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제 능력이 더 커진 것 같아요.”
“그래요? 어떻게 커졌나요?”
“선생님, 208호 여자 아시죠?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그 여자 금방 저한테 올 걸요.”
거기서 벌떡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꽤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이 남자는 망상이 심한 환자로, 벌써 다섯 번째 회기였다. 명문대에 입학했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한 후 취업에 계속 실패하면서 현실도피성으로 공상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점점 심해져 병증으로 발전했다. 모친이 우연히 환자가 소설처럼 쓴 공상의 내용을 보고 놀라서 병원에 데리고 온 케이스였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가 망상의 대상으로 삼던 것은 가상의 인물이나 학교, 아르바이트하던 가게에서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그게 같은 폐쇄병동의 환자를 향했다.
남은 시간 동안 환자의 망상을 전부 들어 주었다. 내 말이 뒤틀린 망상에 대한 긍정과 응원으로 들리지 않게 하면서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인상도 느끼게 하는 건 가느다란 실을 당기는 것처럼 어렵고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조금만 균형이 어긋나면 환자의 망상이 내 긍정으로 인해 발전하거나 더 위험한 방향으로 튈 수도, 환자가 나를 경계해 입을 다물어 버릴 수도 있었다.
남은 시간 동안 환자의 망상을 전부 들어 준 뒤,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서인지 어느 정도 차분해진 환자를 두고 병실에서 나왔다. 간호사실에 체격 큰 조무사 두 명과 간호사가 모여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곧바로 다가갔다.
“전화 좀 빌릴게요.”
정신과 외래 스테이션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는 여전히 바쁜지 어수선했지만 크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사실 정신과 외래라고 해서 그렇게까지 지옥도는 아니다. 다들 걸어서 병원에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심리팀 한지원입니다. 서 교수님 통화 가능하신가요?”
-아, 한 선생님. 교수님 지금 그쪽 올라가셨는데…….
그쪽?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외래에서는 꽤 거리가 있으니 아직 오는 중인 듯했다. 알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205호 문제 있어요?”
간호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205호랑 208호 분리해야 할 것 같아요. 최경선 환자랑 이신아 환자가 최대한 떨어지게.”
“아.”
방금 면담하고 나온 환자, 최경선이 말한 ‘208호 여자’는 이신아였다. 자살 위험도가 높은 이신아는 중앙 스테이션 바로 앞의 2인실에 입원 중이었고 최경선이 있는 205호는 조금 비껴서 마주 보고 있는 정도로 가깝다. 병실에서 좀처럼 나올 일이 없는 폐쇄병동 환자들이었지만 아마 산책 시간에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빈 병실을 체크하는 듯했다.
“음…… 318호 비어 있네요.”
한 층 위, 서쪽 복도 끝으로 남자 간호사와 조무사들이 주로 근무하는 스테이션 앞이다. 1인실이고 주로 폭력성 높은 환자들이 들어간다. 그쪽은 뭐가 나온다느니 하는 소문이 있어서 1인실인데도 가끔 빈 병상이 생긴다. 마침 잘된 일이었다.
“산책 시간도 분리해야 할 것 같아요. 최경선 환자가 이신아 환자를 본 것 같은데, 우선 서 교수님한테도 보고하고…….”
“나한테 뭘 보고해?”
뒤에서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돌아보았다. 대체 어느 틈에 여기까지 온 건지 바로 뒤에 서 교수님이 서 있었다.
“깜짝이야…… 소리 좀 내고 와 주세요, 교수님.”
“소리 내고 왔는데. 한 선생이 너무 심각해서 못 들은 거야.”
“그, 그래요?”
“그나저나 무슨 소리야. 205호 무슨 문제 있어? 나 지금 그 환자 보러 온 건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금 면담 내용을 짧게 설명했다. 진정제 증량이며 병실 관리며, 어차피 전부 교수님과 상의해야 했다. 하지만 교수님의 반응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녹취했지. 좀 들어 보자.”
교수님은 딱딱한 얼굴이었다.
아차 싶었다. 이신아는 10대의 우울증 환자였다. 내가 그 환자를 보며 무거운 마음을 느꼈듯이, 교수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히려 나보다 더 크게. 나는 조금 머뭇거리며 휴대폰과 이어폰을 내밀었다.
“윤 선생, 205호에 나 조금만 늦는다고 전해 줘요.”
짧게 대답한 남자 조무사가 205호로 사라진 후 교수님은 곧바로 녹취를 듣기 시작했다. 띄엄띄엄 내용을 스킵하는가 싶더니, 이신아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쯤 한쪽 손으로 이어폰을 귀에 누른 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보고 있는 내가 조마조마해질 정도로.
최경선이 이신아에 대해 이야기한 건 15분 남짓이었다. 그것을 전부 들은 교수님은 이어폰을 집어 던지듯 빼냈다. 205호로 돌아간 시선은 살벌했다.
“한 선생 오늘 일정 더 있어?”
“두 시부터 30분 정도 비어요.”
“그때 잠깐 연구실로 올래?”
“네…….”
교수님의 목소리는 잔뜩 낮아져 있었다. 화가 난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최경선의 망상 내용이 그 정도로 심각했던 건 맞지만…….
“들어갔다 올게.”
“교수님.”
나는 병실로 들어가려 하는 교수님의 팔을 잡았다. 차갑게 식은 얼굴이 나를 향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교수님이 느끼고 있는 건 사적인 감정이다.
“진정하세요.”
최경선은 처음 검사할 때부터 나를 놀라게 할 정도로 지독한 망상을 가지고 있었다. 모친이 기겁해 바로 병원에 데리고 올 만큼 폭력적이고 외설적이고 집요하다. 나도 면담을 마치고 나면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끔찍한 내용이라도 초반에는 환자의 말을 전부 들어 주어야 했다. 내용 자체를 긍정하진 않지만, 환자가 느끼는 현실감은 긍정한다. 환자에게는 그게 현실이니까.
환자에게 필요한 건 자신의 말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 주는 사람이다. 그렇게 관계가 만들어져야 환자에게 망상에서 빠져나올 길을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환자 본인을 위해서, 그리고 환자가 돌아가야 할 사회를 위해서 치료가 필요했다. 최경선 같은 사람을 사회에 그냥 놓아두면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내가 당장 그 말을 듣고 비위가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그런 생각 자체를 지워 버려야 한다.
동요하거나 불쾌해하면 환자와 나의 신뢰관계는 단숨에 깨진다. 다른 의료진이나 치료자의 태도 또한, 환자에게는 ‘병원’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는 만큼 나를 향한 감정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교수님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수십 초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지나갔다. 스테이션에 있던 사람들도 불안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얼마 후 교수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보다 한결 차분해진 얼굴이었다.
“미안해. 레지던트 1년 차도 안 할 짓을…….”
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도해서 어깨의 힘이 빠져나갔다. 교수님의 말대로 미숙한 행동이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일단 진정제 증량하고 병실이랑 동선 분리하고. 자세한 건 이따 이야기하자.”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는 내 머리에 손을 툭 얹고는 병실로 향했다. 205호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교수님은 완전히 평정을 찾은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던 나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누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데.’
교수님에게 생각을 집중하느라 미처 깨닫지 못했다.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안쪽 복도며 엘리베이터 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사각지대는 꽤 있었다.
“가 볼게요.”
“네, 선생님. 고생하세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이내 시선은 사라졌다.
주경이가 어디서 보고 있었나?
조금 전 교수님이 한 행동을 떠올려 보았다. 머리를 쓰다듬고 간 정도. 스테이션에 있던 사람들도 딱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스킨십이었지만 강주경이 보면 조금 마음이 상할 것 같기도 했다. 바로 어제 그렇게 열렬하게 고백해 놓고 오늘 그러면…….
폐쇄병동을 빠져나오자마자 휴대폰을 꺼냈다. 근무 중이겠지 싶어서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세 번 채 울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님?
“응, 주경아. 지금 어디 있어?”
-산부인과 병동이요.
“아…….”
산부인과면 여기서 꽤 멀다. 강주경이 순간이동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B동에서 A동의 폐쇄병동 중앙 스테이션에서 왔다 가는 건 무리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일하고 있어?”
-잠깐 트러블이 있어서요. 산부인과 왔다가 돌아가는 중이에요.
“으응.”
괜한 머쓱함에 저녁에 뭘 먹고 싶은지, 뭐 그런 것을 물어보다가 전화를 끊었다.
심리실로 돌아오자 선배와 유화영이 가까이 앉아서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꽤나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한 선생, 이야기 들었어?”
“네?”
둘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표정을 보니 병원에 또 무슨 일이 생긴 듯했다. 내내 폐쇄병동에 있다가 왔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것도 못 들었다.
“산부인과에서 난리 났었던데.”
“산부인과요?”
주경이도 산부인과에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했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고, 곰 같은 시큐리티가 또 급하게 불려 갔던 모양이다.
“웬 술 취한 미친놈이 태어난 게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난동을 부렸대.”
“헉.”
“자기가 분노조절장애여서 화 풀릴 때까지 다 죽일 거라고 하더니, 강주경 씨가 가서 잡으니까 얌전해졌다던데.”
꼭 있다. 선택적으로 충동조절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 대체로 아무런 병증도 없고 그냥 성격이 나쁠 뿐이다. 선배도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나저나, 역시 교수님과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건 강주경이 아니었다. 주경이가 한 말을 못 믿은 게 아니라 시선이 너무 명확해서였고, 이 병원에서 날 뚫어져라 쳐다볼 사람이라곤 그밖에 없는데.
역시 기분 탓이었나. 나는 묘한 느낌을 지우며 자리로 돌아갔다.
* * *
[조금 늦게 끝날 것 같아요]
퇴근 시간쯤 되어 그런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안팀은 야근이 거의 없는 편이지만, 아주 가끔씩 야간 근무자의 출근이 늦어지거나 스케줄이 안 맞으면 주간 근무자가 자리를 메우곤 했다. 오늘도 그런 모양이다.
시간을 물으니 10시쯤에나 끝난다고 한다. 마음 같아선 기다려 주고 싶었지만 집에 가서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집에서 기다릴게]
[차 키 가져다드릴게요]
[택시 타고 가면 돼]
[차 타고 가세요]
으음,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자판을 눌렀다. 직원들의 퇴근 시간에는 택시가 잔뜩 줄을 서 있지만 밤 10시에는 조금 다르다. 오고 가는 환자도 많지 않을 시간이라서 병원 부지를 벗어나 큰길까지 가야 할 때도 있었다.
한참 옥신각신한 끝에 강주경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알겠다고 말했다. 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서 생수 12병을 사 오라고 하지 않았다면 기어코 내게 차 키를 떠안겼을 것이다.
다시 메시지 창이 깜빡거렸다. 당연히 주경이겠거니 하고 열어 보니 서 교수님이었다. 낮에 최경선 때문에 폐쇄병동 간호사들까지 모여서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또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아니, 그러면 사내 메신저로 연락했을 텐데.
[저녁 같이 할래?]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시계를 흘끗 보았다. 어차피 교수님이랑 식사하는 자리는 점심시간에 직원식당에서 밥 먹는 수준으로 금방 끝나고, 집에 가서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시간도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다.
알겠다고 하고 일을 마무리했다. 퇴근 후 교수님이 날 데리고 간 곳은 자주 가는 그 음식점이 아니라, 번화가에서 약간 들어간 골목의 어둑어둑한 술집이었다. 일단 지하인 데다 좁고, 어둡고, 통기타 연주에 남자 가수의 목소리가 깔리는 컨트리 뮤직이 흘러나왔다.
테이블과의 간격도 좁았다. 옆자리가 비어 있지 않았다면 대화하는 내용도 같은 자리에 앉은 것처럼 전부 들렸을 것이다. 그다지 의욕이 없어 보이는 직원이 와서 메뉴판을 주고 갔다.
대부분 튀김이나 소시지 같은 맥주 안주 종류에 콘 치즈, 황도, 심지어 타코와 김치볶음밥까지 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무국적 메뉴판을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맛은 있더라.”
“으음.”
대체 뭘 주문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자 교수님은 타코를 추천하고, 자신은 모둠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종이빨대가 딸려 나오는 멕시코산 과일 음료를 추가해서.
주문을 마친 뒤 가게 안을 눈으로 훑었다. 벽 여기저기에 내용이 제각각인 핑크색과 파란색 네온사인이 붙어 있었다. 그 옆으로 소주 광고 포스터와 60년대 서부극 포스터가 나란히 걸려 있다. 그리고 음악은 영국 컨트리 팝.
뒤죽박죽인 분위기에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나고, 음악은 볼륨이 너무 크고. 난 이런 곳에 호도 불호도 없지만 교수님이 골랐다고 하기엔 묘한 가게였다. 평소 교수님이 선호하는 것과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하지만 맛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이미 와 봤던 곳 같고. 평소 교수님이라면 들어와서 한 번 훑어보고 도로 나갔을 정도인데.
“여기 와 보고 싶다고 했었거든.”
직원이 음료를 먼저 가져다주고 돌아서자 교수님이 불쑥 말했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은재가.”
“…….”
어쩐지. 순간 할 말을 찾지 못해서 입을 다물었다.
“엄마 심부름하러 왔던 적이 있대. 그때는 잠깐 왔다가 나갔는데, 여기 앉아서 밥 먹어 보고 싶었다고. 이거랑 같이. 은재도 가게 이름을 제대로 몰라서 결국 못 왔는데, 며칠 전에 돌아다니다 우연히 찾았지 뭐야.”
이거랑 같이, 라고 말하며 교수님은 음료 병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찾으셨네요.”
“은재가 설명한 거랑 똑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교수님이 웃었다.
열일곱 살의 아이가 결국 오지 못한 가게에 교수님과 내가 앉아 있었다. 주문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음식이 나왔고 정말로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하기야 골목 뒤쪽이라도 이 땅값 비싼 곳에서 몇 년째 장사하고 있는 거니까, 누군가는 이런 분위기와 음악을 좋아할 거고 여기서 파는 술이나 음식을 좋아하겠지.
별다른 대화도 없이 의식처럼 음식을 먹었다. 접시가 반쯤 비었을 때 교수님이 직원에게 술을 한 잔 주문했다. 도수가 꽤 높은 위스키여서 말리려고 하자, 그는 한 잔만, 하고 말하며 웃었다.
계속 못 마시게 할 수도 없다. 결국 어울려 주듯이 나도 알코올이 들어간 칵테일을 주문했다.
“술 마셔도 괜찮겠어? 차는?”
“택시 타고 갈 거라서 괜찮아요.”
“아. 아직 강주경 씨랑 같이 있던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경 씨는, 먼저 퇴근했고?”
“오늘 늦게 끝난대요. 제가 먼저 들어갈 것 같아요.”
“보안팀도 바쁘네.”
술 맛은 거의 나지 않는 칵테일을 홀짝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교수님보다는 안 바쁠 거예요.”
“맞아. 진짜 일만 하다가 늙겠어.”
“교수님이 일을 너무 많이 하시는 것도 있고요…… 좀 쉬세요.”
“네가 남 말할 처지냐.”
그 말에 우리 둘 다 웃었다. 술을 마시는 이유도 같이 가지고 있는 기억도 얕게 묻어 두는 것 같은 웃음이었다.
술 한 잔씩이 따라붙었지만 식사는 겨우 한 시간을 조금 넘겨서 끝났다. 교수님도 병원 주차장으로 가서 대리 기사를 불러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기에 나와 나란히 서서 택시를 잡았다.
먼저 온 택시에 날 태우려 하는 교수님을 반쯤 강제로 차에 밀어 넣었다.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도 내가 말했고. 출발하기 전 교수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날 너무 걱정하네, 한지원.”
“공경해 드려야죠, 선배님.”
“하하. 간다. 잘 들어가고, 내일 봐.”
“네.”
오랜만에 부른 ‘선배’라는 호칭에 교수님은 피식 웃었다.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도 빈 차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알코올이라곤 한 스푼 남짓 들어갔을 칵테일이었는데도 조금 몽롱했다.
집에 돌아와서 세탁기를 돌려 둔 뒤 뜨거운 물에 몸을 씻었다. 침실에 딸린 좁은 욕실은 금방 온기와 수증기가 차올랐다. 술집은 담배연기가 조금 떠돌긴 했지만 몸에 들러붙는 쿰쿰한 냄새는 없었고, 나름대로 깔끔했다. 유니크한 느낌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술집에 가 본 적 없는 어린애가 ‘한번 가 보고 싶다’고 말하기에 적당한 가게. 국적 불명의 메뉴판과 특이한 음료와 술. 형광색 네온사인. 라이브 연주와 구분하기 어려운 큰 볼륨의 느긋한 음악.
아무 일도 없었다면 은재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기념 삼아 교수님과 나, 그리고 은재, 셋이 그 가게에 갔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미성년자가 들어가선 안 되는 곳은 아니었지만 그냥.
그러고 보니 교수님에게 올해는 언제 갈 건지 묻는 걸 잊었다. 1월 중순까지 교수님은 학회 일정도 겹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사이에 대전까지 다녀오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걱정이었다. 일단 은재에게 다녀와야 교수님의 저 우울한 상태가 나아질 텐데.
술기운을 씻어 내기 위해 평소보다 긴 샤워를 하고 나왔다. 온몸이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따끈따끈했다.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차가운 물을 두 잔 정도 마시자 그제야 머리가 맑아졌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던 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니 살 것 같았다.
컵을 씻고 있는데 싱크대 앞 창문에 투둑투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창을 살짝 열어 본 순간 찬 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훅 쏟아져 들어왔다. 하루 종일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싶더니 결국 내리는 모양이다.
후다닥 닫아 버리고 그새 머리카락에 묻은 물방울을 툭툭 털었다. 다시 씻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곧바로 서재로 가서 노트북을 열었다. 바탕화면에 오늘 정리해야 하는 자료 파일 세 개가 나란히 떠 있었다. 첫 번째 파일부터 열어서 내용을 훑어보고, 음성자료와 비교하고, 내용을 추가하거나 삭제하고, 이 비슷한 작업을 마지막 세 번째 파일까지 끝마쳤을 때 타이밍 좋게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서 현관으로 나갔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강주경이 현관에 멈춰 섰다. 그의 뒤로 문이 낮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왔어? 춥지.”
“……네.”
‘네’가 무엇에 대한 ‘네’인지 잠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강주경은 진눈깨비가 요란하게 쏟아지는 12월이 아니라 혼자 봄날 꽃길을 걸어온 것처럼 평온했다. 매해 그렇듯 사상 최대 한파인 겨울을 대부분 코트로 버티고 있는 강주경이 부러웠다.
“저녁은?”
“병원에서 먹었어요. 선생님은…….”
왜인지 그는 신을 벗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멀뚱하니 서 있었다.
