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당신이 싫다면 그만하겠지만, 정말 싫은가?
그날 이후로도 최수혁과는 두 번 같이 밥을 먹었다. 한 번은 녀석이 사 온 음식으로, 한 번은 내가 대충 만든 파스타로. 최수혁이 말한 대로 우리는 그저 옆집 사는 사람에서 같이 밥을 먹는 사이로 바뀌었다. 그런 와중에도 녀석의 보람찬 성생활은 계속되었고 나의 액션 영화 관람기도 계속되었다.
슬슬 회사 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신제품 런칭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신경이 예민해졌고 야근의 압박이 거세졌다. 8시 전에 엉덩이 떼는 놈은 나 할 일 없소 하고 자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후배들 뒤치다꺼리까지 하다 정신없이 하루가 가고 보니 벌써 밤 10시다.
[야 정세연]
[우리 벌써 2차로 자리 옮긴다]
[진짜 안 올 거냐]
그러고 보니 오늘이 동창회 모임이었다는 것을 깜빡 잊었다.
[몇 시까지 달리냐. 나 야근]
[아침까지 달린다]
[끝나면 바로 튀어와]
알겠다고 답장한 뒤 집에서 할 것과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분류했다.
“저 마무리는 주말에 해서 이메일로 쏴 드릴게요.”
“약속 있냐?”
“그럼 없을까요?”
신차장이 띠겁게 쳐다보다 ‘가라 그럼’ 하고 허락을 해 준다. 딱히 니 허락 받고 퇴근하는 거 아닌데 상황을 오묘하게 지 좋을 대로 끌고 가는 재주가 있는 놈이다. 얼른 승진해야지. 저 새끼한테 나도 반말 좀 해 보자.
택시를 잡아타고 강남역으로 향했다. 동창회 있던 건 깜빡했지만 마침 오늘은 카풀이 동재 순번이라 차를 두고 나온 것은 타이밍이 좋았다.
“손님 저 앞이 꽉 막혀 있어서 여기서 내리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요.”
나는 얼른 택시비를 지불하고 신호등 건널목에 내렸다. 시간이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다들 열심히 불금을 즐기고 있는 모양새였다. 벌써 취해서 토하는 놈. 소리 지르며 싸우는 놈. 승리하고 모텔로 들어가는 놈.
주점 문을 열고 들어가니 중앙에 테이블 2개를 붙여 놓은 동창 놈들이 손을 흔들었다.
“왔냐. 야근 좀 적당히 해라 인마”
“그래 새끼야, 너는 왜 이렇게 인생을 성실하게 사냐. 사람 민망하게.”
그러게나 말이다. 앉자마자 다들 잔소리를 했다.
“술 줘. 들이마시고 잊어버리게.”
이 모임은 정말 작정하고 달리는 놈 아니면 버틸 수 없는 모임이다. 덕분에 여자애들은 하나둘씩 얼굴을 감추기 시작했고 남은 것은 여자 하나, 남자 일곱이다. 그러나 하나 남은 이 여자 동창 아이의 술 실력은 남다르다. 첫 모임 때부터 우리는 그녀를 주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酒)님.
사실 나는 친구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그냥 아는 사람과 친구는 구분해야 한다. 이 녀석들은 내가 유년기 시절을 미국에서 보내고 난 다음 사귄 첫 한국 친구들이었다. 이런 친구들과 함께 하는 다이내믹 코리아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부모님과 헤어져 쭉 혼자 살았다.
막걸리 다섯 잔이 들어갔다. 회사에서 대충 때운 김밥 덕에 배가 고파 안주를 모조리 집어 먹었다. 그래서인지 금방 배가 부르고 졸렸다.
“야 이 새끼 자냐? 야 정세연. 전화 왔어. 받아.”
친구 한 명이 테이블에 올려 둔 내 휴대폰을 손에 쥐여 주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아 시발 진짜 너무 피곤했다.
“…여보세요.”
-어디야
“누구신지.”
-나야, 옆집 사람.
이건 또 뭐냐 진짜.
“…뭐야 왜 마치 평소에 전화하던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말하는 건데.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관리 사무소에 있는 입주자 명단.
개인정보 유출이다 이건 진짜.
-차가 주차장에 있길래 집에 있나 하고 가 봤는데 아무도 없는 거 같아서. 술 마시는 건가? 주변이 시끄럽네.
“동창회라 늦어. 새벽까지 달릴 거야.”
잠깐. 내가 왜 이런 것까지 보고하고 있는 건지 좀 한심해졌다.
-어디서 마시는데.
“강남역.”
-머네. 데리러 갈까?
“헛소리하지 마. 끊는다.”
곧바로 통화 종료를 한 나는 액정에 뜬 전화번호를 쳐다보았다. 이거 저장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야야 뭐 하냐. 1분 1초가 아깝다, 빨리 마셔.”
한차례 또 웨이브를 타고 이제 여섯 잔째. 막걸리는 숙취가 심하니 종목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하고 맥주를 시켰다. 그러나 나의 주문을 가로막는 그녀의 한마디.
“야 나 화장실 가기 귀찮아. 아줌마 여기 소주 4병이요.”
주님께서 화장실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우리는 소주를 막걸릿잔에 부어 마셨다. 며칠째 계속된 과로에, 쏟아지는 졸음에, 올라오는 알코올 기운에,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자 그럼 다들 휴대폰 중앙으로 몰아. 박기영 너부터 시계 방향으로 돈다. 메시지는 앞 사람이 정해 주는 그대로 보내는 걸로. 오케이?”
뭐냐. 잠깐 졸았더니 뭔가가 진행되고 있었다. 대충 분위기를 보니 그 악마의 게임을 또 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악마의 게임이란, 바로 직전 통화했던 사람에게 앞사람이 지정한 메시지를 보내기… 뭐?! 바로 직전 통화했던 사람?
“자자, 박기영이 보낼 메시지는!!…… [자니…?]”
“푸하하. 야 빨리 보내. 너 누구야? 마지막 통화한 사람.”
“야 시발, 우리 부장 새끼야 악 안 돼!”
“푸하하하하. 야 이 새끼 사표 쓰고 보내야겠다.”
된통 걸린 기영이가 절대 안 된다며 휴대폰을 가지고 도망가려는 걸 아이들이 붙잡고 기어이 그 문자를 보내고야 말았다.
위잉-
[기영씨 메시지 잘못 보낸 거 같네. 술 마시고 괜히 전 여친한테 실수하지 말고 주말에는 푹 쉬고 우리 월요일에 회사에서 봐요. ^^]
에이… 뭐냐. 존나 예의 바르네. 아이들이 실망했다.
