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2권) (4/7)

04

냉동고 안의 시신이 세 구였던 것에서 어느 정도 짐작했으나 하연희의 부모 역시 남자친구와 비슷한 시기에 살해당했다. 친척도, 교류하는 지인도 없었고 집이 워낙 외진 곳이었기에 그들의 실종은 시신이 발견되기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유일한 가족인 하연희가 신고를 안 했으니 당연했다.

증거물은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 내가 힐끗 보고 나왔던 그 상자에서. 경찰이 들이닥쳐 하연희를 붙잡고, 시신을 찾아내고, 집 안을 수색할 때까지 나는 지하실에 혹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한 건 아닌지 불안해해야 했다. 그러나 남자친구와 부모님을 죽일 때 사용한 장식물이 나왔을 뿐이다.

하연희는 그들을 위협해서 꽃 모양의 장식물을 삼키게 해 죽인 후, 곧바로 목부터 배까지 갈라 그것을 다시 꺼내고 시신은 냉동고에 보관했다. 피도 닦지 않은 장식물이 잼 같은 것을 담는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남자친구는 지하실에서, 부모님은 창고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하연희가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건 지하실에서 상자가 떨어진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남자친구의 경고처럼 느껴졌다고 진술한 걸 듣고 아연해졌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주리라 생각하다니.

범죄자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다. 어떤 논리적 근거도 없이 자신이 전능하다고 믿는 것. 자신이 모두를 굽어보는 자리에 있고, 모두를 통제하고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근거도 무엇도 없는 믿음.

자신이 죽인 사람들조차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위해 줄 거라 생각하는 하연희의 생각 역시 그와 상통한다.

또한 자신의 지능이 높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고지능 중범죄자는 많지 않다. 고지능자는 범죄가 아닌 영역에서 욕구를 충족할 기획력도, 자원도 있다. 굳이 범죄를 저지를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때문에 범죄자는 지능이 낮다. 범죄자들이 가지는 비논리적 전능감은 그 낮은 지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가지지 못했으니 망상에 몰두해버리고 만다. 망상에서만 끝나면 그냥 가여울 뿐이지만 현실의 범죄로 이어지면 망상 아래에 깔아뭉개둔 책임이 몸집을 키운다. 범죄자는 망상에서 벗어나 자신이 저지른 죄와 직면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그런 소동 속에서 내 차를 폐차해야 했다는 사소한 문제가 더해졌다. 강주경은 전화 너머에서 이상을 감지한 즉시 차를 몰아 하연희의 집 담벼락에 들이받았다.

차가 문제가 아니라 범퍼가 다 구겨지도록 충돌하고, 그대로 높은 담장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한 강주경을 병원에 끌고 가서 검사를 받게 하느라 온갖 수선을 다 피워야 했다.

놀랍게도 그는 멍든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아무래도 몸의 구조나 구성 물질부터 나와 다른 게 아닐까 싶었다. 할 수 있는 검사는 모조리 한 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검사실을 여기저기 끌려 다니다 돌아온 강주경은 굳은 얼굴이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는 게 아니기에 무뚝뚝한 시선 앞에서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선생님 일에.”

긴 침묵을 깨고 흘러나온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바짝 세우자 강주경은 표정을 조금 풀었다. 석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고, 나도 그를 따라가듯 머리를 기울였다.

“간섭하지 않을게요.”

“…….”

“대신 어딜 가든 데리고 다닌다고…… 약속해 주시면 안 돼요?”

“미안.”

“……안 되나요?”

나도 사과의 말이 튀어나왔는데, 또 타이밍이 안 좋았다. 강주경의 말을 거절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때를 놓치면 또 휴대폰을 붙잡고 전전긍긍할 내가 보였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휘저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미안한 건,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는 뜻이었어.”

강주경이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뭐, 이렇게까지 위험한 일은 나도 피할 거지만, 너한테 꼭 먼저 말한다고 약속할게.”

정말로. 차로 담장을 들이받았다는 걸 알고 병원에 올 때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주경이도 전화가 연결되어 있는 내내 날 걱정했을 것이다. 살인범에게 위협받고 그 소리를 전화로 생중계하게 될 줄이야.

내 약속에 강주경의 얼굴이 꽤나 풀어졌다.

결국 그날과 다음 날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며 정신없이 보냈다.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주경이는 다시 내 집으로 왔다. 다시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할 타이밍을 찾고 있었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서로 걱정하고 있었지만 강주경은 흠집 하나 안 난 자기 몸을 보여 주며 내가 더 큰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긴 했다. 짧은 시간 동안 비슷한 일을 두 번이나 겪으니 타격이 꽤 컸다. 추운 날씨에 얇은 옷차림으로 나와 있으면서 잔뜩 긴장한 탓인지 감기까지 걸렸고. 선배가 진지하게 굿을 하건 귀농을 하건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는데 순간 혹했을 정도였다. 혼자였다면 무서워서 TV도 켜 놓고 불도 켜 놓고 여기저기 한참 전화를 걸다가 자야 했을 것이다. 그것을 전부 강주경이 대신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한참 끌어안고, 욕실에 데리고 들어가서 천천히 옷을 벗겨 씻기고, 뜨거운 물에 잡아다 담그고(잡아다 담갔다는 말이 딱 맞았다. 나를 든 채로 욕조에 들어가 나올 때까지 끌어안은 채였으니), 보송보송하게 말려서 앞도 옆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품에 쏙 넣은 채 내 등을 쓸었다. 옆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안도가 되는데 이렇게 계속 살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붙어 있으니 불안이 다가올 틈이 없었다.

금세 잠들었고 잠깐씩 뾰족하게 잘린 와인 잔이 목에 파고드는 꿈을 꿨지만 그때마다 강주경의 손이 등을 쓰다듬어 깨어났다. 눈을 뜨면 익숙한 내 침대의 감촉, 방향제 냄새, 강주경의 몸 사이로 얼핏 보이는 벽과 침실 선반, 그리고 내내 내 등을 토닥이고 있는 손.

덕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당연히 병원은 한 번 더 발칵 뒤집어졌다.

정운성이 남긴 폭탄이 더 남아 있을지도 몰라서 예전 환자들의 기록을 살피고, 확인하느라 또다시 다른 교수님들과 심리실이 엄청나게 바빠져야 했다. 나도 한동안 경찰서에 들락거려야 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이정주가 보고서를 무단으로 올렸다는 사실을 입 다물고 있는 바람에 선배와 민 선생님까지 징계를 받을 뻔했지만, 심리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다 이정주의 말을 이미 들은 데다 서 교수님도 나서 줘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뜻밖인 건 이정주가 그대로 잘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싸늘한 분위기의 심리실 한쪽에서 이정주는 뚱한 얼굴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해고는 피할 수도 있는 건이었지만, 이정주가 자리에 남은 건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이번 일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정주의 아버지가 우리 병원 외과 과장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무서운 게 학연 지연 혈연이라더니…….

그나마 지금 심리실이 조용한 건 민 선생님이 이미 이정주를 임상심리학회 윤리위원회에 회부했기 때문이다. 병원 내에서야 외과 과장의 말이 통하겠지만 밖에서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정주는 조용하게 병원을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쪽으로 취직을 못 하게 될 거고, 심리실 사람들은 그걸 알고 있기에 지금은 달리 말을 안 할 뿐이다.

이정주로 말하자면 이번 일로 상당히 기고만장해진 듯했다. 이러고도 안 잘리는 걸 알았으니 더 적극적으로 진상이 되고 싶은 모양이었다. 위원회라는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 꼴을 보는 건 길어야 한 달일 테니까. 애초에 이정주 같은 사람이 누구를 치료할 수 있을까? 남한테 공감도 할 줄 모르는 놈인데.

싫은 사람은 숨만 쉬어도 짜증 난다고, 이정주가 타자 치는 소리를 괜히 거슬리게 생각하다가 시계를 확인하고 일어났다. 병동으로 면담을 하러 갈 시간이었다. 10분쯤 여유 있게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나는 유리벽에 비친 모습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바로 보이는 계단으로 강주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별다른 일 없이 병원 안을 돌아다니는 중일 뿐인지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보폭이 넓어서 금세 계단을 지나쳤다. 완전히 없어질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는데, 거의 다 가서 나이 든 환자에게 붙잡혔다. 환자가 무언가 물어보자 강주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길이라도 물은 모양이다. 고개를 꾸벅이며 멀어지는 환자에게 강주경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친절해 보인다.

‘이래서 연애를 하는구나.’

주책 같지만 이런 식으로 강주경을 보니 괜히 설레었다. 내가 웃고 있는 건 아닌지 뺨을 만지작거려서 확인해야 했다. 너무 흐뭇하게 웃음 짓고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다른 모든 일과 별개로, 그날의 오해가 풀린 건 아니었다. 그가 어영부영 다시 집으로 오긴 했지만 나는 그의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못했다. 강주경은 서 교수님과 어떤 사이인지 다시 묻지 않았고, 나는 나대로 입 열기를 망설이는 상태였다.

나와 교수님 사이에 강주경이 의심할 만한 일은 없다. 하지만 요즘 교수님의 상태를 보면, 앞으로 한동안 그가 기분 좋게 보진 못할 행동을 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주경이에게 어떤 식으로 말해야 할지, 그것도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어쨌거나 그날 밤이 없었던 일이라도 된 것처럼 문제를 덮어 두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답답하지만 이런 고민 자체가 처음이라 도무지 방향을 찾을 수 없었다.

환자를 보낸 주경이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큐리티는 시간에 따라 근무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걸 확인하는 듯했다. 어차피 시간은 조금 남았고,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으려 했는데 강주경이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봤나. 괜히 머쓱해져서 손을 흔들자 그는 난간으로 다가왔다. 역시 보폭이 커서 한 걸음으로 충분했다. 난간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강주경의 머리부터 발까지 전부 보였다. 그는 늘어뜨린 손을 움찔거렸다. 들어 올리려다 멈춘 듯했다. 이어 난간에 한 손을 얹고 뭐라고 입술을 움직인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다.

뭘 할지 궁금해져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웃자 아래에서도 그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주경아.”

“……선생님.”

“일 잘하고 있어?”

강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스케줄을 생각하면 세 시쯤에 잠시 틈이 날 것 같았다.

“세 시 정도에 잠깐 나올 수 있어?”

“네.”

“그럼 산책이나 갈까?”

더 다가올 곳이 없는 것 같은데도 주경이는 난간으로 몸을 붙였다. 난간은 평균 신장에 맞추어 위험하지 않을 정도의 높이였지만 190cm를 넘기는 키에 몸집도 큰 강주경이 바짝 다가오자 무척이나 낮게 보였다.

“위험하잖아, 몸 내밀지 마.”

“괜찮아요.”

“이따가 연락할래?”

그가 고개를 끄덕였고 때맞춰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한 번 더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사방의 벽으로 병원 내부가 보이는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는 동안 강주경과 높이가 같아졌다가, 더 위로 올라왔다. 그는 물끄러미 내가 사라지는 걸 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간호사실로 다가가는 내내 아까와 똑같은 이유로 계속 입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름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개방병동의 조무사 유형식이 날 보자마자 물었다.

“선생님, 뭐 좋은 일 있으셨어요?”

“……음.”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엔 사소하지만 나쁜 일도 아니지 않은가?

사실 나는 사내 연애를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면 이래저래 다른 사람 눈도 신경 써야 하고, 연인이라도 회사 사람이니 퇴근한 후에도 일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고 회사 생각도 날 것 같고, 그러다 만약 헤어지기라도 하면 어마어마하게 어색해질 것 같고…….

하지만 해 보니 꽤나 다르다. 다른 사람 눈을 신경 쓰는 건 생각대로였지만 아무도 모르게 연애한다는 기분이 꽤 두근거렸고, 퇴근한 후에 일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 일하는 중에도 서로를 볼 수 있는 게 좋다. 헤어진 후는, 음.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헤어진 후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어쨌거나 유형식이 좋은 일이 있는지 물을 정도로 풀어진 얼굴을 거울 앞에서 잘 관리한 뒤 병실로 들어갔다. 환자는 볕이 잘 드는 일인용 병실 침대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조경철 씨.”

“음, 벌써 기도할 시간인가?”

“네. 시간이 빨리 가죠?”

병원마다 한 사람씩은 있다는 종교 계열의 환자였다.

그는 서른 살 때부터 신이 보인다는 망상을 겪다가 운 나쁘게 사이비 종교에 끌려가는 바람에 그 종교에 귀의한 뒤 1년 동안 ‘제사장’으로 살았고, 그 탓에 증세가 상당히 심각해졌다.

그나마 제사장이라고 사이비 종교에서 대접이라도 받았다면 모를까 고행을 해야 한다느니 솔선수범해서 제물을 바쳐야 한다느니 하며 사기꾼 놈들에게 이용당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그 종교의 다른 놈들은 전부 감옥에 갔는데, 조경철 환자는 지도자급이었음에도 피해자로 분류되었다.

조경철의 부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나 신이 보인다고 말하는 아들의 말을 믿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독교의 신이 아니라 마귀를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정신과는 부정적으로 생각했고 치료를 받게 할 마음조차 없었으며, 주위에서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권하면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런 그들에게 접근한 게 조경철을 1년 동안 감금하다시피 한 사기꾼들이었다.

사기꾼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치료 시설의 한 단체라고 말했다. 유명 목사가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용히 운영하는 시설, 신앙이 깊은 환자에게만 몰래 찾아가 치료해 주는 곳이라는 말로 속였고, 그 유명한 목사를 종교 방송에서 설교하는 화면으로만 만나 본 조경철의 부모는 유창한 말에 덜컥 넘어가고 말았다. 목사가 친필로 썼다는, 종교적 치료를 권유하는 편지와 그의 도장을 보고 여지없이 믿었다고 한다. 당연히 전부 가짜였다.

조경철을 시설로 데리고 간 그들은 제사장이 해야 할 고행이라고 하면서 청소나 빨래 같은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부모에게는 매달 받는 치료비 외에 특별 기도니 성물 값이니 하면서 돈을 뜯어냈다. 조경철이 갇혀 있던 1년 사이 상당히 부유하던 집안이 기울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1년이 되었을 때 조경철의 부모가 오랜만에 가족 모임에 나갔고, 거기서 친척 중 하나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때쯤 조경철의 부모는 친척들에게 하나씩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치료라는 명목으로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아서.

도박도 사업도 손댈 생각조차 안 하는 사람들인데 꽤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주위에 손까지 벌리는 게 확실히 이상하게 생각될 법하긴 했다.

결국 친척의 설득 끝에 조경철이 종교 치료 시설에 들어갔다는 걸 털어놓았다. 당연히 다들 말도 안 되는 일 아니냐고 펄쩍 뛰었다. 조경철의 부모도 1년 내내 치료 중이라는 걸 핑계로 아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다소 초조해하고 있었기에 친척들의 말에 조금은 귀를 기울였다.

친척들이 나선 결과 사기꾼들은 검거됐고 조경철도 연행되었다가 정신질환이 있는 피해자임이 밝혀지면서 우리 병원으로 들어왔다. 처음 가족들과 함께 상담할 때 그 부모님의 황망한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지난 1년이 조경철의 증상을 어마어마하게 악화시켰다는 사실이 잃은 재산보다 더 그들을 힘들게 한 것 같았다.

병원에 막 왔을 때 조경철은 제사장의 임무대로 순교해야 한다며 계속 자살을 시도했다. 그게 방향을 바꾸어 남들을 축복하고 다니는 쪽으로 바뀌었으니,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여기에 신의 축복을 내려 주겠네.”

“감사합니다.”