“끝나고 교수님이랑 먹고 왔어.”
“네, 그런데…… 선생님, 안경 쓰셨네요.”
“응?”
주경이의 말에 그제야 눈가를 더듬었다. 시력 보호용 안경이다. 서재에 늘 놓아두긴 하는데, 쓰는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인. 오랜만에 써 보고는 썼다는 것도 잊은 채 일을 했다.
“이거 쓰면 눈이 덜 아프다는데 난 잘 모르겠더라고. 그런데 거기서 뭐 해? 안 들어와?”
“…….”
그는 잠시 더 현관에 서서 머뭇거렸다.
“주경아?”
“선생님.”
“으응?”
“항상 같이 들어오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제야 강주경은 구두를 벗고 거실로 올라서서 다가왔다. 지하에서 차를 타고 다시 지하에서 내린지라 젖진 않았지만 비오는 날씨 특유의 축축한 냉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그것이 내내 따뜻하던 내 몸을 덮었다.
상체를 숙여 끌어안는 커다란 몸을 마주 안았다. 부드러운 코트 위로 코를 눌러 냄새를 맡았다. 새로 클리닝한 캐시미어 코트의 청결한 섬유 냄새, 옅게 남은 향수 냄새. 비 냄새. 차가운 공기의 냄새.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꼬리를 흐렸지만 주경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내가 거기 서서, 어서 오라고 인사해 줘서 좋았다고. 나도 그랬다. 문이 열리고 강주경이 바깥의 공기를 가득 품은 채 돌아와 다녀왔다고 한 것이 좋았다.
내가 그에게서 나는 냄새를 킁킁거렸듯이 그도 내 냄새를 맡았다. 아마 목욕제품 냄새, 잠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 샴푸 냄새 같은 것. 한참 끌어안고 있다가 서로 놓아준 뒤 주경이에게 씻고 나오라고 말했다.
마침 나도 일이 끝났으니 따뜻한 차나 좀 마시고 일찍 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강주경이 현관으로 한 걸음 돌아가 양손에 들어 올린 것을 보고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성실하게도 생수를 정말로 사 왔다. 아니, 그야 필요하긴 했지만 인터넷으로 주문을 해도 되고, 나한테 차를 못 넘기게 하려는 핑계였는데.
그리고 양쪽에 각각 십여 킬로씩을 과자 봉지 들듯 무게감도 없이 든 강주경은 고개를 기울인 채 말했다.
“아까, 물 사서 택시 타고 간다고 하려다가.”
“응?”
“참았어요.”
“…….”
무뚝뚝한 표정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차를 끝까지 떠넘기지 않고 져 준다는 심정으로 자기가 끌고 온 걸 칭찬해 달라는 것 같다. 진짜 귀여워서 죽겠다. 막 웃으면서 강주경의 양쪽 뺨을 잡고 발돋움해 입을 맞췄다.
주경이는 답이라도 하듯 자기 쪽에서도 먼저 입 맞추더니, 다용도실에 생수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욕실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주전자를 꺼내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잘 사용하지 않는 미색 주전자는 처음 샀을 때랑 똑같이 긁힌 자국 하나 없다. 앞으로 좀 자주 써 볼까.
몸을 씻는 소리, 어느새 완전히 비로 바뀌어 버린 물방울이 창문을 타고 흐르는 소리, 주전자의 물이 끓는 소리가 천천히 섞였다.
* * *
다음 날도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병원의 평화는 병원이 문을 닫아야만 올 것 같다.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강주경에게 붙들린 최경선을 보고 있었다.
병동의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어제 오후 바로 3층 서쪽 끝으로 병실을 옮긴 최경선은 저녁에 증량된 진정제를 먹고 좀 차분해지는가 싶더니, 오늘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뛰쳐나왔다고 한다.
마침 스테이션에는 전산 업무를 처리하던 간호사 한 명밖에 없었고, 식사를 가지고 들어간 사람은 불시에 밀쳐져 넘어진 바람에 그를 잡을 겨를이 없었다. 간호사가 스테이션에서 나오는 그 짧은 순간에 최경선은 벌써 저만치 가 버린 뒤였다.
그런데 그가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에 303호에 있던 또 다른 환자가 복도로 나와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제사장님이었다.
신이 사악한 자를 잡으라고 계시해서 최경선을 잡으러 나왔다고 한다. 그 말에 나는 조금 혼란했다. 제사장님이 병이 아니라 정말 신의 사자인 거면 어쩌나 하고.
계단 앞에서 두 환자가 엎치락뒤치락 싸우기 시작했고 나와 서 교수님과 강주경이 우르르 불려 올라왔다. 주경이에게 양쪽 팔을 붙들린 채 악을 쓰는 최경선과 달리 조경철은 간호사 옆에 점잔하게 서서 훈계하고 있었다.
“신이 남자에게 더 큰 힘을 준 것이 부녀자를 위협하게 하려고 한 일인 줄 아나! 부끄러운 줄 알게!”
엄청나게 맞는 말이었다.
“내가 내 애인 만나러 간다는데, 씨발 무슨 참견이야!”
“어허! 자네 혼자 좋아한다고 해서 애인인 게 아니래도!”
나는 눈을 옆으로 굴렸다. 서 교수님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우리 둘 다 같은 생각일 것이다. 조경철은 최경선을 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복도를 뛰어가는 것만 보고 그의 목적을 알아차린 건지. 사실 정신과에서는 무속신앙도 병리적 관점에서 접근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신비와 신앙은 의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그걸 구분하는 건 결국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마도 병동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처럼 미스터리로 남을 사건 앞에서 나는 이마를 짚었다. 계단 문이 열려 있었고 간호사들은 한창 바쁠 시간이라서 조경철이 나오지 않았다면 최경선이 205호 문까지 두드렸을지도 모른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까진 못했겠지만 이신아에게도, 그 주변에 있는 환자들에게도 사납게 문을 두드리고 자기 망상을 외쳐 대는 소리가 엄청난 악영향을 줄 건 분명했다. 이 일로 또 여기저기 시끄러워질 것이다. 가뜩이나 예민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서 윗사람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만큼 더.
최경선이 병실을 빠져나올 때 근처에 있었던 근무자들은 전부 핼쑥한 얼굴이었다. 환자를 못 막았다는 충격과 앞으로 있을 문책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두 환자가 각각 병실로 돌아가고, 간호사들이 링거와 주사를 챙기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강주경에게 들리다시피 해서 복도 끝으로 가는 내내 최경선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성이 난 사람이라도 몇 분 안에 차분해지게 만드는 약물이 최경선의 몸에 빠르게 돌아 주면 좋겠다.
“들어가 볼까요?”
병동 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묻자 서 교수님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차피 지금 흥분 상태라서 말도 안 통할 거고, 약 맞으면 잠들 텐데.”
하기야 그랬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교수님이 헉 하는 소리를 내더니 내 어깨를 두드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전 진료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분 단위로 차 있는 예약은 교수가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기나긴 진료 지연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지금쯤 외래 병동 간호사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는 환자들 사이에서 불안한 얼굴로 목을 빼고 있을 것이다.
교수님이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경이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옷깃 하나 구겨지지 않은 채였다.
“또 불려 왔네. 보안팀에서 너만 일하는 것 같아.”
예전에는 그걸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가까이 지내다 보니 확 느껴진다. 강주경은 거의 병원의 해결사처럼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내 말에 그는 엷게 웃음을 띠었다.
“그런 건 아니에요. 선생님 말대로 찾는 사람이 많아서 저는 고정 구역이 거의 없거든요.”
“아…….”
대체로 난동 부리는 사람은 강주경의 체격과 얼굴을 보면 침착해진다. ‘이 새끼들아’가 ‘아니, 선생님’으로 바뀌는 게 한순간이었다.
나타나서 깡패같이 무작정 위협하는 것도 아니고, 대면하고도 얌전해지지 않으면 붙잡는다. 지난번에 하연희를 잡았을 때가 떠올랐다. 물론 하연희의 기질 탓도 있지만, 갑자기 붙잡히고도 기분 나쁜 기색을 안 보였던 걸 생각하면 강주경은 지난 5년 동안 갈고닦은 프로의 붙잡기 기술이 있는 듯했다.
학교도 외국의 경호학과를 나왔다고 하고, 역시 우리 병원에 있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체격을 보나 능력을 보나 유명 배우의 보디가드 같은 걸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와 처음 가까워졌을 무렵 날 꽤나 설레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누굴 지켜 주는 게 좋아서.
“있잖아, 언제부터 이런 일을 하고 싶었던 거야?”
“경호원이요?”
“응.”
그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어릴 때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는데…….”
“……응?”
엄청난 말을 하는 강주경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나는 내가 ‘어릴 때 부모님 심부름을 가다가’ 같은 말을 잘못 들은 건가,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 뭐라고? 뭘 당해?”
“납치요.”
여전히 어조는 변함이 없었다.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을 할 때도 담담할 것 같다. 놀라서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 그가 다시 말했다.
“그렇게 놀라실 일 아니에요.”
“아니라니?!”
“실제로 당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병동을 빠져나와 걷다 보니 어느새 1층 로비였다. 나는 강주경의 팔을 잡고 끌고 가다시피 카페로 향했다. 타이밍 좋게도 음료를 받으려는 사람은 많았지만 주문하는 줄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거 먹을래?”
“네, 좋아요.”
시럽과 크림이 조금 들어가는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픽업 코너 옆에 섰다. 계속 물어도 되는지 짧게 고민하다가 애초에 그 말이 도입부였다는 걸 깨닫고 주경이를 보았다.
“정말 그건 별일 아니었는데……, 동생이랑 외가에 다녀오다가 데려다주던 차가 고장 나서요. 어머니가 오기로 하셨고,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몇 살이었는데?”
“열 살이요. 동생은 여섯 살이었고.”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강주경이 해 준 이야기는 이랬다.
강주경과 여동생은 집안의 유일한 어린아이들이었다. 부모님도, 양쪽 조부모님도, 친척들까지도 전부 바빠서 명절이 아니면 한곳에 모일 일도 거의 없지만 다들 두어 달에 한 번씩은 아이들을 보고 싶어 했다. 특히 조부모님들은 달마다 직접 찾아오거나 데리고 갈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대체로 조부모님 집의 기사가 데려다주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기사가 갑자기 차가 고장 났다고 하며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내렸다.
작은 카페나 소품점과 주택만 늘어선 한적한 길이었다. 카페에 아이들을 앉혀 놓은 기사는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비워 버렸다. 차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고장 난 것인지는 열 살짜리 아이는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할 문제였다.
코코아를 마실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진 동생을 앞에 앉힌 채 열 살의 강주경은 왜인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주위에 돌봐줄 어른이 아무도 없는 게 워낙 낯선 일이기도 했다.
곧바로 어머니와 통화를 했고, 의아한 기색의 어머니가 곧 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했다. 조금 안심하고 앉아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여자가 다가왔다.
‘안녕, 주경이 맞지? 너는 하경이고.’
‘그런데요…… 누구세요?’
‘엄마가 모르는 사람이랑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어요.’
두 아이가 동시에 경계하자 여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똑똑하기도 하지. 아줌마는 너희 엄마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사장님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데리러 왔어.’
강주경은 그 낯선 여자의 말을 바로 믿지 않고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계속 통화중이라는 메시지만 나올 뿐 연결은 되지 않았다.
‘엄마 바빠서 전화 못 받으실 텐데. 자, 봐. 엄마 회사 맞지?’
그렇게 말하며 여자가 보여 준 것은 어머니 회사의 명함이었다. 로고 아래에 똑똑하게 박힌 이름 석 자와 여자가 꺼내서 보여 준 신분증의 이름은 일치했다. 강주경은 조금 망설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주경이 너무 똑똑해서 좋아하시겠다. 기다려 봐.’
여자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과장님, 저예요. 지금 사장님 아드님이랑 따님 데리러 왔는데, 글쎄 너무너무 똑똑해서 절 안 따라오려고 해요. 아하하. 네. 자, 주경아. 전화 받아 봐.’
머뭇거리면서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만난 적 있는 어머니의 부하 직원이었다. 그가 웃으며 걱정하지 말고 아줌마를 따라오라고 말했고, 슬슬 바깥에 있는 것에 질린 여동생은 보채기 시작했다.
‘오빠, 나 힘들어. 집에 가고 싶어.’
결국 강주경은 낯선 여자를 따라나섰다. 카페 바로 앞에 회색 왜건이 서 있었다. 강주경이 동생의 손을 잡고 그 차로 다가가려 했을 때, 누군가가 팔을 잡고 뒤로 홱 끌어당겼다.
‘아줌마, 아까부터 듣고 있었는데요.’
놀란 표정의 여자와 강주경 사이로 웬 교복 차림의 학생이 끼어들었다. 근처에서 제법 유명한 중학교 교복이었다.
‘저거 렌트카죠?’
그가 차량 번호판을 가리켰지만 강주경은 렌트카가 뭔지는 알아도 번호판과 렌트카가 무슨 상관인지는 알지 못했다.
‘회사 사장님이 애들 데리고 오라고 한 건데, 왜 아줌마 차도 아니고 회사 차도 아니에요?’
‘……너 누구니? 미안한데, 아줌마는 바빠서 빨리 애들 데리고 가야 해. 애들 엄마도 기다리고 있고. 비켜 줄래?’
마른 체구의 중학생이었지만 바로 앞에 감싸듯 섰기 때문에 그에게 가려져서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이 안 보이니 목소리의 분위기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초조해하는 기색이었다.
‘얘들 엄마가 기다린다니까. 너 이러는 거 범죄야, 알아?’
강주경은 범죄가 뭔지 생각했다. 누군가를 데려가려고 하는 것과 그걸 막는 것, 두 가지 행동 중에서는 데리고 가는 쪽이 더 강주경이 배운 ‘범죄’에 가깝다. 그래서 동생의 손을 붙잡으며 남학생의 뒤에 바짝 붙어서 섰다.
‘진짜 미치겠네. 얘, 기다려. 애들 엄마랑 통화시켜 줄 테니까.’
여자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내내 통화 중이었던 어머니는 여자가 전화를 걸자 곧바로 받은 듯했다.
‘네, 사장님. 죄송해요. 여기 좀 이상한 애가 있어서…… 애들을 못 가게 하지 뭐예요. 네, 네. 말씀 좀 해 주세요.’
남학생은 여자가 내민 휴대폰을 받지도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갑자기 자신에게 돌아온 시선에 놀란 강주경을 향해서 남학생이 말했다.
‘너희 엄마 전화번호 알지?’
‘……네.’
‘아줌마, 그 전화 끊어 주세요. 저 얘 휴대폰으로 전화 걸어 볼 거예요.’
여자가 당황하더니 어영부영 전화를 끊었다. 남학생은 강주경에게 휴대폰을 받아 들고는 통화 목록에서 ‘어머니’를 찾아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역시 연결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걸로 얘들 엄마가 전화 받을 때까지 안 비킬 거예요.’
‘너 대체 누구야? 자꾸 이러면 경찰 부른다!’
‘부르세요!’
남학생은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는 사이, 점점 주위의 시선이 모이기 시작했다. 강주경의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비어 있던 손으로 그것을 마주 잡았다가 깜짝 놀랐다. 어른을 상대로도 겁먹지 않아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차갑고,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그가 갑자기 손을 놓아 버렸다. 이대로 가 버리려는 건가 해서 반사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뒤로 돌아서서 몸을 굽혀 두 아이를 끌어안았다.
‘비키라니까!’
여자가 성큼성큼 와서 그의 팔을 붙들어 떼어 내려 했다. 어머니의 부하 직원이 아닌 건 분명했다.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눈치챈 여동생이 울음을 터뜨렸고, 여자가 강주경의 옷깃을 잡아당기려 한 것과 동시에 경찰차 사이렌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골목 안으로 순식간에 경찰차 서너 대와 어머니의 차가 달려 들어왔다. 여자가 당황해서 아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려 한 것보다 경찰이 차를 세우고 뛰쳐나와 그 여자를 잡은 게 더 빨랐다.
“그다음은 잘 기억이 안 나요.”
“으음.”
나는 이야기하는 사이 반쯤 비어 버린 커피 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미수로 끝났다고 해도, 열 살이면 어린애였는데. 게다가 열 살의 강주경은 또래보다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여섯 살인 동생은 말할 것도 없다.
“정말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요. 선생님은…… 보시면 알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이는 주경이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긴 했다. 똑같은 사건을 겪어도 사람에 따라서 충격의 크기는 다르다. 강주경이 그 일로 크게 힘들어하지 않은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동생도 괜찮아?”
“기억 안 난대요.”
“그렇구나.”
어린 시절의 자그마한 강주경이라니. 다 자란 채로 태어났을 것 같은데. 하지만 새카만 머리에 피부는 희고 눈은 또렷한 귀여운 아이였겠지. 워낙 인상이 강해서인지 열 살 주경이의 모습도 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은 집에서 반대 안 했어? 어머니 회사도 있는 거면 물려받아야 하거나, 그런 거 아냐?”
“저희 집은 자유로운 편이에요. 회사는 형이랑 동생이 물려받을 거고요.”
어릴 때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머니 회사도 큰 편인 모양이고, 외가랑 친가에 각각 운전기사가 있었다고 하고,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대단한 집안인 듯했다. 우리 주경이랑 헤어져 달라고 하면서 가족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어쩌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경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응? 왜?”
“아니요. 선생님 처음…… 봤을 때 생각하고 있었어요.”
“으응. 병원에서 봤다고 했지.”
5년 전에. 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 만남이었던지라 어쩐지 조금 미안했다. 내 말에 그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예전에 날 5년 전 처음 봤고, 그때부터 좋아했다고 말했을 때도 강주경은 이런 표정이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켕기는 구석이 있는 표정?
그게 뭐 이상한 일도 아닌데 왜인지 조마조마해하는 것 같아서 괜히 안쓰러웠다. 뺨을 살살 쓰다듬어 주자 그는 눈을 휘며 웃었다.
“병원 창립기념일 행사에서요.”
“아.”
“자리 채우는 아르바이트…… 비슷한 걸로 참석했었는데, 거기서 봤어요.”
매년 창립기념일이 되면 병원에서 자선 행사를 한다. 대형 병원의 특성상 전 직원이 다 나올 수 있는 시간은 없기 때문에 일부만 차출된다.
5년 전 행사에는 심리팀 전원이 참석했다. 그해에 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정신건강 복지 지원 제도를 만들고, 창립기념일 행사에서 정식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몇 년쯤 전부터 우리 병원은 정신과 쪽에 꽤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서 교수님이 외국 유명 병원을 전부 거절하고 여기로 온 것이 그 지원 제도 계획 때문이었다. 대형 병원에서 그런 제도가 만들어지면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도, 접근성도 크게 달라질 거라고 하면서.
