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6화. 어머님이 누구니, 어쩌자고 너를 이렇게 키우셨니 (6/11)

6화. 어머님이 누구니, 어쩌자고 너를 이렇게 키우셨니

여기 한 남자가 작은 회의실 안에서 반짝거리는 다섯 명의 사원들 앞에 섰다. 그는 선배들 앞에서 늘 겸손했으며 후배들 앞에서는 모범이 되었고 상사 앞에서는 개처럼 엎드렸다. 야근과 주말 근무에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며 입사 이래 여름 휴가라는 걸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자가 오늘 승진을 했다.

“팀장님 축하드립니다!”

“정팀장님, 축하합니다!”

후배들이 정(情) 팀장이라며 초코파이 한 상자를 뜯어 탑을 쌓아 촛불을 꽂았다. 힘차게 후우 불고 나서 초코파이는 두 개씩 나눠 가졌다. 내 밑으로 다섯 명, 나까지 총 여섯 명의 팀원으로 구성된 기획부 3팀. 하늘 같은 조소영 총괄부장의 밑에서 앞으로 빡세게 굴러야 할 나의 첫 부하 직원들이었다.

슬기로운 직장인들은 ‘대리님’이라는 직책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고로 ‘대리님’이라는 건 인사고과에 하등의 영향도 미치지 못하면서 일은 일대로 다 하고 후배들이 잘못하면 대신 욕까지 먹어야 하는 허울뿐인 직책인 것이다. 진정한 승진이란 내 밑의 부하들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주는, 즉 월급을 얼마나 올려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위치에 가야 승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는 월급을 쥐고 흔드는 자가 예수님이고 부처님이다.

“팀장님… 저희 오늘 회식하나요?”

조직 개편된 첫날이니만큼 팀 단위로 회식이 있을 거라는 두려움에 1년 차 막내가 조심히 물어 왔다.

“아니 없어, 회식비로 점심이나 먹자.”

“워, 팀장님 센스 쩌네요.”

이동재가 놀리듯 박수를 쳤다.

“이동재 대리, 시건방 떨지 말고 메뉴나 골라 놓으세요.”

동재도 대리로 승진을 했다. 데려가고 싶은 팀원들 있으면 명단 써서 올리라는 조팀장의 말에 이동재와 김시은의 이름을 넣었다. 실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가까이 두고 관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잉-

[역삼 근처에서 촬영 있어]

[점심 같이해]

바로 이런 상황을 지혜롭게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멀리 둘 수가 없었다. 팀원들의 책상이 2열로 늘어져 있고 그들을 바라보는 상석에 나의 새로운 책상이 마련되었다. 한층 더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환경이다.

[법카 줄 테니까 애들 데리고 가서 맛있는 거 먹이고 들어와]

사내 메신저로 동재에게 첫 번째 미션을 할당했다. 존경받는 팀장이란 자고로 몸은 무겁고 지갑은 가벼워야 하는 법. 개념 있는 상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래저래 신경 쓸 것이 많다.

“세연 팀장, 회의 들어와.”

파티션 너머로 조소영 본부장이 지나가며 호출했다. 갑니다, 가요. 그녀가 지나가며 나를 포함한 세 명의 팀장들을 소집했고 따라 들어간 대회의실에는 다른 부서 팀장들이 벌써 앉아 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기획부에서는 이렇게 세 명 들어올 거예요. 오늘은 첫날이니까 인사도 하고 인수인계도 할 겸 저도 참석할게요. 시작하세요.”

그녀는 이제 급이 맞지 않는 회의 참석 멤버들에게 마치 아랫사람 부리듯 회의 시작하라는 뜻을 전했다. 계급이 깡패구만. 그래도 지난주까지 티격태격하던 다른 부서 팀장 중 누구도 그녀에게 고깝게 구는 사람이 없었다.

“1차 이벤트 반응 괜찮았습니다. 갤러리아에서만 3천 세트 나갔구요. 2차 이벤트는 모델까지 같이 뛸 거니까 5천 개 분량 준비합니다.”

“K양은 우리 제품 때문에 이미지 더 좋아졌다. 안 그래요?”

사실이었다. 나의 영혼을 갈아 넣어 런칭한 스파라인이 반응이 꽤나 좋은 탓에 여기저기 그녀의 사진이 백화점 곳곳을 장식했다. 위에서도 실적이 좋으니 신이 났는지 마케팅 비용으로 매주 억 단위가 내려왔다.

“2차 때는 기획부에서도 사람 좀 보내 주시죠. 저희도 리소스가 딸립니다.”

“그래요, 그럼. 오팀장 쪽에서 몇 명 보내 드려.”

당황한 오팀장이 ‘저희 팀에서요?’ 하며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조소영 본부장을 쳐다보았다. 당연히 예전처럼 ‘우리가 왜요?’ 하며 히스테리를 부릴 줄 알았는데 성모 마리아처럼 대뜸 우리가 도와주겠소 하며 마음 쓰는 것이 이제껏 알던 그녀와는 꽤나 매칭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피지컬이 좀 필요하니 정팀장 쪽에서 와 줬으면 하는데요, 평균 연령도 젊고.”

박건희 팀장, 이럴 거요? 내가 인사과 귀염둥이랑 이어지는 것도 도와줬는데 회사 생활 너무 쉽게 하려 하네 이거?

“그래요 그럼. 세연 팀장이 알아서 몇 명 보내 줘.”

“네.”

본부장 타이틀 달고 갑자기 바다와 같은 마음 씀씀이로 돌변한 조소영씨의 자아도취 놀이에 괜히 우리 팀만 뺑이 치게 생겼다. 자리로 돌아와 마케팅 허스키에게 [소회의실로 롸잇나우] 라고 보내고 씩씩거리며 이동했다.

회의실 테이블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으니 박건희 팀장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 양반이 몇 주 전까지 이 회의실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기억은 하고 이렇게 용감한지 묻고 싶었다.

“왜 그러셨어요, 저한테.”

“내가 오팀장이 좀 불편해요.”

“저는 편합니까?”

다 알면서 뭘 그러냐는 표정이다. 지난달까지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가고 회사에서 밤새 일했는데 마케팅 이벤트까지 챙기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두 명 이상 지원 못 나갑니다. 그것도 한 명은 제일 늙은 제가 갈 거고요.”

팀장 단 지 하루 만에 밑에 있는 애들한테 이벤트 현장 지원 나가라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다. 결국 만만한 이동재 데리고 내가 가야 했다. 짜증 나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가서 K양을 봐야 했다. 최수혁의 기준에서 사귄 게 맞다고 할 정도의 사이라면 내가 신경 쓰이는 게 당연했다. 질투를 가장한 심술이라도 부리고 올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손에 쥐고 있는 휴대폰이 끊임없이 울렸다. 결재 알람, 보고서 알람, 사내 메신저 알람들이 윙윙 울려 대는 통에 제대로 항의도 못 하고 일단 회의실에서 나왔다.

“응. 아니야. 바로 확인할 테니까 메일로 보내 놔.”

전화를 끊으며 다시 자리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또 후배 한 명에게 잡혀 영문으로 된 보고서를 감수해 줘야 했다. 걸어가며 확인해 보니 금방 끝날 내용이 아니라 이것도 메일로 보내 놓으라 했다. 보관함에 읽지 않은 메일이 계속해서 쌓여 갔다.

“팀장님 진짜 같이 안 가세요?”

팀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일어난다. 팀 막내가 예의상 다시 한 번 물어보지만 얼굴에는 ‘이제 와서 간다고 하면 당신은 배신자’ 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다. 신경 쓰지 말고 갔다 오라고 밀어 넣었다. 30분쯤 늦어진다는 최수혁의 문자는 이미 확인한 터라 잘되었다 싶었다. 읽지 않은 메일 10개 정도를 처리했지만 그 후 20개가 더 쌓였다.

30분에서 5분을 더 넘기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을인데 아직 에어컨을 가동하는 식당이 많은 터라 재킷을 가지고 나왔다. 벌써 점심을 해결하고 커피 타임을 가지는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가득 메우고 올라왔다. 그들은 다 내리고 나만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걸음을 서두르며 로비 정문으로 가고 있는데 후문 쪽에서 팀원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안 나갔었냐며 1층 카페로 향하고 있었다.

“뭐 먹었어?”

“한식 뷔페요. 같이 드시지.”

요 앞에 새로 생긴 고급 한식집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뷔페식으로 여는데 1인당 만오천 원이다. 다섯 명이 만오천 원이면 칠만오천 원. 오케이. 생각보다 출혈이 크지 않아 안심했다.

“이대리, 커피도 돌려.”

“넵!”

이럴 때만 존댓말 쓰지 이놈아.

모두 좋다고 먼저 카페 안으로 들어가 뭘 시키지 고민들을 하고 있었다. 카드를 흔들며 내 앞을 지나가던 동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이제 대놓고 티 내기로 한 거야?”

무슨 소리냐 했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로비 밖으로 가리켰다.

밖을 쳐다보니 익숙한 차량 한 대가 말쑥하게 빼입은 제 주인을 데리고 도로변에 서 있었다. 살짝 길어진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긴 다리를 꼬고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도 ‘나 영화배우 최수혁이오’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녀석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너무 저렇게 대놓고 연예인 포스를 풍기고 있으니 차마 다가가지도 못하고 웅성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경찰 출동하기 전에 얼른 데리고 좀 사라지지?”

동재가 어깨를 치며 카페로 들어갔다.

이동재의 말처럼 최수혁은 민폐였다. 지 멋대로 도로변에 정차해 놓은 차량도 불법이었고 저렇게 생겨 먹은 주제에 보란 듯이 얼굴 내밀고 차 밖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것도 불법이었다.

