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먼저 말하는 놈이 지는 게임
녀석은 더 자겠다고 했다. 잠 못 자다 죽은 귀신이 붙은 건지 진짜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황금 같은 일요일인데 뭘 하고 보내야 잘 보냈다고 소문이 날까.
티비에서 의미 없는 연예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여자 아이돌들이 단체로 나와 체육 대회를 한다. 구르고 넘어지고 깨지고 울기까지. 그러고 보면 평범하게 직장 다니며 소소하게 돈 버는 거 나쁘지 않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 빼먹기가 어디 쉬운 줄 아나. 가만 보면 불로소득 같아 보이는 직업들이 사실은 개고생하는 경우가 많은 법이다.
-그래서, 자자 그래서 우리 루루는 이상형이 누구죠?
-착한 남자요.
-솔직하게 가야지, 연예인 중에 누구?
-저… 영화배우 최수혁씨 좋아합니다! 꼭 밥 한 번 같이 먹고 싶어요! 꺄아, 나 어떠케.
-솔직합니다, 우리 루루 솔직해요! 자 보너스 10점 갑니다!
녀석은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연예인이다. 말주변이 없어서 티비 프로에는 절대 출연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싸가지가 없어서 못 나가는 거겠지. 저런 데 나가면 성격이 바로 들통날 거다. 성질나면 사회자를 때릴지도 모르는 일이야. 자동 조정으로 맞춰 둔 에어컨 바람이 강해졌다. 그만큼 한낮의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대학 동기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한 명 더 데리고 가도 되냐]
음… 대충 또 뻔한 패턴이 이어지는 중이다. 오랜만에 본 동기 놈, 갑자기 한 번 더 보자고 먼저 연락해서 누굴 데리고 나오겠다는 건. 너무 뻔한 클리셰인데.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기억 못 하세요?”
클리셰가 내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왜 자기를 모르냐며 나의 기억력을 탓했다. 과 동기만 해도 30명. 학부 합쳐 대충 100명, 선후배 다 합쳐서 500명이 넘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기억하겠니. 졸업한 지 벌써 6년 차인데.
“야, 기억 안 나? 우리 3학년 조별 발표할 때 중간에 참여했었잖아.”
“그때 선배님이 윤아 닮았다고 해 주셨는데….”
내가? 내가 왜 그랬을까. 가끔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말 하나하나를 박제시켜 놓고 니가 뱉은 말 니가 책임져라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것에 매우 익숙하다.
“기억나지! 왜 기억이 안 나, 경영학부 08학번 윤아 여신. 알지 내가.”
“선배님 저 09예요.”
“알지, 09학번. 생생하게 기억나. 오랜만이네?”
동기 녀석의 눈빛이 당황함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는 순간적으로 녀석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대충 넘어가자 제발.
“희재 오빠가 얼마 전에 선배님이랑 같이 저녁 먹었다는 소리 듣고 한 번 뵙고 싶어서 끼워 달라고 했어요.”
오빠 소리 하는 걸 보니 둘은 자주 연락하는 사이인 것 같고. 굳이 셋이 보게끔 상황을 연출한 건 둘 중 하나다. 동기 놈이 이 후배를 맘에 두고 있거나, 이렇게 연결해 주고 자기는 다른 사람 소개받기로 했다거나 뭐 그런 등가교환의 사이일 거다.
“희재랑은 자주 만났나 보네? 나랑 밥은 수요일에 먹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았을까?”
“아, 오빠가 저희 회사 앞에서 미팅이 많아요. 종종 연락 와서 점심 같이 먹어요.”
1번이로구만. 걱정 마라 오희재. 나는 흔들림 없이 너와의 우정을 지속해 나간다.
“그래서 윤아는 뭐 먹고 싶니? 여기 파스타 잘하는데 좋아하나?”
“선배님 제 이름 송희예요.”
“알지 알지. 알지만 윤아라고 부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우리는 파스타 시키고, 희재야 너는 피자 시키고 나눠 먹으면 되겠다.”
“어? 어. 그래. 여기요.”
피자 한 판과 파스타, 샐러드, 이것저것 시켰더니 테이블이 꽉 찼다. 최수혁 때문에 아침부터 억지로 죽을 먹었더니 식욕이 땡겼다.
“선배님 루신그룹 다니시죠. 제 친구도 거기 다녀요. 저 거기 가끔 놀러 가는데.”
“어, 빌딩 지하에 맛집이 많아. 점심시간에 유용하지.”
“다음에 놀러 가면 연락해도 돼요?”
“그래 연락해. 밥 사 줄게.”
나는 웃으며 휴대폰 번호를 찍어 주었다.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 모르는 희재 녀석이 괜스레 피자 판에 묻은 치즈 조각을 손으로 떼어 내기 시작했다.
위잉-
좋아, 최수혁. 남자는 타이밍이지.
“아이구, 여친님한테서 문자가 왔네. 확인해 볼까.”
이번엔 윤아의 얼굴이 벌게지고 희재 녀석의 표정에 생기가 돌아왔다.
[또 어딜 기어 나갔어]
“너 여친 있었어? 나 몰랐네. 지난번엔 없다고 하더니.”
동기 녀석이 내가 만들어 준 밥에 개똥을 뿌렸다. 이런 눈치 없는 새끼.
“아 응. 그땐 썸만 탔는데 지금은 사겨.”
“아…. 그랬구나.”
동기놈이 어쩌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윤아를 쳐다보았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으나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라는 표정. 윤아가 울상이 되어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긴 세연 선배님이 솔로인 게 더 이상하긴 하죠.”
나 1년간 솔로였는데 그동안 이상했나. 그때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봐라, 그새를 못 참고…
“아 왜.”
-문자를 읽어 놓고 왜 씹어.
“오빠 밖이라고 했잖아.”
-…….
“금방 들어간다니까 그새를 못 참고 전화를 해.
-…미쳤어?
“오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금방 들어가니까 약 먹고 누워 있어.”
“야 여친이 집에 와 있었던 거야? 우리 때문에 괜히 싸우는 거 아니야? 빨리 들어간다 그래.”
희재의 말이 수화기 너머로 들렸는지 녀석이 한숨을 쉬며 알았다며 끊었다. 확인사살까지 당한 윤아는 입이 뾰로통하게 나온 채로 파스타를 먹고 있다.
“얘 걔 친구야. 전에 너 좋다고 쫓아다니던 레이싱 모델 있었잖아 왜.”
“어? 누구?”
아이고 이 멍충아.
“아니 왜 내가 먼저 작업 들어가려 했는데 걔는 너 좋다고 하는 바람에 내가 무리하게 유턴한 걔 말이야.”
한참을 방황하더니 그제야 나의 눈빛을 읽은 희재가 드디어 시나리오에 올라탔다.
“아… 아아 그래. 걔. 그렇지, 나 좋다고 했던… 걔 친구야?”
“어, 꿩 대신 닭이라고 차선 변경했지 내가.”
윤아의 눈빛이 살짝 달라진다. 안 듣는 척하면서도 우리 얘기를 놓칠세라 포크로 파스타를 돌리고 있었다.
“근데 성격이 좀 지랄 맞아. 뭐랄까 사람들 앞에서는 착한 척 내숭 떠는데 둘만 있으면 승질머리가 드러워져.”
“아 그래… 그래도 너 용케 받아 주는구나.”
“어. 외모가 좀 돼. 그… 몸매도 좀 되고.”
내가 최수혁을 두고 요딴 식의 대화를 나눈 걸 놈이 알면 최소 사망이다. 하지만 자리에 없는 사람 씹는 건 죄가 아니랬다. 대충 자리는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으니 얼른 먹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간만에 무공을 좀 썼더니 피곤하기도 했고.
“여기 택시가 잘 안 잡히거든? 희재야, 니가 집까지 데려다줘라.”
“어? 어 그럴까?”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
“그래 잘 가. 너도 들어가라.”
둘을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소소한 일요일의 이벤트를 끝내고 아파트로 걸어 들어갔다. 혼자 짜증 내고 있을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 편의점에서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오빠는 바쁘다더니.
“우정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 처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 이해해라.
-일부러 애인 있는 척이라도 해야 했던 건가.
“음… 애인 있는 ‘척’이라.”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의미 부여할래?
“그럼 나 뭐라고 해야 되냐 앞으로.”
-뭐가
“나도 인기 많아. 이런 일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고. 소개팅 거절하는 것도 일이고 무슨 데이 무슨 데이 할 때마다 선물 처리가 곤란하다고.
-대충 핑계를 대.
“핑계? 뭐라고 핑계를 대. 핑계로 성공한 사람은 김건모밖에 없어.”
-시덥지 않은 농담 하지 말고 빨리 올라와.
“답을 줘야 할 거 아니야, 답을.”
녀석이 휴대폰 너머로 웃었다, 눈치챘나 보다.
-정세연, 아무리 그래 봐야 내 입에서 그런 얘기 듣기 힘들어. 수작 부리지 마.
놈은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그래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다음 작전이 떠오를 때까지는 일보 후퇴다.
***
나는 햄스터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열심히 쳇바퀴를 굴리면 굴릴수록 속도는 빨라지고 빨라진 속도를 맞추려 더 빨리 움직이면 쳇바퀴가 미친 듯이 더 빨라지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직장인의 구렁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쳇바퀴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월급날이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아침부터 만세 삼창으로 시작하는 팀 회의 분위기가 활기찼다. 이번 달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데스크톱에 다운로드해 놓은 ‘사직서 표준양식(5).doc’의 숫자가 6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자신감.
이제 이 월급은 잠시 잠깐 나의 통장에 왔다가 바람처럼 카드 대금으로 사라지겠지만, 통장에 찍힌 ‘급여’라는 그 숫자는 내 존재감을 증명해 주는 평가이기도 했기에 월급날은 언제나 뜻깊다.
“점심 회식 한 번 할까? 월급도 들어왔는데.”