그때 수련생 1년 차였던 나를 포함해 정신과 의료진 전원이 단상에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으니까 주경이는 아마도 거기서 날 보았을 것이다. 긴장 때문에 엄청 얼빠진 얼굴이었을 텐데…… 그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니 민망했다. 미간을 긁적이고 있는데 다행히도 강주경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그분도 어딘가 안 좋으신 거죠?”
그가 말하는 ‘그분’은 조경철일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아픈 사람보다 더 옳은 말만 하시던데.”
그러게. 생각해 보면 한 번도 틀린 말이나 안 좋은 말을 한 적은 없다. 매번 내 볼펜이나 노트나 휴대폰에 축복도 내려 주고.
“맞아…… 원래부터 좋은 사람이었을 거야.”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프기 전부터 조경철은 아주 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악의로 남을 속여 본 적도 없으리라는 걸. 그래서 나중에 병에서 벗어난 그가, 종교 단체에 있을 때 수많은 신도가 그를 위해서 재물이나 노동력을 바쳤다는 걸 알고 받게 될 충격이 걱정된다. 그의 잘못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그 역시 피해자임에도, 그렇게 착한 사람은 이용당한 것만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만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너무 많아.”
강주경이 어린애 같은 단어를 쓰는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쁜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을 자꾸 이용해. 그게 싫어.”
“……저도요.”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좋아요.”
“…….”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니, 난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한 게 아닌데. 입에서 흘러나와 버리긴 했지만 말하고 보니 무슨 만화 대사처럼 들리기도 했다. 얼굴의 열기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손으로 뜨거워진 뺨을 누르면서 갈팡질팡하다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한 줌 꺼냈다.
“자.”
와르르 쏟아 준 색색의 사탕은 강주경의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몇 개 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주경이는 사탕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주머니에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넣더니, 또 바닥을 보다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미간에 엷게 주름이 잡혀 있었다.
어쩐지 묘한 눈이었다. 잠시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내 얼굴이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점차 붉어졌다.
“저기, 주경아…… 너 지금 무슨 생각 해?”
“…….”
“…….”
강주경이 먼저 눈을 피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얼굴이었다. 더 캐묻지 않는 게 서로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병원에서, 직장에서…… 그런 생각을……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토, 토요일에. 차 타고 어디 나갈까? 멀리는 못 가지만.”
나는 급하게 말을 돌렸다.
“좋아요.”
“음, 영화나 공연이 더 좋으면 보러 가도 되는데.”
어디든 좋다고 대답하던 것을 떠올리며 말하자 강주경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드라이브가 더 좋아요.”
“그래?”
“영화나 공연도 좋지만…… 그건 내용을 봐야 하니까요.”
얼굴이 계속 따끈따끈하다. 나는 손등으로 뺨을 문지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드라이브가 더 좋아.”
내 대답에 강주경은 무척 다정하게 웃었다.
* * *
인천에 있는 해안 유원지는 토요일에도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위험한 놀이기구와 의미 없는 모노레일 같은 것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포털사이트에서 데이트 코스 같은 진부한 검색어를 뒤적거리다가 문득 떠오른 게 이곳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후련함과 심심함에 몸부림치면서 여기저기 놀러 다니다 찾은 곳 중 하나. 그때는 서울에서부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 가며 거의 세 시간에 걸쳐 찾아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열정이다.
친구들과 왔을 때는 안쪽의 테마파크에서만 한참 놀다 돌아온 것 같은데 엉뚱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잠깐 스치듯 보았던 이 길이었다. 한쪽으로는 오래된 티가 나는 간판이 늘어서 있고, 반대편엔 난간 옆으로 바로 바다가 붙어 있는.
며칠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씨는 오늘도 흐려서 거리 전체에 회색 막을 씌워 놓은 것 같았다. 왼편의 가게 중 1/3은 불이 꺼진 채였다.
가게와 바다 사이, 길 가운데로 놓인 둥근 벤치 옆에는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이나 자잘한 간식거리를 파는 노점이 몇 개쯤 있었다. 솜사탕이며 알록달록한 아이스크림, 삶은 고둥 같은 것. 노점에 가까이 가지 않아도 바람을 타고 길거리 음식 냄새가 났다.
비가 올 듯 말 듯 한 날씨에 바닷가 특유의 습기가 섞여 공기는 무척이나 축축했다. 갈매기 한 무리가 바닥에 뿌려진 과자를 노리고 우르르 날아들어서 벽돌이 말끔하게 깔린 바닥을 뒤뚱뒤뚱 돌아다녔다.
이곳을 떠올렸을 때 막연하게 기대하던 그 분위기였다. 오래되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 같고,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아주 황폐해진 건 아닌 묘한 느낌.
주경이는 언제 생긴 건지 모를 괴이한 얼굴 조각상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현대미술이나 설치미술의 심오함을 알지 못하는 나에겐 약간 무섭게 생긴 구조물이었다.
“바닷가로 가 볼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걸어왔다. 난간 아래로 돌 축대와 바다가 보였다. 해초인지 이끼인지 모를 것들이 출렁거리고 과자 껍질 같은 쓰레기가 떠 있는, 진녹색의 불투명한 바다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비릿하고 짠 냄새가 훅 풍겼다.
멀리 유람선이 반짝이는 조명을 단 채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근처로 갈매기 떼가 요란하게 울며 날아다녔다.
“주경아.”
“네?”
“어, 여기 마음에 들어?”
채도를 낮춰 놓은 것 같은 한겨울 바닷가의 유원지. 예전에 본 그 동화 같은 내용의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왜인지 주경이도 이런 분위기를 좋아할 것 같다고 멋대로 짐작했다. 하지만 싫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보편적으로 누구나 좋아할 법한 느낌은 아니다.
강주경은 내 물음에 느리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저는 좋아요.”
“정말? 다행이다.”
“선생님은요?”
“나도 좋아.”
느리게 물결치는 바다를 잠시 보고 있던 그가 내 쪽으로 손을 약간 내밀었다.
“손잡아도 돼요, 선생님?”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희미하게 웃은 주경이가 내 손을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한적한 바닷가를 잠시 걷다가, 차이나타운의 오래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속이 텅 빈 달콤한 빵까지 사서 서울로 돌아왔다. 별로 돌아다니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9시가 지나 있었다.
오랜만에 차를 타고 나갔다 와서인지 이대로 집에 돌아가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말하자 주경이는 목적지를 정하고 가자며 길가에 잠시 차를 세웠다. 이 시간에 갈 곳이 어디 있을까. 남산, 63빌딩, 한강 공원…… 아.
“그럼 중앙박물관 갈까?”
“박물관이요?”
강주경이 ‘이 시간에?’라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박물관을 보러 가는 건 아니었다.
“거기 야경이 예뻐. 좋아하는 곳인데 가 본 지 오래됐네.”
박물관과 극장 사이에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곳이 있다. 남산이나 63빌딩만큼 높은 건 아니지만, 거기서 보는 풍경도 꽤 좋았다. 이 시간이면 아직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약간 신이 나서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있는데 강주경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무심코 돌아본 순간 입술이 맞닿았다.
“음, 잠깐만…….”
내비게이션 위에 있던 손이 화면에 헛손질을 몇 번 하다가 더듬더듬 위로 올라갔다. 혀가 입술을 벌리며 가볍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 주고, 입을 벌리자 입맞춤은 천천히 깊어졌다. 점막이 쓸리면서 젖은 소리가 아무런 음악도 틀어 두지 않은 차 안을 채웠다.
이내 입술이 완전히 맞물리고,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워졌다. 혀가 얽혀 서로 조금이라도 더 닿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입술이 잠깐씩 약간 떨어질 때마다 내 입에서 신음 섞인 가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어쩌지. 그만해야 하는데. 차 안이라고 해도 아직 바깥인데. 그런 상식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오가다 점점 흐려졌다. 한적한 길가에 덩그러니 세워진 검은 차량이 수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거나, 선팅을 짙게 했지만 혹시나 바깥에서 안이 보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나, 그런 게 전부 사라질 정도로 지나치게 기분 좋았다.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내 것은 그대로 있으니 주경이의 것이겠지. 가까이 다가오겠다는 신호와 같았다.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그가 손을 뻗어 내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날개 뼈에서 등을 따라 더듬어 내려가는 손길에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그 손가락이 느릿느릿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기대감으로 배 속이 지잉 울렸다. 아, 안 돼. 이제 정말, 더는 안 되는데. 정말로, 하지만…….
휘청거리던 자제심과 상식을 단숨에 다시 일깨운 건 축축한 소리만 가득하던 차 안을 요란하게 울린 휴대폰 진동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강주경에게서 떨어졌다. 차 안에서 정신없이 키스하던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서늘해졌다.
“저, 전화.”
나는 그렇게 웅얼거리며 콘솔박스에 내팽개쳤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옷 속이 아니라 여기에 있어서 진동이 더 크게 들린 것 같다. 허둥지둥 화면을 확인하자 서호 선배였다. 당황을 채 지우지도 못한 상태로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눌러 버렸다. 그 직전에 강주경이 몸을 뒤로 기울이면서 짧게 숨을 골랐다.
“여, 여보세요. 선배?”
목소리가 잔뜩 튀었다. 내가 통화하는 동안에도 주경이가 손을 멈추지 않고 날 만지면 어떻게 하지, 그런 걱정인지 기대인지 모를 것이 겨우 사라졌다. 사라지고 나서 생각하니 기대였던 것 같다. 나도 큰일 났다, 진짜.
-지원아, 밤늦게 미안해.
“아니에요.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선배는 무척 난감한 목소리였다. 오늘 야근이라는 말은 없었고, 게다가 주위가 유독 시끄러운 게 술집인 듯했다. 서 교수님이 술을 사겠다고 했는데 그게 오늘이 된 모양이다. 평소 같았으면 술을 사도 교수님은 안 드셨겠지만…… 선배가 내게 전화를 했다는 건 오늘 그 술자리가 평소와 달랐다는 뜻이다.
-진짜 미안해. 서 교수님이 널 찾아서…… 어휴, 어떻게 하냐, 이걸.
선배의 목소리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며 미안해하는 게 뚝뚝 묻어났다. 매년 있는 일이지만 선배는 그때마다 나에게 너무 미안해한다. 아무리 내가 선배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라고 말해도.
“선배, 괜찮아요. 저 금방 갈게요. 어디에 계세요?”
-병원 근처. 교수님이 너 와 봤던 가게라고 하는데…….
“아. 어디인지 알 것 같아요. 그 좀 특이한 가게죠?”
-응, 맞아. 교수님. 교수님, 좀 일어나 보세요.
선배는 정신도 없어 보였다. 옆에서 민소라 선생님의 목소리도 들렸다. 다들 그 일에 대해 알고, 서 교수님을 이해도 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저…… 차 안 막히면 40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교수님 많이 취하셨어요?”
-응. 오늘은 또 유독 취하셨네. 거의 꼼짝도 못 하고 계셔.
“최대한 빨리 갈게요.”
-지원아, 진짜 미안해.
“선배가 미안해할 일 아니라니까요. 정말이에요.”
곧 가겠다는 말로 전화를 끊고 나니 강주경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같은 차 안에 주경이가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는 차분한 표정이었지만, 내 통화를 듣고…… 기분이 좋았을 것 같진 않다. 절대로.
“주경아.”
“네, 선생님.”
“미안해…… 나 잠깐 다녀올게.”
“서 교수님한테요?”
“……응.”
주경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선생님이 꼭 가셔야 하는 거 아니잖아요. 옆에 다른 분들도 계신 것 같은데.”
“…….”
그것에 대한 설명을.
설명을, 하려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전부 환자에 대한 것이다. 환자에 대한 것이고, 서 교수님과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남은 후회와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대한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어디까지 주경이에게 말해도 괜찮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은 무엇 하나 그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내용은 없다. 조금이라도 그가 내 행동을 수긍할 수 있도록, 필사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일 수도 있다.
내 머릿속에 수많은 말과 문장이 떠돌았다. 은재, 교수님, 그 해의 겨울, 나…….
“미안해. 내가 가야 해.”
망설임 끝에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결국 그것뿐이었다.
그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뿐이라고, 그렇게 분명히 고백했다.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불안을 가지는 법이다. 몇 마디 말과 그때 분명 오간 끓어오르는 감정과, 몸을 겹치며 서로가 닿았던 내면, 그 모든 걸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느 한순간의 균열이 불안을 끝없이 키운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나와 강주경의 관계가 오래도록 이어졌다면 느끼지 않았을 불안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주경이에게 긴 시간을 전부 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주경이는 벌써 오래전부터 내게 자신의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만나서 함께한 절대적인 시간은 아직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불안의 크기는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아질 텐데, 우리가 보낸 시간은 강주경의 불안을 잠재워 주기엔 너무 짧다.
“서 교수님이 취했는데, 선생님이 꼭 찾아가야 한다는 게.”
“……응.”
“저는……, 솔직히 말하면 이유를 모르겠어요.”
“네가 맞아. 하지만…… 미안.”
강주경은 오래도록 나를 쳐다보았다. 거기에 짜증이나 화, 그런 종류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주경이의 새카만 눈에는 상처가 떠올라 있었다. 서로 무슨 말도 하지 못한 채 짧은 침묵이 지나가고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저는, 그냥…… 선생님한테 어리광 부린 거예요. 죄송해요. 알아요. 선생님이 제게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 건, 그건 선생님 스스로 정해 놓은 규칙 때문인 걸. 저는 그런 선생님도…… 사랑하니까요.”
띄엄띄엄 말하는 목소리는 분명 진심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이란 원래 정반대의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 주경이는 저 말을 진심으로 하면서, 연인을 두고 다른 남자가 술에 취했다고 해서 달려가는 내게 서운함과 질투 또한 느끼겠지.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 쪽으로 몸을 뻗었다. 그리고 아직 촉촉하게 부어 있는 그의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강주경이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집에 가서 기다려 줄래? 너무 늦지 않게 올게.”
그는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말했다.
“제 차 타고 가세요.”
“아니야. 거기 차 들어가기도 어려운 골목이라서. 택시 타고 갔다 올게. 음…… 술 조금 마시고 올지도 모르고.”
“…….”
“주경아…….”
교수님이 걱정된다. 지금도,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주경이가 걱정되었고, 주경이가 내게 화를 내는 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떠올리는 게 이상하지만 나는 강주경이 내게 무언가 말할 때마다 머뭇거리거나 어려워하는 게 왜 그랬던 건지 이해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한테 화가 나지 않을까, 라는 불안은 생각보다 더 큰 거구나.
잠시 오가는 메시지가 짧아졌을 때 느낀 그 기분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나는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주경이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선생님.”
“……응.”
“그건 끝까지 말 못 하는 일이에요?”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끝까지 말하지 못할 일…… 어쩌면 그렇진 않을지도 모른다. 벌써 4년. 이 정도면 시효인지도 모른다. 다만 아직 서 교수님은 그날에 멈춰 있다. 그러니 교수님이 거기서 벗어날 때, 그때가 진짜 시효가 되지 않을까.
“언젠가는.”
“……네.”
주경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이번엔 그가 먼저 내 뺨에 입을 맞췄다.
“병원 근처라고 하셨죠. 정확히 어디예요?”
“아. 공원 앞으로 가면 돼. 거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가게 있거든.”
그가 택시 호출 앱에 목적지를 입력했다.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택시가 잡혔다. 3분 후 도착으로 되어 있다.
휴대폰을 콘솔박스에 내려놓은 주경이가 내 옷차림을 정돈해 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며 구겨진 니트를 바로 한 그는 뒷좌석에서 내 점퍼를 집어 입혔다. 지갑과 휴대폰만 주머니에 넣고 택시가 오기를 기다렸다.
“입술은…… 금방 가라앉겠네요.”
“으응.”
잔뜩 부풀었던 입술은 접촉이 사라지자 조금씩 원래대로 가라앉아갔다. 병원 근처에 도착할 무렵엔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곧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 강주경의 팔을 살짝 잡았다.
“집에서 만나, 주경아.”
“……네.”
그 대답까지 듣고 차 문을 닫았다. 내가 택시에 올라 출발하고, 더 이상 그 자리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강주경의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 * *
“교수님. 교수님, 제 말 들리세요?”
“아……, 아. 지원이. 우리 지원이 왔구나. 어디 갔었어어.”
교수님은 얌전히 누워 있는 것 같더니 내가 와서 깨우자 느릿한 목소리로 말하며 날 끌어안았다. 술 냄새가 보통이 아니었다. 교수님은 평소엔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시기가 되면 한두 잔쯤 마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듯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에 취하곤 한다.
그 좁은 가게에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서호 선배와 민 선생님, 나, 셋이 끙끙거리며 교수님을 차까지 끌고 갔다. 뒷좌석에 늘어지듯 앉은 교수님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뭘 찾기 시작했다.
“음, 지원아, 내 전화…… 내 휴대폰 어디 있지? 은재가 전화했을지도 모르는데. 나 받아야 하는데…….”
은재. 현은재. 여기에 있는 모두가 그 아이의 이름을 안다.
“한 선생……, 지원아. 은재가 나한테 전화했으면 어쩌지? 또 못 받으면. 응? 어떻게 하지, 지원아?”
내 옷자락을 붙잡던 교수님은 결국 나를 끌어안았다. 전화를 못 받으면, 그래서 은재가 더는 전화를 걸지 않으면. 그런 말이 교수님의 입에서 계속 쏟아졌다.
그 아이의 전화를 받지 못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마도…… 은재가 통화하기를 원하던 사람은 교수님이었을 것이고, 교수님이 그 아이의 전화를 받았다면, 아마…….
“지원아, 나 어떻게 하지. 은재야…….”
교수님이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3년이나 지난 기억은 아직도 흐려진 부분 하나 없이 선명하다.
─현은재가 폐쇄병동에 입원한 것은 가을,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무렵이었다. 열일곱 살. 검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청소년 우울증일 거라 생각했으나, 결과는 생각보다 너무 심각했다. 학업이나 대인관계, 그 이상으로 아주 어릴 때부터 집요하게 마음을 갉아먹은 수많은 불행이 그 애를 짓누르고 있었다.
중증 우울장애. 그리고 모든 지표에서 죽음을 간절히 바란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미 몸을 씻거나 남이 말을 걸었을 때 대답할 에너지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검사 내내 고요하던 은재는 폐쇄병동 입원이 결정되었다. 담당의는 서 교수님이었다.