이 화보를 더 즐겨 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천천히 빌딩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은 최수혁을 보고 있었고 최수혁의 시선은 나에게 향해 있었다.

녀석에게 다가갔다. 살짝 올려다봐야 하는 키 차이는 나쁘지 않다.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녀석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감상은 집에서 하지? 언제까지 들여보내 주면 돼?”

“한 시간이나 한 시간 반 정도. 되는대로 들어가도 돼.”

“팀장 되니 좋네.”

“직급이 깡패지. 너무 멀리는 가지 마.”

동시에 차에 올랐다. 이미 정해 둔 곳이 있는지 망설임 없이 가속 페달을 밟는다. 왼쪽 시야로 들어오는 녀석의 옆선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핸들을 잡지 않은 왼쪽 팔은 도어트림에 얹은 채 긴 손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인다. 내가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는지 힐끗 한 번 시선을 주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중식집이었다. 예약을 해 두었는지 개인실로 안내받아 들어간 방은 강남의 마천루가 보이는 커다란 창문이 인상적이었다. 종업원은 쓸데없이 문을 열지 않았고 음식은 곧바로, 그리고 한 번에 나왔다. 나의 젓가락은 당연히 꿔바로우로 먼저 향했다.

“무슨 촬영이었는데?”

“티비 광고.”

“그런 건 얼마나 받아?”

“남의 재산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졌어.”

허기진 나와는 달리 자스민 차를 홀짝이던 녀석이 탕평채로 젓가락을 향했다. 그래 너는 야채 많이 먹어라.

“나 때문에 연예인 관두게 되면 먹고살 게 마땅한지 궁금해서.”

어련히 알아서 많이 벌어 두었겠냐만은 씀씀이를 보면 정작 쌓인 것은 얼마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당장 관둬도 될 만큼 벌어 두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녀석의 대답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월급쟁이의 흔한 고민이다. 망할 걱정은 없지만 평생 흥하지도 못한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내 휴대폰이 몸을 떨었다. 02로 시작되는 모르는 번호인 걸 보니 스팸인 듯해 진동을 끄고 무시를 했다. 다시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려는데 조용해졌던 휴대폰이 같은 번호로 다시 울렸다.

“받고 욕하고 끊어.”

내가 너냐.

“여보세요.”

대충 바쁘다고 둘러대고 끊으려 했는데 상대방이 아무 말을 안 한다.

“여보세요?”

다시 한 번 말했는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 세상에서 제일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Mom…?”

최수혁이 먹던 젓가락을 놓고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이거 서울 번호인데…??

***

내가 통화하는 동안 최수혁은 밥을 먹지 않고 계속 나만 빤히 쳐다보았다. 가끔 친구들이 말하길, 내가 영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의 톤이 완전 다르다고 했다. 다른 사람 같다고. 그래서인지 녀석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내가 통화하는 모습을 대놓고 구경하고 있다.

“Got it. Will pick you up then, yeah. See ya, love you too. (알았어. 그럼 데리러 갈게. 응. 있다 봐. 나도 사랑해.)”

내가 전화를 끊고도 그 시선은 거둬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먹지 말고 계속 쳐다봐라 그럼. 나는 다시 젓가락을 들고 멘보샤를 입에 넣었다.

“섹스할 때 니가 가끔 영어로 욕하는 거.”

가득 넣은 음식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고 ‘어’ 하고 짧게 답했다.

“그거 진짜 꼴려.”

“고맙다.”

이 자식 밥 먹다 말고 또 이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음식에 열중했다. 그제서야 최수혁도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리고 통화 내용을 물었다.

엄마가 한국에 오셨다. 그것도 크루즈 여행 갔다 아빠랑 싸우고 열 받은 김에 무작정 한국으로 가출하신 거란다. 평상시 우리 엄마 성격을 아는 나는 놀랄 것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길게 있다 가실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우리 집에서 지내겠다고 하시진 않겠지?

“바빠지겠네, 어머니 오셨으면.”

“내가 왜.”

“말도 안 통하실 텐데 챙겨 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

“뭔 소리야, 우리 엄마 한국어 존나 잘해.”

사실이다. 아빠는 엄마를 한국에서 만났다. 그리고 7년 동안 한국에서 나를 키우며 대치동 셔틀 생활만 몇 년을 하셨는데. 한국어를 왜 못하겠어. 의외의 스토리에 최수혁이 웃었다. 그런데 왜 너랑은 영어를 쓰냐고 물었다.

“그건 부산 출신 서울 사람이 평소엔 서울말 쓰다가 가족들 만나면 사투리로 급 전환되는 것과 같은 이치지.”

다시 휴대폰으로 사내 메신저가 울렸다. 들어가서 곧바로 확인해 주겠다는 답장을 급히 보내고 물을 마셨다. 입을 닦는 나를 보고 최수혁이 가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하다. 에이씨, 1시간밖에 같이 못 있었네.

먹은 것도 없는 놈이 냅킨에 입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녀석의 테이블에 아직도 요리들이 수북하다.

“왜 이렇게 많이 남겼어, 복 나간다.”

“11시에 밥 먹었으니까.”

“근데 왜 먹자고 했어.”

“알면서 묻지 마.”

그러고는 개인실 문을 확 열어젖히고 저벅저벅 걸어간다. 후훗. 당연히 알면서 물었다. 녀석이 곧바로 계산을 하고 다시 선글라스로 무장한 채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최수혁이 나를 회사 앞에 내려 주고 떠났다. 남들 다 점심 먹을 때 혼자 일하고, 남들 다 일할 때 혼자 자리를 비운 터라 조금 숨 가쁘게 오후를 마무리했다. 다음 주부터 마케팅 지원 나가야 한다고 이동재에게 말한 뒤 능력 없는 상사 소리를 들었지만, K양이 올 거라는 부가 설명에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팀장님’ 인사를 두 번 받았다.

조금 일찍 회사에서 나와 S 호텔로 엄마를 데리러 갔다. 급하게 집을 나와서 가진 옷이 별로 없다며 쇼핑을 가시고 싶단다. 보통 가출해도 이렇게 멀리까지 가출하는 사람은 없는데, 역시 특별한 여성, 나의 모니카. 이 넓은 로비에서도 눈에 확 띄는 저 옷차림.

“Hey beb~~~!! My boy~~~!! (내 새끼!! 우리 아들~!)”

저렇게 소리를 지른다.

“Mom, you’re too loud. Come and get on the car. (엄마, 너무 시끄러워. 빨리 와서 타).”

허그 한 번 일단 해 주고 뽀뽀 세 번쯤 하고, 손 붙잡고 한두 번 콩콩 뛰어 주고 해야 못 이기는 듯 차에 탄다. 차는 언제 또 새로 뽑았냐며 손뼉 쳐 주고, 오랜만에 보니 우리 아들 더 잘생겨졌다에서 시작해서 이게 다 자신의 미모 덕분인 것으로 끝이 난다.

엄마는 유별한 사람이었다. 잘 놀라고, 잘 울고, 잘 삐친다. 그래서 피곤한 사람이지만 쉽게 감동하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사람이라 컨트롤은 단순하다. 오는 길에 아버지와 통화를 해서 가출한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역시나 고모였다. 한국으로 시집와 상상도 못한 시집살이를 겪었던 미국 여자 모니카는 시누이와 절연을 선언했고 그렇게 15년 안 보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슬슬 시동을 건 모양이었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마냥 안 보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 제 도리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엄마와의 협상은 결렬되었나 보다.

“Gosh… I was told from 인욱 that your dad has been in contact with 형님 so far. He cheated on me. (니 아빠가 형님과 지금껏 연락하고 있었던 걸 인욱이한테서 들었다니깐. 나를 기만한 거야.)”

“She’s his big sister, you can’t cut off blood. 혈육이라고. (고모는 아빠 누나야. 혈육을 끊을 수는 없잖아.)”

엄마 편을 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지만 내가 남자라 그런지 아빠 편을 자꾸 들게 된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할머니 집에만 다녀오면 서럽게 울던 게 생각났지만 어쩌겠어. 15년 벌줬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백화점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간만에 아들과 데이트를 하는 것이 신이 났는지 내 손을 잡아끌고 백화점을 1층부터 9층까지 꼼꼼히도 돌았다. 나는 당연히 엄마의 심부름꾼 역할을 수행하며 입어 보는 것마다 예쁘다고 엄지척을 해 줘야 했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와 트렁크에 실었다. 당연히 호텔로 돌아가려는데 우리 집으로 가자고 한다. 아들 사는 곳 구경도 못 가냐며 가서 저녁을 해 먹자고 했다. 오랜만에 엄마 밥을 먹을 생각에 나도 두말없이 집으로 차를 몰았다.

이 아파트로 이사 오고 난 뒤 한 번도 부모님이 오신 적은 없었다. 엄마는 전에 살던 오피스텔이 너무 cozy 하지 않다며 싫어했는데 여기는 입구부터 자기 스타일이라며 좋아했다.

들어오는 길에 장을 봐 왔는데 메뉴는 된장찌개와 감자 샐러드를 곁들인 연어구이 정식이란다. 나름 동서양의 조합으로 합의를 본 듯했다. 엄마는 아파트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평당 얼마쯤 하는지를 점치고 있었고 나는 짐꾼처럼 뒤에서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주차장도 넓고 엘리베이터도 편하게 되어 있다며 자기 아들 출세했다고 또 물개박수를 친다.

12층에 내려 엄마에게 비밀번호를 말하며 문을 열라 했다. 내 손은 이미 엄마의 쇼핑백과 장을 봐 온 꾸러미들로 한가득이었다.

“No, touch the sharp first and then pin code! (아니, 샵 먼저 누르고 비번이라고!)”