면담을 마치고 조경철이 축복을 내려 준 펜을 소중하게 챙겨서 빠져나왔다. 손을 흔들어 주는 조경철의 얼굴은 자상했다. 신이 진짜 있다면 나쁜 놈인 게 분명했다.

평소보다 조금 길어지긴 했지만 다행히 점심시간을 크게 넘기지 않고 끝났다. 다들 이미 식사를 마쳤을 것 같아서 곧바로 혼자 식당으로 향했다.

후다닥 먹고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오늘 메뉴가 쓰인 게시판 앞에 서 교수님이 멍하니 서 있는 게 보였다. 메뉴를 보고 있는 건 아니고, 그 앞에서 발이 멈췄는데 그대로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교수님.”

“……응?”

역시 평소보다 훨씬 기운 없는 시선이 돌아왔다.

올해는 더 빨리 이러는 것 같다. 날이 유독 추워서인지. 가만히 두면 열흘이고 한 달이고 메뉴판 앞에 서 있게 생긴 교수님을 질질 끌다시피 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당근과 양파밖에 안 보이는 불고기와 뭐가 들어간 건지 모를 국 이야기로 몇 마디 잡담을 하는 동안은 교수님도 어느 정도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릇을 대강 비우고 연구실로 올라가려 하는 교수님을 붙들었다. 어차피 오늘 교수님은 오후 진료도 없다.

“커피 마시고 가요, 교수님. 제가 살게요.”

“커피? 좋지.”

말은 그렇게 해도 별로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잡아끌다시피 해서 카페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서 꽤 북적거렸다. 겨우 음료 두 잔을 사서 나오자 교수님은 길을 묻는 보호자에게 수납 창구 위치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가운을 입고 나오면 5분에 한 번 정도는 환자나 보호자에게 붙잡힌다.

“교수님.”

보호자를 보내고 돌아본 교수님이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정문 앞까지만 나가서 바깥바람을 쐬며 커피를 마셨다. 좀 덜 추운 대신 먼지가 가득했지만 이제 다들 적응했는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로비의 카페 브랜드가 바뀐 후에는 메뉴 선택 폭이 넓어져서 더 좋다느니, 정문 언덕이 너무 가파르다느니,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거 엄청 달다.”

“어, 달아요? 시럽 좀 적게 해 달라고 했는데.”

“먹어 볼래?”

교수님이 내민 커피를 한 모금 마셨지만 사실 내 입맛에 그렇게 달진 않았다. 평소에 단 걸 별로 안 먹는 교수님에게는 달지도 모르겠지만, 당분이라는 게 원래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바꿀까요?”

“아니, 괜찮아. 여전히 잘 챙기네.”

아메리카노를 내밀며 묻자 교수님은 고개를 젓더니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제가 뭘요.”

“이제 슬슬 그만해야 할 텐데. 그렇지?”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만해야 한다,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어두운 생각을 멈출 수 있다면 정신과는 전부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뭐라 말을 하려 했을 때 교수님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네.”

-교수님? 지금 병동으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아요! 301호 환자분이…….

“바로 갈게요.”

돌아서는 교수님의 손에서 종이컵을 받아 들었다. 가볍게 눈짓한 교수님이 후다닥 뛰어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진료가 없는 시간이라도, 언제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병원이다. 짧은 한숨이 나왔다.

커피 두 잔을 혼자서 다 마실 수는 없는 일이라 교수님 몫은 적당히 버리고 심리실로 올라왔다. 오후에도 검사 한 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남는다는 핑계로, 반쯤 비운 커피를 책상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들었다.

[점심 맛있게 먹었어?]

[네. 선생님은요?]

[지금 먹고 들어왔어]

서 교수님이랑 먹었다는 건…… 말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들으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서.

[검사실 가야겠다. 이따 연락해]

[네]

토끼가 춤추는 이모티콘을 하나 보내고 일어섰다. 환자 정보는, 스물네 살, 이름은 이미영, 입원 중, 주요 증세는 편집증. 으음. 요새 망상 환자가 유독 많은 것 같다. 나한테만 몰리는 건지. 가끔 이럴 때가 있다. 공기감염이라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특정 질환이 몰리는 시기가.

검사실에 들어온 것은 수수한 차림의 조용해 보이는 여자였다. 인사를 나누는 내내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럼 시작할까요? 우선…….”

막 종이를 꺼내려 하는데 환자가 튕기듯 일어나더니 책상 옆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 있으세요?”

“폭탄이 설치되어 있잖아요!”

“음.”

익숙한 일이었다.

“미영 씨, 여긴 폭발물 검사를 마쳤어요.”

“끝낸 후에 설치했다고요.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아닐 거예요. 제가 폭탄 있는지 검사할 때부터 계속 여기 있었거든요.”

하지만 환자는 불신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폭탄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잘 달래서 의자에 다시 앉히기까지 20분쯤 걸렸다.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긴 했지만 이 검사실이 당장 폭파될 위험이 없다는 건 납득했는지, 순순히 연필을 잡았다.

“제가 보여 드리는 도형을……, 아.”

“아.”

검사를 설명하기 위해 들었던 볼펜 끝이 이미영의 손등에 닿았다.

아, 미친. 망했다.

“당신도, 당신도 한패지?! 내 몸에 지금 칩을 집어넣은 거지?!”

“미안해요. 진정하세요, 미영 씨.”

진정하라고 한다고 해서 진정하면 환자가 아니었다. 비명을 지르는 이미영을 달래 보려 애쓰며 책상 밑을 더듬어 비상벨을 눌렀다. 자기 몸이 곧 폭발할 거라며 겁에 질린 환자의 모습에 몇 분 전의 내 목을 조르고 싶었다.

대체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볼펜에 쓰인 글자까지 읽은 건지 환자는 ‘*아빌리파이! 폭탄 이름이야, 내가 알아!’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제약회사에서 뿌린 볼펜이라서 약 이름이 인쇄되어 있는 것뿐이다.

곧바로 검사실 문이 열리고 남자 간호사가 뛰어 들어와 이미영을 잡았다. 그 뒤로 시큐리티도 두어 명 따라왔다.

“일단 병동으로 올려 보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간호사와 시큐리티들이 이거 놓으라고 소리치는 환자를 데리고 바쁘게 사라졌다. 볼펜. 이놈의 볼펜. 이걸 조심한다는 게 잊을 만하면 이런 실수를 한다. 망상이 있고 경계심 높은 환자에게 예고와 달램 없이 접촉하는 건 발작해 달라고 기도하는 꼴이었다.

전화기를 끌어당겨서 내선 번호를 눌렀다. 담당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가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지만 잘못한 일이기에 고개만 꾸벅꾸벅 숙여야 했다.

“망상이 좀 더 심해지긴 했어요.”

-알겠어요. 투약 늘려야죠, 뭐.

“네…….”

다음 주로 재검사가 잡혔다. 약을 증량했으니 다음 주에는 얌전해진 환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 애꿎은 볼펜을 노려보다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시간을 잡아먹긴 했지만 검사는 시작도 못 했기에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붕 뜨게 됐다.

볼펜은 죄가 없지만 심리실로 가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렸다. 마음의 문제였다. 어차피 모두가 네다섯 개쯤 가지고 있는 제트스트림 볼펜이었다. 심리실에도 발에 채일 만큼 굴러다닌다.

축복받은 볼펜을 가지고 온 게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아니, 그 볼펜 가지고 왔으면 별일 안 생기지 않았을까? 괜히 칙칙한 기분이 들어서 걸음을 빨리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강주경이었다.

“응.”

-선생님? 괜찮으세요?

“으응?”

뭐가, 라고 되물으려다 곧 알았다. 비상벨을 눌렀으니까 주경이 귀에도 들어갔겠구나. 휴대폰을 고쳐 들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었어. 그냥 좀.”

-지금 어디 계세요?

“안과 병동 지나고 있는데…….”

-갈게요.

“여기로?”

-가까워요.

가깝다고 하더니 정말로 주위를 몇 번 두리번거리는 사이 저쪽에서 강주경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휴대폰을 내리고 서서 기다렸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주경이가 내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 마지막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색이 안 좋아요, 선생님.”

“그건 기분 탓이야.”

“그래도…….”

“아하하. 진짜로 기분 탓이라니까. 일하다 온 거 아니야?”

나 때문에 환자가 충격을 받아서 시무룩해진 것만 빼면 아무렇지도 않다. 강주경이 입을 다물고 있는 바람에 결국 검사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야 했다. 솔직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자랑은 아니다. 미간을 긁적거리며 이야기하자 강주경은 그제야 풀어진 얼굴을 했다.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그렇다니까.”

“네.”

환자가 다칠까 봐 걱정은 했지만 다행히 괜찮았다. 나는 다시 강주경을 보았다.

“여기 있어도 돼?”

“가 봐야 해요. 세 시에…….”

“응, 그때 봐. 일 열심히 해.”

마음 같아선 뺨에 입이라도 맞춰 주고 싶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다. 대신 팔을 톡톡 두드려 주고 돌아섰다. 강주경도 잠시 뒤에 서 있다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심리실에 들어오자 다들 비슷비슷하게 지쳐서 컴퓨터 앞에 늘어져 있었다. 이정주는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 선생님. 일찍 오셨네요.”

“좀 사고가 있어서.”

“사고?”

라고 물은 건 선배였다. 두 번 연달아 있었던 일 때문에 선배 역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나치게 위험한 일은 하지 말라고 아주 오랫동안 붙잡혀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아, 아니요, 그런 사고가 아니라. *파라 환자였는데 검사실에 폭탄이 있다고 하는 걸 겨우 달래서 앉혔거든요. 그런데 검사 시작하려다 제가 환자 손등에 볼펜을 대는 바람에.”

“에고.”

유화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흔히 할 법한 실수지만 해서는 안 되는 실수다. 환자를 놀라게 하는 임상가라니 말도 안 된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환자는 병동으로 올라갔고, 검사 전부터 이미 망상이 공고화된 상태여서 투약 늘리기로 했어요.”

“그래. 좀 쉬어, 한 선생.”

“보고서…….”

“아…….”

심리실 전체에서 비슷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다시 자기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려던 유화영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날 보았다.

“한 선생님, 오늘 회식 가세요?”

“회식……?”

“네. 오늘 합동 회식.”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달력을 확인했다. 진짜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합동 회식이라는 빨간 글씨와 동그라미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맨 정신으로 일찍 집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직장인들이 대체로 그렇겠지만 나는 회식이 싫다. 모두가 세상에서 제일 밝은 사람인 척해야 하는 분위기, 고기 냄새, 고기가 아니면 술집 특유의 꿉꿉하고 불쾌한 냄새, 무작정 오고 가는 술잔, 하나도 재미없는 상사의 잡담, 기타 등등.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다 싫었다. 합동 회식이라서 사람이 많으니 구석에 들어가 앉으면 그나마 눈에 띌 일이 없으리라는 게 다행이었다.

한참 일을 하다 올려다보니 벌써 세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카페로 올래?]

[네]

다음 치료가 네 시니까, 30분 정도는 여유가 있다. 가운 대신 점퍼를 걸치고 로비 카페로 내려가자 주경이는 벌써 와서 기다리는 중이었다. 두 손에 따뜻한 음료를 한 잔씩 들고.

“선생님.”

“응. 내 것도 사 놓은 거야?”

“네.”

조금 아까 커피는 마셔서 다른 걸로 하려고 했는데, 라고 생각하며 한 모금 마셔 보니 따뜻한 코코아였다.

“춥지 않겠어?”

“괜찮아요.”

강주경은 정장 재킷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아무리 오늘 날씨가 좀 풀렸다지만, 추위도 안 타고 더위도 안 타는 것 같아서 부럽다.

기온이 올라가서인지 산책로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꽤 있었다.

“오늘 회식 갈 거야?”

“……선생님은요?”

“우린 인원이 적어서 안 가면 바로 들켜.”

“그러면 갈게요.”

음, 그나마 주경이가 같이 간다니 다행이었다. 슬쩍 붙어 있어야지.

“회식 다 없어지면 좋겠다.”

“그래요?”

강주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를 못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그런가요?’였다. 왜인지 없애 달라고 말하면 회식도 다 없애 줄 것 같다. 요새 하도 주경이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더니 신뢰도가 한도 끝도 없이 올라간 상태였다.

그렇게 오래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순식간에 30분이 지나갔다. 심리실로 돌아가서도 바쁘게 시간이 흘렀고, 드물게도 아무도 기다리지 않던 퇴근 시간이 왔다. 다들 주섬주섬 짐을 챙기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회식 장소는 아니나 다를까 병원 근처의 삼겹살집이었다. 병원 사람들로 가게가 가득 찬 시끌시끌한 분위기 속에서 술병이 쌓여 갔다. 다들 집에 가고 싶은 얼굴로 앉아서 매우 즐거운 듯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대요, 헐 정말요? 대박 장난 아니다. 이런 내용도 영혼도 없는 말이 빠르게 오고 갔다. 피차 다들 똑같은 마음이고 아마 회식이 즐거운 건 저쪽 상석에 앉은 관리자 몇 명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도 한 잔은 받아야지! 받기만 하고 앞에 놔!’라는 말로 강권된(당연히 앞에 놓으면 내가 다 마시는지 형형한 눈으로 감시하는) 술 서너 잔 때문에 눈앞이 가물가물했다. 속도 안 좋고, 몸이 이리저리 기울어지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옆으로 쓰러지진 않았다. 뭐에 기댄 듯이 안정감이 있다. 신기한 일이었다.

‘더워.’

밤이 되면서 떨어진 바깥 기온에도 불구하고 가게 안은 덥고,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들고 힘겹게 일어나서 가게 밖으로 나왔다. 겉옷도 안 입고 나왔는데 서늘한 공기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가게 벽에 등을 기대려고 뒤로 기울어졌다. 어째 벽이 따뜻했다.

‘……벽이 왜 따뜻하지?’

멍하니 고개를 들자 뒤에는 벽이 아니라 강주경이 있었다.

“음…… 언제 나왔어?”

술 냄새가 날 것 같아서 신경 쓰인다. 떨어지려고 하는데 땅이 울렁거렸다. 뭐지? 땅이 멋대로 움직인다. 지진인가. 앞으로 홱 고꾸라질 뻔했지만 그러기 전에 단단한 팔이 배를 끌어안았다.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 내 두 팔이 그 위로 축 늘어졌다.

“괜찮으세요?”

“아니이…….”

안 괜찮다. 기분 나쁘게 들큼한 소주 맛이 아직도 입 안에 남아 있었고, 속은 벌써 아프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같이 어지러웠다.

“너는 안 마셨어……?”

“조금요. 괜찮아요.”

“으으…….”

강주경은 멀쩡해 보였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어지러워서 정신이 없다. 비틀거리는 나를 강주경이 추슬러서 똑바로 세우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집에 가요.”

“으, 아직…….”

“아무도 몰라요.”

“정말……? 그럼 갈래…….”

뺨에 부드러운 천이 닿았다. 이어서 따뜻한 체온이. 술기운은 금세 잠을 불러왔다. 의식이 깜빡깜빡 끊어지는 걸 보면 내가 졸고 있는 듯했다.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더니 얼마쯤 가볍게 흔들리고,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고, 잠시 눈을 뜨자 푹신한 시트에 앉아 있었다.

“잠깐만 계세요.”

“으응.”

시트에 몸을 묻은 채 계속 졸았다. 앞좌석 문이 열리고, 뭔가가 조수석 시트에 놓이고, 낯선 목소리가 목적지를 물었다. 강주경이 나지막하게 집 주소를 말했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언제부터인지 강주경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있던 나는 스르르 미끄러져 허벅지를 베고 누워 버렸다. 체온 높은 손이 머리를 쓰다듬었고, 뭐라고 말을 걸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좀 주무세요.”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잠이 쏟아졌다.

