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것은 흔하디 흔한 로맨스의 도입부이다
위잉-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정세연]
[당장 내려오지 않으면]
[나 혼자 출근하는 수가 있어]
어디서 형 이름을 막 부르고 이 새끼가… 일 분에 한 번씩 울리는 동재 녀석의 문자에 걸어가며 답장을 보냈다.
[다 왔다니까!]
아파트 앞 경비실 건너편에 정차된 흰색 볼보 SUV의 창문이 열리며 동재 녀석이 얼굴을 내밀었다.
“뛰어오라고!”
하도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하마터면 지나가던 오토바이에 몸을 날릴 뻔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안달이냐며 옆좌석으로 비집고 들어가니 신경질을 버럭 내며 빨리 벨트부터 채우란다. 요즘 들어 지각하면 벌금 십만 원씩 매길 거라는 오팀장의 호통에 동재는 평소보다 10분 일찍 집에서 출발한다.
주구장창 영어로 떠들어 대는 라디오가 시끄러워 볼륨을 줄이자 까칠해진 동재가 영어 공부중이라며 다시 볼륨을 키웠다. 알아는 듣냐.
“근데 뭐야? 형네 아파트 경비 겁나게 살벌해졌어. 도둑이라도 든 거야?”
그랬다. 일주일 전부터 우리 아파트 앞으로 온 방문객 차량은 전부 신원조회를 하고 있다. 어느 집에 방문하는지 일일이 확인을 하는 통에 성격 급한 이동재가 성질을 내는 것도 당연하다. 카풀 때문에 일주일에 두세 번을 왔다 갔다 벌써 1년을 해 온 일인데 새삼스레 무슨 대질신문까지 하냐며 경비원에게 아는 척을 했다 싫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너무 잘사는 동네에 잘나가는 놈들만 산다는 아파트라 그런가. 동재는 경비가 한 단계 낮은 곳으로 이사하는 게 어떠냐고 핀잔을 줬다. 사실은 도둑이 들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설명하기 귀찮지만 일단은 말해 두어야겠다 싶어서 지난 내 생일 소동 때부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때 그 젊은 신혼부부 있었잖아, 옆집에. 맨날 싸우던.”
“있었지.”
“이사갔어. 이혼했나 봐.”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니.”
동재가 살짝 끼어드는 뒤차를 확인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좁혔다. 앞에 있던 중형 세단은 황색 신호에도 신나게 직진으로 미끄러진다.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미괄식으로 말하지 마, 머리 아파.”
“그러니까 그게… 야, 신호 바뀐다!”
이동재의 팔을 치며 내가 소리를 질렀다. 생각 없이 앞차를 따라잡던 동재 녀석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몹쓸 타이밍에 적색 신호로 바뀌어 버린 탓에 우리 차량은 상당히 어색하게 횡단보도 중앙에 서 버렸다. 뒤차가 바짝 붙여 버리는 바람에 후진도 못한다. 파란불에 건너가던 보행자들이 한 번씩 가늘게 뜬 눈으로 우리를 째렸다. 죄송합니다. 우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닙니다만.
“이사 온 사람이 연예인이셔. 관리실에 뭐라고 했나 보지.”
동재는 우와! 하며 단박에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영어 공부중이라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 놈이 눈을 반짝이며 누구누구? 하며 묻는다.
“혹시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탤런트 H양인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형이 여신으로 모신다던 영화배우 S양?”
그때야 여신인 줄 알았지. 지금은 연예인이고 영화배우고 관심이 없단다 했는데도 이동재는 또 제멋대로 묵은 얘기를 꺼내 들고 주절대었다.
“마주치면 뺨을 때려 버려. 아직 유효한 방법일 수도 있어.”
이 자식이 쉰내 나게 몇 년 전 유행하던 헛소리냐.
“신경 안 써. 나이 들고 나니 남의 일에 관심이 없어져 버렸어.”
동재가 불쌍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혀를 쯧쯧 찼다. 형이 뭐 언제는 남 일에 관심이 있었냐며 가끔은 TV도 보고 세상일에 관심을 좀 가지라며 중얼거렸다.
그 수다가 10분을 이어지며 어느새 홍보실에 새로 온 부장 새끼 이야기로 옮겨 갔다. 서울대 출신이었는데 자신 역시 그것이 인생에 있어서 꽤나 괄목할 만한 성과였었나 보다. 회식 자리에서 맥주병을 들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제 자랑을 해 대는 통에 듣기 싫어진 우리는 둘 다 일찍 자리를 떴었다. 그 후로도 그는 기획실 여기저기를 들락거리며 우리 팀장과 상큼하게 말다툼을 몇 번 했었다.
참 말 많지, 그 새끼… 동재가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으며 열을 올리고 있던 차에 옆 차선으로 지나가는 버스 광고물에 눈길이 간다.
“저 새끼야.”
“뭐?”
“저 새끼라고.”
“김부장이?”
“아니, 아파트에 새로 이사 온 놈. 연예인.”
동재는 내 말에 고개를 길게 빼고 옆으로 지나가는 361번 버스의 광고물을 쳐다봤다. 웃통을 벗어 버린 남자 모델이 강렬한 눈빛으로 복근을 자랑하며 명품 향수를 광고하고 있었다.
“최수혁??!”
“아, 맞다. 이름이 최수혁이었지.”
그러니까 내 기억은 다시 일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밤낮으로 싸움만 해 대던 신혼부부가 이사를 가고 나니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 그래서 이대로 좀 조용한 사람이 이사 왔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어느 날 우리 동 전체가 뒤집어졌다. 밖을 내다보니 아파트 주민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서는 그놈이 이사하는 꼴을 구경하고 있었다. 처음엔 연예인인 줄도 모르고 무슨 정치인이라도 되나 싶어 팔짱을 끼고 같이 서서 구경을 했다.
‘실물로 보니 훨씬 더 잘생겼네. 키도 엄청 크네 그죠?’
얼굴 익은 1206호 아줌마가 슬쩍 다가와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는다. 그제서야 그가 연예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찬찬히 뜯어보니 나 역시도 어디서 좀 본 거 같은 기분이 들긴 했다.
짐은 또 뭐가 그리 많은지 포장 이사를 한참이나 풀어놔도 끝날 줄을 모르던 녀석의 신고식이 저녁 늦게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었다. 그 후로 몇 명의 여성들이나 교복을 입은 여학생 무리가 아파트 앞을 서성이다 경비원에게 쫓겨난 듯했다.
그 난리가 일주일쯤 지속되다 보니 관리 사무소에서 방문객 확인에 대한 공고문을 아파트 현관 앞에 크게 붙여 놓은, 그런 결론이 되시겠다.
오버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마침 주인공 되시는 분께서 매니저도 없이 등장해서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턱 하니 타 버리셨다.
스읍… 어디서 봤더라… 하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자니 녀석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나도 모르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아니 아니, 절대 니가 연예인이라서, 니가 잘생겨서 쳐다본 게 아니거든?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12층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길 기다리고 있는데 녀석은 손도 까딱하지 않고 호주머니에 손만 꽂은 채 서 있다.
‘몇 층 가세요?’ 하고 내 딴에는 공손하게 물어 줬더니 하는 말이,
‘됐습니다.’
하는 게 아닌가.
뭐가 됐다는 거지? 뭐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다 있어…. 하고 쌍욕을 속으로 곱게 씹고 있다 보니 이 녀석이 이사 온 곳이 바로 내 옆집이라는 사실이 그제서야 생각났다. 그럼 당연히 나랑 같은 층으로 가겠지.
정세연 이 상등신 같으니라고.