삐웅삐웅삐웅-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에 당황한 엄마가 자꾸만 경보음을 울려 댔다. 왼손에 든 가방만 좀 받아 보라고, 내가 하겠다고 해도 굳이 자기가 다시 해 보겠다며 이것저것 눌러 대다 또 경보음을 울린다. 아 쫌!!!

삑삑삑삑, 또르릉~

어디선가 나타난 큰 손이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뒤를 돌아보니 최수혁이 재밌는 광경이라도 구경하는 듯 웃으며 나타나 우리 집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집에 있었어?”

“누가 보면 도둑 든 줄 알겠어.”

“땡큐”

우리가 집에 들어가도록 녀석이 밖에서 현관문을 잡아 주었다. 두 손 가득 쥐고 있던 짐들을 얼른 거실 옆에 놓아두고 내가 문을 잡았다.

“친구?”

“응, 옆에 1204호 살아. 여긴 우리 엄마.”

“안녕하세요, 최수혁이라고 합니다.”

“어머, 안녕하세요. 모니카 정이에요. Gosh… 너무 잘생겼다. 영화배우 같아.”

“엄마 이 친구 영화배우야.”

“어머나 그래?! 꺄, 신기해라!”

소녀처럼 까르르 웃는 엄마를 보니 살짝 부끄러워졌다. 그래, 우리 엄마가 좀 재기발랄하지? 멋쩍은 나의 웃음에 녀석이 미소를 지었다. 그 와중에 미인이시라는 칭찬도 하고 이 친구랑은 찬밥 같이 나눠 먹는 아주 친한 사이라며 자기 어필을 했다.

“우리 지금 저녁 해 먹을 건데, 아직 안 했으면 건너와서 같이 먹어요. 남자 혼자 먹을 게 집에 뭐 있겠어.”

또 시작되었다, 엄마의 오지랖. 얘는 원체 바쁜 애라며 엄마를 일단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너 빨리 가라 하고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네 어머니, 저 아직 안 먹었습니다. 저녁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라는 말과 함께 이미 녀석은 신발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비슷한 상황이 한 달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데자뷔인가.

***

엄마의 ‘된장찌개와 감자 샐러드를 곁들인 연어구이 정식’은 대성공이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밥때가 꼬여 점심을 제대로 먹지 않았던 최수혁의 입맛에 딱 맞았나 보다. 오랜만이었다. 저렇게 잘 먹는 모습을 보는 건.

“너무 잘 먹네, 더 줄까요?”

“네.”

사양도 하지 않고 밥그릇을 내민다. 허허, 이놈 봐라.

“바빠서 제대로 못 먹었나 봐. 우리 아들은 편식하는데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엄마 아들 편식 안 해, 이제.”

“세연이 당근 안 먹죠.”

“Right! 너무 잘 안다! 하하하하.”

또 물개박수 나왔다. 그와 동시에 8살 먹은 나에게 당근을 먹이려 고군분투했었던 옛날이야기가 나오며 하하 호호 자기들끼리 난리가 났다.

“오늘 주무시고 가시나요?”

녀석이 자연스럽게 엄마의 다음 행선지를 물었다. 나이스 캐치, 최수혁.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들인 나는 미안해서 차마 물어보지 못했지.

“아니. 다 큰 아들 집에서 어떻게 자고 가요. 마음은 끌어안고 자고 싶은데 우리 아들이 누구랑 같이 자는 거 극도로 싫어해요. 호텔 가야지 뭐.”

“누구랑 같이 자는 거 싫어하는구나, 몰랐네.”

녀석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을 마셨다. 이건 시간이 갈수록 내가 불리해진다. 엄마는 이 자식이 누군지도 모르고 미주알고주알 나 어릴 때 얘기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의 얘기를 재밌다고 늘어놓았다.

“어머, 벌써 11시다. 너 내일 출근해야 할 텐데 나 택시 타고 갈게.”

“응, 엄마. 그럴래?”

나는 두 번 묻지 않고 곧바로 수긍했다. 빈말이라도 데려다주겠다 하면 안 되냐며 또 삐친 그녀를 달랜 뒤, 내일 호텔에서 저녁 먹자는 약속과 함께 겨우 돌려보낼 수 있었다. 빨리 아빠에게 데리고 가라는 연락을 해야 했다. 엄마가 서울 생활을 너무 재미있어하면 내가 여러모로 곤란하다.

말 많은 스피커 하나가 사라지니 온 아파트가 다시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식탁을 정리하는데 뒤에서 최수혁의 손이 허리에 감겨 왔다. 평화롭다.

“우리 엄마 말이 좀 많아. 아직도 소녀 같고 좀 그래.”

“응 미인이시던데. 당연히 예상은 했지만.”

“당분간 저녁은 같이하기 힘들겠다.”

“가능하면 집에서 먹어. 오늘처럼 타이밍 맞으면 더 좋고.”

녀석의 손이 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복근에서 이어져 다리 사이로 향한다. 목덜미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달아올랐다.

“반응이 빨라서 좋은데.”

녀석의 손길이 그곳에 닿자 참지 못하고 몸을 돌려 입술을 받았다. 기다렸다는 듯 들어오는 최수혁의 혀가 탐닉하듯 훑고 지나가자 곧바로 강하게 입술이 빨렸다. 어느새 내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던 녀석이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고 허벅지를 밀착시켰다.

“하아… 씻고 올게.”

“같이 들어가.”

그 말에 긍정한 내가 녀석의 셔츠 단추를 풀자 귀찮다는 듯 위로 올려 한 번에 벗어 버렸다. 단단한 어깨가 다시 나를 쥐고 끈적한 키스를 퍼부었다. 밀착된 허벅지 안쪽으로 녀석의 단단한 것이 느껴진다. 좀 더, 좀 더….

삑삑삑삑, 또르릉~

“Look! Now I can do this well. OH MY GOSH!!! (봐, 나 이제 이거 잘 연다. 어머나!!!)”

온 아파트를 쩌렁쩌렁 울릴 듯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너무 순간적이라 입술을 뗄 새도 없었다. 셋은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두고 온 쇼핑백을 가지러 혼자서도 문을 ‘너무 잘, 한 번에’ 열어 버린 엄마와, 웃통을 까고 내 허리를 감고 있는 최수혁과, 반쯤 벗겨진 셔츠 차림으로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묻고 있는 나.

쾅-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엄마의 손을 떠난 현관문이 반작용에 의해 다시 닫혔다. 중학교 때 방에서 자위하다 들켰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충격이 다가왔다. 머릿속에는 딱 세 음절로 된 소리만 울려 퍼졌다.

좆.됐.다.

***

빵빵-

뒤에서 나는 클락션 소리에 제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다. 무슨 정신으로 출근을 해서 어떻게 하루가 갔는지 모르겠다.

어제 엄마에게 최수혁과 성인영화 찍던 장면을 들킨 이후 일생일대의 고비가 왔다. 아들이 양성애자가 되었다는 건 둘째 치고, 너무 적나라하게 둘이서 반쯤 벗고 달려드는 꼴을 보셨을 테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실 거다.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혀 버린 후 옷을 추슬러 입고 다시 문을 열었지만 엄마는 이미 가고 없었다. 일단 아침 일찍 [저녁 7시 호텔 로비에서] 라는 메시지를 프런트에 전달해 놓았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호텔로 가고 있었다.

최수혁이 같이 가서 설명하겠다는 걸 겨우 말렸다. 뭘 설명해, 이미 다 봤는데.

언젠가 부모님에게 이런 류의 얘기를 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부주의했다.

S 호텔 1층 로비 테라스에 엄마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모자지간이 이렇게 어색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 번도 엄마에게 여자친구를 소개시켜 준 적도, 내 연애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심각한 사이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런 면에서 부모님은 나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내가 단 하나 희망을 걸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Sorry, I should have told…. (미안 내가 미리 말….)”

“How long? (얼마나 됐어?)”

아직 앉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대뜸 얼마나 되었냐는 질문부터 꺼냈다. 표정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More than 2 months. (두 달 넘었어.)”

“You mean, being together with him or realizing your sexual identity. (그 남자랑 사귄 게 두 달이라는 거야 아님 니 정체성을 깨달은 지가 두 달이라는 거야.)

“Both. (둘 다)”

엄마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내가 가서 무릎 꿇고 빌까?]

픽 웃음이 났다. 녀석도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휴대폰을 보던 내 표정을 읽었는지 엄마가 그 남자냐며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도 모르게 웃어 버린 게 민망했다.

한참을 혼자 생각하던 엄마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방으로 가서 쉬고 싶다고 했다. 장난 아닌 거 알았으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먼저 일어나는 그녀를 보내고 한참 더 앉아 있다 집으로 향했다.

-워, 완전 막장 드라만데?

가는 길에 걸려 온 이동재의 전화에 나도 모르게 마음 털 곳이 필요했는지 대략적인 사건 개요를 말해 주었다.

“어느 부분이 막장이라는 건데. 요즘은 동성애 별거 아니라던 진보주의자 이동재 선생께서는 어디로 가신 거야.”

-그렇다고 부모한테 커밍아웃을 옷 벗고 하라는 뜻은 아니었어.

“충격 받으셨을 거야. 우리 엄마 교회 다니시거든.”

-자식 이기는 부모 없어. 걱정 마. 게다가 최수혁은 비주얼이 좋으니까 받아들이시기가 한결 편하실 거야.

“너의 그 진심 1도 느껴지지 않는 위로에도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걸 보니 내가 긴장하긴 했나 봐.”

-형 인생 갑자기 너무 다이내믹하다.

백퍼 동감하는 바이다. 지난 몇 주간 나는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며 죽었다 살아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나를 해결하니 하나가 터졌다. 10년은 늙어 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집에 들어왔다.