그랬다. 요즘은 그런 꼰대가 별로 없단다 얘들아. 우리 회사 신차장 정도 되는 놈 아니면 부하 직원이 실수해도 다짜고짜 욕하고 그러는 세상이 아니다.
“야 다음은 누구냐, 정세연 휴대폰 어딨냐.”
머릿속에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그러나 이미 옆에 있던 놈이 내 손가락으로 강제 지문 인식을 한 뒤 잠금장치를 풀어 버렸다.
“자, 우리 존잘 미남 정세연씨가 가장 최근 통화한 사람은….”
-옆집 놈 010-4857-****
그랬다. 내가 그놈 전화번호를 기어코 저장하고야 만 것이었다. 본명을 안 쓴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찰나.
“자, 정세연님께서 ‘옆집 놈’님에게 보내실 문자는… [자기 어디야?]”
“푸하하하하. 야 이웃사촌지간에 살인 날 일 있냐? 너무 세다.”
“잘못 보낸 줄 알겠지. 야 빨리 전송해, 전송해.”
나는 포기했다. 말려서 들을 놈들도 아니고 저 정도 뜬금없는 문자에는 녀석도 당연히 알아챌 거다. 휴대폰 전화를 돌려받은 나는 그 전전 통화 상대가 조팀장이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실로 좆될 뻔했다.
위잉-
어쭈 빠른데. 녀석에게서 답장이 왔다.
[강남역]
뭐?
그리고 곧 이어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
[끝나면 연락해]
“어어얼, 뭐야. 이 새끼. 이거 위장용 이름이었어? 바른대로 말하라. 자네 연애하나.”
나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최수혁 이 새끼 일부러 그러는 거다. 분명 게임중인 거 눈치 깠을 텐데 나 엿 먹이려고 참 애쓴다 애써.
“정세연 너 일찍 들어가야겠다. 집에서 누가 기다리나 본데.”
“아무리 연애가 좋아도 우리랑 아침은 먹고 가라 새끼야.”
일곱 명이 돌아가며 잔소리를 해 댔다. 에이씨 진짜.
“다음은 내 차례지? 나 존나 세게 갈 거니까 말리지 마라.”
주님이 나를 보며 어디 한번 해 보라는 표정으로 자기 휴대폰을 직접 들었다.
“주님이 보내실 메시지는…. [어제… 좋았어?]”
“푸하하하! 야 좋아! 정세연 아주 좋아. 야 주님 누구냐 최근 통화.”
“우리 신랑.”
아… 저 녀석이 최근 결혼했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운 좋은 놈. 그렇게 우리의 술자리는 깊어져 갔고 새벽 3시까지 달리다 한두 명 전사자가 발생했다.
노래방에서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난 나는 왠지 찜찜한 마음에 휴대폰을 들었다. 일단 친구 놈들이 실수했다며 미안하다고 최수혁에게 사과 문자를 보냈다. 녀석은 자고 있겠지만 오늘 깔끔하게 정리를 해 두어야 내일 편안한 토요일을 맞이할 수 있다.
[알아. 사과할 필요 없어]
의외로 바로 답문자가 왔다. 새끼 역시 알고 있었네. 그리고 다시 오는 문자.
[난 아직 강남역이야. 기다리는 거 좀 지루하네]
뭐야 진짜 강남역이었어? 아까 통화할 때는 집이라더니.
[거기서 뭐 하는데. 누구 기다려?]
[너]
[나? 왜?]
[차 안 가져갔잖아]
[진짜 데리러 왔다고?]
[그렇다고]
뭐냐. 지금이 몇 시인데. 나는 노래방에서 반쯤 쓰러진 아이들을 보고 다시 휴대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 어딘데? 진짜 나 데리러 왔다고?]
[영화관. 넌 어딘데]
[나 **노래방]
[지금 간다]
그래 사실 졸리기도 하고. 누가 데리러 와 줬다는 게 기쁘기도 하고. 택시에서 내려서 아파트 입구를 걸어 들어가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도 하고.
대충 내 몫을 계산하고 노래방을 나왔다. 여길 잘 찾아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녀석의 페라리가 이미 저쪽에 주차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이라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조수석 문을 열고 녀석의 차에 탔다.
“와 이건 뭐… 얼마나 마신 거야. 남이 풍기는 술 냄새 맡는 것도 색다른 경험인데?”
최수혁이 창문을 열고 공기를 순환시켰다. 좀 민망해서 셔츠 냄새를 맡아 보니 그래 좀 심하긴 했다 정세연. 녀석이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택시를 잡겠다고 비틀비틀 도로 위를 걸어 다니는 강남역 좀비들이 눈에 보였다.
나는 오는 길 내내 너무 피곤해서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녀석이 흔들어 깨우지 않았으면 주차장에서 다음 날 오후 늦게나 돼서 일어날 정도로, 정말 피곤했다.
“얼굴이 많이 안 좋네. 내리 야근하고 술 마시고. 좀 쉬어라.”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카풀은 동재랑 할 것이 아니라 이 녀석과 하면 정말 금상첨화겠다 싶었다. 문 앞까지 대리기사 서비스인데 이런 좋은 조건이 어딨겠냐. 최수혁이 연예인이라는 게 아쉽네 아쉬워.
“고맙다.”
나는 짧게 한마디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씻을 기운도 없어 그대로 소파에 넘어질 듯 쓰러져 버렸는데 녀석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저녁 못 먹었을 거 같아서 사 왔는데 집에 없더라고. 그래서 언제 들어오나 궁금해서 전화했었어.”
녀석이 유명한 빵집 봉투를 내밀었다. 하… 이 새끼 은근히 남 미안하게 만드는 데 재주가 있네. 나는 말없이 빵 봉투를 받고 다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다음 날 오후 3시까지 잠이 들었다.
그렇게 아침 같은 오후에 눈을 뜸과 동시에 밀려오는 엄청난 숙취에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끝도 없이 들이켜고 나니 현실 직시가 되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주말인데 일해야 해…
나의 불평 소리에 수화기 너머로 동재가 혀를 끌끌 찼다.
-집으로 일거리를 가져오는 그런 아마추어적인 짓을 저지르다니. 차라리 월요일 새벽에 출근을 해. 주말엔 놀아야지.
“주말에도 일하고, 월요일 새벽 출근도 이미 예약이야.”
이번 신제품은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대부분의 직장인이라면 나 정도 되는 연차가 가장 일을 많이 한다. 경험치가 폭발하고 혼자서 판단할 능력도 생긴다. 여기서 한 3년만 더 버티면 실무는 후배들이 다 해 주고 나도 컨펌만 해 주는 역할로 바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내리 3시간을 일했더니 눈이 뻐근했다. 테이블 위에 어제 녀석이 준 빵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 입에 물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빵 하나를 다 먹었는데도 그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질 못했다. 에이씨…
휴대폰을 들었다.