* * *

차가 출발하자마자 푹 잠든 한지원은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깨어나지 않았다. 대리기사가 돌아간 뒤 강주경은 그를 안아 들고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감싼 채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앞좌석에 두었던 겉옷 두 벌과 가방을 챙겨 올라가는 동안 잠깐 눈을 뜬 한지원은 어지러운 듯 머리를 기우뚱거리더니 꾸물꾸물 품속에서 팔을 꺼내 강주경의 목에 감았다.

집에 들어오자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씻을래.”

“네.”

집에 오자마자 그는 옷이 거추장스러운 듯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욕실로 향하면서 한 손으로 요령 좋게 옷을 벗긴 뒤 힐끗 상태를 살폈다. 혼자 씻을 수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으나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한지원은 아직도 비몽사몽이었다.

네 잔을 받고 마지막 잔은 절반도 마시지 못했으니 고작 소주 세 잔 남짓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취할 줄이야. 술을 안 좋아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가게에서도 휘청거리는 게 불안해서 기대게 했으나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아예 자신이 옆에 와서 앉은 것부터 모르지 않았을까. 말 한 마디 안 붙인 걸 보면. 그렇게 취한 상태로 비틀비틀 나가려 하기에 따라가서 집으로 데리고 와 버렸다.

욕조에 한지원을 앉히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내내 자더니 조금은 정신이 들었는지 눈을 뜨고 있었다. 강주경은 소매를 걷고 손으로 물 온도를 재며 그를 보았다.

작은 체구여도 심하게 마르진 않았다. 물론 조금 더 살을 찌우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한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 희고 연한 피부와 세운 무릎 위에 얌전히 얹힌 가느다란 양쪽 손목. 체구에 딱 맞게 작은 발과 복사뼈가 도드라진 발목, 매끄러운 다리, 반쯤 감긴 눈의 긴 속눈썹, 강주경은 잠시 물을 틀어 놓은 것도 잊은 채 한지원을 쳐다보았다. 색소가 옅은 머리카락이 따뜻한 물에서 올라오는 수증기에 조금씩 젖어 가고 있었다.

모양이 예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난번에 걸린 감기가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건지, 술이 깨면서 체온이 떨어지는 건지 손톱 색이 희미하게 창백해졌다. 발끝부터 물을 적시자 한지원은 유순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내내 멍하던 다갈색 눈은 몸을 씻기는 동안 점점 빛이 돌아와서, 머리카락의 거품을 씻어 낼 때쯤엔 몇 번 깜빡이더니 꾹 감겼다가 다시 뜨였다. 금방 취해서인지 그만큼 금방 깬 것 같다. 그래도 아직 몽롱한 기색이었다.

몸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 걸 싫어해서인지 그는 가만히 자기 팔을 끌어당겨서 냄새를 맡았다. 무의식중인 듯했다. 양치까지 다 한 몸에서는 샤워젤 향만 날 뿐이다. 그걸 알고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스르륵 웃는다.

강주경은 이제 눈은 또렷하게 뜨고 있는 한지원을 수건으로 감싸서 안아다 침실로 데려갔다.

“저도 씻고 나올게요.”

그가 고개를 가만히 들더니 끄덕였다. 입었던 옷이며 가방을 정리한 뒤 씻고 나오자 한지원은 좀 더 정신을 차렸는지 혼자서 머리를 말린 뒤 베개를 끌어안은 채 누워 있었다. 드라이어를 사용한 후 특유의 미지근한 공기가 침실에 떠돌았다.

아무것도 안 입고, 이불도 덮지 않은 채였기에 다가가자 한지원은 눈을 뜨고 있었다. 그가 안은 것이 자신의 베개임을 깨달은 강주경은 뻗으려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 굳어진 강주경을 잠시 올려다보던 한지원이 눈을 휘며 웃더니 그 손을 끌어당겨서 자기 뺨에 가져다 댔다. 평소 자신보다 서늘한 체온이 지금은 막 잠든 어린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따뜻했다.

이끌리듯이 몸을 기울여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자 두 팔이 뻗어 와 목을 끌어안았다. 맨살에 닿은 한지원의 피부는 부드럽고 따뜻하고, 요즘 유행하는 인형처럼 말랑말랑했다. 입술이 눈가로, 콧등으로, 뺨에서 입술로 내려갔다. 일어난 부분 하나 없이 촉촉한 입술이 맞닿자 배 속이 뜨끈해졌다. 요즘은 한지원을 보기만 해도 흥분하는 것 같다. 짝사랑만 이어지던 지난 5년 동안은 어떻게 참았던 걸까 싶었다.

급하게 맞닿은 입술에서 젖은 소리가 났다. 한지원은 몸을 똑바로 눕히며 매달리듯 강주경을 끌어당겼고, 그 위를 덮은 채 계속 입 맞췄다. 입술이 재촉하듯 벌어졌다. 혀끝으로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부분부터 말캉한 살이 있는 곳까지 쭉 핥아 올리자 한지원이 몸을 가볍게 떨었다.

입 안에 얌전히 있는 혀를 꾹 누르며 빠져나오자 그는 순순히 따라 나와 혀끝으로 입술을 몇 번 핥았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핥는 것과 다를 바도 없는데 상대가 한지원이라는 것만으로 무척이나 야한 짓처럼 느껴졌다.

손이 더듬더듬 뒷목에서 등으로 미끄러졌다. 강주경은 침대를 짚었던 한 손을 들어 한지원의 살랑살랑하게 마른 옅은 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반면에 자신은 드라이어는커녕 수건으로 대강 닦기만 한 게 전부였다. 입술을 잠시 떼며 고개를 든 사이,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 한지원의 뺨에 떨어졌다. 한지원은 멍하니 강주경을 올려다보다가 손끝으로 그 물방울을 닦더니, 그대로 입에 넣었다.

“선생님, 뭘…….”

“으응.”

강주경은 짧은 숨을 내쉬고 완전히 침대 위로 올라왔다. 팔 사이에 갇히듯 누운 한지원이 눈만 들어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이 올라와 뒤통수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술이 깬 건지, 아직 취한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게 중요한가. 둥근 어깨를 손바닥으로 감쌌다가 가슴까지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이 유두에 닿은 것만으로 한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느다란 신음에 순식간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도 이런 성욕은 없었을 것이다. 그대로 팔까지 손을 미끄러뜨려 손목을 들어 올리고, 손등에 입 맞췄다. 손끝에서부터 손가락 사이로 혀를 집어넣어 세게 핥자 흰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손가락의 이음매, 손바닥, 엄지손가락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둥그런 부분, 핏줄이 조금 비쳐 보이는 손목까지 사탕이라도 되는 듯 천천히 핥았다. 피부가 입 안으로 녹아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아……!”

옅은 색의 유두를 입에 물자 가는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손으로 더듬어 움켜쥐듯 허리를 잡자 강하게 빨아 댈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굳이 참으려 하지 않는 신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가슴이 타액으로 질척질척해지고, 잇자국과 검붉은 내출혈이 생길 때까지 한참을 괴롭히자 손안에 잡힌 허리와 등줄기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강주경은 자신의 아래에 깔린 자그마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마른 체격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에 비하면 턱없이 가늘고 연약하게 보였다. 색이 희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욕심껏 두 손으로 움켜쥐면 그대로 어딘가가 부서지거나 으스러질 것 같아서 겁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도 무슨 일만 있으면 한없이 무모해진다. 말로는 선생님 일에 간섭하지 않을게요, 라고 했지만 한지원과 가까워지게 되면서 그를 어딘가에 가둬 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

이전에 주차장에서 만난 그 새끼까지는 그렇다 치고, 얼마 전의 여자…… 굳이 그래야 했을까. 한지원을 말리고 싶었던 건 물론이고 그런 걸 허락하거나 그냥 내버려 둔 그의 동료와 상사, 선배들에게 화가 났다.

잠시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 뻔했던 강주경은 어깨 위로 올라온 손에 정신을 차렸다. 곧바로 눈앞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흔적이 보였다. 숨이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침대에 짚었던 두 팔을 한지원의 등 뒤로 넣어 상체를 안아 들자 그는 저항도 없이 딸려 올라왔다. 아마 힘을 꽤 주었으니 저항하지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입술을 짓누르고 깨물고, 핥고, 빨았다. 목에서 어깨와 쇄골까지 가슴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얼굴을 떼어 냈다.

내내 작게 신음하고 있던 한지원이 강주경의 두 팔에 온전히 체중을 맡긴 채 시선만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눈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강주경이 움직이기 전에 한지원은 어깨 위에 올라가 있던 두 손을 내려 그의 가슴을 짚고, 상체를 꾸물거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빠져나가려는 건가 보다, 하고 강주경은 순순히 팔을 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한지원을 불렀다.

“선생님.”

“으응.”

이제 익숙해진, 끝을 조금 끄는 듯한 대답에 한층 더 당황해야 했다. 한지원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몸을 뒤로 빼면서 강주경의 허벅지 위에 뺨을 얹었다. 등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선이 가볍게 휘어지고, 모양이 예쁜 발끝은 겹쳐지듯 모였다.

허벅지에 머리카락이 닿았다. 바지 안으로 손이 들어와 벌써 일어난 채 젖은 성기를 꺼낼 때까지도 강주경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입술 사이로 귀두 끝을 문 후에도.

한지원은 입술과 혀로 끄트머리를 조금 물고, 핥기만 한 후에 떨어졌다. 떨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두 손으로 성기를 감싸 쥐고 있었고 여전히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입술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그 상태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은 한지원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어떻게 보아도 이래저래 생소해하는 얼굴이었다.

이끌리듯이 손을 뻗어 한지원의 귓가로 가져갔다. 한지원은 그에 머리를 가볍게 문지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조심스럽고, 귀두를 할짝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이대로 머리카락을 잡고 목구멍에 닿을 때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것을 누르는 게 꽤나 큰일이었다. 강주경은 숨을 고른 뒤 한지원의 옆머리를 쓰다듬었다.

“입 더 벌려요, 선생님.”

성기 끝을 입술 사이에 문 채로 한지원이 눈을 들더니, 곧바로 떨어져 입을 벌렸다. 순하고 무방비한 얼굴이었다. 들끓는 것 같은 욕구를 겨우 누르며 말했다.

“혀 내밀어 보세요.”

이번에도 순순히 그대로 따른다. 강주경은 내밀어진 붉은 혀 위에 성기를 얹고 두어 번 움직였다. 성기로 입천장을 살짝살짝 긁자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적어도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잠시 혀 위에 성기를 얹은 채 한지원을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그는 그대로 강주경이 움직이지 않자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다가 눈을 꾹 감았다.

뺨을 쓰다듬으며 일단 빠져나오자 한지원은 그제야 입을 다물며 턱과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혀 아래에 고인 타액이 시트로 떨어졌는지 작은 자국이 몇 개쯤 생겨 있었다. 다시 물어 보라고 하기도 전에 그는 손으로 성기를 끝까지 한 번 쓸어 올리더니 입 안에 머금었다. 조금 전보다는 요령이 생겼는지 혀뿌리 근처까지 들어갔다. 입을 잔뜩 벌린 것 같지만 여전히 버거워 보였다.

강주경은 한 손으로 계속 머리를 쓰다듬으며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시작해 버리면 멈추지 못할 것 같다. 그것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한지원은 아주 조금씩 더 깊게 성기를 삼키려 애쓰고 있었다. 몇 번이고 떨어져 입을 다물고, 침을 삼키고, 숨을 몰아쉬면서 느리게 입 안을 내어 주던 그가 어느 순간 바짝 몸을 굳혔다. 귀두 끝이 목구멍 안쪽으로 약간 들어갔다.

곧바로 떨어진 한지원이 목덜미에 손을 얹은 채 콜록거렸다. 시작부터 이러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곧바로 목구멍까지 집어넣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입천장 끝의 부드러운 살을 짓누르며 지나가 한지원이 생리적으로 기침을 하고, 침을 삼킬 때마다 귀두를 축축한 점막으로 꽉 조이는 걸 느끼고 싶었으나 좀 더 익숙해질 때까지는…….

가볍게 고개를 저은 한지원은 다시 그만큼 성기를 입에 집어넣었다. 조금 전보다는 좀 더 깊었을 것이다.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올라온 걸 겨우 참은 것 같았으니. 대신 입 안에 성기를 가득 문 채로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틀어 막힌 입 안쪽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을 울리는 소리로만 들리는 그것이 더없이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아래도 그렇지만 입 역시 자신의 것이 어떻게 들어가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작고 좁았다.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볼이 불룩해졌다. 귀를 쓰다듬던 손을 뺨으로 내리자 그것이 손바닥에도 느껴졌다.

한참 후에 한지원은 입을 떼어 낸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마도 사정할 때까지, 라고 생각한 듯한데 좀처럼 하지 않으니 지친 모양이었다. 감각은 점점 고양되고 있었고 그 표정에 한층 더 끓어올랐다. 달래듯 뺨을 쓰다듬었다.

“조금만 더요.”

“으응…….”

“힘들어요?”

그가 혀끝으로 성기 뿌리를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힘들면, 선생님. 여기까지.”

강주경은 그의 목울대에서 턱 아래까지를 살살 쓸었다.

“어떻게 집어넣으려고요.”

그러자 성기를 다시 물려 하던 한지원이 멍하니 눈을 들더니, 그 자리를 가늠이라도 하듯 강주경의 손 위에 손을 얹었다.

“여, 여기에, 어떻게?”

멍하니 묻는 얼굴이 어리게 보였다. 네 살이나 연상인 이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차분하지만 가끔 이런 얼굴을 한다. 그대로 끌어당겨 온몸을 끌어안고 어딘가에 가둬 버리고 싶은 무방비한 표정. 강주경은 손끝에 약간 힘을 주어 턱 아래쪽을 만지작거렸다.

“억지로 집어넣을 거예요.”

“지금……?”

눈을 깜빡이는 한지원을 보며 강주경은 작게 웃었다. 흔들리는 눈은 당장은 겁을 먹은 것 같더니 이내 가벼운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이런 면을 내보인 순간 돌아서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으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한지원은 기뻐했다.

“선생님이 조금 더 익숙해지면요.”

“으응, 음…….”

고개를 끄덕인 한지원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성기가 다시 축축한 점막에 감싸이고, 마찰되었다. 입천장이나 약간 깊은 곳을 건드릴 때마다 한지원은 발끝을 움찔거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으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음하는 모습은 시각만으로도 몸을 달아오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정감이 올라왔다. 그는 시간이 길어져 불만인 것 같았으나, 이것도 꽤나 빠른 편이었다고 생각한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꼈는지 한지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하지 못한 듯 고개를 빼려 하지 않았으나 입 안에 정액이 쏟아지자 놀라서 후다닥 물러났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입은 꾹 다물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그 얼굴이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하고, 턱을 잡아 입을 벌리게 했다. 방금 쏟은 정액이 남아 있는 입 안과 혀가 드러나고 얼굴과 입에 탁한 정액이 튀었다.

“아, 아……!”

도망치지 못하도록 뒤통수를 꽉 잡은 채 얼굴에 사정했다. 한지원은 정액이 뺨이며 입술, 눈썹 같은 곳에 쏟아질 때마다 몸을 움찔거렸다. 마찰 때문에 부어오른 입술이 힘겨운 듯 달싹였다.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있는 혀 위의 정액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늘 그렇지만 한 번 사정한 정도로 몸은 가라앉지 않았다. 게다가 한지원이 얼굴에는 정액을 잔뜩 묻히고, 턱이며 입술, 볼,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다 아프다는 듯 갸웃거리며 아직 다리 사이에 머리를 두고 있다면.