내가 이런 생각들을 마구마구 하고 있는 동안에도 뭐가 그리 잘나셨는지 향수 냄새 팍팍 풍기며 서 있는 게 제대로 재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무렵,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당연히 저보다 앞에 서 있던 내가 먼저 내리는 게 순서에 맞아 나가려 했더니 이 녀석이 나를 무시하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먼저 휙 하고 내려 버렸다.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제야 이 녀석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그때 형이랑 같이 봤던 그 조폭 영화에서 진짜 멋있었는데 말이야.”
동재가 영화 속에서 총질을 하며 죽어 가던 녀석의 배역을 생각해 냈다. 영화 보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어 버린 나를 위해, 아무리 그래도 남들 다 본 건 의무적으로 봐 줘야 한다며 끌고 갔던 영화관 스크린 속에 그 녀석이 있었다.
그때 봤던 그 영화 한 편이 안 그래도 유명한 놈을 완전 딴 세상 속으로 몰고 들어가 버렸다. 극장 안에서도 대부분의 관객들은 녀석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마다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눈물을 흘리며 죽어 가는 여자친구를 안고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같이 눈물 콧물을 찍어 댔다.
그래, 인정한다. 그 스크린 속에서 녀석은 남자인 내가 봐도 참 멋지고 괜찮은 놈으로 보였다.
“어때? 말은 해 봤어? 실제로도 그렇게 젠틀하셔? 완전 예의남이야?”
동재가 자꾸자꾸 녀석의 사생활을 캐물었다. 풍기는 이미지와 브라운관에서 비치는 녀석의 성격은 완벽한 젠틀맨이다. 수트 광고 속에서도 멋지게 세단을 몰고 돌아다니며 자신이 젠틀하다는 이미지를 풍기던 그런 녀석. 사실은 대단히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걸 알면 이동재가 얼마나 실망할까. 아니 대한민국 여자들이 죄다 실망하겠지. 나 역시 조금은 실망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또 내 기억은 며칠 전 저녁으로 돌아가게 된다. 분리수거를 하려고 현관을 나서는데 옆집에서 투닥투닥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눈치 없이 확 나가자니 미안해서 현관문 안쪽에서 둘의 대화를 본의 아니게, 정말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다.
그게 정말 가관이었다.
녀석의 애인이었던 듯한 여자가 문 앞에 서서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벼들고 있었다. 왜 자신을 피하는 거냐며. 왜 전화는 안 받았던 것이며, 갑작스레 이사는 왜 온 것이냐며 생떼를 쓰는데 듣는 나조차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잘도 참아 준다 싶더니 얼마 안 가 강하게 한 방 날리더라.
‘아 시발… 진짜….’
호오라, 이 녀석 욕도 할 줄 아네. 더 신기한 건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를 받으며 매니저인 듯한 사람에게 있는 성질 없는 성질 다 내 가며,
‘그거 안 한다고 했잖아. 시발 몰라 아쉬운 새끼들이 오라 그래.’
하고 전화를 끊는 것도 수차례.
참 가지가지 한다 싶고 안에서 엿듣고 있는 나도 볼썽사나워 그냥 박스를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관 밖에 서 있던 녀석이 나를 슥 쳐다보더라. 자신도 그 상황이 좀 창피하다고 느꼈는지 울고 있던 여자를 확 낚아채서 집으로 들였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아침 출근할 때 보니 어젯밤만 해도 죽네 사네 했던 그 여성분이 생글생글 웃으며 ‘나 갈게’ 하며 집 밖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뭐야, 죽어라 싸울 땐 언제고 뭐가 이렇게 쉽게 풀려.
“완전 개싸가지야. 욕도 잘하고 여자 문제도 복잡해 보였어.”
동재는 내 말을 다 듣고 난 다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딱 벌렸다.
“이야… 연예인들 다 가식 덩어리라더니. 그래도 최수혁이 그럴 줄은 진짜 몰랐다. 완전 젠틀맨이라고 방송국 다니는 우리 선배가 그랬는데.”
“아쉬운 놈한테는 잘해 주나 보지 뭐.”
“하긴… 최수혁이 형한테 뭐가 아쉽다고….”
듣고 보니 그렇군.
그렇게 시답지도 않은 연예인 얘기를 하던 차에 동재의 SUV는 이미 회사 빌딩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처음엔 주차비 좀 아끼려고 시작했던 카풀이었는데 어쩐지 매일 아침마다 동재와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버렸다. 주차비는 이제 핑계고 사내에서 들리는 가십 거리들을 공유하며 출퇴근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어이고, 또 부부 동반 출근 하셨어?”
어김없이 같이 들어선 우리를 보고 또 스리슬쩍 시비를 거는 신재식 차장과 함께 오늘 하루도 이렇게 재수 없게 시작된다.
***
어제부터 신제품 기획안을 정리하느라 하루 종일 진이 다 빠져 버린 탓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좀 더 곤혹스럽게 되어 버렸다. 10분 일찍 안 나오면 죽여 버리겠다며 빽빽거리던 동재 때문에 와이셔츠 다림질도 하지 못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음, 오늘은 그 재수 없는 놈이 안 보이는구나.
마침 닫히려던 엘리베이터 문에 발을 툭 넣어 잡아탔는데 양반도 못 되는 그 녀석이 혼자 떡하니 서 있었다. 매니저가 집에 드나드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나. 그랬는데 녀석이 나를 보고 슬쩍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도 아니고 그냥 고개만 까딱. 그래서 나도 고개로 띠껍게 눈인사를 해 주자 이번엔 목소리도 내어 준다.
“지하 가세요? 아님 1층?”
뭐지 이건. 갑자기 친절하게 바뀌셨잖아. 아니꼬운 마음에 그냥 지난번 받은 그대로 돌려주기로 했다.
“됐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랬다. 녀석을 무시하고 팔을 뻗어 B2층을 눌렀다. 그랬더니 방송용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고 구겨질 대로 구겨진 험악한 인상으로 나를 노려본다.
그래, 너는 그게 더 자연스럽다.
서로 경쟁하듯 엘리베이터 안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차를 집어 탔다. 녀석은 말끔하게 빠진 페라리의 시동을 걸고 나는 며칠 전 서비스 센터에 들어갔다 나온 구식 아우디를 몰고 주차장 출구로 향했다.
그 순간 후진을 하다 차를 돌려 입구 쪽으로 나오려던 녀석의 페라리와 내 차가 ‘ㄷ’자 모양으로 딱 마주쳐 버렸다. 짜증이 나서 창문을 열고 쳐다보니 이놈도 전혀 양보할 기색이 없어 보인다.
빵빵-
클락션을 울려 대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아예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나를 노려본다.
이것 봐라? 감히 직진 차량의 진로를 방해해? 사람 잘못 봤다 이 새끼야. 나도 저를 따라 팔짱을 낀 채 후진 기어에서 손을 내렸다. 그렇게 1분 정도를 서로의 범퍼 10센티 거리에 두고 정차해 있었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나다. 스케줄이 바빴던지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녀석의 휴대폰이 작은 욕지거리와 함께 옆좌석으로 던져졌다. 신경질적으로 후진 기어를 넣은 녀석의 차량이 뒤로 빠졌다.
나는 여유 있게 주차장을 먼저 빠져나왔다. 잠시 후 내 뒤로 녀석의 페라리가 갑자기 속력을 내더니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아파트 밖으로 사라졌다. 물론 나 역시 10분 일찍 대신 5분 늦어 버린 탓에 이동재에게 잔소리를 들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일이 있은 날부터 우리는 거의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라도 녀석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길렀다. 내 바람대로 된 건지 아님 녀석도 나를 피하고 있었던 건지 정말 그날 이후로 절대 마주치는 일 없이 1~2주가 흘러갔다.
시시콜콜한 연예 뉴스를 덤으로 전해 주던 아침 방송에서 알려 주기를, 요즘 최수혁은 주연으로 나온 영화가 개봉 전이라 여기저기 홍보로 바쁘신 모양이었다.
