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7)

03

피곤했다. 어제 하루 종일 집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갔는데 한 달 내내 안 쉬고 일한 사람처럼 피로가 쌓여 있었다. 분명 고민하느라 기력을 다 써 버려서일 것이다. 어제는 정말 살면서 이렇게까지 고민을 해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머리를 굴렸다.

그저께 강주경이 그렇게 돌아가 버린 뒤 현관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터덜터덜 침실로 돌아와 씻고 드러누웠다. 침대에 엎드려서 죽은 듯이 있다가 후다닥 휴대폰을 찾아서 들었더니 집에 도착했다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손가락이 자판 위를 아주 오래오래 떠돌았다. 미안하다고 썼다가 화났냐고 썼다가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썼다가 급기야 지금 만나자는 말을 보낼 뻔하고 급하게 지웠다. 결국 기나긴 고민 끝에 내가 보낸 답은 ‘잘 자’였다. 무려 28분 만이었다.

보내 놓고도 뭔가 더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액정을 만지작거리다가, 강주경이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또 곧바로 ‘선생님도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답장을 하는 바람에 뭘 덧붙이기도 이상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 후로도 휴대폰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노려보다가 시간만 흘려보냈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설치고 날이 밝자마자 확인했으나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고민하다가 잘 잤느냐고 보내자, 5분쯤 후에 지금 일어났다는 답장이 왔다. 일찍 일어난 것 같다는 말과 함께. 강주경의 말대로 나는 보통 휴일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두 시간은 빨리 일어났다.

그대로 잠이 완전히 깨서 더 자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일어나서 뭘 하지도 않고 침대에 들러붙어 하루를 보냈다. 강주경을 생각하면서 온갖 후회를 다 해야 했다. 그렇게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침대에 같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 미칠 것 같았다. 금요일 밤의 한지원에게 가서 말하기 전에 생각했는지 멱살을 잡고 묻고 싶었다.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출퇴근만 따로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결론이 먼저 나왔을 텐데!

그러나 뒤늦게 ‘다시 집에 올래? 생각해 보니까 출퇴근만 따로 하면 괜찮을 것 같아’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강주경이 내가 마지못해 받아 주는 것처럼 오해해 버리면 어쩌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오해에 다시 오해가 쌓이고 대화가 사라지고 골이 깊어져 가고 또다시 사소한 일로 오해하고…… 아, 진짜 어쩌지?

이 생각을 어제 내내 하다가 또 잠을 설쳤다. 강주경과는 딱 세 번 메시지 했다. 아침에, 점심에, 자기 전에. 대화는 놀라울 정도로 뻔했다. 잘 잤어? 점심 먹었어? 잘 자.

이게 뭐야, 대체? 둘 다 자기한테 관심 없는 상대에게 수작질할 때 쓰는 진부한 질문만 주고받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비슷했다. 아주 약간 달랐다. 강주경에게서 온 첫 메시지가 ‘출근 잘하셨어요?’였다. 덕분에 안녕히 주무셨냐는 인사보다 조금 늦어졌으므로 나는 초조했다. 그리고 지금, 11시 10분, 나는 점심 같이 먹겠냐는 메시지를 보낼지 말지 한 시간째 고민하는 중이었다. 같이 먹으면서 어떻게든 대화를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아니 진짜 뭐라고 말하지……?

책상에 볼을 누른 채 휴대폰과 눈싸움하고 있는데 심리실 문이 열렸다. 아무도 없었으니 누군가 들어왔겠지. 슬슬 점심시간이 다가오니 다들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였다.

“한 선생, 안녀엉…….”

내가 출근했을 때 이미 뭔가 하러 자리를 비웠던 선배가 이제야 돌아온 듯했다. 늦은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던 나는 선배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 놀랐다. 눈 밑이 시커멨다. 나는 차마 피곤하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몰골이었다.

“서, 선배. 무슨 일 있었어요?”

“하하. 무슨 일은. 환자가 검사하는 도중에 서른 번쯤 뛰쳐나가서 그것 좀 데리고 오느라고.”

“아…….”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사실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등등의 이유로 뛰쳐나가는 환자는 꽤 많다. 하지만 서른 번이 넘게 탈출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불쌍하게도 선배는 서른 번이 넘게 뛰쳐나간 환자를 쫓아 뛰어가서 설득해 데리고 돌아왔다는 뜻이다. 오늘……이 아니라 한 사흘 치 에너지를 다 쓰지 않았을까?

안쓰러운 마음으로 선배를 쳐다보고 있는데, 선배가 자기 자리도 아니고 문에서 제일 가까운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나를 보았다.

“참, 나 오는 길에 불곰이랑 마주쳤어…… 한 선생, 불곰이랑은 잘돼 가고 있어?”

“네…… 네?”

선배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지금 주경이를 불곰이라고 부른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그다음 말이…….

“걱정하지 마. 내 동생도 연애하느라 아주 정신이 없더라…… 연애…… 좋아? 어때……?”

“…….”

큰일이다. 선배가 지친 나머지 생각이 그대로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급하게 선배를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혀 두고 카페로 뛰었다. 메뉴판에서 제일 단 음료에 초콜릿 시럽을 뿌린 휘핑까지 잔뜩 쌓아서 심리실로 들고 와 빨대의 스푼 부분으로 크림을 떠서 휙휙 선배의 입에 넣었다.

선배는 로봇처럼 크림을 먹었다. 크림이 거의 남지 않았을 때 빨대를 물려 주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선배가 마시면 혈당치가 세 배로 뛸 것 같은 엄청난 음료를 쭉 빨아마셨다. 음료가 단숨에 절반쯤 줄어들더니 거기서 다시 절반, 또 그 절반으로 점점 느리게 수위를 낮췄다.

거의 얼음만 남아서 도로록 소리가 날 때까지 음료를 마신 선배가 5초 후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제 좀 살겠다.”

“괜찮아요, 선배?”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선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 선배 불쌍하게도…….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선배는 환자가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다양하게 도망쳤는지 늘어놓았다. 엄청난 환자였다. 같은 경로로 도망치면 안 된다는 확신이 있어서 점점 난이도가 높아졌다고 한다.

겨우 대화가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때 선배가 한 말이 퍼뜩 떠올랐다. 그러니까, 선배가 생각을 그대로 내뱉는 상태가 되었던 건 맞는데, 강주경을 불곰이라고 하는 거야 이 병원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테니 넘어간다 쳐도 둘이 잘돼 가고 있는지 물었다.

“선배, 전부터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응?”

“저랑 주경이는…….”

주경이는, 뭐라고 해야 하지?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사귀는 거 아니에요? 그냥 주경이가 잠깐 도와줬던 거예요? 어떤 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거짓말이라는 건 알지만 왜인지 그런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에 흠집이 날 것 같다.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아직 안 사귀어?”

“네? 아, 아직?”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선배는 고개를 갸웃했다.

“흠, 그럼 미안. 내가 넘겨짚었네.”

“아니……, 선배, 그게…….”

“내 동생도 사귀기 전에 삽질 엄청 했거든. 걱정하지 마. 지금은 아주 난리도 아니야.”

그렇구나, 선배 동생이 사귀기 전에 삽질을 엄청 했고 지금은 아주 난리도 아니구나. 나는 점점 흐려지면서 선배의 말을 들었다. 애초에 난 선배한테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거지?

“내가 보기엔 한 선생도 그럴 것 같아. 연애에 별 관심 없는 것 같은데 한 번 하면 한 선생도 상대도 서로 퍼주고 싶어서 안달하는 연애라고 해야 하나. 주위에서 보기 흐뭇해지는 그런 커플 있잖아.”선배의 말에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얼굴이 새빨개졌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내가 겨우 물었다.

“선배……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뭐가?”

“제가 남자랑 사귄다고 하는데.”

그 말에 선배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너 지금 임상가한테 편견 있는 거냐고 물어보는 거니?”

“……아.”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가장 편견에서 벗어나야 할 직군 상위권에 드는 게 임상심리사일 것이다. 나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전에…… 선배가 이상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서요.”

“전에? 아, 그때. 아니 그건 같은 회사 사람 둘이 사귄다는 거 알면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호들갑 떨면서 꺄악, 축하해요! 결혼은 언제 해요? 이러는 것보단 낫잖아.”

“…….”

비교가 극단적이었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오늘…… 아, 미역국.”

벽에 붙은 이번 주 식단표를 확인한 선배가 낙담했다. 내가 대신 긍정적이 되기로 했다.

“오늘 저염식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이에요.”

“흑…….”

최악보다는 뭐든 나은 법 아니겠는가. 그렇게 위로했지만 선배는 저염식보다 미역국이 낫다는 생각 대신 수요일이 되면 또 저염식을 먹어야 한다는 절망에 빠진 것 같았다. 슬프게도 같은 처지였다.

