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7)

02

오후 세 시,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흐느적거리며 녹아 갈 시간이다. 나도 피로에 절어서 커피를 사러 내려가는 길이었다. 두 시간 반 동안 화가 난 *PD 환자가 30만 원짜리 검사 도구를 부술까 봐 조마조마하게 보냈더니 어깨 근육이 결렸다. 검사 도구는 부속품을 따로 팔지 않는다. 작은 조각 하나만 날아가도 새로 사야 한다는 뜻이었다. 다행히도 검사 도구는 무사했다.

‘피곤하다.’

진짜로 피곤했다. 몸이 아니라 머리가. 강주경은 오늘 아침 내내 묵묵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묘한 일이 있었던 미묘한 사이의 둘이 으레 그렇듯 우리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아니, 미묘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나? 뭐가 있긴 했나? 손잡은 것밖에 없잖아?

강주경과 내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게 고작 일주일쯤 전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맞으려면 몇 분 만에도 눈이 맞는 게 사람 사이였다.

카페가 있는 병원 1층으로 내려오자 공교롭게도 강주경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에스컬레이터 옆 공간에 머리를 박고 숨을 뻔했다. 예기치 못한 기습이었다.

다행히 내가 가슴팍에 명찰이 버젓이 달린 가운 차림으로 머리만 감추며 타조처럼 굴기 전에 강주경이 나를 발견했다. 괜히 헛기침을 하고 있자 그가 내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오늘 아침부터 목소리 내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조용하던 강주경은 뭔가 결심한 기색이었다.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불곰을 보며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성큼성큼 걸어온 강주경은 정작 가까워지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꾹 다물어진 입 안에서 무언가 빙글빙글 맴돌고 있는 게 보였다. 내가 강주경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10년 넘게 한 공부가 도움이 되는 건지. 그도 아니면 그냥 강주경이 알기 쉽게 행동하는 건지.

나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사탕 한 줌을 꺼냈다. 어린아이도 상대하는지라 가운 주머니에는 항상 사탕이며 스티커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손을 내밀자 강주경이 반사적으로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 알록달록한 사탕을 놓아 주었다.

강주경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긴장한 것 같던 분위기가 녹아내리고, 설탕이 솜사탕으로 부푸는 것처럼 무언가가 차올랐다.

그가 내 팔을 잡았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볍게 당기는 것만으로 발이 휘청휘청 끌려갔다. 역시 강주경이 한 번 밀치면 나는 낙엽처럼 굴러갈 것이다. 그렇다고 강주경이 아주 나를 질질 끌고 간 건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궁금해서 내 발로 따라갔으니.

그는 사람이 거의 오지 않는 병원 구석의 비상계단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어서 다들 계단인 것도 모르고 지나치는 곳이었다. 창문은 없고 형광등 불빛과 녹색 비상구 표시만 있어서 병원 괴담에 단골로 나올 것 같은 계단이다. 실제로 괴담이 많기도 했다. 밤 열두 시에 오면 벽을 타고 내려오는 여자가 보인다거나…… 다른 생각을 하며 연하의 불곰 앞에서 당황하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그건 한순간에 깨졌다. 강주경이 바짝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했지만 곧 벽에 등이 닿았다.

선생님, 강주경이 다시 중얼거리듯 나를 부르며 몸을 숙였다. 워낙 덩치가 커서 그것만으로 시야가 차단되었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에 역광이 진 강주경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눈가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러나 불시에 나는 손을 잡혔다. 손목을 먼저 잡고 천천히 내려와 손을 꽉 쥐는 힘은 강하지만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어젯밤처럼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굵은 팔뚝이 내 머리 옆의 벽을 짚었다. 뾰족한 눈매가 가까워졌다. 점점 더, 우연히 가까워질 수 있는 거리를 한 걸음 더 넘을 때까지. 짙은 색 눈동자가 고집스러운 눈꺼풀에 가려지고 숨결이 닿을 때까지. 심장이 세게 뛰었다. 입술이 닿을 거라 생각하고 나도 눈을 감았을 때였다. 조용한 비상계단에 날카로운 소리가 쏟아졌다.

둘이 동시에 눈을 떴다. 강주경의 무전기가 요란하게 삐빅거리고 있었다.

<환자가 도망쳤어!>

무전기 너머에서 콩을 단번에 쏟아부은 것처럼 엄청난 소란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로 다급하긴 해도 비교적 이성적인 시큐리티가 환자가 도망친 방향 등등을 짧게 알렸다.

강주경이 한순간 나를 보더니 손을 꽉 잡았다가 놓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말을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나는 내 손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그가 나가고 잠시 후 나도 로비로 나가자 바깥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검은 양복을 입은 시큐리티들이 모여 급하게 움직이고, 그 뒤로 간호사와 보호사들이 당황한 얼굴로 따라가거나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환자가 도망쳤다니. 나는 이마를 짚었다. 환자들이 보호사와 함께 산책하러 나오는 시간이긴 했다. 입원 환자는 혼자 걸을 수 있게 된 어린애와 같았다. 딱 한 순간 눈을 떼면 탈출한다.

정문 밖으로 나오자 저 멀리 환자복을 입은 사람이 병원 입구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내달리고 있었고 그 뒤로 긴 꼬리처럼 시큐리티, 보호사, 다른 과 환자를 싣고 왔던 것으로 보이는 구조대까지 따라 뛰어가고 있었다. 환자분, 환자부우운! 하는 다급한 외침이 여기까지 들렸다.

갑작스러운 도주극은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끝났다. 환자는 횡단보도에서 흰 선을 정확한 간격으로 밟기 위해 수십 차례 왕복하다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한 행인의 도움으로 겨우 붙잡혔다.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지 자칫하면 큰일로 이어질 뻔했다.

환자를 쫓아갔던 사람들은 죄다 반쯤 넋이 나간 채 돌아왔다. 보호자와 관계자들은 서로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사과했다. 나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무지 조용할 날이 없다.

“한 선생, 커피 한 잔 하자.”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커피를 사러 가던 길에 강주경과 마주치는 바람에 카페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선배와 함께 1층 카페로 내려왔다. 퀭한 얼굴의 의사와 간호사와 그 외 직원들이 크림이 음료만큼 올라간 컵을 위태롭게 들고 있거나 시럽 펌프를 기계처럼 누르고 있었다.

각자 딸린 탕비실이 있으니 카페까지 내려오는 건 몹시 지쳐서 잠깐이라도 과를 벗어나서 쉬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와 선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빨래처럼 구겨져 서류와 격투하고 있을 수련생들의 음료도 사 들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아까의 소란은 전부 증발해서 병원 1층은 여느 때와 같은 분위기였다. 사람들 사이를 요령껏 빠져나와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을 때 선배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 환자 보호자랑은 연락됐어?”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고 음료수 한 모금을 쭉 빨았다. 달콤한 커피가 입 안을 채웠다.

“아니요, 아직.”

“전화를 안 받는대?”

“아예 꺼져 있다는 것 같아요. 아마 교수님이 계속 연락해 보고 계실 텐데…….”

“그것도 큰일이네.”

선배가 빨대로 음료 컵을 휘저으며 말했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일주일을 넘기고 있다.

서 교수님이 신경을 안 쓰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해서 집에 찾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틈이 날 때마다 연락해 보는 수밖에. 그리고 교수님도 선배만큼이나 이 일을 걱정했다. 내가 눈썹을 긁적이자 선배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어쩔 순 없지. 강주경 씨랑 잘 붙어 다녀.”

“…….”

선배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순간 동요했다. 환자의 탈출 사건으로 잠시 잊었던 순간이 확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계단으로 끌려들어 가서, 아마 강주경의 무전기가 다급한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아마.

“한 선생?”

“예…… 네.”

조금 전 일어났던 일에 정신을 빼앗겼던 나는 상당히 얼빠진 대답을 내놓고 말았다. 선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둘이 무슨 일 있었어?”

“네? 없, 없었는데요? 없었어요. 일은요, 무슨. 무슨 일이 있겠어요?”

“…….”

내 입술을 붙잡아서 비틀고 싶어졌다. 누가 봐도 무슨 일 있었다는 말투였다. 선배는 눈치도 빠른데 혹시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 움찔하며 선배를 보자 선배는 먼 산을 보고 있었다.

“하하, 그렇지. 내가 바쁜 일이 있었지, 참…….”

조금 전에 나랑 커피를 사러 내려갔었는데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을 리 없다. 망했구나. 선배가 슬금슬금 사라지는 걸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힘없이 돌아와서, 수련생들의 책상에 음료를 하나씩 내려놓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 프로그램을 열었으나 내 손은 한참 키보드 위에 멈춰 있다가 가갸거겨 같은 의미도 없는 말을 쓰고 지우길 반복했다.

하나씩 심리실로 돌아온 수련생들이 음료를 보고 의아해하다가 잘 먹겠다고 인사했다. 내가 아니라 선배가 산 거라고 대답하면서도 나는 좀 멍한 상태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스페이스 바를 계속 누르고 있어서 공백밖에 없는 페이지가 열두 장째 이어질 때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끌어안고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쾅 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수련생들이 괴이쩍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자기 일로 돌아갔다. 머리를 벽에 박든 책상에 박든 남의 일에 신경을 쓰기에 그들은 너무 바쁘고 다급했다.

빈 페이지를 하나씩 삭제하면서 나는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젯밤에 그런 일이 있었고 아침에는 둘 다 꿀이라도 퍼먹은 것처럼 입을 닥치고 있었고 조금 전에 계단에 가서, 우와, 세상에 진짜 무슨 일이야? 설레서 죽는 줄 알았네.

거기서 무전이 안 울렸으면 어떻게 됐던 거지?

내가 다시 이마를 싸쥐며 엎드리자 내 옆자리인 3년 차 수련생 유화영이 말을 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 얼굴로 날 힐끔거렸다. 다행히 유화영이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라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하기 전에 스케줄에 맞추어 설정해 두었던 알림이 울렸다.

‘선생님.’

“아악.”

그러나 알림 소리에 뜬금없게도 강주경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올라왔다. 기어이 유화영이 안쓰럽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느 환자가 나를 몹시 괴롭힌 것이라 오해하는 게 분명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정정할 기력은 없었다.

* * *

[지금 주차장으로 갈게요]

메시지를 확인한 뒤 짐을 챙겼다. 여섯 시 조금 전이었다. 놀랍게도 환자의 탈주가 불과 몇 시간 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즉 계단에서 있었던 일도 오늘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나는 심리치료 한 건을 하고 돌아와 퇴근 시간까지 심리실에 박혀 있었다.

긴장된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강주경과 같은 차 안에 있고, 집에 가서는…… 복잡한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다 책상에 거나하게 무릎을 박았다.

“악!”

책상이 흔들릴 정도였다. 심리실에 아무도 없어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주차장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8층에 있었다. 만원 표시가 깜빡거리는 걸 보니 내려오려면 꽤 한참 걸릴 것 같았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훨씬 빠르겠네. 비상계단의 무거운 철문을 열었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서 교수님이다. 김진석 문제가 해결된 건가 싶어 반갑게 전화를 받았으나, 교수님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지원아? 지금 어디 있어.

“주차장 내려가는 계단이요.”

-잠깐 내 연구실로 와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1층에서 지하 1층 사이의 계단을 막 내려가는 참이었다.

“왜요?”

-방금 김진석 환자 보호자랑 연락됐어.

“아. 뭐라고 해요?”

-지금 가족이 다 같이 여행하러 미국에 갔대. 보호자들 말도 그렇고, 전혀 재발 기미가 없던데. 그 사람이 아니야. 혹시 짚이는…….

교수님의 말은 중간에 끊어졌다. 낮은 목소리는 무언가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그 내용을 듣지 못했다.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고, 그것을 다시 주울 틈은 없었다. 계단 아래에서 불쑥 튀어나온 그림자가 내 팔을 움켜쥐어 거칠게 끌고 가고 있었다.

“누구……!”

“선생님.”

목소리에 웃음이 가득했다. 팔이 빠질 것 같다. 두 발은 바닥을 딛는 게 아니라 거의 미끄러지는 것에 가까웠다. 새카만 옷을 입은 남자는 무서울 만큼 강한 힘으로 나를 질질 잡아끌었다. 지하 주차장, 몇 걸음만 떨어지면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인데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을 누르고 소리치려 한 순간 멱살을 붙들렸고, 시야가 뒤집어졌다. 비명이 서늘한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날 타고 앉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환자에게 고정관념을 가지면 안 된다. 진단적 명칭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 이미 병명이 있는 환자라고 해서 반드시 그 병증에 한정되게 행동한다는 법은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알았는데,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단정했던 거지.

불과 며칠 전 난 이 사람을 보았다. 내가 써낸 보고서의 문자가 눈앞에서 빙글빙글 맴돌아 남자의 얼굴에 얽혔다. 시야 한가득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작은 키에 보통 체격, 음울한 얼굴. 현실 지각 능력의 부족. 도피적 공상. 자기도취. 인간관계에 대한 비정형적 개념화. 성적인 것에 대한 집착.

망상적 사고.

강박.

“저 보고 싶으셨죠, 선생님?”

폭력.

의료진을 폭행한 전적이 있는 환자.

이경민이 내 입을 틀어막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병원 정원의 나무 통해서 저한테 말 거셨잖아요. 일주일 전에. 절 좋아한다고.”

눈은 이미 풀린 채였다. 아니, 풀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또렷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의 시선은 현실이 아니라 망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EMR에서 이경민의 폭행 사유는 공란이었다.

“그 나무 봄에는 참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안 그래요?”

그는 맥락이 이상한 말을 늘어놓았다. 자기 머릿속에서는 나름대로 연결되어 있는 내용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다.

손이 예쁘다는 말부터 경계했어야 했다. 그날, 내가 비상벨을 누를까 봐 내 손을 쳐다본 게 아니라 그의 눈에는 정말 예쁘게 보여서 뚫어져라 본 것이다.

단번에 *색정망상에 빠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미 증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전 병원에서의 폭행 사유, 공란에 채워졌어야 하는 내용은 그쪽 의료진에게 품었던 망상이다.

이경민이 헐떡이며 내 얼굴을 짓눌러 더듬었다.

“선생님, 그동안 눈치 보느라 힘드셨죠. 알아요.”

“읍……!”

“하지만 신호를 보내셨잖아요. 손이 예쁘다고 말했더니 손을 흔드셨잖아요? 정말 귀엽더라고요.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요?”

위에서 내리누르는 힘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좁은 관을 통해 들어오는 것처럼 부족한 산소를 힘들여 삼켰다.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서 애써야 했다.

“사진이 마음에 든다고 하셨잖아요. 절 못 만나서 말 못 하셨죠. 선생님이 귀여워서 일부러 안 갔어요. 상자를 챙기는 게 귀엽더라고요. 남들이 모르게 챙기느라 얼마나 답답하셨어요?”

축축한 손바닥이 입술을 짓눌러 벌리며 입 안의 살에 닿았다. 그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고, 발기한 아랫도리가 배에 문질러지는 게 참을 수 없이 불쾌했다. 나는 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자극하면 안 돼.’

폭발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구미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면 공격성이 극대화된다. 아주 사소한 행동도 과잉 해석할 것이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조심해야 했다.

사람이 여기까지 올까. 지하 주차장이니 소리를 지르면 멀리까지 들리겠지. 하지만 자칫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누군가 오기도 전에 상황은 끝나 버린다.

이 남자는 평소의 몇 배로 힘이 세졌을 거고, 손을 내려 내 목에 감고 조이면 그대로 나를 죽일 수도 있다. 급소를 눌리면 숨이 끊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자랑하고 싶어서 못 참고 그 남자를 부른 거잖아요. 은근히 자랑하셨죠. 그 남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사진이 예쁘게 나왔다고 하던가요?”

적어도 강주경과 내 사이를 의심하지 않는 건 다행인가. 그랬다면 더 거칠게 나왔을 수도 있다. 언제부터 나를 보고 있었지? 카드가 처음 도착한 날을 떠올렸다. 이경민이 내원한 다음 날이다. 진료를 기다리다가, 아니면 그 전후로 병원을 돌아다니다가 나를 봤을 것이다.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선생님. 일부러 저랑 만나려고 선생님 스케줄을 조정하신 거죠? 절 만나려고 제 검사를 하러 오신 거 알아요. 정말 귀여워요.”

“……읍…….”

검사를 내가 했든 다른 사람이 했든 어차피 결과는 이거다. 현실에 기반하는 사고가 아니니까. 내가 들어가면 직접 만나고 싶어서 조정한 거고, 다른 사람이 들어갔으면 수줍어서 피한 거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겠지.

순간 눈앞이 검게 가라앉았다가 돌아왔다. 이경민은 아주 잠깐씩 손의 힘을 풀었다가 다시 더 세게 누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조금씩 들이쉰 숨 때문에 겨우 정신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지났지? 교수님이 내가 끌려가는 소리를 들었을까.

“그러니까 선생님이 계단에서 그 새끼랑 들러붙었던 건 용서해 드릴게요.”

얼굴이 확 다가왔다. 아, 그래. 오늘 낮에 그걸 봤구나. 그래서 화가 난 채로 주위를 맴돌다가 못 참고 달려든 거다. 딱히 내가 혼자가 되길 기다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냥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밖에 나오지 않아서 이제야 기회를 잡았을 뿐. 이경민이 냄새라도 맡듯이 뺨과 목덜미에 코를 짓눌렀다.

“병원에서 계속 저 모르는 척하느라 힘들었죠? 불쌍한 선생님. 이제 제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선생님, 병원 생활이 많이 고단하셨죠. 많이 바쁘셨을 거 알아요. 그래도 그 카드 보니까 힘이 나셨죠? 선생님 연인이 쓴 편지잖아요. 제가 어딘가에서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열심히 일한 거야. 맞죠? 제가 준 편지 잘 읽었어요? 읽을 때마다 소중하게 품에 넣더라고요. 그렇게 좋아할 줄 몰랐는데.”

아, 왜 아무도 안 오는 거야. 진짜 미치고 환장하겠네.