그때쯤 나는 인터넷으로 주문한 바지가 도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 짜증이 올라오던 참이었다. 회사로 개인적인 택배가 들락거리는 걸 참지 못하는 팀장 덕분에 며칠 전 일부러 판매자에게 전화까지 해서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꼭 토요일 오전에 배달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이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배송 완료라고 떴는데 저는 못 받았다니까요.”
잠시 기다려 보라는 상담원의 말에 수화기를 잡고 있노라니 동재가 다가와 ‘대리님아 회의, 회의’ 하며 나를 잡아끌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노트북을 챙겨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이번 달 런칭 예정인 제품의 샘플들이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이놈들 세상에 빛 보게 하려고 몇 주일을 밤샘 업무 고통에 시달렸던가.
가운데 앉은 조팀장 표정이 굳어 있는 거로 봐서 이미 마케팅 쪽과 한바탕 하고 오신 분위기였다.
“어떨 거 같아?”
여전히 굳은 표정의 그녀가 주어 없는 말을 던졌다.
“잘 빠졌는데요. 밀고 가시죠?”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던 동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에 모델이 K양이라던데. 맞아요?”
건너편에 앉은 나대리의 말에 조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를 한다.
“위에서 돈 좀 썼지 이번에. 요즘은 그런 스타일이 먹히니?”
“팀장님, 걔 지금 완전 핫걸이에요. 드라마도 잘되고. 아 이번에 스캔들도 났지, 최수혁이랑.”
음? 최수혁?
“뭐? 최수혁?”
나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인지 조팀장의 톤 높은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걔 최수혁이랑 사귀었어? 진짜야?”
“모르죠. 저희가 어떻게 알아요. 그게 바로 스캔들이라는 거죠.”
조팀장이 최수혁 팬인가 보다. 그런 내용으로 끄적끄적 낙서를 하고 있던 내 수첩에 동재가 ‘그런 듯’ 하며 동감을 표시했다.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는데 회의를 좋아하는 조팀장 덕에 30분이 더 소요되었다. 동재와 나는 계속해서 깨작깨작 낙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회의 시간을 때웠다. 그러다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우리의 주의를 깨운다.
“하나씩 가지고들 가서 예상되는 컨펌 리스트 작성해 와. 내일까지.”
그녀의 말과 동시에 표정이 굳어진 우리는 아씨… 하고 작게 불만을 토로했다. 모두 똥 씹은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서던 중 나는 잠시 의자에 그대로 앉아 조팀장이 문 앞까지 나오길 기다렸다. 뭐야? 하며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쳐다보던 그녀에게 나는 뭔가를 속삭였다.
“진짜?!”
예상된 그녀의 반응에 내가 하나 더 덧붙여 주자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던 그녀의 표정이 쓱 풀어졌다. 눈빛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였지만 내 등을 툭툭 치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정대리는 면죄부.”
나는 쾌재를 불렀다. 뒤에서 이동재에게 승리의 브이를 날리자 ‘뭐야?’ 하며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본다. 뭐긴 뭐야.
“최수혁이 우리 옆집에 산다고 썰 좀 풀었다. 조만간 우리집에서 집들이라도 한 번 할까 한다고도 전했지.”
아마 방문하셔도 좋은 꼴은 못 보실 겁니다. 라는 말은 생략해 둔 채 그날은 그렇게 좋게 좋게 마무리가 되어 가던 찰나였다. 그러니까…. 운명의 전화가 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기서 운명의 전화란 다름 아닌 쇼핑몰 택배원의 전화였다. 모르는 번호가 휴대폰 액정에 뜨길래 광고 전화인가 싶어 받지 말까 하다가 왠지 찜찜하여 받아 봤더니 이 아저씨가 다짜고짜,
[정세연씨, 어제 댁에 안 계시길래 택배를 옆집에 맡겨 두었는데요.]
라며 이런 발칙한 말을 내뱉는 거였다.
“네에?!!”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른 탓에 부서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나가서 받아 새끼야.”
노여움으로 달아오르는 신차장의 얼굴을 뒤로하고 허리를 숙인 채 파티션 밖으로 나갔다.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어본다.
“아니 그걸 왜 옆집에 맡겨요. 어느 옆집이요? 왼쪽이요, 오른쪽이요?”
[댁에 안 계시길래 1204호에 맡겼습니다. 잘 건네주시기로 하셨는데 아직 못 받으셨나 봐요?]
당연하지, 이 사람아! 그 싸가지가 잘 건네줄 리가 없잖아! 라고 말하려다 꾹꾹 눌러 참고,
왜 하필 1204호입니까! 1206호도 있고 경비실도 있잖습니까! 왜 남의 택배를 함부로 옆집에 맡기나요? 하고 말하려다 또 눌러 참고,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두통이 심하게 몰려왔다.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그 싸가지가 그 시간에 집에 붙어 있었다는 것과, 내 앞으로 온 택배를 알고도 받아 줬다는 것과, 잘 전달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었다는 것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 구겨진 마음을 풀고 다시 업무에 임하고 있었으나 퇴근 시간이 다가올수록 압박감이 심해졌다. 꽤 비싸게 주고 산 옷인 데다 수량도 한정인 것을 가까스로 결제하고 만세를 불렀던 만큼 기대에 차 있던 옷이었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이렇게도 재수가 없나. 잃어버린 셈 치고 하나 더 살까 싶어서 쇼핑몰에 들어가 봤더니 이미 매진. 사진 속의 그 바지를 보고 있으려니 또 욕심이 나서 포기가 안 된다.
그래, 내가 왜 포기를 하지? 그냥 가서 받아 오기만 하면 되잖아. 내 거잖아. 지가 뭔데. 이 생각이 사이클을 돌고 돌다 보니 어느새 6시가 되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내일이 주말이라 회사 앞 호프집에서 한잔하자는 동료들의 말을 씹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녀석이 영화 홍보로 지금 바쁘다고 하시니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몰라 초저녁부터 기다려 보기로 했다. 온 신경을 현관문 밖에 곤두세우고 인기척이 날 때마다 인터폰 카메라로 누구인지 확인했다.
7시 반에 집에 도착해 12시가 다 되도록 왔다 갔다 확인하기만 여러 차례. 그 사이 1206호 아줌마가 수험생 딸을 데리고 들어가고 배달 음식 기사님이 층을 잘못 들어오신 덕에 두리번거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아파트는 한 층에 세 가구가 산다. 호텔처럼 실내 대리석 복도가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긴 대리석 복도를 지나 각 세대의 현관문으로 바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 현관에서 곧바로 집 거실이 이어지는 탓에 잘만 하면 바깥 소리가 들리는 희한한 구조이다. 나는 탐정처럼 온 신경을 현관문 바깥 소리에 곤두세웠다.
녀석이 귀가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맥주를 한 캔 따서 시간을 때우고 있으려니 벌써 새벽 2시가 다 되어 간다. 오늘 안 들어올 참인가 보다. 아니면 또 여자를 끼고 들어오기라도 해서 말 걸기 곤란하게 되면 어쩌지 싶어 소파에서 뒤척거리다 다시 30분이 지났다.
그러다 졸립고 피곤해서 살짝 잠이 들었는데 본능적으로 아파트 복도를 가르는 남자 구두 소리에 잠이 깼다. 보폭으로 보아하니 녀석이 아닌가 싶어 슬쩍 인터폰 카메라로 확인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잔뜩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최수혁의 모습이 비쳤다.
혹시라도 놓칠까 싶어 슬리퍼를 대충 신고 바로 현관문을 열었다. 번호키를 누르며 막 닫히려던 녀석의 아파트 문을 잡고 힘으로 밀어젖혔다. 술기운에 고개를 숙였던 녀석의 눈빛이 나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나라고 나. 옆집 사는 사람.
