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선생님의 모든 게 다 좋아요.” 대학병원 정신과에 근무하는 한지원은 며칠 전부터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 환자의 소행이라 생각하며 대응을 망설이고 있던 중 주차장에서 스토커와 갑자기 마주치며 위험에 처하고, 때마침 근처에 있던 같은 병원의 시큐리티 강주경의 도움을 받는다. 주위에서 강주경을 부르는 별명은 불곰. 하지만 한지원의 눈에는 그가 점점 곰 인형으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 카페가 있는 병원 1층으로 내려오자 공교롭게도 강주경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에스컬레이터 옆 공간에 머리를 박고 숨을 뻔했다. 예기치 못한 기습이었다. 다행히 내가 가슴팍에 명찰이 버젓이 달린 가운 차림으로 머리만 감추며 타조처럼 굴기 전에 강주경이 나를 발견했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있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오늘 아침부터 목소리 내는 사람을 잊은 사람처럼 조용하던 강주경은 뭔가 결심한 기색이었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불곰을 보며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성큼성큼 걸어온 강주경은 정작 가까워지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꾹 다물어진 입안에서 무언가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강주경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10년 넘게 한 공부가 도움이 되는 건지. 그도 아니면 그냥 강주경이 알기 쉽게 행동하는 건지.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사탕 한 줌을 꺼냈다. 어린아이도 상대하는지라 가운 주머니에는 항상 사탕이며 스티커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손을 내밀자 강주경이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 알록달록한 사탕을 놓아주었다. 강주경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긴장한 것 같던 분위기가 녹아내리고, 설탕이 솜사탕으로 부푸는 것처럼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가 내 팔을 잡았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당기는 것만으로 발이 휘청휘청 끌려갔다. 역시 강주경이 한 번 밀치면 나는 낙엽처럼 굴러갈 것이다. 그렇다고 강주경이 아주 나를 질질 끌고 간 건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궁금해서 내 발로 따라갔으니. 그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병원 구석의 비상계단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있어서 다들 계단인 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곳이었다. 창문은 없고 형광등 불빛과 녹색 비상구 표시만 있어서 병원 괴담에 단골로 나올 것 같은 계단이다. 실제로 괴담이 많기도 했다. 밤 열두 시에 오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여자가 보인다거나…… 다른 생각을 하며 연하의 불곰 앞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그건 한 순간에 깨졌다. 강주경이 바짝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했지만 곧 벽에 등이 닿았다. 선생님, 강주경이 다시 중얼거리듯 나를 부르며 몸을 숙였다. 워낙 덩치가 커서 그것만으로 시야가 차단되었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에 역광이 진 강주경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러나 불시에 나는 손을 잡혔다. 손목을 먼저 잡고 천천히 내려와 손을 꽉 쥐는 힘은 강하지만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어젯밤처럼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굵은 팔뚝이 내 머리 옆의 벽을 짚었다. 뾰족한 눈매가 가까워졌다. 점점 더, 우연히 가까워질 수 있는 거리를 한 걸음 더 넘을 때까지. 짙은 색 눈동자가 고집스러운 눈꺼풀에 가려지고 숨결이 닿을 때까지. 심장이 세게 뛰었다. 입술이 닿을 거라 생각하고 나도 눈을 감았을 때였다. 조용한 비상계단에 날카로운 소리가 쏟아졌다. 둘이 동시에 눈을 떴다. 강주경의 무전기가 요란하게 삐빅거리고 있었다. 비상상황이었다.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주경이 한 순간 나를 보더니 손을 꽉 잡았다가 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