렸다.

이거 뭔데 이렇게 떨리냐.

순간 최수혁의 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몸을 숙여 슬그머니 내 어깨를 틀어 각도 조정을 해 주었다. 여러모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더 끌면 큐대가 미끄러질 것 같아 녀석이 잡아 준 각도대로 그냥 샷을 날렸다. 정확하게 타격되었다. 시원하게 굴러가던 큐볼이 외로이 서 있던 12번 공을 깔끔하게 밀어 넣었다. 만세!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을 꼭 쥐고 허공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12번 공과 함께 큐볼이 그대로 포켓으로 같이 빨려 들어갔다. 파울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최수혁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내가 생각보다 너무 못해서 충격을 먹은 건지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조그만 소리로 미안하고 용서를 빌었다. 녀석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기사회생한 상대 팀의 금발 남자가 웃으며 큐대를 잡았다. 갈색 머리가 중앙으로 빼 준 16번 공을 무난하게 집어넣고 마지막 8번 솔리드를 노렸다. 무난하게 밀어 넣는가 싶더니 우리 쪽 남은 15번 스트라이프의 진로 방해로 인해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히고 말았다. 운명의 8번 볼은 포켓을 3센티 정도 앞두고 멈춰 서 버렸다.

“No way. (말도 안 돼.)”

오오… 완전 흥미진진해. 구경하던 구경꾼들도 재밌다는 듯 한마디씩 던졌다. 표정이 일그러진 갈색 머리가 최수혁을 쳐다보았다. 게임 끝났다는 걸 직감한 듯했다.

“You can change the player. (니네 선수 바꿔도 돼.)”

금발 남자의 농담에 최수혁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테이블 중앙에 섰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큐대로 겨냥하고 곧바로 15번 볼을 해치웠다. 그러고는 세 걸음쯤 자리를 옮겨 그대로 8번 솔리드를 밀어 넣었다. 와, 끝내는 데 한 5초 걸렸나. 짧은 박수 소리도 들렸다.

좋은 게임이었다며 두 사람이 악수를 청했다. 그들이 기분 좋게 술을 한 잔씩 샀고 우리는 두 판 정도 게임을 더 하고 파티를 떠났다. 의외로 재밌었다며 오는 길에 녀석이 소감을 말했다. 그랬겠지. 니가 세 판 다 쓸어 버렸으니까.

그렇게 셋째 날 밤이 저물었다.

***

여행이라기보다는 휴가라는 목적에 충실하고자 했던 우리는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호텔에서 뒹굴었고, 어떤 날은 맛집 찾기에 열을 올렸다. 녀석이 하자고 하는 것에 나는 불만이 없었고 내가 권하는 것에도 최수혁은 말없이 따랐다. 싫고 좋고의 문제보다는 함께해서 다 괜찮았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었을 것이다.

어제는 둘이서 교대로 운전을 하며 꽤나 위쪽 지방까지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 밤길 운전으로 지쳐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렸다.

밤인지 아침인지 모를 시각에 정신이 들었다. 머리맡에 넣어 둔 휴대폰이 계속 진동을 울리며 나를 깨우고 있었던 탓이었다.

[형, 안녕하세요.]

[저 허지환입니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례를 해야 할거 같은데]

[혹시 오늘 점심 같이 안 하실래요?]

[참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시계를 보니 아직 9시 반. 아침부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민속놀이를 하고 있는 이 친구는 대체 누구냐.

[아, 저 그놈입니다]

[며칠 전 도와주셨던]

[그 바보 같은 대학생이요.]

곧이어 들어오는 추가 메시지를 보니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500크로나. 내가 분명 연락처를 주지 않았는데 어떻게 휴대폰 번호를 안 건지 고민하다 얘네 아버지한테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었던 장면이 생각이 났다. 예절이 너무 발라서 귀찮은 청년이로군.

[일정이 타이트해서 안 되겠네요.]

[별로 신경 쓰지 마세요.]

기억을 더듬느라 머리를 좀 썼더니 이미 잠은 다 깨 버렸다. 휴대폰을 다시 탁자에 올려 두고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자동으로 감겨 오는 최수혁의 긴 팔이 다시 나를 침대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어딜 벌써 일어나냐는 듯 단단한 가슴을 맞대었다. 등 뒤에서 녀석의 체온이 따뜻하게 전해져 온다.

“출근할 거 아니잖아.”

낮게 잠긴 목소리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서 회사 나가는 것도 아닌데 굳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법은 없지. 비루한 직장인의 버릇이 나도 모르게 성실함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내 허리를 단단히 조인 녀석의 오른쪽 다리를 손으로 훑었다. 허리, 엉덩이, 허벅지까지 살갗이 맞붙은 느낌이 좋았다.

내 손길에 아침부터 수컷의 건강함을 뽐내기 시작한 녀석의 물건이 엉덩이 쪽에 느껴졌다. 나를 감고 있던 최수혁의 오른손을 천천히 입술로 가져갔다. 그 긴 손가락을 입에 넣고 천천히 혀를 감았다. 검지가 빨린 녀석의 다리가 좀 더 조여 왔다. 자는 것처럼 고요하던 다리 사이의 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신호를 보냈다.

“이리 와.”

녀석이 부드럽게 나를 돌려 눕히고 키스를 해 왔다.

감겨 오는 아찔한 혀끝을 느끼며 녀석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부드럽고 가느다란 머릿결이 너무 좋아 계속해서 헤집고 싶어졌다. 다시 오른손이 자유로워진 최수혁이 얇은 이불 밑으로 손을 넣었다. 녀석의 긴 손가락에 천천히 쓸어내려진 성기에서 고요하게 욕정이 밀려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작은 신음 소리를 내었다. 소리를 더 내 보라는 듯 녀석에게 귀두 끝이 문질러지고 혀가 빨렸다.

나는 최수혁의 목을 감싸 쥐고 몸을 돌려 상위를 점령했다. 두 입술은 여전히 붙은 채 서로를 탐하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자세 변경에 최수혁의 왼쪽 팔이 자연스레 내 허리를 받쳐 주었다. 푹신한 베개에 팔을 괴고 본격적으로 녀석의 입술을 빨았다.

천천히 진로를 변경해 목덜미에서 머물다 쇄골을 거쳐 유두까지 내려왔다.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녀석의 손길이 엉덩이로 내려와 허벅지를 훑다가 다시 목으로 올라와 자신의 유두를 빨고 있던 얼굴을 끌어 올렸다. 녀석의 혀가 이번에는 조금 더 힘 있게 안으로 들어왔다.

팔 하나를 내려 녀석의 성기를 만졌다. 적당히 발기된 물건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거추장스럽게 우리를 덮고 있던 시트를 걷어 내고 허리를 숙여 녀석의 성기를 빨았다. 희미하게 터져 나오는 저음의 신음 소리가 듣기 좋았다.

커튼이 살짝 열린 틈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와 침대 한쪽을 비추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입속에서 마찰하는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었다.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녀석의 손에는 점점 굵은 핏줄이 잡혔다.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최수혁의 복근에도 근육이 선명해졌다. 녀석에게 범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 달라는 의미로 펠라를 그만두고 녀석의 성기를 손으로 문지르며 눈을 마주쳤다. 그대로 상체를 일으킨 최수혁이 간단히 나를 쓰러트리고 등 뒤로 올라왔다. 적당한 중량감이 뒤에서 몸을 눌렀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곧 등 뒤에서 느껴지던 녀석의 숨결이 사라지고 익숙한 손놀림이 엉덩이 사이에서 느껴졌다. 살짝 열린 구멍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던 손가락이 금방 빠져나가고 부드러운 혀가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그러다 다시 둘이 되어 들어온 손가락이 구멍 속으로 들어와 내벽을 눌렀다. 등 뒤에서 다시 중압감이 느껴졌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던 숨결이 조금씩 거칠게 바뀌고 빨리는 듯한 혀 놀림이 다시 입술까지 내려왔다.

빨라진 키스 속도는 곧 시작됨을 암시했고 기대에 찬 내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할 때를 맞춰 녀석이 정확하게 삽입을 시작했다.

“흣….”

천천히 그리고 깊게 들어온 성기는 부드럽게 성감대를 자극시켰다. 살짝 물러나 어깨를 물다 다시 깊게 삽입을 한 녀석이 입술을 다시 부딪쳐 왔다. 그렇게 다시 한 치의 실망감도 주지 않는 완벽한 섹스가 이어진다.

시트를 쥐고 있는 내 손 위로 녀석의 손이 깍지를 끼었다. 살짝 땀이 나는 듯한 손바닥을 느끼며 녀석의 움직임에 허리를 함께 태웠다. 익숙해진 고통이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살짝 혀를 깨물며 신음 소리를 내었다. 아프고 또 흥분되었다.

나는 녀석의 허리가 내려올 때마다 신음 소리를 냈다. 깊숙이 박힌 성기가 조여진 내벽을 긁을 때마다 녀석도 신음 소리를 냈다. 완벽하게 하나가 된 느낌이 들 때쯤 최수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깍지 끼워진 손 마디가 욱신거릴 정도로 큰 사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나는 사정하지 못했지만 만족했다. 뒤처리를 마친 최수혁이 입으로 정액을 빼 주었고 살짝 지친 우리는 1시간 정도 다시 선잠이 들었다.

기대 이상의 휴가가 이어졌다.

***

일주일이 지났다. 남은 이틀은 말뫼에서 보내기로 한 터라 아침 일찍 호텔 체크아웃을 했다. 편하게 지내셨냐는 매니저의 질문에 Great을 날려 주었다. 그는 재원 선배에게 안부 전해 달라는 말과 함께 흰 봉투에 영수증을 넣어 주었다. 잠깐, 나 아직 결제 안 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로비 소파에 긴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쳐다보는 최수혁이 보였다. 대체 언제 계산한 거야!

“너 자꾸 조용히 재산 자랑할래?”

“다음 호텔은 니가 내 그럼.”

“겨우 이틀이잖아.”

“밥도 사.”

“겨우 밥 가지고.”

“술도 사.”

“술 마실 생각 없잖아.”

먼저 앞서가는 녀석의 뒤를 쫓아가며 따지는데 쳐다보지도 않고 실실 웃으면서 농담만 던진다. 이제부터 지갑 열면 죽는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뒤로도 돈 쓸 일이 별로 없었다. 말뫼로 가는 도중 주유를 했는데 겨우 십만 원 정도가 나왔다. 여전히 미간이 찌푸려진 나를 보고 녀석이 운전대를 잡은 손을 바꿔 내 어깨를 잡았다.

“나중에 나 늙어서 돈 없을 때 니가 다 내.”

늙은 최수혁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보면 쉽지 않은 이야기를 해 준 셈이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조금 풀렸다.

일주일 넘게 24시간 붙어 있다 보니 녀석과의 거리가 한없이 좁혀진 듯한 느낌이었다. 우리 둘은 그날 이후로 서로에게 어떤 태그들을 붙여 주기 시작했다.

만나는 사람. 사귀는 사람. 애인. 매일 보는 사람 그리고 오래 볼 사람.

말뫼 호텔에 도착하고 나니 벌써 오후가 되었다. 7시간의 운전으로 지친 우리는 호텔에서 쉬면서 룸서비스로 저녁을 해결했다. 밤에는 항구로 산책을 나갔다. 항만 곳곳에 벤치가 놓여 있어 우리 말고도 밤 풍경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리 밑으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내려다보니 강아지 한 마리가 내 다리에 붙어서는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Förlåt. (미안해요.)”