나는 2년 차 수련생으로, 혼자서 자신감이 붙어 여유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1년 반이 넘게 일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한 사람 몫은 한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일이든,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데도 긴장이 풀리고 짐짓 내 실력에 자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 2년 차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은재의 검사를 마친 후 어린 나이에 이 정도로 심각한 우울장애를 가진 환자에게 사적인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그것을 드러내려 하진 않았다. 그저 그 아이가 깨어 있을 때는 내내 죽고 싶다는 생각만 한다는 게 안쓰러웠을 뿐이다.
하지만 서 교수님은 조금 달랐다. 교수님의 여동생은 은재와 비슷한 나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사고가 나기 전에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게 사고였는지, 자살이었는지 교수님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교수님은 은재에게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가르쳐 주고, 다른 환자보다 꽤 자주 그 아이를 찾아갔다. 자신을 옥죄는 병증에 갇혀 폐쇄병동에서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보내던 은재는 자신을 치료해 주는 사람이 분명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자 쉽게 서 교수님을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교수님도 알고 있었지만 은재는 그에게 지나치게 특별했다. 나이도 병증도 여동생과 같은 아이. 교수님은 은재에게 죽은 여동생을 투영해 점점 더 안쓰럽고 안타깝게 여기고, 병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랐다.
또한 선배로서 의사로서 교수님을 무척이나 믿고 따르던 나 역시 교수님의 감정에 휩쓸리듯 은재를 특별히 생각하게 되었다.
환자를 가리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 고정관념을 가져선 안 된다. 철저하게 배우는 사항이지만 나와 치료면담을 할 때, 몇 회기를 지나서 겨우 한두 번씩 호전의 기미가 보일 때면 기뻤다. 면담이 없을 때도 가끔 환자의 상태를 본다는 명목으로 병실에 올라가곤 했다.
면담 외의 만남 때문에 민소라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으러 갔을 때였다. 선생님은 드물게도 인상을 찌푸렸다.
‘한 선생, 환자를 잘 챙기는 건 좋은데…… 지금 지나쳐. 나 지금 한 선생이 현은재 환자한테 전화번호 주겠다고 한 거, 그거 허락한 게 후회될 정도예요. 한 선생이 지금 병원 일 너무 잘해 주고 있는 거 사실이야. 그런데 그렇게 잘하던 한 선생인 만큼 내가 이번 일은 당황스러워요. 혹시, 현은재 환자한테 마음 있거나 그래요?’
‘아, 아니요. 아니에요, 선생님.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환자한테 잘하려고 하는 걸로 혼내는 거 아니에요. 걱정이 되는 거지. 지나치게 몰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뭐, 한 선생 그럴 사람 아닌 거 나도 아니까 연애 감정 쪽으로는 아예 배제하고 생각할게요. 면담 외에는 되도록 방문 자제하고, 혹시 연락 오더라도 너무 자주 받아 주지는 말아요.’
사실 그런 주의를 한 건 민 선생님이 처음이 아니었다. 서호 선배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환자한테 개인적으로 감정 주면 절대 안 된다고 배웠잖아. 한지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환자가 퇴원했을 때 우리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게 하는 거라고. 환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건 우리 몫이 아니야. 환자랑 앞으로 같이 살아갈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야. 너도, 교수님도 지나쳐.’
나뿐 아니라 교수님에게도, 그것보다 말투가 더 정중한 같은 말을 했다. 주위에서 계속 주지시킬 정도로 교수님과 내가 은재를 특별 취급한 것은 분명했다.
그 후로 나는 은재를 다른 환자와 똑같이 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해가 바뀌기 조금 전에 은재의 퇴원이 결정되었다. 자살 사고가 유의미하게 줄어들었고, 잘 맞는 약을 찾아서 우울과 불안증상도 약물 치료가 적절히 이루어지는 중이고, 무엇보다 은재의 가족이 퇴원을 원했다.
은재의 우울증은 가족의 학대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래서 가급적 가족들과 분리하고 싶어 센터 같은 곳도 알아보았지만, 은재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가족검사도 이미 마친 데다 그 결과를 알려 주면서 가족도 심리치료를 어느 정도 받았다. 은재에게 잘못한 게 많았던 것 같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그래서 퇴원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교수님은 교수님대로 마음을 정리한 것 같았다. 서호 선배나 주위의 다른 교수들의 계속되는 말에 자신이 은재에게 동생을 투영하고 있다는 걸 인정한 후로 은재를 신경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더 큰 이유로는, 은재가 교수님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기 시작해서였다.
힘들고 지친 아이가 자신을 돌봐주고, 고통에 관심을 가져 주고, 공감해 주는 어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환자는 의사가 주는 위로에 쉽게 흔들린다. 치료를 위한 행동에서 애정을 느끼고 만다.
때문에 정신과의 의료진은 환자와 연애나 성적인 관계로 엮일 수 없다. 규정도 규정이지만, 치료자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 환자의 불안정한 상황과 심리를 알면서 그 마음에 응하는 건 아픈 사람의 의존을 이용하는 일이다.
하지만 은재는 교수님과 그런 관계가 되기를 바랐다. 혼자서 나름대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고, 간호사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은재가 찾아낸 것은 치료가 끝난 후 일정 기간이 지날 때까지 환자와 의료진은 가까워질 수 없다는 자료였다. 그것을 은재는, 그 기간이 지나면 교수님과 연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무렵이면 자신은 더 이상 미성년자도 아니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교수님을 연애 대상으로 좋아하게 되면서 병세도 눈에 띄는 호전을 보였다. 퇴원 전에는 회진이나 교수의 면담 때마다 서 교수님 앞에서 수줍어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오랜 시간 사람을 무서워해 온지라 더듬거리고 어눌한 말이었지만, 말하는 것이 즐거워 보인 것은 분명했다.
은재는 나와 교수님에게 조심스레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빨리 완치되고 시간이 흐르면 교수님에게 고백하고 싶다고. 이 말에 교수님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눈앞에 있는 게 죽은 동생이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의 환자임을 간신히 다시 인식했다.
은재는 퇴원한 후 일주일에 한 번씩 외래로 내원했다. 그때마다 나름대로 열심히, 말끔한 차림으로 왔다. 그리고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서 교수님에게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교수님은 딱 의사가 보일 수 있는 친절로 은재를 대했다.
그리고 그날.
무척 추운 날이었다. 작년 대비 최저기온이라며 뉴스에서 무척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그때쯤…… 나는 은재의 심리치료를 하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은재는 나에게 뭔가를 감추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꾸미고 위생 상태도 좋고, 아직 크게 호전된 건 아니지만 극도의 무기력 상태에서는 벗어나 약물로 일상생활은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되었다.
여전히 더듬거리는 말투. 눈을 잘 마주치진 못했지만 순탄한 치료였다. 하지만 그 느낌은, 불안함이라고밖에 말할 수 있는 기분은.
은재를 만날 때마다 나는 이유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은재가 진료와 심리치료를 마치고 돌아간 날이었다.
저녁 여섯 시쯤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부재중 전화가 한 통 들어와 있었다. 은재의 번호였다. 바빠서 전화가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이름을 본 순간 은재를 만날 때마다 느끼던 불안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다시 걸까 하다가, 우선 그냥 두었다. 번호를 알려 주고 연락이 온 건 처음이었는데, 번호 알려 주게 한 걸 후회한다는 민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머뭇거렸으나 선생님의 허락을 받은 후에 다시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거는 건 어차피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은재는 그날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자살했다.
유서에 쓰인 건 어두운 과거도 자신이 겪는 고통도 아닌, 유일하게 원했던 한 가지뿐이었다.
원망의 말조차 아니었다.
이제 자신은 지쳐서 모든 걸 그만두게 되었지만, 그래도 이 사실만은 알아주기를 바란다고.
장례식장에서 서 교수님은 고요했다. 울지도 않고 차분하게 은재의 영정 앞에서 절하고, 향을 올렸다. 은재의 가족들은 멍한 얼굴이었다. 누군가가 은재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은재가 불효를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불효’라는 말에 놀랐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멍해졌다. 그들은 은재가 죽은 다음 날,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날까지 은재를 혼자 두었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은재에게 잘할 거라고 말하던 은재의 부모님은 다른 두 딸만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서 살고 있었다. 아무도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어린아이를 그렇게 내몰지 않았을 것이다.
은재의 가족이 퇴원을 요구한 건 ‘가족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사실을 빨리 지워 버리기 위해서였다. 초기 가족상담에서도 그들은 은재가 유별나고 유난하다고 말했었다. 그 유별나고 유난한 아이를 은재의 자매들,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상적인 아이들’과 떨어뜨리고 싶어서 은재를 가족의 틀 안에서 밀어내 치운 것이다.
통원하는 동안 은재는 겉으로 보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가족들이 자신을 두고 사라진 것도 말하지 않았다.
은재가 바란 건 하나였다. 빨리 회복하고 완치돼서 서 교수님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그의 곁에 있는 것. 가족에게서 얻지 못한 애정을 얻는 것.
은재는 서 교수님과 내 앞에서 점점 더 밝은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고 있었다.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 기분이 괜찮다, 불안하지도 않다, 차분한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완치 판정은 검사를 거쳐 더 조심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걸 모르던 은재는, 그런 식으로 최선을 다했다.
그날 내게 전화를 걸기 전에 은재는 서 교수님에게 먼저 전화했다. 교수님은 전화가 온 걸 알았지만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를 계속 상기하면서, 은재는 죽은 동생이 아니라는 말을 되뇌면서. 전화 수신 화면이 이어지는 내내 교수님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두 번째로 울릴 때까지……, 세 번째 전화가 오면 받으려 했다.
하지만 그 세 번째는 걸려 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걸어 보았으나 은재의 휴대폰은 통화 중이었다. 은재는 그때 나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결국 연결되지 않은 전화를.
그리고 은재는 그다음에는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한 번도 연결되지 않은 세 번의 통화 끝에 은재는 휴대폰을 강물에 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느릿하게 난간 위로 올라갔다.
CCTV에 남은 은재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은재가 죽고 화장까지 마친 뒤에 불쑥 은재의 외조모가 나타났다. 어릴 때 은재를 키운 외조모였다고 한다. 그 후 은재의 부모와 의절하면서 지금까지 떨어져 살았고, 뒤늦게 은재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부모님과 외조모 사이에서 한바탕 다툼이 있었다. 그 끝에 외조모는 은재의 유골함을 안고 자신이 사는 대전으로 갔다.
은재가 할머니와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다못해 가족들이 은재를 버리고 갔을 때라도 알았다면.
그날 교수님이 전화를 받았더라면.
……내가 전화를 받았더라면.
우습게도 은재는 자살방시 서약서를 써 두었다. 수술 동의서, 그런 비슷한 종류다. 자살하더라도 의료진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겠다는. 그 서약서를 보고 있자니 우스웠다. 어떻게든 죽음을 막아야 할 의료진이, 자살해도 전부 내 책임입니다, 라는 서약서를 쓰게 한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을 보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환자에게 주어지는 몇 개의 전화번호. 119, 생명의 전화, 자신의 상담사, 담당의……, 은재는 교수님과 내게만 연락을 했다. 어쩌면, 교수님이나 나는 은재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교수님과 내가 은재의 전화를 받지 않은 일에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은재의 가족들 역시 조용했다. 집에 아이를 혼자 둔 책임이 돌아오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듯했다.
병원은 은재가 서 교수님에게 지나친 연애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들어, 전화를 일부러 피한 건 상황으로 보아 합리적 판단이었다고 말하며 큰 징계도 내리지 않았다. 수련생이었던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와 서 교수님은 큰 징계 대신 심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교육상담, 자기분석, 상담자 치료……, 죄책감으로 가득한 시간이 지나갔다.
교수님이 나를 계속 찾는 건 아마도 마찬가지로 은재의 전화를 받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은재가 입원해 있을 때 셋이 함께 있었던 적도 많았기에, 나를 보며 은재를 떠올리기도 하고.
그나마 나는 은재의 죽음을 어떻게든 묻을 수 있었지만 서 교수님은 아니었다. 은재가 죽은 시기가 되면 불안정해진다. 술을 마시고, 때로 오늘처럼 은재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고, 심하게 우울해지고. 처음에 서 교수님의 전담팀까지 만들어야 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정말 많이 나아진 것이다.
1년, 2년, 3년…… 올해로 4년. 시간이 흐르면서 서 교수님도 점점 나아져 가고는 있었다. 시간은 모든 일 위에 공평하게 새로운 기억을 쌓아 놓는다.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서 교수님도 은재를 떠올리며 슬퍼하긴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12월 무렵이 되면 우울증에 시달리진 않겠지.
남겨진 사람들은 그렇게 잊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한참 나를 끌어안고 있던 서 교수님은 완전히 잠들었다. 민 선생님은 거기서 돌아가고, 대리 기사를 불러 서호 선배와 함께 서 교수님 집으로 갔다.
선배도 은재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느끼는 사람 중 하나였다. 선배가 교수님에게 은재와의 관계에 대해서 몇 번이고 이야기했으니까. 일전에 선배도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교수님은 은재가 건 전화를 받았을까?
하지만 우리 모두 ‘그러지 않았다면’이 얼마나 의미 없는 말인지 잘 알고 있다.
선배와 둘이서 교수님을 겨우 들어 집 침대에 눕혔다. 기진맥진해서 재킷과 넥타이를 풀어 주고, 양말을 벗기고, 그 위에 간신히 이불만 덮어 놓았다.
술을 이렇게 마셨으니 아침까진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침대 옆 협탁에 큰 물통과 컵을 가져다 두고 일어섰다.
“선배, 택시 타고 가실 거죠? 같이 나가요. 출발하시는 거 볼게요.”
“아냐. 집에 연락했어. 선호가 데리러 나온대.”
“지금요? 바쁘신 거 아니에요?”
“얘들도 쉬는 기간이 있거든. 2월까지는 휴가야.”
“와. 부럽다.”
실없는 소리를 하며 교수님의 집을 나섰다. 언제 연락했던 건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이미 선배 동생이 도착해 있었다. 택시 타고 가면 된다고 했는데 선배가 미안해서 그렇겐 안 되겠다며 나를 반쯤 끌다시피 뒷좌석에 태웠다.
“죄송해요, 저까지.”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누나가 갑자기 불러냈다고 하던데.”
“아뇨, 그건 뭐…….”
선배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선배보다 한참 어리지만 선배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음에 경기 보러 오세요. 누나 통해서 티켓 보내 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배도요.”
“응, 지원아. 오늘 너무 고생했다. 내일 만나.”
차가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깨에서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터덜터덜 올라가서 문을 열자, 강주경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현관 앞에 서 있었다. 그와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반대라는 걸 빼면 며칠 전이랑 상황은 비슷한데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힐끗 소파 쪽을 보자 책 한 권이 놓여 있다. 내내 거실에서 기다린 모양이다.
“나 왔어, 주경아…….”
조금 우물쭈물하며 서 있자 주경이는 성큼 다가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묘하게 안도하면서 숨을 내쉬는데, 목덜미에서 코를 한 번 울린 주경이가 몸을 움찔했다.
“……주경아?”
“선생님.”
“으응.”
“선생님한테서…… 서 교수님 향수 냄새 나요.”
갑자기 주위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교수님과 꽤 오래 끌어안고 있긴 했다. 향수 냄새가 그렇게 쉽게 배는 게 아니라는 건 주경이도 잘 알 것이다. 그렇다고 교수님이 취해서 계속 안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정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강주경이 나를 안아 들었다.
“주, 주경아.”
“씻겨 드려도 돼요?”
그 말에 나는 멍하니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마주 본 주경이의 눈은, 속상함도 있고 화도 있고 여러 감정이 잔뜩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강주경이 골라낸 말은 씻겨 줘도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미안. 미안해, 주경아. 그냥 교수님이 너무 취해서. 그래서 날 좀 끌어안고 있었고, 거기서 또 집까지 부축해서 가느라 그런 거야.”
결국 나는 전부 줄줄 털어놓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솔직하게. 욕실로 들어가려던 주경이는 문득 발을 멈추고 날 보았다.
“끌어안은 건…….”
“으, 응.”
“선생님이 말씀하신, 아직 말할 수 없는 부분 때문인 거죠?”
“…….”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강주경은, 그럼 됐어요, 라고 속삭이곤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괜히 속이 상했다.
“주경아, 나한테 화내도 괜찮아.”
주경이를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는 화가 날 상황인 게 맞는데도 너무 다정했다. 강주경이 다정한 만큼 나는 미안해졌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날 욕실로 데리고 가서 욕조 가장자리에 앉히고는, 그 앞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선생님.”
“으응.”
“선생님도 언제나 다정하시잖아요.”
“내가?”
“저한테든, 다른 사람한테든.”
그랬나. 그렇지도 않은데. 나는 짜증도 많이 내고 화도 많이 내는데.
“그래서 저도 선생님한테 다정해요. 선생님이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다정하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가 내 뺨과, 향수 냄새가 난다고 했던 목덜미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선생님은…… 절 좋아한다고 하셨으니까. 그 말 한마디로 저는 선생님이 뭘 하든 믿을 수 있어요. 아까는.”
커다란 손이 내 옷을 하나씩 벗겼다. 성적인 느낌은 없이, 정말 씻겨 주려고 천천히 벗기는 느낌이었다.
“아까는, 음. 투정 부린 거예요.”
“투정…….”
“네.”
이 커다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다소 어울리지 않는 단어에 난 한 타이밍 느리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해.”
나는 차에서 보았던 주경이의 눈을 떠올렸다. 분명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 역시 이해하면서도 상처를 숨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그에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물을 은재는 이미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리고 그 앞에서 나는 몇 번이나 지켜야 할 윤리, 보호해야 할 환자, 내 역할과 책임, 그런 것에 대해 떠들었다. 그런 내가 저지른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털어놓는 것은, 내게는……, 시효는 교수님이 그 일에서 벗어났을 때라고 생각했던가? 허울 좋은 생각이었다. 결국 나는 은재와 교수님을 핑계로 주경이에게 내 잘못을 감추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사과 받아드릴게요.”
뺨에 다시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내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거라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내가 정해 놓은 규칙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걸 안다고. 그런 나도 사랑한다고.
나야말로 주경이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규칙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나는 용기가 없을 뿐이다. 은재의 죽음이 내 안에서 남에게 고백하느니 마느니 할 사건이 되어 버린 것도 부끄럽고 미안했다.
“고마워…….”
은재에 대해 전부 말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주경이에게 내 잘못을 털어놓을 준비는 해야 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고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준비를.
* * *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서 한참 뒤척이다가 새벽쯤 겨우 잠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자 주경이가 없었다. 자기 방이나 주방에 있나, 하고 찾으러 일어났다가 협탁을 보고 도로 침대에 앉았다.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나간다는 메모가 차 키와 함께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언제 나간 거지?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약간의 불안을 느끼며 휴대폰을 들었다. 다행히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주경이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 있어?”
-잠깐 볼일이 생겨서요……, 별일 아니에요.