[어디냐]
녀석의 1이 곧 사라졌다.
[집]
***
“넌 무슨 연예인이 이렇게 한가하냐.”
“원래 영화배우는 한가해, 작품 끝나면.”
녀석이 어제 사 온 각종 빵이 접시에 담겼다. 늘 우리 집에서만 먹었는데 최수혁 집에서 먹게 되니 또 기분이 색다르다.
“평범한 직장인이 왜 그렇게 바빠.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돈 버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너 이번 영화 홍보 들어갔을 때 집에 거의 못 들어온 거 내가 기억하거든?”
“홍보할 때는 원래 바빠. 매일 같은 내용 인터뷰에… 맨날 똑같은 것만 물어보고 반복해서 대답하고….”
“뭐 물어봐 줬음 좋겠는데 그럼?”
녀석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더니 한참을 생각했다.
“니가 한번 물어봐. 뭐든 대답해 줄 수 있어.”
“나 너한테 궁금한 거 없는데?”
“조금도?”
내가 너한테 뭐가 궁금하겠냐. 또한 궁금하다 해도 인터넷에 찾아보면 다 나올 텐데, 전화번호까지 안 마당에 이제 정말 궁금한 것이 없다.
“그런 거 말고 개인적인 거 물어봐도 돼.”
“개인적인 거라… K양이랑은 진짜 사귄 거냐?”
“왜, 질투하나?”
“미쳤냐. 우리 회사 제품 모델이라 묻는다.”
아… 그는 조금 실망한 듯했지만 사실관계를 털어놓았다. 진짜 사귄 거였단다. 헐… 그렇다네요 조팀장님, 진짜 사겼다네요. 사귄다는 걸 어떻게 정의 내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최수혁을 부를 때 자기야 라고 했으니 그런 것 같단다.
“그리고 어제는 어떤 남자가 나에게 ‘자기’라 불렀지.”
“야!”
친구들이 장난친 거라고 했잖아. 아마도 쭉 놀려 먹을 생각인 듯했다. 내년 모임 전에는 이 녀석 전화번호를 지우리라 다짐했다.
시답지 않은 녀석과의 대화가 매니저에게서 걸려 온 전화에 끝이 났다. 눈치로 봐서는 오늘 스케줄이 있는 것 같았는데 지 맘대로 짼 것 같았다. 뭐야 아까는 한가하다며.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그래라.”
“더 먹고 가도 돼. 냉장고에서 뭐 꺼내 먹어도 되고.”
“그래.”
니가 그렇게 친절하게 말하면 내가 사양할 것 같았냐. 조금의 고민도 없이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최수혁은 곧바로 집을 나갔다. 그 덕에 주인 없어진 집에 나 혼자 앉아서 이것저것 들춰 보며 놀았다. 부엌 한쪽이 프로테인바로 싹 다 채워져 있다. 곧 있으면 또 신작 준비로 몸 만들어야 한다더니… 이런 거 먹고 어떻게 사나 싶었다.
주인 없는 집을 구경하는 것은 참 재밌다. 그것도 집주인이 연예인이면 더욱 그러하다. 배우라 그런지 화보 촬영했던 사진들이 많이 걸려 있었다. 몸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녀석이다 보니 대부분은 반쯤 벗고 찍은 거군. 이 근육 좀 봐라, 부럽다 진짜. 싸가지가 좀 없어서 그렇지 인기가 많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녀석의 집에서 나왔다. 오늘 안에 마무리해서 이메일을 보내 놓지 않으면 신차장이 또 지랄할 게 뻔했다. 그런데 현관문을 여니 웬 여자가 우리집 비밀번호를 막 누르며 계속되는 오류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뉘신지?”
“네? 아, 네. 아는 사람 집인데 비번이 안 먹히네요.”
“전 댁을 모르는데요.”
“네?”
여자는 당황한 듯 잠시 나를 바라보다 ‘어머나’ 하며 아파트 호수를 확인했다.
“제가 호수를 잘못 봤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를 지나쳐 우리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한 번에 현관문을 열었다.
“근데… 집이 거긴데 왜 여기서 나오세요?”
여자가 착각했다는 그 집은 최수혁의 집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르다 말고 문득 내가 그 집에서 나온 걸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다.
“어… 친구 집이라서요. 그럼.”
아마 요즘 만나는 여자인가 본데 괜히 오해할까 싶어 친구라고 둘러댔다. 뭐 친구 맞잖아. 근데 이 녀석 나이는 어떻게 되더라?
집 안으로 들어가 작업중이던 노트북을 열고 포털 사이트에 최수혁을 검색했다. 서른.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어렸다. 어린놈의 새끼가 지금까지 반말하고 있었네. 그렇게 브라우저를 닫고 다시 파워포인트를 열었다.
***
드디어 신제품 런칭 날짜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임원회의 들어갔다 의외로 칭찬을 받은 조팀장이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인다. 그래 나도 이번 일만 끝나면 휴가라는 걸 한번 써 보려 한다. 거의 한 달 동안 일만 했으니 딱 3일만 놀아 보자.
“그래 써. 주말 달아서 5일 쉬다 와.”
역시 휴가 얘기는 상사 기분이 좋을 때 꺼내야 하는 법. 단박에 오케이가 떨어지는구나.
“우리 팀 진짜 이번에 수고들 많았어. 오늘은 대충들 마무리하고 일찍 퇴근하자. 내일은 행사장으로 바로 출근들 하고.”
좀비 같은 얼굴 10명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우리는 진심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참, 간만에 회식할까 하는데. 런칭도 마무리했으니 겸사겸사.”
제발 나 휴가 때 해라. 제발 나 휴가 때…
“정대리 저번에 나한테 집들이하겠다고 했잖아. 우리 그거 이번에 할까?”
헉. 기억하고 있었구나. 역시 팀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칼 같은 저 기억력을 봐라. 최수혁의 이름을 팔아 야근 한 번 땡땡이친 게 열 배로 돌아오는구나.
“…대신 저 다음 날 바로 휴가 쓸 겁니다. 무르기 없기.”
“무르기 없기.”
조팀장이 진지하게 내 주먹을 받아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흐물흐물한 행사장 인형처럼 허리를 굽힌 채 퇴근 준비를 했다.
사원증을 찍고 시계를 보니 6시. 이렇게 해 떠 있을 때 퇴근해 보는 게 얼마 만이냐. 오는 길엔 운전하다 깜빡 졸았다. 삐뚜름하게 주차를 시켜 놓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올라가는구나. 1층… 2층… 3층…
“기면증 있냐.”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떠 보니 최수혁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시발 엘리베이터에서 졸았구나. 문이 열렸는데도 내가 내리질 않으니 지하까지 다시 내려왔나 보다.