먼저 앞서가던 주인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아지를 불렀다. 제 이름이 불리자 주인에게 다시 쫓아간다. 우리도 빈 벤치를 찾아 앉았다.

“내일 하루 남았네.”

아쉬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돌아가면 다시 바빠지나?”

“조금은. 직장인은 휴가 냈다고 일이 없어진 게 아니거든. 밀린 거 처리하려면 한동안 늦을 거야.”

“니가 잘나가는 남자라 좋긴 한데 가끔은 짜증이 나네.”

“피차일반이거든.”

이렇게 이국적인 풍경을 눈앞에 둔 채 한국 돌아갈 생각을 하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침에는 나도 몰래 힐끗 열어 보았던 200통이 넘는 미확인 메일들이 끔찍해 휴대폰을 닫았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배 한 척이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소매를 걷어 올린 팔에 쌀쌀함이 느껴졌다. 호텔로 들어가자는 녀석에 말에 동의하고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다. 오후까지 여유 있게 거리를 돌아다니다 말뫼에서 1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코펜하겐으로 이동했다. 카스트럽 공항에서 다시 독일로 들어왔고 3시간 후 다시 인천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국적기를 타게 된 우리는 비행기에서부터 다시 내외하기 시작했다. 나는 샴페인을 많이 마신 탓에 곧 잠이 들었고 화장실 가고 싶어 잠깐 깼을 때는 최수혁도 옆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10시간의 비행 끝에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찾고 곧바로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어느새 선글라스 장착이 되어 있는 최수혁의 뒤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휴대폰을 들었고 우리는 말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현실로 돌아온 소감이 생각보다 무거웠다.

열흘 동안 주인을 기다린 아우디가 서늘한 냄새를 풍기며 우리를 맞이했다. 익숙한 글자 익숙한 도로 사정이 나로 하여금 가속페달을 밟게 했다. 가는 도중 녀석은 매니저와 통화를 했고 다음 날 스케줄 확인을 했다. 나 역시 곧바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라 부담감이 몰려왔다.

몸의 시차는 억지스럽게 다시 서울에 맞춰 돌아가고 있었다.

***

지각할 뻔했다. 제대로 꼬여 버린 수면 시간이 8시가 되도록 나를 잠재웠고 보다 못한 최수혁이 나를 흔들어 깨워 주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녀석은 이런 수면 패턴에 익숙한 듯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회사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휴가에서 돌아온 나는 일복이 터졌다. 일주일 넘게 팀장 결재를 받지 못한 기안서들이 줄줄이 올라왔고 내가 할 일을 떠안고 결정장애가 온 이동재가 안 하던 형님 소리를 하며 나를 반겼다.

“세연 팀장 회의 들어와.”

“넵.”

신의 속도로 타자를 치고 있던 나에게 조소영 본부장이 휙 지나가며 말을 던졌다. 재깍 대답한 거에 비해 내 몸은 여전히 의자에 붙어 있었다. 조금씩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면서도 키보드 위의 손가락은 쉴 줄을 몰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어어어…. 타다다다닥- 탁! 마지막에 엔터를 치고 곧바로 전송 버튼을 누른 뒤 노트북을 들고 걸음을 재촉했다. 바빠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녀의 뒤를 쫓아 회의실로 들어가니 다른 기획부 팀장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네 하고 웃어 주는 오팀장과 아예 이민을 가지 그랬냐며 비꼬고 있는 신재식이가 나를 반겼다.

“우리 2차 아이디어 회의까지 끝낸 거 피드백 받았는데 반응 나쁘지 않아. B안으로 결정 날 거 같은데.”

헉. B안은 우리 팀에서 낸 기획이다. 입꼬리가 올라간 내 표정을 보고 신팀장이 딴청을 피우며 표정을 찌푸렸다.

“세연 팀장 내가 임원 회의록 보내 줄 테니까 읽어 보고 이번 주까지 보강해서 나한테 먼저 컨펌받아. 힘들면 다른 팀 애들 데려다 써도 되고. 두 분 다 협조해요, 오케이?”

본부장의 말에 뭐, 그러죠 하는 반응을 보인 두 팀장들의 표정이 떨떠름하다. 기수로 따지면 내가 한참 후배인데 만약 이대로 우리 팀이 내년 신상품을 리드하게 되면 나머지는 꼼짝없이 서브로 1년을 일해야 한다. 그 마음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참, 기분이 흥했다.

“아 그리고 세연 팀장. 어제부터 가을 인턴십 시작돼서 각 부서별로 5명씩 들어왔거든. 한 명 데려가. 너무 잡일만 시키지 말고 빠릿빠릿한 애들 있으면 인사팀으로 피드백도 좀 주고.”

“네.”

귀찮게 됐다. 봄에 뽑은 신입사원들 이제서야 사고 좀 안 치나 했는데 이제는 대학생들까지 와서 설치겠구만. 짤막한 회의가 끝나고 자리를 뜨려는데 조소영 본부장이 잠깐 자기 좀 보자고 한다. 다른 팀장들이 다 나가자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며 ‘이 배신자’ 한다.

“네?”

어디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냐며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내미는데 화면에 떠 있는 것은 익명의 게시판 메시지였다.

@Suf864 : 최수 매니저 바뀜?

밑으로 내렸더니 어제 공항에서 나오고 있는 최수혁과 내가 나란히 찍힌 사진이 올라와 있었고 밑에는 팬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코멘트들이 달려 있었다.

@Doroshi : 지난번 중국 촬영 때도 데리러 옴.

@489girl : 새 매니저 간지 쩌네.

등등의 말들이 달려 있었다. 딱히 제가 투잡 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부장님.

“휴가 간다 그러더니 최수혁이랑 같이 갔어? 둘이 진짜 친하네?”

“네, 뭐… 옆집 살다 보니. 또 시간이 맞아서.”

“아니 나한테는 같이 간다 말도 안 하고, 섭섭하다 진짜. 내가 팬인 거 뻔히 알면서.”

그녀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하늘 같은 상사한테 당신이 팬인 그 남자 나랑 사귑니다 할 수도 없고, 안 친하다고 거짓말하기에는 이제 증거가 너무 많고.

“다음에 또 집들이해. 알았지?”

“네? 아 네.”

집들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거면 열 번도 더 하겠다 싶었다.

“됐어, 가 봐.”

남의 속도 모르고 빙그레 웃는 그녀를 뒤로한 채 회의실에서 나왔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나오자마자 회의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동재의 손에 이끌려 다음 회의실로 이동했다. 야 인마 나 숨 좀 돌리자.

“팀원들 다 내팽개치고 혼자 허니문 떠난 그 책임이 커.”

“내 호적 아직 깨끗하거든.”

“들어가.”

이동재에게 등이 떠밀려 들어간 회의실에는 5명의 앳된 얼굴들이 앉아 있었는데 뒤따라 들어온 이동재를 보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여기 기획부 3팀을 맡고 계신 정세연 팀장님, 어제까지 휴가셔서 단체로 소개할 때 빠지셨어요.”

뭐냐 하는 표정으로 내가 쳐다보니 이동재가 인턴십 대학생들이라고 그제야 말을 해 준다. 아, 아까 본부장이 말한 애들이구만.

“네, 안녕하세요. 정세연입니다. 한 달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음? 분위기가 이상한데. 나는 분명히 정중하게 인사를 했는데 모두들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아무리 철부지들이라도 상대가 이렇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으면 ‘네 잘 부탁드려요’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잘생겼죠, 우리 팀장님이 좀. 하하하.”

동재가 웃자 그제야 얼어 있던 다섯 명이 어떡해 어떡해 하며 손을 모으며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4명의 여학생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던 남학생 한 명만 호기롭게 ‘안녕하십니까, 김기현이라고 합니다’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야, 우리 팀은 무조건 저 남학생으로 해라.”

이동재에게 조용히 속삭인 뒤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이건 결단코 성차별이나 그런 게 아니다. 이미 봄에 한차례 신입사원 시즌을 치러 낸 나는 정말 조용히 일만 하고 싶었다. 그래도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올해 신입사원 대시는 두 명으로 줄었었다. 한 여사원은 집으로 찾아왔었고 다른 한쪽은 술 마시고 다짜고짜 고백하고 울다가 부서 이동을 했다.

더군다나 지금 내년 신제품 아이디어가 우리 팀에서 나올 수도 있는 이 중대한 시기에 회사에서 쓸데없는 곳에 신경 쓸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자리로 걸어가는 도중 주머니에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나 지금 나가. 야근인지 아닌지만 말해. 맞춰서 들어갈게]

잠시 생각했다. 시차 때문에 졸려서 제정신이 아닌데 야근까지 하면 후유증이 심할 것 같았다.

[8시쯤 퇴근하려고. 우리 집 엉망이니까 니네 집에서 잘게]

[그래. 하루가 길다]

녀석의 문자에 씨익 웃음이 났다. 어제까지 쭉 같이 있어 놓고 이런 낯간지러운 얘기를 하다니. 나도 모르게 광대뼈가 승천한 채 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폭풍 같은 이메일 쳐 내기에 돌입했다. 지금 당장 답장이 어려운 것들은 중요 메일함에 다시 넣어 둔 채 내가 업무에 복귀했음을 상대에게 빨리 알렸다. 너무 집중한 탓이었는지 1시간이 훌쩍 지나고 12시가 다 되었다. 이동재가 밥 먹을 때가 되었다고 알렸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본부장이 말했던 임원 회의록이 날아왔다. 오늘 8시에 퇴근하려면 지금 바로 시작해야 했다.

회의록으로 추려 낸 피드백을 정리하고 팀원들에게 맡길 태스크 테이블을 만들었다. 다 끝내고 보니 인턴 생각이 나서 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적당히 간단한 업무를 넣어 주고 단체 메일 전송을 눌렀다.

대충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하에서 파는 도시락이라도 일단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먼저 로비에 내렸다. 거기서 다시 지하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팀장님’ 하고 누군가 불렀다. 호기롭게 자기소개를 했던 인턴 남학생이 달려와 아는 척을 했다.

“점심 먹고 오는 길이에요?”

“네, 아직 안 하셨어요?”

“이제 하려구요. 커피 마실래요?”

“아, 네!”

같이 점심을 먹고 올라온 인턴 학생들이 대충 다섯 명은 되는 거 같아서 아예 카드를 주고 나중에 가져오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는 학생들 속에서 이질감이 드는 대사가 섞여 들렸다. 뭐라고? 형?

“형! 저 지환이에요!”

인턴들 사이에서 불쑥 나타난 키 큰 남학생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누구?”

“저요 저! 허지환! 강동대학교 경영학부 3학년!”

아… 500크로나.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이 자식이 웃기는 게 ‘스웨덴에서 돈 빌려주셨던 그 대학생이요’도 아니고 지 이름 석 자와 학교 이름을 내가 어떻게 외웠을 거라고 애당초 설명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쪽도 인턴이에요?”

“네! 형 루신 그룹 다니세요? 와, 대박! 우리 인연 쩐다 그죠!”

나를 자꾸 형이라고 지칭하며 함부로 인연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 남학생의 패기에 나도 모르게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자신은 마케팅 팀 인턴으로 들어왔다며, 형이 기획부 팀장인 줄 알았으면 기획부로 지원할걸 그랬다며, 한 달도 전에 나온 결과를 가지고 제 탓을 했다. 타임라인 완전히 틀렸거든 이놈아?

“허지환씨, 여기 회사니까 사적인 호칭은 삼가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럼 같이 마시고 올라오세요.”