현관문을 여니 제집처럼 떡하니 들어와 소파에 누워 선잠을 자고 있는 최수혁이 보였다.

한 번은 내가 퇴근했다 녀석의 집으로 들어가고 녀석은 우리 집으로 들어와 1시간을 남의 집에서 각자 기다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먼저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 문자를 남기기로 했다. 녀석이 [1205호] 라는 문자를 아까 보냈었다.

졸지에 집이 두 채 생겼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는지 녀석이 눈을 떴다.

“침대에서 자. 입 돌아간다.”

“나가야 돼, 다시.”

“미친. 너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2주만 더 버티면 크랭크 업.”

녀석이 여전히 누운 채 나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뭐 어쩌라는 건지 싶어 다가가니 손을 아래위로 흔든다. 왜 뭐. 잡으라고? 손을 잡으니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 제 위로 넘어뜨린다. 녀석의 가슴팍에 얼굴이 그대로 묻혀 버렸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좋아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나 촬영 끝나면 여행 갔으면 하는데. 너 여름 휴가 안 쓰지 않았나.”

“어디로.”

“그냥 좀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으로.”

최수혁이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곳은 국내에 없다. 해외를 말하는 것 같았다. 생각 좀 해 보자 대답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녀석이 아침에 뿌린 듯한 향수 냄새가 옅게 맡아졌다. 스르륵 눈이 감긴다. 이렇게 달콤한 잠에서 깨어 몸을 일으키고 촬영을 나가야 한다니. 개 불쌍한 놈. 그런 생각을 하다 나도 모르게 진짜 잠이 들어 버렸다.

***

다음 날 점심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에 대학 선배를 우연히 만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밥 사 달라고 따라온 김시은이를 먼저 돌려보내고 선배와 회사 건물 앞에 세워져 있는 조형물 위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것도 있었지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따뜻한 카페라떼를 그에게 건네며 예전에는 못했던, 그러나 지금은 감히 물을 자격이 있다고 보는 질문을 꺼냈다.

“선배는 가족들한테 커밍아웃 어떻게 했어요?”

그는 학교 다닐 때부터 유명한 게이였고 그것을 굳이 숨기려 한다거나 하지 않았다. 스웨덴에서 오래 살다 와서인지 신입생 환영회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얘기해 주었고, 갓 어른이 된 우리는 모두 쿨한 척하느라 ‘아 그래요?’ 정도의 반응만 내보이고 그 놀라움을 속으로만 끙끙 앓았었다.

“어… 그냥 내가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얘기했어. 당연히 부모님이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셨고, 설명을 드리다 보니 성별이 남자라고도 말씀을 드렸어.”

“그랬더니요?”

“음? 뭐 조금 당황하시긴 했지만, 한 번 만나고 싶다고 하셔서 집으로 데려갔지. 다를 거 없었어. 같이 저녁 먹고 그 뒤로도 몇 번 더 초대해 주셨어. 그 친구랑은 지금 헤어졌지만.”

그는 거리낌 없이 자신의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왜 그런 걸 묻는지, 혹시 너도 같은 상황이 된 건지 등에 대해 전혀 묻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터놓기가 편했다.

“꽤 오래 함께할 거 같은 사람이 생겼는데, 남자예요. 의도치 않게 어머니한테 들킨 상태고.”

“아 그래? 미국 분이라고 하셨었나?”

“네, 그런데 캘리포니아 출신은 아니시거든요.”

그는 내 말뜻을 알아듣고 같이 웃어 주었다. 그리고 시간을 드리라고 했다.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그건 니가 이해해야 하는 거라고 했다.

“회사가 여기 근처인지 몰랐다. 자주 보자.”

그는 근처 투자 운영 회사에서 펀드매니저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동네가 워낙 빌딩 숲이라 싹 다 걷어서 거름망에 걸러 보면 아는 사람 서너 명은 확실히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내게 선택의 폭이 두 배로 넓어진 것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며 자신의 회사로 향했다.

“세연 팀장.”

마케팅 허스키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사원급들은 이미 사무실로 복귀했고 관리직들만 아직도 느긋하게 담배나 피우며 몇 분 더 때우는 시간대였다. 그가 한 손에 드립 커피를 들고서는 같이 들어가자며 나와 발걸음을 맞췄다.

“내일 알죠? 9시까지만 와 줘요. 행사는 11시부터 시작하니까.”

“알바를 더 쓰시는 건 어때요?”

“쓰고 있잖아, 알바.”

그가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보자, 시간당으로 따지면 내 연봉으로 얼마냐. 하루 8시간, 한 달이면 160시간, 일 년이면 1920시간. 시급 5만 원짜리로군.

“끝나고 뒷정리는 밑에 애들 시키실 거죠?”

“4시쯤 되면 행사 끝물이에요, 바로 퇴근해도 되지 뭐.”

앗싸. 좋은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군. 오랜만에 일찍 들어가서 최수혁과 영화나 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직접 찍을 수 있으면 더 좋고 흠흠.

퇴근하는 길에 엄마가 있는 호텔로 다시 전화를 했다. 방에 안 계신다고 하니 어디로 증발해 버리셨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 큰 어른을 뭘 걱정하겠냐마는 내가 답답하니 한국 휴대폰을 하나 사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 대기 상태로 정차중이었는데 꽃집이 시야에 들어왔다. 좀 더 편안한 미래를 위해 평생 해 본 적 없는 짓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세요.”

“선물할 건데요, 50대 후반이시고. 저희 어머니예요.”

꽃집 종업원은 웃으며 원하는 색상이나 품종이 있는지 물었다. 엄마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꽃 하면 역시 장미 아닌가. 새빨간 장미 스무 송이에 흰색 분홍색 꽃들이 섞였다. 저래 가지고 되겠나 싶었던 꽃다발이 어느새 휘황찬란한 자태를 갖추고 금박 포장지를 둘렀다. 여윽시 기술직. 익숙한 손동작으로 슥슥 잘라 내더니 꽃다발이 완성되었다. 감탄이 나왔다.

시들지 않게 곧바로 호텔로 향했다. 로비에 있는 컨시어지에 사정을 설명하고 메모지를 한 장 얻었다.

[I’m still your son. (저는 여전히 당신 아들이에요.)]

메모지와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주고 잘 부탁한다고 전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한 그가 곧바로 세팅해 드리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그를 올려 보내고 나니 호텔 로비에 태국 음식 전문점이 보였다. Take out이라는 팻말이 붙은 카운터에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최수혁에게 전화를 했다.

“어디야.”

“니네 집.”

“아직 여유 있으면 저녁 사 갈까? 너 태국 음식 먹어?”

“어머님 말씀 못 들었어? 난 다 잘 먹지.”

잘났다 그래. 전화를 끊고 줄을 섰다. 기다리는 동안 메뉴판에서 적당히 두세 개를 골라 두었다. 테이크 아웃인데도 호텔에 붙어 있다고 부가세를 받는단다. 돈 버는 거 참 쉽네. 음식이 포장된 종이봉투를 들고 호텔에서 나왔다. 잠깐 세워 둔 발렛 주차에 5만 원이 또 떼였다. 돈 쓰는 거 참 쉽네.

현관문을 열었더니 이미 말끔하게 빼입은 최수혁이 식탁에 앉은 채 나와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에 사냥 나가는 올빼미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같이 느껴졌다.

“스웨덴 어때.”

내가 건넨 음식 포장을 뜯으며 세팅을 하던 최수혁이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여행지 말이다, 여행지.

“가 본 적 없어. 너 좋으면 나도 괜찮아.”

난 사실 가 본 적이 있다. 대학 시절 유럽 전역을 돌며 혼자 배낭여행을 했는데 너무 추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호텔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스웨덴의 겨울 날씨를 깔보고 덤볐던 20대의 패기는 하루 만에 백기 투항으로 돌아섰다.

“가자. 너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저 말에 ‘우리’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뜻은 생략되어 있다. 아이디어는 오늘 마주친 대학 선배에게서 얻었지만 스웨덴 정도라면 최수혁도 선글라스 없이 돌아다닐 수 있을 듯했다. 자네가 월드 스타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군 그래.

지구 환경을 생각해 수저는 가져오지 않았다. 부엌에서 숟가락 두 개를 가지고 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호텔이다. 엄마가 내 선물을 확인한 듯했다.

“여보세요.”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감동이었나. 엄마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하며 착한 아들 코스프레를 했다. 내일 저녁? 그럼 6시에 호텔로 가겠다고 하고 끊으려는데 그녀가 정말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What?

내 목소리에 최수혁이 밥 먹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녀석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엄마가 너 바꾸라는데?”

그러자 녀석이 씹지도 못한 밥을 삼킨 채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

“네 어머니.”

급하게 먹던 밥을 삼키고 대충 물로 입을 헹군 녀석이 신줏단지 모시듯 내 휴대폰을 가져가 허리까지 굽신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네, 네네. 아닙니다. 네. 그러시죠. 네 어머니.”

저런 모습은 또 처음 보네. 가식적으로 팬서비스하던 모습도 아니고 싸가지 없이 제멋대로 말 툭툭 내뱉는 모습도 아니고 완전 공손 예절남처럼 굴었다.

웃었다가, 곤란해했다가, 다시 웃었다가, 진지하게 듣고, 다시 네네 한다.

나는 식탁에 앉아 다리를 떨며 그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내 녀석이 전화를 끊었다.

“뭐야, 뭐래. 무슨 일이래?”

최수혁은 다시 식탁에 앉을 듯하더니 시계를 한 번 보고 나갈 채비를 했다. 재킷을 입고 있는 녀석에게 나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쪼르르 쫓아가서 계속해서 무슨 얘기 했는지를 추궁했다.