이경민은 나보다 키가 약간 작았지만 뭘 하고 살았는지 생활근육이 자잘하게 붙어 있어서 힘이 강했다. 옷을 입어 마르게 보이는 것뿐 아주 왜소하지도 않은 것 같다. 누운 상태에 할 수 있는 호신술 강좌 이딴 건 진짜 더럽게 쓸모없는 것들이다. 실전에서는 전혀 써먹을 수 없었다.

“역시 선생님은 손이 정말 예뻐요.”

이경민은 이번엔 내 손을 잡아 올리더니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 손으로 빨리 제 좆도 만져 주시면 좋겠어요.”

소름이 쫙 끼쳤다. 그러니까, 좀 침착하게 정리해 보자. 그는 지금 내 손에 심……취해 있으니 지금이 기회였다. 카드가 도착하기 하루 전날 이경민은 이 병원에 처음 방문했다. 이경민의 진료는 오전이었다. 근처에 있다가 주차장으로 가는 나를 따라왔을 것이다.

내 차종과 번호를 알아내고 카드를 준비했다. 카드를 놓으러 매일 왔다 갔다 한 걸 보면 이 근처에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 집은 어떻게 알아낸 거지…… 거기까지 생각하다 이경민의 옷차림을 보았다. 검사할 때는 한여름 옷을 입고 있더니 지금 입은 건 워커에 검은 바지, 검은 라이더 재킷이었다. 차보다는, 오토바이 같은 걸 탈 때 입을 듯한 복장이었다.

퇴근하는 내 차를 오토바이로 따라온 게 아닐까.

아파트로 오는 길에 좁은 샛길 하나가 있다. 차로는 들어갈 수 없는 넓이지만 오토바이라면 충분했다. 처음 한 번 미행해서 집을 알아내고, 그 길을 사용하면 내가 도착하는 것보다 빨리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규정 속도를 설마 지켰을 리 없고 과속하면 5분도 채 안 걸릴 거리였다.

첫날 나를 보고 바로 망상을 시작한 그는 내게 카드를 보내다가, 사진을 동봉하기 시작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나와의 관계가 어디까지 진전되었는지 몰라도 성적인 것이 다분히 섞였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건 알겠다.

색정망상은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지만 내가 동성인 이상 자신은 내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지금보다 더 폭력적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입을 손으로 짓눌러 대는 통에 입술을 꽉 다물자 이경민은 웃었다.

“선생님, 우리 사이에 창피해하지 마세요.”

“으, 읍……!”

당혹감에 비명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경민의 손이 벨트로 향하고 있었다. 철걱철걱하고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천이 스치는 소리, 결국 그 손이 속옷 한 겹 위로 올라갔을 때 나는 상황을 똑바로 판단하기 위해 감정을 전부 참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좋으세요?”

귀에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대체 얼마나 끌려온 거지? 엘리베이터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되었다. 장기 주차된 먼지 쌓인 차량과 벽 사이, CCTV에는 비치지도 않을 으슥한 곳이었다. 도움을 청할 기회는 많지 않다. 계속 저울을 기울여 보고 있던 나는 이경민이 얼굴에서 손을 떼고 아래로 내려간 순간 곧바로 비명을 질렀다.

“이……, 이, 씨발, 멍청한 게, 씨발, 조용히 안 해?!”

이경민이 뺨을 연달아 여러 번 쳤다. 고개가 푹푹 꺾이긴 했지만 죽도록 아픈 건 아니었다. 다시 고함을 치려 하는데 목을 졸렸다. 이판사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담도 협상도,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다. 자극하지 않더라도 당장 주차장 한복판에서 이경민은 나를 강간하고 죽일지도 몰랐다. 내키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한 환자였다.

이경민은 완급을 주어 목을 조르면서 다른 손으로 내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뜯어냈다. 점점 초조해졌다. 소리친 보람도 없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뭘 빼고 그러세요. 선생님은 이런 거 좋아하잖아요. 제가 ‘손이 예쁘네요.’라고 신호를 보냈더니 선생님 대답했잖아요. 우리 사이에서 그거 섹스 하자는 뜻이잖아요.”

이경민의 말투가 다시 조용해졌다. 환장하겠네. 그런 신호를 보낸 적도 없거니와 심지어 그게 섹스 하자는 뜻이었다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대체 이경민은 어디서 무엇으로 그런 신호를 얻은 걸까? 혹시 신호의 창조자인 걸까? 생각해서 뭐 하겠는가. 눈만 깜빡여도 원하는 의미로 받아들일 텐데.

“큭.”

조르는 힘이 한 번 강해졌다. 엄지손가락이 목의 급소를 거세게 누른 순간 컥, 하는 소리와 함께 구역질이 올라오고 격통과 함께 입이 벌어졌다. 손으로 목을 감싸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었다. 딱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기관이 손에 눌려 터지기라도 하듯 뻐근한, 두통 같은 통증을 머리에 쏟아 놨다.

“선생님, 이런 모습도 예쁘…….”

이경민의 말은 이번엔 정말로 이어지지 못했다. 몸을 누르던 무게도 목을 움켜쥔 손의 힘도 전부 사라졌다. 나는 맥없이 누운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강주경이 한 손으로 이경민을 붙잡아 올리고 있었다.

부어올라 뻐근하고 따가운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눈앞이 깜빡거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팔을 뒤쪽으로 꿈틀거려 물러났다. 제정신이 아닌 이경민보다 강주경의 얼굴이 더 무서웠다. 그는 험악한 얼굴로 이경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험악하다? 그런 온순한 말로는 저 표정을 다 나타낼 수 없었다. 그가 이경민을 바닥에 내던졌다가 곧바로 다시 들어 일으켰다. 멱살을 잡힌 이경민의 몸이 헝겊인형처럼 끌려 올라왔다. 강주경이 주먹을 움켜쥐었고, 그 순간 나도 정신이 들었다.

“강주경!”

그대로 이경민을 후려치려던 강주경의 손이 아슬아슬한 곳에서 딱 멈췄다. 이경민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딱 굳어 꺽꺽거리고 있었다. 강주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차가운 표정이었다.

“……안 돼. 환자야.”

“환자라고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네가 때려도 되는 것도 아니야.”

강주경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를 악물었다. 내 말을 수긍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여전히 주먹은 쥐어져 있었고, 이경민은 공중에 들린 채 다리를 버둥거렸다.

“왜요?”

“환자니까.”

환자니까, 그 이유밖에 없다. 나라고 해서 화가 나지 않은 게, 때리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다. 무섭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화를 삭여야 했다. 정신질환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를 비난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환자인 이상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든, 나는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당장 이경민을 후려치는 게 아니라 폐쇄병동이나 치료감호소로 보내는 것이다. 옆에서 보기에 답답해도, 대체 왜, 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나를 보던 강주경이 다시 이경민을 내던졌다. 순간 자유를 얻은 그가 앞으로 기어 도망치기 전에 목을 잡아 차가운 바닥에 짓눌러 붙이고, 강주경은 무전기에 대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다. 지원 요청이었다.

그로부터 불과 수십 분 후에 상황은 대강 정리되었다. 응급실로 들어간 이경민은 입원이 결정되었고 서 교수님과, 이경민의 담당의였던 조교수 정운성과 함께 이경민의 보호자를 면담했다. 피해자가 아니라 검사자로서 나도 동석했다.

연락을 받고 온 보호자를 보고 나는 아연했다. 이경민의 보호자는 고작 두 살 위, 스물넷에 불과한 누나였다. 게다가 환자를 케어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내내 책상 아래를 쏘아보았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위생 상태는 엉망인 채 무슨 말을 해도 같은 말만 반복했다.

“제 책임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을 위해 가족분들도…….”

“왜 걔를 저 혼자서 책임져야 해요?”

이경민의 부친은 작지 않은 회사를 경영하고, 모친은 3년 전 타계했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소극적인 어머니. 내원하는 환자 중 꽤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가정 형태였다. 이경민을 검사할 때 누나에 대한 감정은 표면적으로 무시, 실질적으로 열등감과 공격성이었다. 과연 폭력이 동반되지 않았을까.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사람을 어떻게 24시간 지키고 있어요. 병원에 보냈으면 된 거잖아요. 더 이상 뭘 더 어떻게 해요?”

교수님의 눈이 희미하게 내 쪽으로 움직였다. 동생에 대한 책임을 혼자서 떠안고 있지만, 그것을 수행할 기력은 조금도 없는 누나. 게다가 검사를 해 보자는 말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날 검사가 끝난 후 나는 곧바로 이경민에게 입원 소견을 붙였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곧바로 입원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담당의였다.

하지만 이경민 정도의 환자는 만약 입원하지 않는다 해도 무조건 보호자를 불렀어야 했다. 환자를 통제하도록 보호자의 다짐을 받아야 했고, 보호자가 저런 상태인 걸 알았다면 사회복지사를 연결시키는 게 맞았다. 하루에도 수백 명이 오가는 대학병원에서 입원을 권유받은 환자 한둘이 안 오는 것은 잊히기 십상인 일이지만, 그게 저 정도로 위험한 환자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됐다.

정운성이 임상가의 권유를 무시하거나 환자 정보를 제대로 알려 주지 않는 일은 빈번했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욕이 턱밑까지 올라오는 걸 겨우 참았다.

서 교수님의 설득 끝에 이경민의 누나는 간신히 검사를 예약하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약을 맞고 얌전해진 이경민은 몇 마디를 털어놨다. 내 집 호수는 경비실에서 알아냈다고 한다. 차가 이상하게 주차되어 있어 연락하려고 하니 호수만 알려 달라고. 그걸 알려 준 경비실도 경비실이었다.

그는 전원(轉院)하지 않고 그대로 우리 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했다. 차라리 가까이 두고 지켜보는 게 낫다. 내가 담당하진 않겠지만.

“한 선생이랑 정 교수만 남아서 이야기 좀 하지.”

서 교수님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셋만 남았다. 막 퇴근 준비를 하고 있다가 불려 온 정 교수는 그다지 밝은 얼굴이 아니었다. 평소 태도를 생각하면 지금 이 일도 내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환자보다 저 인간이 더 나쁘다. 솔직히 말해 개새끼였다.

“정 교수님.”

“네.”

“입원 소견 봤죠? 이경민 환자 진료도 했고.”

“봤습니다.”

“이번 일 어떻게 생각해요.”

정운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서 교수님이 물어보고 있는데 뻔뻔하게 ‘제 잘못 아닙니다.’ 조의 대답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은 매우 좋지 않았다. 정운성은 서 교수님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데 아직 조교수였고, 이례적으로 빨리 정교수 자리에 올라간 서 교수님을 상당히 싫어했다.

“주의가 부족했습니다.”

“통제 가능한 환자였는데 그냥 내보내고 주의가 부족했다로 끝납니까?”

“……하지만 피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병원 사람이 당한 건 피해도 아니에요?”

교수님의 말에 정운성이 입을 다물었다. 임상심리사에게 환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하나하나 알려 주는 건 서 교수님 정도였지만, 정운성은 정도가 심했다. 같은 의사들 사이에서 얻는 열등감을 임상가나 간호사들에게 푸는 인간이라서.

스스로에게도 한숨이 나왔다. 담당의가 정운성이었으니 EMR을 더 자주 들여다봤어야 했는데. 범인이 김진석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고 그쪽에 신경이 쏠리는 바람에 다른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아무 말도 못 하는 정운성 앞에서 교수님은 보란 듯이 들고 있던 펜을 내던졌다.

“정 교수님은 나가 보세요. 이번 일은 과장님한테 바로 보고 올라갈 겁니다.”

“…….”

정운성이 힐끗 나를 노려보고 돌아섰다. 노려보면 어쩌게? 나도 감정이 안 좋긴 마찬가지였다. 정신과 과장은 정운성을 싫어한다. 꼬장꼬장한 노인에 사고방식은 낡았지만 과장이 제일 싫어하는 게 무능한 사람인데 정운성이 그랬다. 정신과 전문의가 부족해서 난리인 마당에 마흔세 살에 아직까지 조교수에서 못 벗어난 것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이번 일로 과장에게 된통 깨질 것이다. 적어도 내부 징계와 감봉은 확실했다. 이대로 사라져 주면 좋을 텐데, 진짜…….

“괜찮아?”

문이 쾅 닫힌 뒤 교수님이 바로 내 쪽을 보았다. 나는 말끔한 차림이었다. 강주경은 내게 메시지를 보낸 후 곧바로 보안팀장에게 붙들리는 바람에 잠시 이야기를 하느라 늦어졌다고 한다. 십오 분쯤 지나서 겨우 풀려나 금방 내려가겠다고 연락했지만 대답이 없었고, 전화도 받지 않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해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주차장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무전을 보낸 그가 이경민을 잡은 채로 나직하게 날 불렀다. 그제야 나도 내 꼴을 보고 차림새를 다듬었다. 강주경이 부른 보안팀 직원들과 교수님이 우르르 주차장으로 왔을 때는 셔츠 단추가 좀 뜯겼을 뿐 멀쩡한 차림이었다. 셔츠쯤이야 몸싸움하다 그런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뺨이 퉁퉁 부은 것도.

그리고 환자 보호자가 오길 기다리는 동안 심리실에 뒀던 새 셔츠로 갈아입고, 머리도 다시 빗어서 간신히 멀쩡함을 되찾았다. 교수님 너머로 언뜻 거울이 보였다. 옷매무새도 낯빛도 다 괜찮았다.

뺨이 부어오르고 목에, 엄지손가락이 강하게 눌렸던 부분에 벌긋한 자국이 남아 멍이 들 것 같긴 했지만 지금은 눈에 안 띄는 붉은 자국으로만 보이는 정도였다.

“놀란 거 빼곤 괜찮아요. 좀 많이 놀랐지만.”

“정말 뺨 말고 다친 곳은 없는 거지?”

“네. 멀쩡해요.”

“미안하다.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건데.”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 걱정과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교수님은 주차장에 내려와서 내 얼굴을 보고도 기절할 듯 놀랐었다. 따지고 보면 교수님이 잘못한 건 없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수님이 뭘요…….”

서 교수님과 몇 마디를 더 하다가 연구실에서 나왔다.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정문에서 기다릴게요.]

나오는 길에 마주친 간호사도 나를 붙잡고 연신 사과했다. 입원이 필요한 환자가 그냥 돌아가면 간호사가 가끔 와서 알려 주기도 하는데, 아마도 그가 그걸 전해 주러 왔을 때 내가 자리를 비웠던 모양이다. 메모를 남기거나 찾아다니며 알려 줄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쨌거나 그에게도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 나는 유독 무겁게 느껴지는 가방을 늘어뜨리고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에서 왼쪽으로 조금 빠져나가면 차를 정차해 둘 수 있는 곳이 있다. 거기서 기다린다는 뜻일 것이다.

역시나 정문 왼쪽으로 나오자 검은 SUV가 비상등을 켜고 서 있었다. 택시나 데리러 온 차에 타거나, 차에서 내려 병원에 들어오는 사람들 틈을 지나 차 문을 열자 강주경이 조수석 쪽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올라타서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채우자 그는 느릿하게 액셀을 밟았다.

시트가 따끈따끈했다. 몸을 붙이고 앉자 긴장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차 안의 시계가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세상에, 아직 저녁 8시라고? 100년 같은 하루였다. 내가 한숨을 내쉬자 강주경이 룸미러로 흘끗 나를 보더니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니……, 으, 정신없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가 내 몸은 남겨 두고 혼만 쏙 빼 간 기분이다. 강주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들릴 듯 말 듯 한 낮은 엔진 소리만 떠돌았다. 하지만 무거운 침묵은 아니었다. 내가 말 한마디 하기 힘들 정도로 지친 걸 강주경이 알고 조용히 있을 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뇌인지 목구멍인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침을 삼킨 순간 목을 졸린 감각이 확 되살아났다.

“…….”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헐떡거렸는지 강주경이 날 한 번 쳐다보았다. 한숨 비슷한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차가 길가로 붙고 이내 멈췄다. 선생님, 또 강주경이 그 침착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괜찮아, 끝났잖아. 머리로는 그걸 아는데 뒤늦은 공포가 밀려왔다. 누군가 뒷골에 얼음으로 된 창을 박아 대는 것처럼 찌릿하게 아프고 소름이 온몸에 돌았다.

“만져도 괜찮아요?”

“…….”

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뺨이 욱신거렸다. 강주경이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핸들에 걸쳐진 팔과 강주경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 나서야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들었다. 끄덕이는 대신 눈을 깜빡이자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어깨를 가볍게 짚었던 손이 뺨에, 그다음으로 목에 닿았다.

길쭉하고 단단한 손끝이 서서히 멍이 올라오기 시작하는 상처를 쓰다듬었다.

“입술이 파래요.”

“내가?”

“네.”

강주경의 지금 표정은 비교적 알기 쉬웠다. 걱정으로 가득했다. 분명 화도 났을 텐데, 그것을 멀리 밀어 두고 나를 걱정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상처를 조심스레 만지던 손은 입술로 이어졌다. 뺨에는 열이 올라 몰랐는데, 손에 입술이 닿자 확연히 따뜻했다.

손에 가 있던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조금 아쉬워졌다. 오늘 낮에 그런 얼굴을 봤는데 지금은 이렇게 복잡한 감정과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을 본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지난주부터 오늘까지 짧은 시간 동안 겪기엔 너무 감정의 변화가 컸다.

얇은 막처럼 몸을 덮고 있던 오물이 걷히는 기분이었다.

“……집에 가자.”

“네.”

그는 두말하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손끝은 떨어지기 전 아주 약하게 목덜미를 눌렀다. 본격적으로 다친 곳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추위가 느껴졌고, 강주경은 아무런 말도 없이 히터를 더 세게 틀었다. 따뜻한 바람에 피부가 물 못 먹은 흙바닥처럼 바짝 마르는데 정작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 꾸물꾸물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지만 잠금장치가 말을 안 들었다. 고장 났나?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조수석 쪽으로 돌아온 강주경이 문을 열고, 몸을 안으로 들이밀더니 아주 쉽게 잠금을 풀고 나를 일으켰다.

다행히도 혼자 설 순 있었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긴 했지만. 심장이 정도 이상으로 빨리 뛴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차 문을 닫은 강주경이 갑자기 바닥에 앉았다.

“뭐 해?”