나는 옆에 서 있는 김기현을 향해 눈짓을 주었고 내 뜻을 알아들었는지 그가 자신의 동기 입을 막고 커피숍으로 끌고 들어갔다.

도시락을 사러 가는 길에 나는 그나마 조금 안심했다. 마케팅 팀 인턴십은 빡세다. 일단 일 자체가 빡세고 인턴이 할 수 있는 잡일도 많고 무엇보다 거기 수장이 매우 빡센 놈이다. 인턴 이틀째라 아직 팔팔한가 본데 시베리아 칼바람을 좀 맞아 보면 정신을 차리겠지 싶었다.

…라고 생각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우리 팀 김기현 대신 내 카드를 돌려주러 온 허지환이 지금 내 앞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다.

“잘 마셨습니다. 정세연! 팀장님.”

동기에게서 내 이름을 전해 들었는지 직급에 또박또박 성명까지 붙여서 부른다. ‘네, 가 보세요.’ 하고 다시 일에 집중하려는데 요 녀석이 갑자기 오늘 저녁 시간 되냐고 물었다.

“시간도 안 되지만 사유가 뭔가요?”

“아, 돈 갚아 드려야 하는데 그냥은 제가 너무 죄송스러워서 식사 대접하려구요.”

“뭐, 이제 보니 모르는 사람한테 쓴 돈도 아닌 게 됐고 하니 잊어버리세요. 밥은 먹은 거로 하고. 내가 스물세 살짜리한테 밥 얻어먹을 군번도 아니고.”

“스물넷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가 보세요.”

“아 그래도….”

“팀장님 저희 회의….”

“어, 들어가자.”

허지환이 다시 뭔가를 말하려던 차에 김시은이 끼어들었다. 팀 회의가 있는데 이 호기로운 대학생 하나 때문에 아까부터 다들 이동하지 못하고 단체로 서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이동재는 재밌다고 낄낄거리고 있었고, 보다 못한 김시은이 눈치를 준 것이다. 자신의 동기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김기현도 오늘 아침 IT실에서 부여받은 새 노트북을 들고 우리 뒤를 따라왔다.

“메일 받았지 다들?”

회의실에 앉자마자 아까 단체로 보낸 태스크 테이블 이야기를 꺼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는데 김기현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일 안 갔어요? 이대리, 김기현 인턴 메일 주소도 우리 팀으로 그룹핑 해 줘.”

“네이-”

“아 그리고 나는 팀원들한테 반말하는데 혹시 인턴으로서 불편해요?”

“아닙니다. 친근하고 좋은데요. 저한테도 반말하셔도 됩니다.”

“시원시원하네. 야 이거 누가 화면 좀 띄워 주라.”

디스플레이 코드 가까이에 있던 팀원 중 한 명이 내가 메일로 보내 준 엑셀 파일을 화면에 띄웠다. 갑자기 왜 아이디어 수정에 들어가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고 있던 팀원들은 우리 팀 아이디어가 내년 신제품 라인으로 채택될지도 모른다는 뉴스에 다들 소리를 질렀다. 회의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출발했다.

***

졸렸다. 억지로 몸을 움직인 탓인지 시차 감각이 저세상으로 가 있었고 집까지 운전해 들어오는 것도 힘들었다. 운동을 해야 하나. 요즘 들어 체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실감했다.

우리 집을 지나쳐 최수혁의 집으로 직행했다. 녀석도 피곤한지 시체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다. 그 위로 올라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씻고 그냥 자자’ 했다.

니가 먼저 씻으러 가면 내가 나중에 가겠다, 아니다 니가 먼저 일어나야 밑에 깔린 내가 일어나지 순서가 바뀌었다 하며 서로 먼저 행동 개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다 둘 다 나무늘보처럼 늘어져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윙-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주제넘게 굴었습니다.]

[반성하고 앞으로 회사에서는 조심하겠습니다.]

그렇다고 뭘 또 사과까지 하고 그러냐 이 시간에.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최수혁이 회사? 하며 물었다.

그 500크로나 있잖아. 내 말에 녀석이 조금 생각하다 응 하고 기억을 더듬어 냈다. 우리 회사 인턴으로 들어왔다고 말하고 휴대폰을 그대로 녀석의 얼굴에 가져다 대 주었다.

“다 읽었어?”

“응. 너한테 관심 있나 본데.”

“그런 건 아니야. 그리고 얘 디게 멀쩡하게 생겼어.”

“난 멀쩡하게 생긴 게 아니었나 보지?”

“너는 음… 멀쩡하게 생긴 정도가 아니라 미쳤지, 외모가.”

고개를 들어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반쯤 내려 뜬 눈동자가 나를 바로 보고 있었다. 이 코 봐라, 예술품이다 진짜.

“내가 보기엔 정세연한테 첫눈에 반한 초기 증상으로 보이는데. 처음엔 호기심, 그다음엔 안달 나는 단계.”

“그거 너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야?”

“그럼 내가 그냥 미친놈이라서 회사까지 찾아간 거라고 생각했나?”

“응.”

너라면 그러고도 남지. 내가 아는 미친놈 중 가장 잘생기고 제대로 정신 나간 놈.

다시 얼굴을 묻었다. 세상 귀찮고 다 피곤했다. 최수혁 향수 냄새 너무 좋다. 지금 내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는 긴 손가락도 너무 좋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 녀석이 깨우는 바람에 밤 12시쯤 몸을 일으켜 옷만 벗고 다시 침대로 쓰러졌다.

다음 날 스케줄이 없는 최수혁은 늦게까지 잠을 잤고 출근하기 전 짧은 대화로 점심 약속을 잡았다. 오늘은 도시락 안 먹어도 되겠군 싶어 좋았고 대낮에 쌔끈한 최수혁을 만나는 건 더 좋았다.

팀원들과 상의 끝에 가능한 야근을 줄이는 쪽으로 다음 주까지만 타이트하게 한번 달려 보는 거로 결정했다. 출근을 좀 당기고 업무의 우선순위 조정을 했다. 일단 본부장 컨펌이 중요하니까 한 번에 통과하고 싶었다. 2차 수정 3차 수정 질질 끌면서 봤던 기획안 또 보고 또 보고 하는 건 내 스타일과도 맞지 않고. 마침 김기현이 전공이 통계학과였다. 그 어렵다는 통계학을 마스터하신 인턴님의 스킬을 빌려 엑셀 테이블은 모조리 그쪽으로 넘겼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사내 메신저가 울렸다. 프로필 사진도 없는 대화창이 뜨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 그놈이었다.

[팀장님 점심 같이하실래요?]

아무래도 우리 팀에 스파이가 있는 게 확실하다. 그게 아니고서야 회의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메시지가 온다는 것은 보통 타이밍이 아닌데 이거.

김기현이 쪽을 슬쩍 째려보니 녀석은 1년 차 막내에게 업무 지도를 받느라 정신이 없어 보인다. 김시은이? 슥 쳐다보니 이쪽도 이동재랑 내가 지시한 파트 분장으로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들어 파티션 너머로 쳐다보니 기다란 물체 하나가 쓱 밑으로 내려갔다. 이거 참… 아예 후배면 조지기라도 하는데 떠날 사람이다 보니 다루기가 더 어렵다.

[점심 약속 있습니다.]

[누구랑요? 저도 같이하면 안 될까요?]

[애인이 회사로 오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업무 시간에 쓸데없는 메시지 보내는 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고요해졌다. 역시 그런 건가? 골키퍼 있음을 알리는 것이 유효하게 먹히는 걸 보니 최수혁의 짐작이 맞는 건가 싶었다. 메신저 창을 닫고 다시 이메일을 열었다.

***

내 말을 들은 최수혁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자기가 신경 써야 할 정도인지를 물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네버 라고 대답해 줬다.

“애야 애. 군대도 안 다녀온 애. 것도 한 달 있음 갈 애고.”

“정직원으로 뽑히면.”

“안 뽑을 거야. 내가 그쪽 팀장 잘 알아, 그런 댕댕이처럼 일하는 애 싫어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내 말에 녀석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너나 잘해. 스캔들이나 내지 말고.”

최수혁이 이번 영화를 같이 찍은 여배우와 또 스캔들이 났다. 같이 밥 한 번 먹은 적도 없는데 매번 이런 식이라며 녀석이 짜증을 냈다. 이쯤 되면 여배우 쪽에서 일부러 흘리는 건지, 아님 제작사 쪽에서 노이즈 마케팅을 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최수혁은 촬영 스케줄만으로도 정말 바빴고 남는 시간은 무조건 집으로 귀가했다. 집에서는 나하고 하루 종일 섹스했고 밖에서는 무조건 나하고 밥을 먹었다. 그 외의 시간은 수면을 보충하기 바빴고 다른 누굴 만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저녁은?”

“회식 있어. 조금 늦을 거야.”

“금요일인데.”

“금요일이니까.”

녀석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을 마셨다.

“그럼 나도 오랜만에 친구들 좀 만날까.”

“니가 친구들이 있었어?”

녀석이 웃었다. 안다 그래. 존나 많겠지. 나 때문에 외면하고 살았던 인간관계나 좀 풀고 와라.

촉박한 내 시간으로 인해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웨덴에서 내가 제대로 맘 상한 걸 알았는지 요즘은 계속 내가 계산을 하게끔 두고 있다. 카드 결제를 끝내고 나오는데 옆에서 다음 계산을 기다리던 사람 목에 걸린 익숙한 사원증이 눈에 띄었다. 신분을 감춘 나는 얼른 자리를 떴고 최수혁은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고 주차장으로 곧장 향했다.

***

금요일 5시 회의는 항상 고되다. 마음이 이미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집중하며 회의 진행이 잘 되지 않는다. 팀원들의 노트북 화면을 힐끔 쳐다보니 이미 온갖 SNS 메신저들이 켜져 있고 그 위에서 타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이동재의 PPT 설명을 들으며 혼자 회의록 작성에 고군분투 중인 김기현을 보았다.

“이대리, 말이 너무 빠르다. KPI가 뭔지 설명도 좀 해 주고.”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하고 있는 이동재의 입을 멈추고 김기현을 살려 주기로 결심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우리 인턴께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심호흡을 다시 하더니 키보드 위의 손을 움직였다.

“아니 키 퍼포먼스라고. Key Performance Indicator.”

김기현이 작성중인 엉망진창 회의록을 보면서 천천히 다시 발음해 주었다.

“팀장님 발음 쩌네요.”

“닥치세요, 이동재 대리.”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의가 드디어 마무리되었다. 왠지 모르게 자신도 사회인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는지 회의실을 나가는 김기현의 발걸음이 유독 쾌활해 보였다.

“팀장님도 오늘 회식 오시나요?”

그랬다. 오늘 회식은 인턴들의 환영회 겸 3분기의 시작을 알리는 고현성 상무님 주최의 회식이었다. 빅보스가 마련한 회식에 승진에 눈이 먼 내가 빠질 리 없었다. 이미 메신저로 조소영 본부장이 나에게 미션을 부여했다. 오늘 상무님이 10시 이후까지 남아 계신다면 그건 다 정세연 니 탓이라고.

결연하게 데스크를 정리하고 팀원들에게 빨리 회식 장소로 이동하라고 재촉했다.

기획부, 홍보부, 총무실, 비서실까지 인턴을 합쳐 백 명이 넘는 사원들이 모였다. 고깃집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더니 진짜였다. 1년에 한두 번 있는 큰 회식이다. 사원급들은 공짜로 먹는 소고기에 신이 났고 관리직들은 한두 명씩 모습을 드러내는 임원급들 때문에 제대로 앉아 있을 틈이 없었다.