“별 얘기 안 했는데. 그렇게 궁금한가?”

야이씨 별 얘기 아닌 거로 남의 집 엄마랑 10분을 통화하냐.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내용을 말하라는데도 내 반응이 재밌는지 녀석이 입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새벽까지 깨 있다가 물어보든가 그럼. 간다.”

정 없는 놈. 녀석이 가차 없이 내 말을 끊고 촬영하러 가 버렸다. 엄마에게 다시 전화해서 물어볼까 했다가 단념했다. 그런 것도 못 알아내는 사이라는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얼른 먹던 밥을 비우고 내일 출근할 때 입을 옷을 챙긴 뒤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바로 옆집으로 장소 이동.

최수혁은 적어도 4시쯤에는 집에 들어올 것이다. 그때까지 깨 있으면 줘 패서라도 알아내야지. 녀석의 샴푸 냄새가 밴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잠깐만 잠을 청했다. 잠깐 자고 4시에 일어나려고 알람도 맞추어 놓았다.

그리고 일어나니 8시 반이다. 젠장. 9시까지 백화점 행사장으로 가야 하는데 늦어도 완전 늦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옆에는 최수혁이 단잠에 빠져 있었다.

녀석이 깨지 않게 살살 일어나서 침실 문을 닫고는 쏜살같이 욕실로 달려가서 샤워를 했다. 머리를 감으면서 동시에 얼굴을 씻고 몸에 비누칠을 한 뒤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것을 헹구고 나왔다. 머리를 말림과 동시에 옷을 입고 왁스를 바르는 둥 마는 둥 하다 곧바로 녀석의 집에서 나왔다.

14분 34초.

달리고.

차에 타서.

급발진하고.

끼어들기 해서.

35분 10초.

헉헉거리며 백화점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이동재가 혀를 찼다.

“밤에 뭐 하느라 일찍 일찍 안 자고 지각이야.”

“닥쳐, 니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나랑 카풀 안 하니까 요새 완전 늦게 다녀.”

“이동재 대리, 시말서 쓰고 싶나요?”

권력의 힘에 눌린 동재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며 프로그램 표를 건네주었다. 오늘 백화점 1층에서 K양과의 사진 촬영 이벤트가 있을 것이다. 그 후에는 고객들에게 샘플을 나눠 주는 이벤트가 있는데 그냥은 안 준다. 주소와 전화번호 이름을 받고 주는 것이다.

바로 이게 핵심 이유이다. 개인 정보 보호법에 의해 고객 정보를 제3자에게 맡길 수 없어 본사 직원들이 나와서 직접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나와 이동재가 지원을 나온 이유이고 오늘 우리는 1인당 300명분을 해내야 한다.

“안녕하세요.”

K양이 도착했다. 그녀의 본명은 강희진. ‘K양의 발칙한 비밀’이라는 영화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여배우. 차기작 ‘그 여주의 남편은 제가 갖겠습니다’에서 최수혁과 같이 출현했다 눈 맞아 사귀게 된 케이스.

아직 중형급 연예인이지만 각종 CF를 섭렵하고 이번 우리 회사 제품 모델로 양측 모두 시너지 효과를 보았다. 아직까지도 본명보다는 데뷔작에서의 별명인 K양이라고 많이 불리며 요즘은 영화보다 광고로 이미지 소비가 심하다.

그러나저러나 나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니.

“세연 팀장. 나 좀 잠깐 봐요.”

박희건 팀장이 곤란한 표정을 하고 나를 행사장 뒤로 불러냈다. 무슨 일인가 따라가 봤더니 인사팀 귀염둥이가 몸살로 오늘 회사를 결근하셨단다. 밤에 뭘 했길래!

“어쩌죠? 병원을 가야 할 거 같은데 호민이는 혼자 살아서.”

“가 보셔야죠.”

“여기 좀 맡겨도 돼요? 어차피 애들이 다 알아서 할 거니까 딱히 지시할 건 없을 건데.”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의 쿨한 승낙에 세연 팀장이 오늘 나와 줘서 정말 다행이라며 그는 황급히 백화점을 떠났다. 지극정성이다 대형견. 저쪽도 하루 이틀 갈 사이는 아닌 게 확실했다.

행사장으로 나와 보니 K양을 보러 온 팬들 반, 공짜 샘플 받아 가려고 온 사람들 반 해서 벌써 줄을 서고 있었다. 아침부터 미용실에서 머리를 볶아 왔는지 치렁치렁한 웨이브를 휘날리며 K양이 대기실 의자에 앉아 준비중이었다.

“동재야 여기 의자 저기로 치우자.”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당황한 K양이 얼떨결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좁아서요.”

나는 그녀가 앉아 있던 접이식 의자를 동재에게 건네주고 방긋 미소 지었다.

“팀장님 저희 오픈 5분 남았는데요.”

“응 갈게.”

마케팅부 꼬맹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K양이 ‘아….’ 하며 내가 매고 있던 관계자 스트랩을 확인했다.

“인사 잠깐 하고 바로 시작할게요.”

“네!”

아직 신인 티가 나는 K양이 살짝 긴장한 듯 나를 보고 대답했다. 귀엽네. 최수혁이 이런 스타일 좋아했구나 싶었다. 에이 시발.

와아아아- 그녀가 나타나자 팬들이 함성을 질렀다. 안녕하세요오- 로 시작한 그녀의 인사가 짧게 끝나면 사람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한 명씩 사진을 찍으면 된다. 물론 다 찍어 줄 수는 없다. 그러니 추첨을 해야 한다. 추첨은 누가 하느냐. 박건희가 없으니 당연히 내가 하는 거다.

“삽십… 육 번 고객님!”

워어어! 저 멀리서 굵직한 성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팩을 맨 곰 한 마리가 앞으로 나왔다. 자 다음은…

“구십… 사 아니다 삼 번 고객님!”

조용히 왼쪽에서 안경을 쓰고 대포 카메라를 드신 50대 아저씨 한 분이 걸어 나왔다.

“자 마지막으로… 백… 이십……. 일 번 고객님!”

와아아악! 고딩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한 명이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앞으로 나왔다.

역시 내 기억력은 정확했다. 번호표를 뽑아 갈 때 곁눈짓으로 봐 두었던 번호를 이렇게 정확하게 외운다 내가.

곰과 대포 카메라 그리고 까까머리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한 명씩 찍어 드리세요. 내 말에 진행 요원들이 한 명씩 차례로 K양과 포즈를 취하게 했다.

“야, 제대로 안 해?”

갑자기 날아온 나의 호통에 카메라를 들고 있던 1년 차 사원이 움찔하고 놀란다. 내가 가서 카메라를 뺏어 들고 직접 촬영에 임했다. 더 가까이 서세요. 더 더. 친밀하게. 그렇지. 어깨 손 좋다. 옳지.

스무 장씩 찍었다. 30분이면 끝나야 할 사진 행사가 1시간이 돼서야 겨우 끝이 났다. 다음은 샘플 나눠 주기. 우리가 고객 정보를 입력하면 옆에서 K양이 샘플을 나눠 주게 된다.

내가 누구냐. 대기업 6년 차, 워드의 달인. 기획부 ‘미친개’로 소문난 신재식이 밑에서 3년을 버텨 낸 엑셀의 제왕. 나의 고객 정보 입력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오케이 이름은 김소미씨, 은평구 통일로 팔십구길 십이 다시 십구. 공일공? 공일공에 사사육육에 삼삼삼삼. 오케이 다음.”

300명? 훗, 우스웠다. 600명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밀려드는 샘플 요청에 제품이 헷갈리기 시작한 K양이 ‘아 이거요? 아, 요거요?’ 하며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그 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가 눈치가 보였는지 하하하 웃으며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커다란 몸집의 매니저가 내게 다가와 조금 천천히 진행해 달라고 대신 말을 전했다.

못 이기는 척 그러겠다고 했다. 옆에서 이동재가 나를 존나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뭐 인마.

나는 자리를 뜨고 행사장 뒤편으로 이동했다. 휴대폰을 꺼내 쌓여 있는 이메일 처리를 시작했다. 그렇게 삼십 분쯤 업무를 보고 있으니 K양이 매니저를 구박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 힘들어. 그래서 내가 사진만 찍고 간다고 했잖아 오빠.”

애먼 매니저에게 투정 부리고 있는 듯했다. 사진만 찍고 가는데 우리가 행사 비용으로 너한테 수천만 원씩 주겠니? 걸터앉았던 테이블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스윽 다가갔다.

저승사자를 보는 듯 놀란 얼굴이 된 K양이 매니저를 앞세웠다. 당황한 매니저가 변명을 했다.

“아 네. 잠깐 쉬는 시간이라고 하셔서….”

누가? 난 그런 지시 한 적 없는데.

찬찬히 고개를 내려 K양을 뜯어보았다. 실물로 보니 예쁘긴 하다. 쿨하게 인정. 인형같이 생겼고 귀엽다. 최수혁이 하라는 대로 다 해 줬을 것 같은 순진한 얼굴이다. 그녀는 내가 계속 쳐다보니 민망한지 혀를 삐죽 내밀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강희진씨. 연예인이 제일 잘 보여야 할 사람이 누구일까요.”

뜬금없는 나의 질문에 그녀가 당황하며 FM식 정답을 내놓았다.

“네? 아… 그야 팬들이죠.”

“아니죠.”

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건 광고주죠.

“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연예인이 제일 두려워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아… 그게 팬들인가?”

“아니죠.”

그건 대기업 광고주.

내가 우리 회사 마케팅 팀장의 약점을 잡고 있어. 무언의 눈빛을 보냈는데 읽었으려나.

“하하하… 희진아, 쉬는 시간 끝난 거 같네.”