그대로 멍하니 강주경을 올려다보던 그는 손등으로 턱에 맺힌 정액을 슥 문질렀다.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거슬려서 그런 건지,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건지, 어쨌든 그게 강주경의 이성을 끊어 버리기엔 충분했다. 그대로 부드러운 허벅지를 붙잡아 벌리며 사이로 들어가 아래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위에서 놀란 듯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으응, 시, 싫어, 그거 하지 마…….”

하지만 싫다고 말하는 것치고 저항은 미약했다. 흘끗 올려다본 한지원의 상체는 순식간에 어깨까지 붉어진 채였다. 접촉이라고는 가슴을 빨고, 구음한 것뿐인데 이미 성기는 잔뜩 젖은 채 일어서 있었다.

특별히 운동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몸에는 군살이 없었다. 꽉 움켜쥐면 금세 새빨갛게 자국이 남는 허벅지와 동그랗게 올라간 엉덩이까지, 물을 조금 섞은 우유처럼 희멀건 피부에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 위에 자신이 남긴 손자국과 멍이 있었던 걸 떠올리고 강주경은 입구에서 가까운 허벅지 살에 이를 세웠다. 입 안에 살을 가득 채워 물자 한지원은 움찔대며 신음했다. 자신과 같은 목욕용품을 사용했는데, 직접 씻겼으니 분명 잘 알고 있는데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다.

혀끝으로 피부를 더듬으며 올라가 다시 그곳에 입술을 댔다. 벌어진 다리가 그걸 피하려 하듯 버둥거렸으나 허벅지 위쪽을 손으로 움켜쥐고 끌어당기자 한지원은 맥없이 끌려왔다. 둥글게 부푼 모양의 입구를 달라붙어서 핥고 안쪽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흐으, 읏!”

일부러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하자 한지원은 신음하며 어떻게든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 당연히 그렇게 둘 마음은 없었다. 근처의 여린 살에 코끝이 닿을 정도로 누른 채 꾹 닫혀 있던 입구가 타액으로 질척하게 젖을 때까지 빨아 댔다. 입구에서 회음, 음낭과 성기 뿌리 부분까지.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는 말간 액체로 씁쓸하게 젖어 있었다.

“아……, 아, 아!”

성기를 입에 넣었다가 세게 조이며 빼내고, 다시 아래로 내려와 혀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한참을 빨린 입구는 타액 때문에 젤이라도 뿌린 것처럼 젖어 있었다. 말랑하게 풀어진 안으로 혀를 뿌리까지 집어넣자 다물어져 있던 입구는 순순히 사이를 벌리며 이물을 받아들였다. 피부와는 다른 느낌으로 부드러운 내벽은 꿈틀거리면서 혀에 감겨들었다.

“으응, 아, 안 돼, 아…….”

한지원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였다. 단단히 붙들린 허벅지에 움찔거리며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대로 사정해 버릴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손가락으로 얕은 삽입을 하듯 혀가 안팎을 드나들었다. 그것이 빨라지고, 젖은 소리가 더 크게 날수록 몸이 튀어 오르는 빈도가 잦아졌다.

“아……, 아, 하윽, 앗, 아!”

허벅지를 거세게 쥐어 하체를 얼굴로 바짝 끌어당긴 순간 납작한 배가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렸다. 일어서서 휘어져 있던 성기에서 툭, 투둑, 하고 정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주경은 그것을 보며 상체를 일으켰다. 한지원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눈을 감은 채 사정하고 있었다. 시트에 한참을 문질렀는지 희고 갸름한 얼굴에는 덜 닦인 정액이 뭉개지듯 묻어 있었다.

곧바로 손끝으로 아래를 더듬었다. 입구는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채였다. 가늠하듯 주위를 짚어 본 강주경은 세 손가락을 한꺼번에 불쑥 밀어 넣었다.

“……아! 아, 아직, 아, 아직, 안, 되는, 데…….”

사정하며 잔뜩 예민해진 내벽은 진득하게 조여들어 손가락을 물었다. 자극에 약한 점막이 물결이라도 치듯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빼냈다가 손가락 이음매까지 퍽 소리가 나도록 집어넣을 때마다 성기에서 정액이 툭툭 튀었다.

한지원은 손등이 하얗게 되도록 베개를 움켜쥔 채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몸을 뒤틀었다. 가슴에서 배로 이어지는 상체가 빠르고 불규칙하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하반신이 들릴 만큼 힘을 잔뜩 주어 밀어 넣으면 여지없이 비명 같은 신음이 쏟아졌다.

손가락을 천천히 빼내자 눈에 보일 정도로 배에 힘이 풀리며 몸이 축 늘어졌다. 짧게 끊어진 채 내뱉어지는 숨결에는 열기가 잔뜩 섞여 있었다. 젖은 손가락으로 틈새를 문지르고 꼬리뼈를 짚자 한지원은 다시 헐떡이며 시선을 돌렸다. 잔뜩 고여 있던 눈물이 옆으로 흘렀다.

강주경은 숨을 고르며 한지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선액으로 미끌미끌한 성기 기둥을 손이 있던 자리에 대고 느릿하게 문지르자 한지원은 움찔거리며 위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아, 아니야, 아직, 아직, 안 들어갈, 거야…….”

“괜찮아요.”

달래 보아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강주경은 몸을 웅크리려 하는 한지원의 허리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 끌어당겼다. 성기가 아래에 맞물리듯 달라붙자 그는 진저리를 쳤다.

“보세요, 벌어져 있어요.”

“아윽!”

기둥에 모로 눌린 입구 위로 손을 뻗어 휘젓듯 벌리자 신음이 터져 나왔다. 품에 완전히 들어가는 몸을 한 팔로 끌어안은 채 다른 팔로는 오금을 붙잡아 안고, 아까부터 끓어올라 터질 듯하던 성기를 끄트머리에서부터 푹 집어넣었다. 품 안에서 가느다란 몸이 잔뜩 긴장해 굳어졌다. 긴 애무에 풀어진 아래는 삼키듯이 성기를 머금었다. 안쪽까지 움푹 젖은 것처럼 수월한 삽입에 한지원은 놀랐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성기가 조금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갈 때마다 기둥에 빡빡하게 감긴 내벽이 우물거리며 길을 벌렸다. 안쪽을 짓누르듯 벌리자 한지원의 가슴이 급하게 달싹거렸다. 느릿한 삽입이었으나 배와 허리는 계속해서 덜덜 떨리듯 튀어 올랐다. 열이 올라 머리가 들끓는 것 같았지만 정신은 명료해졌다. 강주경은 눈앞에서 흐트러진 얼굴로 떨고 있는 한지원의 얼굴을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이대로 집어넣으면 삽입이 그렇게 깊진 않을 것이다.

“으, 으응, 읏……, 아, 아!”

침대에 손을 짚으며 몸을 일으켜, 그대로 한지원을 엎드리게 했다. 성기가 안쪽을 크게 휘젓는 느낌에 한지원은 허리에서 힘이 풀린 듯 상체를 무너뜨렸다. 머리 위로 뻗은 두 팔부터 이어진 등의 근육, 강주경의 손에 붙들려 들린 허리까지 전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매끈한 등에 고인 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

튀어나온 골반을 두 손으로 잡고 그대로 위에서 내리꽂듯 박아 넣자 그는 신음도 되지 못한, 막힌 숨을 내뱉으며 움츠렸다. 덜덜 떨리는 몸을 따라서 내벽도 꿈틀거리며 경련했다. 안쪽의 둥글게 도드라진 예민한 부분부터 가장 깊은 곳, 더는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벽 끝까지 굵은 성기로 빈틈없이 채워진 채로 한지원은 온몸을 뒤흔드는 감각에 견뎌야 했다. 두 손으로 시트를 움켜쥐었으나 그것으로는 이 자극이 어떻게도 해소되지 않았다.

“흐윽, 으, 으흑……, 아…….”

한지원은 입을 벌려 울음소리 비슷한 신음을 흘렸다. 잔뜩 고양된 감각이 그것을 타고 몸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가길 바랐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신음은 이내 쾌감을 분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포가 올라오듯 한지원이 제어할 수 없는 영역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강주경은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며 손바닥으로 꿈틀거리는 등을 더듬었다. 그의 체온이 올라간 만큼 강주경 역시도 달아올라 있었기에 피부의 온도는 서로 비슷하게 느껴졌다.

손이 닿은 것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내벽이 옴쭉거리며 조여들었다. 그 순간 반쯤 정신이 나가 욕심대로 허리를 쳐올릴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아직 성기를 끝까지 머금은 충격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렇게 했다간 정말 부서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할딱거리며 오르내리는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 땀이 맺힌 목덜미며 날개 뼈에 입을 맞췄다.

버거운 삽입으로 굳어졌던 몸이 조금씩 긴장을 풀고 있었다. 손끝이 침대 헤드에 닿을 정도로 뻗은 팔을 더듬으며 올라가 손등 위에 손을 겹치고, 아래를 가볍게 흔들자 한지원은 앓는 소리를 냈다. 밀착한 채로 떨리는 몸에 가학적인 욕구가 확 올라왔다. 이 연한 살이 때리면 얼마나 쉽게 부어오르는지, 그럴 때마다 한지원의 몸이 어떤 식으로 안쪽을 조이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손을 모두 겹쳐 느릿하게 아래로 끌어 내렸다. 길게 뻗은 팔에 맡기고 있던 체중이 어깨로 몰리면서 한지원은 상체를 조금 휘청거렸다. 가슴 아래에서 견갑골이 팔이 움직이는 대로 올라왔다. 강주경은 그의 두 팔을 살짝 뒤로 당기고, 허락을 구하듯이 귓가에 입 맞췄다. 짧게 머뭇거리는 것 같던 머리가 보일 듯 말 듯 끄덕여졌다.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팔을 뒤로 끌어당겼다.

“흐윽, 아……!”

팔이 바짝 당겨지면서 상체가 들린 한지원이 그것에 아픔을 채 느끼기도 전에 점막에 묻히듯 감싸여 있던 성기를 거의 끝까지 빼냈다가 다시 밀어 넣었다. 안쪽은 성기가 빠져나가자 곧바로 다물렸다가 벌어졌다.

몇 번이고 거칠게 드나들기를 반복해도 내벽은 이물을 처음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기를 꽉 조였다. 미끌미끌하고 단단한 점막을 귀두로 짓누르며 들어가 깊은 곳을 찔러 댈 때마다 비명 같은 신음이 쏟아졌다. 한지원의 팔과 상체는 온전히 강주경의 힘으로만 붙들려 몸이 뒤흔들릴 때마다 부들부들 떨렸다.

“아, 읏, 아파, 아……, 이제, 팔, 놔, 줘…….”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휘청거리던 한지원이 제 팔을 앞으로 가져가려 하며 애원했다. 조심스레 팔을 침대 위로 내려 주었다. 이대로 계속 잡고 있다간 어깨를 다치거나, 팔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가 받아 주는 것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의 범위는 꽤나 다를 것이다. 강주경의 눈에 한지원의 몸은 한없이 약하게만 보였다.

두 팔이 시트를 짚은 것을 확인하고 허리를 더듬어 잡은 뒤 다시 거세게 쳐올렸다. 높은 신음 소리와 함께 몸이 위로 떠밀렸다. 다시 끌고 내려오고, 꽂아 넣기를 반복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연결부는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열을 더해 가는 것 같았다. 엉덩이를 꽉 움켜쥐자 안쪽이 끄트머리부터 부르르 떨리듯 조여들었다.

“……기대돼요, 선생님?”

그렇게 묻자 한지원은 잠시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손안에 꽉 쥐었던 살을 세게 내리치자 그는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아, 아……, 아, 자, 잠깐, 앗, 흐윽, 아……!”

그때부터는 제어할 수 없었다. 체위를 바꿀 여유도 없이 끝까지 그를 몰아붙여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의 안에 사정했다. 힘없이 무너지는 몸을 끌어안아 허벅지에 앉히고 사정하면서 내내 가슴과 성기를 주물러 댔다. 한지원은 머리를 강주경의 어깨에 기대고 반쯤 누운 채 넋이 나간 듯 흐느꼈다. 지나치게 느껴 감각이 둔해지려 할 때마다 살을 때리는 아픔에 더욱더 내몰린 한지원은 한 번으로 지칠 대로 지쳐 축 늘어진 몸을 떨어야 했다.

붉어진 눈을 감고 있는 한지원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맞닿은 입술을 곧바로 벌리고 조르기라도 하듯 혀를 내밀었다. 한참 그 혀를 빨다가 따뜻하게 부어오른 입술을 놓아주자 그가 아직도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을 밀어냈다.

순순히 팔의 힘을 풀었다. 한지원은 휘청거리며 두 손을 침대에 짚고는 기어서 품을 벗어났다. 그것이 불안해서 다시 끌어안으려 했으나 앞으로 꾸물거리며 나아간 그가 아직 벌어져 있는 아래로 손을 뻗는 바람에 놀라 행동을 멈췄다.

뾰족한 손끝이 스스로 안쪽을 파고들었다. 검붉은 자국이 남은 살 사이로 손가락이 거의 끝까지 들어가 안을 더듬어 댔다. 강주경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것을 보았다. 손이 빠져나오면서 정액이 주르르 딸려 나오는 것까지.

안에서 정액을 긁어낸 한지원은 이내 팔을 늘어뜨렸다. 방금 자신이 토해 낸 정액이 손자국이 남은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곳에 다시 혀를 가져다 댔다. 이대로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삼키고 싶다.

강주경은 오늘 낮의 일을 떠올렸다. 커피 두 잔을 사다가 그 교수에게 내밀던 모습, 스스럼없이 머리를 쓰다듬게 두던 것. 그가 내미는 잔에 순순히 입을 대고 마시던 것. 전부.

그것을 한지원이 숨긴 것은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마도 기분이 상할 것을 걱정해 굳이 말하지 않은 것일 테니까. 그냥 그 남자의 존재가 신경 쓰일 뿐이다. 그는 한지원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혹시 이런 모습을 한 번쯤 본 것은 아닌지…… 자신과 비슷한 마음으로 한지원을 좋아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할 수만 있다면 자신만 볼 수 있는 곳에 그를 가둬 두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만나고 그들을 위해 움직이고, 자신의 할 일을 하는 한지원의 모습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그러지 못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복잡할 것도 없는 감정이다. 품 안에만 넣어 두고 싶은 마음을, 흰 가운을 입고 주머니에는 사탕을 잔뜩 넣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사랑하는 마음이 덮는 것이다. 그를 가둬 두는 게 아니라 그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사탕이 되고 싶기도 했다. 그가 생각날 때마다 부드러운 손길로 만지작거리는 그런 물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연애가 하고 싶은 건 아니야.’

우연히 자신과 그의 취향이 맞아 그것은 받아 주었지만, 5년이나 무겁게 가지고 있었던 마음을 알았을 때도 받아 줄지는 의문이었다. 한지원은 한없이 상냥해 보여도 선을 그을 땐 긋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이 질척질척한 부분까지도 전부 받아 준다면.

그러면 그때야말로 강주경은 한지원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 * *

내가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린 건 그쯤이었다. 기억이 날아가거나 인사불성이었던 건 아니었다. 술을 마신 후 특유의 고양감이 흥분으로 직결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술기운이 옅어질 무렵엔 다른 흥분이 몸을 뒤덮고 있었다.