“어어, 앉아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신경 쓰지 말라지만 진짜 신경 안 쓰면 존나 승질낼 거면서 말만 저렇게 한다. 한번 달리면 말술로 달리는 고현성 상무가 각을 잡고 잔을 돌렸다.

“정팀장, 승진하고 처음이네?”

“넵, 상무님. 감사합니다.”

두 손 받쳐 술을 받은 내가 그대로 원샷을 당겼다.

“기획서 잘 봤어요. 조소영 본부장이 밀어주는 이유가 다 있구만.”

이런 자리 아니면 임원급에게서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기가 힘들다. 또다시 입꼬리가 올라간 나를 보며 신재식이가 혼자 술잔을 비웠다. 오늘 회식이 참으로 만족스럽군.

자리가 자리인지라 벌써 열 잔쯤 비웠는데도 취하지가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마주친 이동재에게 팔이 끌려 팀원들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맛있냐.”

나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술만 비운 탓에 이 테이블에서 굽고 있는 차돌박이가 맛있어 보인다. 고생이 많다며 김시은이가 내 앞으로 다 구운 고기를 수북이 쌓아 준다.

“니네 많이 먹어라. 오늘 고상무 기분이 꽤 좋아 보이더라. 속도를 보니 금방 집에 갈 거 같아. 우리 인턴도 많이 먹어.”

“넵.”

어느새 와이셔츠에 고기 냄새가 뱄다. 집에 가면 잔소리할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정세연 팀장님.”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혔다. 아니나 다를까 뒤쪽에서 허지환이 술잔을 들고 우리 테이블로 왔다.

“팀장님 제가 주제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한 잔 받으세요.”

의외로 담담하게 개념 찬 말을 내뱉더니 맥주병을 나에게 향했다. 빈 맥주잔을 들고 술을 받았다. 그래 새끼야, 정신 차려라.

“왜요? 마케팅 인턴이 팀장님한테 까불었어요?”

전후 사정을 모르는 2년 차 팀원이 고기를 입에 넣으며 물어보았다.

“네, 제가 정세연 팀장님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실례를 좀 했습니다. 여자친구 분이랑 점심 맛있게 드셨어요?”

“잉? 우리 팀장님 솔로 생활 1년 넘었는데? 팀장님 언제 여친 생겼어요?”

“뭐야, 세연 팀장 여친 생겼어요? 그제까지만 해도 솔로라며.”

반대편 테이블에서 등을 보이던 박건희 팀장까지 고개를 들고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맥주를 마시던 내 목울대에서 꿀꺽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고기를 굽고 있던 김시은의 손이 스톱모션처럼 느려졌고 폭탄주를 말고 있던 이동재의 손에서 맥주가 흘러넘쳤다.

“어, 대리님. 넘치는데요!”

그래도 나랑 가장 오래 해먹은 이동재가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여… 친… 생겼지. 어, 생겼잖아. 며칠 안 됐지? 그지?”

동재가 김시은을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지글지글 타고 있던 고기를 다시 뒤집은 김시은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그렇죠, 계속 썸 타다가 사귄 지는 며칠 안 됐죠.

“뭐야, 빅뉴스잖아. 기획부 정세연 팀장 드디어 임자 생긴 거야? 사진 좀 보여 줘요. 얼마나 이쁜가 보게.”

야 이 새끼야. 박건희 팀장에게 쌍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이 눈치 없는 대형견을 죽도록 패고 싶었다. 미리 말해 둘 걸 괜히 나까지 커밍아웃하기 싫어서 도도한 척 굴었다가 심하게 뒤통수를 맞고 있었다.

“어… 디게 이뻐요. 그지?”

“네, 저도 봤어요. 그… 무용하신다고 하셨나? 그죠?”

이동재와 김시은이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만담을 이어 나갔다. 사전에 짠 시나리오가 없는 탓에 한 명이 애드립 치면 다른 한 명이 즉석에서 받은 뒤 다시 애드립으로 이어 나가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다.

허지환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았다. 좀 굳어 있는 거 같은데. 하긴 강동대 경영학부 정도면 머리도 엔간히 좋은 편이 아닐 텐데 이런 어설픈 연기에 넘어갈 리가 있나. 시바 나도 모르겠다.

그냥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하고 고기만 주워 먹었다. 순간 갑분싸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허지환은 자신의 잔을 들고 다시 마케팅 테이블로 돌아갔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우리 테이블에는 영문을 모르는 2년 차 팀원이 나와 이동재 그리고 김시은을 빠르게 훑었다. 제가 뭐 실수했나요? 하는 녀석에게 아니다 많이 먹어라 하며 김시은이 선배의 아량을 베풀었다.

때마침 나를 부르는 조소영 본부장의 부름에 나는 자연스레 테이블에서 빠졌고 고상무의 기분을 맞추며 으쌰 으쌰 달린 덕에 9시 50분쯤에 대리기사를 부르는 데 성공했다.

2차로 노래방을 가자는 둥 헛소리를 하는 신재식을 무시하고 가게 밖으로 나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아까부터 문자가 와 있었는데 답장을 못한 터라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회식이야?

“응, 근데 거의 마무리.”

-나 청담동에 있는데 이쪽으로 넘어올 수 있어?

“친구들이랑 있다며.”

-그래서 다들 너 보고 싶어 하네.

친구들이 참으로 프로그레시브 하구나… 나는 저기서 내내 남자 애인 없는 척을 하느라 진이 다 빠졌는데 녀석의 친구들은 대체 어느 별에서 오신 분들인지 궁금해졌다.

“주소 찍어 줘.”

30분 정도면 빠져나오는 데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상무가 집으로 돌아가자 회식 분위기는 금세 흐지부지해졌고 2차로 달릴 사람들만 자유 의지로 남고 나머지는 모두 택시를 탔다. 10분 정도 더 기다리니 대리기사가 도착했다. 주소를 말해 주고 뒷좌석에 올랐다.

“집으로 안 가시네요? 하긴 금요일이죠 허허허.”

내비게이션에 나온 주소를 파악한 대리기사가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술에 취한 건 아닌데 좀 피곤했다. 아직 시차 적응 중인 듯 졸리기도 했다. 쓰러져도 최수혁 옆에서 쓰러지면 별 탈이 없다 싶어 뒷좌석에 몸을 뉘었다. 잠깐 잠들었나 했는데 대리기사가 ‘손님’ 하는 통에 벌떡 일어났다.

만원을 더 얹어 주었다. 이놈의 팁 주는 버릇 좀 고쳐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항상 손이 나간다.

간판도 없는 철문이다. 아주 작은 글씨로 ‘The Room’이라는 상호명이 보였다. 문을 열고 지하로 내려가니 잘생긴 스텝 한 명이 나를 반겼다. 일행이 있냐고 물어 왔다. 잠시 고민 끝에 녀석의 본명을 대자 웃으며 안내하겠다고 앞장을 섰다.

스텝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여자 둘, 남자 셋. 그리고 가운데 최수혁이 앉아 있었다. 연예계에 통 관심이 없는 나도 앉아 있는 대부분의 얼굴들을 보고는 곧바로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술이 좀 취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희가 뵙고 싶다고 졸랐어요. 실례 아니죠?”

TV로 보던 이미지와 별다른 바 없는 미소를 지은 남자 배우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거기에 맞춰 인사를 해 주고 최수혁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얼마나 마셨냐는 녀석의 속삭임에 한 병 정도라고 안심시켰다. 그래도 더 마시지는 말라며 양주잔을 치웠다.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을 보니 반가워 단번에 비워 냈다.

“나는 인정. 과연 수혁이가 난리 칠 정도의 미남이시다.”

아이돌 그룹 출신의 여배우가 호탕하게 웃으며 혼자 술잔을 비웠다. 내가 기분 나쁠까 봐 배려하고 싶었던지 옆에 있던 다른 여배우가 천천히 설명을 해 줬다. 동갑내기 배우들 모임이고 5년 넘게 이어져 왔는데 몇 달 전부터 녀석이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자꾸 빠지기 시작했단다.

오늘 오랜만에 모임을 주도한 최수혁이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고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해서 모두가 스무고개를 했는데 성별이 여자로 출발한 탓에 아무도 못 맞췄단다. 분노한 친구들이 애인 얼굴 좀 보자며 재촉했고 숨길 것 없는 최수혁이 내게 연락을 한 스토리 되겠다.

“와… 눈동자가 진짜 매력적이시다.”

구석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던 남자 배우가 몸을 일으키며 처음으로 입을 뗐다. 요즘 연예계 뉴스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이다. 이 사람만큼은 내가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는 썰로 모두에게 한번 자랑해 보고 싶었다.

이 정도 급의 연예인들이 모이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궁금했는데 우리와 별반 다른 바가 없었다. 가족 이야기, 연인 이야기, 재테크 이야기.

어쩌다 보니 회사 이름이 나와 버린 탓에 조금 곤란한 상황이 왔다. 우리 회사 주식을 사 모으던 배우 한 명이 자꾸 기밀 유출을 유도해서 진땀도 뺐다. 상반기 실적이 이미 목표치를 넘었다. 내가 이번에 승진을 한 이유이기도 했고 고현성 상무가 내 이름을 언급하며 술을 따라 준 이유이기도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IR 페이지를 보시면 된다는 표면적인 이야기를 하며 웃어넘겼다. 생각보다 편안한 자리였고 그리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둘 다 대리기사를 불러 집으로 향했다. 졸지에 같은 곳에 손님을 내려 주게 된 대리기사 두 분께 사이좋게 택시를 타고 가시면 되겠다며 5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

주말 내내 못다 한 여행의 여정을 푸느라 집 밖에 나가지 못했다. 컨디션이 완전히 제자리를 찾았고 엄마에게 잘 다녀왔다는 안부도 전했다.

아버지가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수혁이에게도 안부 전해라 하는 엄마의 오지랖에도 별다른 코멘트가 없는 걸 보니 두 분이서 이미 여러 번 합의를 거치신 것 같았다.

고모는 15년 만에 다시 보는 거로 하고 하나뿐인 아들도 계속 보는 방향으로 말이다.

일주일 정도 고요한 일상이 찾아왔다. 가끔 후시 녹음을 하러 가는 정도의 스케줄만 잡히는 최수혁의 일상은 평화로웠고 팀워크로 똘똘 뭉친 기획부 3팀의 성과는 매우 좋았다. 한 번에 조소영 본부장의 오케이를 받아 낸 기획안은 곧바로 임원 회의로 올라갔다. 3팀은 설레임으로 긴장되었고 1팀과 2팀은 불안함과 초조함에 떨어야 했다.

“동재야.”

“어.”

직급이 아닌 이름으로 부를 때 나는 형이고 이동재는 그냥 후배다. 녀석이 내 자리로 고개를 쭉 내밀며 내가 가리킨 조소영 본부장의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이거 같지?”

“그르네, 딱 그르네.”

두 시간 연속으로 잡힌 비밀회의. 참가자를 알 수 없는 상태창을 보고 느낌이 와서 고현성 상무와 기타 임원들의 스케줄도 확인했는데 똑같은 시간에 잡혀 있다.

내일이로군. 아 씨 너무 궁금해서 회의실에 도청 장치라도 달아 놓고 싶었다.

우리는 눈빛을 주고받으며 내일까지 어떻게 참지 하며 다리를 떨었다. 데스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 내 스케줄표를 다시 확인하고는 초조하게 다시 다리를 떨었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고 쓰읍 마른세수를 하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팀장님.”

“어.”