매니저가 황급히 K양을 다시 끌고 행사장 위로 올라갔다. 나도 다시 남은 100명을 채우기 위해 그들을 따라 이동했다. 자자,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잠깐 쉬었다고 그새 줄이 늘어나 있었다.

***

우르릉 꽝꽝!

오후가 되니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몰아쳤다. 가을장마가 온다더니 태풍을 동반한 장대비가 쏟아져 백화점을 급하게 나가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그 덕에 우리도 행사를 조금 일찍 접어야 했다. 가을 날씨 변덕 한번 오지네요.

6시까지 엄마를 만나러 호텔에 가야 하는데 차가 밀릴 것 같았다. 뒷정리를 대충 밑에 있는 애들에게 시키고 예정보다 일찍 백화점을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빗길 운전에 퇴근 시간까지 겹쳐 신호 한 번 받는 데만도 10분이 넘게 걸렸다. 앞 유리로 줄줄줄 흐르는 빗물을 와이퍼가 1초마다 닦아 주는데도 시야 확보가 힘들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느낌으로 겨우 S 호텔에 도착하니 벌써 6시 10분이다.

호텔 안에 있는 한식 레스토랑에서 기다린다고 했으니 뭐 조금 늦어도 괜찮겠지. 빨리 휴대폰을 사 드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예약자 이름을 입구에서 얘기하니 일행분들은 벌써 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단다.

그래요. 음? 일행분들?

레스토랑 매니저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벌써 엄마 목소리가 밖에까지 새어 나왔다. 깔깔 웃다가 물개박수 치고, 어머나 감탄 한 번 하고 다시 웃고…

룸 문을 열었더니 엄마가 손을 흔들며 ‘세연아’ 한다. 그리고 맞은편에는 역시나… 최수혁이 앉아 있다.

“앗 방을 헷갈렸네요. 죄송합니다.”

다시 문을 닫고 곧장 앞으로 직진했다. 화장실이 저기구나. 식은땀이 흐른다. 나를 안내하던 매니저가 ‘여기 맞습니다. 손님’ 하고 크게 부른다.

민망해서 몸을 돌려 다시 룸 안으로 들어갔다. 나 어디 앉으라고. 엄마 옆? 최수혁 옆? 일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면서 테이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내 손을 끌어당긴 녀석이 자신의 옆에 앉혔다.

“비 맞았네.”

“어.”

머리가 좀 젖었다. 녀석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정면을 보니 엄마 역시 뚫어지게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너무 불편해 이런 자리…

“너 왜 여기 와 있어?”

녀석이 웃는다. 어머니가 어제 전화로 같이 보자고 하셨단다. 원래는 늦게 등장해야 맞는 건데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되는 바람에 1시간 먼저 와서 둘이 노닥거리고 있었단다. 허허 내 참 어이가 없네.

“수혁이 한국에서 엄청 유명하더라. 아까 호텔 매니저도 사인 받아 갔어.”

“언제 봤다고 수혁이야.”

“Should I call him 최서방 then? (그럼 최서방이라고 할까?)”

“Mom!”

어떻게 이렇게 상황 적응력이 뛰어나신 건지 모르겠다. 충격 받으신 거 풀어 주려고 왔는데 내가 오히려 충격을 먹고 있었다.

“소리 지르지 마, 귀 아파. 여기 갈비찜 맛있대. 우리 그거 시키자.”

“Who told you that. (누구한테 들었어, 그런 건.)”

“Who else. (누구겠니.)”

나는 옆에 있는 최수혁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엄마와 내가 투닥거리는 걸 옆에서 즐겁게 감상중이다. 신났네 신났어.

엄마, 지금 속고 있는 거야. 이 새끼는 엄마가 생각하는 그런 친절한 놈이 아니야.

그러나 나 빼고 누구에게나 친절한 최수혁씨가 호텔 매니저를 불러 직접 주문을 했다. 특별히 맛있게 부탁드린다는 말도 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어색하지 않게 대화도 잘 해 주고, 엄마의 오두방정에 맞장구도 잘 쳐 줬다.

어떤 모습이 녀석의 진짜 성격인지 정말 헷갈릴 때가 있다. 오늘이 특히나 그런 날이었다.

2시간을 떠들고 나왔는데 비가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호텔 방으로 그냥 올라가면 되는 엄마는 편하겠지만 우리는 이 빗길을 뚫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게다가 차가 두 대다. 따로 들어가기가 싫었던 우리는 누구 차로 갈 건지 정해야 했다. 안 내면 술래 가위바위보.

훗. 역시.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페라리에 올랐다…

***

빗줄기는 조금 약해졌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을 따라 부르며 핸들을 꺾었다. 두 번째 가위바위보는 운전대 잡을 놈 내기였는데 역시 또 졌다. ‘기사님 수고’ 라는 말과 함께 조수석에 먼저 오르는 녀석의 엉덩이를 차 주고 싶었지만 우리는 둘 다 피곤했다.

엄마한테 기 다 빨렸어.

“나름 적응하려고 노력하시는 거야. 니가 이해해 드려.”

“마치 경험자인 듯 들리는데?”

“우리 집에선 알아. 나 원래 숨기는 거 없이 살았거든.”

“부모님이 시골 사신다며.”

“응.”

“근데 이해하고 넘어가셨다고?”

“응.”

아니 대체 어떤 시골에 사시는 분들이길래 그렇게 쿨하게 아들 성생활에 대해 이리도 오픈 마인드이신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내 표정을 슬쩍 보더니 최수혁이 웃는다. 분명히 나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자네 부모님 고향이?”

“음… 반포.”

내 이럴 줄 알았다.

“혹시 부모님이 땅 같은 거 가지고 계신가?”

“응.”

“얼마나.”

“글쎄, 한 5만 평 되나?”

에이씨… 그래서 녀석이 지가 번 돈 혼자 다 쓰는구나. 시골 사신다길래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인 줄 알았더니 부모님은 서울 출신에 시골 땅 사서 내려간 전형적인 부잣집…

“정세연! 정면 주시!!”

끼이이익-

헉….

갑자기 튀어나온 검은 물체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녀석의 고함에 순간적인 운동신경으로 일어난 반작용이라 뭐가 뭔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남자가 골목길에 나뒹굴고 있었다. 동공이 확대된 채 벨트를 풀고 밖으로 나가니 먼저 뛰쳐나간 최수혁이 이미 그를 일으키고 있었다.

쏴아아-

“괜찮으세요?”

비를 맞으니 제정신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했다. 차를 살펴보니 직접적인 접촉은 아니었던 것 같고 빗길에 미끄러진 것으로 보였다. 이분도 골목길에서 나오다 갑자기 차를 보고 놀라 혼자 넘어졌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우산 때문에 앞이 안 보여 가지고. 어…?”

최수혁의 얼굴을 알아본 남자가 놀라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명함을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혹시 병원 가 보셔야 할 것 같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보험 회사에 전화를 해야 할까 싶었는데 최수혁이 이미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 아니야. 다치신 것 같지는 않아. 응. 운전은 세연이가 했어. 응. 형 연락처 드릴게. 고마워.”

매니저에게 상황 보고가 끝난 최수혁이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엉겁결에 두 장의 명함을 받아 든 남자가 우산을 다시 집어 들었다.

남자가 멀쩡히 혼자 걸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차로 돌아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힘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와. 내가 운전해.”

운전석으로 가려던 나를 녀석이 막아섰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조수석에 올랐다. 녀석이나 나나 흠뻑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괜찮아?”

녀석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하마터면 사람을 칠 뻔했다. 그것도 최수혁 차로. 내일 아침 연합뉴스에 실릴 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

최수혁이 히터 온도를 올렸다. 후우욱 하고 더운 열기가 차 안을 감싸고 나니 내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녀석이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정세연 정신 차려. 아무도 안 다쳤잖아.’ 그런 얘기를 해 주는데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휴대폰 내놔.”

녀석이 내 휴대폰을 찾았다. 건네주니 멋대로 내 얼굴을 비춰 잠금 해제를 하고 무언가를 설정한다.

“외동이라며. 부모님도 한국에 안 사시는데 사고 터지면 어쩌려고. 긴급 연락처 내 번호로 했어.”

녀석이 다시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맞는 말이긴 하다. 내가 만약 큰 사고가 나면 병원에선 누구에게 연락을 할까. 회사? 이동재? 다 기분 나쁘다. 최수혁이 제일 먼저 달려와 줬으면 좋겠다.

“넌 누구로 되어 있어?”

“매니저 형.”

당연하겠지. 그래도 난 좀 욕심이 났다.

“내 번호로 바꿀 수 있어?”

“얼마든지.”

최수혁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설정을 바꾸었다. 녀석의 휴대폰 긴급 연락처에 ‘정세연’ 이름이 들어가 박혔다.

진지한 관계에는 책임이 따른다. 내가 그 누군가의 책임자가 된다는 것은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되고 싶었다. 내가 정신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최수혁이 시동을 걸고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둘 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얼굴을 쓸어내리다 젖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최수혁이 벌써 웃통을 까고 욕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나도 셔츠 단추를 풀며 뒤를 쫓았다.

쏴아-

샤워 헤드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밑에서 전라가 된 최수혁이 눈을 감고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옷을 벗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만 급한 거 아니었나 본데.”

마지막 남은 옷을 욕실 카펫 위에 내동댕이친 채 성큼성큼 다가가 떨어지는 물줄기를 같이 맞았다. 따뜻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고개를 들고 녀석의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덤비지 않고.”