“흐, 읏……, 아, 이상해…….”

“이상해요?”

“응, 으응, 간지러워, 아, 아…….”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따끔하기도 한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맞은 자리를 손끝으로 긁을 때와 비슷한 저릿저릿한 감각이 아래에서 떠돌아 머리까지 올라왔다. 술기운 때문인지 몸이 붕 뜨는 것 같고 작은 자극도 예민하게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이 한 번으로 지쳐 나가떨어졌을 텐데 몸이 계속해서 다음을 원했다. 혀가 입구를 꾹 눌러 핥을 때마다 온몸에 전류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흣, 더, 할래……, 넣어 줘…….”

그 말을 하자마자 커다란 손이 뻗어 와 몸을 바로 눕혔다. 두 다리가 벌어져 강주경의 어깨에 걸쳐지고 충분히 풀어져 있어도 버거운 크기의 성기가 재차 안으로 들어왔다. 한 번 받아들였던 것인데도 여전히 배 속이 꽉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아, 아, 꽉, 차서……, 기분, 좋아…….”

신음하듯 흘린 말에 강주경이 숨을 내뱉었다. 땀 때문에 미끄러지려 하는 다리를 다시 걸쳐 놓은 그가 나를 붙들고 거칠게 몸을 밀어붙였다. 아직도 따갑고 욱신거리는 살에 뼈가 세게 부딪혔다. 맞을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날 정도로. 등골을 타고 찌릿한 느낌이 치고 올라왔다.

“더해 줘, 더, 세게, 앗, 아! 아!”

이미 한 차례 시달린 안쪽이며 입구며 전부 저리고 아팠으나 그만둘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몸이 밀려 올라갈 정도로 사납게 허리를 쳐 대던 강주경이 나를 들어 올려 안았다. 상체를 마주 안은 채 다시 그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되자 체중 때문에 삽입은 더욱 깊어졌다. 누운 채로는 닿지 않았던 부분이 새로이 긁히면서 배 속을 부글부글 끓이는 것 같았다. 혈관을 타고 무언가가 계속해서 터졌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는 걸 느끼며 스스로 허리를 움직였다.

단단한 손이 등을 더듬으며 내려가 꼬리뼈에 닿았다. 잔뜩 벌어진 연결부를 손끝이 매만지고 있었다. 따끔따끔한 감각이 기분 좋아서 허리를 더 내리자 그 손은 한층 세게 그 사이를 문질렀다. 이내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은 나는 놀라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안 돼, 그, 그건 안 돼……!”

이미 한계까지 벌어진 아래로 들어오려 하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손끝이 그곳을 짓누르며 닿은 것만으로 등이 빳빳하게 굳어질 정도의 아픔이 올라왔다. 아픈 것보다, 성기와 손가락을 한 번에 받아들이면 정말로 이상해져 버릴 것 같았다. 계속해서 싫다고 웅얼거리자 강주경은 손을 집어넣는 대신 내 등을 쓸어 올렸다.

“이것도, 다음에.”

“다, 다음에……, 나중에…….”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그것을 되풀이해 웅얼거렸다. 다음에……, 아까 그의 것을 입에 물었을 때도 그는 다음에, 라고 말했다. 내 목을 더듬으면서. 그 안쪽까지 무언가 들어갈 수 있는 걸까. 목구멍에 살짝 닿은 것만으로 생리적인 구역질이 올라왔는데. 하지만 구음이 생소하면서도 기이한, 뜨거운 감각을 몰고 온 것처럼 그것 또한 아주 싫을 것 같진 않았다.

목구멍을 열어 성기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강주경이 내게 가르친다고 생각하면 배 안쪽이 근질거리는 듯한 흥분이 올라왔다. 지금처럼 이렇게, 성기를 넣은 채로 손가락을 더 집어넣는 것도. 이미 그의 것만으로 아래는 아무것도 넣지 못할 만큼 벌어져 있는데도.

나는 마른 목으로 억지로 침을 삼켜 적시며 강주경의 목에 매달리듯 안겼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몸이 크게 치받치고, 머리를 마비시키는 것 같은 쾌감이 온몸에 퍼졌다.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이 신음이 쏟아졌다. 흐느끼는 소리 비슷한 걸 내며 그의 목을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가라앉지 않는 감각 때문에 계속 조르고, 빌고, 울고 더 해 달라고 애원해야 했다.

벌벌 떨리는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은 채로 난폭한 절정을 견디며 강주경의 목덜미를 계속 깨물었다. 사정하지 않는 절정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온몸이 마구 떨렸다. 기분 좋다고, 죽을 것 같다고 웅얼거리며 몸을 더 밀착하고 매달렸다.

간신히 조금쯤 진정한 것은 그가 내 안에 두 번째로 사정했을 때였다. 그때까지 몇 번이고 절정으로 내몰린 나는 안쪽으로 정액이 쏟아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온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좋아해요, 선생님.”

귓가로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강주경의 등을 끌어안았다.

* * *

죽겠다.

중간까지는 술기운이었지만 그 후로는 맨 정신이었다. 한 번 퓨즈가 끊기듯이 잠들었던 것 같은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시계를 본 기억도 없다. 정신을 차리니 아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주경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체력이 아니다.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강주경이 체력을 줄이든지, 내가 체력을 늘리든지. 전자는 뭐든 몸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니 내가 체력을 늘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온갖 건강식품의 이름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다 보니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정말 시간은 눈 깜빡하는 사이에 지나간다. 누군가 내 시간을 훔쳐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멍하니 휴대폰을 보고 있다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화면을 끄기 직전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경이었다. 아침에 출근할 때부터 축 늘어진 나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더니 하루 종일 걱정이 담긴 메시지가 쏟아졌다.

[검사하러 병동 올라가려고]

뭘 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같이 갈까요?]

[일하세요, 강주경 씨]

[네]

묘하게 성실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시큐리티까지 대동할 정도로 위험한 환자를 만나러 가는 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강주경은 항상 내 근처에 있다. 어제 비상벨을 눌렀을 때 말고는 대체로 어딘가에서 휙 튀어나오곤 한다. 그렇다고 주경이가 일을 소홀히 하거나 농땡이를 피우거나 하는 건 아닌데. 보안팀은 근무 구역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정할 수 있는 건가?

폐쇄병동에서 잡힌 검사여서 무거운 검사 도구를 주섬주섬 짊어지고 심리실을 나섰다. 피곤하니 검사 도구 무게도 천근만근으로 느껴졌다. 주경이를 부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까지 들 정도였다. 종잇장 들듯이 들어 줄 텐데.

간호사실에 앉은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병실로 들어갔다. 자살 시도가 잦아서 폐쇄병동으로 들어온 10대 후반의 *MDD 환자였다. 이름은 이신아. 푸석하고 어두운 얼굴의 환자와 진행하는 검사는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물어보는 것에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샤 카드를 보여 줘도 환자는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러 번 다시 묻고, 간신히 단답에 가까운 답을 얻으면 다시 그것에 대해 자세하게 묻고, 그러다 보니 마지막 검사까지 가는 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연필이 사각사각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환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종이 검사지를 보며 무척이나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빗질을 하지 않아 엉킨 머리카락이 하나로 묶여 있었다. 손과 눈 말고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 인사에조차 거의 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환자들은 검사자나 의사 앞에서 자기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으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금은 더 입을 열겠지만…… 지금 이신아가 낼 수 있는 에너지의 진짜 한계는 이 정도라는 의미였다.

진단명으로 고정관념을 가져서도, 어떤 병증에 대하여 개인적 감정을 많이 쏟아서도 안 되지만 우울장애를 가진 어린 환자를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인다. 기억은 사람을 구성하는 커다란 요소 중 하나다. 내 기억에서 3년 전 일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일을 그만두는 날까지 떨쳐 버리지 못할 것이다.

평소 걸리는 것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병실을 빠져나가니 간호사가 눈을 둥글게 떴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좀 오래 걸렸네요. 교수님한테도 말씀은 드릴 건데…….”

자살 위험도가 높다는 말과 함께 이신아를 좀 더 신경 써서 봐달라고 당부하고 폐쇄병동을 빠져나왔다. 자신이든 남이든, 누군가를 해할 수 있는 물건이나 방법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 약봉투를 숨기지 못하도록 시간마다 작은 컵에 알약을 담아 주고 그것을 혀 밑이나 어딘가에 감출 수 없게, 삼키는 것까지 전부 확인하고 관리하는 곳.

괜한 걱정인 건 간호사도, 나도 알지만 서로 그것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 환자를 상대할 땐 아무리 조심해도 부족하니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폰을 확인했다.

‘일정이 바뀌어서 다행이네.’

원래는 이신아를 검사한 후에 곧바로 다른 환자의 면담을 가야 했지만 오늘 아침에 변경되었다. 검사 시간을 세 시간 정도로 여유 있게 잡아 놓은 것인데도 이제야 끝났으니, 자칫하면 면담을 못 갈 뻔했다.

바뀐 면담 일정은 내일 오전. 이쪽도 망상 환자였다.

터덜터덜 돌아오자 심리실은 조용했고, 내 책상에 웬 초콜릿이 놓여 있었다.

누가 준 거냐고 물으려 해도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책상을 흘끔거렸지만 딱히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유화영의 책상에도. 단 걸 별로 안 좋아해서 뭘 받으면 모니터 밑에 다람쥐처럼 쌓아 두는 유화영이었으니, 저기에 없는 걸 보면 누가 심리실에 돌리고 간 건 아닌 모양이다.

물끄러미 초콜릿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출처를 알아차렸다. 심리실까지 와서 이걸 두고 갈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강주경 말고.

기운 빼놓은 건 자기면서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하늘색 리본까지 묶인 포장은 병원 카페가 아니라 번화가 쪽으로 나가면 있는 초콜릿 전문점의 것이었다. 어느 틈에 거기까지 다녀온 건지 모르겠지만. 손바닥 정도 크기의 초콜릿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끝으로 톡톡 쳐 보았다. 반들반들한 금색 포장은 손으로 눌러도 구김이 가지 않았다.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다.

‘언제부터 이랬을까.’

턱을 괸 채로 생각했다. 5년 후에도 내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진짜 언제부터 이랬지?

설정이 과하다고 할 정도로 내 취향. 내게 무조건적으로 다정하게 대해 주는 남자. 5년 전부터 나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사람. 네 살 연하. 사내 연애. 고민이 많지 않은 게 고민인 내가 하루 종일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게 만드는 고민의 싹. 귀여운 내 곰 인형.

내 강주경.

거기까지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초조한 사람처럼 손끝으로 초콜릿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초콜릿을 사 들고 나왔을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주경이가 잠자리에서 끊임없이 좋아한다고 중얼거리는 이유를 알았다. 마음이 그 단어만으로 가득 차 버려서.

‘너무 좋아…….’

포장된 초콜릿까지도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물건으로 보였다.

오늘 저녁에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까. 이런저런 말을 골라 보고, 그 말에 강주경이 뭐라 반응할지 생각하며 즐거운 기분에 젖어 있는데 심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얼마나 거칠게 열렸는지 누가 빚이라도 받으러 온 줄 알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정주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정주는 기분 나쁜 일도 없는데(물론 있어도 그러면 안 되지만) 매사 행동이 시끄러웠다. 문 여는 것도, 타자 치는 것도, 전화 통화하는 것도.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갑자기 약간 달아났다.

“안녕하세요.”

“안녕.”

어쨌거나 오늘 처음 얼굴을 맞대는 것이었다. 이정주는 제법 즐거운 기색이었다. 요 며칠 기고만장이 하늘을 찌른다. 심리실에서 아무도 상대를 안 해 주는데도 잘리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윤리위원회에 회부는 되었지만 당장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학회 징계 위원회에서 이걸 담당하고, 조사하고…… 아직 감사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제 심리실에서 이정주가 사라질 건 확실하니 다들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며 지내고 있다.

정운성은 강원도 어디의 사설 병원에 간신히 들어갔다던데 거기 가서 말벗이나 하면서 계속 딸랑거리면 될 것 같다. 어디인가 하면 매해 갱신되는 ‘이 병원만은 가면 안 된다’ 목록에서 10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아주 악독한 병원이었다. 병원이 10년 전에 생긴 것을 생각하면 개원 이래 내내 1위였다는 뜻이니 어떤 의미로 대단했다.

외과 과장이 그 자존심에, 학회 윤리위원회 회부되고 잘린 아들을 애지중지 챙길 것 같지도 않다. 어디에 꽂아 넣었다가 거기서도 비슷하게 사고 치고 잘리면 그게 또 무슨 개망신이야.

어차피 이 직종으로 취업은 평생 불가능할 테니 그렇게 따르던 정운성한테 찾아가서 아들 학원 데려다주고, 정운성 출퇴근도 시켜 주고, 그러면 되지 않을까? 원래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모아서 버려야 하는 법이다.

초콜릿을 모니터 옆에 고이 모셔 두고 보고서 파일을 불러내고 있는데 이정주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가고 말았다. 뭘 하든 관심 끄고 내 할 일이나 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이정주가 환자의 검사지를 보고 있어서.

“이정주.”

“네?”

“지금 뭐 보고 웃어?”

“아, 저요?”

이정주는 그렇게 되묻더니 또 낄낄 웃었다. 저 자식은 분위기 파악이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니, 방금 검사한 남자요. 검사하는 동안 완전 웃겼거든요. 길에서 얻어터지고 병원 왔다는데, 가해자가 고등학생이래요. 무슨 스물다섯이나 먹어서 한참 어린 애들한테 맞고 다니는지. 그리고 제가 검사하다가 중간에 손 한 번 들었는데 때리려고 그러는 줄 알고 바닥에 엎어져서 울더라니까요.”

“…….”

“아, 진짜. 검사하다가 그런 인간 처음 봤어요. 아직도 웃기네.”

“……다시 말해 봐.”

“네?”

너무 황당해서 순간 이게 꿈인가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정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만큼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늘 이정주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생각은 했지만, 지금 이것은 그런 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떤 치료자도 자신의 환자를 저런 식으로 비웃지 않는다. 절대로 그러지 않고, 해서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손끝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면전에서 모욕을 당해도 이렇게 화가 나진 않을 것이다. 아니, 모욕 정도가 아니라 뺨을 맞는다고 해도.

이정주의 행동을 은근히 신경 쓰기 시작해서 이제야 안 건가? 지금까지도 그런 태도였는데,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나? 머리가 끓는 것처럼 뜨거워졌다가 이내 조금 가라앉았다. 형사 사건의 피해자같이 조심성이 필요한 경우엔 1년 차 수련생에게 오더가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이정주가 3년에 한 번씩 있다는 폭탄인 게 밝혀진 후엔 더 그랬다. 검사가 필요하긴 하지만 위험도가 낮은 경증 환자가 그의 주된 검사 대상이었다.

“누가 너한테 그 환자 오더 줬어?”

“최성준 교수님이요.”

머리가 아프다. 정운성이 이 병원의 무능력을 담당하고 있었다면 최성준은 아부와 아첨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자기가 받는 것도 좋아한다.

정운성의 아들을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 갈 정도로 비비기에 능한 이정주가, 정운성이 날아간 후 다음 목표물로 최성준을 짚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성준은 외과랑 친하기까지 하다.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상황이 술술 그려졌다. 술집 몇 번 따라가면서 잔 채워 주고 손바닥 비비다가 ‘어 우리 이 과장님 아들 능력 출중한 거 내가 믿지!’ 하며 중요한 검사 오더를 이정주한테……, 아, 이 미쳐 돌아가는 거지 같은 병원, 씨발…….