“차도 없이…… 정말 괜찮아?”
-네. 그리고 선생님.
“으응?”
-가능하면 오늘…….
거기까지 말하고 강주경은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오늘, 왜?”
-휴대폰으로는 되도록 전화만 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주 확인하지 마시고요.
“으으응?”
점점 더 이상했다.
-자세한 건 저녁에 말씀드릴게요.
“응, 알겠어.”
전화를 끊고 나서 아무리 생각해도 휴대폰을 되도록 확인하지 말라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괜한 말을 한 건 아닐 테니. 어차피 아주 급한 연락은 전화로 오고, 업무와 관련된 내용은 사내 메신저로 주고받으니까. 원래 주경이랑 사귀기 전까지는 휴대폰을 자주 보는 편도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차를 운전하는 건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비싼 차를 어디다 긁어 버릴까 봐 걱정도 됐고, 차체도 원래 내가 타고 다니던 것보다 높아서 자꾸 나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이게 됐다. 덕분에 출근하는 것만으로 제법 피곤해지고 말았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깨어나 출근했기 때문인지 심리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커피를 탕비실에서 대강 끓여서 나올지, 내려가서 사 올지 고민하고 있는데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약간 멍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어쩐 일로 이정주가 일찍 출근을 했다.
나와 마주친 이정주는 왜인지 몸을 움츠렸다. 옆으로 홱 돌아가는 눈을 보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게 어디다 내 욕이라도 써 놓고 다녔나?
“안녕.”
“…….”
이정주는 내 인사에 우물쭈물하더니 대답도 없이 다시 나가 버렸다. 아니, 출근했으면서 다시 나가면 어쩌자고…….
카페까지 내려가는 것도 귀찮아져서 탕비실로 들어가려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자 서 교수님이 양손에 음료 캐리어를 든 채 서 있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눈 밑이 시커먼 게 엄청난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와서 기다리려고 했더니, 벌써 출근했네.”
“좀 일찍 일어났어요.”
교수님이 사 온 커피를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거나 했다가 도망친 사람들의 책상에 하나씩 가져다 두었다. 병원 카페에서 파는 쿠키 종류는 일찍 다 팔리는데, 그것도 인원수대로 차곡차곡 다 들어 있었다.
“어제 미안해. 잘 들어갔어?”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먹는 단것은 언제나 반갑다. 나는 비스코티 봉투 껍질을 까면서 대답했다.
“잘 들어갔죠. 아, 서호 선배 동생이 데려다줬어요. 잘생겼더라고요.”
“아이고, 미안…….”
“헉,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그래도 교수님은 끙, 하며 몸을 구부렸다.
“숙취 심해요?”
“죽겠어.”
“그래도 술 냄새는 하나도 안 나시네요.”
“응. 샤워 한 시간 동안 했거든.”
대체 몇 시에 일어난 거지? 대단한 의지력이었다.
“연례행사네, 진짜.”
“올해는 좀 조용하셨죠.”
“그래. 전보다 좀 괜찮은 것 같아.”
해가 바뀌어 가면서 확실히 조금 나아지고 있었다. 술을 마시는 빈도도 줄어들었고, 아마 올해는 어제 그것으로 끝인 듯했다. 1주기에는 알코올중독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는데.
“어제 그 꼴 보이고 말해도 못 믿겠지만, 시간이 약이긴 한가 봐.”
“그렇죠.”
안 잊어버리면 어떻게 살겠어요. 내 말에 교수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흐려지는 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방어의 수단일 것이다.
숙취를 카페인으로 누르려는 건지 그는 뜨거운 커피를 훌쩍훌쩍 마시며 말했다.
“오는 토요일에 대전 갈 생각인데.”
“토요일이요?”
바쁜 거 아니었나. 고개를 갸웃하자 교수님은 휴대폰을 흘끗 확인했다.
“그날 오전에 잠깐 시간 나거든. 얼른 다녀오려고. 너는 어떻게 할래?”
쉬는 날이고 별다른 일정도 없었다. 그러면 그날 같이 가자고 말하려 하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토요일이라면 주경이도 쉬는 날이다.
“교수님.”
“응?”
토요일에 강주경만 집에 두고 서 교수님과 둘이서 외출하는 게 꺼려졌다. 다른 날 간다고 말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교수님을 혼자 보내는 것도 조금 불안했다.
어쩌면…… 주경이를 은재에게 데리고 간다면, 자세한 이야기가 없어도 그는 내가 말하지 못한 것을 알아내지 않을까. 하지만 교수님은 나와 강주경의 관계를 모른다. 주경이와 같이 가는 이유를 교수님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아니, 차라리 교수님한테 설명하는 게 주경이를 집에 두고 가는 것보단 낫다. 그 결론에 도달한 내가 입을 열려 했을 때였다. 교수님이 들어오면서 닫아 두었던 심리실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지원아! 너 SNS……, 어, 교수님?”
문을 밀치며 심리실 안으로 굴러 들어온 건 서호 선배였다. 놀라서 커피를 떨어뜨릴 뻔했다. 병원 어디가 무너지기라도 했나? 교수님을 보고 잠시 당황했던 선배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요?”
“너, 이거 무슨 일인지 알아?”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휴대폰 화면을 내 앞에 들이밀었다. 익숙한 SNS 화면이었다. 나는 1년쯤 전에 계정만 만들어 두고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가끔 거기서 재미있는 글이 있다며 선배나 다른 사람들이 보여 주는 걸 볼 뿐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을 앞에 두고 선배가 뜬금없이 재미있는 글을 보여 줄 것 같지도 않고. 반쯤 반사적으로 화면을 들여다본 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게 뭐예요?”
-이중인격자
-교수한테 잘 보여서 자리 차지했지
-언제까지 무시하나 어디 보자
-착한 척하지 마라 역겨워
짧은 메시지 앞에는 전부 같은 아이디가 태그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후에야 그것이 내가 만들어 두고 잊어버린 내 아이디라는 걸 알았다. 갑자기 누가 나한테 원한이라도 가진 모양이었다. 환자인가? 아니면 보호자? 공개된 계정이니 아이디 알아내는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고. 선배의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쭉 올려 보던 나는 마지막 글에서 손을 멈췄다.
“무슨 일이야, 이게?”
같이 화면을 보고 있던 교수님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교수한테 꼬리 치니까 좋냐?
그 말과 함께 올라와 있는 건 폐쇄병동에서 교수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디서 누가 쳐다보는 기분이 들더라니. 환자가 아니고 폐쇄병동 간호사인가? 메시지는 신원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임시 계정에서 온 것이었다. 이 정도로 메시지가 왔는데 왜 내 휴대폰으로는 알림이 안 온 건지 모르겠다. 휴대폰을 집어 들고 뒤적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도 SNS 앱이 보이지 않았다. 접속을 안 할 뿐이지 앱을 삭제한 기억은 없는데.
삭제된 앱을 다시 받아서 확인하려 하자 로그인은 전부 풀어져 있고,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결국 선배의 휴대폰으로 내 계정에 보내진 메시지를 훑어보아야 했다. 메시지는 오늘 새벽부터 거의 백여 개가 넘게 들어와 있었다. 보낸 계정의 생성 시간도 그와 비슷했다.
“으음.”
“지원아, 어디서 원한이라도 샀어?”
“그런 것 같아요.”
“한 선생…… 역시 굿 하자.”
교수님의 진지한 물음에 대답하는 날 향해서 선배가 말했다. 심리실로 뛰어 들어올 때는 동요하고 있었지만 같이 메시지를 확인하는 동안 침착해진 것 같았다.
나는 미간을 긁적였다. 아홉수는 작년이었는데 왜 올해도 다 간 지금 이렇게 온갖 일이 다 터지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처음 스토커가 붙었던 이후 고작 한 달이 지났을 뿐인데. 재난의 압축률이 엄청났다.
“마가 끼었나? 굿 안 할 거면 부적을 쓰든 십자가를 가지고 다니든 해 봐. 성모상을 놓든지. 아니면 마늘 목걸이 같은 건 어때?”
“예? 환자가 무슨 흡혈귀인가요?”
그 후로도 선배가 온갖 종교를 나에게 권유했다.
SNS를 좀 더 살펴봤지만 나에게 보낸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노출되는 건 아니었다. 팔로우한 계정 중에서 댓글을 많이 받은 게시물이 위로 올라오는 시스템이라는데, 내가 계정을 만들고 선배한테만 알려 준 후에 잊어버렸기 때문에 소셜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미안해질 정도로 잊힌 공간이었다. 덕분에 끈질긴 댓글은 벽에 대고 외치는 혼잣말처럼 황량한 내 계정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교수님과 내 사진을 찍을 정도니까 병원 내부 사람인 건 확실했다. 일단 진료 시간이 다가와서 교수님은 병동으로 올라가고, 나는 보안팀으로 향했다. 이 사진이 찍힌 날 폐쇄병동 CCTV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멍청한 놈이었다. 병원 로비나 바깥이나, 누구에게나 눈에 띌 곳에서 찍힌 사진이라면 빠르게 특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찍은 사람도 출입이 제한되는 구역에 있었으니 그곳 CCTV만 돌려 보면 순식간이다.
“……병가요?”
하지만 CCTV를 보기도 전에 나는 예상하지 못한 일에 당황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나간 주경이가 출근을 했는지 물은 뒤였다. 강주경이 오늘 갑자기 병가를 냈다고 하는 것이다.
놀라서 잠시 보안실을 빠져나와 전화를 걸었다. 병가라니, 그럼 아침에 갑자기 아팠나? 아파서 갑자기 병원이라도 간 건가. 걱정하는 사이 그가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괜찮아? 아프면 말하지 그랬어…….”
내 물음에 강주경은 잠시 조용했다.
-아픈 거 아니에요.
“아니긴. 병가 냈으면서.”
-그건…… 그것도 저녁에 말씀드릴게요.
“으응?”
대체 무슨 일이야? 걱정이 산더미였다.
-다음에 한번 아파야겠어요.
“그건 또 뭐야.”
-선생님이 걱정해 주시니까 좋아서요.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이런 말 하는 거 보니 정말 안 아픈 건 맞는 모양이다. 목소리도 멀쩡하고. 아니, 그래도 진짜 아픈 거면 어쩌지? 지금도 걱정할까 봐 괜히 그러는 거고.
-오늘은 정말 아픈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응?”
-휴대폰은 안 보고 계신 거죠?
이번엔 강주경이 걱정하는 말투였다.
그 말에 퍼뜩 머릿속에서 생각이 연결되었다. 오늘은 전화 말고는 되도록 휴대폰을 보지 말라고 했던 말, 새벽에 말도 없이 나간 것, 오늘 새벽부터 왔던 메시지, 내가 삭제한 기억이 없는데 휴대폰에서 사라진 SNS 앱.
“주경아, 혹시 무슨 일 있는 게 네가 아니고 나야?”
-…….
조용해졌다. 어쩐지 알림이 안 왔다 했더니, 새벽에 미친 듯이 쏟아졌고 그걸 주경이가 본 모양이다.
“이런 일도…….”
없는 건 아니야, 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내가 그럴 때마다 수심에 잠기는 얼굴이 떠올라서.
“응. 저기, 위험한 일 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알겠어.”
뭘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주경이도 뭐든 생각이 있겠지. 저녁에 말해 준다고 하니 기다리면 된다. 전화를 끊고 다시 보안실로 들어갔다.
“폐쇄병동 CCTV 좀 볼게요.”
보안팀 직원은 별다른 제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잠시 내려다보던 강주경은 고개를 돌렸다.
새벽에 내내 뒤척거리던 한지원은 네 시가 다 되어 갈 무렵 간신히 잠들었다. 생각이 많은 게 분명했다. 눈을 감았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떠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걸 느끼고 품에 안아 등을 토닥거렸지만 잠들기까지는 꽤나 오래 걸렸다.
간신히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았을 때 갑자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지원의 휴대폰이었다. 깨어나기라도 하면 안 될 텐데, 누가 이 시간에 연락을 하지, 또 서 교수인가.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확인하자 전화나 메시지가 아니라 SNS 알림이었다.
원래 설정이 그런 것인지 잠금을 해제하지 않았는데도 내용이 전부 보였다. 인상을 찌푸리며 눌러 보자 곧바로 화면이 넘어갔다. 알림은 메시지라도 오듯이 빠르게 쏟아졌다. 대부분 지저분한 내용이었다. 한지원이 읽지 못하게 하고 싶을 정도로.
이걸 어떻게 하지. 잠시 고민하던 강주경은 계정 정보를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송한 뒤 SNS 앱을 삭제했다. 시끄럽게 울리던 진동이 간신히 잠잠해졌다.
다행히 깨어나지 않은 한지원은 고개를 베개에 파묻다시피 한 채 잠들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뺨에 손끝을 올려 보았다. 전화를 받고 급하게 서 교수에게 향했던 그는 돌아오자마자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쏟아 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한마디도 필요하지 않은데.
강주경은 한지원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한지원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는 그렇게 미안해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거의 설명하지 않았다. 만약 그게 환자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한지원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건, 그 안에 자신의 이야기도 섞여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도 그 과거에는 한지원이 숨기고 싶은 잘못이 있는 거라고 짐작한다.
한지원은 자신의 단점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지만 그걸 타인에게 쉽게 내보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특히나 자신에게는.
그가 아무런 결점도 없고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결점이나 약점조차도 사랑할 뿐이다. 그러나 아직 한지원은 그걸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상처를 받은 건 사실이었다. 한지원이 자신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만약 전부 받아 줄 거라고 믿었다면 진작 모든 걸 털어놨을 테니까.
고작 한 달로 그에게 신뢰를 주는 건 어려웠을까.
언제쯤 그가 자신을 믿고, 그의 어떤 행동에도 실망하지 않을 걸 확신해서 전부를 내보일까.
그가 서 교수에게 간 게 싫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 사람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한지원에게 스킨십이 많고 지나치게 가까웠다. 한지원은 사람을 쉽게 믿고, 쉽게 자기 영역에 들인다. 위기감이 부족하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도.
자신에게도 그러지 않았던가? 직장에서 몇 번 마주친 게 전부인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들였다. 의심하지 않는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거의 매일에 가깝게 환자의 돌발행동을 접하다 보니 타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 역치가 높아진 듯했다. 문제였다.
뺨에서 천천히 입술로 손끝을 옮겼다. 부드러운 입술을 가볍게 누르자 그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나이보다 한참 어리게 보이는 얼굴은 깊이 잠든 채였다. 강주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열 살에 만났던 한지원의 뒷모습은 가장 큰 벽처럼 보였다. 두 명의 아이를 품에 안기에는 작은 체구였는데도, 그때 그 역시 고작 열네 살밖에 안 되었는데도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곧바로 경찰과 어머니가 달려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한지원은 감싸고 있는 팔을 풀지 않았을 것이다.
일이 마무리된 후에 강주경은 부모님에게 그를 찾아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안 그래도 찾아봤다고. 교복을 입고 있어서 일단 그 학교에 전화를 했었는데, 전화를 받은 교사는 부모님이 이런 일이 있었다고 설명한 것만으로 그게 누구인지 알아차렸다고 한다. 몇 번이나 누군가를 도와주고 다녀서 학교로 전화가 오는 일이 잦다고. 그리고 사례나 인사를 하기 위해 연락하면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고.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부끄러우니 인사는 받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런 모습까지 포함해서 강주경에게는 그가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어린 나이였다. 누군가를 도와주고 이름이 알려지거나, 감사 인사를 받으면 뿌듯함에 여기저기 알리고 싶어 할 나이. 그런데도 당연한 일이라도 했다는 듯 조용히 숨어 버리다니.
어쨌거나 그런 성격 때문에 다시 만나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었는데, 우연히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그를 찾아냈다.
아버지 대신 병원의 창립기념일 행사에 참가했을 때였다. 대신 참가했다기보다는 다른 일정 때문에 늦어지는 아버지 대신 잠시 자리를 메우고 있었을 뿐이다. 조부와 함께 중요한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는 역할이었다.
강주경과 동생의 납치 미수가 있었던 이후 가족들이 정신과 방면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시작해서 산하 재단 병원에 지원금 제도를 만들고, 더 나아가서 대형 재단을 설립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조부가 손님들에게 재단 운영비 같은 것을 출자하는 게 어떤지 넌지시 권유하는, 그런 자리였다.
회사 경영에나 재단에나 별 관심이 없던 강주경은 그날 남매들 가운데 가장 한가하다는 이유로 아버지 대신 끌려왔다.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한다는 아버지의 말에 지루해하면서도 조부 옆에 붙어 다니고 있었다.
조부가 초대한 손님들만 들어오는 자리였기에 병원의 다른 직원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만약 행사장 제일 앞자리 같은 곳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면 기어코 도망쳤을 테지만, 눈에 띌 일이 없다는 말에 내키지 않는 걸음을 꾸역꾸역 옮겼다.
아버지는 행사 시작 직전에 도착했다. 슬슬 지겨움에 도망칠 기회만 찾고 있던 강주경은 매우 반가워하며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빠르게 걸어서 탈출하려다 무심코 단상을 보지 않았다면 걸음은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사회자의 말에 단상 아래에서 서성거리던 남자가 여러 사람과 함께 움직였다. 정신과 의료진이었고 남자는 그들 중 제일 끄트머리에 서서 어색해하고 있었다.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어릴 때의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동그랗던 뺨이 매끄러워져서 어른스러워진 걸 빼면. 그는 언뜻 담담한 듯 보였지만 계속 눈을 깜빡거리며 옆에 선 사람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긴장한 게 분명했다. 앞으로 모아서 쥔 손이 작게 떨리는 것 같았다.
사회자가 말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못 박힌 듯 서 있다가, 그가 단상에서 내려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옆에 선 여자에게 무언가 말하는 걸 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감정은 순식간에 마음을 채웠다. 강주경은 자신이 어릴 때의 기억을 그대로 안은 채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자그마한 등, 자신을 끌어안던 팔을.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난 순간 그때까지의 미숙한 감정은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순진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수련생 신분이었고 3년의 과정을 마친 뒤 병원에 남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기뻐서 당장 그를 찾아갈 뻔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라는 걸 몇 번이나 되새긴 후에야 겨우 참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하고, 바라보기만 하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시 그 관계로 돌아가라고 하면, 아마도 안 되겠지. 그렇게 되면 정말 한지원을 집에 가둬 두기라도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헤매고 있다는 걸 안다. 과거의 어떤 일 때문에.
거기에 다른 사람이 누가 있든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한지원은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말했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조금도. 하지만 언제쯤 그가 자신이 그의 어떤 면이든 사랑한다는 걸 믿어 줄지가 궁금했다. 기다려지기도 했다.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고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휴대폰으로 전송해 둔 메시지는 역시 기분 나쁜 내용이었다. 한지원을 향하는 욕설과 악의가 신경을 잔뜩 자극했다.