조팀장이 웃으며 팀원들에게 말했지만 누구도 긍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월급도 들어왔으니 회식이라뇨, 월급도 들어왔으니 각자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저랑 가시죠, 팀장님. 새로 생긴 해물탕집 괜찮더라구요.”
나의 몸을 던지는 희생에 팀원 모두가 ‘오… 역시 정대리님.’ 하는 표정으로 우러러보았다.
“그럴까? 나 해물탕 좋아. 그러자 그럼.”
“네, 이동재 사원도 함께 갈 겁니다.”
순간 당황하는 동재 녀석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이런 형제 같은 새끼, 내가 설마 너를 버리고 가겠니. 나의 흐뭇한 미소에 녀석은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빌딩 지하에 새로 생긴 해물탕집은 오픈빨을 받는지 손님이 많았다. 팀장 찬스로 10분 일찍 이동한 우리는 재빨리 테이블을 잡고 주문을 넣었다.
“정대리 이제 우리 회사 몇 년 차지?”
“꽉 채워 5년, 횟수로 6년 찹니다.”
“응, 제법 쌓였다. 나 이번에 상무님이랑 면담한 거 알지?”
“네, 안 그래도 팀장님 총괄부장 다는 거 아니냐고 말들 많아요.”
“아우… 소문 빠르다.”
“진짜일까요, 그 소문은?”
나는 그녀에게 수저를 놓아 주며 차분한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물론 나는 대답을 알고 있었다. 현재 우리 기획부에는 두 명의 팀장이 있다. 하나는 오팀장, 하나는 조팀장. 조팀장이 기획부 전체 총괄로 올라간다면 팀장 자리가 빌 것이고 당연히 조팀장 밑에 있던 신차장이 그 자리를 잡겠지. 하지만.
“응, 아직 발표 안 나서 좀 미리 얘기하긴 그런데. 그렇게 될 거 같아. 조직 개편 곧 있을 건데 우리 팀은 두 팀으로 나눌까 생각중이야.”
“저희 팀을요? 두 개로요?”
동재가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야, 너무 오버하면 티 나잖아. 이 새끼 어제 나랑 작전 짤 때는 잘할 수 있다고 해 놓고서 전개하는 방식이 영 미덥지 않다.
“응, 신재식 차장도 차장 단 지 오래됐고. 근데 그 밑에 지금 애들 다 넣기엔 좀 그래. 호불호가 갈리잖아, 신차장.”
“그렇죠. 특히 젊은 사원들한테는 좀, 꼰대 소리를 듣곤 하죠. 그래도 뭐 경력이 있으시니 일 하나는 확실하게 하시잖아요.”
사내 평판이 안 좋다는 걸 슬쩍 흘려서 갈등구조를 상상하게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한다는 객관적인 나의 이미지를 조심스레 흘린다.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신차장 팀장은 달아 주되 사이즈는 좀 줄일까 해. 오팀장 팀에서 몇 명 차출하고 우리 팀에서 몇 명 차출해서 새로 팀 하나 짤까 해서.”
“그렇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하지만 팀장님, 팀이 세 개로 나뉜다면 팀장 자리가 하나 비게 됩니다. 그럼 누가 또 팀장을 달아야 할까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대리.”
“네.”
“정대리 연차 정도면 좀 빠르긴 해도 주변에서 다른 말은 안 나올 거 같고. 또 애들이 정대리는 잘 따르니까. 그 팀 정대리가 한번 맡아서.”
“잘할 수 있습니다!”
동재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어휴 저 등신’ 한다. 나도 모르게 우렁찬 대답이 한발 일찍 나왔다. 조팀장이 웃으며 ‘자신감 있어 좋다 야’ 했다.
“그래 그럼 우리끼리는 얘기 된 거로 하고 인사발표 나기 전까진 비밀로 해.”
됐어! 역시 조팀장은 나를 승진시킬 생각이 있었던 거다. 일밖에 모르는 골드 미스, 이번 신제품이 잘 터져서 고현성 상무 눈에 들었다는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임원들이 비밀을 지키려 해도 조직개편의 소문은 발 달린 듯 사내로 퍼져 나가는 법. 조팀장의 사이즈가 커지면서 밑에 있던 애들도 자동 승진될 게 뻔한데 팀을 쪼갠다면 팀장 할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겠나. 더군다나 이번 신제품에 내가 영혼을 갈아 넣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직장인의 구렁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쳇바퀴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
바로 승진이다.
“그럼 이제 정팀장님이네.”
“야 이거 애미 애비도 모르는 극비야. 말조심해.”
최수혁의 손에 있던 치킨 조각이 빈 그릇으로 이동했다. 날개를 안 먹나 보군. 나는 치킨 박스를 뒤적거리다 살코기가 많은 조각을 녀석 쪽으로 밀어 넣었다.
“월급도 올려 주나?”
“뭐, 쬐금 올려 주겠지. 연봉은 이직할 때 올리는 거야. 사내 진급으로는 어림도 없어.”
“정확히 얼마 받아? 그 정도 되는 대기업 팀장 달면 얼마 받고 사는지 궁금한데.”
“너 그거 선 넘는 질문이야. 내가 너 이번 영화 얼마 받고 찍는지 물어보면 알려 줄 거냐?”
“9억 5천.”
치킨 맛이 뚝 떨어졌다. 이 직업은 불로소득이 맞다. 나라도 9억 5천 준다면 몸 키우고 중국 가서 밤샘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발, 너 진짜 많이 버는구나.
“정세연 팀장님은 순진한 거야 아니면 나를 무시하는 거야.”
새삼 녀석이 대단해 보였다. 난 옆집 사람이라 그저 직업이 영화배우라고 생각했던 건지 한 번씩 녀석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나 간다. 치킨 맛이 떨어졌어.”
“자고 가.”
“뭐?”
“자고 가라고. 나 내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못 들어와.”
나는 예전에도 녀석이 나에게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때의 나는 주먹을 날렸지만 지금 나의 대답은,
“알았어.”
이러하다.
***
“계 탔냐, 왜 이렇게 싱글벙글이야.”
재수 없는 신차장이 또 시비를 걸었다.
“차장님은 웃는 얼굴에도 침을 뱉을 분이시로군요. 존경합니다.”
“이 새끼가 또.”
나는 얼른 내 자리로 몸을 피했다. 어서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니까.
내가 싱글벙글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저 머저리 같은 꼰대 녀석과 이제 팀장으로서 맞먹을 날이 다가오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늘은 주문해 둔 나의 새 차가 입고되는 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0년을 넘게 타고 다닌 나의 구식 아우디. 수고했다. 다음 생에서도 튼튼하고 완성도 높은 독일 차로 태어나 줘.
“여기 서류 사인 주시구요. 네 여기도. 자… 다 됐습니다.”
중고차 딜러에게 키까지 모두 넘기자 이제 정말 안녕이었다. 이 옆 조수석에 정말 수많은 여자들을 태웠다. 이 차와 함께 나의 다사다난했던 연애사도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택시를 잡으러 도로로 나갔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빈 택시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최수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9억 5천 배우님 말씀하십쇼.”
-어디야.
그럼 그렇지, 니가 뭐 다른 말을 하겠냐.
“교대역에서 택시 잡는 중.”
-웬 택시야. 차는 어쩌고. 나 지금 버스 터미널 근처 지나는데 픽업해 줄까?
녀석의 말에 택시를 잡으려 들었던 손을 곧바로 내렸다. 나를 향해 깜빡이를 넣으며 다가오던 택시 한 대가 어물쩍거리다 다시 출발한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콜택시가 온다네요.
“3번 출구 쪽으로 오면 교붕빌딩 있는데. 거기 서 있어.”
-알았어. 10분 줘.
빌딩 입구에 서서 잠시 이메일을 확인하고 있으려니 얼마 안 가 녀석의 페라리가 보였다. 같은 주황색인데 택시보다 열 배 비싼 차로군. 힐끔힐끔 쳐다보는 행인들을 제치고 얼른 조수석에 올랐다.
“아이고, 기사님 수고하십니다. 내곡동이요.”
녀석이 안전벨트를 매는 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집으로 안 가고? 아, 너 오늘 차 나오는 날이라고 했나?”
“응, 너 바쁘면 중간에 내려 줘도 된다.”
들은 건지 만 건지 녀석이 곧바로 3차선으로 진입했다. 아슬아슬하게 좌회전 신호를 받더니 양재 IC 방향으로 틀었다. 독일 차 싫어한다더니 언제 또 와 본 건지 알아서 아우디 매장까지 잘도 찾아가는군.
뜻밖의 방문에 환대 아닌 환대를 받았다. 각종 선물까지 트렁크에 실어 준 매장의 지점장은 그 대가로 ‘번창하세요’ 라는 녀석의 사인이 담긴 종이 한 장을 받고 흐뭇해했다.
그렇게 각자 차를 타고 아파트로 들어온 우리는 선물이라며 넣어 준 발 매트, 왁스, 쿠션, 차량 핸드폰 거치대 등등을 양손 가득 쥐고 어렵사리 12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는 동안 저녁 메뉴 때문에 또 한바탕 다툼이 일어났다.
물론 승자는 나다. 녀석은 혼자서 배달을 시킬 수 없다.
“너도 그냥 아이디를 하나 만들어. 설마 이 최수혁이 그 최수혁이라고 누가 알겠어. 언제까지 나한테 빌붙어 살래? 어차피 요즘은 배달 와도 문밖에 놔두고 간다, 니 얼굴 보여 줄 필요가 없어.”
“트라우마 있다고 얘기했잖아.”