“업히세요.”

“괜찮은데. 혼자 걸을 수 있어.”

“빨리요.”

한 번 더 거절하려고 했으나 강주경은 내가 안 업히면 그대로 그 자리에 심어지기라도 할 기세였다. 결국 나는 앞으로 풀썩 넘어지다시피 넓은 등에 몸을 기댔다. 그는 나를 업고도 그냥 앉았다 일어나는 것처럼 휙 몸을 일으켰다. 밀착한 등에서 온기가 옮아 왔다.

집에 도착해 소파에 나를 앉힌 강주경은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려서 그렇구나, 하고 있는데 자세히 들어 보니 욕조에 물을 받는 소리였다. 거실로 돌아온 강주경이 소파 앞에 앉아서 나를 보았다. 내가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시선의 높이는 거의 비슷했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셔야 할 것 같아요.”

아직도 내 입술이 시퍼런 모양이다. 물이 받아질 때까지 그는 배가 고프지 않은지, 뺨이랑 목 말고 아픈 곳은 없는지 물었다. 집에 와서 앉으니 온몸이 뻐근하고 머리까지 아팠다. 팔다리도 차고 뻣뻣하게 굳어져서 확실히 물에 좀 들어가는 게 나을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겨우 일어나서 욕실로 향했다. 강주경은 문이 닫힐 때까지 걱정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벌써 물은 거의 차서 찰랑거렸다. 가까이 가서 수도를 잠그자 몸에 습한 온기가 닿았다. 들어가야지. 넥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고 막 벗었을 때, 노크가 들리더니 문이 조금 열렸다.

“선생님, 이거 입욕제 같은…….”

“…….”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강주경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손에 언젠가 선물 받아서 거실 한쪽에 두었던 입욕제가 들려 있었다. 순간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2초, 3초…… 그 정도, 아주 짧은 정적이 지나간 후 강주경은 당황해서 내 손에 입욕제를 쥐여 주고 문을 쿵 닫았다. 문밖에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아, 아냐, 괜찮아…….”

문이 닫히기 직전 강주경의 얼굴은 붉었다. 아니, 이게 뭐야, 대체. 연애 시작하기 직전인 학생들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둘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나누면서 서로 어색하게 얼굴이 빨개져 물러나기만 반복하고 있다.

강주경이 쥐여 주고 간 입욕제를 보았다. 작년에 수련을 마치고 나간 수련생에게서 받은 물건이었다. 어쩌다 보니 아직 뜯지도 않은 채였지만. 뜨거운 물에 적당히 붓기만 하면 되는 것 같다. 포장을 뜯어 붓자 투명하던 물이 천천히 부연 분홍색으로 변했다. 흐리게 향이 올라오는 게 나쁘지 않았다.

옷을 마저 벗고, 대강 몸을 씻은 뒤 욕조로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로도 도저히 올라가지 않던 체온이 그제야 조금씩 높아졌다. 발끝과 손끝이 따끔거린다. 좋은 냄새가 나는 뜨거운 물이 피부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욕조에 기대 눕다가 통증이 올라와서 등에도 멍이 들었다는 걸 알았다. 안 아픈 곳을 찾는 게 빠르겠다, 진짜. 뺨은 부었을 뿐 자국이 심하게 남을 것 같진 않았고 목은 터틀넥으로 가리면 된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꽤 한참 앉아 있다가 나오자 거실에 아무도 없었다. 불은 켜진 채였고 강주경의 가방도 소파 옆에 얌전히 놓였으나 그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방에 있나, 고개를 갸웃하며 침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현관이 열리더니 강주경이 들어왔다.

“나갔다 왔어?”

“네…… 빨리 온다고 왔는데.”

강주경은 외출복 차림 그대로였고 손에 뭘 잔뜩 들고 있었다. 약국, 편의점, 죽집 쇼핑백까지.

“속 안 좋으실 것 같아서 죽 사 왔어요.”

죽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식탁에 올린 그가 다른 봉투를 들고 날 보았다. 소파 근처에 서서 그러는 걸 보면 가서 앉으라는 뜻 같다. 나는 반바지에 반팔 셔츠 차림이었다. 불과 수십 분 전의 저체온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소파에 털썩 앉자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봉투를 뒤적였다. 거즈, 반창고로 시작해서 온갖 것들이 다 뒤섞여 굴러 나왔다. 심지어 그중에는 청심환까지 있었다. 편의점 봉투에서 따뜻한 꿀물을 꺼낸 강주경이 뚜껑을 열어 건넸다.

“아주 뜨겁진 않을 거예요. 이것도 드시고…….”

그 말대로 천천히 한 모금씩 마시기에 좋은 온도였다. 강주경은 내게 꿀물을 쥐여 주고는 일어나서 주방으로 향했다. 뭘 하나 했더니 큰 그릇에 얼음을 받아 비닐봉투에 옮기고, 그것을 다시 수건으로 감싸서 가지고 왔다. 그사이 나는 청심환 하나를 우물우물 씹어 먹고 꿀물 한 병도 다 비웠다.

강주경이 내게 얼음주머니를 내밀었다. 수건으로 잘 싸 둬서인지 지나치게 차갑진 않았다. 얼음찜질할 생각을 못 했네. 뺨에 얼음주머니를 댄 채 강주경을 보았다. 이제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내려다보게 되었다. 말끔하게 정리해 넘긴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결이 좋아 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내 몸의 찰과상을 소독했다. 뺨과 목, 귀 뒤쪽, 가슴에도 손톱자국이 있었고 팔꿈치는 주차장 바닥에 긁혔다. 소독약이 닿는 건 물이나 천이 닿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그래도 참고 묵묵히 있자 강주경은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꼼꼼하게 상처를 만지고 소독약이 스며든 뒤에는 면봉에 연고를 덜어 살살 문질렀다. 그 위에 크기에 맞게 반창고를 붙이고 나니 따가운 느낌이 훨씬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내 목도 살폈지만 손가락 모양으로 시커멓게 멍이 든 걸 빼면 이상이 없었다. 뺨은 얼음찜질을 하면 좀 나아질 거고. 조심스럽게 몸을 더듬던 강주경의 손은 무릎에 와서 멈췄다.

“이것도…….”

“아. 그건 아니야. 아까 책상에서 일어나다가 박았어.”

아, 혹시 그게 그거였나? 불길한 징조? 강주경은 손을 무릎에 얹은 채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벌써 몇 번이나 느껴 본 간질간질한 분위기…… 아니, 조금 다른가. 이번엔 단번에 반전된 것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반전된 상태가 가라앉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과 같았다.

나는 강주경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검은 눈에 이채가 돌았다.

“……선생님.”

“응.”

“아까 하려던 말, 계속해도 될까요.”

시선이 올라와 허공에서 똑바로 맞닿았다. 긴장의 순간이 길진 않았다. 강주경은, 마치 그럴 기회를 몇 번이나 잃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연 순간 곧바로 진심을 쏟아 냈다.

“저는 선생님을 좋아해요.”

다시 침묵이었다. 강주경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망설였다가, 이내 얼굴이 빨개졌다.

“죽 드세요…… 약도 있으니까 드시고.”

“고마워.”

“……죄송합니다. 오늘은 정말 괜찮을 것 같, 으니까, 가 볼게요.”

아니, 뭐라고? 간다고? 나는 벌떡 일어나는 불곰의 옷자락을 덥석 쥐었다.

“어디 가?”

“선생님.”

강주경이 잔뜩 당황해 내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저는 선생님을 좋아해요. 조금도 꾸미지 않은 순수한 말이 강주경의 무뚝뚝한 목소리, 싸늘한 말투로 흘러나왔다. 선생님을, 나를 좋아한다고. 네가. 꾸밈도 거짓도 없이 말했으면서 가겠다고.

“……대답도 안 듣고 가?”

그러자 강주경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했다.

“대답……해 주시게요?”

아, 강주경. 귀여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상당히 티 냈다고 생각했는데.”

“네?”

“아닌가.”

아니었나……? 어제도 오늘도,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강주경은 영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뭐…… 그래도 대답 듣고 싶어서 고백한 거 아니야?”

이것도 아닐까?

“……맞아요.”

역시.

“그럼 이리 좀 와 봐.”

강주경이 몸을 내 쪽으로 뻗었고, 나는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놀라서 움찔대는 게 역시 귀여웠다.

“……씻고 나올래?”

“…….”

“싫어?”

“선생님, 지금.”

으음. 그는 입을 잠시 다물더니 신음하듯 이어 말했다.

“지금, 그런 말씀 하시면 저는…… 오해해요.”

“음.”

나는 다시 강주경에게 손짓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왔고, 입술이 두 번째로 맞닿았다.

“오해 아닌데.”

“……선생님…….”

“오해 아니야. 너한테 대답한 거야.”

눈이 흔들리는 강주경의 뺨을 손끝으로 톡톡 쳤다. 그게 신호라도 된 것처럼 그는 느릿하게 일어났다. 씻고 올게요, 라고 말하는 낮은 목소리를 듣자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긴장이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 놨기에 욕실의 물소리가 잘 들렸다. 짐짓 여유롭게 강주경을 붙잡았으나 침실에 서자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뭘…… 뭘 준비해야 하지? 침실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방 안 구석구석을 뒤적였다. 가끔 몸에 바르는 순한 로션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움켜쥐고 침대에 앉아 시계를 노려보았다. 분 표시가 일정한 간격으로, 꽤 느리게 바뀌고 있었다. 숫자가 열다섯 번 바뀌었을 때 물소리가 멈추고 다시 세 번 바뀌자 욕실 문이 열렸다.

얼른 로션을 베개 옆에 내던지고 가만히 앉았다. 덩치를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로 조용한 발소리가 침실로 다가왔다. 가벼운 옷차림을 한 강주경이 문가에 잠시 섰다가 한 걸음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다음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머리카락은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말라 있었다.

그는 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낯선 무언가를 쳐다보는 것 같기도, 신기한 물건을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강주경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가 몸을 낮췄기 때문에 시선의 높이가 서로 자리를 바꾸었다. 검은 눈이 욕실의 물기를 그대로 담아 나온 것처럼 습했다.

손이 뻗어 와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묻듯이. 나는 그 손 위에 손을 겹치고 고개를 조금 돌려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손바닥의 피부는 단단한 편이었다. 컴퓨터 자판과 펜만 잡아 말랑거리는 내 손과는 사뭇 달랐다.

입술이 닿자마자 강주경은 숨을 짧게 삼키더니 바닥에서 일어났다. 대형견이 달려든 것처럼 몸이 떠밀려 뒤로 쓰러졌다. 침대는 푹신해서 괜찮을 줄 알았지만 매트리스가 가볍게 흔들릴 정도로 몸무게가 잔뜩 실린 채 누워서인지 등이 순간 욱신거렸다.

내 표정이 한순간 구겨진 것을 강주경은 놓치지 않았다.

“등도 다쳤어요, 선생님?”

“조금…….”

“보여 주세요.”

아직 얼마나 멍이 들었는지 못 봤는데. 생각하면서도 돌아서서 누웠다. 티셔츠가 걷어 올려지고, 허리와 등이 한순간 서늘했다. 시선만 돌려 강주경을 보자 그는 내 등을 보며 미간을 약간 좁히고 있었다. 큰 손바닥이 등 위로 조심스럽게 얹혔다.

“멍이 크게 들었어요.”

“그렇게까진…….”

“내일 병원 가요.”

명령형이 아니라 같이 가자는 뜻이었다. 그 정도로 멍이 크게 들었나. 정형외과에 가 봐야 할 것 같긴 했다. 실금 같은 게 간 거면 혼자서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멍 때문인지 강주경은 또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나는 한쪽 팔로 몸을 받치고 모로 기대듯 상체만 일으켜 강주경을 올려다보았다. 등에 얹혀 있던 손이 떨어졌고, 내가 다시 그 손을 잡았다. 손목을 잡아끌어서 맨살이 드러난 허리에 얹자 강주경은 잠시 나를 보다가 느릿하게 손을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명치 근처에서부터 간지러운 기대감이 퍼졌다.

엉덩이를 쓸다가 가볍게 쥐는 손길에 몸이 움찔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배 속이 뜨끈했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숨을 내쉬며 기듯이 손을 짚어 위로 올라갔다. 무릎을 구부린 내 발은 침대 밖으로 약간 빠져나가 있었다. 꾸물거리며 완전히 침대로 올라오자 강주경은 곧바로 따라왔다.

바지가 내려갔다. 무릎에 걸쳐졌다가 종아리를 지나 벗겨진 옷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눕는 정도는 괜찮지만 그 뒤는 등이 꽤 아플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로 엎드리자 강주경은 상체를 조금 더 굽혔다. 체온이 확 다가왔다.

몸통이 내 몸 전체를 덮어 감싸는 것 같았다. 골반과 엉덩이를 더듬던 손이 앞쪽으로 향했다. 엎드린 자세 때문에 배와 허벅지로 이어지는 부분이 움푹 들어가 있었고, 강주경의 손은 그곳을 부드럽게 눌렀다. 아래가 움찔거렸다.

답답한 숨이 아랫배에 고여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한숨 비슷한 신음을 조금씩 내면서 가만히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내가 반응하자 강주경은 그곳을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더듬고 눌렀다.

“아, 거기……, 그만…….”

참다못해 허리를 비틀었으나 그는 내 목 뒤에 입을 맞추며 한참 더 장골 근처를 만졌다. 그것만으로 나는 숨이 꽤 거칠어졌다. 꽉 뭉쳐진 감각이 온몸에 느릿느릿 열을 퍼뜨렸다. 아래가 발기하고 젖어 가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젖은 성기에 손이 감겼다. 귀두와 기둥을 한꺼번에 감싸는 느낌에 등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신음이 튀어나왔다. 강주경은 다른 한 손을 내 몸 아래쪽으로, 가슴으로 뻗었다. 손가락이 유두를 튕기듯 움직이고, 손이 크게 펼쳐져 가슴을 크게 감싸 쥐었다. 명치 위에서 움직이는 손에 양쪽이 한 번에 들어가듯 쥐어졌다.

위아래로 동시에 찾아든 자극에 저절로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성감은 불에 올린 물처럼 천천히 기포를 만들어 내며 뜸을 들이다 한순간 왈칵 끓어올랐다.

“흐아…….”

가슴을 쥐었다 놓고, 성기를 문지르는 손은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살이 거의 없는데도 가슴은 크고 단단한 손에 움켜쥐어질 때마다 달콤한 감각을 불러왔다.

바짝 곤두선 유두가 가슴과 함께 손바닥에 꽉 눌렸다. 가슴을 자극당하는 데다 성기를, 신경이 잔뜩 몰린 귀두까지 세게 문질러지니 벌써부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머리는 뜨거웠다. 처음엔 가볍게 만질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당장 사정할 것처럼 굴어서인지 강주경의 손짓은 점점 거칠어졌다.

“흑, 으, 응…….”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숨이 가빠졌다. 결국 침대에 엎드린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머릿속이 확 하얘지더니 절정이 몸을 덮쳤다. 정액이 시트 위로 투둑투둑 떨어졌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사정이 끝날 때까지 신음했다.

어느새 가슴에서 내려간 손이 허리를 안고 있었다. 사정하는 동안 내내 성기를 마찰하던 강주경은 내 등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또 목덜미에 입 맞추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티셔츠를 벗는 강주경과 눈이 마주쳤다.

위로 뻗었다가 내려오는 두 팔의 움직임을 따라 보기 좋게 짜인 근육이 움직였다. 이어 바지까지 벗어 바닥에 대강 던진 그가 반쯤 말려 올라간 내 티셔츠 뒤쪽으로 두 손을 집어넣었다. 내가 팔을 들거나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강주경은 한 손으로 쉽게 내 상체를 받쳐 안고 다른 한 손으로 옷을 벗겼다. 왼쪽 손에 한 번 걸렸다가 완전히 벗겨진 티셔츠가 내 바지 옆에 놓였다.

맨몸이 된 상체가 다시 다가왔다. 한쪽 팔이 내 턱 아래로 들어왔고, 귀에 끈적거리는 속삭임이 흘러들었다.

“싫으면 깨무세요.”

나는 힘줄이 불거진 팔을 깨무는 대신 그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속삭이던 목소리가 신음이 되었다. 다른 한 손이 척추를 더듬으며 내려가 꼬리뼈를 꾹 누르더니, 그 아래로 파고들었다. 심장이 크게 부푸는 것만 같았다. 손끝이 꽉 다물어진 입구를 더듬었다.

뻣뻣하고 물기라고는 조금도 없고, 삽입에 익숙하지도 않은 그곳은 얕은 곳을 벌리며 만지는 손길에도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고작 손가락의 끝부분, 한 마디 정도만 들어온 것뿐인데 통증도 이물감도 심했다. 신음하며 손을 위로 더듬었다. 베개 옆에 던져둔 로션이 금방 잡혔다. 그것을 끌어당기자 강주경은 손을 빼내고, 내 손에서 부드럽게 그것을 가지고 갔다.

이런 일에 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매끌매끌한 로션이 아래로 쏟아졌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쏟아 내는 바람에 로션은 살을 타고 침대 위로 흘렀다. 허벅지 안쪽에 질척하게 쌓인 로션이 느껴졌다. 강주경은 그것을 손끝에 잔뜩 묻혀 다시 입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윤활제가 잔뜩 묻은 손은 조금 전보다 훨씬 쉽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

손가락이 안으로 묻히듯 들어온 순간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튀어 올랐다. 고작 손가락인데도 안이 뻐근했다. 허벅지와 허리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벌써 숨을 쉬는 게 어려운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먼저 올라왔다.

하지만 아프고 버겁다고 느낀 건 처음 잠시뿐이었다. 몸속으로 들어온 길쭉한 이물은 축축한 점막에 로션을 집어넣어 더욱 적시며 세게 문질러 댔다. 안이 만져지는 느낌은 기이한 감각을 이끌어 왔다. 물에 천천히 잠기다가 갑자기 수렁으로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손이 드나들 때마다 미열처럼 피부 아래의 피가 따끈해졌다. 점점 내 입에서 나오는 신음이 잦아지기 시작할 때쯤, 강주경의 손이 깊게 들어와 안쪽 깊은 곳을 꽉 눌렀다.