그래서 곧바로 메모와 차 키를 남겨 두고 형의 회사로 왔다. 이르게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출근길의 정체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고, 도착은 예상보다 늦어졌다.
아침부터 들이닥친 강주경을 보고 적잖이 놀란 형은 그가 내민 휴대폰을 보고 한층 더 놀랐다.
“이게 누구길래 강주경이 이렇게 화를 내. 무슨 내용인데 그래? 살해 협박이라도 있어?”
“아니.”
그런 게 있었으면 여기에 왔겠는가. 한지원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옆에 붙어 있었을 것이다.
“뭐, 찾는 거야 금방인데…….”
형은 자료를 누군가에게 보내지 않고 직접 PC로 옮겼다. 수십 분 정도 그가 모니터에 집중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서 초조한 기분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찾았다.”
그 말에 책상으로 다가간 강주경은 모니터에 떠오른 이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 * *
나한테 일어난 일이야 일어난 일이고, 환자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CCTV를 확인하고 나서 누구에게 말할 틈도 없이 곧바로 검사실로 올라가야 했다. 일단 선배와 교수님에게는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폐쇄병동에서 나와 교수님의 사진을 찍은 건 이정주였다. 스테이션에서는 사각인 위치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서인지 벽에 바짝 붙은 채 손만 이상하게 뻗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걸 뻔하다고 해야 할지, 하기야 세상에 걔만큼 멍청한 인간이 많으면 그것도 문제일 것이다.
검사를 마치고 돌아왔지만 심리실에는 이정주가 없었다.
“혹시 오늘 이정주 본 사람 있…….”
내가 그의 행방을 막 물으려 했을 때 또다시 심리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였다. 이러다가 정말 저 연약한 문이 부서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정주 어디 있어요?!”
뛰어오느라 머리까지 흐트러진 민소라 선생님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선생님을 향했다. 손에 웬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오늘 못 봤는데요…….”
오전에 일이 몰린 날이었다. 출근부터 지금까지 심리실에 드나든 사람들은 시간이 다 제각각이었다. 그중에서 이정주의 얼굴을 잠깐이라도 본 건 나뿐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곧바로 이정주의 책상을 향했다. 얼음이 죄다 녹고 슬리브엔 물기가 배어 나와 반쯤 너덜거리는 커피가 덩그러니 있었다. 아침에 서 교수님이 인원수대로 사 온 커피였다.
“헉, 설마 그대로 나가서 안 들어온 건가?”
유화영이 중얼거렸다. 아니, 무슨 가출하는 청소년도 아니고 출근하다가 나랑 마주쳐서 뛰쳐나간 후로 안 들어왔다니.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하…… 다들 이거 본 적 있어요?”
선생님은 조금 진정한 어조로 책상에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그리로 슬슬 모여들어서 내용을 확인한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이 가지고 온 건 SNS의 캡처 화면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에 선배와 나와 교수님 셋이 보았던 바로 그 SNS. 나한테 왔던 메시지는 물론 아니고, 누군가 쓴 게시 글을 쭉 모아 놓은 것이었다. 조금 전에 선생님의 사무실로 팩스가 쏟아져서 뭔가 하고 봤더니 이것이었다고 한다.
-심리학/S.univ
“…….”
프로필부터 불길했고, 내용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환자들의 이야기가, 아주 자세하진 않았지만 드문드문 쓰여 있었다. 짐짓 안타깝게 여기는 어조로 냉철한 척 썼지만 모든 글에서 환자보다 자신을 우위에 둔 게 분명한 말투였다.
보통 자기 얼굴로 설정해 두는 프로필 사진은 가운을 입은 옆모습. 사진만 모아서 보니 사원증에서 병원 이름만 살짝 나오거나, 커피 옆에 검사지 일부가 나오게 하거나, 그런 것들이었다.
“아니, 이, 미친……, 아니…….”
뒤늦게 합류해서 내용을 본 선배가 말을 더듬거렸다. 이미 우리끼리 화를 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올라오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봐도 이정주의 계정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팔로워는 거의 없었다. 게시글이 노출된 수도 적다. 이 계정이 유명해졌으면 정말 상황을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선생님도 이정주 찾으신 거 아니에요?”
제일 먼저 당황에서 벗어난 건 유화영이었다. 그 말에 나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실 저도 아침에 이상한 메시지가 와서요. 아.”
내 휴대폰에는 SNS 앱이 없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려다 머뭇거리자 선배가 대신 자기 것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종이에 쏠렸던 시선이 이번엔 그 위를 향했다.
“이 사진이요. 찍힌 게 폐쇄병동이어서 CCTV 확인해 봤는데, 이정주가 찍은 거더라고요.”
“허…….”
정말…… 정신과가 아무리 온갖 일이 일어나는 곳이라지만 이건 정말 너무 엄청난 일이었다. 정신 나간 사람 하나는 이렇게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는구나.
“아니, 저 이런 사람 진짜 처음 봐요. 누가 누굴 고쳐…….”
아연한 얼굴의 유화영이 말했다. 그 옆에서 민 선생님은 뒷목을 붙잡고 있었다.
이정주가 어디가 아픈 건 절대 아니었다. 자의식과잉이긴 해도 이건 타고난 성격이다. 병이면 자기가 컨트롤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치료나 완화도 가능하겠지만 성격은 영영 못 고친다. 애초에 이쪽으로 오면 안 되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팩스는 누가 보낸 거예요?”
“모르겠어요. 갑자기 팩스가 막 쏟아져서 고장 난 줄 알고 봤더니 이게 끝도 없이 들어오더라고. 보낸 사람 정보가 하나도 없는 거 있죠. 익명제보, 뭐 그런 건가?”
이게 무슨 공문도 아니고 팩스라니. 글씨나 화면 크기를 확대한 것도 있는데 종이는 수십 장이 넘었다. 이 자식은 글을 정말 많이도 썼다. 거의 하루에 열 개 이상.
“아.”
갑자기 컴퓨터 자판이며 휴대폰을 마구 두들기던 이정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후다닥 그의 책상으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 잠금이 걸려 있었지만 어차피 심리실 비밀번호는 다 똑같았다. 인터넷 창을 확인하자 역시 북마크에 SNS가 추가되어 있었다. 자동로그인이 걸려 있는지 곧바로 종이에 담긴 계정이 떠올랐다.
“한 선생, 이거. 다른 계정 있으면 여기서 볼 수 있어.”
선배가 화면 오른쪽의 SNS 아이콘을 가리켰다. 역시나 로그인 된 다른 계정은 아침에, 아니, 오늘 새벽부터 나한테 메시지 폭탄을 보내대던 그 임시 계정이었다.
이래 놓고 아침에 내 얼굴을 보자마자 튀다니. 저질러 놓고 쫄릴 거면 왜 하는지…….
병원 여기저기를 찾아다녔지만 이정주는 어디에도 없었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아침에 잠시 심리실에 왔던 교수님이 후다닥 도망치는 이정주를 보았다고 하는데, 정말 그 길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출퇴근 기록에 출근은 찍혀 있지만 퇴근이 없다. 어디 눈에 안 띄는 곳에 숨어 있거나, 카드를 안 찍고 병원을 빠져나갔거나.
그리고 오후쯤 되자 일이 생각보다 커졌다. 심리실과 정신과 내부만 들썩거리고 끝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이정주를 찾는 사이 소식은 위로 올라가고 올라가서 온 병원이 시끄러워졌다.
“외과 과장 원장님한테 불려 갔대요.”
“뭐? 그게 가능해?”
유화영의 말에 더 놀란 건 나였다. 이정주가 엄청난 짓을 해 놓고 도망간 건 사실인데, 아무리 아버지라도 다른 과 과장이 원장한테 불려 가기까지 할 수 있나?
“왜, 전에 그 일 있었을 때 외과 과장 때문에 이정주 안 잘렸잖아요. 그래서 지금 원장님한테 불려 간 거라던데.”
아…….
이정주는 심지어 SNS 아이디와 임직원 시스템 아이디를 똑같은 것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도용이라고 하기에는 사진과 게시글의 내용이 너무 이정주 본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원장과 외과 과장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까지는 알지 못한 채로 시간이 갔다. 과장이 돌아와서 드라마처럼 책상 위의 물건을 죄다 팔로 쓸어서 내던지며 난동을 부렸다는 말이 수군수군 떠돌 뿐이었다. 이것 때문에 일이 밀리는 바람에 퇴근이 늦어졌다. 모두가 퀭한 얼굴이 되어 집으로 흩어지기 시작한 건 밤 9시를 넘긴 뒤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제일 마지막이었다. 겨우 파일을 정리하고 집에 가서 마저 처리할 것을 분류해 놓은 뒤 일어나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하루 종일 소식이 없던 강주경이었다.
“으응.”
-선생님? 어디세요?
“나 퇴근이 늦어져서, 지금 주차장 가는…… 아.”
계단을 거의 다 내려가서 차 키를 꺼내려다가 혀를 찼다. 통화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수첩을 두고 나왔다. 오늘 검사하면서 해 둔 메모가 거기에 있는데. 하필 챙겨 온 일과 관련이 있어서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뭘 좀 두고 와서. 올라가서 가지고 와야겠다.”
-중요한 거예요?
“응. 먼저 가 있어. 집에서 이야기하자.”
-음…… 네.
전화를 끊고 다시 터덜터덜 올라갔다. 주차장에서 심리실까지 가는 거리가 달에서 지구만큼 멀게 느껴졌다. 피곤해 죽겠는데. 하품을 하면서 문을 열었다.
“힉……!”
왜 문이 비명을 지르지?
그럴 리가 없었다. 불도 켜지 않은 심리실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곧바로 조명 스위치를 누르자 이정주가 자기 책상 앞에 허리를 수그린 채 서 있었다.
“…….”
황당해서 그대로 멈춰 서 버렸다. 그는 가방 안에 자기 짐을 쓸어 담는 중이었다. 손에 쥔 만년필이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다들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올라와서 짐을 가져가려 한 모양이다.
“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우선 그렇게 입을 여는데, 이정주의 반응이 한발 먼저였다. 그는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더니 책상에 가방을 내던졌다. 제법 비싼 가방이 모니터를 치면서 책상 위로 미끄러졌다.
“네가 찔렀지?!”
“뭐?”
놀랍게도 이정주가 한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적반하장으로 나올 건 예상했는데 하필 그 안에서 ‘네가 찔렀지?’라니, 속에서 화가 울컥 치밀었다.
“이 씨발 새끼가 환자 정보 인터넷에 올려놓고 뭐……?”
내 말에 이미 반쯤 맛이 갔던 눈이 뒤집어졌다. 이정주는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책상과 의자를 넘어서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어억!”
굉장한 소리가 났다. 책상과 의자가 부딪치면서 쾅쾅거리는 통에 이 좁은 사무실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벌써 네 번째로 심리실 문이 거세게 열렸다.
“선생님!”
적어도 경첩 하나는 부서졌을 것이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고 눈을 둥글게 떴다. 강주경이 서 있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다친 데 없으세요?”
“괜찮아.”
“저건…….”
그가 손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이정주가 바닥에 엎어져서 끙끙거리고 있었다. 나한테 달려들려고 하던 이정주의 발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의자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나는 내던지려고 집어 든 미니 가습기를 머쓱하게 내려놓았다.
“몰라. 나한테 달려들다가 혼자 넘어졌어.”
“아.”
화낼 기력도 사라질 정도로 요란했다.
“그럼 안 다치신 거죠?”
“그렇긴 한데, 너는? 어떻게 여기 있어?”
“병원 근처 지나고 있었어요. 올라와서 같이 가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소리 지르는 게 들려서.”
혹시 강주경은 순간이동 같은 걸 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는데 이정주가 꽥꽥거리며 일어나려고 하다가 주경이의 손에 잡혔다.
“어떻게 할까요?”
나는 약간 움찔했다. 가져다 묻어 버리자고 하면 그렇게 할 기세였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순 없는 일이다. 결국 사정을 설명한 후 보안실에 인계했다.
“집에 가자.”
여느 사람들이 그렇듯 이정주도 주경이에게 붙들리자 갑작스럽게 얌전해졌다. 내게 아니, 한 선생님, 제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고, 하고 중얼거리기 시작하기에 못 들은 척하고 돌아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강주경은 나를 세워 놓고 주섬주섬 옷을 벗긴 뒤 욕실로 들어갔다. 어차피 씻어야 하니 가만히 있었지만 주경이의 태도가 묵묵한 게 이상했다. 너무 시무룩해 보여서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한참 고민해야 했다. 어쨌거나 큰 수건에 싸여서 고치처럼 된 후에는 별안간 목욕을 당한 동물의 심정이었다.
“주경아…… 뭐 해?”
“…….”
뒤늦은 질문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손에 드라이어까지 들려 있었다. 새벽부터 걱정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 건지, 병원까지 굳이 데리러 왔던 것도 그렇고.
“많이 걱정했어?”
손을 뻗어서 눈썹 근처를 만지자 굳은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저랑…….”
“으응?”
“저랑 만난 다음부터 선생님한테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 것 같아요.”
“뭐?!”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이더라니 대체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당황해서 뺨에 손을 얹자 그는 얌전히 얼굴을 기대 왔다.
“아니야!”
“그래도…….”
“아니라니까.”
강주경의 생각보다 소심하거나 예민한 부분을 보게 되면 그게 귀여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생각하길 바란 건 아니다.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그의 머리카락도 덜 마른 상태였기에 물방울이 무릎으로 툭툭 떨어졌다.
“네가 나 도와준 게 훨씬 많아.”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랬다. 주경이 없었으면 아마 여기 없지 않았을까? 중환자실쯤 가 있거나 절에 들어가거나 했을 것 같은데.
“너 없었으면……, 너 만나서 안 좋은 게 아니라, 내가 안 좋을 때 네가 나타나서 계속 날 도와주고 있는 거야.”
새카만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내가 자꾸 위험한 일에 참견하고 다녀서 화난 걸 이렇게 표현하는 건가? 생각하다가 속으로 혼자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났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겠지.
그건 은재가 죽은 후 붙은 습관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예감에서 끝내지 않게 된 것. 더 자세히 조사한 후에 정말 이상하다 싶으면 환자와 연락을 하려 한다. 만약 해 봤는데 아무 일 없다면, 그건 그냥 다행인 거고.
하지만 그 습관이 주경이에게 이런 생각을 불어넣은 모양이다. 미안함에 가슴이 뜨끔할 정도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네가 이렇게까지 걱정 안 하게 할게.”
내 말에 주경이가 잠시 나를 미심쩍게 보았다. 그건 못 믿겠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었던 일들 외에, 하연희의 집에 찾아가는 일 같은 건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친 짓이었다. 안전장치가 다 뭐냐. 진짜로 죽을 뻔했는데.
만약 하연희의 목적이 ‘날 빨리 죽여 버리는 것’이었으면 난 이미 세상에 없다. 시신이나 증거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지만 뭔가 더 안전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주경이가 옆에 있었어도, 강주경이 무슨 만능칼도 아니고.
“정말이야.”
“……네.”
그가 순하게 눈꼬리를 내렸다. 이 정도로 가까이서 보면 강주경이 왜 곰 인형처럼 느껴지는지 알 것 같다. 눈이 새카맣고 차분해서 언뜻 싸늘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척 반짝거린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실 때 정말 좋아요.”
“그렇게?”
“다정하게.”
팔이 뻗어 와 나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어제 선배에게 전화가 안 왔다면 그대로 차에서 했겠지. 그 분위기가 떠오르면서 시간이 돌아간 것처럼 배 속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 강주경이 병원에서 나를 바라보던 눈빛도 떠올랐다.
“주경아, 전에 병원에서…….”
“네.”
“나 보고 무슨 생각 했어?”
뺨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내리깐 눈가가 내 물음에 조금 붉어졌다. 큰 수건 한 장만 덮인 몸 위로 느릿하게 손이 올라왔다. 대답은 그가 잠시 머뭇거린 뒤에 나왔다.
“선생님, 가운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요.”
흠, 그런 눈이 아니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대답 잘해, 주경아.”
“…….”
그러자 강주경은 내 허리를 팔로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침대 위에 무릎으로 선 것처럼 들린 엉덩이 쪽으로, 손이 수건을 걷어 올리며 들어오더니 아직 따뜻한 습기가 남은 허벅지를 짚었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응.”
그는 그다음 말을 내 귀에 입술을 바짝 댄 채 속삭였다.
놀리려고 했던 내가 도리어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적나라한 말이었다. 입을 뻐끔거리다가 어깨를 퍽퍽 치자 그가 소리까지 내면서 웃었다.
웃고 있는 입술에 입을 맞췄다. 허리를 끌어안으면서 몸을 가까이 붙이자 주경이는 입술을 잠시 떼고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선생님, 아직 머리카락이 젖었어요.”
“괜찮아.”
“감기라도 걸리면…….”
그 말에 또 웃음이 터졌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강주경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어린애야?”
그렇진 않지만, 하고 머뭇거리는 주경이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수건 아래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이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듯 올라갔다. 그가 입은 얇은 옷 너머로 뜨겁게 열을 품은 아래가 느껴졌다.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흥분했으면서 머리카락이 아직 안 말랐다는 소리나 하다니.
허벅지에 앉은 채로 천천히 하체를 움직이자 그는 조금 놀란 듯 움찔거렸다. 목이 아니라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기에 접촉은 조금 더 노골적이었다. 큰 수건이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집에서 입는 옷이라도 말끔하게 갖춰 입은 채였기에 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곧 손바닥이 올라와 두 손으로 내 등을 더듬었다. 목에서 등으로 내려가는 손길에 몸이 짧게 떨렸다. 휘감듯이 상체를 안은 팔이 나를 좀 더 끌어당겼다. 아래쪽이 가볍게 마찰했고, 직접 닿지도 않았는데 안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바짝 몸을 붙인 채로 입을 맞췄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입 안으로 들어오고, 입천장을 누른 부드러운 살덩어리를 깊이 밀어 넣을 때마다 그는 내 몸을 붙잡아 당기듯 움직이게 했다. 주경이는 옷을 입고 있기까지 한데 아래에 가까이 닿는 그것이 안으로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후, 으……, 이상해……, 아!”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에 중얼거리자 그 순간 그가 몸을 휘젓듯이 움직였다. 배에서 뜨거운 것이 확 퍼졌다. 세우고 있던 무릎에서 힘이 빠질 정도로 갑자기 쾌감이 올라왔다. 접촉이라고는 밀착해 끌어안은 채 입구가 있는 골 위로 성기를 문지른 것뿐인데.