그랬다. 최수혁이 데뷔하기 전 중국집에 배달을 시켜 먹고 쿠폰 10장으로 지불한 적이 있었다. 그걸 가지고 배달원이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나 본데 승질이 더러운 최수혁이 용감하게 지 이름으로 그 중국집에 평점 테러를 하고 리뷰를 올린 것이다. 그걸 하필 누가 캡처해서 인터넷에 올렸는데 중국집에서 그놈이 맞다며 인증을 해 줘 버렸다. 나도 몰랐는데 나무위키에 ‘최수혁 쿠폰 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올라가 있어 알게 되었지.
“먹고 또 나가 봐야 되냐?”
“응, 내일 새벽에나 들어오겠다.”
“니가 너무 열심히 촬영하니까 궁금해진다, 그 영화.”
“지금까진 안 궁금했다는 소리네.”
“어이쿠 전화가 왔네. 아 네, 문 앞에 가져다 놓으셨다구요. 네네 감사합니다. 야 배달 왔다.”
나의 허접한 꽁트를 어이없이 쳐다보는 녀석을 뒤로한 채 문을 열고 복도에 놓인 돈까스 포장을 가지고 들어왔다. 돈까스는 뭐다? 김밥장고 돈까스가 최고다.
“너 내일 새벽에 들어오면 배고프겠다. 혼자 시켜 먹을래? 내 아이디 가르쳐 줄까?”
녀석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니가 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거지? 라는 표정이군.
“휴대폰 줘 봐.”
녀석의 휴대폰에서 민족의 어플을 다운받아 내 아이디로 로그인한 뒤 돌려주었다. 돈까스 포장을 뜯으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최수혁. 그런 녀석을 무시하며 돈까스를 써는 나.
“안 먹니. 썰어 줘야 먹니.”
“뭐야, 빨리 말해. 무슨 꿍꿍이야.”
역시 거래를 아는 남자와는 이야기가 빠르다.
***
현대 직장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시간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일요일 저녁이다. 왜? 다음 날 아침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월요일 아침 출근길은 모두에게 고통스럽다. 빽빽한 만원 전철에 오르며, 꽉꽉 막히는 도로에서 나는 왜 여즉 이 회사를 계속 다니고 있나를 늘어지게 후회하는 거다. 나도 지난주까진 그러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는 그 누구보다 열의에 찬 모습으로 출근하고 있다. 때마침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어깨춤을 추었다.
♪ Who let the dogs out! (누가 개를 풀어놨어!) Who who who who~ Who let the dog out! (누가 개를 풀어놨어!) Who who who who~ ♪
멀리서 휴대폰을 들고 있는 동재의 모습이 보였다. 그새를 못 참고 또 전화질이다.
-아, 어디냐고!
“다 왔다니까.”
-어디, 안 보인다고!
“1분 안에 간다.”
1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해 녀석의 아파트 입구에 섰다. 그러나 동재 녀석은 엄한 데만 쳐다보며 전화로 계속 소리를 질렀다. 조수석 창문을 살며시 내렸다.
“자네가 찾고 있는 사람 여길세.”
“뭐야 어디… 헉! 와씨 이게 뭐야. 형, 미쳤어? A7 뽑는다고 하더니 왜 페라리를 뽑았어. 돌았구나 드디어….”
페라리의 시저 도어가 하늘 위로 열렸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나와 페라리를 번갈아 보던 동재는 어찌 된 일이냐며 계속 다그쳤다. 일단 타라 이 자식아, 다 쳐다보잖아.
“와씨, 간지 미쳤다. 뭐야 형. 로또 된 거야? 회사 드디어 관두는 거야?”
새끼 놀래기는. 나는 금요일에 있었던 최수혁과의 거래를 살며시 들려주기로 했다.
“그래서 민족 어플 아이디 빌려주는 대신 일주일 동안 차 바꿔 타기로 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급발진으로 페라리의 아름다운 엔진 소리를 들려주었다. 물론 최수혁은 내 제안을 한 번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내 아이디에 물려 있는 신용 카드로 마음껏 먹고 싶은 것을 배달시켜 먹으라며 메뉴 선택권을 주자 ‘일주일만이야’ 하며 딜에 승낙했다.
“야… 이게 또 남남커플은 이런 게 좋네. 차 바꿔 타기. 이거 어디 가서 시승조차 못 해 보는 모델일 텐데.”
“동재야, 물론 차는 독일 차가 최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좋은 차는 뭐다?”
“음…. 비싼 차?”
“그렇지.”
나는 으르릉거리는 엔진 소리를 내며 내부 순환 도로에 합류했다.
“근데 사고 나면 어쩌려고? 보험은 추가된 거야?”
“동재야, 무사고 10년에게 예의 좀 갖춰 줄래?”
“아니 걱정돼서 그러지, 이거 긁히기라도 하면 형 월급 다 때려 박아야 할 텐데?”
“동재야, 대한민국에서 사고 제일 안 나는 차는 뭐다?”
“음… 튼튼한 차?”
“비싼 외제차다 임마.”
나는 2차선 진입을 위해 좌측 깜빡이를 넣었다. 그와 동시에 홍해 갈라지듯 나에게서 멀어지는 이 차들을 보라. 앞차와의 간격 80미터를 칼같이 유지하며 달려 주는 이 법치주의자들. 나는 보란 듯이 요리조리 차선 변경을 했지만 누구 하나 빵빵거리지 않았고 누구 하나 먼저 비키지 않은 자들이 없었다.
♪ Who let the dogs out! (누가 개를 풀어놨어!) Who who who who~ ♪
대한민국 정말 좋은 나라야.
모두에게 양보 받으며 순식간에 회사 주차장으로 골인했다. 시트가 너무 포근해서 아침부터 잠들 뻔했다며 오버하는 동재와 함께 1층으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카페에서 시커먼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뽑아 들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책상 앞에 도착하니 때마침 계열사 직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지난번 미팅 때 논의했던 피드백이 궁금했나 보다.
“아 예, 안 그래도 오늘 메일 드리려고 했는데, 일단 위에서는 반응 괜찮았구요….”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 휴대폰을 쥔 채 빈 회의실을 찾았다. 마침 4인용 회의실 하나가 비어 있어 거기서 통화를 했다. 일단은 긍정적인 말을 좀 해 줘야 한다. 미리 쿠션을 깔아 줘야 두들겨 맞는 사람도 지가 맞았다는 걸 전화 끊고 나서야 깨닫기 때문이다.
“예예. 그래서 그쪽 라인은 일단 다 수정해 주셔야 할 것 같구요. 다음 미팅 때는 2차 샘플 받았으면 하거든요, 예예.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 네에, 들어가십쇼.”
잘됐다. 이렇게 말로 때웠으니 오전 중에 해야 할 일 하나가 없어진 셈이었다. 회의실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옆방에서 누가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놈이 또 월요일부터 깨지고 있나 싶어 벽에 귀를 대고 들어 봤다.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회사에서 이러시지 않으셨음 합니다 팀장님.”
팀장한테 깨지는 거 치고는 대화가 좀 이상하다…?
“나랑 관계 가질 때부터 각오한 거 아니었어?”
“그 얘기… 그만하셨으면 합니다.”
오… 이건 뭐다? 소재는 사내 연애, 장르는 에로 먼저 찍고 온 신파극인데 목소리가 둘 다 남자네.
“저 회의 들어가야 합니다.”
“야 정호민!”
나온다 나온다. 나는 얼른 회의실에서 나가며 모른 척 얼굴을 확인했다. 한 명은 처음 보는 놈이고 한 명은 마케팅 박건희 팀장이다.
이야… 이것 봐라. 나 신입사원 때부터 싸가지 없기로 유명했던 마케팅부의 시베리안 허스키가 게이였다니. 역시 사람은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게 많아지는 법이군. 얼른 자리로 돌아가 정호민이라는 사람을 사내 네트워크에서 검색해 본다. 인사과에 이런 사람이 있었군. 허스키씨는 이런 놈이 취향이셨다 이거지.
“나 주간 회의 들어가는데 아무나 한 명 따라 들어와.”
조팀장이 월요일 아침마다 들어가는 주간 업무 회의는 각 부서 팀장들이 모두 모여 정보 공유를 하는 자리이다. 회의록 작성을 위해 팀의 막내가 하나씩 들어가는데 대체로 1년 차 녀석들이 돌아가며 당번을 맡는 편이다.
“네 그럼 제가.”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팀장님!”
벌떡 일어나 손을 높게 든 나를 보고 1년 차 병아리가 당황해한다.
“아, 아닙니다 대리님. 제가 갈게요.”
“아니야, 내가 들어갈게. 나도 좀 듣고 배워야 하기도 하고….”
알잖아요 팀장님, 우리끼리 해물탕 먹으며 나눈 대화.
나의 표정을 읽은 건지 조팀장이 ‘그래 그럼 정대리 들어와’ 하며 앞장섰다. 나도 곧 팀장 달 거니까 미리미리 익숙해지면 좋은 거 아니겠나라고 생각하셨겠지만 딱히 그래서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그 회의에는 마케팅부도 함께 참여를 하니까요.
노트북을 들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저기 오는구나, 시베리안 허스키. 회사 생활이 지루할 땐 뭐다? 사내 가십거리를 즐겨라.
회의 분위기는 뻔했다. 치고 박고 니 탓 내 탓. 다들 짬이 되는 팀장급들이다 보니 콕 짚어 말하기보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이 마치 무림 고수들의 공력 싸움을 보는 것 같다.
“백화점에 행사 좀 더 돌리죠, 물 들어오는 김에 노 저어야지.”
“행사 기획도 기획팀에서 다 짜 주실 건가 보죠?”
“짜 준 대로 진행만 된다면야 서너 개씩 짜 드려요.”
“하긴 뭐 책상 앞에서 PPT만 만드니까 일주일에 네다섯 개도 가능하겠네요.”
“그거 하라고 월급 받는데요 뭘.”
오랜만에 보는 내 상사의 전투 모드. 기획팀의 연봉이 여기 모인 네 개 부서들 중 가장 높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승진을 눈앞에 두고 있는 조팀장의 여유는 모두의 무릎을 꿇리기에 충분하다.