“……!”

눈이 크게 뜨였다. 익숙한 내 방의 침대, 베개와 침대 헤드가 순간 깜빡이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그게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강주경은 손가락으로 나를 꿰어 들듯 하고 그곳을 몇 번이고 세게 문질렀다.

“으응, 읏, 아, 아!”

쾌감과 혼란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뜨거운 숨이 확 쏟아졌다. 입구를 쓸며 드나드는 느낌, 곧바로 이어지는 강렬한 감각, 버티기 힘들었다. 허리가 푹 무너져 침대에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렸다. 강주경의 손이 빠져나갔다가 로션을 더 묻히고, 한 손가락을 더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에서부터 찌릿찌릿한 전류가 온몸으로 퍼졌다.

손가락이 번갈아 가며 빠르게 드나들었다. 처음 하나는 어려웠으나 셋, 네 개로 늘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손을 겹친 것만으로 웬만한 남자의 성기보다 굵은 것 같았으나 윤활제를 잔뜩 바르고 한참 시간을 들여 풀어 놓은 안쪽은 욕심스럽게 이물질을 받아들였다.

살이 눅진하게 물러 흐물흐물 녹아 버릴 정도로 그는 내 안을 풀어 주었다. 잔뜩 벌어진 채 젖은 아래는 손가락이 틈을 만들어 낼 때마다 묽게 녹은 로션을 뚝뚝 흘렸다. 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강주경의 팔에 뺨을 댄 채 연신 헐떡거렸다. 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은 가느다란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아!”

안을 만지던 손이 불쑥 빠져나갔다. 로션이 길게 선을 그리며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여전히, 싫거나 아프면 깨물라고 말하듯이 눈앞에 놓인 단단한 팔에 눈가를 눌렀다. 숨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젖은 무언가를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아래를 만지는 게 아니었으니 강주경의 성기일 것이다. 이 정도로 풀어졌으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입구 위로 기둥이 문질러졌다. 풀어진 점막을 눌러 벌리고, 회음과 음낭 아래쪽까지 닿는 성기를 느끼며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쉽게 들어갈 거라는 자신이 무력하게 날아갔다.

미끌미끌하게 젖은 성기 끝이 꾹 눌렸을 때 그 생각은 더 강해졌다. 끄트머리만 들어왔을 뿐인데도 벌써 버거웠다. 입구는 빠끔거리며 미끈한 귀두를 빨아 대고 있었지만 그 밑으로 느껴지는 무게감에 겁이 덜컥 났다.

“아, 안 돼……, 안 들어가…….”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단 말이야. 홱 고개를 돌린 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강주경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것이라도 보는 것처럼, 당장에라도 녹아내릴 듯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홀려 숨을 내쉰 사이 강주경은 내 앞에 있던 팔까지 뒤로 물리고, 두 손으로 허리를 붙들었다. 허리와 아랫배가 거의 다 감싸였다. 한쪽 손이 젖어 미끌미끌하다는 걸 느낀 순간 역시나 푹 젖은 성기가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

상체가 앞으로 푹 꺾였다. 배 속이 온통 위로 치받치는 것 같았다. 등골부터 시작해 허리와 어깨, 목이며 팔과 손까지 벌벌 떨렸다. 숨통이 틀어 막힌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이었다.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푹 들어온 성기는 아까 강주경의 손이 실컷 만지고 괴롭힌 그 부분 근처까지 닿아 있었다.

아래가 지나치게 벌어져 뻐근하고 괴롭고, 숨이 막히고, 죽을 것만 같았다. 아무리 숨을 내쉬며 힘을 풀어 보려 해도 아래는 부들부들 경련하며 성기를 조이려 했다.

“아윽, 아, 아파, 아…….”

“선생님.”

“앗, 아……, 아…….”

머리는 아파, 그만해, 그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입에서 나오는 건 신음뿐이었다. 눈앞이 검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숨을 들이쉴 때마다 아래엔 계속 힘이 들어갔다.

삽입이 얕았다면 분명 강주경의 성기가 밀려 나왔겠지만, 그는 내 허리를 틀어쥔 채 허벅지에 힘을 단단히 쥐고 버티고 있었다. 도망치려는 움직임은 내벽이 우물거리며 움직여 그의 것을 감싸 빨아 대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응……, 읏, 아, 아! 아!”

간신히 힘을 뺀 순간 강주경은 성기를 약간 물렸다가 다시 퍽 집어넣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까 그가 실컷 괴롭힌 곳, 온갖 감각이 다 몰려 있는 듯한 그 도드라진 자리 위로 손가락보다 훨씬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거세게 내리쳐졌다. 입에서 쏟아진 건 신음이 아니라 비명에 가까웠다. 그곳을 이렇게 강한 힘으로 얻어맞듯 자극당하는 건 처음이었다.

“선생님……, 너무 좁아요.”

“앗, 아, 아, 네가, 아……!”

너무 큰 거야, 라고 말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그런 말을 했다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어지리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헐떡이고 떨어서인지 강주경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그대로 숨을 힘겹게 내쉬며 속을 짓누르는 성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썼다. 크게 벌어진 아래의 느낌이 아주 조금 편해졌을, 아니, 조금 살만해지고 내가 고개를 조금 숙였을 때 허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잠깐, 아, 아……! 아! 앗, 아!”

잠깐만 기다리라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주경은 허리를 쳐올렸다. 아까 그만큼 들어온 것만으로 충분히 안쪽 깊은 곳까지 닿았다. 다 들어온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아직도 이렇게 들어올 것이 남아 있다는 생각도 안 했다. 그게 고작 절반쯤. 그리고 몸을 뒤흔들어 대며 그것이 내 안을 파고들었다.

정말 내장이 전부 심장 언저리도 지날 정도로 밀려 올라오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비명처럼 신음하며 팔을 위로 뻗었다. 삽입을 피해 위로 도망칠 작정이었으나 붙들린 하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버둥거린 팔은 맥없이 시트와 베개를 움켜쥐었을 뿐이다.

“아윽, 아, 앗, 아……, 아!”

오싹한 감각이 쫙 퍼졌다. 드나들기를 반복하는 성기가 다시 그곳을 퍽퍽 때렸고, 속도가 빨라지면서 쾌감이 난폭하게 온몸을 긁었다. 신음이 참을 새도 없이 마구 쏟아졌다. 그곳을 시작으로 민감한 내벽을 마음대로 문지르고 누르고, 때리며 강주경은 기어이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뭉툭한 선단이 믿기 어려운 곳에 닿아 있었다.

중간에 강주경이 내 허리를 붙들어 들어 올렸기 때문에 나는 하체를 높게 든 채 무릎과 어깨로 체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등에서 배까지 쥐고 있는 손이 강하게 아랫배를 눌렀다.

“아윽!”

납작하던 아랫배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곳을 눌리기까지 하니 미칠 것 같았다. 압박감과 아픔은 여전했지만 그보다 생전 처음 겪는 강렬한 쾌감에 머리가 다 녹는 기분이었다. 흐느끼는 소리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배를 더듬던 강주경이 미끈거리는 성기를 귀두 근처까지 뽑았다가 다시 박아 넣은 순간 눈앞이 번뜩였다. 언제 다시 발기하고 내몰렸는지 모를 내 것에서 정액이 튀었다. 이마를 문지른 침대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타액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곳까지 성기가 들어와 있었다. 허리에서 벗어난 손이 땀에 젖은 등을 어루만졌다. 나는 내 등을 볼 수 없었지만 어디에 멍이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을 만질 때만 강주경이 손의 힘을 약하게 했기 때문에.

“……흣, 으, 아윽, 아, 아! 아!”

다시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주경의 체중에 떠밀려 점점 위로 밀려 올라갔다. 침대가 삐걱거리고, 시트는 엉망으로 구겨지고 젖고, 배 속은 불을 넣어 휘젓는 것처럼 엉망으로 뜨겁게 녹아 경련했다.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성기는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마다 오톨도톨한 내벽을 있는 대로 짓누르고 문질렀다.

“앗, 아, 아……, 아! 흐윽…….”

점막에 딱딱한 기둥이 조금의 틈도 없이 밀착해 도드라진 힘줄의 모양, 맥박까지 고스란히 느끼게 했다. 그것이 빠르고 거칠게 안을 마찰할 때마다 계속해서 사정감이 드는 것 같았다. 내 성기를 만져 느끼는 절정과 결이 다른, 이상한 고양감과 오르가슴이 겹겹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내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지도 못했고, 맹수처럼 커다란 남자의 체중에 꿰여 정신없이 흔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분탕하는 감각은 비명 같은 신음으로 아무리 쏟아 내려 해도 해소되지 않고 정신을 몰아붙이기만 했다. 먹먹해진 귀에 강주경의 목소리가 간혹 들렸다. 낮게 신음하거나 숨을 내쉬는 소리였다.

“아……!”

순간 시야가 휙 뒤집어졌다. 강주경은 성기를 깊게 밀어 넣은 채 나를 붙들어 몸을 돌리게 했다. 안쪽에서 단단한 기둥이 내벽을 쑤시며 각도를 바꾸었다.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몸이 앞으로 푹 휘청거려 그대로 쓰러졌다. 배와 배 사이에 내 성기가 들어갔다.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가슴 위로 엎어지자 다시 성기는 그 자리를 바꿨고, 이미 끝까지 예민해진 안쪽은 그 감각을 쉽사리 견디지 못했다. 성기 끝이 뜨끈해지나 싶더니 또다시 사정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몇 번째로 도달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정신을 녹여 놓는 것은 정액을 쏟아 내는 것과 다른, 버거운 절정이었다. 아직은 닿을 듯 말 듯 경계에 걸쳐져 있었다. 그 경계의 감각이 벌써 몇 겹째 겹쳐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온몸이, 뼈마디까지 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강주경의 위에 엎드린 채로 덜덜 떨고 있자 두 손이 뒤통수를 안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그의 머리 양옆으로 팔을 뻗어 짚고 아래에서 들어오는 혀를 받아들였다. 혀끝이 입천장을 핥고 그대로 미끄러져 목구멍으로 이어지는 말랑말랑한 살을 눌렀다. 흘러나온 신음과 타액이 그의 입 안으로 넘어갔다. 혀를 얽고 입술을 빨고, 깨물면서 그가 허리를 거칠게 추어올렸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응, 흐……, 아, 앗, 흐아앙, 아……!”

경계에 걸쳐져 있던 감각이 단번에 그 너머로 끌려갔다. 스스로 놀라 입술을 깨물게 될 정도로 흐트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높고 야한 소리였다. 신음한 순간 안쪽에서 강주경의 성기가 꿈틀거렸다. 그대로 몇 번을 더 쳐올리던 그가 상체를 일으켰다. 뒤로 휙 넘어갈 뻔한 내 몸은 허리를 강주경에게 안기면서 고정되었다.

“아아, 아, 아……, 아…….”

나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 신음에서는 이성을 한 줌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로 머리가 줄줄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아래는 놀랄 정도로 젖은 소리를 내고 있었고 온몸에 열이 오르다 못해 버터처럼 녹아 버리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생소한 쾌감에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사정하는 것보다 강렬하고 기이한 절정이 번개처럼 내리꽂혀 몸을 뒤흔들었다. 길고 난폭하고, 견디기 어렵고, 무섭고, 비명이 나올 정도로 기분 좋았다.

있는 힘껏 강주경의 목을 끌어안은 채 조르듯이 하반신을 문질렀다. 오므라든 발끝이 시트를 계속 구겼다. 발에 벗겨진 내 옷이 걸렸다가 떨어졌다. 배 속을 절반쯤 채운 것처럼 느껴지는 성기가 몇 번이나 더 사납게 안을 드나들다가 퍼뜩 멈췄다. 이미 딱 달라붙어 있다고 생각했던 몸이 더욱 밀착되었다. 벌벌 떨리는 몸 안으로 뜨거운 것이 확 퍼졌다.

“으응, 으, 흐윽, 읏…….”

고개를 푹 숙여 단단한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가 꽉 깨물었다. 꽤 세게 문 것 같은데 강주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맞닿은 배가 뻣뻣해져 있었다. 내가 세 번쯤 사정하는 동안 그는 처음이었다. 배 속이 정액으로 꽉 차는 것 같았다. 강주경이 천천히 내 몸을 들듯 움직여서 남은 정액을 전부 안에 쏟아 냈다.

상체를 일으키고 앉은 채였기에 몸이 들렸다가 내려올 때마다 안쪽에서 정액이 몇 줄기 흘러 접합부를 타고 떨어졌다. 로션으로 젖어 있을 때도 충분히 질척거리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정액이 들어차자 소리는 더 노골적이고 음란한 것이 되었다. 더 달아오를 게 있나 싶던 귀가 한층 뜨거워졌다.

강주경이 내 엉덩이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들게 했다. 무릎으로 서게 되면서 성기가 빠져나갔고, 그 모양대로 벌어져 아직 다물어지지 않은 안쪽에서 정액이 왈칵 쏟아져 흘렀다. 등줄기가 부르르 떨렸다.

“아……, 아…….”

넋이 나간 것 같은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피부가 온통 저릿저릿한 감각으로 뒤덮여 있었고, 무릎이며 어깨 같은 곳 안쪽이 이상하게 뻐근했다. 여운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강렬한 느낌에 계속 몸이 떨렸다. 강주경이 다시 나를 끌어안고 누웠다. 맞닿은 가슴에서 똑같이 빨리 뛰는 심장 박동이 뒤엉켰다. 누구의 것이 더 빨리 뛰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멍하니 강주경을 보았다. 무뚝뚝하던 눈매가 풀어지고, 눈가는 붉었다. 그 눈을 한참 보고 있었더니 그가 팔을 뻗어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거칠게 몰아세우던 것에 비하면 당장 깨지는 물건이라도 대하듯 조심스러운 포옹이었다.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고 한참 코와 입을 비비던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좋아해요, 선생님.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그 말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넋이 반쯤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것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강주경은 숨을 길게 내쉬더니 내 몸을 끌어안아 위로 반쯤 올렸다. 입술이 곧바로 가슴에 닿았다. 곤두선 유두가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아……!”

축축하고 뜨거운 입이 가슴을 빨기 시작했다. 나는 신음하며 두 팔을 시트 위로 늘어뜨렸다가 다시 끌어당겨 강주경의 머리를 안았다.

* * *

시계를 확인하니 거의 새벽이었다. 눈 깜빡하는 사이 지나간 몇 시간에 놀라기도 전에 강주경은 나를 씻기고 침대를 정리하고 다시 그 위에 눕게 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저 불곰 같은 체구에서 미리 예상했어야 하는데…… 온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 버린 것 같았다.

“선생님, 뭐라도 드시는 게.”

나와 달리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멀쩡한 얼굴의 강주경이 말했다. 이미 저녁 먹을 시간은 건너뛴 지 오래였다. 이대로 자도 괜찮지만 뭐라도 먹고 약을 속에 집어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빈속에 소염제를 집어넣어 속이 쓰려지는 건 싫다.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전자레인지에 뭘 데우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몇 분 후 강주경은 그릇에 옮겨 담은 죽을 미지근한 물과 함께 가지고 왔다. 쌀만 들어간 흰죽이었다.

“식욕 있으세요? 다른 거 사 올 걸 그랬나요. 아니면 반찬이라도 가지고 올까요?”

지나치게 환자식으로 보이는 음식을 보고 자기도 움찔했는지 그렇게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시간이라서인지 맛이나 냄새가 강한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다.

“너는?”

“괜찮아요.”

나도 약만 아니었으면 별로 먹고 싶지 않았기에 더 묻지 않았다. 절반쯤 비우고 스푼을 내려놓자 그는 물과 약만 남기고 그릇을 들고 나갔다. 약 두 알을 삼키는 사이 금세 내가 먹은 걸 정리하고 돌아온 강주경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오늘 많이 놀라셨죠. 혹시 모르니까 진료 받아 보시는 건…….”

그가 조금 머뭇거렸다. 정형외과가 아니라 우리 과 진료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사실 정형외과도 안 가도 될 것 같고. 어디 금 간 곳도 없어 보여.”

그렇게 말하며 한쪽 팔을 들어 보았다. 역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진짜라니까.”

실제로 강주경이 생각하는 만큼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건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던 직후에는 놀라서 몸이 떨리고 무서웠지만, 얻어맞은 곳도 아직 아팠지만 원래 환자를 상대하고 있으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편이다.

화나고 놀라는 게 없다고 말할 순 없으나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덜할 것이다. 피를 많이 보면 보통 사람은 크게 놀라지만, 의사는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그리고 다른 범죄자와 달리 환자는 폐쇄병동에 잘 격리되어 있다. 이경민도 지금쯤 병동에서 약을 먹고 멍해져서 잠들었을 것이다. 이경민이 하는 짓으로 보아 퇴원 조치는 쉽게 내려지지 않을 거고, 그가 뛰쳐나오거나 하면 내가 가장 먼저 알게 될 것이다.

주차장에서 끌려간 걸 떠올리면 아직 오싹하긴 해도, 며칠 지나면 알아서 잊힌다. 매일 일어나는 사건도 아니고 이런 일 한 번으로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면 애초에 정신과에서 일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게다가 오늘은. 나는 눈을 굴려 강주경을 보았다.

“선생님?”

그걸 덮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 이어졌잖아.

아직도 아래가 뻐근했다. 안쪽에 멍이 든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침대에 앉아 하체가 조금씩 쓸리는 것만으로 달콤하게 저릿저릿한 느낌이 올라왔다. 노곤하고 나른한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괜찮아. 사실 환자보다 교수한테 더 화나고.”

“……서 교수님이요?”

“아니, 무슨 소리야. 정 교수. 정운성.”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었다. 서 교수님은 우리 병원에서 한 줌도 채 안 될 착하고 멀쩡한 의사였다. 얼른 고개를 저으며 정운성 이야기를 했다.

투덜거림에 가까운 내 말을 강주경은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어찌나 잘 듣는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떠들고 말았다. 오늘 있었던 일의 원인만 말하려고 했는데 평소에 그 인간이 얼마나 재수 없고 짜증 나는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도대체 그런 인간이 무슨 수로 결혼을 했는지 궁금하다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흠, 미안.”