나의 선전포고에 치타가 목덜미를 물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최수혁은 아낌없이 모조리 발라 먹을 기세였다. 이미 손은 내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었고 머리를 헤집고 있던 오른손이 뺨을 타고 들어와 입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녀석의 손가락을 빨면 빨수록 애가 탔다. 물줄기가 튀었고 타액이 흘러내렸다. 길고 야릇한 손가락으로 나를 마음껏 농락하더니 내 턱을 움켜쥐고 그대로 혀를 넣어 주었다.

시작이 너무 좋아서 이미 아랫도리에서 뜨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녀석의 혀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빨던 나는 자연스레 한 손으로 최수혁의 발기된 성기를 감싸 쥐고 있었다.

아직 아니네. 오기가 생긴 나는 허벅지를 들이대고 조금씩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것이 곧바로 손에서 느껴질 만큼 딴딴하게 부풀어 오른다. 녀석이 살짝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동시에 나까지 딴딴해졌다.

키스는 이어졌고 각자의 손은 서로의 것을 쥐고 있었다. 거나하게 커진 두 개의 성기가 뜨거운 물줄기와 함께 쿠퍼액을 쏟아 냈다. 손길이 조금씩 빨라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도 모르게 녀석을 도발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입술을 덮쳐 혀뿌리까지 빨다 놓아주며 귓가에 속삭였다.

“…Fuck me.”

녀석이 거칠게 나를 돌려 욕실 벽으로 밀쳤다. 곧바로 뒤에서 손가락이 들어온다. 단단한 가슴팍이 등 뒤에서 느껴진다. 목은 다시 물렸고 두 손이 포박당했다.

얼마 가지 않아 미끈한 액체가 느껴지는 살덩어리가 입구를 누른다. 진짜로 급했구나. 망설임 없이 밀려 들어오는 뜨겁고 단단한 것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자연스레 허리가 숙여지고 욕실 벽을 손으로 지탱해야 했다.

“흣….”

내 신음 소리에 녀석의 한 손이 내 허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 바람에 몸이 밀착되었는지 더 깊이 들어와 버린 녀석의 성기가 내벽을 휘몰아치며 온몸에 전율을 선사했다. 나도 모르게 또 욕이 나온다. 시발, 너무 좋다.

아래를 보니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최수혁의 팔뚝에 힘줄이 잔뜩 서 있었다. 욕실 벽을 지탱하고 있던 두 손 중 오른손을 내려 녀석의 손을 잡았다.

욕망과 감정이 하나가 되자 절정이 빨리 다가왔다. 피스톤질이 빨라지고 곧바로 녀석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조금의 시차를 두고 나도 사정했다. 뚝뚝 흘러내리는 하얀 정액들이 물줄기와 함께 금세 씻겨 내려갔다.

어느새 욕실의 온기는 열기로 바뀌어 있었고 우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로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

서로의 속옷이 각자의 집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을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는 그게 누구 속옷인지를 모르니 자꾸만 내 속옷 코너에 녀석의 것이 섞여 들어갔다. 용케 거기서 자기 것을 또 하나 찾아낸 녀석이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오늘 강희진씨 만났어.”

뜬금없이 시작된 나의 말에 녀석이 수건을 내리고 나를 쳐다본다.

“우리 제품 모델이잖아. 오늘 행사 있어서 지원 나갔거든.”

“신경 쓰여?”

“회사 일인데 그런 게 어딨어. 완전 애던데? 니 취향에 좀 놀랐어.”

“너 만나기 전엔 취향이란 거 없었어. 가리지 않았다가 정답이겠고.”

“지금은 바꼈다는 거야?”

“지금은 너처럼 편식이 매우 심해.”

젖은 머리에 젖은 눈빛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드러내 놓고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전보다는 자주 진지해졌다.

“최수혁.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참기가 힘들어.”

녀석의 단골 멘트를 내가 던졌다. 빵 터져 버린 최수혁이 이마에 손을 대며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아 진짜 훈남이다. 그 웃음소리에 덩달아 마음이 훈훈해진 내가 오늘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한테 잘해 줘서 고마워.”

진심이었다. 허둥대지 않고 도망가지도 않았으며, 너무 자연스럽게 나의 가족을 받아들여 준 것이 고마웠다. 그게 설령 한 번 보고 말 사이였다고 해도 녀석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예의를 차려 준 것이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녀석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넘겼다.

“소개시켜 줄까, 우리 가족?”

예상치 못했던 질문에 잠깐 침묵으로 응대했지만 곧 ‘아니’라고 기분 좋게 넘길 수 있었다.

“급할 거 없잖아. 우리 엄마는 사고였고. 인연이 길면 언젠간 뵙게 되겠지 뭐.”

녀석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 옷 바구니를 향해 던졌다. 골인-

침대에 누워 각자의 휴대폰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메일과 주가를 확인하다 뉴스 포털로 들어갔다. 낯익은 사진이 있어 클릭해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루신 그룹 행사장에서 만난 K양, ‘팬들과 함께 하는 시간 즐거워요’]

휴대폰을 최수혁에게 건네며 사진을 보여 줬다. K양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진 그 구석에서 팔짱을 끼며 앉아 있는 내 모습이 함께 찍혔다. 마, 내가 이제 인터넷 기사에 사진도 찍히고 그런다.

“질투 안 한다더니 얼굴이 똥 씹은 표정인데.”

녀석이 비웃으며 내가 찍힌 부분만 터치하여 확대시켰다.

“그럼 내가 니 전 여친 만나고도 아무렇지 않기를 바라는 거냐?”

“그럴 리가.”

나는 다시 휴대폰을 빼앗아 테이블에 올려 두고 벽에 손을 뻗어 불을 껐다. 녀석도 보던 휴대폰을 놓으니 방 안이 완전 컴컴한 어둠으로 변했다.

“최수혁. 이 손 치우시지?”

그 소리에 장난스레 내 다리 사이로 들어간 녀석의 커다란 손이 위로 올라와 이번엔 가슴을 꽉 조였다.

“질투하는 정세연은 너무 황송해서 잠이 안 오는데.”

“아씨, 쫌!”

녀석의 팔에서 벗어나려 버둥버둥 거리다 포기하고 그냥 눈을 감았다. 지도 피곤할 텐데 금방 자겠지 뭐.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정수리 위에서 잦아진 녀석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대로 방 안이 조용해졌다. Good night.

***

일주일이 더 지났다.

그사이 엄마는 굳이 최수혁을 불러내 두 번 더 식사를 같이했고, 촬영 막판이라 정신없었을 텐데도 녀석은 1시간이라도 짬을 내서 초대에 응했다. 그 외에는 오랜만에 친구분들을 만나기도 했고 혼자 쇼핑도 다니고 영화도 보며, 가출한 사람 치고는 너무 잘 놀고 다니셨다.

엄마는 최수혁과 셋이 있을 때도 나와 단둘이 있을 때도 우리 사이에 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프라이버시 존중 차원에서였는지 아니면 깊이 알고 싶지 않아서인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아빠 역시 엄마에게서 아무 말을 못 들은 건지 전화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셨다.

그사이 마케팅 팀 지원이 끝났고 밀린 업무들로 한 며칠 야근을 해야 했다. 자기는 이제 여유가 생길 만한데 왜 니가 다시 야근을 시작하냐며 성질을 부리는 최수혁이 웃겼다. 너 거의 두 달 동안 제시간에 들어온 날 없었거든?

-다시 나가긴 했어도 너 들어오는 시간에 꼬박꼬박 집에 들렀던 것 같은데 아닌가?

“생색내는 거냐?”

-응. 이번 작품 여러모로 정말 힘들었거든.

녀석이 어울리지 않게 앓는 소리를 했다. 그래, 그렇긴 했겠다. 중간중간 나랑 신파극도 찍어야 했고 에로 영화도 찍어야 했으니까.

“참, 예매했어. 토요일 저녁 비행기야. 프랑크푸르트 찍고 갈 거야, 직항은 없어. 비즈니스라도 괜찮아?”

보통은 이코노미 타도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일반적인데 녀석에게는 혹시 퍼스트 클래스 아니면 안 타는 거 아닌가요 싶어서 물어봤다.

-상관없어. 내 여권 침실 서랍에 있어, 알아서 찾아가. 호텔은?

“오늘 예약할 거야.”

-고마워, 알아보는 것도 귀찮았을 텐데.

“학교 선배가 스웨덴 출신이라 찍어 주는 대로 다 했어. 안 그래도 같이 밥 한 번 먹자는데, 그 선배… 이쪽이거든.”

-그래, 내일 저녁 괜찮아.

“오케이. 나 다 왔다. 끊어.”

와… 10분 넘게 최수혁과 욕 한 번 하지 않고 통화를 했다. 기록이다. 요즘은 내 쌍욕이 줄었고, 녀석의 빈정댐이 없어졌다.

최수혁이 분명 이번 작품이 끝나면 한동안 쉰다고 했었다. 나는 일을 쉴 수가 없지만 녀석은 원하면 일을 쉬었다. 자영업이 좋긴 좋구만.

차를 주차하고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12층으로 올라가 우리 집을 지나쳐 녀석의 집 키패드 번호를 눌렀다. 잊어버리기 전에 녀석의 여권 정보를 입력해야 했다.

“아저씨 왜 거기로 들어가요?”

헉.

1206호 딸래미가 제집 문 앞에서 헤드폰을 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이 시발 타이밍 진짜.

“아, 우리 집인 줄 알고 헷갈렸네?”

그 순간 또로롱- 울리는 녀석의 집 잠금장치 해제 소리.

“열렸는데요?”

돌처럼 굳은 나는 병신 같은 변명이라도 해야 했다.

“어… 이 집 비밀번호가 나랑 같네. 하하하하. 내가 바꿔야겠네. 너무 흔한 거로 해 놨네….”