분노에 찬 박건희 팀장의 얼굴이 보인다. 굳이 감평을 하자면, 뭐 그냥 발에 채는 대형견 훈남 정도? 일에 미쳐서 미혼인 줄 알았더니 다른 이유가 있었구만.
“정세연 대리, 할 말 있습니까?”
아씨… 계속 쳐다보고 있었더니 딱 걸렸다. 아닙니다, 하고 다시 노트북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메일 라이브로 회의록 작성을 하고 있던 나는 회의가 끝날 때쯤 오탈자 확인을 끝내고 곧바로 팀 전체 송신을 눌렀다.
완벽한 폼. 번호로 딱딱 매겨진 과제들. 5분 만에 읽어 낼 수 있는 간결한 문체에 회의 종료 1분 안에 받아 보는 신속함까지. 이런 걸 바로 회의록이라고 한다 이놈들아. 매번 중구난방식의 회의록에 마침 지쳐 있던 나는 5년 짬밥의 위대함을 몸소 알려 주었다.
회의록도 보냈고 하니 일어서서 나가려는데 회의실 문 앞에 시베리안 허스키가 눈을 부리부리 뜨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세연 대리, 점심 약속 있어요?”
음… 없지만 있다고 할까? 없어도 네놈이랑은 같이 먹기 싫다고 할까? 에이씨, 그래도 팀장은 팀장인데 거절하면 지랄하겠지?
“넵. 저는 백반, 좋아합니다.”
사회 생활은 뭐다? 기왕 해야 하는 일은 웃으면서 해야 하는 거다.
***
“어디까지 들었어요?”
생선 가시를 골라내던 나를 향해 박건희 팀장이 물었다. 역시 들킨 게로군.
“별로 들은 건 없는데요. 뭐… 팀장님 미치는 꼴을 보고 싶어 하는 정호민 대리의 각오 없음을 탓하셨던 것 정도?”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다 들었네.
“대충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는 알겠네요 그럼.”
“음… 회사에서 이러면 안 되는 사이라는 것 정도?”
“세연 대리 역시 쿨하네.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이건가.”
“아는 놈 중에 가리지 않고 먹는 놈이 있어서요.”
“그 친구 부럽네요, 아무리 그래도 아직까진 한국에서 이해받기 힘든데. 난 친구 놈들 무서워서 일부러 여자친구도 만들고 그랬거든요.”
“뭐, 웬만한 강심장 아니고서는 편하게 드러내진 못하죠.”
정말 최수혁은 강심장이다. 게다가 연예인 주제에 당당하다 아주.
생선 가시와의 사투 끝에 드디어 살코기만 남은 갈치구이를 하얀 밥 위에 올렸다. 뿌듯하군. 박팀장은 내가 정갈하게 발라 놓은 가시와, 생선 살이 다 흩어져 엉망이 된 자신의 접시를 보았다. 그렇게 깨작거리고 있는데 테이블에 올려 둔 박팀장의 전화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응. 밥 먹는 중이야. 아니, 밖에 나왔어. 응? 아니야, 기획부 정세연 대리하고 둘이.”
나를 힐끔 보더니 일부러 내 이름 석 자와 ‘둘이’를 강요하는 저 수상한 눈치. 돌아간다, 또 다른 클리셰가. 하지만 난 이런 상황에도 매우 익숙하다.
“그래, 그럼 퇴근하고 거기서 보자. 끊어.”
다시 수저를 드는 그를 은근히 떠보았다. 화해하셨나 봐요?
“그런 거면 좋겠네요. 호민이는 이쪽이 처음이라 설득하기가 은근 힘들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지. 복기해 보면 나도 그런 경우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나는.
“혹시… 맞으셨어요? 정호민 대리한테?”
“네? 아, 아니요 그렇진 않았어요. 많이 놀라긴 했어도 뭐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반응까진 보여 줬어요. 그래서 내가 계속 들이댄 거고.”
음… 역시 내가 쉬운 상대는 아니었겠군. 최수혁 이 새끼, 은근 존경스러운데?
가시와 생선 살이 뒤엉켜 카오스가 된 접시를 포기한 박팀장이 계란말이로 밥 한 그릇을 해치웠다. 밥은 자기가 먹자고 했으니 자기가 쏘겠다고 했다. 지갑을 열 생각도 없었던 나는 ‘아닙니다, 각자 내죠’ 한 번 해 주고 망부석처럼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튼 박팀장님, 저는 팀장님의 그 ‘마음’ 응원합니다.”
김시은의 단골 멘트를 내가 써먹게 될 줄이야. 이놈은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밥을 사야 할 것이다. 그동안 김시은이 나에게서 뜯어먹은 것 2배로 받아 낼 것이야.
“고마워요. 그… 세연 대리, 그래서 말인데….”
후식으로 나오는 싸구려 다방 커피를 입에 물고 있던 나는 순진하게 뭐요? 해 버렸다.
“세연 대리가 나 좀 도와줬으면 싶어서.”
***
퇴근길은 언제나 즐겁다. 술 약속이 없어도 즐겁고 내일 또 출근해야 하지만 일단은 즐겁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 즐거운 이유가 있다.
회사 빌딩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최수혁의 페라리가 외롭게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봐라, 옆에 주차된 차가 하나도 없다. 이 빽빽한 주차장 한가운데 혼자 덩그러니 서서 어디 용기가 있으면 문콕이라도 한 번 해 보라는 듯 웅장함을 뽐내고 있다. 아, 갑질하는 느낌이 너무 좋은데 일주일만 더 빌려 달라 해 볼까 생각중이었다.
-그래서 그 팀장이란 사람이랑 일부러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뭐 상대쪽 질투심 유발 작전 같은 건가?
혹시나 싶어 전화해 봤는데 마침 저녁 먹는 중이라며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어, 나 원래 이런 데 종종 이용당해. 어쩔땐 나도 모르게 이용당하고 멱살 잡힌 적도 있어.”
그랬다. 학교 다닐 때부터 주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장난을 많이 치는 바람에 온갖 루머에 시달리고 영문도 모르고 대학 선배에게 쌍욕을 먹은 적도 많았다.
-그 팀장이란 사람은… 나에 대해 알아?
“알겠지, 너 유명하잖아.”
-그게 아니고. 나랑 너 사이.
“나랑 너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걸렸구나 최수혁. 오늘도 열심히 낚싯줄을 올려 보자.
-정세연, 시도는 좋은데 그 정도론 안 돼.
“어쨌든 시도는 괜찮았다 이거지? 그럼 쭉 한번 이쪽으로 가 보겠어.
-그러다가 후회한다.
“걱정 마. 선 안 넘어. 나는 코미디가 체질이잖아. 참고로 그쪽 상대도 정 대리야, 혹시나 나 몰래 너 혼자 아침 드라마 찍으면 안 되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
-깔끔하네. 역시 프로야.
당연하지. 난 신파는 체질에 안 맞는다고 했잖아. 신호 걸린 김에 휴대폰으로 미리 민족의 배달 주문을 넣었다. 20분 후면 도착하니까 집에 도착하면 딱 맞겠군. 평소에 자주 시켜 먹는 초밥 세트를 결제하려 보니 웬걸, 할인 쿠폰이 엄청나게 들어와 있다.
최수혁 이 자식 얼마나 시켜 먹은 거야. 촬영중에는 한 번씩 배우들이 밥차를 쏘기도 한다는데. 녀석이 도시락이라도 돌렸나 싶었다.
나의 예상대로 20분 만에 아파트 주차장으로 진입한 후 집에서 옷을 갈아입으니 딱 맞게 초밥 세트가 도착했다. 근데 단골이라 서비스로 항상 주던 장국이 빠졌다. 생강 절임도 내가 좋아해서 엄청 많이 주는데 어째 좀 오늘따라 부실하다. 뭐 바쁘면 그럴 수도 있겠지. 혼자 월요일 저녁 식사를 끝내고 넷플릭스를 돌려 보았다.
위잉-
[결국 밤샘 촬영 들어갈 듯해]
[응 그럴 거 같더라니]
문자는 덤덤하게 보냈지만 나는 몹시 서운했었나 보다. 갑자기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는 티비 화면에 정신을 차려 보니 30분 넘게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늦게라도 집에 들어온다는 말에 혼밥도 마다 않고 달려와서 기다렸더니. 옆집 살아 좋은 점이 요즘은 별로 없는 것 같다.
***
[세연 대리, 지금이요!]
회사 메신저에 박건희 팀장의 메시지가 떴다. 그의 커다란 얼굴이 박힌 프로필 사진이 메신저에 뚜룽 하고 뜨는 바람에 순간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저 먼저 퇴근합니다.”
그래 봐야 우리 팀에 남은 사람은 서너 명이 전부이다. 나는 얼른 일어나 가방을 챙겨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미리 퇴근 준비를 한 탓인지 채 20초가 걸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서 서성이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박팀장님 퇴근하세요?”
“어, 세연 대리도?”
“네. 오늘은 퇴근이 좀 늦으셨네요.”
마치 평소 퇴근 시간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대사. 역시 나는 프로다.
“네. 정리할 게 좀 있어서.”
“그럼 저랑 술 한잔하실래요?”
“그럴까요?”
이 사람아, 갑작스러운 제안인 듯 당황하며 5초 정도 생각하고 승낙해야지. 이래서 초짜들은 안 돼.
“참치 맛있게 하는 데 아는데 회 좋아하시면 거기로 가실래요? 어 팀장님 여기 뭐 묻었네요.”
“어, 어디요? 고마워요.”
마치 판토마임처럼 있지도 않은 먼지를 툭툭 털어 준다. 이제 훈훈한 분위기를 풍기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우리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호민 대리가 보였다. 내가 진짜 이제 별짓을 다 하는구나.
“들었을까요?”
박팀장은 초조해 보였다.