반사적으로 대답한 나는 두리번거리며 부른 사람을 찾았다. 김기현이 말똥말똥 눈망울을 밝히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순했다. 할 일이 없단다.

“아… 그래. 그렇겠네.”

수정된 기획안이 올라가고 나니 다들 원래 하던 업무에 복귀했고, 원래 하던 업무가 없는 인턴만 하루 종일 앉아서 아무것도 오지 않는 메일함만 새로고침 중이었다.

팀원의 일을 만들어 주는 것도 팀장의 일이다. 나를 따라오도록. 영문도 모르고 쭐레쭐레 따라오는 김기현을 데리고 파티션 두 개를 넘었다.

“박건희 팀장님.”

허스키가 구석탱이에서 얼굴을 쑥 내밀었다. 우리 인턴 일 좀 시켜 주십쇼. 나의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돈 박팀장이 그래 거기 앉아 하며 김기현을 반겼다. 큰 테이블 위에서 이벤트용 샘플을 분류하던 또 다른 인턴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리고 그 옆에서 묵묵히 일하던 허지환은 나를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그럼 수고.”

허지환이 말을 걸까 두려워 얼른 자리를 떴다. 오랜만에 여유가 좀 생겼으니 칼퇴라는 걸 좀 해 봐야겠다. 회의도 없는 조용한 오후를 마무리하고 나는 일찍 자리를 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조소영.

지금 시각은 6시 반이다. 이 시간에 이 이름이 뜬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세연 팀장 나 좀 도와주라.’ 아니면, ‘정세연 당장 튀어 올라와.’이다. 받아 보니 이미 첫 마디가 앙칼지다. 후자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그녀가 있는 동쪽 윙으로 몸을 돌렸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네, 때리십쇼. 뭐가 문젭니까.

“야, 이거 숫자 누가 냈어. 예상 매출액 다 틀렸잖아. 이대로 임원회의 올렸으면 어쩔 뻔했어. 누구 개망신 시키려고 작정한 거야?”

아씨… 인턴님의 전공을 너무 믿은 내 죄가 컸다. 더블 체크 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동재 이것도 대충 봤구만.

“요즘 내가 좀 잘 봐줬다고 일 대충 하지, 정세연. 밑에 애들 올리는 거 체크도 안 하고 나한테 막 올리지?”

아니, 이거 며칠 전 분명 본부장님이 직접 확인하고 오케이한 거 아닙니까? 라고 튀어나오는 말을 꾹꾹 눌러 참고 죄송하다고 사죄했다.

“내일 나 출근할 때까지 싹 고쳐 놔. 시간 없어.”

그녀의 회의 스케줄까지 확인한 터라 시간이 없다는 말에는 동의했다. 곧바로 내 자리로 달려갔다. 총액은 내가 계산해서 내려 준 것이니까 틀릴 리가 없고 브레이크 다운 해 둔 테이블들이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칼퇴하라고 선언하고 먼저 나온 덕에 팀원들은 이미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고 나 혼자 덩그러니 남아 모니터 전원을 눌렀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세부 사항만 다시 정리하면 될 듯했다.

시계를 보니 7시.

3시간 만에 끝내자 정세연. 숨겨져 있던 엑셀 수식들이 빼곡히 들어찬 테이블들을 불러냈다. 손가락이 바삐 움직인다.

반대편에서 같이 야근을 하던 다른 팀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자동으로 소등되는 불이 반쯤 꺼지자 사무실이 어둑해졌다. 마지막으로 고친 수식을 넣고 마우스를 굵어 총합을 더해 보니 처음 계산된 매출액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하… 시계를 보니 10시 30분. 실력 많이 죽었구나, 30분이나 오버했네. 다시 한 번 숫자를 확인하고 본부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죄송합니다라는 사죄는 한 번 더.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데자뷔처럼 또 전화가 울렸다. 뭐야, 얘는 또 왜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이번 전화의 주인공은 김시은이었다.

“왜.”

“팀장님, 정말 죄송한데요.”

“죄송하면 말하지 마.”

“아니 그게 아니고, 팀장님….”

“왜애.”

“지금 좀 이쪽으로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어딜. 왜. 뭐 하는데.”

“제가 혼자 감당이 안 되네요….”

“뭘 감당하고 있는데.”

“그게….”

김시은과 전화를 끊고 곧바로 차를 몰았다. 회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실내 포차 술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진 테이블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김시은과 술에 취해 고개를 푹 숙인 허지환이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죄송해요. 제가 알아서 잘 달래 볼려고 하다가.”

“니가 뭔데?”

순간적으로 날 선 목소리가 나가 버렸다. 짜증이 잔뜩 서린 내 표정에 김시은이 심각성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팀장님… 흐흐흑….”

허지환이 벌떡 일어났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꼬라지를 보니 다시 콧잔등이 찌푸려졌다.

“제가… 흑흑… 제가 너무 괴로워서 시은 선배님한테 흑흑… 팀장님 여자친구 흑흑… 거짓말 아니냐고 흑.”

아이 시발 진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일단 앉았다. 제발 자기 말 좀 들어 달라며 계속 울면서 보채는 통에 다른 테이블 보기 부끄러워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얼마나 마셨냐고 하니 겨우 소주 3잔이란다. 에라이…

“제가요, 그때도! 그때 스웨덴에서 뵈었을 때도!”

김시은이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자기는 벌써 다섯 번째 듣는 얘기란다. 뭘? 하고 되물으니 일단 들어 보시란다.

“돈도 뺏기고! 휴대폰도 뺏기고! 하… 꼼짝없이 여기서 나는 굶어 죽겠구나 했는데. 그때 딱! 누군가 보였어요. 그게 바로!”

“그래, 정세연 팀장님.”

“아니요! 그때는 형이였죠. 그때는 웬 잘생긴 형이 시크하게 돈도 주시고. 휴대폰도 빌려주시고. 돈 뺏긴 내 마음을 달래 주시려고 위로도 해 주시고.”

굳이 너를 위로하고자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서 일단! 거기서 첫눈에 반했습니다. 네에! 드러운 놈이라고 저를! 욕하셔도 할 수 없어요. 저는 원래! 남자 좋아합니다.”

하오… 김시은과 나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이 와중에 묻지도 않았는데 커밍아웃까지 하냐. 옆 테이블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용기 내서 연락을 드렸는데 딱! 거절하셨어요. 너무 차갑게… 그래서 잊자. 그래 그날 밤 내가 뭐에 홀렸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선배님, 네? 제가 이미 한 번 포기를 했었다구요, 선배님.”

“그래 그래, 포기를 했는데 인턴 둘째 날 딱 하고 니 눈앞에 나타났다고.”

“그르쵸! 남자답게 잊었는데 운명처럼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나셨어요. 일주일 만에 그것도 무려 팀장님으로.”

나 이거 얼마나 더 들어야 돼? 김시은에게 속삭이듯 묻자 이제 반 끝났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아… 이게 인연이구나. 24년 인생에서 처음 느껴 보는 운명이라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밥도 못 먹고 야근을 했던 탓인지 테이블에 놓인 어묵탕에 눈길이 갔다. 말없이 수저를 건네준 김시은이 이거 좀 데워 주세요 하며 종업원을 불렀다.

“그래서! 이미 한 번 들이댔는데 두 번 못 들이대겠나 싶어 막 친한 척을 했습니다! 이미 우리 동기들 반이 우리 팀장님을 흠모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저들과는 다르다. 나는 팀장님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그렇게 생각했었스흐흐흐흑….”

야 다시 운다. 휴지 줘라. 김시은이 휴지를 뽑아 댕댕이에게 건넸다.

“근데… 팀장님이… 여자친구 있다고 하셔서 흑흑… 그래서 그럼 헤어지신 다음에 다시 들이대려고 했는데 흐흐흑….”

뭐야 시발 그런 거였어? 골키퍼 있다고 포기한 게 아니고? 이 새끼 진짜 신박한 놈이네?

“그게… 그게… 거짓말이었다니… 제가 얼마나 귀찮으셨으면… 없는 여친 있다고 흑흑… 거짓말까지 하시고… 흑흑….”

따뜻하게 데워진 어묵탕이 테이블 위에 돌아왔다. 계란 하나와 무우 한 조각, 어묵 한 조각을 그릇에 덜어서 먹기 시작했다. 식욕이 돌았다. 야 오돌뼈 좀 시켜 봐라. 김시은이 저기요 하며 다시 손을 들었다.

“그렇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남자새끼여서 드럽고 토 나오신다고 하셔도! 제가, 제가 팀장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푹- 하고 먹던 어묵이 그릇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다섯 번째 듣는 얘기인데도 적응이 안 되는지 김시은도 웃음을 참느라 휴지를 뽑았다. 그렇게 혼자 다시 울다가 다시 다짐했다가 또 우는소리를 했다.

어차피 내일 되면 기억도 못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댕댕이가 짖게 놔둔 채 나는 열심히 안주를 집어 먹었다.

30분쯤 지나니 개소리가 잦아들었다. 고개가 푹 숙여지더니 자는 건지 말이 없었다. 공깃밥까지 시켜 한 끼를 든든하게 먹은 나는 계산을 하고 김시은과 함께 댕댕이를 부축했다. 키만 멀대같이 큰 놈을 뒷좌석에 쓰러트리고 김시은이 조수석에 올랐다.

“죄송합니다. 제가 괜히 일을 더 키운 거 같아요.”

“하이고… 뭐, 괜찮아. 너도 챙기려고 한 건데 뭐. 고맙다.”

“팀장님 인생 너무 고달프시네요.”

“요즘 좀 그러네.”

다시 말하지만 몇 달 전부터 하나를 해결하니 다른 하나가 터지는 일상이 쭉 반복되고 있었다.

김시은을 먼저 내려 주고 자고 있는 허지환이를 깨워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축축이 젖은 눈망울로 나를 보더니 ‘우리 집’이라고 마크된 맵을 띄워 휴대폰을 내밀었다. 이 새끼 이거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구만 그래.

그나마 우리 집과 크게 멀지 않았던 탓에 짜증은 덜 났다. 사태 파악을 한 건지 술에서 깬 채로 조용히 뒷좌석에 앉아 있던 놈은 자기네 동네를 발견하고는 유령처럼 가방과 옷을 챙겨 내렸다. 감사합니다 하고 작은 목소리만 남았다.

“허지환씨.”

창문을 열어 집으로 가려던 놈을 불러 세웠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어요. 내일 출근 늦지 않게 하세요. 오늘 못 본 걸로 할 테니까.”

그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네… 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힘없이 걸어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차를 돌렸다. 사이드미러 너머로 우두커니 서서 이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놈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2주만 더 참자 싶었다.

***

집에서 내 얘기를 다 들은 최수혁의 기분이 매우, 아주 드럽게 나빠졌다. 당연히 1차적으로는 인턴에게 화가 났고 2차적으로는 나에게 화가 난 듯했다. 그걸 왜 받아 주고 있었냐는 것이 주된 이유였고 뭐 잘했다고 집까지 태워다 주었냐는게 부수적인 이유였다.

“그럼 어떡해. 회사에서 계속 얼굴 봐야 하는데. 아예 내부 사람처럼 막 굴릴 수도 없고.”

“시발… 사표 쓰라 할 수도 없고 진짜.”

녀석이 재킷을 벗어 던지며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들이켠다. 빈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던지더니 나를 지나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성질머리를 마음껏 드러낸 최수혁의 짜증이 만레벨까지 치솟았다. 이제는 김시은이 한테까지 불똥이 튀어 그 여자가 오지랖 부리다 일을 더 망치고 있다며 온갖 화를 다 내었다.