“아니에요.”

놀랍게도 강주경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한참 떠들었더니 정운성의 느글느글한 얼굴이 떠올라서 기분이 불쾌해졌다. 내가 남의 뒷이야기를 잘 안 하는 이유였다. 처음엔 속이 시원한데 결국 그 사람에 대해 많이 떠올리게 되니 역효과일 뿐이다.

“자야지.”

“……네.”

내 말에 강주경은 몸을 일으키더니 돌아서려 했다. 아니, 어디 가? 옷자락을 붙잡자 그는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내가 더 의문스러웠다.

“어디 가?”

“방에…….”

“왜?”

“…….”

강주경의 무뚝뚝한 얼굴이 약간 무너졌다. 왜 당황하는 건지. 수십 분 전까지 그렇게 달라붙어 섹스 했으면서 태연하게 자기 방에 가서 자겠다고 하는 게 더 신기했다. 옷을 끌어당기며 침대 옆자리를 내주자 그는 다시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결국 그가 침대에 들어와 누운 건 내가 티셔츠가 늘어나도록 잡아당긴 다음이었다. 어색하게 침대에 누운 그는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선생님은…… 예상하기 어려워요.”

“그런가?”

나는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주경이 말을 이었다.

“사실 차일 줄 알았어요.”

“으응?”

그럴 리가, 나는 괜히 혼자 앞서나가지 말자고 고민했을 정도인데.

“티 낸다고 낸 건데. 왜 몰랐다는 것처럼.”

“몰랐어요.”

둔하긴. 가슴을 툭툭 때렸지만 커다란 몸은 정말 움찔하지도 않았다.

“정말 몰랐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티 내 주셨다는 것도 눈치 못 챘고.”

“……으음.”

“제가 눈치가 없는 건지도 모르지만…….”

낮게 조곤거리는 강주경의 목소리에 내 행동을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열심히 티를 낸 것 같은데. 어쩌면 강주경도 혹시, 하다가 착각하지 말자고 고개를 저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 날 뻔했다. 둘 다 ‘설마 그렇겠어?’라고 생각하며 서로 땅만 열심히 파다가 자칫 잘못하면 그대로 끝났을 수도 있다.

아니…… 어차피 한 집에 살고 있었으니 언젠가 눈치를 챘을까. 하지만 오늘로 강주경이 날 데려다주고, 내 집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역시 그렇진 않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고민하고 있어도 용감한 강주경이 고백했을 테니까. 지금도 말하지 않았는가? 티를 냈다는 것도 알지 못했는데 고백한 거라고.

그래 놓고 덜컥 침대에 날 혼자 두고 가려고 했으니 이게 무슨 내외인지 모르겠지만, 조심스럽게 끌어안고 있는 팔의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빨리 자라는 뜻에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강주경은 나를 안은 채 숨을 작게 내쉬었다. 먼저 잠든 건 나였다.

다음 날, 오전 반차를 쓰고 병원에 들렀다 가자는 걸 거절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별다른 통증이 없었다. 오히려 어제 다친 것과 전혀 상관없는 부분이, 허리나 다리나 골반 같은 곳이 욱신거렸다. 내 불편한 기색을 보며 계속 병원에 가자고 하기에, 옆구리를 푹 찌르며 투덜거리자 그는 당황했다.

‘어제 거기도 다치신 거예요?’

대답이 제법 귀여웠다. 너 때문에 그래…….

아픈 이유까지 말한 다음에야 강주경은 조용해졌다.

아무튼 굳이 정형외과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가뿐했다. 아무리 실금이라도 뼈에 문제가 생기면 위화감이든 붓기든, 뭔가가 있게 마련이다. 어제 긴장으로 근육이 굳었던 걸 빼면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얼굴에 생각보다 진한 멍이 올라와서 반창고를 붙이긴 해야 했지만.

심리실로 들어가자 먼저 출근해서 의자에 녹아 있던 선배가 펑 튀어 올랐다.

“야! 얼굴이 왜 그래!”

“그게…….”

아직 선배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병원은 이런 일이 일어나면 숨기느라 애를 쓰니까 나나 서 교수님이 말하기 전까지 선배는 알 길이 없을 것이다. 주차장에 왔던 시큐리티들은 이것보다 더한 일도 겪으니 일일이 떠들고 다니지 않고.

“허, 세상에. 역시 행동력 있는 환자랑 체계적으로 이상해진 환자가 제일 무섭다.”

“맞아요.”

“한 선생 얼굴이…… 아이고…….”

선배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역시 선배는 내 걱정을 많이 해 주는 다정한…….

“이 병원에서 보기 좋은 몇 안 되는 얼굴이…….”

내 얼굴을 걱정하는 거였다.

그래도 선배는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1층 카페로 데려갔다. 커피에 초콜릿에 쿠키까지 잔뜩 손에 쥐여 주고, 같이 화단이 보이는 벤치로 나갔다. 거기서 잠시 앉아서 이야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가자마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돌아섰다. 11월 말의 찬 바람은 나약한 현대인 둘이 가운 차림으로 견디기엔 너무 매서웠다.

오전에는 둘 다 비교적 한가했다. 수련생들은 모두 자리를 비웠기에 심리실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어제 일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진짜 정운성 그 새끼 언젠가 그럴 줄 알았다.”

“맞아요. 진짜 교수 중에 한 명만 우주로 보낼 수 있으면 정운성 보낼 거예요.”

“그렇지, 우주복 없이…….”

“누구 좋으라고 입혀서 보내요. 그거 입히면 그냥 우주여행이지.”

“그러네.”

정운성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다른 교수들을 지나 곧 수련생들 화제로 흘러갔다. 선배가 서브 슈퍼바이저였기 때문에 대체로 수련생들은 심리실에서 나보다 선배의 눈치를 더 보는 편이었고, 접촉도 많았다. 아마 지금 슈퍼바이저인 민소라 선생님이 내년에 해외로 가게 되면 선배가 그 자리에 들어갈 것이다.

“이정주가 제일 문제야.”

선배가 길쭉한 초콜릿을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 올해 들어온 1년 차 남자 수련생이다. 슈퍼바이저도, 선배도 그에 대한 평가가 박했는데 몇몇 교수가 그를 좋아했다. 특히 정운성. 끼리끼리 노는 법이라는 생각이 도무지 떠나지 않아서 나 역시 이정주를 좋은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저번에 걔가 뭐라고 썼는지 알아? 이 환자는 참을성이 없어서 충동을 조절하지 못한다.”

“오…….”

대학교 4년과 대학원 2년을 거쳤다고 믿기 어려운 능력이었다. 강주경한테 쓰라고 해도 저런 답은 나올 것이다. 분석이 아니라 관찰을 해 버리는 건 경험이 부족한 수련생들이 자주 하는 실수였지만 때로 저렇게 심각한 사람이 나타나곤 했다. 졸업을 어떻게 한 건지 궁금했다.

“교수들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건 알겠는데 하는 짓이 진짜 어지간해야지. 이정주, 한동안 퇴근하자마자 정운성 아들 학원 끝나는 거 데리러 다녔었어.”

“헉.”

“그날 내기로 한 보고서도 안 내고 그냥 가길래 잡아서 물어봤더니 그러는 거야. 저 정운성 교수님 아드님 학원에 모시러 가야 해서요. 황당해서 넋 놓은 사이에 휙 가 버린 거 있지. 참 대단한 놈이야.”

물론 그다음 날 선배와 민 선생님에게 엄청나게 깨졌다고 한다.

그 후에도 계속 지극정성으로 ‘아드님을 모시러’ 다니다가 그 아드님께서 더는 학원에 안 다니겠다고 선언하신 후로 그만두게 되었다나. 그런 수련생을 챙기면서 지금까지 큰 충돌이 없었다니 선배와 민 선생님 둘 중 하나는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했다. 아니면 공동수상하거나.

거의 오전 내내 선배와 잡담을 하다가 슬슬 점심을 먹기 위해 일어났을 때였다. 먹고 돌아와서는 할 일이 많았다. 검사도 있고, 치료도 있고. 오늘 직원식당 점심 메뉴가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오징어 볶음이라는 것에 같이 한탄하고 있는데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또 무슨 일이 터졌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심리실 문이 부서질 듯 거칠게 열렸다. 문에 매달리듯 열고 들어온 건 뛰어오느라 머리가 다 흐트러진 유화영이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헉, 헉……, 서, 선생님!”

“서, 선생님, 왜!”

선배의 재촉에 유화영이 숨을 한 번 삼키더니 소리쳤다.

“정운성 잘렸대요!”

아니, 이게 웬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가 아니고 갑작스러운 일인가. 선배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았다. 자세한 것을 물어보니 정운성은 오늘 이른 아침에 나오자마자 위에 불려 갔다가 그대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의국 비서가 짐을 챙기는 중이었고 정신과 간호사들은 정운성의 담당 환자를 다른 교수들에게 돌리느라 내내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 소란에서 한발 떨어진 우리는 식당 구석에 앉아서 수군거렸다.

“뭐지? 갑자기 왜 잘린 걸까?”

“모르겠어요,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환자한테 돈이라도 받았나?”

식당에서 유화영도 어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지만, 우리 셋 다 그 일 때문에 정운성의 목이 날아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병원은 그런 일을 쉬쉬하고 싶어 하므로 정운성의 처분은 내부 징계여야 했다.

“그럼 이제 정운성 어디로 가요?”

“글쎄, 어디 산골 의료원으로 가야겠지. 거기도 못 갈 수도 있고.”

대학병원에서 해고당한 마흔이 넘은 조교수. 여느 업계가 그렇듯 여기도 몹시 좁다. 소문이 쫙 퍼져서 어디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정운성은 지금 정말로 우주복 없이 우주에 날려 간 기분이겠지. 아, 남의 불행에 기뻐하면 안 되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운성 덕분에 정신과는 발칵 뒤집어지다시피 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입 안에 욕을 숨기고 있다가 둘 이상 모이면 수군거렸다. 안 그래도 바쁜 대학병원에 일할 거리를 드럼통으로 쏟아 두고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고 사유를 아무도 몰랐지만 모두 비슷한 말을 했다. 그 새끼 언젠가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역시 사람이 인망을 쌓고 살아야 한다.

강주경과 저녁을 먹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정운성 이야기가 나왔다.

“이렇게 갑자기 잘릴 줄은 몰랐는데.”

“여러 일이 겹쳤던 거 아닐까요.”

“흠…… 아마 그럴 거야. 어제 일 정도는 해고될 문제가 아니거든.”

닭고기를 집고 있던 강주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응?”

“왜 그런 짓을 하고도 계속 일할 수 있는 건지 잘…….”

그건 나도 하는 생각이었다. 아마도 피해자가 나, 병원 내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름만 들으면 알 정도로 유명한 병원이기에 문제를 감출 수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추려 한다.

“뭐, 어쨌든 이제 얼굴 안 봐도 되니 잘됐지.”

정말 남의 불행에 웃으면 안 되는데 또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졌다. 강주경 앞에서 너무 즐거워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일 말고 다른 이야기 하자.”

“다른 이야기요?”

“흠, 우리 이야기?”

강주경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강주경과 내 사이는 순서가 제법 많이 바뀌었다. 중간을 건너뛰었다고 해야 할까. 서로 알고 있는 건 취미 정도였다. 나는 요리, 강주경은 운동.

“아는 게 별로 없잖아, 서로에 대해서.”

“……저는 조금 알아요.”

“응?”

생각해 보니 어젯밤에도 처음부터 좋아했느니, 그런 말을 했는데…… 강주경이 말하는 처음이 언제지?

“네가 말하는 처음이 언제야?”

“선생님이.”

거기까지만 말하고 강주경은 어색한 듯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눈만 깜빡이고 있자 말이 이어졌다.

“선생님이, 병원 처음 들어오셨을 때부터…….”

“으응?”

수련을 마치고 곧바로 이 병원에 취직했으니 처음 들어온 걸 따진다면 무려 5년 전이었다. 아니, 그때 강주경은 한국에 있지도 않았던 것 아닌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고 했는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데 강주경이 덧붙였다.

“그때 잠깐 한국에 와서 병원에 들렀는데. 좀…… 그렇죠.”

그는 괜히 말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좀 그럴 건 없었다. 놀랐을 뿐이다. 5년 전에 보고 지금 이 병원에 다닌다는 건 애초에 나 때문에 여기로 왔다는 뜻이다. 어쩐지 오버스펙이다 했더니.

“아깝지 않아?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는데.”

“여기가 제일 좋아요.”

“흠.”

하긴, 어쩐지 강주경과 자주 마주치긴 했다. 내부에 마을버스가 다닐 정도로 넓은 병원 부지 안에서 강주경과 내 활동 범위가 거의 비슷비슷했기에, 그가 입사한 후부터 얼굴은 이미 익숙했다.

병원 시큐리티가 몇 명인데 그렇게 우연히 마주쳤겠는가. 나는 그냥 강주경이 워낙 유명인이어서 다른 시큐리티보다 얼굴이 익숙한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티 낸 걸 몰랐다는 것도 이제 이해했다. 강주경과 가까워지고 슬쩍슬쩍 떠보기 시작한 게 지하 주차장에서 만난 그날 이후부터였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5년 동안 인사도 안 하는 관계였던 거니까.

“5년…….”

그렇게 중얼거리며 물끄러미 쳐다보자 강주경은 점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왜 저러나 싶어서 더 쳐다보았더니 점점 심해졌다. 결국 젓가락까지 내려놓은 그가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왜 그래?”

“혹시 선생님이…… 이상하게 생각하실까 봐요.”

“으으응?”

왜 그렇게 생각할까, 하고 강주경과 내 입장을 바꿔 보았다. 내가 강주경을 5년 동안 짝사랑하면서 건물 안에서 몇 번씩 마주치는 것 말고는 전혀 접근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주차장에서 가까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면?

이 상황에서 강주경처럼 당황할 것 같긴 했다. 물론 지금은 반대 입장이니 웃으면서 보고 있을 수 있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강주경은 어린애 같아서 귀여웠다.

“뭐 그런 걸 걱정해.”

“……걱정해요. 선생님이니까.”

잠시 말을 멈췄던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말했다.

“사실 지금도 꿈같은데.”

“아.”

손이 나도 모르게 강주경을 향했다. 푹신한 머리를 쓰다듬자 그는 날카로운 눈매를 유순하게 내렸다. 크고 사나운 개를 길들인 기분이다. 길에 서 있는 것만으로 위협적일 검고 커다란 개가 꼬리를 휘저으며 내 손바닥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으면 이렇지 않을까.

강주경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서로 간지러워진 기분으로 식사를 마쳤다. 대체로 식사한 후 하는 일은 며칠 동안 비슷비슷했다. 내가 주방을 정리하는 동안 강주경은 집 안을 청소했다. 놀랍게도 청소에 재능이 있어서 그가 오고 난 이후 우리 집 로봇청소기는 충전기 옆에서 내내 잠만 잤다. 구석구석 반짝거리는 집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선생님.”

오늘은 지난 며칠간 보낸 일상에서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씻고 나와서 거실에서 하는 입맞춤. 입술이 안쪽까지 맞닿았다가 금세 떨어졌다. 올려다보자 강주경의 눈매가 또 붉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그는 책을 가지고 오겠다며 휙 돌아서서 서재로 들어갔다.

강주경이 책을 들고 나올 때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제목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지난 일주일 내내 그는 똑같은 책만 들고 나오고 있었다.

“같은 책이면 그냥 방에 두고 읽지.”

생각보다 한 권을 오래 읽는 타입인가? 그러면 굳이 아침에 가져다 두고, 저녁에 도로 들고 갈 필요는 없는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강주경은 또 머뭇거렸다.

“사실 책보다는, 그 핑계로 선생님 방에 들어가고 싶어서요.”

“…….”

아, 진짜 미치겠네. 이렇게 귀여울 일인가? 웃음을 겨우 참으며 그를 보았다.

“그럼 네 방에서는 뭐 해?”

“네?”

“책 한 권을 그렇게 오래 읽을 것 같진 않은데.”

그가 집중력이 좋다는 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얇은 공포소설을 읽는 데 열흘 가까이 걸릴 것 같지 않다는 뜻이었다. 내 물음에 강주경은 이제 다 포기했다는 듯 술술 털어놓았다.

“책은…… 펴 두긴 하는데 읽진 못해요.”

“왜?”

“내내 선생님 생각만 하니까요.”

웃으려던 입술이 멈췄다. 순간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조금 전까지 강주경은 부끄러워하고, 나는 나름대로 여유를 가진 채 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입장이 바뀌었다. 5년 전부터 날 봤다는 말은 머뭇거리며 하던 강주경이 이 말을 할 땐 뭐가 문제냐는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는 새빨개진 내 얼굴을 보다가 입을 약간 벌렸다. 고개가 기울어지나 싶더니 손이 다치지 않은 쪽 뺨을 감쌌다. 항상 강주경의 체온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 뺨이 더 뜨거웠다. 둘 다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먼저 움직인 건 나였다.

가슴팍을 꽉 쥐고 끌어당기자 강주경은 순순히 따라와 눈을 내리깔며 입 맞췄다. 입술은 어느 쪽이 더 뜨거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점점 숨이 가빠졌다.

고개가 기울어질 때마다 그는 계속 따라왔다. 한참 입맞춤이 이어졌고 나는 스스로 아래로 손을 내려 옷을 벗었다. 그 소리에 강주경이 잠시 눈을 떴다. 입술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그는 내 허리를 안으며 몸을 아래로 내려 바닥에 앉았다.

“아, 잠깐…….”

뭘 하려는지 알고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성기가 입 안으로 삼켜진 뒤였다. 반쯤 일어서 있던 것이 축축한 점막에 감싸였다. 순간 다리의 힘이 풀릴 뻔했다. 가쁜 숨이 입에서 쏟아졌다. 두 손으로 벽을 짚고 기대어 서며 간신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 아…….”