“다 들을 필요는 없어요. 분위기 전달이 중요한 거니까. 제 차로 가시죠.”
어차피 난 운명의 그날 이후 술을 끊었다. 박팀장이 한 잔 마시고 풀어놓는 스토리에 장단만 맞춰 주면 되니까 내 차로 가는 게 편하지.
“워. 잠깐만 잠깐만. 정세연 대리. 소문이 진짜였어요? 진짜 회사는 취미로 다니는 건가?”
최수혁의 페라리가 시저 도어를 열며 비상할 준비를 했다. 친구 건데 잠깐 빌린 거라고 대충 둘러댔더니 아무리 친구라도 페라리를 빌려주냐며 의아해했다.
박팀장이 미리 예약해 둔 참치집은 회사와 가까웠다. 집 한 채가 통째로 식당이었고 직장인들로 바글바글했다. 그는 소음 속에 묻혀야 얘기도 편할 것 같아서라고 했다. 소주 한 잔이 들어가자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는 첫눈에 반했다고 했고 사표 쓸 각오로 들이댔다고 했다.
“그래도 영 싫은 눈치는 아니더라구요. 그러다 술 먹고 사고를 한 번 쳤는데… 너무 좋더라구요. 아, 이런 얘기 하면 세연 대리는 못 알아들을 수도 있겠지만 남자끼리도 가능해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니다, 여러 가지 방법. 그래도 폰섹스 같은 건 안 해 보셨을 겁니다. 남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혼자 달려 나가는 야생마 같은 놈이 있었거든요.
“며칠 좋았는데 저도 생각이 있는지 슬슬 피하더라구요. 근데 밥 먹자 그러면 또 먹으러 나와 주고 전화하면 다 받아 주고 그랬어요. 그럼 내가 싫다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나도 사람이다, 언제까지 바보같이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하냐, 싫으면 싫다고 확실하게 거절해라 그랬어요.”
어… 이 시나리오 이거 표절 아니야?
“근데 또 거절은 안 해요. 아,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아 미안해요, 세연 대리한테 고민 상담하려고 부른 건 아닌데.”
“그 뭐 꼭… 지금 정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을까요?”
“네?”
“그러니까, 정호민 대리는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울 텐데. 와씨 내가 남자를 좋아했나. 아니 내가 남자랑 잤다고? 이런 등등의 생각과 앞으로 팀장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스럽고 또 같은 회사인데 소문나면 어쩌나 불안하고.”
“그렇… 겠죠.”
“마음이 없으면 혼란스럽지도 않아요. 밀어내지 않는다는 건 그쪽도 팀장님이 좋다는 거니까 시간을 좀 줘 보면 어때요?”
좀 기다려 보라고 이 성질 급한 사람아. 생긴 것도 그렇지만 박건희 팀장은 진짜 성질이 불같았다.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했으면 일단 열 일 제쳐 놓고 그 보고서부터 써야 한다. 융통성이 좀 없고 불도저 같은 성격이라는 얘기를 마케팅부로 발령 난 동기들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두툼하게 썰어진 참치 회를 간장에 푹 찍었다. 박팀장은 고민에 빠진 듯 보였다. 그의 앞에 놓인 참치 회는 아직 수북했고 내 쪽은 이미 초토화된 지 오래다. 슬쩍 회 접시를 반 바퀴 돌려 놓았다.
“그게 참… 제어가 쉽지가 않네요”
참치 두 개를 한꺼번에 입에 넣으려던 순간 말을 시작한 그에 의해 나는 약간 민망하여 멈칫 그를 쳐다보았다.
“내 딴에는 10분이라도 얼굴 볼 수 있으면 외근 갔다가도 회사에 들렀다 퇴근하고. 할 말도 없는데 용건도 만들어서 계속 만날 거리를 찾고. 제어를 한다고 하는데 나도 사람이잖아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네요.”
음… 얘기가 길어질 듯하다. 질척질척하다.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역시 신파였구만. 하차해야겠다.
내 앞으로 쌓인 참치 회를 얼른 입에 구겨 넣었다. 일어나시죠. 수요일인데 너무 많이 마시는 건 현대 직장인으로서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얼굴이 조금 벌게진 그를 설득해 남은 술잔을 털어 넣게 했다. 집까지 모셔다 주긴 좀 그러니 택시 타고 가실 수 있겠냐고 슬쩍 밀어 보았다.
“세연 대리, 오늘 고마웠어요.”
덩치에 맞지 않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하는 그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찝찝한 마음을 다시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남 구청 지나면 어김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이 새끼 이거 나 위치 추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어디냐면 강남 구청 지났다. 됐냐.”
녀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생각지도 못하게 당한 선빵에 녀석이 크게 웃었다.
-일찍 들어오네. 약속 있다더니.
“장르가 바뀔 것 같아서 얼른 하차하고 집으로 돌려보냈어. 너무 좀 90년대 갬성이더라고. 너 어딘데. 촬영중이야?”
-아니, 집이야. 금방 오겠네. 끊어.
집이라고? 이번 주 내내 밤샘 촬영이라 거의 집에 못 온다고 하더니 또 몸살이라도 난 건가 싶어 속력을 내어 달렸다. 어느덧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페라리의 헤드라이트에 최수혁의 모습이 비쳤다. 정확히 5일 만에 본다. 주차장 입구에서 삐딱하게 기대서 있던 녀석이 자신의 차량에 자연스럽게 올라탔다.
“뭐야. 집에 있었어? 내내 밤샘이라더니.”
“맞아. 다시 나가야 돼. 10분쯤 여유 되겠다. 저쪽으로 차 세워.”
대체 무슨 영화를 찍고 있는 건지… 잘빠진 레트로 양복에 뒤로 쓸어 넘긴 헤어 스타일이 60년대 헐리우드 영화에서 튀어나온 인물 같았다. 최수혁과 함께 있으면 현실 구분이 종종 안 될 때가 많다. 그러니 촬영중에 오지 좀 마라, 어지럽다 정말…
녀석이 가리킨 구석진 주차 자리에 차를 세웠다. 잠깐 집으로 올라가려나 보다 싶어 내리려는데 녀석이 내 팔을 붙잡고 그대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포개진 녀석의 입술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1초 정도 망설였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할까. 어디서 기자가 숨어 있다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째야 하나. 그러나 1초였다. 1초 만에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녀석과의 키스에 온 정신이 쏠렸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최수혁의 혀와 손길에 나 역시 주체 못 하고 녀석의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녀석의 손목에 힘이 들어간다. 잠깐, 설마 여기서 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너 다시 가 봐야 한다며.”
겨우 떼어 놓고 잠깐 이성의 시간을 가졌다.
“닥쳐, 시간 없어.”
짐승처럼 힘으로 눌린 내 위로 녀석이 다시 덮쳐 왔다.
“아니 잠깐 들른 거라며. 볼일 보러 온 거 아니야?”
내가 다시 녀석의 손을 뿌리치며 낚싯줄을 드리웠다. 이상하잖아. 아파트 주차장에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제야 미간을 좁히며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작은 비상구 등만 켜진 어두컴컴한 주차장에 녀석의 얼굴이 칼날처럼 반사되어 비쳤다. 콧날 봐라. 베이겠다, 베이겠어.
녀석이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고는 딱 한 번만 말해 줄 거니까 잘 들으라며 속삭였다.
“원래 주연 배우가 자리를 비우면 진행이 안 돼. 100명이 넘는 스텝이 지금 올 스톱 상태야, 그야말로 나만 기다린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무조건 3시간 정도를 비워야 한다고 우겨서 왔어. 왕복 2시간이 넘어. 그렇게 해서 겨우 얻어 낸 10분이야. 너 보려고. 이제 협조할 거야, 안 할 거야?”
나는 웃으며 다시 녀석의 목에 손을 감고 입술을 포갰다.
월척이오. 첨벙.
***
금요일 아침이다. 그 말은 하루만 더 버티면 주말이란 뜻이다. 눈 감은 채로 욕실로 이동하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거실의 구조가…
에이씨… 우리 집이 아니었다.
정신 차리고 다시 침대 위를 돌아보니 최수혁이 시체처럼 잠들어 있다. 너무 미동도 없이 자는 것 같아 혹시 죽은 거 아닌가 싶어 코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다행히 숨을 쉰다.
폭풍 같았던 촬영 스케줄이 이제야 조금 숨이 트이는지 녀석이 집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밤샘 촬영이 없어진 것뿐이라 녀석은 여전히 피곤해했고,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박건희 팀장의 연애 상담 메신저에 피곤했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전화가 오더니 잠깐 다시 들어오라 한다. 할 말이 있었는데 어제 깜빡했다고. 다시 최수혁의 집으로 들어오니 녀석은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였다.
“나 지각하면 10만 원 내야 돼. 빨리 말해.”
나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이 천천히 나를 훑는다. 오늘 내가 좀 신경 써서 입긴 했지.
“지금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 데이트라도 있는 거야.”
“헛소리할 거면 그냥 전화로 해. 나 간다.”
“부탁이 있어.”
나의 발걸음이 문지방을 채 넘지 못하고 멈췄다. 부탁? 자네 지금 나한테 부탁이라고 했나. 최수혁의 부탁이라… 좀 설레는데 이거.
“들어줄 거야 말 거야, 그것부터 말해.”
“야 시발 그런 게 어딨어. 내용을 먼저 알아야지.”
“안 들어주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할 거니까.”
아… 녀석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알고 지낸 지 겨우 두 달 된 사이인데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가장 못 참는지 벌써 눈치챘나 보다. 그건 바로 궁금증. 내가 안 한다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한다고? 그러면 영원히 그게 뭔지 궁금해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러기엔 내가 아직 젊다. 일단 받았다. 그랬더니 오늘 저녁에 어디 좀 가자고 한다.
“7시까지 데리러 와, 어차피 내 차 타고 나갈 거잖아. 장소는 나중에 찍어 줄게.”