“그런데 선배, 주경이요.”

“응.”

“불곰보다는 곰 인형 같지 않아요?”

“뭐라고?”

선배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아무래도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정말이지 큰일이었다. 선배와 식당으로 내려와서 식판을 두고 마주 앉은 뒤에야 내가 강주경에게 같이 점심 먹자는 말을 결국 못 했다는 게 떠올랐다.

미역국에 수저를 담그며 한숨을 내쉬자 선배가 밥상머리에서 한숨 쉬는 거 아니라고 잔소리했다.

“아니, 그게요, 선배…….”

어차피 선배가 안다는 안심 때문인지 내 입에서 강주경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이경민 때문에 같이 살게 된 것부터 어제 있었던 일까지. 다 듣고 나서 선배의 감상은 이랬다.

“저런.”

“어쩌죠?”

“오해하고도 남을 상황이긴 한데…… 강주경 씨 성격이 어떤지 모르니까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강주경의 성격은 어떨까? 사실 나도 다 파악하지 못했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성격인지 다 알 수 있다면 세상에 갈등이 생길 일은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집에서는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일을 잘하고, 나와 취향이 비슷하고, 서정적인 애니메이션을 보고 울기도 하고. 아직 내가 아는 건 그 정도뿐이다.

며칠 전 그와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우린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하지만 강주경은 나를 조금 안다고 한다. 그 조금이 얼마나일까. 5년 전이라면 나는 스물다섯 살, 지금의 강주경보다 어린 나이였다. 이제 막 병원 수련을 시작해서 앞뒤 분간은커녕 발밑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었다. 드디어 사회인이 되었다는 두근거림도 있었다.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매일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집에 돌아가면 푹 삶은 채소처럼 늘어지기만 했다. 보고서 하나를 쓸 때도 책을 몇 권이나 옆에 쌓아 놓고 찾아가며 하느라 지금보다 서너 배는 시간이 걸렸다. 주위에서는 아직 공부하는 중이니까 실수 몇 번은 하는 법이라고 말했으나 나는 병원에 온 환자를 내 공부나 연습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숙한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그것이 최소한이 되기를 바라서 필사적이었던 것 같다.

병원에서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하루 종일 일했기 때문에 휴일이고 뭐고, 친구를 만날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바빴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기에 더 몰두했다. 그렇게 자는 시간 빼고 나머지 시간은 거의 다 일에 쏟았기 때문에 여유 있게 주위를 둘러보진 못했다. 그때 내가 놓쳐 버린 주위 어딘가에 강주경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의 내가 어떻게 비쳤기에 5년이나 강주경의 마음을 잡아 둘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지금 강주경이 어떤지 묻는다면, 연애 초기의 잔뜩 부풀어 오른 설렘과 주위 다른 사람과는 확연히 다르게 큰 호감, 서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어도 좋은 간지러운 기분, 새로 가지게 된 연애 감정 특유의 신선하고 달콤한 느낌, 그런 정도일 것이다.

조금 더 그를 만나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좀처럼 남에게 보여 줄 일 없는 부분이 맞닿고 서로에게 녹아든다면 분명 내 감정은 더 커지겠지만 지금의 내게 5년 후에도 강주경을 좋아하고 있을지 묻는다면 나는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그런데 강주경은 어떻게 나와 대화 한 마디 하지 않고, 내가 그의 시선을 느껴 보지도 못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내게 망설임 없이 너무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신기한 일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쉽게 마음을 물들인다. 만약 그가 내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였다면 우리가 이런 단계에 오기까지는 훨씬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서로 마음을 졸이고 확신하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단계를 건너뛴 연애는 무척 순조로웠다. 그래서 안 좋은가 하면 그렇진 않았다. 나는 원래 그런 종류의 불안함이나 갈등을 싫어한다.

“한 선생, 생각 그만하고 밥 먹어. 점심시간 끝나겠다.”

“아.”

물끄러미 식판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선배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놀라울 정도로 맛없는 미역국과 다 똑같은 맛이 나는 반찬으로 대강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한 잔 더 마시고 나니 금세 검사실로 올라갈 시간이었다.

가기 전에 잠시 서 교수님의 얼굴을 볼 생각으로 외래 병동에 들렀다. 아직 교수님의 오후 진료는 시작되기 전이었다. 부산한 간호사실과 진료 접수창구를 지나 들어가려 하는데 시야 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아주 화려하게 꾸민 여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나치는 간호사들도 티 나지 않게 그 여자를 보고 있었다. 정신과 외래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전부 그렇진 않지만 대체로 편안한 차림이다. 외관을 꾸밀 만한 심리적 여유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역시 내원 환자였네.’

그날은 코트를 입고 있었던 데다, 옷차림보다는 보고 있던 영상에 눈이 가서 알아차리지 못했다. 휴대폰으로 끔찍하게 잔인한 영상을 들여다보던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접수창구 옆쪽에 서 있었다.

무릎 위로 껑충 올라온 푸른색 벨벳 원피스, 뱀 무늬의 금색 금속 재질 벨트, 내가 있는 곳까지 찰랑찰랑 소리가 나는 것 같은 길고 장식이 많이 달린 귀걸이. 짙은 남색 하이힐. 과하게 보일 수 있는 옷차림이었지만 여자가 워낙 화사한 미인이어서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그 차림은 물론이고 여자의 표정 또한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기분 좋은 듯 웃는 얼굴은 주위에서 뚝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무슨 증상이지? 나중에 간호사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서 교수님과 이야기한 뒤 심리실로 돌아왔다.

검사 오더가 내려온 건 그날 오후였다. 환자 이름은 하연희, 담당의는 임현아. 원래는 정운성이 담당하던 환자였고 임 교수님이 들어오면서 그 앞으로 인계되었다.

검사와 진단은 이미 몇 달 전에 끝나 지금은 경과를 보며 투약 중이고, 오늘 전에 마지막으로 내원한 건 한 달 전이었다. 그때 경과가 좋은 것으로 진단되어 투약을 줄였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니 보고서를 다시 확인하고 필요하면 재검사를 진행하자는 내용이었다.

인상착의를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외래 병동에 올라갔을 때 본 그 여자였다. 몇 달 전 입력된 보고서를 확인하니 확실히 이상했다. 검사자는 이정주, 담당의 정운성, 진단은 경증 우울장애와 망상.

‘우울장애라고……?’

하연희의 표정과 옷차림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어울리도록 화려하게 꾸민 모습, 밝은 얼굴.

우울증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다. 가면성 우울처럼, 주위에서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잘 웃는 사람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그렇다는 의미였다. 우울이 없는 사람과는 웃음의 색채 자체가 다르다. 늘 예민하고 남에게 신경을 많이 쓰는 상태로, 특유의 위축이 있다. 경증이라 해도 우울장애가 있다면 그 사람처럼 웃을 순 없다. 그리고 망상.

환하고 밝은 얼굴, 다소 화려하지만 청결하며 세련된 차림. 인상착의는 내가 본 것과 같았다. 매우 양호한 상태라고 쓰여 있었으나 글쎄. 보고서를 쭉 읽어 내려가다가 환자의 망상 내용에서 멈췄다.

‘개를 죽였다, 죽인 후 남자친구도 죽였다, 개는 발끝부터 태워 죽였다, 남자친구에게는 꽃을 먹여서 죽였다고 하는 등 망상의 정도가 심하고, 그 내용을 즐거운 듯이 이야기함.’

면담 아래로 다른 검사 내용이 있었다. 면담과 달리 검사는 검사 자료를 프로그램에 넣어 돌리면 혈액이나 심전도와 똑같이 정확한 수치로 결과를 말해 준다. 그 결과가 이상했다. 사회적 민감도가 높고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지만 대부분의 검사 결과가 노멀 반응이었다. 보통 병증이 없는 사람의 결과가 4점에서 7점 사이. 하연희의 점수는 10점. 그리고 피, 해부. 시체와 살해라는 키워드에 집착하며 사인(死因)까지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확실히 임 교수님이 확인을 요청할 정도로 이상한 보고서였다. 예를 들면 내원한 환자의 BDI가 0점인 것과 비슷하게, 의문을 가질 법한 내용이다.

보고서를 끝까지 읽고서 가장 상단으로 돌아갔다. 검사자 이정주. 그의 자리 쪽을 힐끗 보았다.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표정만 보면 세상에서 제일 보고서를 잘 쓰는 사람 같지만 아마도 지금 바이트로 된 쓰레기를 만드는 중일 것이다.

“이정주.”

“예, 선생님.”