무심코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자 그는 내 뒤통수를 꽉 잡으며 입술을 더 겹쳤다.
“음, 흑……!”
혀끝이 혀뿌리 끝, 거의 목구멍에 닿는 게 아닐까 싶은 곳까지 들어왔다. 말랑한 입천장을 지나 그 안쪽까지 짓누르는 혀 때문에 기침이 올라왔다. 안에 들어온 혀를 깨물어 버릴 것 같아서 밀어내려 했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른 손이 올라와 턱 아래쪽을 잡고 입을 더 벌리게 했다. 혀를 휘감아 잡아당기는가 싶더니 다시 깊은 곳까지 들어와 마음대로 짓누르고, 휘젓고 빠져나갔다. 혀끝이 목구멍 근처를 누를 때마다 기침을 하느라 몸이 떨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렀다.
“여기보다 좀 더 깊게 집어넣을 거예요.”
“후……, 으, 으응?”
겨우 혀가 빠져나갔다 싶었는데 그가 그렇게 속삭였다.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이전에 그가 ‘다음에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목 안쪽까지 집어넣는 것. 혀가 닿았던 곳보다 더 깊게. 멍하니 올려다보자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아 침대 아래로 내려가게 했다.
침대에 앉은 강주경의 다리 사이에 앉게 된 나는 조금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정말 거기까지 들어갈까. 손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었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근육이 단단하게 잡힌 허리에서부터 손을 미끄러뜨려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미 발기한 채로 미끌미끌하게 젖어 있었다.
입 안에 넣었던 적은 있다. 그때 했던 것처럼 끄트머리부터 입술 사이로 물고, 고개를 숙여 안으로 집어넣었다. 깊게 넣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뿌리와 음낭 부분을 손으로 감싸듯 쥔 채 머리를 움직였다. 입술로 누르듯 하면서 안에 넣었다가 빼내는 것만으로 귀가 뜨거워질 만큼 민망한 소리가 났다.
잠깐 입에 물고 있기만 했는데도 벌써 입술과 턱, 혀까지 뻐근했다. 혀를 내밀어 매끈매끈한 귀두를 덮듯이 핥고, 손으로 잡고 있던 부분까지 혀끝으로 쓸었다. 씁쓸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눈만 올려 바라보자 주경이는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뿌리를 입술 사이로 눌러 핥다가 음낭까지 입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안에 넣고 점막으로 굴리듯 빨자 위에서 신음이 들렸다. 손바닥이 뒤통수를 덮었다. 처음에 어색해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나는 입으로 성기를 빠는 것에 열중했다. 점막이 자극되면 어디든 느낀다고 했던가. 그게 정말인 모양이다. 머리가 점점 뜨거워졌다.
입을 떼어 내고 침을 두어 번 삼킨 뒤에 다시 끝을 물었다. 손바닥으로 성기 아래쪽을 받치듯 든 채 더 안쪽으로 집어넣기 위해 고개를 기울이며 애썼다. 선단이 목구멍에 닿았나 싶었을 때 살짝 빼냈다가 비슷하게 반복했다. 그리고 턱이 아파서 잠시 얼굴을 돌리려 한 순간 뒤통수를 감싼 손에 힘이 확 들어갔다.
“……!”
“이렇게.”
“읍……!”
“하는 거예요.”
주경이의 목소리는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것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넣었던 그곳보다 더 깊게 성기가 반쯤 강제로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도망치듯 몸을 빼내려 했지만 강한 손힘에 가로막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허리를 크게 움직였다.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목구멍을 벌리며 들어온 굵은 성기가 자극에 약한 그곳을 때려 대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목 안쪽을 찔릴 때마다 컥컥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수축한 목구멍이 성기 끝을 조이듯 감쌌다가 풀어질 때마다 움직임은 더 거칠어졌다. 그의 허벅지를 붙잡았던 손이 살을 긁듯이 하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분명히 아프고 괴로운데 배 속이 미친 듯이 근질거렸다. 꽉 틀어 막혀 아무런 소리도 안 나올 것 같은 목에서 억눌린 신음 같은 게 입 안으로 울렸다. 내가 쏟아 내는 울음도 비슷한 소리가 되었다. 다시 한번 성기가 입 안쪽으로 쑥 들어왔다. 그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빼 달라고 말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성기가 빠져나가는 대신 손이 머리에서 턱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읍, 우…….”
손끝이 턱밑을 더듬었다. 그곳까지 밀어 넣어져 불룩해진 게 느껴졌다. 그가 내 안에 들어온 채 배를 만졌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머리를 무언가가 관통하는 것 같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허벅지와 배가 단숨에 빳빳해졌다.
“……!”
등줄기가 오싹오싹했다. 버거운 성기가 완전히 빠져나갔다가 부어오른 입술을 비집어 열며 안으로 들어왔을 때, 눈앞이 희게 되는 것 같은 익숙한 쾌감과 함께 절정의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바닥으로 정액이 쏟아졌다. 입 안에도 당연히 힘이 들어갔다.
그것에 움직임을 멈추나 싶었던 강주경은 입에서 성기를 빼내고 상체를 급하게 숙여 키스했다. 씁쓸한 맛이 그에게도 번졌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입맞춤은 길고 거칠게 이어졌다. 입을 맞추는 동안 그는 옷을 전부 벗어 버렸다.
몸이 위로 끌려 올라가, 침대 귀퉁이에 등만 걸쳐지듯 눕혀졌다. 뒤로 젖혀진 목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그는 내 가슴 위로 성기를 문질렀다.
“으읏, 아…….”
방금 사정했기 때문인지 온몸이 예민했다. 가슴 사이와 유두 위로 문질러지는 뜨겁고 미끄러운 느낌이 채 식지도 않은 열을 다시 끓어오르게 했다. 가슴에서 목덜미, 얼굴까지 그것이 멋대로 마찰되었다. 손을 더듬어 올려서 손으로 쥐어 보려 했지만 머리가 어지러워서 제대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신음하며 고개를 뒤로 완전히 젖혔을 때 다시 입 안으로 성기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정말 소리도 나지 않았다. 조금 전에도 한계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젖은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간신히 붙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떠밀려서 침대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걸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을 때 그의 허벅지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코로 간신히 숨을 들이켠 순간 목구멍 안쪽으로 정액이 쏟아졌다.
그는 내 머리를 감싸듯 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고 끈적거리는 액체를 난 절반도 채 삼키지 못했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정액이 내가 억눌린 기침을 할 때마다 입 안에 들어찼다. 틈이 없는 것 같던 입술과 성기 사이로 정액이 넘쳐나 찌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입 안을 채우던 것이 간신히 빠져나갔다. 희부연 액체가 긴 선처럼 이어졌다. 곧바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거울 정도로 고인 정액을 뱉어 냈다. 점막에 달라붙은 것은 떨어지지 않아서 결국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삼켜야 했다. 등으로 뻗어 온 팔이 나를 받치고 안아 일으켰다. 땀이 밴 맨살이 맞닿는 게 기분 좋았다.
“흐윽, 읏…….”
등을 감싸 끌어안은 강주경이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중간부터는 끌려가다시피 하는 구음이었는데 이걸 하면서 한 번 사정하고 어느새 다시 발기한 뒤였다. 그가 내 것을 감싸 쥐고 부드럽게 쓸었다.
신음할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다. 나는 주경이의 어깨에 이마를 댄 채 감각의 파도를 견디려 애썼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사정감이 차오르고 아래에서 정액이 튀었다. 강주경은 계속 손으로 성기를 문지르며 조금 전과는 정반대로 부드러운 키스를 했다. 입 안에 남은 끈적끈적한 느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정액이 잔뜩 묻은 손가락이 회음을 누르며 뒤쪽으로 들어왔다. 안쪽이 그것의 감촉을 떠올리며 멋대로 꿈틀거렸다. 다리가 벌어진 게 아니라 옆으로 모여 주경이의 허벅지 위에 얹어진 채였기에 그곳이 넓게 벌어져 있진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쏟아 낸 정액을 윤활제 대신 쓴 손은 쉽게 안으로 들어왔다.
“으응…….”
길쭉하고 굵은 손가락이 안을 둥글게 문질러 넓히는가 싶더니, 곧바로 두 개가 더 들어왔다. 그것만으로 평범한 성기의 크기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매달리듯이 그의 목을 끌어안자 손이 빠져나갔다가 다시 세게 들어왔다. 허리 아래가 퍼뜩 뛰었다. 아래에서 찔러 올리듯 하는 손가락은 움직임이 자유로운 만큼 성기와 다른 감촉으로 안을 휘저어 댔다.
“아, 좋아, 아…….”
굳이 가장 많이 느끼는 부분을 찾지 않더라도 그가 안쪽을 마찰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흐려졌다. 뒤로 이렇게까지 느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안을 넓히는 것보다 그 자체로 흥분되는 건지 강주경은 내가 움찔거리며 그를 세게 안을 때마다 낮게 신음했다.
“아……!”
손가락 한 마디 정도를 남긴 채 드나들던 손가락이 단숨에 손바닥과의 연결부까지 안으로 들어왔다. 곧게 편 손끝이 안쪽의 둥글게 튀어나온 부분을 꽉 눌렀다. 배에서 시작해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도 모르게 다리를 모았다. 주경이는 겹쳐진 내 발로 손을 뻗어 감싸 쥐고 끌어당겼다. 무릎이 세워지면서 허리가 미끄러지듯 내려가 삽입이 조금 더 깊어졌다.
“아, 아……, 아…….”
입에서 계속 끊어질 것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안이 스스로 젖기라도 하는 것처럼 질척질척한 소리가 났다. 감고 있던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나를 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더 끓어오를 듯한 얼굴이었다.
다시 짧게 입술이 닿고 몸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손이 빠져나가나 싶더니, 그가 뒤로 물러나면서 나를 침대 위에 엎드리게 했다. 잔뜩 젖은 아래로 단단한 성기가 문질러졌다. 선단이 입구에 꾹 눌렸을 때 무릎을 짚으며 하체만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는 가만히 내 등 아래쪽에 손바닥을 대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아, 잠깐만, 이대로는……, 아, 아!”
등을 눌린 채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데 아래가 벌어지며 안으로 성기가 들어왔다. 애매한 자세여서인지 꽤 풀어졌다고 생각한 입구는 꾸물꾸물 닫혀 이물을 내뱉으려 했다. 그는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넓게 벌리며 다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흐아아, 아!”
억지로 절반쯤 들어온 성기는 조금 물러났다가 다시 세게 밀려들었다. 엎드린 몸이 침대 시트를 밀어내며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버둥거려 시트를 잡아당기듯 움켜쥐었다. 서너 차례 드나들기를 반복하던 그는 내 가슴 옆에 두 손을 짚으며 기어이 끝까지 자기 것을 집어넣었다.
“아, 아……, 아…….”
다물어진 내벽을 비집어 열며 들어온 성기의 자극과 압박감에 나는 고개를 확 들었다. 침대를 짚은 팔까지 덜덜 떨렸다. 순간 크게 떴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여 흘렀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뒤에서 그가 신음하더니 한 손을 내 목에서 허리까지 쭉 미끄러뜨렸다.
안쪽이 물결이라도 치듯이 조여드는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맥박에 따라 꿈틀대는 듯한 성기를 점막이 촘촘하게 감싸고 있었다. 어느 것이 더 뜨거운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몸 위로 체온이 가까워졌다. 내 등을 완전히 덮듯이 상체를 숙인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댔다.
“아, 아읏, 아!”
내벽을 빈틈없이 누른 성기가 약간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난폭하게 들어왔다. 목을 깨무는 것과 동시에 느껴진 충격에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튀어나왔다. 손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시트를 움켜쥐어도 요란한 열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다리를 모으고 싶지만 내가 허벅지를 꿈틀거릴 때마다 강주경은 무릎으로 그걸 더 벌려 놓을 뿐이었다.
“읏, 흐윽, 다, 다리, 그만, 벌……, 려, 아…….”
귓가에 웃음소리가 흘러들었다. 내 말이 의도한 대로 그에게 전해지지 않은 건 분명했다. 몸이 침대에 쓸렸다. 배에 닿는 시트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또 사정한 건지, 선액만으로 이렇게 젖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랫배에서 가슴까지 뭉클뭉클한 열이 퍼졌다. 손끝까지 저리는 느낌은 이제 익숙해진 다른 절정이었다.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으로 겨우 고개를 돌렸다. 금방 뜻을 알아차린 그가 입술을 맞댔다.
“으응, 으, 흣…….”
각도를 바꾸어 입맞춤이 깊어질 때마다 성기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울음소리 같은 신음이 참지도 못하게 쏟아졌다. 반쯤은 그의 입 안으로 넘어간 것 같다. 경련하듯 떨리는 어깨를 안겨 몸이 조금 옆으로 돌아갔다. 눈앞이 하얘지는 강렬한 절정이 다시 이어졌다.
“아윽, 아, 아……, 아!”
애매하게 비틀려 흔들리던 몸이 위로 확 들렸다. 안에서 성기가 크게 요동쳤다. 허공을 더듬는 팔을 그가 두 손으로 잡았다. 순식간에 똑바로 누운 그의 위에 올라타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짝 주저앉으면서 성기가 그동안 닿지 않던 부분까지 들어왔다.
“흐으, 읏, 깊, 깊어, 아…….”
휘청거리다시피 허리를 들어 도망치려 했지만 곧바로 붙들렸다. 하체를 문지르듯 주저앉혀진 나를 커다란 손이 잡아 흔들었다. 너무 느껴서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계속했으면 하는 마음이 뒤엉켰다.
“그러니까, 선생님……, 빨기만 하면서 가면, 제가…….”
“으응, 읏, 그만, 그마……, 아, 앗!”
헐떡이는 울음이 쏟아졌다.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터뜨리자 그의 배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아래에서 강하게 쳐올려져 허리의 힘이 완전히 풀린 나는 앞으로 쓰러졌다.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완전히 그의 위에 엎드려 버린 순간 안쪽으로 뜨거운 액체가 퍼졌다.
“아……, 아…….”
내벽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정액을 짜내듯 움직였다. 몸을 뒤흔드는 절정의 감각 때문에 피부까지 전부 예민해진 것 같았다. 두 번째인데도 처음과 거의 같은 양의 정액을 쏟은 그는 내 허리를 붙잡았다.
“흐, 으……?”
순식간에 그의 가슴 언저리까지 끌어 올려졌다.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힘을 주고 일어서는 바람에 안쪽에 고인 정액이 울컥거리며 떨어졌다. 덩어리진 정액이 흐르는 느낌에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다리가 그의 체구 때문에 크게 벌어져 있었기에 곧바로 벌어진 입구에서 흘러나와 그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겨우 버티다시피 하던 허벅지에서 한순간에 힘이 빠져나가 그대로 무너지듯 앉았다. 뒤로 기울어지는 몸을 두 팔이 받쳤다. 몇 번이나 사정하고, 드라이 오르가슴까지 겪었는데도 배 속이 근질거렸다. 축축한 시선이 드러난 다리 사이를 향하고 있었다. 배 위에 앉은 채 아직 다물어지지 않은 아래로 정액이 흐르는 모습이 고스란히 그의 눈에 들어가고 있다. 머리가 지잉 울리는 것 같았다.
“혼자서 해 주세요, 선생님.”
“흐, 으윽, 읏, 못 해…….”
“빨리…….”
그가 한 팔을 움직여 내 발목을 쥐었다. 다리를 벌리는 것처럼 들어 올린 발을 입가로 끌어당겨, 발끝을 입에 물었다. 이내 뜨거운 점막이 발가락을 감쌌다. 발이 성감대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저절로 허리가 비틀릴 정도로 달콤했다. 결국 복사뼈를 깨물렸을 때 나는 성기로 손을 가져갔다.
그제야 그가 발을 놓아주었다. 젖은 발로 시트를 밀며 두 손으로 내 것을 감싸 쥐었다. 정말로 더는 못 할 것 같았는데도 발기해 있었다.
“아…….”
몸이 또 열에 감싸였다. 직접적이지만 어딘가 부족한 쾌감이 머리를 녹였다. 마찰에 반응해 몸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안쪽에서 정액이 울컥울컥 빠져나왔다. 돌처럼 단단한 배 위로 그것이 문질러질 때마다 눈 안쪽이 번뜩였다.
시선이 나를 만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도, 묽은 액체를 흘리며 손에 감싸인 성기도, 정액이 비어져 나오는 입구도 전부 그의 눈에 담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가 입술이 마르기라도 한 것처럼 혀를 내밀어 핥았을 때 차츰 고조되고 있던 감각이 확 치솟았다. 비명 같은 내 목소리와 함께 반투명하게 묽어진 정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사정했는데도 어딘가 해소되지 않은 열이 잔상처럼 몸속을 휘젓고 다녔다. 안쪽에 남은 그의 정액이 이상한 작용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전류 같은 것이 몸을 관통했다. 조금 전까지 안에 꽉 들어찬 성기를 물고 있던 안쪽이 열을 품으며 꿈틀거렸다. 나는 짧게 머뭇거렸지만 둔해진 이성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손이 더듬더듬 회음 아래쪽으로 향했다.
“흣…….”
등을 받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체중을 완전히 거기 기대고 있었지만 허리와 등을 전부 감싸다시피 했기에 몸이 불안하게 휘청거리진 않았다. 벌어져 있는 안으로 내 손이 무리 없이 들어갔다. 정액으로 젖은 점막은 낯 뜨거운 소리를 냈다.
내벽은 묘한 감촉이었다. 입 안쪽의 살이 좀 더 오돌토돌하고, 꽉 조여지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잔뜩 벌어진 상태일 텐데도 점막이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꼬리뼈 근처로 여전히 단단한 그의 것이 느껴졌다. 손을 뒤로 뻗어 그것을 덮듯이 만졌다.
“……흑, 앗…….”
손바닥에 젖은 성기의 감촉이 와 닿았다. 한 손으로 다 잡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이런 게 이 좁은 틈으로 들어온다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이게 안을 거칠게 문지르고 누르며 드나들 때의 감각이 생생히 떠올랐다. 손가락 하나를 더해 깊게 집어넣으며 성기를 만지자 깔고 앉은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주경이의 표정이 똑바로 보였다.
그가 흥분해 있을 땐 나도 대체로 정신이 거의 없었기에 비교적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선생님.”
“으응…….”
눈가가 붉어지는 건 알고 있었다. 미간은 찌푸린 채였고, 평소 싸늘한 느낌을 주는 입매는 벌어졌다가 악물듯 다물어지기를 반복했다. 새카만 눈은 습하고 열로 가득하고, 나에게만 집중되었다. 숨결은 거칠고 낮은 신음 소리가 섞였다.