“택배 받으셨다고 연락 받아서요. 죄송하지만 지금 좀 주시겠습니까.”
내가 빤히 쳐다보자 녀석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아… 그거.” 하며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 잘 정리된 깨끗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하얀색과 검은색 회색, 무채색투성이의 집이었다. 녀석은 거실 테이블에 자동차 키를 대충 던져 둔 채 곧바로 거실과 연결된 주방으로 향했다.
야, 택배 달라고.
나는 지금 커다란 벽걸이 티비와 카펫이 깔린 영화 배우 최수혁의 집 거실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다.
“아 그거. 저쪽 방 어딘가에 둔 거 같은데. 찾아 볼래요?”
녀석은 다시 주방에서 나와 검은색 가죽 소파에 몸을 구기고 길게 늘어져 버렸다. 좀 기분이 나빴지만 더이상 말다툼 따위도 하고 싶지 않아 녀석이 가리킨 방문을 열고 들어가 택배 상자를 찾았다.
여기저기 늘어진 옷 상자들과 쇼핑백, 그리고 채 뜯지 않은 선물 꾸러미들이 널브러져 있는 방이었다. 열심히 뒤적거린 결과 구석에서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상자를 찾아 품에 안았다.
“이름이, 정세연이에요?”
거실에 있을 줄 알았더니 녀석이 어느새 방문턱에 기대어 서 있다. 술 냄새가 진동한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채 졸린 눈으로 나를 훑어본다. 한 손에는 양주잔이 들려 있었다. 뭐야 알콜 중독인가?
“예쁘네요, 이름이…. 얼굴만큼.”
뭐래, 이 미친놈이.
어이가 없어서 택배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서려는데 이번엔 느닷없이 다 늦은 제 소개를 한다.
“최수혁입니다…. 알고 계시는 줄 압니다만.”
“잘 알고 있으니까 좀 비키실래요? 졸립거든요?”
한마디 쏘아 주고 옆으로 비켜 나가려 하자 녀석이 이번에는 아예 오른팔로 방문 기둥을 잡고 길을 막아 버린다. 순간 놀란 내가 한 발짝 물러나 녀석을 빤히 쳐다보자 얼굴을 들이대고 나를 찬찬히 살펴본다. 서로의 얼굴이 거의 3센티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짙게 낀 속쌍커풀과 날카로운 콧대가 인상적인 얼굴이다. 얼굴 윤곽은 남성적으로 생겼지만 눈매가 상당히, 음 뭐랄까… 섹시했다.
그래, 내 인정해 줄게. 너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다.
서로가 서로를 훑어보느라 시간이 계속 지나갔다. 술 냄새, 향수 냄새가 섞여 방 안을 메우고 있었다. 최수혁은 밤새 이러고 나를 쳐다볼 생각인지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빛이 너무 뜨거웠다.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사내새끼가 이런 일에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일순간 부끄러워져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그랬는데 녀석이 하는 말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자고 갈래요?”
뭐라고 인마?
퍽!
순식간의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최수혁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녀석은 중심을 잃고 쓰러져 들고 있던 양주잔을 깨트리고 방 한가운데 엎어져 버렸다. 입술에 피가 터진 건지 이빨이 부러진 건지 녀석이 인상을 찡그리고 묻어 있던 피를 닦아 낸다.
이대로 경찰서 가서 조서 꾸민다 해도 나는 할 말 있다. 이것은 정당방위야. 이 새끼가 누굴 아주 호구로 보네?
“야! 싸가지만 없는 줄 알았더니 존나 느끼한 데다가… 뭐? 자고 가? 이 좆같은 새끼가 니 눈엔 내가 호스트로 보이냐? 니가 대 달라면 다 대 주길래 이젠 남자랑 해 보고 싶다 이거야? 와씨… 나 진짜 어이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이 게이 새끼… 한 번만 더 미친 소리 하면 죽을 줄 알아.”
머리에서 스팀이 확 나는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쓰러진 놈을 확인도 하지 않고 나는 그대로 그 집을 나와 현관문을 쾅 닫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미친놈 아니야… 술 먹으면 개가 되는 것도 하나 추가다. 인터넷에 올려 버릴까. 영화배우 최수혁, 개싸가지에 여성 편력 심하고 알고 봤더니 게이. 이렇게 제목 쓰면 내일 아침 포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려나.
솔직히 말해 남자들이 들이대는 게 처음은 아니다. 고등학교 때도, 군대 있을 때도, 애매한 말로 나를 떠보는 놈들이 있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처음부터 고투베드 하자는 놈은 없었는데 좀 충격적이었다.
그런 놈을 나는 그래도 이웃사촌이랍시고 며칠 안 보이길래 많이 바쁜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날 주차장에서 내가 너무 싸가지 없이 굴었나 싶어 미안하기도 했는데 그럴 거 하나 없었나 보다.
잠도 못 자고 뒤척이다 그대로 날이 새 버렸다. 그러다 아침 8시쯤 겨우 잠이 들었는데 은근 피곤했는지 12시간을 내리 잤다.
한참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도 아프고 월요일날 제출해야 할 기획안도 정리할 겸 싶어 노트북에 전원을 넣었다. 그래도 여전히 일할 맛이 나질 않는다. 업무용 메일만 확인하고 그냥 인터넷을 끄려는데 포털 사이트에 녀석의 사진이 떡하니 걸려 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뭔가 싶어서 처음으로 녀석의 기사를 클릭해 봤다.
[영화배우 최수혁, 과로로 입원, 새 영화 홍보에 차질 빚어…….]
과로는 무슨. 분명히 나한테 맞은 데가 볼썽사나워서 스케줄 취소하고 드러누운 거 같은데.
어제 새벽 극비리에 강남 모 병원에 입원하고 모든 일정을 취소했단다. 그깟 입술 좀 찢어진 걸 가지고 설레발을 치네 이게… 근데 혹시 정말 이빨이라도 부러진 게 아닐까?
순간 내 주먹을 꽉 쥐고 벽을 쿵 쳐 본다. 아닌데, 내 주먹이 그렇게 강할 리가 없는데. 약골 같은 내 펀치를 맞고 아팠으면 얼마나 아팠을 것이며 다쳐도 얼마나 다쳤을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노트북을 닫았다. 며칠 후면 다시 쌩쌩하게 돌아다니겠지 싶어 잊자 했는데. 이 녀석 잊을 수도 없게 정말 일주일이 훨씬 넘게까지 집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
“대리님아, 살살 몰아.”
아침 출근길 러시아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깜빡이를 켜 가며 차선 변경을 하던 내게 동재가 릴렉스하라며 주의를 준다. 10분이나 지각할 참인데 이동재가 웬일로 이리 여유를 부리나 했더니 어차피 오늘 오전에 외근이 잡혀 있어서 지각 체크는 안 당한단다.
그럼 그렇지. 나만 마음이 급해져서 미친놈처럼 빌딩 주차장 안을 드리프트 했다. 손에 땀 나게 운전을 해 댄 통에 약간 더위를 느낀 나는 재킷을 벗어 팔에 걸고 급하게 사원증을 찍었다. 가까스로 지각 5분 안에 골인했다.
“그래도 10만 원일세.”
동재가 낄낄거리며 제자리로 간다.
젠장… 진이 빠져 버린 나는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히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러니까 최수혁, 그 녀석이 아파트에서 가출해 버린 게 벌써 2주째다. 혹시 내가 없는 사이 들어왔다 나간 건지는 몰라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시간이 갈수록 신경이 쓰여서, 물론 보상금 문제로, 슬쩍 벨을 눌러 보고 도망가 본 적도 있었다. 그 짓을 서너 번 해 봤는데도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으로 봐선 대부분 집에 붙어 있지 않은 듯했다.