이정주가 제법 싹싹한 척 대답했다. 나를 포함해 심리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는 내가 말을 걸 때 유독 성실한 한국 직장인처럼 군다. 의자를 빼고 돌아앉아서 붙임성 좋게 웃는다. 문제는 다른 누구에게도 이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내년이면 슈퍼바이저, 그다음 해에는 교수로 임용될 선배에게도 똑같았다.

이 새끼가 정운성한테 특히 더 들러붙어서 다닌 건 둘이 기본적으로 비슷비슷해서였다. 비슷비슷하게 짜증 나는 놈들이라는 뜻이었다.

“하연희 환자 녹취 좀 줘.”

“네? 하연희……요?”

하연희가 누구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네가 검사했잖아. 녹취 가지고 오라고.”

이날 검사가 어땠는지, 슈퍼바이저 선생님의 반응은 괜찮았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정주의 입에서 나오는 헛소리를 듣느니 녹취를 듣는 게 제일 정확할 것이다.

“6월 14일, 오후 2시, 담당의 정운성, 환자 이름 하연희.”

“어…….”

“……없어?”

설마. 아무리 들으면서 메모를 해도 사람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어서, 수련 과정에서는 환자의 동의하에 면담 내용을 반드시 녹취한다.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자 이정주는 뭐라고 또 웅얼거리더니 말했다.

“찾기 힘든데…….”

“…….”

조용한 심리실을 채우고 있던 키보드 소리가 한 번에 뚝 멈췄다. 이게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해야 했다.

“정리 안 해 놨어?”

“그게…….”

“그게고 저게고 정리 안 해 놓은 거냐고.”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혼자 하는 것만으로도 하루에 두세 건씩 쌓이는 녹취는 나중에 찾으려면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날짜와 시간별로 정리해 두는 게 당연했는데, 2, 3년 전도 아니고 고작 몇 달 전 파일을 찾기 힘들다고 하니 화가 나는 걸 넘어서 황당할 지경이었다. 뭔가 더 말하려고 하다가 한숨만 내쉬었다.

“찾아와.”

“지금요? 저 보고서…….”

……그 말이 더 이어졌으면 못 참고 소리라도 지를 판이었는데 다행히도 이정주는 그쯤에서 꼬리를 내렸다. 자리로 돌아가서 이어폰을 끼우더니 마우스를 마구 딸각거리는 게 제대로 넘버링도 안 해 놓은 녹취 파일을 찾는 것 같았다.

단순하게 녹취니 보고서니 하는 것 때문에 화난 게 아니다. 환자의 상태와 보고서 내용이 일치하지 않아서 나는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어쩌면 하연희가 지금 함부로 바깥을 돌아다녀선 안 되는 상태일 수도 있다. 담당의가 정운성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진 않았겠지만, 이경민을 집에 돌려보낸 전적이 있는 놈이다.

거의 20분이 지나서 이정주가 녹취 파일을 전송했다. 나는 대답도 하지 않고 곧바로 파일을 재생했다. 인사, 가벼운 잡담, 검사에 대한 설명…… 거기서부터 이미 이상했다. 하연희는 지나치게 말을 잘하고 목소리가 유쾌했다. 조증의 에너지가 지나치게 넘치는 상태도 아니고, 조리 있고 태연하고 밝다. 앞부분만 들으면 외향적인 손님과 직원 정도로 느껴질 수준이었다.

-사실은 얼마 전에 개를 죽였어요.

-개요?

망상에 대한 이야기는 맥락도 없이,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되었다.

-네. 발끝에서부터 불을 붙여서요. 너무 시끄러워서 다른 집에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요? 정말 개를 죽인 거예요?

-죽였다니까요. 그리고 남자친구가 개를 죽였다고 화내서 남자친구도 죽였어요.

-그랬군요.

“…….”

그쯤에서 이정주를 힐끗 보았다. 굳은 얼굴의 그는 키보드가 부서져라 타자를 치는 중이었다. 개를 죽였다면서 그 방법까지 자세하게 말하는데 ‘그랬군요.’라니. 머리가 아파 왔다.

-남자친구는 어떻게 죽였어요?

-꽃을 먹여서요. 투명하고 예쁜 꽃이었어요.

-그래요.

뭔가를 입력하는 소리가 났다. 이 부분에서 아마 망상이 심하다는 내용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죽인 다음에 어떻게 했어요?

-썩을 것 같아서 냉장고에 넣었어요. 냉동실에.

냉장고. 평범한 가정용 냉장고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안에 있는 음식과 선반을 전부 빼도 사람 하나가 들어갈까 말까였다. 냉동실이 텅 비어 있다고 해도 성인 남성의 시신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파일을 일시정지한 뒤 보고서를 다시 보았다. 서울 근교 거주, 아버지가 30년 전부터 큰 정육점을 경영하다 폐업. 시체와 피 반응은 이 영향으로 추정됨.

‘정육점…….’

그런 식으로 연결할 수도 있겠지만 정육점에 들어오는 고기와 동물이나 사람의 시신은 일단 모양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이어 하연희는 시신에 대해 서술하기 시작했다.

‘꽃을 먹은’ 남자친구의 숨이 어떤 식으로 끊어졌는지, 숨이 끊어지는 과정을 보며 자신의 기분이 어땠는지, 그 시신을 어떻게 냉장고에 넣었는지.

-죽은 사람은 무겁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맞더라고요! 무거워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 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전에, 자신이 아들을 죽였다고 말한 남자 환자가 있었다.

죽인 방법과 시신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었지만 보호자로 왔던 남자의 모친이 아이는 잘만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었다. 흔히 있는 상황이었고 단순한 망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 보호자도 그 환자가 평소 잔인한 소설이나 영화를 너무 많이 본다고 말했다.

환자가 아내와 이혼한 후 양육권 소송 중이었고 폭력 전과는 없었다. 상황을 보자면 환자의 말은 망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었겠지만 면담을 할 때 어딘가 느낌이 기묘했다. 내가 아는 지식대로 판단한다면 그에게 망상 조절을 위한 통원치료를 권유해야 했으나, 지식보다 직감이 앞섰다.

검사를 마친 후 바로 민 선생님과 당시 담당의였던 서 교수님에게 이야기했다. 곧 경찰이 움직였고 환자가 이미 한 달 전 아들을 죽였다는 게 드러났다. 아들이 아직 22개월이라 한 달 정도 바깥에서 보이지 않아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상황인 데다, 환자의 모친이 손자의 죽음을 숨겼기에 경찰이 집을 수색하기 전까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이혼한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연락했지만 그쪽은 전부 무시로 일관했다고 한다.

아이가 22개월이면 당연히 어머니의 양육권이 우선되지만, 환자는 아들에게 집착하며 아내를 위협해 반쯤 강제로 빼앗아 데리고 있었다. 특별히 아들을 사랑해서는 아니었다. 아들을 데리고 있음으로서 아내에게 이긴 기분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아들을 죽이고도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 범죄가 자신을 꾸며 준다고 생각했다. 면담하는 내내 섬뜩했었다. 그 번들거리는 눈이나, 자신이 특별한 행동을 했다고 믿는 듯한 들뜬 목소리.

그때와 같은 기분이 든다.

다시 보고서를 읽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했다. 수련생의 보고서는 EMR에 등록하기 전에 확인을 거친다. 이제 막 학부를 졸업한 수련생은 잘못된 판단을 할 가능성이 컸고, 때문에 3년이나 되는 수련 기간을 가지는 것이다. 게다가 망상이라면 전문가들도 갈팡질팡하는 분야인데.

내가 보아도 이상한 보고서를 민소라 선생님이 그냥 통과시켰을 리 없다.

“이정주.”

“……네.”

“이 보고서 확인받은 거 맞아?”

이번엔 심리실 전체의 시선이 대놓고 이정주를 향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내는 게 이정주였으니 다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 그 보고서……, 저기, 정운성 교수님…….”

“민 선생님 확인 받았어?”

대답을 피하듯 어물거리는 이정주에게 다시 묻자, 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운성 교수님이 급하니까 빨리 올리라고 하셔서 일단 EMR에 등록했었는데요…… 확인은 나중에 받으려고 했어요…….”

“너 미쳤어?”

내가 아니라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마침 같은 말을 하려고 했기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미친 새끼들…… 황당하고 화가 치밀었지만 이정주를 붙잡고 추궁하거나 혼낼 때가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래 병동 다녀올게요.”

선배가 내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와 빠른 걸음으로 외래 진료실로 향했다. 어차피 일을 바로 처리하려면 담당의가 있어야 했다. 진료 중이라면 전화를 거는 것보다 직접 찾아가는 게 빠르다.

민 선생님에게도 알리기 위해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을 때, 내가 통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진동이 울렸다. 뛰다시피 연결통로를 향해 가며 끊기 위해 화면을 보니 강주경이었다.