“뭐 할 건데.”
“가 보면 알아. 딱 이대로 유지해. 지금 아주 좋아.”
녀석이 손가락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키며 두 번 왔다 갔다 한다.
“혹시 니네 부모님이라도 만나야 하는 거면 우리 너무 이른 거 아닐까.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는데.”
“가라. 지각한다, 정대리.”
녀석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한다. 방문을 닫고 현관에 걸터앉아 옥스퍼드 끈을 다시 매었다. 뭐지 뭐지, 너무 궁금하다.
나는 금요일 점심을 대부분 빌딩 지하에서 해결한다. 점심시간 바로 전 타임이 팀 단위로 하는 주간 회의인 탓에 끝나고 단체로 우르르 몰려가서 먹고 나오는 것이 관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후배들 테이블에 끼어 밥을 먹었다. 아직 입사 1~2년 차인 사회 초년생들. 대체로 연예인 얘기, 자기 연애 얘기 등등이 주된 화젯거리다. 그러다 한 녀석이 조용히 금단의 주제를 꺼내 들었다.
“저… 근데 대리님. 저희가 소문을 들었는데요….”
“응.”
“그… 대리님이 차장 건너뛰고 바로 팀장 다실 거란 소문이….”
호오… 소문이 벌써 그렇게 났나. 나는 모른 척 웃으며 그런 얘기는 당사자한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조언을 해 줬다. 아 이거 기분이 좋긴 한데 내심 걱정도 된다. 혹시라도 잘못돼서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빼도 박도 못 하고 사표각이다. 쪽팔려서 회사를 어떻게 다니겠어.
“근데 저희 팀 두 개로 나뉜다는 소문은….”
“아, 그건 나도 들었어.”
“그죠? 아…. 그럼 신차장님 밑으로 가느냐, 아님 잘생기고 재밌고 후배들을 아끼는 ‘새로운 팀장님’ 밑으로 가느냐 둘 중 하난데… 혹시 그 팀장 되실 분이 팀원들을 직접 고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요것들 봐라. 이래서 나를 이 테이블로 앉혔구만. 신재식 밑으로 가기 싫다는 1~2년 차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뼛속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대리님 혹시라도 뭐 시키실 거 있으면 저 시키세요.”
“저두요, 제가 원료 분석 테이블 정리해 드릴까요? 대리님 다음 주 미팅 가실 때 필요하시잖아요.”
“회사에 이렇게 개념 찬 직원들이 많으니 그 ‘새로운 팀장님’은 굉장히 흐뭇할 것 같아. 커피 마실래?”
“네.”
배가 너무 빵빵했지만 또 커피는 점심시간에 반드시 한 잔 마셔 줘야 하는 코스이기에 우리는 1층 카페로 올라갔다. 얼음이 잔뜩 담긴 아메리카노를 들고 마지막 남은 10분의 휴식 시간을 즐긴다. 흡연자들은 자동적으로 흡연실로 향했고 나는 남은 아이들과 1층에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한 명이 내 어깨를 치며 누가 부른다고 했다.
“정세연 대리님 맞으시죠?”
헉. 인사과의 정호민 대리. 하마터면 아는 척을 할 뻔했다. 애써 누구세요? 하며 모른 척을 했지만 시베리안 허스키의 ‘그’는 이미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잠시 얘기 좀 하자고 했다. 이 아마추어 같은 양반, 그새 들켰구만.
밖으로 나왔다. 이제 9월에 접어들어서 그런가 날씨가 적당히 화창하고 좋았다. 주변에는 광합성 작용을 하러 기어 나온 빌딩 귀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햇빛 아래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그가 벤치의 한쪽을 권했다. 그래요, 우리 일단은 앉아서 얘기합시다.
“박건희 팀장님한테 얘기 들으셨죠? 저희….”
“네, 본의 아니게 제가 두 분 대화를 엿듣는 바람에. 혹시 두 분이 이미 다 얘기하신 거…?”
“하하, 네. 팀장님은 머릿속에 생각나는 건 일단 다 말해야 하는 성격이라. 비밀 같은 건 오래 못 가죠.”
그래 보이드만. 어쩐지 오늘은 메시지가 안 온다 싶었더니 이제는 이쪽에서 난리네. 연애 상담소 차려야 할 지경이다.
“두 분이서 작전 펴신 줄도 모르고 제가 오바를 좀 했어요. 팀장님은 굳이 내가 아니라도 괜찮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상대가 세연 대리님이다 보니 저 같은 건 비교도 안 되는 거 같고….”
“저 여자 좋아합니다.”
뭐, 딱히 거짓말은 아니잖아.
“아 네네. 그런 뜻이 아니라. 제 스스로 정리가 안 돼서요. 너무 괴로워하다 보니 팀장님이 세연 대리님하고 있었던 일 솔직하게 말해 주더라구요.”
“아무 일 없었는데요.”
“알아요. 다행이에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이런 순진한 양반을 봤나. 나의 소중하디 소중한 점심시간 10분이 모두 없어지려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본론으로 들어갔다.
“좋아하죠? 박건희 팀장님.”
그가 얼굴을 붉혔다. 대답 안 해도 알겠다며 괜찮다고 했다. 그는 알고 보니 나와 같은 해 입사한 동기였다. 얼마나 조용한 성격이었는지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데 동기 회식 자리 때 화장실에서 마주친 나를 자신은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시간 나면 가끔 점심이나 먹는 그런 사이가 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인사과에 프락치를 심어 놓는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 왔던 모든 발 달린 소문의 근원지는 바로 인사과니까.
“그래서 이제 우리가 친구가 되어서 하는 말인데.”
“네? 아니, 응…?”
“초안이 나왔나? 조직 개편안.”
“아….”
그는 뭘 말하는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해, 정세연 팀장님.”
됐어!! 나는 두 손을 불끈 쥐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사 발표는 다음 주다. 초안에 이미 이름이 올라갔다면 보나 마나다. 내가 지금 당장 상무실로 올라가 ‘이 개놈새끼’ 하며 뺨을 때리지 않는 이상 상무님이 사인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럼 우리 다시 열심히 일하러 들어가 볼까?”
그가 웃으며 따라 일어섰다. 맘 터놓을 곳이 없었는지 나한테 찾아와 고작 10분 얘기한 걸로도 표정이 한결 밝아 보였다. 퇴근 시간이 다 돼서 날아온 박건희 팀장의 메시지에도 함박꽃이 피었다.
사람이 좋은 일을 하고 나면 왠지 기분이 흐뭇해지는 법이다.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퇴근 후 최수혁이 문자로 보내 준 용인시 수지 세트장으로 차를 몰았다. 입구에서 신분 확인을 하길래 지갑을 꺼내려 했는데 경비 아저씨가 그냥 바리게이트를 열어 주었다. 녀석의 차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여기 들어오고 보니 왜 녀석의 옷차림이 복고풍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모던보이라도 찍는 것인지 세트장은 40년대 서울과 동경을 합쳐 놓은 듯한 분위기가 났다. 장비를 실은 트럭들이 지나가고, 담배를 물고 쉬고 있는 스텝들이 보였다. 그 옆에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같이 담배를 태우는 최수혁이 서 있다.
저 봐라 저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저렇게 친절하다. 팔짱 끼고 쳐다보고 있으려니 자신의 차를 발견한 녀석이 담배를 끄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일찍 왔네. 금요일이라 차 막힐 줄 알았더니. 내려, 내가 운전해.”
“차는 막히지, 다만 이 차를 타면 모두가 양보 운전을 해 줘서 금방 와.”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녀석이 웃었다. 웃을 때는 정말 다른 사람 같다. 이런 이중인격자. 녀석과 자리를 바꿔 조수석으로 이동했다. 녀석은 출발하자마자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매니저인 듯싶었다. 우리 밥 안 먹고 이동하니까 도시락이라도 준비해 달라는 말을 했다.
“나도 자네 형뻘인 거 알고 있나?”
“나보다 나이 많았나? 아래라고 생각했어.”
최수혁은 나의 나이 따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젠가 물어보면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한 번을 묻질 않아 먼저 말을 꺼냈다.
“한 살 많아. 우리 이제 그만 호칭 정리할까?”
“형이라고 부르라고? 웃기고 있네.”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이게 웃을 일인가? 기대도 안 했지만 실로 터져 나온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기대 이하라 실망했다. 가는 동안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들을 녀석에게 종알거렸다. 다른 것들은 별 반응이 없었고 마케팅 대형견과 인사과 순둥이의 해피엔딩에 ‘잘됐네’ 라고 한마디 했다.
녀석이 나를 끌고 간 곳은 스튜디오 촬영장이었다. 처음엔 지 촬영하는데 잡일이라도 시키려는 건가 싶어 째려봤더니 스튜디오 안쪽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보며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수혁이 센스 있네. 지인을 데리고 오랬더니 어디서 모델을 데려왔어.”
나 말인가?
“안녕하세요, QG 도승현입니다. 식사 아직이죠? 먼저 먹고 시작할까요?”
“뭘 시작하는데요?”
“촬영이요. 사진 찍을 건데…. 수혁아, 야 너 말도 안 하고 모셔 온 거야?”
우리를 번갈아 보며 웃는 도승현이라는 남자와, 이것이 바로 내 부탁이었다는 표정을 짓는 최수혁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QG에서 창립 기념 특집으로 매달 유명인 한 명과 지인을 촬영하고 인터뷰를 하는데 거기에 나를 데리고 온 것이었다. 길게 설명하면 내가 안 한다고 할까 봐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 딱 최수혁답다는 생각을 했다.
도승현이라는 남자가 분장실에 우리를 밀어 넣고 도시락을 넣어 주었다. 30분 안에 먹고 나오라는데 10분이면 다 먹을 양이다. 배 나오면 안 돼서 그러는 건가. 혹시 누드 촬영인가…
“옷 입고 찍는 거야. 오버하지 마.”