인터넷 뉴스에 달린 ‘수혁오빠 퇴원했대요’ 하는 네티즌 수사대의 댓글을 보고 이제 집에 오겠거니 했는데 여전히 함흥차사다.
다시 이사 가려나.
나는 모닝커피를 마시기 위해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 커피는 맛이 죽도록 없었지만 1층 카페까지 내려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냉동고에서 얼음을 잔뜩 꺼내어 유리컵에 채웠다.
존나 차게 마시면 맛을 잘 느낄 수 없는 법이지. 원두를 내리고 있던 나를 누군가 호들갑을 떨며 불렀다. 조팀장이다.
“어머, 진짠가 봐. 진짜였어? 옆집 산다더니 진짜 친한가 봐. 웬일이니 정대리, 웬일이니 정세연!”
찰싹찰싹 내 등을 두들기며 혼자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미쳤어요? 라고 말하려다 생각을 고쳐먹고 왜 그러시냐고 공손히 물었다.
“진짜 잘생겼다. 실물이 훨씬 낫다. 정대리. 많이 친해? 회사까지 찾아올 정도면 많이 친한가 봐. 웬일이니.”
“누가 찾아왔는데요? 혹시…?”
“어! 최수혁이 정대리 찾아왔다던데? 내가 소회의실에 모셔다 드렸어. 우리 수혁이는 뭘 좋아하니? 커피 좋아하니? 주스 갖다줄까?”
“……됐어요.”
갑자기 내 입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들고 있던 커피잔을 쥐고 그대로 탕비실을 나갔다. 내가 됐다는데도 조팀장은 손수 뭔가를 만들어 주고자 분주하게 티백을 우려냈다. 무려 팀장님께서 만들어 주신 녹차를 들고 소회의실로 들어가는 와중에 이동재와 눈이 마주쳤다.
이 새끼 미친 거 아닐까? 라는 신호를 주었더니 저도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어 올렸다. 회의실 블라인드 사이로 슬쩍 보니 녀석이 회전의자에 앉아 몸을 이리저리 돌려 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싹 굳은 내 표정을 보고 조금 민망했는지 멋쩍게 웃었다.
선글라스에 캐주얼한 옷차림이 포털 사진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스토커냐?”
“네?”
“우리 엄마도 모르는 내 직장 주소를 니가 어떻게 알았어?”
“아… 그, 택배.”
그렇구나. 택배 종이에는 집 주소 밑에 원래 배송지였던 회사 주소가 버젓이 쓰여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걸 언제 베껴 써 놨지?
“용건만 말해. 치료비 달라고? 주는 대신 내가 너 인터넷에 고발할 거야.”
“뭐라고 할 건데요?”
“변태, 싸가지, 카사노바, 미친개, 호모 새끼….”
줄줄 늘어놓는 나의 미사여구 향연에 녀석이 재미를 느꼈는지 팔짱을 끼고 웃었다. 눈은 안 보이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면 웃고 있는 게 확실했다.
“내가 그 정도인가요?”
“아니, 그거보다 더 심한데 너 상처 입을까 봐 한 번 걸러 냈어. 직장이라 쌍욕은 못 하고 좋게 말할 때 용건만 말하고 꺼지시지.”
“빌딩 멋진데요. 대기업에서 근무하시네요. 정장 입은 것도 잘 어울리고.”
가시 돋은 내 태도에도 녀석이 여전히 비전투 모드다. 뭐냐 무슨 꿍꿍이냐 대체.
“넌 그런 캐주얼한 차림 안 어울린다. 됐냐?”
“자꾸 반말하시면 저도 말 놓습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용건만 말해. 굳이 회사는 왜 찾아와서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데? 집에서 얘기하면 될 거 아니야.”
“집에서 얘기하자는 말, 좀 설레는데?”
뭐?
나 참…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내가 졌다. 살짝 누그러진 내 반응을 기다렸던 것이었는지 녀석이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뭐지. 진단서인가.
“그쪽 때문에 홍보를 제대로 못 해서 말아먹게 생겼어. 시사회 표니까 애인이랑 와서 봐.”
녀석이 꺼낸 것은 VIP 시사회 표 두 장이었다. 곱게 금박을 두른 티켓을 책상 위에 던지며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 들다 회사 안인 것을 자각하고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니 영화 내 취향 아니야. 그리고 같이 갈 사람 없으니까 다른 사람 알아봐.”
내가 다시 티켓을 곱게 접어 녀석의 호주머니에 꽂아 주자 두 번 권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어 버린다. 그럴 거면 말은 왜 꺼냈냐.
“그렇다면 대신 이거.”
이번에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호텔 식사권을 두 장 꺼내 들고 내 눈앞에서 팔랑거린다.
“먹는 거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리고 이건 내가 같이 가 줄 수 있으니까.”
“지금 나랑 장난하냐?”
“장난이라니. 영화도 싫고 애인도 없다. 나도 영화 싫고 애인도 없으니까 같이 밥이나 먹자는 건데 싫은가?”
이 새끼가 말을 계속 함부로 하네.
“내 말은, 우리가 같이 밥 먹을 사이야?”
“충분히.”
“뭘로?”
“일단은…. 이웃집 사람 정도?”
“넌 이웃집 사람이랑 밥도 먹고 다니냐?”
“아니.”
나 이거 언제까지 들어 줘야 하냐 진짜.
“그럼….”
녀석이 다시 웃는다.
“애인이라도 하지 뭐.”
녀석의 장난이 도를 넘었다.
***
모든 직장인에게 설화처럼 내려오는 도시 전설이 있다.
회의실에 도청 장치가 있어.
나 역시 신입 시절 그 말을 믿고 회의실에서는 절대 누구의 흉도 보지 않았다. 필시 할 일 없는 임원들이 사원들을 감시하기 위해, 회의실에는 도청 장치를 달고 모든 이메일은 열어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다 개뻥이라는 확신이 사라지기까지는 3년 정도의 경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경력 5년 차인 나는 지금, 작년에 겨우 대리를 달고 후임 4명을 거느리고 있는 나는,
이 회의실에 도청 장치가 없음에 너무나도 안도했다.
“꺼져라, 제발.”
나는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었고 최수혁은 그런 나를 보고 재미있어 죽을 지경인 듯했다.
“너 진짜 내가 기자 만나서 다 불면 어쩌려고 이러냐.”
“알 사람 다 아는데 뭘. 나한테 진짜 관심 없구나, 나 더 열심히 활동해야겠네.”
“귀찮게 구는 저의가 뭔지 세 글자로 딱 요약해 봐.”
“내가 귀찮나? 충격적인데.”
상당히 귀찮거든?! 남의 회사에 막 찾아오고, 일반인이었으면 출입도 못 했을 이런 곳에 관계자 뱃지를 떠억 하니 달고 들어와서는 회의실까지 차지했으니 이제 한 달 넘게 전 부서 사람들에게 시달릴 것이 뻔했다.
그 생각이 미치자 좀 더 이성적이 되었다. 일단은 이놈을 빨리 내보내야 한다.
“영화표를 줘 그럼, 친구랑 보러 갈 테니까.”
“여자랑 보러 와.”
“왜.”
“취향이 궁금해서.”
알았다며 일단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건네는 시사회 티켓을 받아 들고 빨리 꺼지라며 문을 열었다.
“어머 깜짝이야. 갑자기 문을 여니, 정대리.”
조팀장이 회의실 문에 바짝 붙어 있었나 보다. 그새 세상 젠틀한 표정으로 바뀐 녀석이 다소곳이 인사를 하며 회의실을 나갔다.
너무 잘생겼다, 기럭지 비율도 장난 아니다 하며 연신 감탄하는 그녀를 보고 하마터면 시사회 같이 가겠냐고 권유할 뻔했다.