“그만해라. 내가 더 미치겠거든.”

“한 번만 더 술 먹고 불러내면 나한테 얘기해.”

“너한테 얘기하면?”

“니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들이받을 거야.”

아 무섭다. 최수혁이라면 대놓고 내가 이 새끼 애인인데 너 누구냐고 동네방네 떠들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니가 처신을 더 똑바로 하라는 마지막 말에는 진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많이 억울하다. 이 이상 내가 얼마나 더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하냐. 둘 다 입이 댓발로 나온 탓에 오랜만에 섹스 없이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출근하는데 괜히 긴장이 되었다. 웬만하면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파티션을 빙 둘러 왔다. 탕비실로 가던 문제의 2년 차 팀원이 왜 그쪽에서 출근을 하냐며 물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네? 제가요?”

영문을 모르는 팀원이 나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아니다, 녹차 많이 마셔라 하며 지나쳤다. 먼저 출근해 있던 김시은이 괜찮으시냐는 눈빛을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팀장님 어제 기획안 새로 올리셨어요?”

“어.”

이동재가 왜? 라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나는 어제 퇴근 후 본부장에게 대박 까인 사연과 혼자 야근으로 겨우 메꿔 넣었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전달했다.

이동재 지도 양심은 있는지 세상 미안한 표정을 하고는 ‘고생하셨습니다 팀장님’ 하며 꾸벅 인사를 했다. 90도로 허리를 숙인 이동재 뒤로 허여멀겋게 서 있던 김기현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입을 막았다. 다 들었나 보다.

“팀… 팀장님. 저 때문에….”

“괜찮아. 신경 쓸 거 없어.”

“저 때문에… 아 진짜… 죄송합니다… 아….”

“야, 이대리. 얘 데리고 1층 가서 커피 좀 사 줘라.”

나는 지쳤다. 더 이상 밑에 애들 뒤치다꺼리하다가는 사망할 거 같았다. 내 눈치를 읽은 이동재가 김기현의 등을 떠밀며 가자 가자 하며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고개를 젖히고 의자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조소영 본부장이 어제 보낸 수정안을 읽었는지 답변을 보냈다. 이메일 제일 위에 짤막하게 덧붙여진 [수고했어] 한 마디에 일단 안도를 했다. 그래도 그녀 선에서 체크가 되었기에 망정이지 임원회의 올라간 다음에 터졌다면 그 후폭풍이 끔찍했다.

리드하고 지시하는 데는 무게감이 따른다. 내가 컨펌했다는 뜻은 이 밑으로 내가 다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조소영 본부장은 그걸 실천한 것이고 나도 그대로 실천한 것뿐이다. 고마울 것도 없고 미안할 것도 없다. 휴대폰이 울렸다. 최수혁이다.

[승현이 형 만났어. 안부 전해 달래.]

[나도 안부 전해 줘. 집에서 얘기하지 웬 문자.]

[핑계 대고 연락하고 싶어서.]

화가 풀렸나 보다. 제 화도 풀고 내 화도 자연스레 풀어 주는 이런 만능 재주꾼 같으니라고.

녀석의 문자에 잠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오늘 점심 메뉴는 빌딩 앞에 새로 생긴 부대찌개로 하자는 이동재의 문자도 도착했다. 로비에서 올라오며 봤나 보네. 팀장답게 점심 메뉴를 컨펌하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했다.

오늘은 회의도 별로 없고 개인적인 태스크를 처리하는 데 적합한 날이다. 미뤄 두었던,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이메일들에 답장을 하고 사내 네트워크에 들어가 최근 업데이트된 타 부서 보고서들을 읽었다.

뜨릉-

사내 메신저의 대화창이 열리고 프로필 사진 없는 허지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팀장님. 할 말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다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돌겠네 진짜. 나의 거듭된 이상 행동에 앞에 앉아 업무를 보던 팀원들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허지환씨랑 할 말이 없어요. 업무 시간입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만요.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아 씨발! 진짜.”

팀원들이 헉 하는 표정으로 나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아차.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나 보다. 미안.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웃어 주고 타자를 쳤다.

[어디야.]

[소회의실이요…]

[기다려.]

한때 개새끼 소리 들었던 드러운 성질머리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데스크를 박차고 소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니 피골이 상접한 채 앉아 있던 허지환이 벌떡 일어났다.

문이 닫히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다른 부서에도 오늘은 회의가 거의 없어 옆 회의실도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 들어왔다.

“허지환씨. 회사가 장난처럼 보입니까.”

“아닙니다.”

“아니면 내가 우스워 보입니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여기가 무슨 CC나 만들자고 다니는 대학교 써클인 줄 아나 본데, 인턴 하기 싫습니까? 하기 싫으면 나가세요.”

“아닙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죄드리려고, 죄송하다고, 꼭 사죄를 드려야 할 거 같아서. 그래서 뵙자고 했습니다. 어제는 제가 정말 죄송했습니다. 실수했습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뭐 하자는 거야 진짜.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혼자 들이댔다가 사과했다가 또 들이댔다가 미안하다 하고. 뭐야 지금 이게.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네, 다시는 그런 일 없습니다.”

“잊으세요. 나도 다 잊을 테니까.”

“그건 안 됩니다.”

“뭐?”

“제가 사죄드리는 건 팀장님께 폐를 끼치고 있어서입니다. 다시는 티 내지 않고, 술 마시고 주정도 부리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잊으… 잊으라는 건… 너무하시는 거 같습니다.”

“뭘 너무해.”

“제가… 제가 남자라서 어이없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저는 진심입니다.”

“나 애인 있다고 하잖아요.”

“거짓말이시잖아요….”

“아니라고, 진짜 있다니까.”

“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냥 저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뭘 감당해.”

“팀장님에 대한 제 감정이요. 그건 제 마음이잖아요.”

아 나 미치겠네 진짜.

“그만해.”

“팀장님….”

“그만하라고 했습니다.”

“팀장님 좋아합니다.”

“그런 얘기는 굳이 왜 하는 건데요. 좋아해 줘서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합니까?”

“그냥, 그냥 이건 제 감정이구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고. 아시잖아요. 저 혼자 그냥 짝사랑하겠습니다.”

이런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내가 완전 말렸다 말렸어. 그냥 상종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또 오지랖이 발동해 가지고. 스웨덴에서도 괜히 오지랖이 발동해서 돈까지 주는 바람에 결국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

내 죄가 크다. 내 죄가 제일 크다.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남은 기간 인턴 일 열심히 하고, 잘 가세요.”

더 이상 듣기 싫어서 문을 벌컥 열었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나를 가로막고 서 있는 커다란 인영이 내 어깨를 잡았다. 뭐냐 또 누구냐.

“세연 팀장, 나랑 점심 같이할래요?”

마케팅 박건희 팀장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타이밍 진짜 죽이는구만.

“부대찌개로 하죠.”

이제 나도 이판사판이다.

***

여기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부대찌개를 가운데 두고 흰 와이셔츠에 국물이 튈세라 새색시처럼 앞치마를 두른 두 명의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며 앉아 있다.

“다 끓었으니 이제 드시면 돼요.”

아주머니가 뚜껑을 열어 주고 지나갔다. 확 올라오는 매운 김에 내가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자 침묵하던 박팀장이 눈을 흘기며 나를 쳐다보았다. 세연 팀장 재주가 좋던데.

“놀리실 거면 밥만 먹고 일어나겠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매정하게 굴어요. 허지환 그 친구 훈남이던데.”

“인턴 관리나 제대로 하세요. 업무가 한가하니까 저러는 거 아니에요.”

“그건 내가 미안해요. 근데 진짜로 관심 없어요? 세연 팀장 여자친구 없잖아.”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

“저번에는 없다면서.”

국자로 찌개를 퍼내던 손을 멈추고 내가 노려보았다. 저건 알면서 묻는 말이 틀림없다. 다시 그가 말을 이었다.

“여자친구는 없는데, 만나는 사람은 있다. 그건 여자가 아닌 만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들려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아 진짜야? 와하하하하. 세연팀장 이쪽이었어요? 왜 말 안 했어요. 섭섭하네.”

아주 요즘 너도 나도 커밍아웃 폭발 시즌이로구만.

“나 사실 회식 때 분위기 이상하다는 건 느꼈어요. 눈치 보니 거기 팀원 몇 명은 아는 것 같고. 혹시 내가 너무 나댄 거에요?”

“네, 좀 그랬네요.”

“미안하네. 그러게 진작 말해 줬으면 내가 장단 맞춰 줬잖아요. 근데 잘생겼어요?”

이건 마치 나 여친 생겼다 하면 친구 놈들의 첫마디가 ‘이쁘냐?’로 시작하는 것이 이쪽 세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았다. 사실 잘생긴 걸로 따지면 대한민국에 견줄 자가 있겠냐 싶었지만 이건 또 다른 커밍아웃이 되기에 말을 아꼈다.

“하긴… 진짜 애인이 있었으면 그 친구 저러는게 신경 쓰였겠네. 곤란했겠다.”

“과거형이 아니고 현재진행형입니다.”

“걱정 말아요. 이번엔 내가 도와줄게요.”

마치 품앗이하듯 이번엔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가 방긋 웃어 보였다. 뭘 어떻게 도와줄 거냐 물었더니 신경 쓰지 말고 이제 스트레스받지 말라고 한다. 인턴을 자를 거냐고 하니 그건 자기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안 된단다.

다음 날이 되니 도와준다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박건희 팀장은 인턴 둘을 이벤트 현장으로 파견시켜 버렸고 허지환은 더 이상 본사로 출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누가 봐도 위계에 의한 부당 처사였지만 나는 모른 척하기로 했다. 덕분에 조용히 일주일을 보냈다.

***

월요일 오후 팀 회의의 집중도가 상당히 높았다. 내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긴장을 타며 지켜보는 팀원들의 표정이 남달랐다. 내가 ‘그리고’ 라는 접속사를 쓸 때마다 팀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원하던 말이 아닌 것을 알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그 꼴이 꽤나 귀여워서 나는 쓸데없이 ‘그리고’를 계속 붙이며 회의를 마무리 했다. 

“그리고 내일 건물 전체 소방 훈련 한다는데 팀에서 한 명씩은 필참이야. 막내 수고 좀 해 줘.”

“네.”

“그리고 추석 연휴 일찍 집에 내려가야 하는 사람은 눈치 보지 말고 연차 달아서 써.”

“네.”

“그리고.”

“아 팀장님 좀!”

역시 이동재가 총대 멨다. 싸가지 없이 어디서 상사한테 짜증이야.

“그리고, 수정된 기획안 임원회의 통과됐어. 연휴 끝나고 각오들 하고 와.”

와 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57분을 기다린 끝에서야 원하던 말을 얻어 낸 6명의 팀원들이 하이파이브를 하고 방방 뛰었다. 좋냐, 나도 좋다.

아침 일찍 내가 본부장 호출로 자리를 비운 탓에 다들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로써 내년 신제품 리딩은 우리 팀에서 맡게 되었다. 바빠지겠지만 기분 좋게 바빠질 것이다.

“기현이 내일부터는 인턴들 전체 워크샵이라고 했나?”

“네.”

“그럼 오늘 나랑 점심 같이하자.”

“네!”