입술 안쪽이 성기를 꽉 감싸고 마찰했다. 이미 젖고, 단단해지기 시작하던 것이 강주경의 입 안에서 점점 더 일어섰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머리가 혼란해졌다. 자꾸 몸이 휘청거렸다. 시야가 점점 부옇게 되는 것 같아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여야 했다. 강주경은 내가 비틀거릴 때마다 붙잡아 주었지만 세 번, 네 번 넘어질 듯 몸이 꺾이자 내 한쪽 다리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바닥을 불안하게 짚은 한쪽 발끝도 곧 떨어져 허공에 들렸다. 강주경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쉽게 나를 들고 소리가 나도록 성기를 빨았다. 급하게 끌려나온 감각은 단계도 밟지 않고 단숨에 끓어올랐다.

아래에서 연신 움직이는 머리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벽에 짚은 손을 떼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다리를 버둥거리다가 한쪽 발을 그의 등에 짚자 그것에 흥분하기라도 한 것처럼 구음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내 성기 끝이 목구멍까지 들어가 꽉 조여진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하아, 아, 아!”

강주경이 침을 삼키듯 목구멍을 조였다. 빠르게 찾아온 절정에 가장 먼저 놀랐고, 내가 토해 낸 정액을 그가 전부 삼켜서 두 번째로 놀랐다. 나는 급하게 그의 어깨를 짚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러면서 한쪽 발로 어깨를 밀치듯 누르자 강주경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는 모습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사, 삼켰, 왜…….”

“안 되나요?”

그는 태연한…… 아니, 태연하다기보다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강주경은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더니 조금 다가왔다.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는 상체를 숙이며 내 무릎에 입 맞췄다.

무릎에서 종아리로 입술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무릎 아래를 꽉 깨물려 신음하자 그는 다시 몸을 들었다. 내려가던 입술은 무릎에서부터 다시 위로 살을 더듬으며 올라와 허벅지 안쪽을 세게 빨았다. 멍에 가까운 자국이 생길 게 분명했다.

한참이나 허벅지를 물고 빨아 대던 강주경이 또 고개를 들었다. 사정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 것은 벌써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다. 강주경은 입술 안쪽으로 귀두를 소리 내어 빨았다. 예민한 부분을 그런 식으로 자극당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그러나 그 감각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나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미끌미끌하게 젖은 성기를 뱉은 입술이 더 아래로 내려가 말도 안 되는 부분을 핥기 시작했다.

“무슨, 아, 거기, 앗!”

어제 길게 이어졌던 섹스로 아직도 그곳은 부드럽게 풀어진 채였다. 그 위를 말캉한 혀와 입술이 차례로 눌렀다. 놀라고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하려 했으나 뒤는 벽이었다.

벽에 등을 꽉 누르며 피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강주경은 내 허벅지를 꽉 붙든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서 있어서 크게 벌어지지 않은 아래로 혀가 들어왔다. 코가 살에 닿을 정도로 그의 얼굴이 밀착되었다.

“흐아, 아, 안 돼…….”

입술이 아래를 강하게 빨아 올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다음엔 더 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야 했다. 강주경이 내 무릎 뒤쪽을 잡더니 그대로 들어 자신의 어깨에 걸쳐놓았다.

몸이 아래로 푹 꺼질 것 같았으나 그 전에 단단한 손이 엉덩이를 받쳤다. 그래도 불안해서 양쪽 손바닥으로 벽을 움켜쥐듯 짚고, 등과 어깨까지 바짝 기댔다. 자연스럽게 하체를 앞으로 내민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강주경은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 나를 올려다보더니 무릎을 꿇은 채로 조금 다가왔다. 다시 입술이 아래에 닿았다. 그가 얼굴을 바짝 붙이자 내 체중 때문에 그의 입술과 그 근처를 깔고 누르는 것 같은 모양이 되고 말았다.

부끄러움에 어깨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연신 싫다는 말만 흘리던 나는 기어코 안쪽으로 혀가 들어온 순간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아, 안 돼, 안……, 안 되는데, 거기…….”

강주경은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 젖은 소리를 내며 아래를 빨아 댔다. 성기를 빨릴 때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축축한 소리였다.

혀뿌리까지 들어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게 안을 핥고, 누르고, 강하게 빨고, 그것이 반복되는 동안 점점 몸이 더 달아올랐다. 배 안쪽이 뜨겁게 욱신거렸다. 강주경의 것을 쉽게 기억한 안쪽이 아주 깊은 곳까지 꿈틀거렸다. 나는 두 발목을 겹치듯 하면서 그의 목에 다리를 감았다.

“흐으응, 으응…….”

처음부터 부드러웠던 아래는 긴 애무에 이제 말랑말랑할 정도로 녹아내렸다. 다시 빳빳해진 성기는 미끈거리는 선액으로 덮여 있었다. 그제야 고개를 든 강주경의 입술이 젖어 있어서, 눈은 반쯤 넋이 나간 것 같아서 나를 더 흥분시켰다. 배 속이 따끔따끔할 정도로 간지러웠다.

“넣, 넣어……, 줄…….”

넣어 줄 거냐고, 그렇게 물으려 했지만 질문이 끝까지 이어지지도 못했다. 강주경은 커다란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한 팔로 나를 들듯이 안았다.

아래에 귀두 끝이 닿은 것조차 아주 짧게 느꼈을 뿐이다. 둥글고 미끌미끌한 선단이 입구를 누른 것만으로 내 안은 너무 쉽게 벌어졌다. 긴 애무 때문이었다.

단숨에 절반쯤 들어온 성기는 강주경이 내 몸을 두 팔로 고쳐 안고 조금 빠져나갔다가 다시 쳐올린 순간 아직 벌어지지 않은 안쪽까지 거칠게 짓눌러 열며 뿌리까지 밀려들었다.

“아아, 아! 앗, 갑자기, 아, 아!”

녹을 듯이 풀려 있다고 해도 삽입섹스에 익숙하지 않고, 충분히 길들여진 것도 아닌 아래는 강주경의 것을 삼키기엔 너무 좁았다. 아니, 익숙해진다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다. 내 몸 자체가 강주경을 상대하기에는 지나치게 작다. 아니, 아니지. 내가 작은 게 아니라 강주경이 너무 큰 것이다. 성기가 끝까지 들어오자 배가 절반은 차 버린 것처럼 압박감이 엄청났다.

그러나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크다는 것은 내벽을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힘껏 짓눌러 준다는 뜻이었다. 예민한 내벽, 얇은 점막 아래 뇌에 직격하는 쾌감을 끌어내는 자리 몇 군데가 한꺼번에 자극되었다. 감각의 뿌리를 직접 누르는 힘은 거의 콱콱 밀어 대는 것에 가까웠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뒷목이 선뜩하고 시야는 눈앞에 검은 천이라도 드리워 너풀대는 것처럼 물결쳤다. 손으로 벽을 짚은 감각만 선명하다가 허벅지와 다리가 저렸고, 배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한 팔을 내 등 뒤로 집어넣어 벽에서 떼어 냈다.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강주경의 목을 끌어안았고, 벽에 일부 기대고 있던 체중은 모조리 아래로 실렸다.

“앗, 흐악……!”

체중이 쏠리면서 성기가 약간 더 안으로 들어왔고, 얕은 각도로 안을 휘저었다. 우는 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신음이 아니라 울음에 가까운 소리였다. 코를 훌쩍거리자 강주경이 숨을 뱉어 냈다. 내 목소리에 더 흥분한 게 분명했다. 그는 나를 고쳐 안는 것처럼 엉덩이를 받친 채 흔들면서 동시에 제 허리를 쳐올렸다.

“으응! 읏, 아, 흐흑, 안 돼……, 안에, 안쪽이…….”

“……안쪽이, 왜요, 선생님.”

“너무, 너무 눌려서, 아, 아아……, 흑, 너무, 커…….”

“읏, 그런 말……, 선생님.”

강주경이 다시 안을 거칠게 쳤다. 눈앞에 별이 번쩍거렸다. 나는 과장을 조금 보태어 내 종아리만큼 굵은 두 팔에 받쳐져 흔들렸다. 위로 들렸다가 떨어질 때마다 성기 끝이 안쪽을 푹푹 찔렀다. 그대로 너무 느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참을 때마다 감각이 극점으로 끌려 올라가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선생님……, 선생님,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지금 너무 예뻐…….”

그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진심인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마음이 뚝뚝 떨어졌다. 5년 전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말한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가 표정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그러나 새카만 눈동자는 흐리게 젖은 채일 것이다.

“으응……, 나도, 나도 좋아…….”

“…….”

말소리 대신 숨소리만 들렸다. 거칠게 내쉬는 숨결이 목덜미에 닿는가 싶더니, 강주경은 닥치는 대로 내 목덜미를 빨고 깨물어 댔다. 살을 조금씩 뜯어 삼키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사나운 입맞춤이 목과 어깨, 등에도 몇 번이나 이어졌다. 그중에서 입술로만 가볍게 훑고 지나간 곳은 아마도 목을 졸린 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자리일 것이다.

입 맞추고 깨무는 내내 아, 아, 하고 낮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숨 쉬는 것과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그가 지나치게 흥분해 신음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여유는 없었다. 안을 버거울 정도로 꽉 채웠다고 생각했던 성기가 조금 전 내 말에 더 부풀어, 이제는 정말 배 속에 그것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조이려 하지 않아도 내벽의 오돌토돌한 부분까지 전부 짓눌려 정말 작은 틈조차 사라질 정도로 성기가 꽉 들어찼다.

“선생님……, 더 세게 안고 싶어요. 내 마음대로 다루고 싶어.”

그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반쯤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지금도 충분히 심하게, 거칠게 붙잡아 마음대로 다루고 있으면서. 그러나 강주경의 입에서 나온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그 내용이 부끄럽게도 내 흥분을 부채질했다. 흥분에 휘둘려 숨이 멈출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멋대로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흐응, 응, 좋아, 더, 더 해 줘, 더……, 더 마음대로, 다뤄 줘……!”

“마음대로, 어떻게요. 선생님.”

“네, 네 마음대로……, 전부……!”

“윽, 그렇게 하면, 감당, 못하실 거예요.”

주경이의 목소리도 띄엄띄엄 끊어지고 있었다. 말꼬리 끝에 달라붙은 숨소리가 나를 자극했다. 감당 못할 것이 어떤 건지 궁금했다. 기대가 되었다.

평상시의 정중하고 다정한 강주경과 지금 이 거친 남자 사이의 간극은 엄청나게 자극적이었다. 강주경의 방식은 거칠고 난폭한 편이었고, 나는 그에 흥분했다. 아픔에 가까운 자극은 격렬한 쾌감으로 바뀐다는 걸 나는 빠르게 배웠다.

“흑, 좋아, 기분, 좋아……, 아, 죽을 것 같아, 제발, 더……!”

초반에는 그만하라느니 안 들어간다느니 겁을 냈으나 이젠 그만둘까 봐 겁이 났다. 강주경의 체온이 내 두려움도 수치심도 전부 녹여 버린 것 같다. 육식 짐승처럼 커다란 몸 아래 깔려 무력하게 흔들리고, 마구 내몰리고 싶은 욕구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불덩어리 같은 성기가 안을 푹 찌를 때마다 이성은 뜨거운 물을 떨어뜨린 설탕처럼 녹아서 끈적끈적 흘러내렸다. 다시 한번 강주경을 조르며 안을 힘껏 조이고, 손톱을 바짝 세워 그의 등을 긁었다.

“하…….”

그는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을 토해 내더니 몸을 앞으로 굽혔다. 그리고 헝겊인형이라도 다루듯 아주 쉽게 내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했다.

“아아……!”

안쪽에서 성기가 거의 원을 그리듯 넓은 각도로 거칠게 내벽을 휘저었다. 깊이 삽입한 채로 몸이 돌려지자 엄청난 자극이 되었다. 등줄기가 떨리다 못해 들썩거렸다. 꼬리뼈 언저리가 흥분 때문에 욱신욱신했다.

두 팔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으며 엎드린 나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며 헐떡였다. 주경이 질척거리는 성기를 절반쯤 빼내더니, 내 아래의 바닥을 손으로 훑었다. 뭘 하는 건가 싶었는데 손바닥이 연결부를 덮었고 점액질이 발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사정한 듯했다. 나는 사정의 감각조차 모조리 덮을 정도로 난폭한 쾌감에 휩쓸려 정신조차 차리지 못했다.

“흐으, 읏, 아아……, 앗, 아!”

내 정액이 뒤를 적시는 느낌에 진저리치던 나는 귀두 근처까지 빠져나갔던 성기가 거칠게 안으로 내리박힌 순간 비명을 질렀다. 배를 퍽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눈을 크게 뜨며 벌벌 떨고 있는데 강주경이 내 허리를 아플 정도로 세게 잡았다. 양손 엄지손가락이 등골 옆을 눌렀다.

“선생님, 왜 이렇게……, 야해요.”

“아, 아……, 몰라, 기분, 좋아, 아…….”

한참 전에 사라진 이성은 느끼는 것을 조금도 걸러 내지 않고 입 밖에 냈다. 기분이 좋고, 너무 좋아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지배당하고 꿰뚫리는 감각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뒤흔들어 놓는 것인지 몰랐다. 퍽,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몇 차례 더 몸이 흔들리고 간신히 그 쾌감에 조금이나마 몸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순간 엉덩이에 날카로운 아픔이 지나갔다. 동시에 배 속은 바짝 조여들었다.

“흐악……!”

강주경이 내 엉덩이를 때렸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얻어맞아서 놀란 것보다 그 갑작스럽고 이질적인 자극이 끌어낸 쾌감 쪽이 더 컸다. 아직도 찌릿찌릿하게 살이 아프고, 피부 아래가 간질간질했다. 그 간지러운 느낌이 배 속으로 마구 파고드는 것 같았다. 숨을 멈췄다가 가늘게 신음하자 강주경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맞는 거, 좋아요, 선생님?”

“……흐, 으……, 응…….”

커다란 손은 보이는 것만큼 매웠다. 한두 대만 맞아도 멍이 들지 않을까 싶을 만큼 아팠는데, 아픈 것이 조금도 흥분을 식게 만들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소리 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으나, 뜨겁게 감각을 뒤흔들고 지나간 통증이 기분 좋았다. 좀 더 느껴 보고 싶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결국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하아, 더, 더…….”

강주경은 내 어깨에 입을 맞추더니 골반과 그 아래쪽을 살살 쓰다듬다가 다시 두 번쯤 손을 휘둘렀다. 소리가 요란했다. 손바닥이 살을 때리고 지나갈 때마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안이 그의 성기를 세게 물었다.

아득한 느낌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안쪽에서 성기가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나는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한 줌 남은 이성은 강주경이 가볍게 흔들듯 하체를 움직인 순간 날아갔다. 내 입에서 본능만 남은 호소가 흘러나왔다.

“때리, 때리면서, 박아 줘…….”

“선생님…….”

대화 내용은 마치 내가 주도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강주경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의도한 대로 내몰려 매달리며 애원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거부하고 도망치기에는 내가 느끼는 쾌감이 너무나 컸다.

머리가 줄줄 녹아내리는 것 같은 달콤한 감각이 내 거절을 모조리 집어삼키고 그에게 더 빌면서 울어 보라 재촉하고 있었다. 강주경은 내가 애걸한 대로, 또 자신이 하고 싶었던 대로 행동했다. 살을 때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온몸이 울리고, 따끔거리는 통증이 퍼졌다.

“선생님, 살이 희어서……, 심하게 맞은 것 같네요.”

“흐윽…….”

어떻게 되어 있을까.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이니 알 수 없다. 아직도 화끈화끈하게 아픈 살 때문에 움찔거리고 있는데, 강주경이 다시 내 골반을 움켜쥐더니 거세게 박아 넣었다.

“아아, 앗, 아! 아!”

아까 강주경이 잔뜩 발라 놓은 타액, 내 정액, 그리고 젖은 그의 성기에서 흐른 말간 액체, 고작 그것으로 아래는 찌걱찌걱 소리가 날 정도로 젖었다. 젤을 쓰지 않아 윤활이 조금 부족한 것까지도 자극의 하나가 되었다. 내 몸이 앞으로 휙 떠밀릴 만큼 강한 힘으로 성기가 파고들 때마다 빠듯하게 벌어진 점막이 움찔움찔 꿈틀거리며 그의 것을 틈 없이 전부 물어서 고루 조였다.

계속 이어진 마찰 때문에 부어오른 내벽의 툭 튀어나온 부분도, 그 말고는 아무도, 나조차도 만져 본 적 없는 가장 깊은…… 놀랄 정도로 느끼게 되는 그곳도 힘줄이 두툼하게 불거진 사나운 성기가 마구 문지르고 때려 댔다. 그것이 쭉 빠져나갔다가 체중을 잔뜩 실어 내리꽂힐 때마다 온몸이 뾰족한 것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팔딱거렸다.

그 난폭한 움직임에 몸이 분명 앞으로 밀려가야 하는데, 골반을 단단히 틀어쥔 손 때문에 나는 어지러울 정도로 크게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성기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얼굴 아래로 무언가 후드득 떨어졌다.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흐윽, 아, 아……, 앗, 아! 흐아앙!”

이상한 전류 같은 것이 온몸에 쭉 퍼졌다. 강주경이 맞아서 부어오른 엉덩이를 손으로 꽉 움켜쥔 것이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내벽이 조여들었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안쪽에 들어찬 성기가 크게 꿈틀대는 걸 보면 그도 곧 사정할 것 같았다.

“하아, 하, 아……, 아…….”

정신없이 흔들리던 건 멈추었으나 성기와 내 내벽이 멋대로 움찔거리는 것, 맞은 엉덩이의 아픔과 꽉 쥐어지면서 남은 저림 때문에 여전히 성감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빠르고 험악하게 때려 대는, 괴로울 정도의 쾌감은 아니지만 충분히 심한 자극이었다. 헐떡이며 팔다리에 힘을 주고 엎어지지 않게 버텨야 했다.

“선생님, 제가, 어쩌면…….”

“하윽, 응…….”

“어쩌면, 저는, 오늘 한 것 이상으로, 선생님한테……, 바랄지도 모르, 는데.”

“오늘 한 것 이상이라니…….”

“너무 심하게 하진 않을게요. 그냥, 이렇게……, 이 정도만.”