이 새끼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팀장님께 같이 가자고 할 수는 없다. 자리로 돌아와 메신저 대화창을 열었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최대한 이런 일로 성질부리지 않고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얘는 남친이 UFC 선수라니까 뒷일이 위험하고… 얘는 헤어진 전 여친이니 안 되고 얘는 한국어를 못 하니 영화를 못 보겠고…
하나하나 대화창 스크롤을 넘기다 보니 옆에 누가 와 있는 것도 몰랐다.
“대리님, 제가 오전에 메일 하나 드렸는데….”
2년 차 후배 하나가 책상 옆으로 스윽 다가와 곤란한 듯 말을 걸었다. 근무시간 중 딴짓하고 있는 걸 후배에게 걸리는 것만큼 민망한 것이 없다. 얼른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아… 그래 좋은 생각이다.
“네? 내용이 괜찮나요?”
나는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왔나 보다. 내 말은 그게 아니고 이거다. 내가 건넨 영화 시사회 티켓을 보던 그녀는 적잖게 당황한 듯했다.
“VIP 시사회네요. 와, 진짜 친하신가 봐요… 근데 제가 가도 되나요?”
그래, 니가 딱인 거 같다. 우리 팀 둘째 막내 김시은. 착하고 싹싹한 그녀라면 괜히 사내에 이상한 소문을 낼 리도 없거니와 지난번 프로젝트 도와준 보답이라고 하면 끝이니까.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녀석이 오란다고 진짜 가는 나도 좀 웃기지 않나? 사람 설득하는 데 묘한 재주가 있네 최수혁씨. 차라리 이동재를 데리고 갈까? 아니다, 보아하니 최수혁은 남자 여자 가리지 않는 것 같으니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서 그건 관두기로 했다.
“혹시 거절 못 해서 억지로 가는 거면 괜찮아.”
“아니에요. 저도 그런 데 한 번도 못 가 봐서 재밌을 거 같아요.”
“땡큐. 금요일이니까 퇴근하고 같이 이동할까?”
김시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금요일 시사회 전까지 최수혁을 딱 한 번 더 봤다. 아침 출근길이었는데 새벽까지 촬영이 있었는지 피곤함에 전 모습으로 차에서 내리는 걸 봤다. 아는 체를 할까 하다 말았다. 우리가 뭐 굳이 가는 사람 불러 세워서 인사할 만큼 좋은 사이는 아니니까.
나는 딱 거기까지만 출근길 도중 동재 녀석에게 털어놓았다.
물론 자고 가라는 둥, 애인 하자는 둥 헛소리는 뺐다. 우리는 대한민국 육군 병장 출신들. 자랑스러운 예비군이자 가능한 한 많은 자손을 남기고 싶어 하는 보통의 남자들이니까.
“원래 조선 시대부터 광대들은 똘끼가 있어야 성공한댔거든. 삶이 심심해서 형한테 똘끼 부리는 거로 생각해.”
우리는 회사로 올라가기 전 시간이 남아서 1층 카페로 향했다. 종업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커피가 나올 때까지 1층 로비 옆에 서서 출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내 눈에 총총걸음으로 뛰어오는 김시은이 보였다.
“시은씨도 커피 마시려구요?”
이동재가 먼저 아는 척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도 주문을 하겠다며 뒷줄로 가려던 그녀에게 나는 조용히 카드를 내밀었다.
“프라푸치노 그란데 사이즈로 시켜도 된다.”
“왜 차별해. 나는 아메리카노 사 줬으면서.”
“대신 매일 사 주잖아.”
“그건 그렇지.”
후배들이 많으면 돈 쓸 일이 많아진다. 빨대를 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지갑이 남아나질 않겠어.
***
금요일인데 업무가 바빴다. 연이은 회의 들어가느라 정신없이 하루가 다 가고 나니 벌써 6시 반. 적당히 눈치 보며 일어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저희 먼저 일어납니다.”
내가 재킷을 가지고 나오자 김시은이 마우스를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무리를 했다. 10분 뒤 나의 구식 아우디가 회사 빌딩 앞에 서자 기다리고 있던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대리님 덕에 시사회를 다 가 보네요. 아, 저도 최수혁 팬이에요.”
“대체 왜.”
나의 질문이 예상 밖이었는지 그녀가 웃으며 이런저런 이유를 늘어놓았다.
연예인들의 이미지는 사실 초창기에 굳어져 버리는데 배우들은 대부분 처음으로 뜬 작품의 캐릭터가 그대로 굳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수혁이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풋풋한 청춘 영화였다. 지금은 성인 멜로 영화만 찍는 듯했지만 그 작품 속에서 녀석은 무려 10년 동안 짝사랑한 첫사랑을 찾는 조연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가 순애보에 반듯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듯했다. 김시은도 이런 착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우스웠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신사동은 늘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다. 눈물을 머금고 발레파킹을 한 나는 김시은과 함께 영화관 안으로 입장했다. VIP 시사회라 그런지 우리 같은 일반인은 거의 없었고 좀 덜 유명한 연예인과 영화 관계자들이 많았다. 그 사이를 우쭐대며 걸어갔다. 자, 나도 VIP요. 자랑스럽게 표를 내미니 시사회 스텝이 우리를 한 번 힐끔 보았다.
설마 이 새끼 나 엿 먹이려고 가짜 표를…
“VVIP시네요. 다들 지하로 오시는데… 따라오세요, 안내해 드릴게요.”
그는 영화관 입구가 아닌 백 스테이지에 마련된 문을 열고 우리를 안내했다. 오, 진짜 VIP들은 여기 다 모여 있었군. 작게 마련된 백 스테이지에는 급이 다른 유명 배우들과 감독들이 핑거 푸드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별들 사이에 민망하게 서 있던 우리를 향해 한 남자가 다가왔다. 김시은이 쿨하게 ‘와 잘생겼어요’ 하며 웃었다. 그래 나도 인정해야 했다. 연예인은 연예인이네.
“진짜 왔네. 안녕하세요.”
나한테는 반말하더니 김시은한테는 존댓말을 해 주며 인사를 했다.
“샴페인도 있고 와인도 있어요. 시작은 10분 후니까 한잔하셔도 될 것 같은데.”
“그래요. 우리 샴페인 마셔요, 대리님.”
대리님이라는 그녀의 말에 녀석이 살짝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왜 뭐! 대리 달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냐. 나는 김시은을 데리고 미니 바로 향했다. 질 좋은 와인과 샴페인이 보여서 나도 한잔하고 살짝 기분 좋게 상영관 안으로 들어왔다. 무대 인사를 간단하게 하더니 곧바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
“난 뭐 그냥 그랬어.”
나의 미지근한 반응에 김시은은 더욱 흥분을 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게 그냥 그럴 수가 있어요! 와, 정말 오랜만에 저 너무 설렜어요!! 대리님은 진짜 감정이 별로 없나 보다!”
시사회를 나온 뒤 내내 그녀의 반응은 시종일관 흥분 또 흥분이었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최수혁의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감탄을 했다.
“저 이거 스포하면 안 되는 거죠? 정식으로 개봉은 언제 한대요?”
“왜, 또 보러 가기라도 하게?”
“네!”
미친다 진짜. 사실 그녀뿐만 아니라 시사회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예의로 치는 박수도 있었겠지만 그쪽 관계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영화관을 나오며 ‘이 친구 정말 S급으로 크겠는데?’ 하며 최수혁의 미래를 점쳤으니 말이다. 그래, 연기는 뭐 그럭저럭 괜찮더라. 근데,
“좀 야하지 않던가?”
“대리님, 그게 뭐가 야해요. 베드신 없더구만.”
“아니 그래도 막 너무 벗고 나오는 거 아닌가 해서.”