“환자 비웃어도 된다고 배웠어?”

“…….”

“묻잖아. 검사 끝내고 와서 환자 비웃어도 되냐고 배웠는지.”

이정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앞에서만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 태도로 퍽이나 환자 앞에서 티가 안 나겠다.”

지금 저런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정주가 환자를 앞에 두고 지극히 친절하고 친근하게 대했을까? 설마. 미숙한 검사자의 태도는 제 딴엔 감추고 있다고 생각해도 감춰지는 게 아니다. 정신과를 찾는 환자는 예민하다. 상대의 모든 행동에서 함의를 찾아내려 한다.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다.

“넌 네가 이 일이 맞는다고 생각해?”

“…….”

“당장 지금만 봐도 그런 태도잖아. 어떻게 환자한테 공감할 건데, 네가.”

“공감은…….”

“공감은, 뭐.”

그리고 이어진 말은 나를 더 경악하게 만들었다.

“아니, 솔직히 실적 많이 올리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희 교수님은 환자한테 공감 너무 많이 하면 정신에 안 좋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하셨는데요?”

이 새끼 진짜 머리에 들어 있는 게 뇌가 아니라 뭐 다른 건가?

어이가 없어서 쳐다보자 이정주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병원은 결국 다 실적 싸움이잖아요. 비급여 승부 아니에요? 가뜩이나 정신과는 만년 적잔데, 그거 흑자 전환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지금 네가 한 말이 내가 너한테 한 말이랑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어?”

“왜 없어요? 저 그 환자 입원이랑 심리치료 예약 따냈는데요?”

“…….”

이정주가 말하는 환자는 나도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환자다. 고작 2주 정도 입원한다고 해도 적게 잡아 오백, 평균 천 정도는 쉽게 넘어가는 입원비를 감당할 수 없다.

실비 보험도 요즘 새로 생기는 것 외에는 보장도 안 된다. 물론 형사사건 피해자이니 비용 지원이 되겠지만, 환자도 환자의 보호자들도 아직 뭐가 어떻게 처리될지 몰라 쉽사리 결정을 못 내리는 상황이었다.

입원에 드는 금액만 듣고도 이미 놀랐을 텐데, 병원과 환자 사이에서 최대한 환자에게 유리하며 부담이 적게 가도록 조율해야 할 임상가가 실적을 운운하다니,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신적 충격이 심한 상태의 환자가 입원과 심리치료를 강권당하면 고개를 저을 수 있겠는가. 엄청난 스트레스만 불러올 뿐이다. 나는 이마를 짚었다. 잠깐이라도 감정을 다스리지 않으면 이정주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낼 것 같았다.

“이정주, 네가 뭐야?”

“……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뭐야, 이 병원에서.”

“수련……생이요.”

“그래. 수련생. 뭘 수련하고 있는 건데.”

“임상심리…….”

“그래. 환자 치료하는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입원이랑 심리치료 예약을 ‘따내’? 여기가 무슨 영업소야? 너 여기에 물건 팔러 다녀?”

“…….”

“입원은 환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조심스럽게 권유. 심리치료도 환자가 동의할 때 권유. 권유하는 이유는 모두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적자, 그래. 정신과 적자야. 우리뿐 아니라 다른 병원들도 다. 그런데 이 병원은 적자 감수하면서 정신과 병상 수, 의료진, 한 번도 줄인 적 없어. 이거 재단 이사장이 무슨 행사 할 때마다 한마디씩 꼭 덧붙이는 거잖아. 이게 왜라고 생각해, 너는.”

“정신과한테 잘하라고 질책성으로 하는 말 아니에요?”

가지가지 한다. 사람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놈이었다.

“여기 수도권 3대 병원 중에 하나야. 정신과 적자 감당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우리가 언론플레이 잘하면서 병상 유지하면 다른 두 병원도 이미지 생각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정신과 병상은 환자를 치료하거나 사회로부터 격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해. 여기 병상과 의료진 유지가 이사장이 정신과에 유독 관심 가지는 부분이야. 그리고 그걸 기회만 되면 어디에든 자랑하고 다녀. 우리 이사장이 등신 머저리여서 그렇게 하는 걸까?”

“…….”

“생색내기야. 하지만 그게 여러 군데서 도움이 되는 생색인 거고. 내 말 이해해?”

“……죄송한데, 전 실적 얘기 하고 있었잖아요. 왜 말을 돌리세요, 한 선생님?”

결국 나는 천장을 보며 한숨을 턱 내쉬었다.

“우리 병원은 정신과의 적자를 알면서도 지원한다, 이 사실을 생색내서 다른 병원도 눈치껏, 병상을 확 없애진 못하도록 한다. 돈 벌자고 병상 유지하는 것 같아? 적자 수준만 보면 정신과 문 닫는 게 제일 편하지. 그런데 3대 병원 중에 하나가 그렇게 닫으면, 환자들은 어디로 가. 가뜩이나 정신질환은 병으로 취급도 안 해 주는 세상에서. 그래서 우리 병원은 적자 끌어안고 계속 그냥 가는 거야.”

이사장 생각이 이렇다는 건 조금 연차가 있는 의료진은 다들 알고 있다. 이사장이라 불릴 만한 사람치고 드물게도 제정신이어서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이사장 한 명이 정상적이라고 해서 병원 전체가 그를 따라가는 건 아니니 이 꼴이 나지만.

“병원 입장은 그런 것 같던데, 1년 차 수련생이 실적을 입에 올리네?”

“…….”

입을 다물어 버린 이정주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애초에 내 말로 반성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지금도 억울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또 뭘 하는지 모르게 자판을 두드릴 줄 알았는데 이정주의 손에 들린 건 휴대폰이었다. 누군가에게 내 욕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빠한테 이르고 있거나.

이정주를 내버려 두고 일어나서 민 선생님에게 갔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하자 선생님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이정주 같은 인간만 아니면 다들 비슷하게 반응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사자를 욕하거나 비웃으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욕한 것보다 더 크게 화를 낸다.

실적이니 뭐니 이야기하는 것도. 아무리 병원이 비급여로 이윤을 내고 싶어 한다고 해도, 그런 병원과 환자 사이에서 환자가 최대한 손해 보지 않을 방향으로 조율하는 게 우리 역할이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한 일을 수련생이 나서서.

“하, 진짜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폭탄이라고 생각은 했는데.”

“그나마 초반엔 조심했던 건가 봐요.”

“머리 아프다. 아직 징계 나오려면 꽤 남았는데…….”

민 선생님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내가 가르쳐야 하는 수련생이 이정주 같다고 생각하면 정말 막막할 것 같았다. 지금이라고 해서 막막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민 선생님도 내년 연수를 앞두고 이게 무슨 불행인가 싶다.

“이정주 앞으로 있는 검사 저한테 다 돌려 주세요.”

“그건 안 되지, 한 선생 몸이 두 개인 것도 아닌데. 배분할게요. 나도 좀 하고.”

“네…….”

이마를 몇 번 더 문지르던 선생님이 전화로 이정주를 불러들이는 것을 보고, 몇 마디 더 갑갑한 대화를 나눈 뒤 심리실로 돌아갔다. 오는 길에 마주치지 않았는데 자리에 없는 걸 보면 내가 나가고 바로 어딘가로 뛰쳐나갔던 모양이다.

화를 가라앉히고 앉아서 일을 하고 있는데 복도에서 빠른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뭐야, 이 새끼 없잖아.”

선배였다. 민 선생님에게 연락을 받은 듯했다.

“민 선생님한테 불려 갔어요.”

“하…… 그래. 한 선생, 일찍 들어가자. 내일부터 바쁠 텐데.”

“네.”

일찍 들어간다고 해도 어차피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일단은 병원을 벗어나고 싶다. 하, 퇴근하면서 차 안에서 무슨 말 할지 고민하던 게 겨우 몇십 분 전인데.

[나 오늘 먼저 갈게 천천히 와]

[무슨 일 있으세요?]

[말하자면 좀 길고... 집에서 봐]

그래 봐야 두 시간 조금 못 되긴 해도.

폐차한 후로는 계속 주경이와 같이 다니고 있다. 적당한 구실이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오늘처럼 시간이 안 맞기도 하니 슬슬 새로 차를 사야 할 텐데. 강주경이 자기가 한 일이니 차를 새로 사 주겠다고 은근히 말했지만 왜인지 그러라고 하면 엄청난 걸 사다 놓을 것 같아서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병원 정문 앞에 줄줄이 서 있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섯 시도 안 된 시간, 해가 거의 지긴 했지만 창밖이 아직 가로등 불빛과 비슷할 정도로 희끄무레하게 밝았다. 씻고 나오자마자 냉장고부터 열었다.

내가 냉장고에 있던 재료를 거의 다 털다시피 해서 식탁을 꽉 채워 놓았을 때쯤 강주경이 집에 돌아왔다. 주방을 보고 멈칫했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정말 무슨 일…….”

“……씻고 나와. 밥 먹자.”

그리고 주경이가 식탁에 앉을 때까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음식을 쳐다보며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강주경에게 우선 먹기부터 하라고 말하고,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묵묵히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식탁이 이렇게 되었다. 그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강주경은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나마 이사장이 정신과 지원해 줘서 다행이지…….”

“그건 아마.”

한참을 하소연하고 나서 머쓱해진 기분으로 입을 다물었는데, 뜻밖에도 그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모기업 방침 때문일 거예요.”

“아.”

병원이 있고, 그 위에 재단이 있고, 또 그 위에 모기업이 있다. 하기야 재단 이사장 경영 철학이 뭐가 되었든 모기업에서 일단 돈이 나와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 환원, 좋은 말이다.

“그럼 내일부터 바쁘시겠네요, 선생님.”

“응? 응, 그럴 거야, 아마.”

“차…….”

“차?”

“사다 둘까요.”

“음.”

‘집에 휴지 사다 둘까요?’라는 말을 잘못 들었나 했다. 바빠지면 오늘처럼 시간이 안 맞는 일도 많을 테니 출퇴근을 따로 하는 게 아무래도 낫긴 하겠지만.

주경이는 처음 차를 새로 사 준다고 말할 때부터 내가 부담스러워할 걸 꽤나 신경 쓰고 있는 듯했다. 당연히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옷이나 신발도 아니고 차를 사 준다는데.

처음에는 그냥 내가 사겠다고 했다. 어차피 주경이가 하연희 집 담벼락에 차를 들이받은 것부터 내가 억지로 거기에 갔기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주경이 물러서지 않았다. 신경 쓰는 건 신경 쓰는 거고 새 차를 사 주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이미 주경이에게 없는 듯했다.

“새로 사야 하긴 하겠는데…….”

왜인지 기대가 어린 것 같은 눈길을 외면하지 못하고 그렇게 웅얼거리자 강주경은 기다렸다는 듯이 휴대폰을 보여 주었다. 어느 틈에 차종을 스크랩까지 해 두었다. 하나씩 넘겨 보자 역시나 기절할 것 같은 가격의 차들이었다.

“너무 비싸. 국산차로도 충분해.”

“……국산차는 내구도가 약하잖아요. 사고라도 나면…….”

음. 범퍼가 구깃구깃해진 내 차가 떠오르긴 했다.

그리고 강주경은 국산차의 온갖 단점을 미리 준비라도 해 둔 사람처럼 줄줄 읊어 댔다. 말을 듣고 있으니 점점 우리나라의 모든 국산차가 종이접기로 만든 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두 손을 들고 강주경이 사자고 하는 차를 사기로 했다. 끝까지 자기가 사 주겠다고 하는 걸 어르고 달래서 내가 사겠다고 결론을 내리기로 했지만, 강주경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차 값 입금해 놓고 모르는 척하는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른다. 갑자기 통장에 거액이 입금되면 재빠르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토요일에 뭐 해?”

“토요일이요?”

주방을 정리하면서 문득 물어보자 그는 그릇을 겹쳐 쌓아서 든 채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아무것도…….”

“그럼 나갈까?”

“좋아요.”

어디에 가는 거냐고도 묻지 않는다. 웃음을 터뜨리면서 내가 이상한 곳이라도 가자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하고 묻자 그는 멈춰 선 채로 빤히 나를 보더니 말했다.

“어디든 좋으니까요.”

“…….”

불의의 일격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마주 보자 강주경은 성큼 다가와서 내 뺨에 입을 맞추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그릇을 나르고, 반찬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데이트하기에 좋은 곳을 빨리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 *

하루에 두 건 정도씩 잡혀 있던 이정주의 스케줄을 선생님과 선배, 내가 적당히 나눠 가졌기 때문에 다음 날부터 어쩔 수 없이 바빠지고, 퇴근 시간도 늦어졌다. 그나마 다들 이정주에게 계속 검사를 하게 두느니 일이 늘어난다고 해도 직접 맡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 다행이었다.

민 선생님에게 호출을 받았다가 돌아온 다음부터 이정주는 검사가 전부 취소되고 심리실에만 붙어 앉아서 자기가 한 과거 검사 면담 녹취록을 만들고 있다. 선생님이 자신을 괜히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보였다. 제 손으로 위원회에 제출될 증거를 만들고 있다고는 꿈에도 모르는 것 같다.

차를 사는 건 일단 조금 미뤘다. 새로 차를 샀을 때의 이런저런 절차를 다 처리할 시간이 없었다. 주경이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지만 알아서 하게 뒀다가 아파트 주차장에서 2억짜리 차와 눈이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덕분에 오늘은 자고 있는 주경이 몰래 일어나서 나오느라 별짓을 다 해야 했다. 감은 눈 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고 거실 욕실에서 조용히 씻고 어제 서재에 챙겨 둔 옷을 입고. 안 그러면 강주경은 자기 출근 시간보다 두 시간 반이나 빠르게 나와야 했기에.

강주경과 출퇴근 시간이 안 맞으면 나는 택시로 다닐 생각이었는데 그렇게 놓아두질 않았다. 그는 약간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하고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안 된다느니, 자기도 일찍 나가서 할 일이 있다느니, 퇴근이 늦어질 땐 남은 일이 있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유를 붙여서 꼭 자기 차에 나를 태워 출퇴근해야 만족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안 된다. 두 주에 한 번인 사례회의가 있는 날이었고, 회의 시간은 오전 7시 30분이었다. 지난번에 별생각 없이 조용히 준비하고 나오려 하다가 귀신같이 깨어난 강주경이 기어이 그 이른 시간에 나를 자기 차에 태웠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열심이니…….

아직 조금 어두운 바깥은 저절로 악 소리가 나올 만큼 추웠다. 날씨는 조금씩 풀어질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역시 겨울 이른 아침의 체감온도는 남극 수준이었다. 추워서 주머니에서 손조차 꺼내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병원 건물에 들어왔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자 강주경이 벌써 일어났는지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다음에는 회의 있는 날도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10분쯤 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회의가 있어서 먼저 출근한다고 메모를 남기고 나왔는데, 뭐 때문인지 평소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서 그걸 확인한 듯했다. 으음. 다음 회의면 2주 뒤인데. 그 전에 차를 사야 하나, 아니면 또 이렇게 몰래 일어나서 나와야 하나.

“춥다. 안녕하세요.”

겨울에는 아침인사 앞에 ‘춥다’가 관용구처럼 붙곤 한다. 따끔거리는 뺨을 누르며 심리실 안으로 들어서자 다들 비슷한 얼굴로 비슷한 인사를 했다. 회의 자료를 정리하느라 바쁜 사람들 틈에 당연히 이정주는 보이지 않았다.

겉옷을 걸어 두고 가운을 입고 있는데 자료를 훑어보던 선배가 말했다.

“한 선생, 이 사람이지?”