“밥은 먹었냐.”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어서 나를 12층으로 올려 보내 주게.”
나의 간곡한 청에 녀석이 다시 12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올렸다. 올라가는 동안 내가 또 졸까 싶었는지 내 어깨를 붙잡고 부축까지 해 줬다. 현관문이 열리고 거실로 들어왔는데… 어라, 우리 집이 아니다.
“자더라도 밥 먹고 자.”
이 새끼가 또 내가 잠시 정신력이 혼미해진 틈을 타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왔다. 싸울 힘조차 없었기에 차려 주는 대로 일단 앉아서 숟가락을 들었다.
“니네 회사 미친 거 같다. 사람을 갈아 버리네 그냥.”
“1년에 한 번만 이래. 신제품 시즌 끝나면 칼퇴 많이 한다. 뭐냐 이거 왜 맛있냐.”
어디 밥하는 이모님이라도 왔다 가셨는지 웬일로 국과 밑반찬, 게다가 오곡밥까지. 오랜만에 먹어 보는 집밥이다.
“누가 정성껏 해다 주셨지.”
아 생각났다. 그 여자. 우리집을 최수혁 집으로 착각하고 비번 눌러 대던.
“너 은근히 인간적이더라. 여자한테 집 비번 알려 줄 정도면 꽤 가까운 사이인가 보네.”
“질투인가.”
“그럴 리가.”
“…그냥 질투 난다고 좀 해 주면 안 되나.”
“…….”
“눈치가 없는 거야, 없는 척하는 거야.”
“…….”
“아…. 시발. 너 자냐?”
나는 그렇게 녀석의 집에서 밥을 먹다 식탁에서 잠이 들었다고 했다. 나를 어떻게 의자에서 끌어 내려 침대까지 데리고 갔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나는 녀석의 침대에서 11시간을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 보니 다음 날 아침 7시 반. 씻고 행사장으로 바로 출근하면 퍼펙트한 시간이다. 거실로 나오니 녀석이 소파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최수혁은 은근히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녀석을 버려두고 출근 준비를 했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내일부터 휴가라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났다. 물론 그 전에 집들이라는 거대한 벽이 존재했지만 다들 피곤할 테니 금방 끝날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지.
인간이란 참 신비한 동물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뇌 없는 좀비처럼 돌아다니던 양반들이 행사 끝나기 한 시간 전부터 환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저녁쯤 되자 다들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제 한동안 야근 안 한다는 생각과 간만에 술 먹을 생각, 그리고 연예인 구경한다는 생각에 다들 들뜬 게 분명했다.
“집에서 잘 안 나와. 가끔 엘리베이터 타면 마주치고 그게 다야.”
“대리님 그게 어디에요! 그렇게라도 보는 게 어디야, 아악 어떡해! 어떡해!”
회식 참가 불변의 법칙이라고 꼭 당일날 일이 생겼다며 불참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생기더니 오늘은 어째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한다고 했다. 술은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샀고 안주는 역시 민족의 배달 음식.
방문자 신분 확인이 모두 끝나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섰다.
“정대리, 회사는 취미로 다니는 거였구나. 뭐 이런 고급 아파트에 살아? 월급 안 줘도 되겠다 야.”
“아닙니다. 저는 그 월급이 꼭 필요합니다.”
어느 미친놈이 취미로 밤도 새고 엘리베이터에서 졸기도 하고 그럽니까. 딸린 식구가 없다 보니 주거환경에 투자를 한 것일 뿐. 그렇게 모두가 기대하던 연예인은 보지를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조용히 피어오르는 이 난장판. 다들 술이 고팠구나.
위잉-
[손님 온 건가?]
최수혁이 집에 있었나 보다.
[미안. 시끄럽냐]
[회사 사람들]
[금방 갈 거야]
[나도 건너갈게]
[니가 왜]
[인사하려고]
[나 안면 있잖아. 잊었나?]
그렇다. 이 녀석 우리 회사로 찾아온 적이 있었지.
[오버하지 마]
[문이나 열어]
녀석의 문자가 끝나기가 무섭게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 올 사람 있었어?”
조팀장이 충혈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암요 있죠. 팀장님이 기다리는 바로 그 사람.
“어머! 어머어머! 웬일이니 얘들아 웬일이니… 들어오세요오.”
난리가 났다. 오다가다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음 좋겠다 이 정도의 희망을 품고 왔을 텐데 주인공이 제 발로 납셔 주셨다.
“안녕하세요.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인사도 안 하고 있기가 좀 그래서요.”
최수혁 전용 스킬 예의 바른 척하기 발동. 모두 그 말을 믿었는지 역시 젠틀맨 하는 표정이다. 서 있지 말고 일루 들어오세요 하며 자리까지 만들어 준다. 저기, 집주인은 접니다만.
“(들어오긴 어딜 들어와. 인사했으니 가라 이제.)”
현관 앞에서 작은 소리로 경고했지만 ‘그래 그럼 잠시만 앉아 있다 갈게’ 하며 녀석이 사기를 친다. 나를 무시한 채 집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조팀장이 마련해 준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잔도 받고 돌리고 하고 있었다.
“정대리님이랑 친하신가 봐요.”
“네, 뭐. 가끔 찬밥 나눠 먹는 친구 사이 정도. 같은 또래다 보니 친해지게 되었네요.”
“어우… 유명인 같지 않게 디게 소소하시다.”
상사가 제3자에게 아부 떠는 걸 보는 건 좀 괴롭다. 조팀장이 녀석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혼자 얼굴이 빨개졌다.
“급이 맞으니까 친해지셨겠죠, 팀장님. 정대리님도 우리 회사에선 연예인이에요.”
“맞아. 매년 신입사원들 들어올 때마다 대리님 때문에 진짜 우리 팀 시달리는 거 장난 아니야.”
“왜 시달리는데요?”
녀석이 흥미가 생겼다는 얼굴로 3년 차 후배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대리님 훈남이잖아요, 혼혈이라 더 신기하구. 매년 여자 신입사원들 우리 팀에 들어오겠다고 진짜 별 지랄… 어머… 별짓을 다 해요. 호호.”
“덕분에 내가 귀찮아. 다들 나한테 아부하잖아. 정대리랑 같은 프로젝트 같이 엮어 달라고.”
봤냐. 내가 이 정도다 인마. 내가 너처럼 건강한 성생활을 누리고자 한다면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문명인이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일 뿐. 왠지 녀석이 회식에 참석해 준 게 잘된 일이다 싶었다. 너만 잘난 게 아니라는 걸 제3자의 입을 통해 전달하는 것만큼 확실한 게 어딨겠어.