“에이 요즘 그 정도는 벗은 것도 아니에요. 김지혜 저번 작품에서는 장난 아니었어요. 옷 입은 장면이 별로 없었는데요 뭘.”
아니 내 말은 여배우가 아니고… 하려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서 ‘그랬나…?’ 하며 대충 대화를 무마시켰다.
김시은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를 좀 샀다. 약속 없는 주말이 참으로 오랜만이라 그런지 집에서 영화나 한 편 때릴까 싶어서였다. 주차장을 나오니 녀석의 페라리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뒷풀이 같은 거 할 줄 알았더니. 술 좋아하는 녀석이 의외로군 싶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정말 그런가 싶었다.
집에 들어오니 녀석이 왜 일찍 들어왔는지 확실해졌다. 이건 뭐 일부러 문을 열어 놓고 하는 건지 급해서 현관에서 판을 벌인 건지. 여성 분의 신음 소리가 우리 집 거실까지 들리는 건 정말… 대체 어떤 스킬을 익혀야 그럴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온디맨드 서비스에서 볼만한 영화를 고르던 나는 볼륨을 40 가까이에 놓고 웅장하게 영화를 즐겼다. 액션 영화는 역시 크게 틀어 놓고 봐야 한다. 저쪽 집 소리가 커질수록 이쪽 집 볼륨도 커진다.
12시가 넘어서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영화 시작한 지 20분 만에 잠이 들어 버린 나는, 그것은 마치 금요일 밤 설레는 맘에 뭐든 해 보겠다고 발버둥 치지만 결국 곧바로 잠들었다로 마무리되는 대한민국 모든 직장인들의 애환이 담긴 병이라고 설명했다.
[그래 진짜 병이다]
[단둘이 영화까지 봐 놓고]
[밥도 안 먹이고 들여보내냐]
[님 고자임?]
동재의 메시지가 자꾸만 울렸다.
[사내연애는]
[사표 쓸 각오 하고]
[해야 하는 법]
[김시은 정도면]
[사표 써도 되지 않아?]
안 된다. 내가 여길 어떻게 들어왔는데. 나의 커리어는 여기서 팀장 달고 동종업계 부장급으로 이직해서 벤처 기업 임원으로 끝나는 것으로 정해졌다. 지금 이직하는 건 애매하다.
토요일 11시. 아직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휴대폰 문자만 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산뜻하게 브런치라도 먹어야 하는데 내 주제에 무슨. 민족의 어플을 켜고 배달 음식을 시켰다.
정확하게 30분 후 인터폰이 울렸다. 역시 평점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집은 일 처리도 확실하군. 카드로 결제했으니 이미 문 앞에 두고 갔겠지. 구렁이처럼 스윽 문을 열고 비닐봉지를 잡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올려다보니 최수혁이 나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
내가 시킨 산채비빔밥을 먹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다 어젯밤 여성 분의 신음 사운드가 겹쳐지며 살짝 민망해졌다. 참으로 건강한 남성의 삶을 누리고 있는 녀석을 보니 역시 동재의 말이 정확했다. 나한테 하는 장난질은 삶이 심심해서 부려 보는 똘끼 같은 것이다.
“단백질 보충하게 계란 좀 줄까?”
나의 농담에 그가 알아듣고 웃었다. 신경 쓰지 말란다.
“애들이 머리 쓰는 거야. 그렇게 꼭 티를 내고 싶어 하거든. 내가 최수혁이랑 섹스한다고.”
나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 그들도 자랑스럽겠지. 산 정상에서 내가 정복했노라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내가 매일 밤 액션 영화를 볼 수는 없어.”
“알고 있어. 우리 집에서도 들리더라고. 생각 있으면 말해. 난 셋이서 하는 것도 좋아.”
이 새끼가 진짜 못된 것만 배워 가지고. 말끝마다 어이가 터진다 진짜.
“그래서 우리 대리님은, 어떠셨나? 내 영화.”
녀석이 잠시 수저를 내려놓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뭐. 흥행은 할 것 같더라고. 같이 간 사람이 호평 일색이었거든.”
“그 여자 취향 물어본 건 아닌데? 그쪽이 보기엔 별로였나?”
내 의견이 뭐가 중요하냐, 어차피 타겟층은 20-30대 여성일 텐데. 녀석에게 반 덜어 준 산채비빔밥을 입에 넣으며 잠시 생각했다. 나는 왜 토요일 ‘아점’을 이런 식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냐.
배달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려던 나를 가로막고 서 있던 녀석. 시사회 표 값으로 퉁치자며 제멋대로 우리 집에 들어왔다. 이렇게 마주 앉아 정답게 끼니를 나누는 모습을 보니 우리는 이웃사촌이 분명하구나.
“약속 없어? 토요일인데 집에 있네?”
“너같이 사회생활 안 해 본 놈들이 꼭 주말에 왜 집에 있냐고 물어보는데. 원래 직장인들은 주말에 집에 있는 거다. 주말이라고 클럽 가고 술 약속 잡으러 다니는 애들은 사회 초년생 내지는 승진을 포기한 놈들이지.”
토요일 아침잠에서 깼을 때의 그 안도감. 이대로 침대에서 지박령이 되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편안함. 세수도 하지 않고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냉장고를 파먹을 때의 그 뿌듯함을 니가 알겠니.
“공부 잘했나 봐, 대기업 다니는 걸 보면. 하긴 이 아파트 아무나 들어오는 데는 아니니까.”
“이거 반 월세야. 회사 잘리면 바로 이사 나가야 돼.”
“안 잘리길 빌어야겠네 그럼.”
얼씨구.
녀석이 웃으며 물을 마셨다. 눈썹이 정말 예쁘다. 웃는 모습만 보면 역시 젠틀남으로 소문날 만하다.
“잘 먹었어. 저녁은 내가 살게.”
“개소리하지 말고 니네 집으로 가라.”
“왜 이렇게 까칠하지? 설마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그러는 너는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 아님 1206호 아줌마한테도 자고 가란 소리 했냐?”
“아… 그거.”
아 그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밤잠을 설쳤는데 그새 잊은 듯한 저 표정은 뭐냐. 녀석이 생각났다는 듯 웃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너무 자유롭게 살다 보니 뇌 속에 드는 생각을 곧바로 입 밖으로 꺼내는 버릇이 있어서 그랬다고. 그러면서 집도 옆인데 좀 친하게 지내자고 한다. 그것이 녀석의 내게 한 모든 행동에 설명이 되지는 않았지만, 사회 보편적 가치로만 본다면 하등 이상할 것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난 이만. 좀 자러 가야겠다.”
마치 여기도 내 집 저기도 내 집처럼, 녀석은 스르륵 현관문을 열고 옆집으로 이동했다.
최수혁을 보낸 나는 지난밤 보다 잠든 액션 영화를 시청했고 오랜만에 걸려 온 부모님의 화상 전화에 태블릿을 세우고 손을 흔들었다.
“아빠 안녕, hi mom.”
그쪽은 이제 아침인지 커피를 든 부모님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안녕 우리 아들!
-Why are you still dressed in pajamas, beb? (아들, 왜 아직도 파자마 차림이야?)”
토요일이니까요, 맘. 미국인인 엄마는 모르시겠지만 저는 오늘 쭉 이 차림으로 하루를 지내고자 합니다.
금실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부모님. 엄혹했던 시절 국제연애로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그들은 일단 애를 싸질러 놓고 보자 싶어서 나를 낳았다.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은 한국에서 돈 버느라 허리가 휘는데 이번엔 또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신다고 신이 나셨다. 조만간 집에 한 번 들어가려 했더니 나보다 더 바쁜 부모님이라 타이밍이 안 맞을 듯하다.
격주로 한 번씩 있는 부모님과의 통화를 끝내고 티비를 틀었다. 보지는 않지만 누구라도 시끄럽게 떠들어 줘야 집에 사람이 좀 사는 것 같아서 늘상 하는 일이다.