누구라고 짚어서 말한 건 아니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정주가 검사했던 형사사건 피해자. 시기상 다음 회의로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우선도가 높다는 판단에 이번 사례로 올라왔다.

녹취록을 통해 들은 검사 내용은 이정주가 심리실에 들어와서 보인 태도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환자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고 소극적이 되어 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환자는 검사 이후로 의료진에게 불신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전까지는 이것보단 그래도 괜찮았는데…… 아버지가 외과 과장씩이나 된다는 게 밝혀진 후로 이정주는 드러내 놓고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입이 근질근질한 걸 그동안 어떻게 참은 건지.

게다가 그 배경 덕분에 하연희 건 같은 큰일을 저지르고도 자리를 유지했고, 그게 ‘어차피 너희는 나 못 건드려.’라는 태도로 발현되는 중이었다. 병원장도 아니고 고작 외과 과장인데 저렇게까지 으스댈 수 있는 것도 재주였다.

“네, 맞아요.”

“으음. 큰일이네.”

가뜩이나 폭행 피해로 충격을 받은 상황이었는데. 수습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예전에 이정주가 사고를 친다면 제발 수습 가능한 사고이기를 바랐건만 정말 이정주의 존재 자체가 재앙이다.

이정주는 7시 18분에야 출근했다.

“……선생님, 혹시 오늘 천재지변 일어나서 쟤가 케이스 발표 안 해도 되고, 그런 거 아니죠?”

유화영이 다가와서 작게 속삭였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회의 시작하자마자 해야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정주는 이미 자료를 다 챙겨 일어서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가운으로 갈아입고 따라 나왔다. 선배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최 교수는 입 좀 마르고 있겠어.”

“그러니까요.”

범죄 피해를 입은 환자는 예민하게 다뤄진다. 이번 일은 피해자가 2차 가해로 병원 의료진을 고소해도 이상하지 않을 문제였다. 당연히 저 얼뜨기 같은 놈에게 오더를 준 최성준도 질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정운성의 목이 갑자기 날아간 이후 교수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떠돌고 있다고 하니, 최성준도 지금쯤 선배의 말대로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겠지. 그리고 그 원망은 고스란히 이정주를 향할 테고.

환자에게나 병원에나 조심스러운 사례였기에 회의실 분위기는 어두웠다.

교수들이 들어온 걸 마지막으로 해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발표를 하기 위해 일어선 이정주에겐 당연히 아무도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환자는 서울에 거주하는 25세의 대학생으로, 길을 가던 중 고등학생과 시비가 붙어……, ……전체적으로 겁먹은 반응을 보였으며……, ……갑작스러운 공포와 무력감으로 인한 *PTSD로 추정됩니다.”

보통 수련생이 사례회의에서 발표를 하는 경우에는 슈퍼바이저가, 즉 민 선생님이 검수를 해 준다.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정주가 검사하고 쓴 그대로 발표가 진행되었다.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고 발표 도중에 대놓고 큰 한숨을 내쉬는 교수도 있었다.

“가족력 검사했습니까?”

“……범죄 피해자라서…….”

“그게 가족력 검사 안 할 이유가 되나? 이정주 선생님, 정신질환에 가족력이 얼마나 큰지 안 배웠어요? 자료 있습니까, 민소라 선생님.”

“익일에 긴급으로 검사했습니다. 환자 어린 시절부터 생활고가 계속되었고, 부친이 유약하면서 히스테릭하며 모친은 과잉통제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환자는 사건 전부터 불안정감이 크고 인정욕구가 있었으며, 다소의 불안 증상을 보였습니다.”

“*온셋 언제로 추정해요?”

“사건 직후로…….”

“그거 하나 맞는 것 같네.”

어느 교수인가의 말에 이정주가 얼굴을 붉혔다.

“가해자 나이가 어리죠. 이게 환자에게 어떻게 작용했을 것 같습니까?”

“그게, 아무래도 자기보다 어리니까 좀 창피하고.”

“법정 가서 그렇게 말할 거예요?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어리니까, 아무래도 그게 자기보다 어리니까 좀 창피하고.’ 가해자 변호사가 들으면 참 좋아하겠어요.”

더 어린, 일반적으로 생각해 사회적 지위가 낮은 가해자의 폭행. 불안 증상과 인정욕구가 있던 피해자에게는 가해자의 연령 또한 충격의 주요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환자의 모친은 과잉통제 경향이 있지만 환자가 자신의 기준에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경우 확실히 칭찬하거나, 벌을 면제해 주곤 했다. 때문에 환자는 ‘얌전히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머릿속에 가지고 살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은 아무런 이유도 없는 무차별 폭행이었다.

환자는 그로 인하여 자신의 근처에 다가오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폭행하려 한다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실질 요인에 의한 대인공포는 언제 완치된다고 장담할 수 없는 치명적인 장애였다.

“그게, 법정에서는…….”

“법정에서는 뭐 다른 말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어휘 없으신 것 같은데? 이정주 선생님, 선생님이 지금 발표한 프로토콜 눈으로 한 번 읽어 봐요. 이것만 보면 ‘이 환자 지금 잠깐 좀 놀랐습니다. 금방 낫습니다.’로 들려요.”

여기저기서 대놓고 혀를 차고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과 검사 결과는 신체적으로 입은 상해의 진단서만큼이나 법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구적인 장애는 몸뿐 아니라 정신에도 남을 수 있다. 가족력, 개인력으로 환자가 얼마나 더 치명적으로 피해를 입었는지 증명해 주는 게 정신과의 역할이었다.

“지금 이정주 선생님이 법정 가서 증명해 줄 입장인가? 주치의, 검사자, 둘이 나란히 피고인 석에 가야겠는데요.”

그 말에 최성준까지 어깨를 움츠렸다.

“됐습니다. 앉으세요. 진세영 선생님, 발표해 주세요.”

살얼음판 같던 케이스 발표가 간신히 정리되고 사회복지팀에게 차례가 돌아갔다.

사건 피해자라도 치료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환자에게 적용 가능한 지원제도를 찾아 연결하는 게 사회복지팀의 역할이었다. 범죄 피해는 정신과 진료비 실비 지원이 있긴 해도, 어떤 검사를 하고 어떤 치료를 하느냐에 따라 심사에서 통과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환자의 집안 형편이 어렵고 사실상 환자가 가장이었기 때문에 앞으로의 생계 지원 문제도 있다.

환자가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까지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고, 사회 복귀까지 가려면 아주 길게 잡아야 했다. 무사히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질 때까지 치료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려면 일이 꽤 복잡했다.

우선 치료비가 해결되어야 다름 단계를 의논할 수 있다. 환자의 스트레스 방지 면에서도 그랬다. 마음 같아서야 가해자에게 전액을 지불하라고 하고 싶지만, 병원으로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하더라도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다.

민 선생님과 교수들, 간호사들 사이에서 의견이 여러 번 오간 뒤에 간신히 병원비 일부와 긴급생계비 국가 지원, 병원 내부 지원제도로 환자의 삼 개월 입원과 심리치료가 결정되었다. 사회복지팀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고 있는데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으라는 듯 말한 것이기에 당연히 들렸다.

-결국 입원도 하고 치료도 하잖아.

‘……회의 중이다, 회의 중…….’

이정주에게 뭐라 쏘아붙일 뻔한 걸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참았다. 다행히 그걸 들은 건 나뿐인 듯했다. 아니면 나한테만 들리게 말했거나.

그럭저럭 현실적인 방안으로 해결책이 제시된 후, 최성준의 이름이 불렸다. 흘끗 이정주를 보았으나 뚱한 얼굴일 뿐 그다지 긴장한 것 같지도 않았다. 발표에서 그렇게 까이고도 저럴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놈이었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감 넘친다고 생각하고 옆에서 보기엔 자아도취인 상태로 앉아 있던 이정주는 최성준의 다음 차례로 교수와 그 윗사람들에게 말로 얻어맞았다.

이름을 불렸을 때 왜 내 이름을 부르냐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으나, 어리둥절한 상태로 일으켜 세워져 발표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폭격을 당하면서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서 교수님은 다정한 편이지만 누굴 질책할 땐 세상에서 제일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곤 했다. 두 시간 남짓 이어지는 회의에서 약 40분이 최성준과 이정주를 질타하는 데 쓰였다.

나란히 감봉을 당한 두 멍청이는 각자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옆에서 콕 찌르기만 해도 비명을 지르며 펄펄 뛸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로 흘끗흘끗 노려보나 싶더니,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정주는 최성준에게 불려 갔다. 최성준이 이정주를 혼내든, 이정주가 말대꾸를 하든, 어디 으슥한 곳에 가서 둘이 머리채를 붙들고 싸우든 내 알 바 아니었다.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 교수님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저거 때문에 다들 고생하고 있다며. 내가 밥……, 아니, 술 한번 산다고 전해 줘.”

저거, 라고 말하며 교수님이 가리킨 건 당연히 최성준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는 이정주였다.

“그래도 그나마 빨리 알아서 다행이죠.”

이정주의 이전 녹취록을 들어 보니, 환자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알고 검사를 빼게 되어서 다행이라 생각할 정도로. 서 교수님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휴. 점심에 시간 돼?”

“음, 안 될 것 같아요.”

“지원이는 따로 점심도 사 주려고 했더니.”

“고생은 다 같이 하는데요, 뭐.”

“우리 지원이는 나한테 특별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교수님은 내 어깨를 툭툭 쳐 주고 돌아갔다. 별생각 없이 나도 돌아서서 심리실로 향하는데, 문득 발이 멈췄다.

‘서 교수님이랑 많이 친하세요?’

왜 지금 그 질문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나는 괜히 죄라도 지은 기분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 교수님이 한 말은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고, 회의실 앞이라서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없다. 주경이가 그 모습을 보진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봤다면 오해했을 수도 있는 말인가?

아닌가?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날 퇴근 시간까지 나는 틈이 날 때마다 이 일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아침 일찍 회의가 있었기 때문에 퇴근은 그렇게 늦어지지 않고, 주경이와 비슷한 시간에 끝났다.

그는 시동을 걸자마자 히터 앞에 손을 대고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지 확인했다. 내 쪽으로 조금 가까워진 얼굴이 중요한 실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하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생각한 말을 입 안에서 정리해 보았다.

서 교수님은 내 대학 선배였다. 당연히 같이 다닌 건 아니고, 이미 졸업한 학교에 자주 찾아오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교수님은 의대고 나는 사회과학대로 전혀 가깝지 않았지만 공통의 지인 때문에 만나게 되었고, 서로 성격도 잘 맞아서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해졌었다. 스무 살밖에 안 되었던 나에게 교수님은 무척 어른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릴 때 잠깐 교수님을 보며 설레었던 적이 있다. 진짜 잠시. 그때부터도 여자보단 남자가 좋았는데, 그 나이대의 괜찮은 남자라는 게 거의 환상종에 가깝다 보니 갑자기 나타난 서 교수님에게 마음이 간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식었다. 애초에 연애 감정이 아니라 선망에 가까웠고.

그때 교수님이 스물일곱 살이었으니 지금의 나보다 어렸지만 스무 살 눈에는 엄청나게 어른스러워 보였으니까, 그 연장선에 지나지 않는 감정이었다.

같은 병원에 다니게 되고, 4년 전 그 일을 같이 겪으면서 유대 같은 게 있는 건 사실이다. 교수님이 이 시기에는 유독 나를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 어쨌든. 대학에 다닐 때 교수님을 따르던 마음과 지금 주경이에게 가진 마음은 무게도 종류도 달랐다.

주경이가 그 질문을 한 게 벌써 꽤 오래전인 것 같다. 대답을 찾지 못해서 지금까지 묻어 두고 있었다. 강주경도 아마 마음 어딘가에 자신이 한 질문을 놓아두었겠지.

내가 대답을 미루던 건 내가 서 교수님을 챙기거나, 연락하는 것에 대하여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설명하려면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아야 한다. 그건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나, 교수님, 그리고…….

하지만 그런 것들을 다 설명하기 전에 강주경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주경아.”

“네.”

“있잖아, 네가 전에 물어봤던 거.”

핸들 위로 손을 옮긴 주경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교수님이랑 친한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

역시 내내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뜬금없이 말을 꺼냈는데도 그는 되묻는 것 한 마디 없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너처럼 좋아하는 건 아니야.”

“……선생님.”

“그러니까, 너만큼 좋아하는 건…… 아니, 난, 내 말은……, 그러니까.”

갑자기 멍청이가 된 것 같다. 분명히 머릿속으로 말을 정돈한 것 같은데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두서가 없었다. 횡설수설을 멈추기 위해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열어야 했다.

“난…… 너만 좋아해. 그, 뭐지……, 무슨, 무슨 뜻으로 좋아한다는 건지, 알지?”

“선생님.”

“으, 응?”

“한 번만 더 말해 주세요.”

그 낮은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내 얼굴은 불을 붙인 것처럼 뜨거워졌다. 강주경은 눈매를 부드럽게 휜 채로, 녹아내릴 것같이 웃고 있었다. 빨리요, 하고 그가 작게 재촉했지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입은 내내 벌어져 있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 뭔가 말하면 바보같이 끙끙대는 소리만 내 버릴 것 같다.

“지…….”

“네.”

“지, 집에, 가자.”

“집에 가면.”

“…….”

“다시 말씀해 주실 거예요?”

얼굴이 화끈거린다. 히터의 열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결국 대답하지 못했으나 강주경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퇴근 시간의 정체에 끼어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 둘 다 말이 없었다. 불편한 침묵은 아니었다.

집에 도착해서 내가 한 걸음 늦게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주경이를 올려다보자, 그는 눈을 마주치더니 다시 웃었다. 순식간에 몸이 위로 들렸다. 어린아이라도 안아 들듯이 두 팔로 나를 받쳐 안은 그는 쉽게 내 신발을 벗겨 버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떨어질 것 같진 않지만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았고,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이 닿았다.

똑같이 추운 주차장과 엘리베이터를 지나서 왔는데 그는 계속 실내에 있었던 것처럼 따뜻했다. 온몸의 온기가 옮아 오는 것 같은 부드러운 입맞춤 후에 강주경은 입술을 거의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선생님.”

점막 위로 입술이 움직이는 게 전부 느껴질 정도였다.

“빨리요.”

“…….”

입을 조금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재촉하듯이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찌릿한 느낌이 허리를 타고 흘렀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이런 상황에서 말하려 하니 도저히, 첫 한 글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하는 나를 강주경은 안아 든 채 입술에, 뺨이나 귓가에 입을 맞추며 기다렸다.

내가 겨우 목소리를 낸 것은 젖은 소리를 내며 몇 번이나 맞닿고 빨리던 입술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기 시작할 때였다.

“……좋아해…….”

“누구를요.”

“너……, 너만…….”

그리고 내가 부끄러움을 느낄 틈도 없이 입맞춤이 이어졌다. 가만히 끌어안고 있던 팔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강주경의 등으로, 뒤통수로 더듬더듬 움직여야 할 만큼 깊어진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혀끝이 입천장의 오돌토돌한 부분을 긁자 온몸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더 안으로 들어와 달라고 조르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입술을 가볍게 깨문 그는 내 입 안으로 혀를 깊게 집어넣어 말랑말랑한 점막을 꾹 누르듯 핥았다. 숨이 막혀 헐떡일 때만 잠깐씩 놓아주면서, 겉옷을 벗기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남기고 전부 풀어 버리는 내내 강주경은 계속 입술이 꽉 맞닿을 정도로 깊게 키스했다.