인턴십도 거의 끝이 났다. 남은 삼 일은 춘천에 있는 사원 기숙사에서 전체 워크샵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니 우리 팀과 일하는 건 오늘로 마지막이다. 고생했다 싶어 맛있는 걸 사 주려고 김기현 혼자 데리고 나왔다. 10분쯤 걸어서 재원 선배가 일하는 증권사 건물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와규가 포함된 철판 요리 세트를 시켜 주니 좋아한다.

“많이 배웠어? 어땠어?”

“아, 저는 팀 복이 너무 좋아서요. 선배님들이 너무 잘해 주셔서 진짜 많이 배웠습니다. 다른 동기들은 좀 괴로워했는데 저는 다 형 누나 같고 그래서 편했어요.”

“다행이네. 휴학했다고 했나?”

“네, 이제 토플 점수 만들어 놓으려구요. 루신 토플 허들 디게 높던데요.”

“좀 그런 편이지.”

“학교빨이 없어서 남들 두 배로 해야 돼요.”

“어디 나왔다고 했지?”

“저 한국대요.”

“그랬지 참.”

문득 나 취업 준비할 때가 떠올랐다. 그래도 난 영어가 프리패스라 다행이었지. 청춘을 갈아 넣는 스펙 준비의 시작점에 돌입한 후배가 안쓰러워졌다.

가지런히 차려진 철판 요리들과 밥, 그리고 미소국이 나왔다. 육즙이 좔좔 흐르는 와규 한 점을 입에 넣은 김기현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입맛에 맞은 듯하니 다행이었다. 고기가 더 많은 걸로 시켜 줄걸 그랬나 싶었다.

“취업 준비하다가 궁금한 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명함 뒤에 개인 휴대폰 번호를 적어 건네주었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명함을 받아 든 김기현이 이 귀한 번호를 이렇게 쉽게 딸 수 있을 줄 몰랐다며 웃었다.

“여자애들이 저 엄청 부러워했거든요. 기획부 디카프리오 팀 배정받았다고.”

“그게 내 별명이냐?”

“네. 흐흐.”

김기현이 생각지도 못하게 나와 버린 말에 멋쩍은 듯 웃었다. 나쁘지 않네. 당연히 살찌기 전 디카프리오를 말하는 거겠지?

“저… 팀장님 근데요.”

“어.”

“진짜… 여자친구 있으신 거죠?”

밥알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내 눈치를 살피며 물어보는 게 안 봐도 알 만했다.

“요즘 왜 이렇게 내 여친한테 관심들이 많아?”

“그러게요.”

“허지환이가 시켰어?”

들켰다는 표정을 지은 주제에 작은 목소리로 꼭 그런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있다고 나 임자 있다고 제발 니 주변 애들한테 소문 좀 내 달라고 부탁했다.

“어제도 술 먹고 많이 울었어요. 저도 그런 쪽으로 막 열린 사람은 아니었는데… 자기가 얼마나 싫었으면 그랬겠냐고 막 그래서… 그래서 저도 궁금해서 여쭤봤어요. 죄송합니다.”

허지환은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스트레이트라서, 자신이 남자라서 안 되는 거라는 착각. 그렇다고 내가 사실을 말해 줄 필요는 없었지만,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심하게 나를 쫓아다닌 사람은 없던 탓에 신경이 이만저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상태가 정상이 아닌 놈이라 어리석은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어설픈 관심은 항상 일을 그르친다. 나의 상념은 접어 둔 채 건조하게 다른 이야기를 했다.

“너는 여자친구 있어?”

“네. 이제 1년 됐어요.”

묻지도 않았는데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둘이 같은 야구 점퍼를 입고 응원하는 사진이 귀여웠다. 근데 요즘 문제가 있으시단다. 한번 시작된 연애 상담은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내가 보기엔 정말 별것도 아닌 문제였지만 한 번은 심각하게 헤어지는 거까지 고민했다고 했다. 그래 고민의 무게는 각자 다른 거겠지.

퇴근하는 길에 오랜만에 주님과 통화를 했다. 니가 웬일로 전화를 다 했냐고 하니 임신했단다. 헉. 나에게는 너무 저세상 이야기 같아서 순간적으로 급브레이크를 잡을 뻔했다.

축하한다고, 몇 개월째냐고 하니 이제 14주 되었단다. 몇 개월이냐고 묻는데 왜 주 단위로 받냐고 하니 원래 임신은 주 단위로 얘기하는 거란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

-지난번에 너랑 최수혁이랑 눈싸움하며 술 마신 날 있잖아.

“어, 그때도 임신중이었어?”

-어 대박이지? 나 몰랐거든. 근데 그날 집에 가는 길에 몸이 너무 안 좋은 거라, 우리 그날 술도 거의 안 마셨잖아.

“맥주 두 잔이면 너한테는 이온 음료 수준이지.”

-그러니까. 근데 몸이 넘 안 좋아서 다음 날 병원 갔거든. 임신이래는 거야. 개깜놀.

주님은 초등학교 때부터 나 닮은 아들을 낳아야 한다고 주야장천 노래를 불렀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혹시 정자 기증할 생각이 없냐는 소리까지 하며 헛소리를 했는데 작년에 갑자기 이상형을 만났다며 연애 반년 만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이제 애 엄마가 되려나 보다.

“남편이 엄청 좋아하는 거 있지. 나 완전 여왕처럼 살아 요즘.”

“응 좋겠지. 남자는 원래 그때부터 철든다 그러더라.”

“너는?”

“나 뭐.”

“너 장가 안 가냐. 애기 좋아하잖아.”

“내가 그랬냐?”

까마득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친한 친구 중 처음으로 아빠가 된 녀석이 돌잔치를 한다고 불렀었다. 20대 중반에 멋도 모르고 잡은 애기 손이 너무 작고 귀여워서 내내 베이비시터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재수 없는 신재식이 딸도 처음 태어났을 때는 귀엽다고 휴대폰 사진을 몇 장이나 넘겨 본 적이 있었다.

뭐, 한때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거지. 이제는 왠지 남 얘기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한동안 잊고 있었다. 이제 겨우 서른하난데 뭐. 남자는 결혼 늦게 해도 괜찮아 하는 주님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집에 오니 최수혁이 마침 거실에서 휴대폰을 들고 서 있었다.

“저녁 나가서 먹을까 해서 전화했는데 통화중이던데.”

“응, 친구 전화 와서. 너도 알잖아. 요 앞 치킨집에서 봤던 동창 여자애.”

아… 녀석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우리에겐 참 잊을 수 없는 날이었지.

“임신했다고 그래서.”

“그런 걸 왜 너한테 보고해.”

“걔가 원래 내 유전자를 좀 탐냈었거든. 겸사겸사 생각이 났나 보지 뭐.”

“탐내는 사람이 너무 많네, 정세연은.”

“니 직업이 뭔지는 까먹은 거냐. 나갈 거야? 나갈 거면 나 옷 안 갈아입고 이대로 가게.”

“가자.”

녀석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왁스로 넘긴 머리가 그대로 고정되어 있었다. 현관 옷걸이에 걸려 있던 트렌치코트를 쥐고 밖으로 나오더니 그대로 어깨 위에 슥 걸쳤다. 그러고선 긴 다리로 휙휙 걸어가는 모습은 사진을 찍어 두고 싶을 정도였다.

“키 줘. 내가 운전할게.”

근처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데 페라리를 탈 수는 없다. 아직 예열된 채로 기다리고 있던 아우디 엔진이 곧바로 피스톤 운동을 재가동했다. 본 주인과는 다르게 거칠게 밟는 가속 페달로 인해 실린더에 힘이 들어갔다.

한참 운전중이던 최수혁이 내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애를 좋아하냐고?

무슨 뜻으로 물어본 건지 반은 짐작이 갔고 나머지 반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대충 둘러대는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뭐 애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냐고. 혹시 너는 싫어하냐고 되물었다.

“아니, 별 생각이 없어.”

“나도 그래.”

니가 그런 거면 나도 그랬다.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하는 게 무서워진 우리는 라디오를 들었다. 아이돌 그룹들이 나와서 새 앨범 홍보를 하고 있었다. 멤버 다섯 명이 깔깔대며 웃는데 해맑았다. 신곡이랍시고 틀어 주는 비트와 베이스가 너무 쿵쿵 울린 탓에 조금 볼륨을 낮추려고 하는데 갑자기 라디오 소리가 아예 음소거되어 버렸다.

차량 계기판에는 ‘허지환 인턴’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속절없이 울려 퍼지는 전화 신호음만 차 안을 맴돌았다. 둘 다 표정이 굳어 버렸다.

“받아.”

녀석이 그 한 마디를 던지고는 내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운전대에 연결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팀장님 하며 차량 스피커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미 젖어 있었다. 그 와중에 또 꾸역꾸역 자기소개를 한다. 안다 인마, 니 번호 이미 저장되어 있다고.

금방 말끝을 흐리더니 눈물을 한참 삼키는 듯했다. 이제 못 뵙는 거죠 하는 소리에 나 대신 최수혁이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나는 술 마신 거냐고 물어보았다. 아니란다. 와, 맨정신에 이런 전화를? 진짜 패기 하나는 누구 못지않았다.

보아하니 김기현이 가서 말을 전했나 보다. 그런데 자기는 쉽게 포기가 안 된단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본사 앞 벤치에 혼자 앉아 있단다. 마지막으로 인사하러 찾아왔는데 내가 이미 퇴근하고 없어서 계속 이러고 있다며.

도어트림에 왼쪽 팔을 기대어 뺨을 문지르던 최수혁이 갑자기 목소리를 내었다.

“지금 간다고 해.”

갑작스럽게 들려온 다른 목소리에 허지환이 여보세요? 하며 상대방을 확인했다. 내가 한숨을 쉬며 지금 갈 테니까 거기 있으라고 했다. 그 바람에 ‘죄송합니다 팀장님’ 하는 목소리 끝에 희망이 조금 실려 버렸다. 전화를 끊고 최수혁을 쳐다보았다. 너 진짜 들이받을 거냐.

“포기가 안 되신다니 포기를 하게끔 해드려야지.”

아우디가 3차선으로 진입했다. 그대로 신호를 받아 유턴을 했다.

***

허지환을 만나러 가는 길에 최수혁이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획사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했고 잠깐 들를 거라고 했다.

최수혁은 차 안에서 기다리고 나 혼자 내렸다. 일단은 이 말 안 듣는 똥강아지 같은 놈을 데려와야 했기에 빌딩 앞으로 갔는데 안 보인다. 어디쯤에 있는지를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조형물 옆에서 시커먼 인영 하나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와.”

꾸벅 인사를 하는 허지환을 무시한 채 차가운 목소리로 그냥 따라오라고만 말했다. 빠르게 앞장서서 가는 나를 놓칠세라 타박타박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후문 쪽에 서 있는 아우디 조수석 문을 열었다.

“뒤에 타.”

그 말에 허지환이 잠시 멈칫했다. 나 혼자라고 생각했나 보다.

영문도 모른 채 뒷좌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른 허지환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의 옆얼굴을 확인하고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을 껌뻑거렸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시간 됩니까?”

목소리를 듣고서야 자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다는 걸 깨달은 허지환이 아 네… 하고 대답했다. 나는 불친절한 침묵을 택했고 최수혁은 운전에만 집중했다. 가는 내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머리를 굴리는 허지환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아우디가 D&D 엔터 건물 앞에 섰다. 최수혁이 굳게 문이 닫힌 소속사 건물을 지문 인식으로 열고서는 익숙한 듯 2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도 처음 와 보는 녀석의 사무실이었다. 어두운 건물 벽에 걸린 최수혁의 앳된 사진들이 보였다. 다른 소속사 연예인들도 모두 배우들이다.