“그럼 다행인데. 괜찮겠어? 나 얼굴 팔려도?”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 건데?”
“혹시라도 나중에 문제 될까 봐. 우리가 그냥 지인은 아니잖아.”
물어랏!
“커밍아웃이라도 해 줄까 그럼?”
놓쳤다.
“됐다, 많이 먹어라.”
실패를 순순히 인정하고 도시락을 먹었다. 30분 준다 해 놓고 15분쯤 되니 다 먹었냐며 문이 열렸다. 익숙한 듯 먼저 나가는 녀석을 따라 급히 물을 마시고 나갔다.
“딱히 뭐 포즈 같은 건 필요 없고 둘이서 그냥 얘기하는 거 자연스럽게 찍을게요. 편하게 거기 앉아서 얘기하시면 됩니다.”
쉽네. 난 또 뭐 웃통이라도 까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는데 사진작가는 우리에게 딱히 원하는 것이 없었다. 우리는 그냥 양탄자 깔린 비비드색 소파에 앉아 잡담을 하면 되는 그런 컨셉이었다. 그래서 녀석이 아무 말이나 막 한다. 그럼 나도 받고 두 배를 얹어 준다. 네 배가 되어 돌아온다. 받아라 여기 폭탄.
“저기… 둘이 싸우고 있는 거 아니죠?”
사진작가가 곤란한 표정을 하며 다가왔다.
“분위기가 너무 좀 그런데… 어 한번 웃어 보실래요?”
“아 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었다. 내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뜩바로 즘 해라, 빨리 끝내고 집에 가게.”
“집에 가서 뭐 하려고.”
“미드 볼 거다.”
“찍는 게 아니고?”
“나도 뇌가 있어, 오늘은 좀 쉬자.”
“내가 뭐랬나? 은근 생각하는 게 야하네 정세연.”
“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곤란한 표정을 짓는 사진작가를 의식하며 다시 억지웃음을 지었다. 겨우겨우 몇 장 건졌다는 소리에 촬영은 끝이 났고 인터뷰에 들어갔다.
Q: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계기는?
정: 옆집 살아서.
최: 택배 받아 주다가.
Q: 서로가 생각하는 상대의 장점은?
정: 솔직하다.
최: 잘생겼다.
정: 응?
Q: 그렇다면 단점은?
최: 오지랖이 넓다.
정: 체력이 저질이다.
최: 뭐?
(인터뷰 중단)
Q: 서로의 이상형에 대해 아는지?
정: 알고 싶지 않다.
최: 분에 차는 사람을 좋아한다.
Q:서로에게 사과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정: 없다.
최: 없다.
Q:마지막으로 덕담 한마디씩.
정: 돈 많이 벌어라.
최: 성질 좀 죽여라.
“둘이 친한 거 맞아?”
도승현이라는 남자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예, 친합니다. 망설임 없이 내가 대답했다.
“아니 뭐, 기사는 유니크하게 뽑혀서 좋긴 한데….”
“이제 우리 가도 되나?”
“어 그래. 고맙다 야. 너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웬일로 수락을 다 해 주고.”
“사진은 기사 나가기 전에 미리 좀 받을 수 있을까? 세연이 것까지 싹 다.”
“물론이지.”
그는 웃으며 최수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느새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억지로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꽤 피곤한 거구나.
녀석이 운전대를 잡는다는 소리에 나는 만세를 불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조수석에 올라 눈을 감았다. 전화가 온 듯한데 녀석이 받지를 못하고 망설였다.
“받아, 숨소리도 안 내고 있을 테니까.”
귀찮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리고 누웠다. 차량 스피커 폰으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혁아. 1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응, 듣고 있어. 누나.”
나는 다시 숨을 쉬었다.
최수혁의 누나가 다시 반찬 같은 걸 가지고 방문하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어디 계신지 누나가 매번 급식 당번처럼 반찬을 날라다 주고 있는 거냐 했더니 부모님은 시골 분들이라 서울 오는 걸 싫어하신다고 했다. 자식은 9억 5천을 껌값처럼 버는데 왜 아직 시골에 모시고 있냐 했더니 그게 자기 돈이지 부모님 돈이냐며 따졌다.
불효막심한 새끼. 니네 엄마가 너 이 얼굴로 안 낳아 주셨으면, 넌 인마 택배 상하차나 해야 되는 거야. 녀석이 그게 뭐냐고 물었다.
“고수익에 혹해 누구나 한 번쯤은 발을 담가 보지만 하루 만에 지옥을 경험하고 모두가 도망간다는 알바계의 개미지옥 같은 곳이지.”
“해 본 사람처럼 말하네?”
딱 하루 해 본 적이 있었다. 제대하고 심심해서 유흥비나 벌어 볼까 하고 갔는데 3시간 만에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받은 충격으로 정신 차리고 스펙 쌓아서 대기업에 취직했다. 누구는 억대 연봉을 받아 좋겠다고 하지만 그때 내가 한 노력은 정말 치열했다. 잠은 하루에 4시간씩 잤고 각종 공모전과 스터디로 점철된 삶을 꼬박 1년 동안 때려 박았다.
“재밌네. 더 해봐, 옛날 얘기.”
녀석이 멍석을 깔아 주었다. 최수혁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자신은 다니지 않았던 대학교 시절 이야기를 좋아했고 친구들과 술 먹고 사고 친 얘기들을 들으면 많이 웃었다. 잘은 모르지만 그런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는 듯했다. 보통 동료 배우들끼리 술도 마시러 다니고 그러지 않나? 혹시 왕따인가? 아싸?
“왜 혼자 모노 드라마 찍고 난리야.”
녀석이 시동을 끄고 차문을 열었다. 뭐야, 사람 민망하게, 기껏 생각해 줬더니. 엘리베이터로 먼저 걸어가는 녀석을 향해 원망 어린 눈빛을 쏘아 댔다.
“그건 대리님 얘기라서 재밌게 들어 주는 거예요. 최수혁이 친구가 왜 없어요. 아오, 진짜 가만 보면 바보 같네요.”
어김없이 내게 점심을 빌붙고 있는 김시은이 젓가락으로 허공을 찌르며 나의 둔함을 탓했다. 하늘 같은 선배에게 바보 같다니…
“대리님도 물어보세요, 촬영장에서는 뭐 하는지. 어떤 배우랑 친하게 지내는지. 혹시… 키스신 같은 건 없었는지.”
김시은이 커다란 오징어 튀김을 가위로 자르며 떡볶이 냄비 위에 투척했다. 점심부터 무슨 떡볶이냐 했지만 의외로 푸짐하게 나오는 튀김 세트에 기대가 되어 앞치마까지 목에 걸었다.
“안 봐도 뻔해. ‘내가 왜 그런 걸 말해 줘야 하지?’ 하면서 승질낼 거다. 나 만두 하나 더.”
납작한 잡채 만두 하나가 반으로 싹둑 잘려 내 그릇 위에 올려졌다.
“자기 얘기 궁금해서 묻는 사람한테 뭐 억하심정 있다고 승질을 내요.”
“그 녀석은 그래.”
“대리님은 참 연애도 생긴 것만큼 거창하게 하시네요.”
“어허, 또 버르장머리 없이.”
“이거나 많이 드세유.”
잘게 썰어진 오징어 다리 튀김이 떡볶이 국물과 함께 내 앞에 놓였다. 한편으로는 김시은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최수혁에게 억하심정이 생길 때는 오히려 먼저 연락해서 점심 같이 먹자고 하고 싶었다.
“어 두 분 여기 계셨네. 또 둘이서만 먹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회사 동료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날리며 지나갔다. 이렇게 연막전에도 써먹기 좋고.
***
주중에는 회식도 없고 저녁 약속도 거의 없는 편이다. 일찍 퇴근한 뒤 우편물을 확인하고 있으려니 인터폰이 울렸다. 배달시킨 초밥이 왔나 보다.
여느 때처럼 문고리에 걸려 있겠거니 하고 문을 열었는데 배달 기사 아저씨가 떡하니 복도에 서 있다. 응? 내가 현금 결제를 눌렀던가.
“안녕하세요, 제가 사장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플 결제했을… 텐데?”
“예, 손님 얼굴 좀 보려고 기다렸습니다.”
이건 무슨 소리지. 자신을 초밥집 사장님이라고 소개한 중년의 남자는 여전히 오토바이 헬멧을 쓴 채 나를 노려보았다.
“생긴 건 너무 멀쩡하게 생기셔서 놀랍네요.”
이 상황이 나는 참 당혹스러웠다.
“저… 이거 먹어도 되죠?”
“예에! 맛있게! 드십쇼!”
그는 쿵쿵거리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별일이 다 있다 싶어 문을 닫고 초밥을 꺼냈다. 음 역시 생강 절임은 정말 조금 들어 있었고 서비스로 주던 장국도 없다. 내가 뭐 실수한 게 있나 싶어 민족의 어플을 열었다.
쿠폰이 더 쌓였다. 느낌이 싸하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마이 메뉴에서 리뷰를 눌러 보았다.
헉. 최근 작성 리뷰 35개.
[미도리 분식] ☆
오므라이스 계란옷이 너무 두꺼움. 케첩 맛이 너무 강함. 햄 포함량이 너무 적음. 사진과 다름. 배달 속도는 빠름.
[김밥장고] ★ ☆
김밥에 든 밥이 오래되었음. 단무지도 오래되었음. 돈까스는 맛있다고 함.
[용초밥] ☆
밥만 너무 많고 생선 살이 별로 없음. 기성품 가져다 파는 듯. 사장 반성해야 할 듯.
등등등…
내 아이디로 수많은 배달 음식집들의 메뉴가 별점 테러를 당했다. 쿠폰이 쌓인 것은 리뷰 평점 이벤트로 받은 것인 듯했다. 아… 최수혁 이 자식. 이거 완전 또라이 아니야? 당장 녀석에게 전화를 했다. 대체 이 새끼 왜 이러고 사는지가 궁금해졌다.