속옷까지 벗겨지고 내 옷이라곤 단추가 덜 풀린 셔츠만 남았을 때 코트와 재킷만 겨우 벗은 그가 나를 고쳐 안았다. 두 팔 대신 한 팔로 몸을 받치고, 다리는 벌려서 그의 허리에 감은 모양이 되었다. 강주경의 사복은 대체로 단정하다는 걸 빼면 정해 둔 스타일이 없었다. 오늘은 셔츠에 니트 재킷 차림이었다.

나는 거의 맨몸으로, 그는 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로 몸이 밀착했다. 굴곡이 느껴지는 가슴과 배가 곧바로 느껴졌다. 끌어안고 있는 등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렸다. 운동을 해도 근육이 잘 생기지 않는 내게는 강주경이 다른 종족인 것처럼 느껴졌다.

긴 입맞춤만으로 이미 내 것은 반쯤 발기해 있었다. 강주경이 나를 다시 추슬러 안은 순간 그것이 그의 배에 문질러졌고, 동시에 아래로는 옷 너머로 일어선 성기가 느껴졌다.

“읏……!”

한 번에 느껴진 자극에 신음하자 그는 내 귓불을 살살 깨물었다. 느껴지는 숨결이 뜨끈했다. 옷 속으로 들어온 손이 등의 움푹하게 파인 부분을 더듬으며 내려가 허리 아래쪽을 꾹 눌렀다. 몸이 움찔 떨렸다. 팔을 풀고 셔츠를 완전히 벗어 버리려고 했으나, 커다란 손이 등을 눌러 움직일 수 없었다.

“잠깐만, 나 옷 좀…….”

“괜찮아요.”

열이 섞인 목소리를 듣자 곧 나도 옷은 아무래도 좋게 되었다. 그가 팔을 움직여 재차 나를 고쳐 안았다. 머리가 조금 높아졌다. 크게 벌어진 가슴이 강주경의 얼굴 근처까지 올라갔다. 무엇을 하려는지 알고 나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빼려 했으나 역시나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입술이 가슴을 꾹 누르고, 유륜을 가볍게 깨물었다.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이렇게 예민한 부분이라는 것은 그와 섹스를 하기 시작하면서 처음 알았다. 금세 뾰족해진 유두가 입술 사이에 물렸다. 촉촉한 점막이 유두와 가슴을 감싼 채 부드럽게 움직였다. 나른한 고양감이 올라왔다.

입술이나…… 아래쪽을 빨릴 때처럼 낯 뜨거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따금 들리는 소리에 청각까지 자극되었다. 내리깔고 있는 강주경의 긴 속눈썹, 살짝 찌푸려진 미간, 옅게 남아 있는 향수 냄새, 한쪽 가슴을 집요하게 빨리는 느낌과 소리. 대부분의 감각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음, 그, 그쪽만 하지 마…….”

내내 입술 안에 품어져 있던 한쪽 가슴이 따끔따끔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그쪽만 부어오른 게 느껴졌다. 오른쪽만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이상하게 보일 것만 같다. 고개를 가로젓자 그는 순순히 입술을 옆으로 옮겼다.

“응, 으응…….”

강주경은 결국 내가 그만하라고 버둥거릴 때까지 가슴을 빨아 댔다. 어깨를 두 손으로 붙들고 밀어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아서 다리를 휘저어야 했다. 그 바람에 옷 아래 단단하게 일어선 성기를 쓸린 그가 낮은 신음을 내뱉더니 내 가슴을 깨물었다.

“아……!”

따끔한 아픔은 미지근하게 달아오른 몸의 온도를 단숨에 높여 놓았다. 내 것 역시 그와 비슷할 정도로 흥분해서 아직도 단정하게 입고 있는 회색 셔츠 앞섶을 온통 축축하게 적셔 놓고 있었다. 천천히 끓어오른 몸은 더 큰 자극을 원했다. 두 다리로 그의 몸을 더 세게 감으면서 허리를 흔들듯 가볍게 움직였다. 강주경은 숨을 내뱉더니 날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길게 움직이진 않았다. 그가 나를 내려놓은 건 소파 옆의 작은 테이블 위였다. 책이나 간단히 먹을 것을 올려놓는 크기로 간신히 올라가 앉을 수는 있었지만, 크게 벌어진 다리까지 받칠 정도는 아니었다. 다소 불안하게 벽에 어깨를 기댄 내 앞에서 강주경이 테이블 서랍을 열었다.

어느 틈에 넣어 둔 건지 젤이 들어 있었다. 침실에 있는 것과 상표가 다르다. 힐끗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웃을 뿐이었다. 강주경이 내 앞에 앉았다. 소파보다 테이블이 조금 더 높아서 앉은 위치가 묘했다.

한쪽 다리는 발끝으로 바닥을 짚었고, 다른 다리는 허공을 더듬다 소파에 걸쳐졌다. 현관 앞이나 소파에서 한 적도 있는데 왜인지 모르게 테이블은 일상의 공간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강주경이 젤 뚜껑을 열고 손에 내용물을 쏟았다. 병 색이 분홍색이라서 과일 향이라도 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다. 손바닥을 우묵하게 해서 끈적끈적한 젤을 잔뜩 고이게 한 그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평소에 쓰던 거랑 다를 거예요.”

“응? 으, 읏.”

바짝 일어선 성기 위로 차가운 점액질이 떨어지는 감촉에, 물으려 하던 목소리가 신음으로 바뀌어 나왔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멍하니 아래를 보던 나는 젤을 잔뜩 바른 손가락이 느릿하게 안으로 들어와 움직이기 시작한 후 곧바로 차이를 알게 되었다. 분명 차갑기만 하던 젤은 몇 번의 마찰에 온도가 높아졌다. 미지근한가 싶더니 따뜻하다가, 조금 뜨겁다 싶을 정도로.

“이거, 뭐……, 뜨거워…….”

“싫으세요?”

천천히 안을 만지던 손이 멈췄다. 싫다고 하면 깨끗이 씻어 내고 평소 쓰던 것을 가지고 올 것 같았다. 싫은지 묻는다면, 그건, 그렇게 싫진 않기도 하고…… 작게 고개를 젓자 그는 내 허벅지에 입을 맞췄다.

벌써 몇 번이나 몸을 겹쳤는데도 안에 무언가 들어오는 느낌은 낯설었다. 안쪽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기분, 닫혀 있어야 할 점막을 타인의 손끝이 더듬고 만질 때의 기묘한 느낌. 아직 고작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천천히 드나들고 있을 뿐인데도 닿지 않은 안쪽이 욱신거렸다. 뜨거운 윤활제 때문에 오늘은 유독 더 그런 것 같았다.

입구 근처를 풀어 놓듯이 얕은 곳만 오가던 손가락이 내가 숨을 내쉰 순간 끝까지 들어왔다. 내 손보다 훨씬 크고 굵고, 마디가 불거진 손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내가 놀랄 만큼 안을 벌리며 들어왔다. 안쪽 깊은 곳을 조금 더듬다가 완전히 빼낸 그는 손에 젤을 더 뿌리고는 그대로 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하윽……!”

다물어져 있던 점막이 놀란 듯 그의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손이 번들거릴 정도로 많은 양의 젤이 안쪽까지 발려 온도를 높였다. 안쪽이 뜨거워지자 간질거리는 느낌이 더욱 강해졌고, 허벅지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저절로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손가락을 안쪽에서 가볍게 구부리며 끌어당겼다. 손끝이 안쪽의 도톰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누르듯 지나간 순간 온몸에 전류 같은 것이 퍼졌다. 허리가 튀어 오르면서 상체가 주륵 미끄러져 반쯤 누운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거의 강주경의 얼굴 바로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것에 가까워졌다. 창피함에 몸을 뒤로 물리려 했으나 좁은 테이블 위에서는 쉽지 않았다.

“아, 아……, 잠깐, 아, 앗, 아!”

강주경은 미끄러진 내 몸을 요령 좋게 감싸서 받치고는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번 자극당해 꿈틀거리는 예민한 부분을 단단한 손끝이 연거푸 문질러 댔다. 신경이 잔뜩 몰린 그곳도, 손가락을 감싸며 벌어진 입구도 전부 감각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배가 빳빳해지는 느낌과 함께 머릿속이 희게 점멸했다. 아무리 예열이 길었다고 해도 빠른 사정이었다. 가슴까지 투둑투둑 튀는 정액을 보며 나는 계속 멍하니 신음했다. 여전히 배 속이 뜨겁고 간지러웠다. 손을 뻗어 성기를 만지작거리자 말초적인 감각이 올라왔으나 부족했다.

헐떡이며 안을 조인 순간 강주경은 내 몸을 안아 들어 소파로 옮겼다. 커다란 체구가 느릿하게 움직여 몸 위를 덮었다.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축축하고 뜨거운 입구에 둥그스름한 것이 닿았다. 아마도 평소와 다른 이 젤 때문인 것 같다. 너무 화끈거리고, 저리고, 부족하고……, 나는 팔을 뻗어 간신히 그의 허리를 잡았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강주경은 내 허벅지를 눌러 벌리며 오로지 힘으로 안을 파고들었다. 애매하게 벌어져 있던 안쪽이 단숨에 한계까지 벌어지면서 빈틈없이 채워졌다. 나는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눈앞이 새하얗게 비었다. 압박감과 둔통에 숨도 쉬기 어려웠지만 그 이상의 만족감이 버거울 정도로 온몸을 휘감았다.

“아……, 아, 아…….”

단단한 허리에 얹힌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손끝이 그의 살을 긁는 것이 느껴졌으나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디론가 뚝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잔뜩 젖힌 채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사정의 여파가 아직 남아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절정이 오는 것인지 숨을 내쉴 때마다 신음이 쏟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몇 번이나 밀어내는 날 달래면서 천천히 삽입했을 그는 단번에 성기를 끝까지 짓눌러 넣은 채로 짧게 끊어지는 숨을 내뱉었다. 밀착한 하체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뒤늦지만 그제야 강주경이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았다. 무언가 참듯이 입술을 짓씹던 그가 내 배 위를 손으로 짚었다.

“아, 그거, 앗, 아……, 누, 누르지, 마……, 아!”

강한 힘은 아니었다. 손바닥이 아랫배를 덮은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얇은 배 위로 두드러진 이물의 모양을 알 수 있었다.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줄줄 흘러서 옆머리를 온통 적셔 놓았다. 한참이나 그렇게 배를 더듬던 그가 오른손으로 내 왼쪽 발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으응……!”

배 위에서 다리가 교차되면서 안쪽이 저절로 조여들었다. 안 그래도 버겁게 들어차 있던 기둥으로 점막이 우물거리며 마구 달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잡힌 발목에 힘이 들어가고, 발등이 멋대로 오므라졌다. 손끝과 발끝까지 경련이 내달렸다. 그는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꽉 쥐더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아, 안 돼, 아, 흐윽……!”

온몸을 통째로 붙들려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크게 다르지도 않다. 내 몸에는 버거울 정도로 큰 성기가 안쪽을 꿰뚫은 채 난폭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내벽이 빠짐없이 짓눌리면서 마찰되었다. 모든 신경이 다 그곳으로 집중되어 버린 것처럼 머리가 녹아내렸다. 뇌가 끓는 듯한 쾌감이었다. 발목을 붙들린 아픔 또한 흥분을 추가했다. 손으로 잡힌 자리에 멍이 들 것 같다. 손자국이 검푸르게 남을 발목을 생각하자 놀랍게도 배 속이 찌릿해졌다.

“으응, 좋, 아, 더……, 주경아, 아……!”

그가 발목을 놓고 내 오금으로 양쪽 팔을 집어넣어 끌어안았다. 하체가 더욱 높게 올라갔고, 그는 한쪽 무릎을 소파에 댄 채 위에서 내리찍듯이 내 안을 때렸다. 몸이 올라가면서 가슴을 타고 무언가 흘러내려 그제야 내가 어느새 또 사정했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체중을 실어 아래로 꽂히는 삽입의 감각은 사정과 완전히 결이 다른 절정을 몰고 왔다.

“아윽, 아, 아……, 흐아앙, 아, 흑…….”

끄트머리가 벌벌 떨리는 신음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왔다. 안쪽이 뜨겁게 부어오르는 느낌이 젤 때문인지, 삽입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감각기관이 다 쾌감만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한 번의 절정이 끝나기도 전에 새로운 파도가 밀려왔고, 사정도 없는 절정이 겹겹이 쌓이면서 나는 역치를 넘어선 감각 속으로 끌려갔다.

계속 흐려지는 눈을 간신히 떠서 주경이를 마주 보았다. 입술을 얼마나 깨물었는지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성감으로 습하게 젖어 있던 눈은 나와 마주친 한 순간 또렷해졌다가, 내가 그의 입술을 손으로 더듬자 다시 불이 번쩍 튀었다. 몸이 아래로 확 잡아당겨졌다.

“아윽……!”

바닥에 앉아 버린 그와 연결된 채 끌려 내려오는 바람에 그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었다. 그의 체중이 아닌 내 체중으로 삽입이 이어졌다. 성기가 내리꽂힐 때와는 다른 곳을 자극했다. 지나치게 중첩된 쾌감이 쓰라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내 허리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앉히며 가슴을 콱 깨문 순간, 그 저릿저릿한 아픔과 온몸을 관통하는 감각이 뒤엉켜 배 속에서 거칠게 터졌다.

“으응, 읏, 아, 아……!”

성기에서 말간 물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주경이가 나를 꽉 끌어안았고, 안쪽으로 정액이 쏘아졌다. 빈틈이라곤 없는 것 같던 내벽을 정액이 축축하게 적셨다. 사정과는 다른 배출감에 나는 어깨까지 부들부들 떨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직도 단추 두어 개를 푼 것이 전부인 강주경의 셔츠와 바지를 투명한 액체가 잔뜩 적셨다.

한동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도 못하던 우리 중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주경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체를 뒤로 빼더니 내 턱을 잡고 입 맞췄다. 섹스의 여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달고 부드러운 키스였다. 입을 맞추는 동안 나도 조금씩 사고가 돌아왔다. 우선 느껴진 것은 척척하게 젖은 그의 옷이었다. 작게 움직인 것만으로 질퍽질퍽 소리가 날 정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걸 적신 게 무엇인지 몇 초쯤 뒤에 깨달은 내 얼굴은 터질 듯 붉어졌다. 후다닥 일어서려 했으나 주경이는 오히려 더 힘주어 나를 끌어안았다. 아직도 안쪽에 들어와 있던 성기가 꿈틀거렸다.

“응……!”

잠시 가라앉았던 감각이 허리를 타고 다시 올라왔다.

“흑, 자, 잠깐, 옷이라도 벗고…….”

“네.”

내 옷은 이미 입고 있다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고 주경이의 옷은 가슴팍까지 젖었다. 그는 나를 한 팔로 안은 채 셔츠 단추를 풀었다. 젖은 천 아래로도 두드러지던 몸이 완전히 드러났다. 땀과, 다른 액체로도 젖은 몸은 잔뜩 열이 올라 있었다. 일단 내 안에서 빠져나와 날 안은 채 바지까지 벗은 그가 다시 소파에 앉았다. 주위가 엉망이었지만 그게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주경이는 나를 허벅지에 앉힌 채 눈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시 말해 주세요, 선생님.”

“…….”

“빨리요.”

“……좋…….”

좋아해. 너를. 너만. 조금 전까지 그렇게 농밀하게 몸을 섞어 놓고도 그 말을 하자니 부끄러웠다. 하지만 한 번 입 밖으로 흘러나간 말은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 속삭이자 강주경은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언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내리깐 채 듣고 있다가, 내 입이 다물어지자 입술을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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