“이거 덜어 먹자. 야 정대리, 그릇 좀 가져와 봐.”
찌개를 덜어 먹기 위해 빈 그릇을 찾았다. 하지만 나 혼자 사는 우리 집엔 이 많은 숫자를 먹여 살릴 밥그릇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제가 가져올게요, 저희 집에 남는 그릇 있어요.”
최수혁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뒤를 졸졸 쫓아가 녀석의 집으로 이동했다.
“한 여섯 개쯤 더 있으면 돼?”
따라 들어온 나를 보며 녀석이 빈 그릇을 건넸다.
“재밌냐.”
“응. 너 회사 생활에도 도움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나 보자고 굳이 집으로 쳐들어온 것 같은데. ”
“굳이 너 봤으니 이제 목표 달성했어. 여기서 빠져.”
“난 좋은데. 정세연 대리님 회사 생활 얘기도 듣고.”
나왔다, 저 표정. 농담과 진담의 중간쯤에서 사람을 놀릴 때 나오는 그 표정이다.
“너 계속 있으면 저 사람들 안 가고 새벽까지 달릴 거야.”
내 말에 녀석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시끄러울 테고 다른 입주민들에게도 민폐다.
“…그건 곤란하네. 너 내일 출근하기도 힘들 거고.”
“나 출근 안 해. 휴가 냈어.”
“뭐? 근데 왜 말 안 했어. 나 내일 스케줄 있는데.”
“……?”
그게 어쨌다고.
***
최수혁은 내 말을 듣고 정말 더 이상 회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바쁜가 봐요. 한마디 했더니 그래 연예인인데 우리랑 놀고 있을 시간이 어딨겠니 하며 다들 이해해 줬다.
10시가 되니 가정 있는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11시가 되니 체력이 떨어진 사람들이 자리를 떴다. 남은 것은 이동재 하나. 같이 치워 주겠다고 남았다가 입가심으로 맥주 한 캔씩 따서 식탁에 앉았다.
“끝났구나 드디어.”
“어.”
우리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퀭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맥주 맛을 음미했다.
“이 순간 나는 내일 출근 안 해도 되는 형이 제일 부럽다.”
“일단 출근만 하고 가서 뺑이 쳐”
동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너 대리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 차 가져왔지?”
“어, 나 그냥 여기서 출근할까? 너무 피곤한데.”
“그러든가 그럼. 이불 가져다줘?”
동재에게 이불 하나를 꺼내 주고 방으로 들어왔다.
핸드폰에 지정해 둔 ‘평일 7시 반’ 알람을 껐다. 이제 방해할 자는 아무도 없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으니 몸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이다. 이런 걸 두고 현대인은 ‘꿀잠’이라 지칭한다.
일어나니 동재 놈은 출근하고 없었다. 어제 대충 치워 놓은 음식 쓰레기들과 술병들을 한데 모아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아이고, 평일인데 출근 안 하셨나 봐요.”
경비원이 반갑게 뛰어와 인사를 했다. 내 손에서 술병 보따리를 받아 들고 같이 쓰레기장으로 가 준다.
“화장실 문제는 해결되셨어요?”
“네?”
“1204호 사시는 최수혁씨요. 전화 안 하셨어요? 옆집에서 화장실 물이 새는 것 같다고… 급하니까 전화번호 알려 달라고 하셔서 알려 드렸는데.”
아, 이런 창의적인 새끼…
“아 네. 왔었어요. 고쳤어요. 하하.”
“네에… 아니 이상하네. 화장실 물이 새면 밑으로 새지 왜 옆집으로 새나 그래. 비싼 돈 들여 봐도 다 소용없네요.”
그러네요. 비싸기만 하지 일반 아파트보다 마감이 더 별로라며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잠은 충분히 잤고, 평일 이 시간에 불러낼 사람도 없다. 그렇다면 정답은 하나다. 쇼핑을 가는 거다.
시간이 없어서 늘 인터넷 쇼핑만 하다 보니 막상 받아 보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일이고 점심때도 지났으니 어딜 가도 한가할게 뻔했다. 대충 옷만 갈아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가까운 백화점을 목적지로 찍고 아파트를 빠져나오니 차량 계기판에 ‘옆집 놈’이 떴다.
“왜.”
-뭐 해.
“백화점 간다.”
통화 너머로 녀석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카드 줄까?
“미친놈아 전화 왜 했어.”
-정대리님 휴가 받으면 뭐 하는지 궁금해서.
“스케줄 있다더니 헛소리였냐.”
-잠깐 쉬는 중. 오늘 밤샘 촬영이다. 집에는 새벽에나 들어갈 것 같고.
“왜 바깥양반이 마누라한테 전화하듯 그런 걸 나한테 말하는 건데.”
-나는 궁금했거든. 너 야근한다고 집에 매일 늦게 들어올 때.
이 새끼 또 시작이다.
-복도에서 발소리 나면 너 들어오는 건가 해서 나가 보고 그러는 기분이 좀 좆같아서. 너는 그러지 말라고.
빵빵-
에이씨… 끼어들기를 하고 지랄이냐. 나는 클락션을 울리며 앞차에 신경질을 내었다. 평일인데도 도로가 더럽게 밀린다. 금방 도착할 줄 알았더니 기분 진짜 엿 같네.
“끊어. 나 운전해야 돼.”
멋대로 통화가 끊긴 차량 안에 에어컨 바람 소리만 남았다. 시발, 이래서 일이 한가해지면 잡생각이 든다.
***
소소하게 산다고 했는데 3백만 원쯤 긁은 거 같다. 쇼핑백을 주렁주렁 들고 차에서 내리니 정말 무슨 어디 회장 사모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1206호 아줌마가 수험생 딸과 함께 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어머, 많이도 사셨다. 쉬는 날이에요?”
“네. 쉬는 날 아니면 쇼핑도 못 하네요.”
“우리 딸 알죠? 인사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딸이 말도 없이 인사만 꾸벅했다. 대기업 다니는 아저씨라며, 어머니가 미국 분이시라 영어도 네이티브라고, 빨리 장가를 가야 할 텐데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 어쩌냐는 얘기까지. 나를 앞에 두고 내 얘기를 듣는 건 신선한 경험이었다.
근데 아주머니, 어떻게 그렇게 나에 대해 잘 압니까.
“아우, 우리 아파트 사는 사람인데 왜 몰라요. 우리 다 알아요. 옆집에 사는 최수혁씨 매일 여자 바뀌는 것도 우리 다 알아, 호호호. 모른 척해 주는 거지. 근데 요즘은 좀 뜸하데?”
여기가 진정 스몰 월드,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진심으로 이 사람들이 무서웠다.
이사 가야겠다.