“야, 너 민족의,”
-방송 대기중이야. 문자로 해.
뚝.
에이씨 진짜.
[너 왜 리뷰 테러했어]
[나 그 집 스시 좋아하는데]
[너 때문에 이제 배달 못 시키겠어]
[그거 먹지 마]
[기성품이야]
[배달음식에서]
[장인정신 찾을래 자꾸?]
[나 1시간 후에 끝나]
[그거 먹지 말고 나와]
[진짜 스시 사 줄게]
뭐? 사 준다고?
약간 예상을 빗나간 녀석의 문자에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용초밥과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사장님 미안합니다. 사 준다는데요.
혹시 또 VIP만 가는 그런 제대로 된 스시집이 있나 싶어 약간 설레기도 했다. 일본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막 80세 넘은 할아버지가 3대째 스시를 쥐었다는, 막 예약이 1년 내내 꽉 차서 죽기 전에 한 번 먹기 힘들다는 그런 전통 스시집 말이다. 식탁 의자 위에 걸어 둔 블레이저를 다시 걸치고 어디로 가면 되냐고 문자를 넣었다.
최수혁이 찍어 준 주소는 단순했다.
[MBC]
***
살면서 방송국은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는데 지난번엔 잡지 촬영에 오늘은 방송국까지. 최수혁 장단에 맞춰 주려니 지루할 틈이 없다.
“엠비씨 정문으로 가 주세요.”
녀석이 차를 가지고 갔을 테니 택시를 타야 했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계속 나를 힐끔거리며 자신의 기억력을 더듬는 듯했다. 도와 드려야지.
“저 연예인 아니에요.”
“아 그래요? 저는 워낙 잘생기셔서 어디서 뵈었나 계속 생각했네요. 허허허.”
“네. 그런 소리 종종 들어요.”
“네? 아하하하. 참 재밌으신 분이네.”
한번 말 튼 게 기뻤는지 택시 기사는 그때부터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방송국 얘기, 연예인 태운 얘기, 그러다 마무리는 늘 정치 얘기로 흘러가서 자신이 싫어하는 정당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았다. 검찰총장 아들 입시 문제 얘기가 한창일 무렵 마침내 방송국에 도착했다.
지옥 열차에서 내린 뒤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로비에서 나를 보며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전에 공항에서 뵈었었죠.”
아하, 이 매니저 양반 기억난다.
“정식으로 인사를 못 드렸네요. D&D 엔터 김재호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세연입니다.”
“수혁이 끝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는데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그를 따라 접수처로 가 신분 확인을 한 뒤 관계자용 출입증 하나를 받았다. 3층 높이의 천장이 높게 뚫린 방송국 로비에는 저녁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녀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방송국 촬영을 다 하나. 티비 나오는 거 극도로 싫어할 텐데.
“토크쇼예요, 원래 고현주랑 친한데 이번에 자기 이름 달고 토크쇼 런칭해서 첫 손님으로 수혁이를 불렀어요. 첫방은 임팩트 있게 가야 하니까 지인 찬스 쓴 거죠.”
“첫방이 막방이 되겠네요.”
“네? 하하하하. 수혁이 안 그래요. 와서 구경하세요.”
매니저를 따라 지하 스튜디오로 내려갔다. 거기에 도착하기까지 50명 정도 사람을 지나쳤는데 대충 서너 명 정도가 연예인이었고 그중 한 명은 정말 톱스타였다.
커다란 문을 열자 앞이 뻥 뚫린 개방형 스튜디오에 카메라 5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방청석에는 서른 명 남짓한 여성 방청객들이 있었고 스텝들은 합쳐 스무 명쯤 되어 보였다. 무언가를 연신 써 내려가며 손짓 발짓을 하는 작가들과 이어폰을 낀 채 뛰어다니는 PD, AD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 있는 세트 조명 아래 최수혁이 세상 착한 얼굴을 하고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매니저 옆에 서서 녀석의 촬영을 구경했다. 오, 이거 기분이 남달랐다. 왜 가끔 티비를 보면 나오지 않는가. 우리 매니저 형이에요, 우리 코디 누나예요 하면서 갑자기 카메라가 확 틀어지면서 도망가는 스텝들과 관계자들을 잡는 장면.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서 있는 셈이었다.
“에이, 수혁씨가 술을 더 잘하죠. 지금 제 앞에서 거짓말하시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제가 썰 한번 풀어 볼까요? 네?”
약간은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고현주의 넉살에 녀석이 웃으며 제발 하지 말라며 애원했다.
“여러분들 모르시겠지만 제가 최수혁씨 데뷔하고 얼마 안 돼서 사귀었던 친구랑, 아 최수혁씨 어디 가세요. 안 할게요, 안 할게요.”
상당히 친한 사이였나 보다. 고현주는 모델 출신 연기자인데 언제 저렇게 친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비밀이 많아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짓궂은 질문에 울상 짓는 최수혁은 정말 낯설었다.
김시은의 말이 맞았다. 녀석은 왕따도 아니었고 아싸도 아니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정말 많은 이들과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두 명의 코디가 수시로 다가와 옷을 만져 주고, 그 와중에 인터뷰를 하겠다고 달려드는 연예 프로그램 리포터, 자투리 시간에 달려가 스케줄 조정을 하는 매니저, 녀석은 휴대폰 한 번 볼 시간 없이 바빴다.
1시간 안에 끝난다던 녀석의 녹화는 30분을 더 채웠고 최근 만나는 사람은 누구냐는 집요한 고현주의 추궁 끝에 최수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그냥 좀 잘나가는 직장인이에요. 자기가 잘난 걸 너무 잘 아는 그런 사람이요.”
방청석에서 워-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솔직하게 나오신 김에 하나 더 물어봐도 될까요?”
“안 되는데요.”
방청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 뻔한 진행이긴 한데 그래도 이왕 말 나왔으니까 그분께 이 자리 빌려서 한 말씀 하신다면?”
“안 할래요.”
“에이, 너무 빼신다.”
“둘이 있을 때 직접 해 주고 싶네요.”
꺄아- 방청석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매니저가 황급히 PD를 찾아간다. 손으로 뭔가를 자꾸 쳐 내는 모양새가 방금 건 편집해 달라는 내용이겠지. 투닥투닥 PD와 한참 입씨름을 한다. 지 매니저 고생시키는 것도 모르고 생글생글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문득 낚시는 이제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프로한테 덤볐다가는 내가 심장 터져 죽겠다.
녹화가 끝이 나자 녀석이 온 스텝들에게 돌아가며 인사를 했다. 구석구석 빠진 사람 없나 확인까지 다 하고서야 나를 향해 다가왔다.
“미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
“일본 날아가서 사 먹는 게 더 빨랐겠어.”
“가자, 기다린 거 후회 안 하게 해 줄게.”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가는데 지금 어디 가서 스시를 먹냐.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울 수 없었으나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저 태도 때문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면서 전화를 하는 걸 보니 셰프를 미리 잡아 둘 생각인 듯했다. 라스트 오더 9시 반을 막 넘긴 시간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전화로 주문을 넣고 페라리를 밟았다.
기대했던 3대가 운영하는 일본 장인의 집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고급 일식집이었고 현지인이 쥐는 스시가 맞기는 했다. 배가 고파서 그랬는지 몰라도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먹다 보니 고픈 게 또 하나 생각났다.
“나 궁금한 거 못 참아 하잖아.”
“그런데.”
“아까 스튜디오에서 한 얘기. 둘이 있을 때 해 준다며.”
녀석이 말없이 스시를 입에 넣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던진 건데 미끼도 물지 않고 갑자기 또 장르를 바꿔 버리니 조금 민망해졌다.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나. 그럼 장난이라도 쳐 주지 그냥.
“그게 너라고 생각했어?”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젓가락질이 자동적으로 멈춰졌다.
“뭐라고?”
“아니,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줘.”
녀석의 표정이 진지하다.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아예 놓았다. 뭔가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 것 같았다. 그래, 지금까지는 애매한 말들로 서로의 간을 보고 있었다고 치자. 서로 지기 싫어서 진지한 말 따위는 접어두고 본능에만 충실해 왔다고 치자. 나는 이제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니가 그렇게 나오면 나는 다큐로 받아 주지.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 나는 그게 나라고 생각했어. 너 다른 사람 있어? 만나는 사람은 따로 있고 나는 그냥 섹스만 하는 상대였냐? 그러면 그렇다고 해. 나도 딱 거기까지 할 거니까.”
“거기까지 한다는 건?”
최수혁이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알아들었으면서 쐐기를 박겠다는 건지 뭔지, 나는 좀 혼란이 오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고 생각했어. 만나는 사이라고 여겼고. 생각이 달랐다면 나는 여기까지라는 뜻이야.”
녀석은 또 아무 말이 없어졌다. 나는 최수혁의 침묵이 정말 싫다. 지난번 삼문 삼답 퀴즈 때도 마지막 질문에 용기 내서 예스 해 줬더니 별 반응이 없고. 내가 지금 완패했다고 선언했는데 승자의 오만함도 없고, 그냥저냥 말없이 물만 들이켜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는데 나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용기를 낸 내 고백 앞에서 대답이 없어진 최수혁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먼저 일어났다. 시발, 이럴 땐 집이 같다는 게 최악이네. 계산대에서 지갑을 꺼내려니 이미 계산 끝난 테이블이란다. 아 존나 깔끔한 새끼.
스시집에서 나와 택시를 잡으려는데 녀석의 페라리가 쫓아와 문을 열었다.
안 탄다고.
마침 건너편의 택시 한 대가 나를 발견하고 유턴을 해 주었다. 녀석이 쫓아올세라 얼른 집어 타고 목적지를 말했다.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시발, 지금 나 차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