위잉- 휴대폰이 울렸다.
[일성 초등학교 11기 동창회 모임 안내]
잠금 화면 위로 메시지가 떴다. 벌써 동창회 모임이 돌아왔나. 날짜를 보니 2주 후다. 이렇게 되면 다다음 주 토요일의 평화가 물 건너간 거다. 한번 달리면 낙오자 없이 끝까지 가는 것이 이 모임의 모토. 지난해에는 아침까지 먹고 들어왔던가… 매번 똑같은 패턴이 이어지니 특정하기도 힘들었다.
[확인했다. 이상]
회신을 보내고 나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뭐냐, 인터폰도 아니고 누가 현관문을 두드리나 싶어서 열었더니 또 최수혁이다. 한번 열린 문, 이젠 막 드나들겠다 이거지 지금.
“왜 아직 이러고 있어. 30분 줄 테니까 준비해. 먹고 싶은 거 생겼어.”
“그럼 먹으러 가면 되지 여길 왜 와.”
“저녁 사 준다고 했잖아 내가. 그런 파자마 차림으로는 갈 수 없는 곳이야.”
“귀찮아. 씻기도 싫고 나갈 준비 하는 거 상상만 해도 귀찮아.”
“화장하냐? 대충 씻고 옷만 입어.”
“귀찮다고!”
소리를 버럭 지른 나를 보며 최수혁이 아예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다. 해볼 테면 해보라 이건가. 누가 이기나 또 해보자 이거야?
“나 오늘은 스케줄 없어서 먼저 후진 안 해 준다.”
진짜인 듯했다. 10분을 넘게 그렇게 현관 앞에서 짜증 나는 얼굴을 하고 서 있는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다 못한 내가 못 이기는 척 샤워하러 들어갔다. 그 와중에 우리 집임에도 문을 걸어 잠그는 내가 참 웃겼다.
대충 청바지에 흰 셔츠만 입고 나왔다.
“나의 30분을 헛되게 쓰게 하면 넌 죽는다.”
내가 노려보며 신발을 신으니 그제서야 녀석이 팔짱을 풀고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걱정 마, 비싼 데야.”
주차장으로 내려와 말없이 걷던 우리는 갑자기 홍해 갈라지듯 각자의 차로 향했다.
“뭐야, 내 차로 가.”
녀석이 페라리의 문을 열며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아차. 너무 익숙하게 차 키를 가지고 나온 탓에 나도 모르게 내 차로 갈 뻔했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이건 마치 내가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인 여자처럼 상대 남자의 외제차에 올라타고선 ‘어머 차 좋네요’ 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어머, 차 좋네요.”
“헛소리하고 있네.”
나의 시도가 가차 없이 녀석에게 돌려차기를 당해 버렸다.
“천천히 몰아, 너 운전 험하게 하더라.”
녀석이 나를 비웃듯 급발진과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단 한 번을, 남의 말 듣는 법이 없는 놈이다.
***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어디를 그렇게 잘 가는가 했더니 알 만했다. 청담동 가는구나. 그래 그래도 명색이 연예인인데 홍대를 갈 수는 없지 않나.
라디오 소리가 너무 작아서 조금 어색해졌다. 이렇게 긴 시간 좁은 곳에서 단둘이 있는 것도 뭔가 좀 느낌이 이상했고. 그보다 대관절 왜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지가 궁금해졌다.
“신기해서. 완벽한 동양인인데 눈동자만 한국 사람이 아니더라고. 그래서 자세히 보니 골격이 다른 게 혼혈인 거 그때 알았어.”
이런 패턴은 고등학교 때까지 종종 있었다. 엄마가 미국인이라 생긴 것이 많이 다른 탓에 전학만 가면 모두 친해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연예인까지 신기해하다니. 대한민국 아직 글로벌화가 덜 되었구나.
“어느 쪽이야? 미국?”
내가 ‘어’하고 짧게 답하자 그럴 것 같았다며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게 황색 신호를 받아 질주하던 녀석의 페라리가 작은 골목 앞에 섰다. 이런 데 식당이 있나? 싶을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였고 다른 가게는 없었다.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일본식 오마카세 주점인 듯 보였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예약이라도 한 듯 가게 주인이 반갑게 녀석을 맞이했다.
“웬일이야, 시간 딱 맞춰서 왔네. 바로 시작할까?”
“응, 차 가지고 왔으니까 술은 못해.”
익숙한 사이인 듯 가게 주인이 혼자서 분주하게 그릇들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예약까지 했냐? 황송한데.”
“게다가 아무나 예약 못 하는 곳이지.”
녀석이 셔츠 소매를 걷어올리며 주인장이 건네주는 뜨거운 타올을 건네받았다. 손을 닦고 잠시 기다리자 작은 접시에 쯔끼다시가 먼저 놓였다.
“혹시 생선 못 먹고 그런 건 아니지?”
“알레르기 있는데.”
“뭐?! 다른 데로 가자 그럼.”
“농담이다 인마. 없어서 못 먹어.”
녀석을 놀려 먹은 게 신이 나서 기분이 좋아졌다. 또한 주인장의 솜씨는 매우 훌륭했다. 메인은 도미 요리였고 곁가지로 나오는 횟감들도 신선했다. 부들부들한 계란찜을 숟가락으로 퍼먹다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근데 이사는 왜 온 거냐.”
정확히는 왜 하필 내 옆집으로 온 거냐고 묻고 있는 거다. 의외의 질문이라며 녀석이 대답했다.
“나 원래 2년에 한 번씩 이사 다녀. 한 곳에 적을 오래 두면 귀찮아지거든.”
오, 그럼 2년 뒤엔 다시 이사를 가겠다는 소리군.
“근데 이번엔 좀 오래 있어 보려고. 다정한 이웃사촌도 생겼고.”
녀석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괜찮아. 니가 안 가면 내가 이사 나가지 뭐. 어차피 반월세인데 사람만 구하면 내일이라도 나갈 수 있다.
후식으로 달달한 모찌 아이스크림과 우롱차가 나왔다. 너무 깔끔하게 잘 먹은 탓에 30분의 준비 시간은 상쇄가 될 만했다. 가게 주인이 웃으며 계산서를 내밀었다.
시발, 93만원…
“왜 놀래. 비싼 데 데려간다고 했잖아.”
“나도 꽤 벌지만. 너 이렇게 살다가는 금방 거지 된다.”
“내가 얼마 버는 줄 알고?”
녀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카드를 내밀었다.
아리가또. 일본인 주인장이 녀석의 카드를 돌려주며 감사를 표하자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ご馳走様でした。(잘 먹었습니다.)”
이번엔 녀석이 나를 쳐다보며 어쭈 하는 표정이다.
“왜 놀래. 대기업 다니려면 3개 국어 정도는 기본이야.”
“그럼 다음번엔 우리 대기업 다니는 정세연 대리님께 얻어먹어 봐야겠군.”
야 이 프로페셔널 한 새끼를 봐라. 은근슬쩍 다음 만남을 준비하네? 얼굴 믿고 들이대는 줄 알았더니 노력까지 곁들인다. 박수가 절로 나왔다.
가게를 나온 우리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이 같은 아파트다 보니 중간에 누굴 데려다주고 내리고 할 것도 없이 한 방에 지하 주차장까지 쭉. 게다가 엘리베이터까지 같은 층에 내리니 상당히 편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선한 느낌이었다.
12층에 내려 같은 방향으로 향한다. 각자의 집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던 우리는 짧게 ‘잘 자라’ 정도의 인사만 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다음 날인 일요일에도 녀석은 별 기척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집에서 생활했다. 벽 하나를 중간에 두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티비를 본다. 이것이 나와 옆집 남자 최수혁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