그렇게 말하며 강주경은 맞아서 뜨겁게 부어오른 자리를 손끝으로 긁었다. 손톱을 가볍게 세워 긁는 감각에 배에서부터 성기까지 근질거리는 전류가 마구 퍼졌다.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그의 두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우악스럽게 붙잡고 벌리는 바람에 맞은 자리는 저릿저릿하고 화끈거렸고, 온몸으로 강렬한 감각이 내달렸다. 그것이 다 도망치기도 전에 강주경은 허리를 쳐 대기 시작했다. 몸이 저항하지 못하고 앞으로 휘청휘청 밀렸다.

“아아, 아, 응, 으응, 흐앙……!”

정말 교성이라는 말이 어울릴 신음 소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몇 번이나 더 거칠게 움직이며 엉덩이를 때린 강주경이 퍼뜩 멈췄다. 사정하려는 듯했다. 안쪽으로 퍼질 뜨거운 액체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돌연 몸을 뒤로 빼며 귀두가 아슬아슬하게 걸릴 때까지 빠져나갔다.

뭘 하는 건지 고개를 돌려 확인하기도 전에 그는 그 상태로 정액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귀두가 둥글게 걸린 정도로만 얕게 삽입된 상태였기에 정액은 아직 벌어진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거나 울컥울컥 넘쳐 입구에 덩어리졌다가 그 일부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었다. 둥글고 미끌거리는 덩어리가 안쪽에서부터 입구까지 고였다. 강주경은 그 상태로 몇 번이나 귀두로 입구 안쪽과 그 위를 문지르며 사정하다가, 맞아서 화끈거리는 자리에 젖은 성기를 비비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 내 위에 뿌렸다.

한 번 사정했으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으나 강주경은 숨을 골랐을 뿐 여전히 흥분한 기색이었다. 무언가 더 이어질 것을 알고 나도 모르게 움츠린 순간 몸이 조금 들리듯 하면서 뒤로 끌려갔다. 바닥에 쓸리거나 하진 않았지만 놀라서 작게 신음했고, 그걸 들은 강주경이 달래듯 내 어깨에 입을 맞췄다. 고개를 들자 현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선생님, 고개 돌려 보세요.”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뒤를 돌아보자 거울이 있었고, 내 뒷모습이 비쳤다.

“흑…….”

거울에 비친 모습은 엄청났다. 엉덩이는 새빨갛게 부어오른 채 작은 멍이 올라왔고 그 위로 희뿌연 액체가 흘렀다. 아직도 벌어진 입구에는 진한 정액이 잔뜩 고여 있었다. 강주경의 시선은 그 위에 못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열이 잔뜩 고인 눈을 보면 그 스스로도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강주경이 내 발목 한쪽을 붙잡고 옆으로 잡아당겼다. 다리가 크게 벌어지면서 몸이 푹 가라앉아, 어깨와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듯 엎어졌다. 무의식중에 앞으로 뻗은 한쪽 손바닥이 현관의 차가운 타일을 짚었다. 그러자 강주경은 팔을 내밀어 내 손을 잡고 거실 바닥으로 돌려놓았다. 손이 무척 뜨거웠다.

그는 손을 다시 뒤로 물리더니 내 등에 얹었다. 땀에 젖은 살을 손바닥이 더듬으며 가볍게 내리눌렀고, 나는 상체를 더 낮춰야 했다. 정액이 잔뜩 고여 미끌미끌한 아래로 다시 귀두 끝이 닿았다. 그리고 숨을 내뱉기도 전에 강주경의 성기가 정액과 함께 안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 맞아서 욱신거리는 살에 뼈가 거세게 부딪힐 정도로 난폭한 삽입이었다.

“아, 아……, 아…….”

입구 근처를 제외하고는 언제 성기를 품었냐는 듯 다물린 내벽이 재차 넓게 벌어졌다. 두 번째 삽입임에도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오히려 안쪽이 마찰과 자극 때문에 뜨끈하게 부어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자극되었다. 귀에 잔뜩 쉰 신음 소리가 들렸다.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그 역시 버거울 것이다. 성기가 점막을 짓누르며 꿈틀거렸다.

“으응, 잠깐만……, 조금만…….”

숨을 내쉬며 힘을 풀어 보려 애쓰고 있는데 갑자기 몸이 위로 들렸다. 내 숨소리가 비명으로 바뀌었다. 나는 순식간에 강주경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고, 거울이 정면에 보였다.

거울로 본 나는 대단한 꼴이었다. 머리는 다 흐트러진 채 땀 때문에 이마에 달라붙었고, 얼굴은 터질 듯 붉었다. 입술은 잔뜩 부풀고 정면에서도 보이는 자리에 강주경이 깨물거나 빨아서 만들어 놓은 자국이 있었다. 다리를 크게 벌린 채로 늘어져 앉은 자세에 얼굴은 넋이 나간 듯 멍했다.

나를 몸 위에 앉힌 강주경은 눈가가 붉었고, 마찬가지로 흥분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나와 다른 것은 몽롱하게 흐트러진 표정이 아니라 오히려 평소보다 더 험악하게 보인다는 정도였다. 거울을 통해 보니 강주경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앞에 있는데도 그의 몸은 나보다 훨씬 컸고, 내 몸으로 다 가려지지도 않았다.

내 어깨에 턱을 얹은 강주경이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귀에 입을 맞춘 그가 살도 거의 없는 양쪽 가슴을 모아서 세게 움켜쥐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신음했다. 그러자 그는 내 귀를 가볍게 깨물며 거울을 보라고 속삭였다.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로 앞을 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리자 눈앞이 명확해졌고, 곧바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에는 나와 강주경의 얼굴만 보느라 미처 보지 못한 아래가 눈에 들어왔다. 잔뜩 벌어진 채 성기를 품고 있는 아래, 말간 액체를 줄줄 흘리며 일어선 성기와 맞은 자국부터 시작해 온갖 흔적이 덮인 허벅지, 그 상태로 강주경이 가볍게 하체를 흔들자 정액 거품 사이로 입구가 마구 우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흐아아…….”

흐느끼는 것 같은 신음이 나왔다. 거울을 통해 강주경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입술을 깨물자 그는 모양 좋은 눈을 휘며 웃었다.

“시, 싫어, 거울……, 싫…….”

부끄러워서 이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내 모습을 거울로 직접 보는 것 자체도 죽을 것 같았고, 이것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강주경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가 두 손으로 가슴을 모아 쥐면서 동시에 아래를 쳐올렸고, 눈앞이 색색으로 점멸했다.

“흑……, 싫어, 제발, 주경아, 아, 아! 아!”

그만두기는커녕 몸짓이 더욱 거칠어졌다. 가슴에도 멍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세게 치대며, 허벅지에 힘을 주고 아래에서부터 쳐올렸다. 다리가 휙 들릴 정도로 흔들렸다. 말랑말랑하고 뜨겁게 부은 안쪽은 예민한 부분이 내벽 전체로 다 퍼져 버린 것처럼 성기가 얕게 드나드는 것만으로 울음이 터져 나올 듯한 쾌감을 온몸에 퍼뜨렸다.

“아아, 아! 앗, 흐, 으흑, 아……!”

성기가 아래에서부터 난폭하게 안쪽을 찔렀다. 나는 눈을 꽉 감으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다리를 오므렸다. 강주경이 내 몸을 뒤흔들 때마다 다리는 맥없이 벌어졌지만 얼른 다시 무릎을 모았다.

“눈 떠요.”

“싫……, 어, 아, 흐악, 아! 아!”

가슴을 주물러 대던 손이 아래로 내려와 배를 끌어안듯 잡았다. 하체가 더 밀착되면서 귀두 옆머리가 안쪽의 단단한 곳을 세게 짓눌렀다.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감각이 더 생생했다. 잠시 숨만 내쉬던 그가 내 귀를 꽉 깨물었다.

“아……!”

“눈 뜨고, 다리 붙잡아요, 선생님.”

“흐으……, 흑…….”

“빨리.”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눈이 확 뜨였다. 거울이 다시 보였다. 조금 전보다 더 엉망이 된 얼굴의 내가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 타액이 흐르는 것도 거울을 보기 전까지 몰랐다.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강주경이 재촉하듯 내 배를 두 팔로 끌어안은 채 허리를 흔들었고,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저릿저릿했다. 잔뜩 고조된 감각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사정의 전조조차 포악한 쾌감에 떠밀려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조금 전의 그것으로 순식간에 한계가 닥쳐왔다. 성기 끝에서 정액이 쏟아졌다.

알지도 못하는 사이 이미 사정했던 것인지 이번에 나오는 정액은 반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묽었고 양도 많지 않았다. 나는 반쯤 흐느끼며 다리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발이 들리면서 바닥을 딛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허벅지는 크게 벌어졌다. 그가 한 팔로는 내 배를 안고, 다른 손으로 가슴을 쥔 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 잠깐, 나, 아직……, 아윽, 아, 아! 아!”

사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이 빠르게 위로 들렸다가 떨어졌다. 잔뜩 벌어진 다리 사이가 거울에 선명하게 비쳤다. 내 성기에서 흐른 정액이 아래로 타고 내려가 연결부로 떨어졌다. 묽어진 정액 때문에 그의 것이 드나들 때마다 거품이 일었다. 질컥질컥하고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적나라한 소리가 났다. 힘줄이 일어선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입구의 연한 살이 붙잡듯 달라붙으며 따라 움직였다.

머리가 몽롱했다. 강렬한 감각을 이성은 따라가지 못했다. 온몸이 예민하게 달아오르고 피부 아래로 전류가 끊임없이 지나갔다. 발끝이 구부러졌다가 펴지고, 다리를 끌어안은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명치가 뜨끈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흐윽, 으, 흑……, 그, 그만, 그만…….”

당연히 그는 멈춰 주지 않았다. 나를 한 번 고쳐 안은 강주경은 몸을 일으켰다. 내 몸도 따라 일으켜지면서 무릎이 바닥에 닿고, 두 팔은 반사적으로 앞으로 내밀어졌다. 더듬듯 뻗은 팔이 차가운 무언가를 짚었다. 거울이었다. 그의 한쪽 손이 다가와 내 손등 위에 얹히고, 깍지를 끼며 붙잡았다. 팔꿈치까지 거울에 대게 한 채로 그가 허리를 퍽 소리가 나도록 쳤다. 두 번, 세 번 그것이 반복되자 어느새 무릎까지 거울에 닿아 있었다.

그 상태로 강주경은 빠르게 하체를 쳐올렸다. 몸이 함께 흔들리는 속도에 맞추어 입에서 주체하지도 못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비명이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내 목소리 위로 계속해서 그가 선생님, 선생님, 하고 부르고 있다는 건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나는 반쯤 엉엉 울고 있었다. 스스로도 신음인지 울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강렬한 쾌감에 판단력이고 뭐고, 모두 녹아 버리는 것 같았다. 내벽은 마찰과 자극 때문에 불이라도 붙은 듯 예민하게 화끈거리며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 사정할 때보다 더 뜨거운, 생소하고 견디기 어려운 절정이 끝없이 몰아쳤다. 그리고 이미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감각이 어느 순간 몇 배로 확 부풀었다.

“아, 아, 이거, 뭐, 으응, 읏, 아윽…… 흐, 응……!”

배가 단단하게 조여들었다. 이명이 커졌다가 작아지며 반복되었다. 아랫배에 무거운 열기가 잔뜩 고이더니, 강주경의 성기가 빠져나갔다가 다시 뿌리까지 박힌 순간 요란하게 터졌다.

“으으응……, 흐아, 앙, 아……!”

절대로 정액은 아닌 무언가가 성기 끝에서 터져 나와 거울로 쏟아졌다. 유리 같은 표면을 타고 투명한 액체가 줄줄 흘렀다. 놀라서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게 뭔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두 손으로 거울을 짚고 나도 모르게 일어나려 하다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싹한 느낌에 부르르 떨었다. 아직 안쪽을 성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고, 내가 몸을 움직이자 그것이 안에서 꿈틀거렸다.

“아으, 으, 뭐야, 싫어, 이거, 싫어…….”

“싫어요?”

“아!”

강주경이 다시 나를 자기 위에 앉히고 끌어안았다. 조금 전처럼 계속 흐르진 않았지만, 그가 날 안고 하체를 부드럽게 휘저을 때마다 내 것이 움찔움찔하면서 그 말간 액체를 쏟았다. 바닥에 투명한 물이 잔뜩 고여서 움직이면 찰팍거리는 소리가 났다. 등 뒤로 느껴지는 강주경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밀착한 몸이 같이 떨렸다. 귀에 거칠어진 숨결이 들리고 날 끌어안는 힘이 한층 강해졌다. 깊게 결합한 안쪽 깊은 곳으로 뜨끈한 액체가 퍼졌다.

“아, 아…….”

“……선생님…….”

나는 눈을 감으며 몸의 힘을 뺐다. 온몸이 물먹은 솜이 된 것처럼 축 늘어졌다. 강주경이 가슴에서 배로 손을 미끄러뜨려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손바닥이 배를 가볍게 누를 때마다 안쪽이 경련했다. 손끝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것 같은데 내벽은 멋대로 좁아져 안에 들어찬 성기를 조였다. 그는 끝까지 사정하고도 한참 내 안에 있었다.

몇 분쯤 지났을까, 반쯤 정신을 잃은 것처럼 멍하니 있던 나는 강주경이 허리를 가볍게 흔든 순간 놀라서 힘이 다 빠진 손으로 그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그만, 그만해……, 나, 이제, 못해…….”

“…….”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한 말인데 강주경은 정말 더 할 작정이었던 모양이다. 기절한 나를 붙들고 혼자서 하겠다는 거라면 모를까, 절대로 못 한다. 그런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멈춰 줄 것 같지 않다는 불안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모, 못해, 안 할래, 싫어…….”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계속 고개만 젓고 있는데 귓가에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괜찮아요. 안 할게요. 울지 마세요.”

“으응……, 흑, 아파…….”

“죄송해요.”

그제야 강주경이 내 안에서 빠져나왔다. 뒤늦게도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젖은 소리가 나면서 안쪽이 스르르 다물어졌다. 둥근 귀두까지 완전히 빠져나가자 긴장이 풀렸다. 거실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 몸을 씻어야 한다는 생각, 젖은 거울이며 바닥, 그런 것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강주경이 선생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를 얼핏 들었지만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물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 탓인지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물에 발끝이 닿는 느낌에 간신히 눈을 떴다.

“놀라셨어요? 씻고 주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강주경이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머뭇머뭇 말했다. 내 몸에는 촉촉한 습기가 맺혀 있었고, 지금 막 강주경에게 안겨 욕조로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멍하니 깜빡거린 눈이 강주경의 눈과 마주쳤다. 그가 내 뺨에 입 맞추고는 등과 허벅지를 받쳐 아기라도 안듯이 안고 욕조로 들어갔다. 적당히 좋은 온도였다.

“거실…….”

아무도 안 들어오지만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말 궁금해할 것 같은데. 다행히도 강주경은 고개를 저었다.

“청소했어요.”

“그래……?”

그렇구나, 청소를 했구나. 했다니 다행이다. 온몸이 녹아내린 것 같고 아파서 현실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지만 의식은 꿈을 헤매는 듯했다. 나는 손을 더듬어 강주경의 어깨를 잡고 가만히 쓰다듬다가 몸을 기댔다.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선생님.”

“응? 뭘?”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로 되묻자 강주경은 불안한 표정을 했다.

“제가 너무…… 심하게 해서, 선생님이 싫으셨나 생각해 봤어요. 다음부터는 좀 자제할게요.”

흠, 역시 은근히 자기 생각은 밀고 나가는 면이 있다. 선생님이 싫으셨다면 안 할게요, 가 아니라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다음이 반드시 있다는 걸 상정한 말이다.

“자제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 하나씩 말해 봐.”

“…….”

묻지 않아도 알긴 한다. 하지만 아예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이라면 모를까 한 입 맛본 맛있는 음식이 눈앞에 놓여 있다면, 웬만한 사람은 그것을 먹게 될 것이다. 강주경도 분명 그럴 거고. 다행히도 먹히는 사람 입장에서 그게 싫지 않다. 나에게도 강주경에게도 좋은 결말이다.

“맨몸에 코트만 입고 밖에 나가게 하거나, 이상한 걸 먹이거나, 어디가 부러질 때까지 때리거나, 뭐…… 그런 것만 아니면 돼.”

농담이라고 한 말에 강주경은 약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다행히도 그렇게까지 위험한 취향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면 괜찮아.”

목을 끌어안으며 말하자 그는 잠시 내 등에 손을 얹고 있다가 불쑥 말했다.

“……선생님은, 대체 왜…….”

“왜?”

“매일 새로 반하게 만들어요.”

“……매일?”

강주경이 고개를 대강 끄덕이며 아까 자신이 때린 자리를 손으로 감쌌다. 아직도 화끈하고 따끔거렸다. 하지만 역시 나쁘진 않은 것 같다. 나는 그가 살과 살 사이의 좁은 틈으로 물이 들어가 촉촉해진 피부를 계속 만지게 놔두었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숙여 그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체온과 느린 심장 박동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강주경과 이렇게 달라붙어 있으면 안심이 된다. 곰 인형 테라피인가……?

곧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떨쳐 냈다. 곰 인형 테라피는 무슨.

그냥 강주경을 좋아하니까 그럴 뿐이다.

* * *

12월에 접어들면서 기온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원래 영하 8도에서 영하 15도가 되면 그러려니 하지만 영상 10도에서 영하 1도로 떨어지면 적응이 어려운 법이었다. 예년보다 훨씬 추운 날씨에 사람들은 죄다 춥다고 비명을 지르며 돌아다녔다.

나도 당연히 그 비명을 지르고 다니는 사람 중 하나였으나 정작 난방이 잘되는 실내에 붙어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서류 작업이 너무 쌓여서 심리실에 몇 시간째 갇힌 상태였다. 실내의 답답함보다 비명 나오는 추위가 낫다는 생각이 점점 들어서 결국 점퍼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병원 산책로로 뛰쳐나왔다.