집으로 들어와 대충 라면 하나로 저녁을 때웠다. 늦게 일어난 탓인지 잠이 쉽게 오지는 않았다. 소파에 앉아 넷플릭스 메뉴를 백 번쯤 훑다가 추천 미드 하나를 재생시켰다. 보고는 있는데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다 어느새 시즌 하나를 통째로 끝내고 자동으로 시즌 2가 재생되려 하고 있을 때쯤, 복도에서 발소리가 났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여는 소리까지 들리고 조용해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녀석이 여자를 데리고 오지 않는다. 이 아줌마들 진짜… 관찰력이 셜록 홈즈급일세.
위잉-
[나 왔어]
[알아]
[뭐 해]
[미드 정주행중]
[문 열어]
귀찮은 새끼 진짜. 현관문을 여니 살짝 피곤해 보이는 녀석이 복도에 서 있었다. 집주인 허락도 맡지 않고 거실로 들어서더니 구석에 몰아 둔 쇼핑백 무더기를 보고 픽- 웃었다.
“새벽에 들어올 거라더니.”
“지금 3시야, 보통 새벽이라고 하지.”
얼굴을 보니 화보 촬영이라도 있었던지 메이크업도 지우질 않은 채다. 녀석이 멋대로 소파에 앉아 내가 보던 미드를 쳐다본다. 재밌냐는 물음에 그저 그렇다고 답변했다.
“니네 집 바로 옆에 있거든. 왜 여기로 퇴근하냐.”
“너 출근 안 한다며. 방해될 거 없잖아.”
녀석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여차하면 저대로 잘 듯싶었다.
“꺼져라 좀. 내가 우습냐?”
“너야말로 내가 무슨 마리아 테레사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본데… 내 인내심이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뭐?”
“…참아 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말끝마다 짜증 내고 가시 돋친 말만 하는데 내가 언제까지 바보처럼 들이대 줄 거 같아. 정말 싫으면 싫다고 해. 나도 사람이야.”
녀석이 눈을 감은 채 나한테 하는 말인지 저한테 하는 말인지 모를 헛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더니,
“간다.”
녀석이 갑자기 일어섰다. 나를 무시하고 스쳐 지나가는 녀석의 흰 셔츠가 바스락거리며 소리를 내었다. 넘어가지 말자, 이 새끼는 프로야.
“개인적인 질문 해도 돼?”
녀석이 멈춰 섰다.
“질문하라며. 뭐든 답해 준다고.”
“해.”
“…누구야? 니 성격에 비번까지 알려 줄 정도면 뭐 곧 연예 기사에 톱 뉴스라도 뜨는 거야?”
아 시발, 정세연. 결국엔 물어봤구나. 계속 신경 쓰여 짜증 나던 통에 결국엔 입 밖으로 그 말이 튀어나왔다.
“누나야. 친누나.”
녀석이 웃음을 참으며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비번은 1434.”
쾅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복도에서 녀석의 웃음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심이 요동치는 소리를 들었다. 완벽하게 말려들었다, 녀석의 페이스에. 역시 프로는 다르다.
***
목요일 아침이 되었다. 산뜻하게 커피와 토스트로 허기를 채웠다. 이것이 삶이라는 것이지. 여유 있는 아침 식사와 뉴스로 시작하는 지식인의 우아함이 거실을 꽉 채웠다.
커피를 마시다 문득 거실 벽면을 바라보았다. 아직 자고 있으려나. 혼자 뚫어지게 쳐다보다 정세연 이 미친놈아 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내일 퇴근 후에 한잔 콜?]
동재의 문자에 1초 만에 콜 하고 답했다. 은근히 혼자 휴가를 쓰는 것도 심심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운동이나 갈까 하다 아파트 밑에 피트니스 센터가 있다는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이런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한 번도 이용해 주지 않았다니. 쯧쯧. 물 한 병과 함께 타올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이 시간엔 한가하겠지 싶었는데 역시나 직장인은 아무도 없었다.
아줌마 한 명과 노인 한 명. 그리고 최수혁.
녀석이 웨이트를 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 온 줄도 모르고 바벨을 들어 올리는 녀석의 가슴 근육이 우악스럽게 움직인다. 실제로 보니 더 마초스럽군.
“너무 그렇게 쳐다보면 내가 흥분되는데.”
녀석이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짐승같이 근육을 키웠냐.”
“니 맘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새로 들어가는 작품 컨셉이 그래. 3개월만 참아.”
“재밌냐.”
“뭐가.”
“니 멋대로 던져 보고 내 반응 살피는 거.”
녀석이 웃으며 일어났다. 타올로 땀을 닦더니 자리를 정리했다. 뭐 벌써 가냐. 시작도 안 한 거 같은데?
“너도 곧 땀 흘릴 거잖아. 너는 잘 참았지만, 나는 못 참을 거 같거든.”
재밌는 게 확실하구나. 그렇다면 더 이상 반응해 주지 않겠다. 나는 말없이 러닝머신으로 향했다. 그 뒤를 최수혁이 따라왔다.
“저녁 사. 지난번 오마카세 얻어먹은 보답으로.”
“나가는 거 귀찮은데.”
“장소는 니가 골라. 너 먹고 싶은 데로 가.”
그 말에 번뜩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진짜지?”
“6시까지 준비해. 나 올라간다.”
좋다 최수혁. 제대로 한번 당해 봐라. 나도 좀 재밌어 보자.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났더니 개운해졌다. 인터넷 서핑을 하며 이래저래 시간을 때우니 금세 오후가 지났다. 아직 뜯지도 않은 쇼핑백을 풀어 헤쳐 입을 옷을 정하고 나니 정확히 5시 55분. 차 키를 가지고 복도로 나가 녀석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10초쯤 후에 녀석이 나왔다. 오… 연예인 티가 팍팍 나는데.
“왜 이렇게 차려입었어.”
“좋아?”
“어 존나 좋다.”
어쭈 하는 표정의 녀석을 뒤로한 채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니 곧바로 페라리 라이트가 켜진다. 야, 오늘은 니 차 안 타.
“나 독일 차 별론데.”
“오늘 니 차 타고 가면 넌 최소 사망이야 인마.”
녀석이 조수석에 올라 안전밸트를 맸다. 표정을 보니 이제 조금 궁금해지긴 했나 보다. 얌마 나도 한때는 너 못지않게 개새끼 소리 듣고 산 놈이야. 내비게이션은 생략한 채 익숙한 도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한남대교를 건널 때만 해도 눈치를 못 채더니 연남동 근처를 오자 녀석의 표정이 서서히 썩어 가기 시작했다.
내려라, 너의 지옥에 도착했다.
“헉 미친! 웬일이야, 최수혁이야!”