타이밍도 참…… 짧게 고민했으나 일단 전화를 받고, 다시 건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

“응, 주경아, 내가…….”

빠르게 말하려 하던 나는 그대로 발을 멈췄다. 외래 진료실로 가기 위한 연결통로, 벽이 전면유리로 된 곳에서 병원 정문이 내려다보였다. 모여서 서 있는 사람들, 진료 접수나 처방전 발매를 하는 기계, 전광판, 병원 카페, 그 앞에 휴대폰을 든 채 서 있는 강주경, 그리고…….

“주경아.”

-네?

“그 사람……, 그 사람 잡아. 파란 원피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강주경은 곧바로 휴대폰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급하게 연결통로 벽에 달라붙는 것과 동시에 그는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한 팔에 코트를 걸친 파란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강주경이 향하는 방향에 있었다. 두 걸음 만에 다가간 그가 여자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대로 잡고 있어. 금방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며 나는 원래 가려던 외래 진료실 대신 병원 1층으로 뛰었다. 로비로 이어지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 다가가자 하연희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주경이를 보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말하며 붙잡은 것인지 화가 나거나 놀란 기색도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하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드럽게 컬이 들어간 머리카락과 귀걸이가 찰랑거렸다. 뭐라고 하면서 붙잡아야 하지? 이미 시일이 꽤 지난 검사 결과로 환자를 붙잡아 놓을 수 있을까. 우선 담당의에게 연락부터 해야 하는데.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지나갔다.

“……하연희 씨 맞으시죠? 정신건강의학과 한지원이라고 합니다. 곧 연희 씨랑 다시 검사를 하게 될 것 같은데, 마침 지나가시는 게 보여서요.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 이 친구한테 붙잡아 달라고 했어요.”

나는 최대한 수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웃으며 말했다. 내 인상이 남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연희가 나를 빤히 보며 마주 웃었다. 역시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제가 검사 전에 연희 씨한테 추가로 질문할 게 있을 것 같은데…… 혹시 저랑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거, 괜찮으세요?”

내가 휴대폰을 꺼내 가볍게 흔들며 말하자 하연희는 흔쾌히 좋아요, 하고 대답했다. 말의 내용은 검사자로서 말하는 것 같지만 되도록 다른 의도, 그러니까 호감을 숨기지 않는 태도가 보이도록 노력했다.

내 번호를 저장하고, 전화를 한 번 걸어서 자기 번호도 알려 준 뒤 하연희는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병원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차림에 다른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것이 보였다.

“선생님.”

하연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강주경이 나를 불렀다. 짧은 한숨이 나왔다.

“조금 신경 쓰이는 환자라서. 알려 준 거 업무용 번호야.”

어차피 하연희에게 꺼내 보여 준 휴대폰이 환자들과 연락할 때 쓰는 병원 휴대폰으로, 내 것과는 기종이 달라서 바로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신경 쓰이는 환자요?”

“음, 좀 위험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이 말에는 더더욱 인상을 찌푸린다.

“직접 연락하실 거예요?”

“아니, 그냥 일단 연락처만 받아 둔 거야. 나한테 연락할 수도 있으니까…….”

“선생님한테 연락하면요.”

“응?”

“업무용 번호라도 선생님한테 위험할 것 같으면 보통 번호 안 가르쳐 주잖아요. 다른 선생님들도 그렇게 하고요.”

나는 조금 놀라서 강주경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반응을 보일 것 같아서 일부러 ‘신경 쓰이는 환자’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했는데 그는 곧바로 진짜 뜻을 알아차렸다. 난감해져서 미간을 긁적이자 강주경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보았다.

“연락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뭐. 그냥 느낌이 너무 이상해서 그래.”

“……직접 만나자고 하면 찾아가실 건가요?”

뜨끔했다. 사실 이런 식으로 환자를 만난 적이 몇 번 있다. 수련 2년 차 이후로 줄곧 그래 왔다. 물론 나도 무작정 뛰어드는 건 아니다. 안전장치는 해 둔다. 경찰에 대기를 부탁하든, 다른 선생님이나 교수님과 함께 가든. 나도 내 목숨 아까운 걸 아는 사람이다.

“그러려고 준 번호야.”

“선생님.”

“네가 같이 가 줄래?”

그리고 지금 가장 괜찮아 보이는 안전장치는 강주경이었다. 같이 가자는 말에 그제야 그가 표정을 약간 풀었다.

“그런데 전화는 왜 한 거야?”

“…….”

강주경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음, 내가 생각해도 너무 대놓고 말을 돌렸다.

“그냥, 핑계를 찾다가요.”

“핑계?”

“선생님한테 연락할 핑계요. 마침 카페가 보여서…… 커피라도 사다 드린다고 하면서 전화하려고 했어요.”

다행히도 그는 순순히 날 따라서 화제를 바꿔 주었다. 게다가 내용이 뜻밖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커피를 구실로 삼았다는 거였다.

‘……다행이다.’

어색하게 오고 가는 메시지 때문에 불안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웃자 강주경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뜻은 고마웠지만 지금은 카페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교수님을 찾아가는 길에 하연희가 있어서 잠깐 내려왔을 뿐이다. 그렇게 설명한 뒤 일단 주경이를 보내고 외래 병동으로 올라갔다.

임 교수님은 진료 중이었지만, 다음 환자가 들어가기 전에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전말을 들은 교수님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일단 보호자한테 연락해서 바로 내원 잡을게요.”

당장 경찰에 신고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상황이었다. 예전에 아들을 살해했던 그 남자와 달리 이미 전 담당의와 검사자가 단순한 망상이라 진단을 내려 놓았고, 나는 나중에 보고서와 녹취만으로 판단했다. 그때 곧바로 민 선생님이 보고서를 검토하거나 담당의의 판단이 달랐다면 모를까 자칫 섣부른 행동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하연희에게 직접 연락하자고 말한 것이다.

“일단 제 연락처 전해 뒀어요. 통화라도 하게 되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그래요. 부탁해요.”

뒤로 진료할 환자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불안한 기분으로 심리실에 돌아온 나는 곧바로 인터넷 창을 켜고 뉴스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연희가 사는 지역 명, 남자 실종, 실종 사건, 행방불명, 키워드를 바꿔 가며 찾았지만 별다른 건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메신저 프로그램을 열었다. 친구 목록에서 하연희의 이름을 확인하자 메신저 프로그램에 SNS가 연동되어 있는 게 보였다.

곧바로 접속했다. 게시 글이 올라오는 주기는 하루에 한두 번. 적은 횟수는 아니었다. 최신 글에서부터 위로 스크롤하며 글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대부분 일상에 대한 글이었지만 워낙 양이 많아서 몇 달 전으로 올라가기까지도 시간이 꽤 걸렸다. 간신히 하연희가 내원했던 6월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위로.

거기서부터 거슬러 올라갈수록 내 인상은 찌푸려졌다. 이전 게시 글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남자친구 이야기나 사진이 있었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보다 전엔 기르는 강아지의 사진이 자주 올라왔다.

둘 다 6월이 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하연희의 남자친구 사진에는 그의 SNS 주소가 태그되어 있었다. 주소를 따라 들어가자, 마지막 글 작성은 5월 28일이었다.

그 전에도 남자친구 쪽은 SNS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다. 한 달에 두세 번. 하연희가 7월쯤 기르던 강아지가 보고 싶다는 글을 하나 올린 걸 보면 단순히 개는 잃어버렸고, 남자친구와는 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헤어진 후로 남자친구가 더 이상 SNS를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화면을 한참 보던 나는 메신저의 친구 목록을 열었다. 새로 추가한 하연희의 이름이 가장 상단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연희 씨. 잘 들어가셨어요?]

[안녕하세요! 저 아직 가는 중이에요.]

답장은 곧바로 왔다.

[어디 들렀다 가시나 봐요]

[네. 쇼핑 좀 했어요! 지금은 잠깐 신호 걸린 틈에^^]

아까 병원에서도 진료가 끝난 뒤 꽤 시간이 흘렀을 때 빠져나갔다. 별다른 목적 없이 돌아다닌 것 같다. 그 후 쇼핑을 하러 간 거라면 꽤나 활동적이다. 뭐라고 말하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골랐다.

[혹시 시간 괜찮은 날 있으세요?]

돌려 말하는 것보단 직접적인 게 낫다.

[와. 되게 빠르시다ㅋㅋ]

[원래 이런 건 빠른 게 좋잖아요]

[그렇죠. 마음에 들어요!]