녀석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대부분이 유리로 된 작은 방들이 이어졌고 맨 끝 방만 원목으로 된 두꺼운 문이 달렸다. 녀석은 바로 그 방으로 들어갔다.

소속사 대표의 방인 듯했다. 고급스러운 원목 데스크 옆에 서 있던 스탠드 램프의 불이 켜졌다. 데스크 앞에는 스칸디나비아 스타일로 커팅이 된 테이블이 있었는데 의자 하나를 빼어 최수혁이 앉았다.

허지환에게는 눈짓으로 맞은편에 앉으라고 권유를 했고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데스크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낮은 채도의 조명이 방 안을 가득 담았다. 밝지는 않았지만 표정을 읽기에는 충분했다.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왜 이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며 인상을 쓰고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최수혁입니다.”

녀석이 뒤늦게, 필요하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했다.

“아 예, 그건 아는데… 팀장님?”

나를 돌아보며 눈을 껌뻑였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해 달라는 눈치였다. 나는 계속해서 침묵을 택했다.

“그쪽이 세연이 좋아한다구요.”

그 말에 허지환이 얼굴이 벌게지며 다시 최수혁을 돌아보았다. 뭐야 왜 이 사람이 그런 걸 알아 하는 표정이다.

“상대가 정중하게 몇 번을 거절하는데도 자기 감정만 앞세워서 괴롭히는 거, 스토커라고 합니다.”

“네? 어… 괴롭힌 적 없는데요.”

“괴로워하던데요, 옆에서 보니까.”

허지환의 동공이 좀 더 커졌다. 대체 니가 뭔데 나한테 지금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도 읽혔다. 지금의 고압적이고 불친절한 태도는 최수혁이 평소에 보여 주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허지환은 한층 더 당황했다.

“저기…. 저는 팀장님하고 얘기하러 왔는데요.”

“하세요.”

“어… 그러니까. 저기 친구분이신가 본데 잠깐 자리 좀 비켜 주시면 안 되나요?”

“내가 그래야 하나?”

최수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니’ 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 말에 허지환이 어? 하며 또 나를 쳐다보았다. 이 방 안에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다는 걸 직감한 듯했다. 전혀 자리를 비켜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최수혁이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팀장님.”

“말해.”

“저… 가끔 한 번씩은 만나 주실 수 있나요? 그냥 형 동생 해도 좋고 또….”

“아니.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나는. 마지막 인사하러 온 거라며.”

놈의 말을 잘라 먹고 정확하게 내 의사를 전달했다.

“그럼 그냥 연락만 해도 되나요? 아주 가끔이라도 좋은데.”

하… 시발 또 시작이다. 머리가 아팠다.

“그냥 제가 뭐 다른 거 바라는 건 아닌데 연락 정도는….”

“허지환씨.”

“네?”

놈과 나의 대화에 다시 최수혁이 끼어들었다.

“세연이가 지금 정확하게 의사 전달했습니다. 싫다고.”

“아… 네. 죄송합니다.”

“그렇게 꼬리 내리는 척하다가 틈 보이면 또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고 합니까?”

“네?”

“세연이가 배려해 주면 또 밀고 들어올 거잖아요, 허지환씨는.”

“저기요, 근데 아까부터 저한테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는데. 불편하거든요. 이미지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 좀 이상하시네요. 그쪽이 뭔데 자꾸 끼어들어요?”

“그러는 너는 뭔데 자꾸 내 애인 건드려.”

“네?”

하… 나는 모르겠다. 니가 알아서 수습해라 최수혁.

허지환이 잘못 들은 거 아닌가 싶어 나와 최수혁을 번갈아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한 번 더 말해 줘야 믿을 수 있다는 표정이다.

“애인 있다고 몇 번을 말해도 안 믿으신다고 하셔서요. 믿게 해 드리려고 같이 왔습니다.”

그렇게 녀석이 두 명 분의 커밍아웃을 한꺼번에 해치웠다. 허지환의 표정을 보니 충격이 심하게 온 듯한데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진지하다. 눈을 껌뻑거리더니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해 줄 말이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최수혁 진짜 들이받았네.

“그러면… 그러니까 두 분이… 사귀시는… 거죠?”

“네.”

“와….”

입을 떡 벌리고 동공이 커졌다.

“와…. 이거 무슨 소설 같다….”

이번에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판타지 같은 남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충격적이네요….”

“세연이가 남자 애인 있다는 게? 아님 그게 저라서?”

허지환이 둘 다라고 대답했다. 놈은 한동안 말을 잃고 머릿속에서 상황 판단에 들어간 듯했다. 진짜 애인 있으셨구나… 게다가… 혼자 중얼거리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보고 또 한숨을 쉬었다.

“이제 포기가 됩니까?”

“네? 아 네. 그건 이미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노력은 안 보이는 데서 혼자 하면 안 됩니까?

“저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건데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네?”

“자제를 하든 노력을 하든 혼자 하시라는 말입니다. 애들처럼 장난하지 말고.”

최수혁은 몰아붙였고 허지환의 표정은 더 굳어졌다.

“저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저는 진지한데 애 취급하시니까 좀 그러네요. 그쪽이 남자친구로서 기분이 나쁘신 건 제가 이해하는데요, 그렇다고 남의 감정을.”

“그런 게 아니고.”

최수혁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또 여느 때처럼 주절주절 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으려던 허지환이 말을 뚝 그치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내가 남자친구라서 기분 나쁜 게 아니고, 그쪽이 어리고 진심이 아닌 거 같아서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

“세연이가 괴롭다잖아. 회사에서 그쪽 때문에 힘들다잖아. 그래서 나는 같이 괴로운데 그쪽은 아닙니까? 좋아한다면서요.”

그 말을 듣고 있는 허지환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화난 건가, 슬픈 건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최수혁에게 대들던 놈이 입을 꾹 다물고 숨만 쉬고 있었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정세연 회사 생활이 꼬일 수도 있겠다, 커리어를 망칠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나는 지금도 하는데.”

나도 최수혁을 쳐다보게 되었다.

“세연이가 말만 사납고 전혀 모질지를 못해서 내가 대신 얘기하는 겁니다. 뭘 하든 그쪽 자유인데 좋아한다면서 괴롭히는 건 아니지 않나.”

허지환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여느 때처럼 ‘팀장님 제가 괴롭혔나요?’ 하고 울상 지으면 그렇다고 대답해 줄 참이었는데 어째 말이 없었다. 허지환씨 하고 부르는 최수혁의 물음에도 시선은 계속 테이블로 향해 있었다.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이제.”

우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안심이었다. 화난 것 같지도 않으니 사고 치지는 않을 것 같고. 진짜 이번엔 알아들은 건가 하는 희망을 가져 보게 되었다.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오지도 않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음… 이번엔 좀 진짜인 것 같았다. 순간 나를 잠깐 쳐다보는 허지환의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금세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로 향했다. 짧은 쉼표를 쉰 끝에 결심한 표정을 지은 허지환이 자신은 그만 꺼지겠다며 가방을 집었다.

“제가 중간중간 말이 짧아서 죄송했습니다.”

“아니요, 욕 먹어도 할 말 없죠 제가.”

“오늘 여기서 들은 걸로 당장 기자 찾아가셔도 상관없습니다.”

“저 그렇게 개념 없는 놈은 아닙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그럼. 찾아가지 마세요, 세연이가 곤란할 테니까.”

녀석이 내 핑계를 대었다.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는 녀석은 이용도 할 줄 알았다. 허지환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며 짧게 목례를 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흔들리는 눈동자가 서글펐지만 잘 가라는 인사도 해 주지 않고 그냥 보냈다.

허지환이 1층으로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대표의 데스크에 놓인 아날로그 시계 소리가 째깍째깍 울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조금 더 가까이 최수혁에게 다가갔다.

녀석이 손을 올린 테이블 옆모서리에 기대앉았다. 조명에 비친 최수혁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채, 풀리지 않은 채였다. 안타까웠다.

“왜 그랬어. 그렇게까지 다 얘기할 건 없었잖아.”

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오픈했다. 사생활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불리해지는 직업을 가진 최수혁이 그런 걸 모를 리 없다. 녀석이 의자를 뒤로 빼고 몸을 길게 젖혔다.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그러고는 고개를 올려 나를 쳐다본다.

“다른 새끼가 너한테 계속 들이대는데 옆에서 쥐 죽은 듯이 듣고 있어야 하는 게 너무 좆같았어.”

마음이 아팠다.

“걱정 마. 증거 하나 없이 들은 얘기 가지고 기사 써 줄 미친놈은 없어. 좀 개념 없어 보여도 너에 대한 감정은 진짜인 거 같더라.”

“미안.”

“하… 정세연 진짜. 확 그냥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닐 수도 없고.”

뭘. 나를? 녀석이 진지하게, 진심 그렇게 하지 못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지랖 좀 그만 부리라고. 안 그렇게 생겨서 왜 이렇게 물러 터졌어?”

“내가 그랬으면? 진짜 그랬음 너한테도 안 넘어갔어.”

“알아. 그래서 신경 쓰여.”

“뭐가.”

“혹시 아직도 나 배려하고 있는 건지. 내가, 나도 내 감정만 앞세우고 너 곤란하게 하는 거 아닌가 해서 기분이 묘하네.”

나는 팔짱을 풀고 왼쪽 손으로 테이블 모서리를 쥔 채 무게 중심을 잡았다. 아무 말 없이 녀석을 지긋이 쳐다본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를 처음 인지했던 날과 막무가내로 들이대던 날들 속에서 내 마음을 확인했던 순간까지.

“사실은 너한테 거짓말했었어.”

내 말에 최수혁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무슨?”

“나 다 기억해. 내가 술 마시고 너한테 데리러 오라고 전화한 날. 치킨집에서 구르고 쪽팔려서 생각 안 난다고 했는데 사실은 다음 날 생각이 났어.”

하… 녀석이 그날을 생각하며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이동재와 김시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주를 3병 마시고 사고를 쳤다.

“너한테 다짜고짜 전화해서 한 첫마디가.”

“시발 새끼였지.”

둘 다 쿡쿡 웃었다.

“맞아. 시발 새끼야 왜 더 안 들이대고 한발 빼냐. 나는 좋았는데. 너랑 있으면 재밌는데.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너는 나 안 보고 싶냐.”

본인 입으로 본인의 술주정을 재현하는 내 모습이 웃긴지 녀석이 이마에 손을 대고 웃었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너도 나 보고 싶으면….”

“너도 나 보고 싶으면 데리러 와 새끼야.”

기억하는구나. 토씨 하나 안 빼고 다. 그런데도 뭘 걱정하냐. 그게 너 혼자 들이댄다고 진전이 되었겠냐. 쓸데없는 생각 하는구나 최수혁.

녀석이 일어섰다. 좀 전까지만 해도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은 이제 위로 올라가야 했다. 평소라면 겨우 한 뼘 정도 더 큰 키지만 테이블에 걸터앉아 있는 나는 보다 조금 더 낮은 곳에 위치했다.

현실감 없이 잘생긴 얼굴이 다가왔다.

“이 방에 CCTV 같은 거 있어?”

“무슨 상관이야. 여기 우리 기획사야.”

얼굴이 포개져 온다. 목을 길게 빼어 녀석의 입술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서 테이블 모서리를 쥐고 있던 손을 뻗어 최수혁의 목에 걸었다. 더 가까이 와. 그 소리에 내 허리를 감싸 쥐는 손이 느껴진다. 나는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로 쓰러졌고 그 위로 녀석이 덮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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