“야 야, 나 지금 홍대 입군데 여기 최수혁 왔어. 야 봐봐. 보여? 보여?”
“오빠!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
문명의 혜택을 받은 자들이 여기저기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녀석을 찍기 바빴다. 라이브 중계라도 하는지 혼잣말하며 녀석을 따라오는 아이들도 많았다.
지금 우리는 홍대 주차장 길을 나란히 걷고 있었다. 매니저도 없고 경호원도 없다. 녀석의 표정이 썩었다가도 금세 풀어지고, 찡그렸다가 다시 웃었다.
“네 안녕하세요. 아 사진요. 네.”
찍어 줘라. 뭐 그리 비싼 얼굴이라고. 녀석이 웃으며 사진 촬영에 일일이 응하고 악수도 해 주고 인사도 해 준다. 바쁘다. 너의 그 가식으로 포장된 얼굴에 구김살이 가지 않게 바쁘게 움직이고 있구나.
“재밌냐….”
녀석이 다가와 입술을 깨물며 속삭였다. 나는 대답 대신 ‘수혁아 사진 찍어 드려’ 하며 여고생들 무리로 그를 떠밀었다. 녀석이 아무리 프리하게 사는 연예인이라 해도 이런 곳에 갑자기 노출되는 급은 아니다. 이건 내일 뉴스에 실릴 만했다. 한순간이라도 실수하면 빛의 속도로 퍼져 나갈 거다.
웃어, 웃으라고.
***
녀석이 땀을 흘렸다. 프로는 프로다. 한 명도 거절하는 법 없이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준다. 팬서비스의 화신이라 해도 믿겠다. 지쳤는지 한숨도 살짝 내쉬던 건 나만 들을 수 있었다.
“저희 좀 지나갈게요.”
녀석을 끌고 조금 한산한 곳으로 향했다. 동정심이 생겨서? 아니, 여기서 밥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약했는데요, 정세연으로.”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종업원이 화들짝 놀라며 마련해 둔 테이블로 안내했다.
“갈매기살 2인분하고 내장 모듬으로 1분이요, 우설도 좀 주시구요.”
내 멋대로 한 주문에 녀석이 쳐다본다.
“소 혀야. 못 먹어도 괜찮아, 내가 다 먹을 거야.”
똥 씹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녀석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손님들이 젓가락을 쥔 채 이쪽만 쳐다보고 있다. 녀석이 다시 한숨을 쉬었다. 소리 없이 카메라 플래시만 터진다.
고기가 구워지고 밥과 찌개도 나왔다. 신나게 퍼먹다 녀석이 젓가락만 쥔 채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 먹겠으면 갈매기살 먹어. 이건 괜찮아.”
내가 젓가락으로 옮겨 주자 녀석이 작은 고기 한 점 입에 넣고 또 한참을 쳐다본다.
“안 좋아하면 다른 거 시켜.”
“좋아하는데. 지금은 몸 만드는 중이라서 이런 거 못 먹어. 새 작품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지 참.
“이것도 다 단백질이야. 점심은 뭐 먹었는데?”
“안 먹었어.”
“왜.”
“너하고 저녁 먹을 게 기대돼서 점심 먹을 생각 못 했어.”
나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 번을 못 이기냐 한 번을.
“옮길까?”
“됐어. 어차피 얼굴 다 팔렸고 내일쯤에는 ‘내장 먹는 최수혁 짤’ 올라올 건데 뭐 하러 굳이.”
“너 왜 사람 자꾸 미안하게 만드냐.”
“그렇게 느껴져? 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뿐이야.”
밥맛이 뚝 떨어졌다. 재미가 사라졌다. 땀 뻘뻘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최수혁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그것도 잠깐이었다. 대화가 끊기고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내가 말없이 일어나 계산을 하고 나와 녀석을 잡아끌었다. 중간중간 다가오며 사인해 달라는 행인들은 내가 대신 거절하며 차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일찍 돌아올 생각이 아니었는데 녀석의 반응이 나를 매우 실망시켰다. 마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같은 표정이어서 내 기분만 더 상했다.
“잘 먹었다.”
별로 먹은 것도 없으면서 녀석이 짧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녀석이 들어간 문을 바라보며 따라 들어갈까 잠시 생각했다.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 이런 쓸데없는 고민까지 하게 된다.
집으로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었다. 부엌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한참 쳐다보다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녀석이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너 왜 울상인데. 티키타카도 받아 주는 맛이 있어야 오고 가는 거 아니야. 왜 캐릭터에 맞지도 않게 우울한 목소리야.”
녀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현타가 와서.
“뭐?”
-현실의 벽이 느껴져서 잠깐 우울해졌어. 내가 누군지 너무 잘 일깨워 준 하루였다고. 성공했네 정세연.
벽 너머의 녀석이 힘없이 항복하는 것이 느껴졌다. 너 왜 요즘 성생활을 게을리하냐. 왜 집에만 붙어 있고 밖에 안 나가. 이런 얘기를 너무 해 주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쉬어.”
그날은 그렇게 전화를 끊었고 다음 날도 녀석은 별 기척이 없었다.
***
퇴근하는 동재를 데리러 회사 빌딩 앞에 차를 정차시켰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 시간에 혼자 땡땡이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상당히 흐뭇했다. 입구에서 동재가 손을 흔들며 차도를 건너왔다. 뭐냐, 니가 달고 온 혹은.
“대리님이랑 한잔하러 가신다길래. 저도 껴도 되죠?”
김시은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당연히 껴도 되지. 아니 껴 줘서 고맙다 김시은.”
남자 둘이서 술 마시는 게 뭐 대단한 자리라고. 황송하기 그지없었다.
“우리 그냥 가볍게 치맥만 할 건데 괜찮지?”
“네, 치킨 싫어하는 여자가 어딨겠어요.”
“치킨 싫어하는 남자도 없어. 가자.”
서초동으로 차를 몰았다. 퇴근한 직장인들이 모여 다 함께 회식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시끄럽고 번잡스러웠지만 오늘 내 기분엔 이런 곳이 딱 좋았다.
“형, 가볍게 한잔하자던 사람 어디 갔어. 왜 이렇게 달려.”
“대리님 안 좋은 일 있으셨어요?”
“휴가중에 안 좋은 일 있을 게 뭐 있어. 혼자 놀려니 심심했는데 니들 보니 반가워서 그러지.”
“그러고 보니 형 휴가 끝났네. 주말 쉬고 다시 출근이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3일이 지나가 버렸다. 그중 하루는 망쳤고.
“선배님 근데 지난번에 이사님이 대노하셨다는 거요.”