메시지를 확인하는 속도도, 보내는 속도도 빨랐다. 어쩌면 운전하면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연희에게 우울장애가 있다는 진단은 역시 의심스러웠다. 우선 우울장애는 남의 기분을 많이 신경 쓰고 거절당하는 걸 두려워한다. 스스로에게 자신감도 없는 편이다. 하지만 하연희는 자신이 주목받는다는 걸 충분히 알고 그걸 즐기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럼 오늘은 어떠세요?]

오늘? 이것도 상당히 빠르지만…… 늦는 것보다야 빠른 게 낫다. 하연희가 먼저 오늘이라고 말해 주어 다행인지도 모른다.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저는 너무 좋죠.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으세요?]

[저희 집 오실래요?]

이번엔 잠시 멈칫해야 했다. 집이라니. 다른 사람이 있는 장소도 아니고, 집은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집이면 주경이가 가까이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괜찮을까.

하지만 거절한다면 하연희는 더 이상 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연희 씨 집이요? 괜찮아요?]

[전 바깥보다 집이 더 좋거든요. 맛있는 와인 드릴게요.]

“으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액정을 몇 번 손으로 두드렸다.

[그럼 그렇게 할까요?]

[와^^ 쿨해서 좋아요. 집 주소 찍어 드릴게요.]

집 주소는 환자 정보에 등록된 곳 그대로였다. 대략적인 위치는 알 것 같았다. 서울 외곽, 그렇게 먼 건 아니지만 개발이 덜 되어 다소 외진 곳. 이제 막 큰 건물이 지어지기 시작해서 대규모 공사장이 많고 그 주위로는 거의 논밭뿐인 지역이었다.

남의 눈에 띌 일이 거의 없는.

빠르게 스트리트 뷰에 주소를 찾아보았다. 화살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확인하니 집 근처에 논길 쪽으로 빠지는 외진 길이 있고, 그 길이 다른 집이 모인 곳으로 통한다.

‘이 정도면…….’

차 한 대쯤은 숨길 수 있을 것 같다.

[어, 제 친구 집이랑 가깝네요.]

[정말요?ㅋㅋ진짜 신기하당]

친구 집과 가깝다는 건 물론 거짓말이었다. 강주경과 같이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려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둘러댔을 뿐이다. 일단 주경이와 같이 가서 근처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자. 그렇게 하면 위험 부담은 훨씬 줄어든다.

시간 약속까지 잡은 뒤 업무용 휴대폰을 집어넣고 곧바로 주경이에게 연락했다. 근무 중일 텐데도 답은 1분 만에 왔다. ‘갈게요.’

그날 일이 끝나고 곧바로 하연희의 집으로 향했다. 임 교수님과 민 선생님에게는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에 이미 말해 두었다. 업무용 휴대폰 자체부터 환자에게 위험한 상황이 생겼을 때 바로 연락이 가능하도록 있는 것이다. 자기를 해치거나, 남을 해치거나.

강주경에게 같이 가 달라고 말한 후 미리 경찰에도 연락해 두었다. 보고서 결과만으로는 부족하지만 내가 직접 환자를 만나러 가고 있다면 상황이 다르다.

“……꼭 선생님이 가셔야 해요?”

주경이는 내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을 때까지도 머뭇거리는 얼굴이다가, 결국 출발한 지 10분쯤 지났을 때 입을 열었다. 이경민 일이 있었던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주경이가 걱정하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을지도 몰라.”

“…….”

그가 입을 다물었다.

모든 일은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히 느낌만 가지고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감이 안 좋은 환자를 전부 따라다니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녹취를 들었을 때의 불안감, 하연희의 SNS, 내원 직전에 사라진 개와 남자친구, 그즈음에 갱신이 끊어진 남자친구의 SNS. 경찰에게 내밀 증거로는 모자라지만 내겐 충분했다. 하루라도 더 빨리 하연희를 만나야 할 것 같다.

녹취 후반에 하연희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두 시간을 조금 넘겼을 때였기 때문에 이정주가 억지로 끊어 버려서 이어지진 못했지만. 분명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이다.

그 후로 하연희의 집까지 한 시간쯤 되는 거리를 아무런 말도 없이 왔다. 강주경은 생각이 복잡한 것 같았고 나는 긴장해서였다. 곧 내비게이션에서 좁은 길 쪽으로 들어가라는 안내가 나왔다. 그 전까지 지나온 큰길에도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지만, 여긴 아예 차가 없다시피 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주홍색 가로등이 늘어서 있을 뿐이다.

차가 신호에 걸려 멈췄을 때 나는 안전벨트를 약간 느슨하게 하면서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오늘은 내 차를 타고 왔기 때문에 몸을 숙인 것만으로 거리는 꽤 가까워졌다. 핸들 위쪽에 올라간 손에 내 손을 겹치자 강주경이 시선을 돌렸다.

“통화 연결해 두고 들어갈 거야.”

“…….”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와 줘.”

강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걱정하는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내게 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일단은 하연희와 이야기를 하면서 이상한 징후를 찾아내는 게 첫 번째다. 하연희는 병원에 오는 것을 꽤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낮에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도 즐거워하는 기색이었다.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는 일이다. 의료진의 요청을 관심이나 특별 취급으로 여기는.

말을 많이 하면 그만큼 이상을 찾아낼 확률도 높아진다. 경찰에 신고도 해 두었으니 혹시나 하연희의 말에서 살인에 대한 확신을 찾거나, 실제로 살인한 증거물을 발견한다면…… 또는 나에게 무언가 하려 한다면 곧바로 구속할 수 있을 것이다.

차가 다시 출발했다. 좁은 길을 느린 속도로 잠시 달리자 오른편에 꽤 큰 이층집이 보였다. 그 옆으로는 비슷한 크기의 벽돌담으로 된 단층 건물. 하연희의 아버지가 정육점을 경영하던 곳은 우리가 아까 지나온 시내였고, 꽤 큰 가게를 닫으면서 집기는 전부 가지고 와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저 단층 건물이 아마 창고일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알림과 함께 안내가 끝났다. 조용해진 차 안에서 강주경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뒤 화면을 주경이에게 보여 주고, 그것을 주머니에 넣은 뒤 뒷좌석에 있던 쇼핑백을 꺼냈다.

“나 내리면 바로 출발해. 알겠지?”

“……네.”

아까 스트리트 뷰에서 본 것 그대로 길이 있었다. 다른 집이 있는 쪽으로 멀어져서, 반대쪽 길로 돌아와 하연희의 집 근처에 눈에 띄지 않게 차를 대 둘 수 있다. 고작 몇 분 거리. 휴대폰 너머로 계속 상황을 듣고 있으면 혹시나 무슨 일이 생겨도 주경이가 늦지 않게 들어올 것이다.

쇼핑백을 한 손에 든 채 초인종을 눌렀다.

-네에!

“안녕하세요, 연희 씨. 한지원이에요.”

밝은 대답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낡은 초록색 철문이었다. 집을 먼저 짓고, 창고는 나중에 이어 붙이듯 만든 것 같았다. 나는 마른 잔디가 깔린 정원을 걸어가며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정원이 넓지만 그다지 관리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지하가 있는지 다섯 계단쯤 위쪽에 자리한 현관문이 휙 열렸다.

“오셨어요!”

“네. 너무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죄송하긴요. 보시다시피 심심한 동네예요. 손님 오신다고 하면 전 너무 좋아요.”

“아, 먹을 것 좀 사 왔어요. 여기 음식이 맛있어서요.”

“와아!”

하연희가 쇼핑백을 받아 들며 기뻐했다. 쇼핑백에는 포장된 음식과 식기, 작은 사이즈의 무알코올 맥주가 들어 있었다. 이 집에서 뭔가 먹거나 그릇을 쓰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다. 오래 머물면서 한사코 내주는 걸 거절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우선 사 온 음식과 맥주를 마시고 다른 걸 먹자고 하면 자연스럽다. 일부러 와인과 어울리지도 않는 음식으로 사 왔다.

“맛있겠다. 선생님…… 지원 씨라고 불러도 돼요?”

“그럼요.”

소파에 앉아서 업무용 휴대폰을 꺼내 두었다. 내 휴대폰은 여전히 통화를 연결한 채 주머니에 들어 있었고.

음식을 사 갈 거라고 말했기 때문에 하연희가 따로 준비해 둔 건 없었다. 테이블에 식기를 늘어놓고 맥주를 각자 앞에 한 병씩 놓았다. 식사하는 내내 분위기는 좋았다. 하연희는 말을 잘하고, 반응도 매끄럽고, 친밀하게 눈을 마주쳤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던 중에 하연희가 물었다.

“그런데, 저 재검사 왜 하는 거예요?”

“아.”

나는 마시려던 맥주를 내려놓았다.

“왜, 전에 연희 씨 검사했던 검사자 있잖아요. 남자.”