정운성이 예상치 못하게 해고당하고 일주일, 병원은 여전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능하기로 유명한 조교수 하나였지만 시계태엽처럼 촘촘하게 돌아가는 대학병원에서 조각 하나가 갑자기 떨어져 나간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간호사들은 정운성이 자기 전 재산을 빼앗아 도망치기라도 한 것처럼 이를 갈았다.

원래 정신과 전문의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적은지라 정운성의 후임을 찾기까지 일주일이 걸렸다. 그래도 빨리 찾은 편이라고 해야 할지…….

목적도 없이 점퍼를 두 손으로 여민 채 산책로를 서성거렸다. 날이 추워져서인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0분 정도는 이리저리 서성거릴 생각이었지만 10분은 고사하고 3분이 지나자 빨리 실내로 돌아가지 않으면 병원 한복판에서 싸늘한 동사체로 발견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결국 산책을 포기하고 종종걸음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 날씨에 대단하다는 생각에 눈길이 갔다가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말끔한 차림의 여자였다. 뒷모습이었기에 옷차림은 잘 안 보였지만 아이보리 색 얇은 코트가 썩 따뜻할 것 같진 않았다. 그뿐이었다면 당연히 추위를 잘 안 타나 보다, 하고 지나갔겠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 여자가 보고 있던 화면 때문에.

남이 벤치에 앉아서 뭘 하든 내가 끼어들거나 구경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작은 액정에 떠오른 화면은 지나치게 잔인했다. 아마도 정상적인 경로로 인터넷에 올릴 수 있는 자료는 아닐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지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 비명을 지를 영상을 여자는 미동도 없이 들여다보았다.

너무 놀라서 몇 초 정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여자가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얼른 뒤로 물러섰다.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인지 아닌지, 여자는 품에서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에 연결했다. 볼륨을 크게 설정해 놓았는지 연결하자마자 내게까지 그게 들렸다. 영상에서 예상할 수 있는 섬뜩한 소리였다.

등줄기가 서늘하게 식는 것 같았다. 여자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벤치에서 멀어지면서 힐끗 얼굴을 보고 나서는 곧바로 확신했다. 저 사람은 정신과 병동 환자거나,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다. 병증이 있지 않고서는 저런 영상을 보며 즐거운 듯 웃고 있을 수 없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 영상의 내용을 떠올리자 속이 안 좋아졌다.

어쨌든……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잔인한 영상을 보고 있었다고 해서 내가 그 여자를 잡아다 억지로 치료를 받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미 내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머리 한구석을 차지하는 찜찜한 느낌을 누르며 20분 후 예정된 검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심리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의아하게 돌아보자 낯선 얼굴의 의사가 서 있었다. 서로 초면이었지만 누구인지 바로 알았다. 정운성의 후임으로 부임한 교수님이다. 교수가 새로 왔다고 해서 심리실까지 인사하러 오는 일은 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안녕하세요…….”

물음표를 잔뜩 띄운 채 말하자 그녀는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젊고 성격도 좋아 보인다. 누군들 정운성보다야 못하겠느냐마는,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일이다. 새로 온 교수는 좁은 심리실을 눈으로 한 바퀴 돌아보더니 내게 물었다.

“윤서호 선생님은 안 계신가요?”

그 말에 나는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를 확인했다. 수련생들도, 선배도 전부 검사 때문에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예, 검사하러 올라간 것 같아요.”

“아.”

“용건 있으시면 전달해 드릴까요?”

그러자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얼굴 좀 보러 온 거니까. 선생님한테도 인사해야겠네요. 정신과에 새로 온 임현아예요. 잘 부탁드려요.”

“아, 한지원입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악수했다. 겪어 보기 전까지는 절대로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지만 일단 인상은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 사소한 사회적 대화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임현아 교수는 돌아갔다. 그 사람이 첫인상만큼이나 괜찮은 사람이라는 건 검사를 마치고 돌아와 선배와 이야기하며 알게 되었다.

“대학 선배거든. 내가 수련할 때도 여기서 레지던트 하셨고. 이따 전화 한번 해 봐야겠다.”

“선배랑 친했어요?”

“응, 꽤나? 해외 연수 가시기 전엔 같이 술도 마시러 다니고 그랬어.”

“아…… 그럼 좋은 분이겠네요.”

선배는 이상한 사람과는 절대로 가까이 지내지 않는다. 병원 밖에서 따로 만나 술까지 마시러 다닐 정도였다면, 인상 그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늑대 피하다 호랑이 만난다고, 정운성이 가고 더 지질한 사람이 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성격도 좋고 능력도 좋지. 정운성 다섯 배는 될걸?”

“선배, 0곱하기 5는 0이에요.”

“아.”

정운성이 다섯 명 있어 봐야 짜증만 다섯 배가 될 뿐이다. 선배는 크게 실수했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어쨌거나 좋은 분이니 너도 잘 지낼 수 있을 거라는 말로 마무리하고 각자 책상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 있어 수련생들도 하나둘 피로한 얼굴로 자리를 채웠다.

퇴근을 한 시간쯤 앞두었을 때였다. 수련생들의 보고서를 검사하고 있던 선배가 낮은 목소리로 이정주를 불렀다. 심리실에 희미한 긴장이 깔리고 이정주를 제외한 나머지 두 수련생이 힐끗힐끗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너 이게 뭐야?”

“네?”

이정주가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선배의 짜증이 나한테도 느껴지는데 정작 이정주는 태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BDI가 0점인데 이걸 문제가 없다고 해석해?”

“아니, 문제 되는 부분이 없어서 정상 수치라고 한 건데…….”

“이정주. 학부 1학년도 이런 해석은 안 해. 내원 환자 BDI가 0점이다, 이게 어디가 이상한 건지 너는 이해가 안 돼?”

“아니요, 그게…….”

“그게, 뭐. 이렇게 해석한 네 나름의 이유가 있어?”

“그게 0점이라서 0점이라고 한 건데요.”

결국 선배가 이정주의 보고서를 집어 던졌다. 삽시간에 심리실 온도가 뚝 떨어졌다. 아무런 병도 없는 사람이라도 BDI가 2, 3점은 나온다. 그런데 내원한 환자가 0점이 나왔다는 건 부인방어가 심하다는 의미였다. 그런 환자는 거짓 답변을 하면서도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는 자각이 없다. ‘나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라는 일종의 자기암시다.

기본 교재에서도 수없이 강조하는 내용이고, 심지어 심리학을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물어도 그건 좀 이상하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지식이 아니라 상식의 문제였다. 그것으로 혼이 나면서도 이정주는 불만스러운 티를 냈다. 0점이라서 0점이라고 한 건데, 같은 헛소리는 더 이상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선배는 어마어마한 인내심으로 이정주가 해 놓은 해석이 뭐가 어떻게 문제인지 조목조목 설명했으나 이정주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저게 저러는 건 상식이 아니라 지능과 자기객관화의 문제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힐끗 유화영을 보자 그녀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 내 눈만 보고도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선배는 차분한 어조로 이정주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었다. 보통 수련생이 그렇게 혼이 나고 있으면 다들 비슷한 입장에서 안타깝게 생각하며 관리자를 미워하는 법인데, 나머지 두 사람의 눈은 매우 싸늘했다. 이정주를 싫어하는 게 나와 선배만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정주는 병원에 와서 사흘째 되던 날에 유화영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배님, 예쁜 선배님이 커피 한 잔 타 주시죠!’ 그 자리에는 나도, 선배도 없었는데 나중에 말을 전해 듣고 진심으로 이정주가 미친놈이 아닌가 했다. 유화영은 자기 *DSM에 저 새끼의 피를 묻힐 거라며 이를 득득 갈았다. 물론 선배와 나와 슈퍼바이저 선생님에게 돌아가며 뼈도 안 남도록 엄청나게 까였지만 그다지 반성한 기색은 아니었다.

잠시 대답을 기다려 주던 선배는 벌떡 일어나서 파쇄기로 향했다. 보고서 몇 장이 한 번에 기계로 들어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갈렸다.

“다시 써.”

“…….”

놀랍게도 이정주는 죄송하다는 한마디도 없이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돌아오더니 짐을 싸기 시작했다. 퇴근 시간이었다. 한 시간 동안 깨졌다는 뜻이다. 이정주는 5시 30분이 되자마자 자기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나라면 거기서 언성을 높였을 텐데 선배는 이정주를 흘끗 쳐다볼 뿐이었다.

“넌 집에서 쓰는 게 더 잘되나 봐? 내일 아침까지 내 책상에 올려 놔. EMR 접속할 생각도 하지 말고.”

물론 마지막 한 방을 잊지 않았다. USB도 갈아 버리는 파쇄기 속 종이처럼 드륵드륵 갈린 이정주가 대답도 없이 나가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심리실 문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쟤가 진짜 전문가가 되면 어쩌죠?”

“미쳤어? 우리나라 임상가가 죄다 우주여행이라도 가지 않는 한 쟤는 안 돼.”

아니, 그래도 안 될 것 같다. 도대체 쟤가 어떻게 우리 병원에 들어왔을까. 유화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젠가 사고 거하게 치고 접지 않을까요.”

그 말에는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그 사고가 수습 가능한 일이길 바랄 뿐이다.

[나 오늘 좀 늦어. 먼저 갈래?]

5시 45분쯤 되었을 때 강주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별다른 말이 없었던 걸 보면 그도 여느 때와 같이 6시 30분쯤 끝나겠지만 내 퇴근이 그보다 늦어질 것 같았다. 메시지를 보내고 5분쯤 지났을 때 답장이 왔다.

[기다릴게요.]

이모티콘 하나 없는 딱딱한 메시지였지만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이 맛에 연애하는구나…….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리며 일에 집중했다. 7시를 조금 넘겨서 밀린 보고서를 다 쓴 나는 강주경에게 지금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강주경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강주경은 절대 나를 혼자 주차장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심리실 앞까지 강주경이 올라오는 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에, 거의 차를 꺼내 와 정문 앞에서 기다리거나 1층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곤 했다.

마침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시간에 일이 끝났기 때문에 다 같이 심리실을 나왔다. 이경민이 폐쇄병동에 입원하면서 심리실 사람들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강주경과 함께 집에 돌아가는 걸 보고도 딱히 별생각은 안 하는 것 같지만, 문제는 그게 ‘아직까지는’이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 나는 새삼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데, 언제까지고 강주경이랑 같은 집에 살 수는 없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아는 건 심리실과 서 교수님, 그리고 보안팀과 정신과의 몇몇 사람뿐이었다.

‘슬슬 따로 살아야 하나…….’

의심받기 시작하는 건 한순간일 것이다. 의심이 순식간에 소문이 되고, 소문이 되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병원에서뿐 아니라 이 좁은 업계에서 말이 도는 게 기꺼운 일은 아니었다.

1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사복 차림의 강주경이 저쪽 기둥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장신에 어두운 색 진, 캐주얼한 니트에 베이지색 겨울 점퍼. 유화영이 내 옆에서 진짜 잘생겼다고 소곤거렸다. 동감이었다.

오늘 차를 안 가지고 왔다는 선배까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어떻게 알았는지 강주경이 고개를 들었다. 나와 강주경은 다시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했기에 거기서 다들 헤어졌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카페에 있었어요.”

“그랬어?”

강주경이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카페에서 뭘 마셨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기다렸는지 궁금했다. 같이 엘리베이터로 가려고 하는데 저쪽에서 누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 교수님이었다. 카페에서 나오는 길인지 손에 따뜻한 커피가 들려 있었고, 코트에 머플러에 가방까지 들고 있는 걸 보니 교수님도 퇴근하는 길인 모양이었다.

“이제 퇴근해?”

“네. 교수님도 늦으셨네요.”

“그렇지 뭐. 끝나고 별일 없으면 저녁이라도 먹을래? 강주경 씨도 같이요.”

“네?”

갑자기 자기 이름이 나오자 강주경이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저번에 그 일도 사과할 겸.”

“아니요, 교수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닌데…….”

목에 든 멍을 가리느라 내내 터틀넥만 입고 다니고 있는데, 그게 생각보다 오래가니 교수님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교수님이 사과할 일은 전혀 아니지만.

“그럼 오랜만에 내가 밥 사 주고 싶은 거라고 해도 되고. 곤란해?”

교수님이야 이런 일로 앙심을 품진 않으니 거절해도 상관없지만, 굳이 거절해야 할 이유도 없다. 강주경은 내가 결정하라고 말하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전 괜찮아요.”

어차피 내일은 강주경도 나도 교수님도 다 쉬는 날이었다. 교수님과 사적으로 식사를 한 지도 꽤 오래됐고, 밥이라도 얻어먹지 않으면 계속 걱정에 더해서 미안함까지 안고 있을 것 같고, 결국 같이 가기로 했다.

병원 근처에 교수님이 자주 가는 음식점이 있었다. 술보다는 어느 나라의 것이라고 말하기 모호한 음식이 중심이기 때문에 회식하는 사람으로 넘쳐나는 거리에서 몇 안 되는 조용한 식당이었다. 다행히도 셋 다 술을 잘 안 마신다.

가게는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조용했다. 천장이 꽤 높은 편이어서 다른 테이블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도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만 들렸다. 뭘 시켜도 맛있다는 교수님의 말에 적당히 메뉴를 골라 주문하고, 먼저 나온 음료를 각자 마셨다.

나와 교수님이 주로 이야기하고 강주경은 조용히 듣기만 했으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가 화제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까지 왔을 때 문득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아.’

요새 하도 일이 많이 일어나다 보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어쩐지 교수님이 식사하러 가자는 말을 꽤 강하게 하더라니.

이 시기가 되면 서 교수님은 약간 불안정해진다. 올해로 벌써 3년째였다.

“교수님……, 올해는 언제쯤 가실 거예요?”

서 교수님과 강주경이 동시에 나를 보았다. 교수님은 다소 복잡한 얼굴이었고, 강주경은 모르는 화제가 나와서 의아한 얼굴이었다. 지금까지는 강주경이 있어서 둘만 아는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그래, 시간 빠르네. 벌써 4년이야.”

“그러게요.”

“너도 서른이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냈지만 교수님의 눈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 일이 있었을 때 나는 26살이었고, 2년 차 수련생이었다. 강주경이 힐끗 나를 보았고 교수님은 어깨를 으쓱했다.

“강주경 씨도 잘 알아 둬. 서른 살 되는 거 순식간이야.”

“주경이 서른 살 되면 교수님은 마흔 넘어요.”

“아…….”

서 교수님이 과장되게 우울한 얼굴을 했다. 당장은 농담으로 끌고 가고 싶은 것 같기에 그에 맞췄다. 그 화제는 거기서 끝나고 나온 음식을 천천히 먹으면서 다시 조금 전 분위기로 돌아갔고, 술 마시는 사람이 없는 모임은 두 시간이 조금 안 되어 끝났다.

“아무도 술 안 마시니까 편하네.”

모두가 멀쩡한 정신으로 주차장까지 와서 교수님이 말했다. 기운이 좀 없는 걸 빼면 아직은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았다. 아마 크리스마스쯤 되면 심해질 것이다. 선배와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강주경과 나란히 차에 탄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 남의 문제 말고 내 문제. 이대로 강주경이랑 계속 같이 살아도 될지. 시동을 거는 그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

금요일 밤의 도로는 정체되었다. 핸들에 손을 얹은 강주경은 여느 때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선생님, 추우세요?”

“응? 아니.”

“네.”

늘 그렇지만 말수도 적었다.

집까지는 30분쯤 걸렸다. 생각이라곤 해도, 사실 결론은 내렸고 언제 말을 하느냐의 문제였다. 사실은 말하기 싫은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의외로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학교나 회사에서 하루, 이틀 자고 오는 행사가 생기면 바로 전날까지 가기 싫어서 혼자 이리저리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지금까지 그게 남이랑 한 방을 쓰는 게 싫어서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그냥 집 밖에서 자는 게 싫었던 거였나? 아니면 강주경과는 확실하게 구분된 공간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또 아니면 주경이는 하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데다 청소도 잘하고…….

“선생님?”

“……응?”

어느새 집 현관문 앞이었다. 방금까지 차 안에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으세요?”

“일? 아니?”

왜인지 강주경이 심각한 얼굴이었다.

“불러도 못 들으셔서…….”

“아.”

불러도 못 들은 데다 차에서 집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내내 멍하니 있었던 모양이다. 주경이가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했다.

“아니야. 뭐 좀 생각하느라.”

얼른 비밀번호를 눌렀다. 열린 문으로 따라 들어온 강주경이, 신을 벗고 있는 내 등에 대고 말했다.

“선생님, 서 교수님이랑…… 많이 친하세요?”

“뭐?”

뜻밖의 질문이었기에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만 돌리는 바람에 몸이 기우뚱했고, 넘어질 뻔한 걸 강주경이 팔을 뻗어 잡았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

아, 이대로…… 이대로 물 흐르듯 흘러가 버릴 것 같다. 아니, 안 돼. 지금은 아냐. 나는 가까워지는 강주경의 입술을 두 손으로 막았다. 새카만 두 눈이 의아한 듯 둥글게 뜨였다. 분명 생각을 정리하던 중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주경아, 우리 이제 따로 살까?”

“…….”

그 말에 강주경의 눈이 더 커졌다.

“다른 뜻 아니야. 그냥, 일도 해결됐고…… 계속 같이 살면.”

같이 살면? 다음 말을 재촉하듯이 강주경이 머리를 아주 약간 모로 기울였다.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딱히 접점도 없던 다 큰 남자 둘이 같이 산다는데. 아니, 내가 걱정이 너무 많은 건가? 다시 생각해 보니 같이 사는 것보다 출퇴근을 같이 하는 게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그냥 각자 차로 다니면 괜찮지 않을까. 그 말을 하려고 했을 때 강주경이 나를 바로 세워 놓고 한 걸음 떨어졌다.

“주경아?”

“알겠어요, 선생님.”

“어…….”

“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주, 주경아, 잠깐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붙잡으려고 했으나 그는 휙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쿵 하고 닫힌 문을 보면서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서 교수님이랑 친하세요?’라는 질문에 내가 따로 살자는 말로 대답한 꼴이 되었다는 걸.

……나 같아도 오해한다.

아, 미친. 어쩌지?

“어쩌지?”

당연히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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