이동재와 김시은이 회사 얘기를 꺼냈다. 직장인들은 늘 술자리에서 그런다. ‘야 술자리에서까지 일 얘기냐’ 내지는 ‘회사 얘기 하지 마 술맛 떨어져’ 라고 하지만. 결국엔 회사 얘기만 하게 되고, 돌고 돌다 다시 업무 얘기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한심하다 둘 다. 그리고 나도 한심하다.
“대리님 많이 취하셨어요.”
“형, 왜 이래. 집에서 놀다 나온 사람이 왜 오버야. 정신 차려.”
“나 안 취했다. 노인 취급하지 마라.”
겨우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은데 애들이 벌써 일어나려고 했다. 재미없다. 이동재랑 술 마셔도 예전만큼 재밌지 않고 김시은 정도 되는 미녀가 앉아 있어도 설레지가 않았다. 동재가 대리기사를 불렀다.
“시은씨 택시 타고 가면 되지? 미안, 형이 오늘 안 좋은 일이 있나 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시은씨 안 부르는 건데… 괜히 입장 곤란하게 했네.”
“아니에요. 저 여기서 가까워요. 대리님, 저 먼저 가요.”
“김시은, 내가 사표 쓰기가 좀 그래서 그렇지. 너를 이뻐하지 않는 것이 아니야.”
“왜 헛소리야 형.”
“알아요. 대리님, 감사해요. 저 가요.”
아씨,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대리기사 기다리는 동안 두 번쯤 토를 했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심하게 취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이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다행이다. 그쯤 생각했을 때 대리기사가 도착했다.
“감사합니다. 택시 타고 가실 수 있겠어요?”
뭐야. 대리기사 불렀다며.
“아 네. 저야 뭐. 근데 괜찮으세요? 이렇게 막… 돌아다니셔도?”
길거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괜찮습니다. 어제부로 그런 거 포기하기로 했거든요. 그럼 데리고 들어갈게요.”
“네? 아…. 네… 뭐 그러세요. 형! 최수혁씨 오셨으니까 나 간다? 내일 전화할게.”
이런 시발. 정말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녀석이 나를 부축해서 자신의 차량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내 차, 내 차 타고 갈 거라고.
“니가 대리기사냐, 여길 왜 와.”
“기억 안 나면 좀 닥치시죠.”
거리에서의 젠틀한 최수혁이 사라지고 옆집 사는 최수혁이 돌아왔다. 딱 봐도 내가 뭔가 실수한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난다. 동재 이 새끼… 형제를 팔아먹고 혼자 튀다니.
그냥 눈을 감았다. 눈 뜨고 녀석의 얼굴을 보면 토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거침없는 녀석의 운전 솜씨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냥 밟아, 빨리 집으로 가자.
끼이익-
순간 잠이 깼다. 어느덧 페라리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바로 내리기 뭐하면 좀 있다 올라가든가.”
“그래… 좀 쉬자.”
녀석의 배려에 나는 다시 눈을 감기로 했다. 머리가 어지러워 걷기가 힘들 것 같았다.
“장부에 써 놔. 니가 두 번 데리러 온 거 다음에 갚아 줄게.”
“돌려받자고 하는 짓 아닌 거 알지 않나.”
“맞을래?”
“두 번은 안 맞아 줘. 그리고 이번에 취한 쪽은 너고.”
그래 이번엔 내가 취했다. 택배 상자 받으러 가던 그날은 내가 아직 녀석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한 1년 지난 거 같은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네.
“안 그러면 안 되나? 내가 뭐 하자고 한 거 없잖아. 왜 그렇게 밀어내는데.”
이 새끼가 남의 속도 모르고 일방통행을 또 시작했다.
“안 밀어내면? 뭐 어쩌자고. 남자끼리 물고 빨고 하자는 거야 뭐야. 그나마 내가 밀어내니까 이 정도로 유지되는 거 모르겠어?”
나 뭐래는 거니 진짜. 술김에 말이 막 나온다. 이젠 낯 뜨거워서 눈을 뜰 수가 없다. 녀석이 조용하다. 뭐야 시발 왜 조용해.
“너… 나한텐 너네 집 비밀번호 알려 주지 마라.”
왜.
“이러다 진짜 큰일 나겠다.”
녀석이 차문을 열고 나갔다. 너 이 새끼 폼만 잡고. 그런 은유법을 쓰면 내가 못 알아들을 것 같냐.
아씨… 내가 내쉰 술 냄새에 다시 취할 것 같았다. 젖 먹던 힘을 다해 문을 열고 나왔다. 녀석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집으로 들어왔다.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토를 한 것 같은데 그 뒤로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보다.
“다친 데는 괜찮아? 미친 거 아니야 형?”
“뭔 소리야, 나 멀쩡한데?”
아침이 되고 나니 동재가 직접 집으로 찾아왔다. 전화한다더니 새끼. 형이 걱정되었구나.
“어제 형 진짜 난리도 아니었어. 내가 형을 너무 모르고 살았나 봐.”
아… 더 들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일단 요약본으로 먼저 접한 뒤 양괄식으로 풀어내기로 했다.
“나 얼마나 마셨어? 어제.”
“소주 3병.”
뭐야. 맥주 마시러 간 거 아니었나. 누가 소주를…
“최수혁은 누가 불렀어. 설마 너….”
“형이 불렀지! 내가 어떻게 불러.”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내가 건 게 맞긴 맞다. 에이씨… 변명의 여지가 없네.
“나 어디 다쳤는데?”
“굴렀잖아, 치킨집에서. 최수혁 보고 놀래서.”
뭐?!!
그런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단 건가. 동재가 내 셔츠를 확 젖히고 등을 보라며 거울 앞으로 끌고 갔다. 멍이 들긴 들었다. 아씨… 그럼 이제 디테일로 들어가야겠다.
“아니 시발 내가 김시은씨 앞에서 쪽팔려서 고개를 들 수가 있어야지. 뭐 가자마자 맥주 한 잔 먹고 혼자 취해서 소주를 막 시키는데. 말리려니까 막 욕하고. 그래서 혼자 두 병 다 마시더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를 막 해서 내가 그냥 회사 얘기하면서 화제를 돌리긴 했는데. 김시은 눈치 다 깠을걸?”
“뭘.”
“형이 최수혁 좋아하는 거.”
뭐?
“아니 누가 봐도 상황이 딱 그런 게… 우리 회사 얘기 한참 하는데 혼자 휴대폰 꺼내서 전화하더니 막 이 새끼 저 새끼 하다가 데리러 오라 그러고. 내가 너 땜에 죽네 사네 하더니….”
뭐…???
“아니 그렇다고 또 바로 데리러 오는 건 뭔데? 이때까지 난 형 혼자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뭐라고???
“최수혁도 형 좋아하나 본데? 둘이 사귀냐?”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