말끝을 흐리며 슬금슬금 옆으로 이동한 뒤 우리 집 비밀번호를 잽싸게 누르고 들어와 문을 닫았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만약 내가 최수혁과 스캔들이 터지면 그건 백퍼 1206호 딸래미의 소행일 것이다. 무섭다. 진정한 권력이란, 터트릴 스캔들을 안 터트린 채 쥐고 있는 것이지. 어린것이 벌써부터 대한민국 검찰 흉내를 내고 있다.

***

“세연아 여기!”

선배를 발견한 내가 손을 들어 답했고 뒤따라오던 최수혁에게 저쪽임을 눈빛으로 알렸다.

“늦는다더니, 별로 안 늦었네. 안녕하세요. 심재원입니다.”

“최수혁입니다.”

큰손과 큰손이 악수를 했다. 선배는 순수 한국인이지만 체격이 컸다. 스웨덴 우유는 발육 상태를 촉진시키나 보다. 뭐 하긴 최수혁의 키나 체격을 보면 대한민국 맘마밀도 밀리지는 않는 듯싶다.

나도 어디 가서 키로 꿀린 적은 없는데… 미국 의문의 1패.

“바쁜 사람 불러 놓고 맛없는 거 대접하면 안 되는데.”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웃기지 마, 내가 낼 거야.”

여기 돈 잘 버는 남자 세 명이 모여 서로 지가 밥값 내겠다고 우기고 있다. 누가 보면 진짜 꼴값을 떤다 하지 않았을까? 둘이서 뭘 시키나 봤더니 무난한 가격대로 골랐다. 그럼 나는 안심하고 제일 비싼 스테이크로.

“호텔 예약했어? 내 이름 팔아먹으라니까.”

“네, 선배 이름 듣고 지배인이 반가워했어요.”

“뷰 좋은 곳으로 줬을 거야. 거기 좋아요, 나도 애인이랑 귀국할 땐 항상 거기로 가니까.”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어울려요, 두 사람.”

선배가 우리를 바라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내가 최수혁과 함께 등장하면 대부분 먼저 놀라고, 환호하고, 긴장하며 쓸데없는 질문들을 했다. 잘생겼다거나 팬이라는 말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재원 선배의 표정에는 초반부터 쭉 변화가 없었다.

그는 최수혁을 그냥 후배의 파트너로 대해 주었고 그게 통했는지 녀석도 어느 때보다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았다. 최수혁이 편하게 대한다는 건 가식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다리를 꼬고, 선글라스 낀 채 비스듬히 앉아서 가끔 큭큭거리거나 말도 한 번씩 짧아진다. 녀석이 인간적으로 이 자리를 즐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말뫼도 갈 거죠?”

“아마도요. 차 렌트할 거긴 한데.”

“거기 레스토랑 내가 나중에 찍어 줄게요. 스웨덴 음식 지뢰밭이 많아서.”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한참을 스웨덴 음식 흉을 보았다. 그 얘기를 들으며 최수혁이 내가 앉은 의자 뒤로 자연스레 팔을 걸쳤다. 손가락으로는 저도 모르게 내 와이셔츠 카라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어느새 목덜미를 만지던 손이 터지는 웃음에 자연스레 내 어깨를 잡았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음식이 나오고 우리는 한동안 먹는 데 집중했다. 내가 주문한 스테이크와 같이 구워져 나온 당근을 최수혁이 말도 없이 가져갔다. 재원 선배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유익하고 쓸모가 많았다.

그래서 결국 계산은 누가 했느냐.

당연히 최수혁이 냈다. 화장실 간다고 일어난 적도 없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카드를 준 건지, 이미 결제 끝난 영수증에 사인만 받으러 온 종업원을 보고 우리 둘은 기함을 했다. 신통한 재주가 있다 녀석은.

일주일이 더 지났다. 어제오늘 인터넷에 녀석의 기사가 많이 올라왔다. 크랭크업을 한 영화 제작사에서는 간단하게 주연 배우, 감독의 인터뷰를 따서 각 신문사에 돌렸다. 덕분에 같은 내용의 기사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쫑파티를 끝내고 돌아온 최수혁은 우리 집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다음 날인 금요일 내가 출근할 때까지도 자고 있길래 깨우지 않았다. 하루 종일 전화도 없는 걸 보면 기절이라도 한 듯싶었다.

한 시간 일찍 퇴근하고 곧바로 S 호텔로 직행했다. 오늘 엄마가 떠나는 날이다.

아들 등골 그만 빼먹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아빠의 전화가 있었다. 한참을 둘이서 지지고 볶고 하더니 결국엔 사랑해 여보야로 끝이 나며 엄마의 화려한 외출은 막을 내렸다.

올 때는 작은 캐리어 가방 하나 달랑 가지고 왔던 양반이 뭘 이렇게 많이 산 건지 가방이 3개로 늘었다. 엄마는 기내용 가방 하나만 총총거리며 끌고 간다. 뒤에서 그녀의 커다란 이민 가방 2개를 밀고 오는 나를 향해 왜 이리 더디냐며 채근했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심부름꾼 역할만 하고 있다.

“어디까지 가세요?”

“보스턴이요. 아, 저는 안 가고. 어머니 혼자요.”

커다란 가방 두 개를 수화물 벨트에 올려 준 뒤 수속을 마쳤다. 기내식을 좋아하지 않는 엄마를 위해 식당에 들러 미리 끼니도 해결해 드렸다. 집에 돌아가는 게 좋은지 엄마는 생글생글 웃으며 기념품점에서 아빠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

이제는 미국 사람 다 된 아빠에게 한국에서 가져가는 조미김과 옥수수 차 티백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자기 먹으려고 사는데 괜히 남편 핑계 대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제 슬슬 들어가 보셔야 할 시간이 되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 당황했었지만 막상 가신다고 하니 또 섭섭한 마음은 들었다. 엄마도 혹시 그런 생각 하실까 봐 올겨울이나 내년 초에 한 번 들어가겠다고 했다.

출국장 앞에서 대답 없이 미소 짓고 있던 엄마가 다 큰 아들을 껴안았다. 키를 맞춰 드리려고 허리를 숙이니 엄마가 낮은 톤으로 조용히 말을 꺼냈다.

“Are you sure? (진심이야?)”

이 아줌마 은근히 감성적이다.

“More than ever. (그 어느 때보다도.)”

엄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작게 Wow…하고 감탄을 했다.

“Then I’m happy too. (그럼 엄마도 행복해.)”

한참을 안아 주던 엄마가 등을 토닥이며 나를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출국장 안으로 사라졌다. 눈가가 좀 젖어 있었던 것 같기도 했는데. 착각인가. 나는 엄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녀 자신도 어려운 연애를 했었다. 그래서 나를 이해해 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그냥 엄마니까. 다른 이유는 필요 없었던 것 같다.

-울었어?

“미쳤냐.”

드디어 수면 마취가 풀리신 건지 최수혁이 전화를 했다. 뭘 좀 먹여야 할 것 같아서 배고프냐고 물었더니 필요 없단다. 자기는 편식이 심해서 지금 땡기는 건 딱 하나라고 했다. 변태 같은 놈.

“최수혁, 미리 경고하는데.”

-해.

“너는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나서 지금이 아침 같겠지만 나는 퇴근하고 공항까지 다녀오느라 심신이 지쳤거든.”

-어차피 시차 적응해야 하지 않나?

“제발.”

녀석이 웃으며 알았다고, 오늘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주부터 6일짜리 연차를 써서 주말, 공휴일 붙여 열흘의 휴가를 만들었다. 출발은 내일. 벌써부터 소풍 가는 아이처럼 신이 났지만 몸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조금씩 날씨가 서늘해지고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아파트 지하 주차장의 낮은 온도에 걷었던 셔츠 소매를 내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혹시라도 또 누가 있을까 싶어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 참 여긴 우리 집이지. 이제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거실로 들어서는데 최수혁이 없다. 침실에도 없다. 서재 문을 여니 책상 의자에 앉아 뭔가를 읽고 있었다. 대본인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침대에서 꼼짝도 안 할 때는 언제고, 어느새 깔끔하게 샤워도 하고 옷도 갈아입었다. 늦은 밤에 왜 혼자 때 빼고 광내고 있는 건지 진짜…

나는 그대로 문틀에 몸을 기울이고 팔짱을 끼고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긴 다리가 살짝 움직이는 듯싶더니 대본 한 장이 다시 넘어갔다.

“정세연씨 오늘은 감상이 너무 긴데.”

내가 쳐다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녀석의 시선은 여전히 대본에 가 있었다. 큰 어깨 위로 살짝 흘러내린 니트는 또 왜 저렇게 잘 어울리는지.

“이번 작품 끝나면 좀 쉰다며.”

“쉴 거야, 반년 정도. 그래도 들어오는 시나리오 봐 두는 건 해야 하거든.”

고개를 든 시선이 나에게로 꽂혔다. 눈이 마주쳤다. 내가 팔짱을 풀고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최수혁의 목울대와 깎아 놓은 듯한 턱선이 그대로 보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색다른 흥분감을 선사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을 만큼 거리를 좁혔다. 녀석이 대본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양팔을 벌려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안 건드리겠다는 약속은 유효했다. 내가 녀석의 무릎에 올라 양손으로 뺨을 감싸 쥐었지만 최수혁의 팔은 여전히 자유로웠다. 성인 남자 두 명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던 의자가 삐걱 소리를 냈다. 채 날아가지 않은 녀석의 샴푸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람에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숨을 한 번 골랐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키스를 했다. 무방비 상태인 최수혁의 입술을 내 마음대로 농락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녀석의 양팔이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고 내 허리를 감싼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녀석의 혀가 들어와 감겼다.

최수혁의 작전에 완벽하게 말려든 금요일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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