“네.”

“그 사람이 너무 부족해서요. 아무래도 다시 검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네요.”

거짓말이 아니기 때문에 태연하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연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 그 사람 너무 싫었어요. 말하고 있는데 막 끊고, 제가 말하면 비웃는 것 같고. 기분 나빠요.”

“그렇죠? 이번에 징계 받을 거예요. 죄송해요. 기분 많이 상하셨어요?”

“……그땐 화났는데, 지원 씨 보니까 풀리는 것 같아요.”

하연희가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베이지색 터틀넥 니트에 긴 목걸이, 발목까지 오는 자수가 들어간 스커트. 병원에 올 때 입었던 파란 원피스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지금도 집에서 입고 있기에는 조금 과한 차림이었다. 물론 어울리기는 무척 잘 어울린다.

“사실 그때 녹취해 둔 파일을 들었어요.”

“지원 씨가요?”

“네. 그 사람이 뭘 얼마나 잘못했는지 알아봐야 해서요.”

“아…….”

플라스틱 포크를 손에 든 하연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정말 죽인 거예요?”

주어를 넣지 않고 말했으나 하연희는 내 물음에 장난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사용하지 않은 새 포크를 집어 허공에서 살짝 흔들었다.

“어떨 것 같아요?”

“으음.”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색이 예쁜 눈동자였고 화려한 생김새와 달리 언뜻 천진하게 보였지만, 그 반들대는 빛에 담긴 건 천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눈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하연희는 사람을 죽였다.

꽃을 먹여 죽였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녹취에서 숨이 끊어지는 과정이나 시신의 모습을 설명했던 걸 생각하면 사인은 질식사일 것이다. 꽃을…… 투명한 꽃을 먹여서 죽였다는 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뭔가를 삼키게 한 걸까? 나는 물끄러미 하연희를 보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알지만…….”

“네?”

“사실 재검사 전에 이야기하고 싶다는 건 핑계였어요.”

하연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희 씨랑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해 본 거예요.”

그 말을 하면서 아까 주경이의 표정을 생각했다. 아마 제법 비슷하게 흉내 냈을 것이다. 하연희의 흰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미소가 떠올랐다.

“지원 씨, 우리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도 무척 부드럽고 상냥했다. 내가 하연희에 대해 몰랐다면 그냥 예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연희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앞으로 몸을 기울이려 했을 때였다. 어딘가에서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집 안에서 들린 건 분명한데 1층이나 2층에서 들렸다고 하기엔 멀게 울렸다.

“……지하실에서 뭐가 떨어진 것 같아요. 물건을 많이 쌓아 둬서 자주 그러거든요.”

“지하실이 있어요?”

“네. 거의 창고지만요. 잠깐 가서 보고 올게요.”

하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서요? 같이 가요.”

“아니에요. 지하실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자 같은 게 떨어진 걸 거예요. 금방 올게요.”

그렇게 말하며 하연희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문이 하나 있었다. 문을 열자 거의 곧바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고, 하연희는 익숙한 걸음으로 그것을 내려갔다. 작은 발소리가 멀어졌다. 혹시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지만 떨어지는 소리가 났을 때 분명 하연희도 깜짝 놀랐으니 그건 아닐 것이다.

약간 열린 문을 힐끗 보다가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냉장고는 일반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크기의 양문형이었다. 괜히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체구가 작은 편인데도 저 냉장고에 내가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아무래도 냉장고 넣었다는 말은…….

아니, 아닌데.

사람이 들어갈 만한 냉장고. 하연희의 아버지는 정육점을 했었고 거기서 쓰던 집기는 지금 전부 집에 있다. 정원의 창고에.

창고로 쓴다면 보통 전등 같은 걸 켤 수 있도록 전기를 연결한다. 예전에 정육점에서 쓰던 냉장고의 전원을 켜 두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더 생각을 하기 전에 지하실에서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상자가 하나 떨어졌더라고요. 놀라라.”

“큰일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나는 주방을 보고 있었던 게 어색하지 않도록 시선을 집 안으로 빙글 돌렸다. 먼지 하나 없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잘 정리해 둔 말끔한 집이었다.

“집이 예쁘네요. 연희 씨 혼자 살아요?”

“아니요. 부모님이랑 사는데, 지금은 여행 가셔서요.”

“여행?”

“제주도요. 잠깐 여행한다고 갔으면서 벌써 몇 달째 안 오시는 거 있죠?”

하연희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몇 달…… 가족도 집을 비우고 있었다면 이 외진 동네에서 무슨 짓을 하든 알아챌 사람은 없겠지.

“부모님이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네. 친척도 없고, 부모님이 가까이 지내는 친구분들도 안 계시거든요. 그래서 두 분 사이가 유독 좋아요.”

그 말을 하면서 하연희는 소파로 돌아와 앉는 게 아니라 주방으로 향했다. 아일랜드 식탁 위쪽으로 와인 잔을 걸 수 있는 랙이 있었다. 거기서 잔 두 개를 꺼내더니, 식탁 옆쪽에서 와인을 꺼낸다. 수납장인 줄 알았더니 와인 냉장고였던 모양이다.

“방에 가서 마시지 않을래요?”

와인 병 끝이 안쪽의 방을 가리켰다. 아마도 하연희의 침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나서 따라갔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와인 병을 내밀며 가볍게 입술을 맞대려 하는 것에 기겁했지만 티 나지 않게 피했다.

침실도 거실처럼 잘 꾸며 두었다. 침대를 중심으로 창을 따라 놓은 길쭉한 선반 위에 온갖 종류의 다육식물과 선인장이 늘어서 있었고, 선반 오른쪽 끝에 스툴 두 개가 나란히 놓여서 바 카운터처럼 보였다. 그쪽엔 유리 돔에 담은 낮은 캔들, 화병에 꽂은 생화가 있었다. 하연희가 그 위에 와인과 잔 두 개를 놓더니 캔들에도 불을 붙이고 말했다.

“씻고 나올게요.”

“……네.”

하연희는 정말로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침실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아니, 이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는데. 살다 보니 정말 별짓을 다 하는구나 싶었다. 여자랑 같은 침실에 들어와 보기도 처음이다. 캔들의 작은 불빛이 일렁거리는 걸 보니 머리가 다 아파 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잠시 욕실 문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씻고 나온다는 게 세수를 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닐 테니 적어도 10분은 걸린다. 나는 물소리를 확인하며 조심스레 침실에서 빠져나왔다.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향했다. 하연희가 몇 달 동안 혼자 살았다는 넓은 집은 조용하다 못해 괴괴했다. 밝은 조명에 꽃과 예쁜 소품으로 인테리어 잡지에 나오는 곳처럼 꾸미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소파와 커튼도 톤을 맞춘 포근한 색조의 패브릭으로 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음산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 하연희가 지하실에 가서 무언가 하고 나왔다. 물건이 떨어졌다고 말했지만, 모를 일이다. 조용히 지하실로 다가갔다. 잠겨 있진 않았다. 들어가도 괜찮을까. 문을 열어 둔 침실 안쪽에서는 아직 물소리가 들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안으로 발을 들였다. 혹시 하연희에게 발각되면 아래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내려와 봤다고 할 생각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조명 스위치를 눌렀지만 아무것도 켜지지 않았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원래 조명이 있었을 자리에는 전등갓이 떨어지고, 전등이 연결되어야 할 자리에 줄만 몇 개 남은 채였다. 그 근처로 백열전구가 하나 달렸다. 전구 위의 스위치를 돌리는 형식으로, 팔을 위로 뻗어 켜 보았지만 광량이 애매했다. 경사가 급한 계단에서 겨우 발을 헛디디지 않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부터 이러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전등 자리도 남아 있고, 크기를 보면 지하실 전체가 밝아질 정도는 될 텐데 일부러 떼어 냈다. 지하실을 창고로 쓰는데 굳이 그렇게 불편하게 할 이유가 있을까.

계단을 전부 내려오자 그 위에 조명이 하나 더 있었으나 이것 역시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계단 위의 노란 불빛은 지하실 계단 옆으로 쌓인 낡은 가구에 가려져 물건의 윤곽만 희미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상태였다. 예전에 쓰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었다. 가장자리는 칠이 일어나 거칠거칠하게 떠 있고, 때가 묻고, 요즘은 사용하지 않을 것 같은 디자인.

지하실은 집의 넓이에 비해 좁고 고요했다. 오래된 가구와 천장까지 위태롭게 쌓아 둔 물건 말고는 특별히 보이는 게 없었다. 계단의 불빛 하나로 비추고 있는지라 어둡지만 사물의 분간은 충분히 가능했다.