불을 삼킨 것 같다. 손안에서 성기가 꿈틀거렸다. 주경이가 하는 것을 흉내 내 안쪽을 문질렀지만 좀처럼 충족되지 않았다.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어 빨리 움직여 보려 해도 부족하고 어설펐다.
“흑, 모, 못 하겠……, 어, 네가, 해 줘…….”
결국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강주경은 길고 낮은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휙 일으켰다. 떠밀리듯 몸이 뒤로 넘어가고 다리가 높게 들렸다. 말랑말랑하게 벌어진 입구를 열며 잔뜩 성이 난 그의 것이 단숨에 들어왔다.
“아……! 아, 아, 잠, 깐, 너무 빠른, 데, 아, 아!”
그는 허리까지 높게 올라간 내 몸이 떠밀리도록 하체를 밀어붙였다. 오금을 누른 팔로 침대를 짚고 있었기에 다리는 지탱해 줄 것을 찾지 못한 채 위로 들려 꺾일 듯 흔들렸다.
“흐아, 앗, 아! 아아!”
허벅지를 끌어 안겨 아래로 확 끌려갔다. 침대 끄트머리에 허리까지만 겨우 걸쳐졌고, 강주경은 한쪽 무릎만 침대에 올린 채 체중을 완전히 실어 아래로 몸을 내리꽂아 댔다.
“으응, 앗, 아, 흐윽……!”
허공을 휘젓던 손이 간신히 그의 허벅지로 올라갔다. 힘까지 잔뜩 들어간 허벅지는 손으로 움켜쥐기 힘들었다. 땀 때문에 미끄러워서 기둥이라도 붙든 것처럼 자꾸만 미끄러졌다. 어떻게든 잡고 매달리기 위해 손을 뻗었다. 허리며 허벅지를 손 가는 대로 붙들자 손바닥 아래에서 단단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아, 아……, 아…….”
목소리는 이미 잔뜩 쉬어 있었다. 목구멍을 잔뜩 자극해서인지, 너무 많이 울어서인지 모르겠다. 머리카락과 관자놀이, 귀에 닿았던 입술이 눈가와 뺨을 지나 입술을 꾹 눌렀다. 내 신음을 삼키려 하는 것 같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으음, 읏!”
다리가 높게 들린 자세에 겨우 익숙해지나 싶었는데 또다시 몸에 팔이 휘감겼다. 그는 내 엉덩이 아래와 등을 감싼 채로 완전히 안아서 들었다.
“아……! 아, 앗, 아파, 물지, 마…….”
목덜미를 강하게 깨물렸다. 정신이 확 들 정도로 아팠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하자 그는 미안하다고 말하듯이 그 자리에 살살 입을 맞추고 핥았다.
그대로 안긴 채 몸이 흔들렸다.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는 그의 허리에 감기지 못하고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몸은 미끄러질 것 같으면서도 꽉 끌어 안겨 그에게 매달려 있었다. 안을 짓누르는 자극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더는 못 할 것 같다는, 쾌감을 피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기분 좋다는 생각이 뒤덮었다.
계속해서 귓가에 들리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그 생각을 부추겼다.
“아, 아으, 흑, 아!”
“윽, 선생님…….”
그가 신음하며 내 다리를 들어 올려 안고, 한쪽 무릎을 침대에 댔다. 체중이 다 거기에 실리다시피 했는지 침대가 삐걱거리며 흔들렸다. 아까 쏟아 놓은 정액이 다 빠져나가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다시 안쪽이 젖어들었다.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며 끝까지 사정한 그는 숨을 내쉬고는 나를 내려놓고, 안에서 빠져나갔다.
반쯤 넋이 나간 채 헐떡이던 나는 손이 다시 허리를 붙들고 엎드리게 하는 것에 놀라 고개를 저었다.
“흐윽, 나, 이제, 못……, 싫어…….”
배 속에 멍이 든 것 같았다. 온몸을 휘도는 열 때문에 머리까지 다 녹아 버리는 기분이었다. 더 하면 아래가 다물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계속 고개를 젓자 커다란 손이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넣을게요, 선생님. 죄송해요. 조금만.”
“흐윽, 뭐, 하려고……, 윽…….”
그는 내 배 쪽으로 팔을 감아 하체를 들어 올리게 하고, 다리를 모아 보라고 속삭였다. 어깨와 무릎으로 몸을 떠받친 채 다리를 좁게 모았다. 안쪽에서 정액이 흘러나와 허벅지를 적시는 느낌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아직도 열이 식지 않은 성기가 젖은 골 사이로 몇 번 미끄러지더니 그대로 꽉 모은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 아, 아!”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지만,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의 살과 입구, 회음부터 성기 아래쪽까지 마찰되었다. 서로가 흘린 액체로 젖은 그곳은 조금의 뻑뻑함도 없이 성기를 받아들였다. 이런 곳으로도 이만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아윽……!”
손바닥이 가볍게 엉덩이와 허벅지를 때렸다. 평소에 때리는 것보다 훨씬 약한 힘이었지만 이미 새빨갛게 부어 욱신거리고 있어서인지 오히려 평소보다 아팠다. 때리는 힘이 강해진 순간 또다시 강렬한 절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시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벌써 몇 시간이나 강한 쾌감에 휩싸였던 몸은 이제 시트가 몸을 스치는 느낌에도 덜덜 떨릴 정도로 민감하고, 고조되어 있었다. 신음이 거의 섞이지 않은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주, 경아, 나, 힘들…….”
“……죄송해요.”
목소리에서는 조금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성의 거의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흐윽, 아, 아……, 아…….”
엉덩이와 등, 허벅지로 정액이 튀었을 때 몇 번째인지 모를 절정에 올라 온몸이 떨렸다.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눈앞이 깜빡거리나 싶더니 정말로 어두워졌다. 푹 떨어지는 몸을 두 팔이 끌어안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드물게도 아침에 내가 먼저 깨어났다.
아침이라기보다는 새벽이었다. 나갈 준비를 하기에는 조금 이르고, 다시 자기에는 애매한 시간.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하자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한 선생, 피곤할 텐데 내일 안 나와도 괜찮아. 푹 쉬어.]
민 선생님과 선배에게서 온 전화가 한 통씩 있었고, 메시지는 선생님의 것이었다. 어젯밤 집에 오는 길에 이정주에 대해 다 말을 전해 둔 차였다. 그 후 도착해서 휴대폰 볼 겨를이 없었는데, 그때 연락이 왔었던 듯했다.
그래도 출근을 안 하는 건 좀. 시간을 보니 선배는 벌써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전화를 걸어 보자 금방 연결이 되었다.
-응, 벌써 일어났어? 선생님이 보낸 메시지 봤지?
“네, 콜록……, 봤는데, 그래도 출근은 할게요.”
-목소리 좀 봐. 그냥 푹 쉬어. 오늘 한 선생 쉬어도 괜찮아.
“저 검사 있는데…….”
-그건 민 선생님이 한다고 했어. 부탁이니까 쉬어라, 지원아. 너 오늘 출근했다가 응급실로 퇴근한다.
아니, 목소리는 아파서 그런 게 아닌데…… 이유를 떠올리고 새빨개진 채로 몇 마디 더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집에서 쉬기로 했다. 내일이 원래 휴무여서, 그럼 내일 출근하면 되는지 물었다가 선배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덕분에 이틀이나 쉬게 되었다. 전화를 끊고 어떻게 할지 생각하다가 그대로 드러누웠다. 솔직히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다. 역시 강주경의 체력을 따라갈 수 없다. 내가 체력을 늘리는 것보다 주경이에게 체력이 떨어지는 침이라도 놓는 게 빠르지 않을까? 체력이 떨어져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나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다시 잠시 쏟아졌다. 눈을 감자 흐트러져 있던 이불이 목까지 덮였다. 그새 깨어난 모양이다.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다시 눈을 뜨니 놀랍게도 오후 두 시였다. 대체 몇 시간을 잔 거지? 부은 눈을 손으로 문지르고 두리번거렸지만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출근했겠구나.
어젯밤에 그대로 기억이 끊어졌지만 어디 하나 지저분한 곳이 없었다. 침대는 포근하고 몸도 깨끗했다. 하품을 하고 나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출근을 안 하는 날에도 개인 PC나 휴대폰으로 접속할 수 있는 임직원 시스템과 학회 홈페이지는 꼭 확인을 하는 편이었다.
아이디를 입력하고 들어가자마자 팝업 메시지가 떠올랐다. 또 무슨 공지 사항이 있나 보다, 하고 내용을 확인한 나는 어, 하는 소리를 냈다.
인사 관련 공지였다. 오늘 날짜로 작성된 공지 사항에 외과 과장의 얼굴과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나와 있었다.
징계 내용은 오늘 날짜로 해고.
“……?”
나는 영문을 모른 채 화면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곧바로 떠오른 건 어제 일이었다. 아니, 원장한테 불려 간 것까지는 그렇다 치고 과장급이 바로 해고라니?
징계 사유가 대여섯 줄로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몇 조 몇 항 위반이라는 말로만 나와서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너무 놀라서 선배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어, 장난 아니야ㅋㅋ성추행에 뇌물에 별짓을 다 했던데 외과 안에선 유명했대]
[그러다 이번에 걸린 거예요?]
[응 다 털렸대 외과 애들 지금 방긋거리면서 다님]
그야 그런 상사가 잘렸으니 방긋거릴 만도 했다. 정운성이 잘렸을 때의 그 즐거웠던 기분이 떠올랐다.
[이정주 때문에 걸린 거래요?]
[흠 그건 모르겠네... 그 이유가 아주 없는 건 아니겠지?]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하긴 그런 짓 하는 아들을 감싸서 해고도 막아 주는 아버지인데 번듯한 인간일 리는 없었다. 이정주가 미친 짓을 한 것 때문에 걸린 거라고 해도, 어차피 자업자득이다.
[그럼 이정주는요?]
[선생님이 출근하지 말라고 했지 뭐...]
[뭐 오라고 했어도 안 오지 않았을까?]
그건 그랬다. 아무리 이정주가 뻔뻔스럽기로서니 이 지경이 되고서도 출근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어제도 그렇게 도망갔고, 애초에 심리실에 돌아와서 짐을 챙겨 가려 하지 않았던가. 일주일 이내에 징계 위원회가 소집될 거라고 한다. 민 선생님은 그날까지 집에서 대기하라고 통보한 거고.
징계위원회 참석해서 소명한다고 발악은 해 볼 수 있지만…… 글쎄, 소명이 아니라 걔가 갑자기 용감한 시민 상을 받으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라도 안 통할 것이다.
휴대폰을 놓고 옆으로 몸을 굴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집에서 쉬고 있는데, 내일도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니 벌써 피로가 싹 풀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정주와 이정주의 아버지까지 날아가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다가 목욕이라도 할까 싶어서 일어나려 했을 때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둥글게 뜨고 있자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잠시 들리더니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침실 문을 열고 나타난 건 강주경이었다.
“어어…… 출근 안 했어?”
“네. 오늘 쉬는 날이에요.”
그랬나? 나랑 같이 내일 쉬는 줄 알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가벼운 외출복 위에 외투를 걸친 차림이었다.
“뭐 좀 드셔야 하는데, 침실로 가지고 올까요?”
“으응? 아니. 금방 씻고 나갈게.”
“씻겨 드릴까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지만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춰야 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일어나려다 말고 두 팔을 뻗자 주경이는 큰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날 안아다 씻기고 식탁 앞에 앉혔다. 어느 틈에 다 사 온 건지 봉투와 쇼핑백이 여러 개였다.
“헉, 이걸 다 어떻게 먹어.”
“뭘 사 와야 할지 몰라서…….”
5, 6인분은 될 것 같았다. 나중에 먹어도 되는 음식을 골라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점심이라고 하기에도 늦은 식사를 했다. 씻고 밥까지 먹고 나니 그제야 움직일 기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있자 주방 정리를 끝낸 주경이가 다가와서 옆에 앉았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어제 물어보려다 못 물어봤는데.”
“네?”
“어제, 어디 다녀온 거야?”
내 물음에 강주경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새벽에 선생님 휴대폰이 너무 많이 울려서요…… 일부러 본 건 아니에요.”
아, 앱. 어쩐지. 그때까지 있었는데 주경이가 그걸 보고 삭제해 버린 모양이다. 일부러 봤든 아니든 고마운 일이었다. 새벽부터 SNS 알림에 깨어나서 이정주가 보낸 메시지를 봤으면 기분이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다녀왔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봐?”
“그 사람 계정 정보로 이것저것 알아낼 수 있어요.”
그렇구나. 그렇게 정보를 알아내는 게 합법인지 잠시 고민하다 혼자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때.’
“네가 알아본 거야?”
“아니요, 형이……, 알아보니까 이것저것 나왔어요. 다른 계정도 나오고, 사용하는 IP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병원 거였고요. 임직원 시스템 접속 기록도 보였고 ID 하나는 아예 동일했어요.”
“오…….”
병원 컴퓨터에야 기록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찾았지만, 외부에서 ID만 가지고도 그걸 알아낼 수 있다니 인터넷은 역시 무서운 세계였다. 그걸 하루 사이에 찾아내는 주경이의 형도 대단한 사람이고. 아무런 정보도 안 적힌 SNS 임시 계정만 보았을 땐 계정 주인을 찾을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신기하다는 생각만 하고 있다가 퍼뜩 떠올렸다.
“아, 팩스.”
내 말에 강주경은 또 짧게 입을 다물었다. 민 선생님의 사무실로 쏟아졌다는 발신인 불명의 팩스.
“네가 보낸 거야?”
“……형이요. 원래 제가 그 사람한테 직접 찾아가려고 했는데, 형이 말려서. 찾아갈 걸 그랬죠. 그랬으면 선생님이 놀라실 일도 없었을 거예요.”
나는 재빨리 고개가 떨어지도록 흔들었다. 직접 찾아가려고 했다고 말하는 강주경의 표정은 어제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을 때와 비슷했다. 이정주의 태도에 따라 어디 야산에 슬쩍 가져다 묻어 놓을 것 같은 얼굴. 주경이 앞에서 다른 사람처럼 얌전해지던 이정주였지만, 그래도 순간적으로 욱해서 어떤 반응을 했을지 모른다. 역시 형제라서 그런지 주경이의 형은 주경이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아니야. 말려 주셔서 다행이네.”
“그런가요?”
“응.”
그가 이정주와 안 좋게 얽히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 그 사람 싫으신 거죠?”
“응?”
“혹시 그 사람도 어디가 안 좋아서 그런 거거나.”
“아,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날 때부터 성격도 나쁘고 머리도 나쁜 사람 있잖아?”
둘 중에 하나만 나쁘면 괜찮지만 둘 다 나쁘고 제대로 배울 생각도 안 하고, 눈치까지 없으면 이정주가 되는 것이다. 애초에 그 자식이 왜 이쪽으로 진로를 잡은 건지 의문이었다.
“아무튼 걔는 환자가 아니야. 병원만 그만둘 게 아니라 아예 이 땅을 떠나 주면 좋겠어…….”
뒤의 말은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이정주 때문에 속 썩은 수많은 일이 떠오르는 바람에. 하지만 그 말에 바뀐 주경이의 표정을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주경아……, 진짜로 없애 버리고, 그러려는 거 아니지?”
“……그건 어렵겠지만 선생님이 원하시면 해 볼게요.”
“아냐!”
범죄에 연루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신기하네. 이정주 아버지도 해고됐더라고. 보통 이런 일은 구색만 갖춘 징계로 끝나는데, 요새 병원이 묘하게 비현실적이란 말이야. 무슨 판타지도 아니고 잘못만 하면 바로 잘리고…….”
이정주야 학회까지 올라갔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외과 과장도 그렇고 예전에 정운성도 그렇고. 생각해 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이런 걸 이상하게 여겨야 하다니 세상이 좀 잘못된 것 같긴 하지만…….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
……그럴 수도 있나?
나는 잠시 주경이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상하지.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처리될 리가 없다. 병원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사람이고, 잘못했다고 해도. 정운성이야 워낙 능력 없고 풍전등화 같은 조교수 신세였지만 외과 과장은 다르다. 지금까지 잘 해먹으면서 과장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인데.
정운성도, 외과 과장도, 요즘 이어진 내 불운과 연관되어 있다. 이게 내 자의식과잉인가?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 병원 위쪽에 연줄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이게 쉬운 일인 건지.
“있잖아, 혹시 너희 집 병원장 친척이거나, 그래?”
선물로 벤츠를 사 줄 정도면 돈도 많은 것 같고.
“……아니요.”
“아, 아니구나.”
하기야 그렇지.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병원장은…… 아니에요.”
“…….”
병원장‘은’ 아니라고?
강주경은 갑자기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서로 말이 없는 동안 그는 시선을 발끝으로 내렸다가, 무릎 위에서 한 손을 꾹 쥐었다가 폈다.
“전부터 물어볼까 했는데, 주경아…… 부모님이나, 아까 말한 형도 그렇고. 동생도 있다고 했지? 뭐 하는 분들이셔?”
그가 나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눈을 돌렸다.
“그냥…….”
“그냥?”
“돈이, 좀…… 많아요.”
왜인지 머뭇머뭇하는 목소리였다.
“으응, 그래. 뭐.”
그거면 됐지. 괜한 질문이었던 것 같다. 궁금해서 물어보긴 했지만 당황하는 걸 보니 미안해졌다. 그렇게까지 알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냥 대충 위쪽과 연관이 있겠거니 하면 될 일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강주경이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선생님.”
“응?”
“……싫으세요?”
“뭐가? 아…… 싫긴. 좋은 거 아냐?”
“……네.”
이번에는 안심하는 얼굴이었다. 어디서 돈 있는 집 아들이라고 말했다가 크게 데이기라도 했나.
빚을 짊어진 것도 아니고 그게 결점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주경이가 빚이 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만큼은 갚아 주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그렇게 생각하며 물끄러미 주경이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였다.
“왜요……?”
“아니…….”
그러고 보니, 전에 차 이야기를 했을 때도 비슷한 반응 아니었나? 아무래도 강주경은 크게 티 내려 하진 않지만 내 앞에서 많은 게 불안한 모양이다.
그런데도 내가 입을 다무는 이야기에 대해 재촉하지 않는다. 그 침묵 역시 그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인 게 분명한데도.
나는 아직 말할 용기도 못 냈는데. 주경이에게 그 말을 할 용기도, 주변 사람들에게 주경이 이야기를 할 용기도.
하지만, 네게는 5년이었지만 나한테는 한 달인걸.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려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에게는 한 달이지만 강주경에게는 5년이었다.
그 긴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이미 주경이는 충분히 오래 기다렸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고 한다.
4년이나 더 살아 놓고. 지나친 어리광이다.
나는 한참이나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경아, 있잖아. 이번 토요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