늘어선 옷장 안, 가구와 가구 사이의 틈, 캐비닛 위, 공간이 있는 곳은 전부 둘러보았으나 좀 음산할 뿐 평범한 지하실이었다. 한숨을 내쉬고 위를 올려다보자 선반에 상자 하나가 살짝 튀어나온 채 얹혀 있었다. 물건이 떨어졌다는 건 정말인 듯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는 아니고, 그 정도의 무게감도 없다.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 확인할까 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거실로 올라왔다. 아직 침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현관문에 손을 얹고 힐끗 침실을 보았다. 도어락이 아니어서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안쪽에 닿을 것 같진 않았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문고리를 돌린 채 문을 닫고 현관 앞 계단을 내려왔다. 겉옷을 입지 않고 나와서 추위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창고까지는 몇 걸음도 되지 않는다.

고개를 숙인 채 정원 창고야, 라고 말했다. 주위가 조용하고 주경이도 전화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을 테니 들렸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안에서 하연희랑 대화하는 걸 주경이가 다 들었겠구나. 괜히 민망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통화가 연결되어 있는 건 확실하지만 혹시나 하연희에게 들리지 않도록 주경이는 숨까지 죽이고 있을 테니, 반응을 알 수 없었다.

거실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이 쳐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침실 창 안쪽이 얼핏 비쳤다. 창가에서 아직 촛불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원 창고에는 양철로 된 문이 붙어 있었지만 열린 채였다. 한겨울의 싸늘한 공기가 들어찬 창고는 천장에 달린 조명이 아무것도 켜지지 않아서 어두컴컴했다. 창이 크게 나 있기에 새카만 어둠은 아니었지만, 그래 봐야 밝은 부분은 창백한 회색, 어두운 부분은 검은색으로 명암이 보일 뿐이다.

불빛이라곤 딱 하나였다.

냉장고가 켜져 있다는 걸 알려 주는 붉은 등. 그 옆에 작은 패널과 짧은 선 여러 개가 붙은 형태의 숫자. -20도, 빨갛게 표시된 온도가 얼려 두고 있는 게 뭘까. 내내 영하권을 기록하는 날씨에 굳이 정원에 내놓은 커다란 냉동고에 보관해야 할 것은.

추위 때문만은 아닌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주, 경아.”

그렇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생각만 했는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커다란 냉장고가 있었다. 낮게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냉각기가 돌아가고 있다. 오래 사용해서 표면이 긁혔고, 처음 구입했을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비닐 포장이 엉성하게 뜯겨 군데군데 허물처럼 남았다. 위아래로 하나씩 있는 커다란 사각형의 문.

냉장고가 아니라 영안실처럼 보인다. 전구를 연결하기 위해 늘어뜨린 가느다란 전선이 나무 골조를 마감하지 않은 천장에 늘어져 음침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창밖에서 달이 구름 밖으로 드러나며 창고 안이 잠시 밝아졌다. 환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빛이 바래 부옇게 된 은색 표면이 기분 나쁘게 번들거렸을 뿐이다.

조금 전 지하실에서 본 고요함, 전구 하나로 밝힌 서늘하고 칙칙한 실내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축축하고 습한 공기에 소독약 냄새 같은 것이 흐릿하게 섞여 있었다.

바닥은 오래된 집 욕실이나 부엌 같은 자잘한 사각형 타일이었다. 시선이 천천히 출입문에서 냉동고를 향해 움직였다. 바닥에 일부러 만들어 놓은 길처럼 긴 얼룩이 이어져 있었다. 타일 표면은 다른 곳과 똑같이 반질반질했지만 줄눈이 그 부분만 검게 변색되었다. 무언가가 스며든 자국이다.

저걸 열어야 한다. 열어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손을 뻗었지만 손끝이 자꾸만 구부러졌다. 팔까지 덜덜 떨리고 있다. 신경이 모조리 문손잡이에 쏠린 것 같았다. 간신히 손이 손잡이에 닿았다. 얼음덩어리를 만진 것처럼 차가웠다. 간신히 숨을 내쉰 후 손에 힘을 주려 한 순간, 손등이 따뜻해졌다.

나는 내 손 위에 얹혀 함께 손잡이를 잡은 손을 멍하니 보았다.

“여기 계셨네요.”

등에 푹신한 니트의 감촉이 닿았다.

나와 키가 비슷한 사람이 내 바로 뒤에 서서 손을 겹치고 있었다.

하연희의 숨이 느껴지는 목덜미에 소름이 쭉 돋았다.

옷은 목걸이까지도 아까 본 그대로. 머리카락은커녕 손끝조차 젖은 흔적은 없었다. 아까, 씻으러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분명 물이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물을 틀어 두고 내가 뭘 하는지 지켜본 것이다.

물을 틀어 놓은 채 욕실 문에 귀를 붙이고 있었을 모습이 쉽게 떠올랐다.

언제부터 나를 수상하다고 생각한 걸까.

“제가 남자친구를 정말 죽인 건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하연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냉각기의 소음 같은 목소리였다.

“이제부터 알게 되실 거예요.”

내 손을 위에서 겹쳐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달칵, 하고 문이 문틀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 발등으로 한겨울에조차 상상할 수 없는 날카로운 냉기가 쏟아지고 천천히 문이 열렸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을 뻔했다.

간신히 나를 붙든 건 여기서 놀라거나 피해선 안 된다는 사실 하나였다. 숨을 들이쉬며 동요를 내리눌렀다. 점점 문틈이 벌어진다. 어두운 창고보다 한층 더 어두운 사각의 상자 안에, 섬뜩한 한기 속에 발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 명이 아니야.’

성에가 희게 덮인 발은 세 사람의 것이었다.

죽은 게 누구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뺨에 서늘하고 둥근 감촉이 닿았다. 그게 와인 잔이라는 건 몇 초쯤 뒤에 알았다. 아주 섬세하고 얇은 잔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대고 힘주어 누른 것만으로 깨져서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될 수 있는 것.

“지원 씨한테는 이걸 먹여 드릴게요.”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냉동고의 문이 닫혔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저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고 말았다. 세 사람의 시신. 하나는 하연희의 남자친구, 나머지 둘은……, 둘은 누구일까.

부모님이 제주도로 여행을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여기 계셨네요, 라고 말할 때 하연희의 목소리는 평온하고 다정했다. 그다음 말들은 너무 작게 속삭여서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경이가 이상을 눈치챌까. 정원 창고로 가고 있다는 말과, 거기에 따라온 하연희의 목소리에 곧바로 들이닥칠까.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5분은 끌어야 한다. 경찰을 기다리려면 그것보다 더 오래.

신고를 미리 해 두었다 하더라도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서 여기까지 10분은 족히 걸릴 것이다. 상대는 흉기를 들고 있고 남을 해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몸싸움을 한다고 해도 그런 사람을 상대로 조금도 다치지 않고 끝날 수 있는가 하면, 장담할 수 없다. 시간을 끌어야 했다.

만약 하연희가 내 죽음, 지금 당장 시체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앞뒤 상황으로 보면 그녀는 과시형 범죄자다. 다만 아직 누구에게도, 이정주와 한 상담을 제외하면 SNS에조차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해 불만족스러운 상태일 것이다. 과시 욕구와 위험성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상담에서 사실을 털어놓은 건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지어 거기서도 남자친구 외의 살인은 이야기하지 못했다.

두어 가지를 제외하면 하연희는 대부분이 정상 수치였다. 심리학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했다면 정상 수치가 나오도록 할 수도 있다. 그런 환자가 있기 때문에 수련이라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환자의 방어를 알아차릴 정도의 경험이 없으니 슈퍼바이저의 도움이 필요한 건데 이정주는…… 아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연희 씨.”

사람은 상대의 직종을 들었을 때 일종의 편견을 가지게 된다.

이를테면, 상담가는 다정하고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줄 거라는 편견. 이정주 때문에 조금쯤 인식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가 경찰이나 검사 같은 사람인 것보다 임상가인 쪽이 상대의 위기의식을 낮춘다.

하연희는 지금 언제든 나를 죽일 수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평균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을 알고 있고, 그것을 드러내며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성격.

타인의 평가와 찬탄을 중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연희에게 있어 가장 다정하고 특별하게 그녀의 행위를 칭송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어차피 저를 죽일 거잖아요.”

“네, 맞아요.”

“그러면 죽기 전에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싶어요.”

“제가 한 일이요?”

하연희가 나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신이 죽인 사람은 남자친구만 있는 게 아니죠?”

나는 조심스럽게, 하연희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움직여 손끝으로 냉동고 문을 짚었다. 서늘한 감촉이 피부를 타고 올라왔다. 문 하나 사이에 시신이 있다는 공포는 생각보다 컸지만, 무형적인 것보다 지금 당장 내 목숨을 쥔 채 뒤에 붙어 있는 여자 쪽이 더 무섭다.

“살인이라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요.”

“…….”

와인 잔을 든 하연희의 손이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제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건…… 언젠가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런 사람이요?”

“평범한 사람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

당연히 평범한 사람은 하지 못하지. 정확히 말하면, 정상적인 사람은.

“그래서 연희 씨를 따라온 거예요. 아시잖아요. 병원에서 검사 전에 미리 만나는 일은, 게다가 집까지 찾아오는 일은 없다는 거. 저는…….”

마른침이 넘어갔다. 당장에라도 내 목을 짓누르고 깨져서 피부에 파고들 것 같던 와인 잔은 이제 약간 옆으로 떨어져 있었다.

“당신처럼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요.”

“……흐음.”

“그리고 당신의…….”

천천히 고개를 뒤로 기울였다. 하연희에게 밀착하듯이.

“특별한 전리품이 되고 싶어서요.”

“내 전리품.”

하연희의 목소리는 끝이 웃음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특별한 사람, 전리품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 것이다. 이미 손에 들어온 사냥감이 자신이 한 일을 긍정하며 우러러본다. 곧 죽일 테니 비밀이 새어 나갈 염려도 없이 자신의 ‘업적’을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신을 검사한 그 남자를 제외하면 당신이 한 일은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게 맞죠?”

“하하. 맞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그 멍청한 새끼는 내 말을 안 믿었고.”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그걸 말하기 전에, 나만 그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당신의 것이 되고 싶어요.”

와인 잔이 완전히 옆으로 꺾였다. 대신에 내 목에 닿은 건 하연희의 섬세한 손끝이었다. 손톱이 조금 긴 손이 천천히 목을 더듬었다. 새로 산 물건의 감촉을 확인하듯이.

“내가 죽어서도 당신을 기억하게 해 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생각보다 오래 지나진 않았을 것이다. 3분쯤, 어쩌면 그보다 짧게……, 달이 구름에 가려졌는지 창고 안은 다시 어두워졌다. 창에는 유리가 끼워져 있었지만 벌레 우는 소리가 들어올 정도로 방음은 약한 편이었다. 거기에 차 소리가 섞이지 않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주경아…….’

주경아, 빨리.

“지원 씨, 꽤 귀여운 면이 있네요.”

와인 잔 대신 하연희의 입술이 가까워졌다. 사냥감의 추앙에 제법 기분이 좋아진 목소리였다. 안도를 감추며 눈을 감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러나 입을 열려 한 순간 하연희가 멈칫했다.

“……지원 씨.”

가느다란 손이 주머니로 들어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눈이 스르르 아래를 향했다. 꺼져 있어야 할 액정이 부옇게 빛나고 있었다. 휴대폰을 흔들어 보아도 액정이 켜지지 않는 걸 확인했는데, 정말 개 같은 타이밍이었다. 집 안에서였다면 괜찮았겠지만 창고는 너무 어두웠다. 그 불빛을 하연희가 바로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하연희는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내 눈앞에 보여 주었다. 통화중 화면에서 시간이 한 시간 이십 분을 막 넘기고 있었다. 초 단위가 천천히 바뀌었다. 25, 26, 27……, 대여섯 번쯤 숫자가 바뀔 때까지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공기의 밀도도 높아졌다. 하연희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혼자 알고 싶었던 건 아닌 모양이에요.”

긴장으로 숨이 턱 막힌 순간, 요란한 소리가 창고를 뒤흔들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큰 소리였다. 무언가가 담장을 들이받았다.

하연희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뒤를 돌아본 틈에 나는 그녀를 밀치고 앞으로 구르듯 뛰쳐나왔다. 휴대폰의 불이 켜진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걸 보여 주기 위해 하연희가 내 손을 놓았으니. 곧바로 뛰어 창고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눈앞에는 강주경이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쫓아 나오고 있는 하연희를 코앞에 두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안에서 문을 열려 하기도 전에 강주경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창고 자물쇠에 달린 사슬을 문고리에 감았다. 안쪽에 갇혀 버린 하연희가 양철로 된 문을 거칠게 걷어차 댔다. 강주경은 창고를 등지고 서서는, 넘어진 나를 일으켜 그대로 끌어안았다.

“귀 막아요, 선생님.”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이끌리듯이 양쪽 귀를 손으로 틀어막자 강주경은 한 팔로 나를 고쳐 안고 다른 손으로 양철 문을 뒤로 후려쳤다. 귀를 막지 않았으면 엄청나게 놀랐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창고 안에서 들은 충돌의 굉음과 비슷할 정도다. 후려친 부분이 움푹 들어갔을 정도로 강한 힘에 문이 드르르 울렸고, 안쪽에서 털썩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그것으로 기절하거나 한 건 아니었기에 하연희는 곧 다시 일어나 두 손으로 문을 두드리며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강주경은 사슬을 한 번 확인하고는 문에서 약간 비껴 서서,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어깨에 덮어 주었다. 향수 냄새가 옅게 났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창고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정신이 생겼다. 담장 밖은 보이지 않지만 그 위로 드리워졌던 나무는 가지가 여러 개 꺾여 있었다. 설마, 하고 위를 올려다보자 강주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이다. 대문은 분명 잠긴 채인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까 그 충돌음은 뭐였을까. 담장에 뭔가 부딪힌 것 같은, 아, 설마…….

그러나 생각은 끊어졌다. 안이 조용해졌나 싶었는데, 갑자기 주경이가 나를 옆으로 홱 밀쳤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나는 곧바로 얼굴의 핏기가 가시는 걸 느꼈다. 강주경이 철문을 때렸을 때 찌그러져 문짝과 문짝 사이에 난 틈으로 녹이 잔뜩 달라붙은 정육점용 칼이 비집고 나와 있었다.

칼날이 빠져나온 틈새로 시뻘겋게 충혈 된 눈이 보였다. 어차피 칼날이 닿지 않을 범위이긴 했어도 주경이와 나, 둘 다 두어 걸음쯤 뒤로 물러났다. 하연희가 악물었던 입술을 열며 소리쳤다.

“감히, 감히 나한테 거짓말을 해?! 나한테?!”

칼날이 섬뜩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마구 양철 문 사이를 헤집었다. 강주경이 힐끗 커다란 창문 쪽을 보았다.

처음 창고에 들어갔을 땐 몰랐는데, 안에서 열 수 없도록 막대가 덧대어져 있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모양으로 깨지는 얇은 유리가 끼워져 있다. 창고 구조를 잘 아는 하연희라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온 신경이 문에 쏠려 있어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겠지만.

“죽여 버릴 거야, 너도!”

지방질이 가득한 고기를 버터처럼 썰어 냈을 길쭉한 칼은 녹을 덕지덕지 붙인 채 계속 양철 문의 틈새를 찌르고 긁어 댔다. 쇠에 쇠가 긁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귀와 머리를 온통 붙잡고 갉아 대는 것 같았다. 칼을 붙든 하연희의 손도 점점 상해서 틈새를 따라 이리저리 피가 튀었다. 나도 모르게 강주경의 옷자락을 움켜쥐었고, 등을 커다란 손이 감쌌다.

그리고 발광하며 날뛰는 하연희의 목소리 위로 사이렌 소리가 겹쳐졌다.

주석

*심리실: 병원 내의 임상심리사 사무실

*EMR: 전자의무기록(Electronic Medical Record), 의료 전산 시스템

*슈퍼바이저: 임상심리전문가 자격 수련의의 지도감독자

*OCD: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 원하지 않는 불안감과 강박적 사고로 특정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질환

*SPR: schizophrenia, 조현병. 언어와 행동이 와해되며 망상, 환상으로 현실인식에 괴리가 생기는 등의 만성적 질병. 양성증상(positive symptoms, 망상, 환각, 언어와해, 이상행동, 심한 긴장 등의 정서불안), 음성증상(negative symptoms, 정동 둔마, 무논리, 무기력) 등 증상의 종류가 광범위하며 명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신분열병이라는 명칭에서 편견의 배제 및 치료에의 긍정적 가능성 부여를 위하여 2011년 조현병(調絃病)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BGT: Bender Gestalt Test, 벤더 게슈탈트 검사. 공간인식, 기억력 등을 확인한다.

*웨이즈: 지능검사

*로샤: 로르샤흐(Rorschach), 대칭하는 잉크얼룩을 이용한 심리 투사 검사

*PD: 인격 장애(personality disorder), 병리적으로 사회 기능이 불가능한 상태의 정신 장애

*색정망상: 에로토마니(erotomania), 실제 그런 관계가 아닌 타인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망상

*BDI: 벡(Beck)의 우울증 평가 척도

*DSM: 정신장애 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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