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7)

01

<201호 환자분, 201호 환자분, 병실로 오세요.>

벌써 5분째 같은 안내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201호의 낯모를 분께서 어서 헛된 저항을 그만두고 돌아가길 기도하며 내 눈앞의 환자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손이 막 마지막 문항을 완성한 차였다.

“아휴, 시키는 게 많기도 해.”

“그렇죠? 고생 많으셨어요.”

“의사 선생님도 고생이 많어. 자, 얼른 이거 받어. 내가 선생님 주려고 특별히 챙겨 왔어. 아무도 안 준 거니까 비밀이여, 알겄지?”

이미 여러 번 나는 의사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흰 가운을 입으면 대체로 다들 의사라고 생각하긴 한다.

노년의 환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구겨진 종이컵이었다. 순간 당황했으나 티 내지 않고 웃었다.

“와. 감사합니다.”

“비밀이여, 알겄지? 꼭 이걸루 커피 마셔. 아주 그냥 피로가 싹 사라질겨.”

“예.”

환자는 눈을 빛내며 강조하더니 흡족한 얼굴로 간호사와 함께 사라졌다. 잠시 구겨진 종이컵을 쳐다보다가 검사지와 내 필기도구를 챙겨 검사실을 나서는데, 저쪽에서 간호사 윤민아가 다가왔다. 표정 변화 없이 뛰지도 않고 빠르게 다가오는 건 병원에 오래 있을수록 발전하는 스킬이었다.

“한 선생님!”

“네.”

“그 종이컵 주세요.”

“네? 네, 여기요.”

어차피 쓸 생각이야 없었지만 무슨 일일까. 피로가 싹 사라진다는 마법의 종이컵을 윤민아에게 내밀자 답이 돌아왔다.

“환자분이 거기에 독 발라 놨다고 했거든요. 선생님 암살할 거래요.”

“아.”

피로가 싹 사라진다는 게 목숨이랑 같이 사라진다는 뜻이었군. 병원에는 암살자가 많았다. 검사실에 폭탄을 설치해 놨다고 하는 사람, 곧 자신이 고용한 용병이 천장을 뜯고 내려올 거라고 경고하는 사람, 내가 목이 말라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면 씩 웃으며 거기에 독을 타 놨다고 하는 사람…….

서른 살, 수련 3년에 전문가 2년 차의 임상심리사는 독 바른 종이컵을 받은 정도로는 놀라지 않는다. 어차피 모두 이런 일에 익숙하다. 뭘 바르긴 했을지도 모른다. 엄청나게 위력적인 독이라 생각하는 세면대 물이나 정수기 물 같은 것.

종이컵을 챙겨 총총 사라지는 간호사를 보고 있다가 *심리실로 향했다. 아직도 원내 방송이 탈주한 201호의 환자를 애절하게 찾고 있었다.

오후 2시의 심리실은 텅 비어 있었다. 다들 각자 할 일을 하러 나간 듯했다. 잠시 앉아서 *EMR을 살펴보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선배 윤서호가 들어왔다.

“피곤하다, 피곤해.”

“오셨어요.”

“애가 검사실 불을 계속 껐다가 켰다가 하는 바람에 아직도 어지럽다.”

“저런…… 저는 독 바른 종이컵 받았어요.”

“오. 독 먹었어?”

“아니요. 먹었으면 여기에 없지 않을까요?”

선배가 심각한 얼굴로 그러네, 하고 중얼거린 뒤 자리에 앉았다. 곧 심리실에는 키보드 소리만 남았다. 둘 다 마찬가지로 작성해야 할 보고서가 산더미 같은 처지였다. 201호 환자가 드디어 잡혀갔는지 스스로 돌아갔는지 더 이상 방송은 나오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세 시 삼십 분에 잡혀 있던 심리치료를 끝내고 다시 돌아와 서류의 지옥에 파묻혀 있기를 두 시간. 예정한 시각에 예정한 분량을 정확하게 끝내고 홀로 성취감을 느끼며 자리를 정리했다. 수련생 1년 차와 2년 차가 인사할 타이밍을 노리며 나를 힐끔거렸다. 3년 차는 *슈퍼바이저에게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련생들은 두세 시간씩 걸리는 검사를 하루에 두 건에서 세 건 정도 떠안기 때문에 이 시간쯤 되면 대체로 꾸깃꾸깃했다. 선배도 남은 일이 있는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응, 조심해서 가.”

“조심히 들어가세요.”

피곤한 몸을 끌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오늘 아침에 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약간 구석진 곳 말고는 자리가 없었다. 그나마 기둥 뒤에 가려져 눈에 잘 안 띄었기에 남아 있었던 거지, 저길 못 찾았으면 엘리베이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워야 했을 것이다. 지친 직장인에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한 자리까지 가는 길은 험준한 산악의 오르막길과 비슷했다.

터덜터덜 기둥 뒤로 돌아간 나는 차를 보자마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오늘도 와이퍼에 봉투가 끼워져 있었다. 오늘로 사흘째였다.

와이퍼에서 봉투를 잡아 뺐다. 얇은 봉투 안쪽으로 촌스러운 모양의 카드가 보였다.

내용을 확인하자 지난 이틀과 같았다. ‘선생님, 오늘도 보고 있어요.’ 어디서 뭘 보고 있다는 말은 없다. 워드로 작성한 문장을 잘라 카드에 붙여 놓은 것. 봉투, 카드, 폰트, 글씨 크기, 자간, 문장이 있는 종이의 크기와 붙이는 위치까지 전부 동일했다.

*OCD구나…… 머리가 아팠다.

이것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주로 만나는 만큼, 환자는 의사나 임상심리사에게 강한 감정을 품는 일이 많았다. 의존, 집착, 증오, 그 외 기타 여러 종류.

일단 카드는 모아 두고 있었다. 곧바로 무슨 조치를 취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정신과 과장의 반응을 떠올리면 두 배로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러게 왜 환자가 오해할 행동을 하느냐, 전문가라는 사람이 왜 이런 상황을 만드느냐, 등등.

우선은 상황을 좀 지켜보는 게 나을 듯했다. 아직까지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카드의 내용은 비교적 온건한 편이고, 스토킹보다는 내게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비슷한 짓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카드를 보니 한층 피곤해졌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 쪽으로 가려 하는데, 뒤에서 불쑥 손이 튀어나와 내 팔을 붙잡았다.

“악!”

나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안 그래도 놀랐는데 그것까지 보니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뛰어 사라졌고, 복잡한 주차장 안에서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식은땀이 쭉 났고, 심장이 쿵쿵 뛰어 입 밖으로 토해질 것 같았다.

“하……, 헉, 뭐야…….”

심장 대신 그런 말이 흘러나온 건 긴장으로 따끔거리던 목덜미가 간신히 어느 정도 진정된 다음이었다. 나는 뒤늦게 내가 무언가에 기대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풀렸는데 바닥에 주저앉지 않았다 했더니. 홱 시선을 내리자 내 허리를 굵은 팔이 끌어안은 채였고, 등은 휘어진 벽 같은 것에 붙어 체중을 고스란히 떠맡기고 있었다.

‘팔 달린 벽인가?’

충격 때문인지 머리가 미친 생각을 했다. 나는 그대로 고개만 위로 들었다. 거기에 뜻밖의 얼굴이 있었다.

“아, 불…….”

다행히도 내 사회성이 제때 정신을 차려 그 단어를 끝까지 말하진 않았다. 내가 기대 있던 벽은 병원 안에서 소소하게 유명한 시큐리티 직원이었다. 이미 퇴근했는지 사복 차림이지만 그의 얼굴을 보자 희미한 안도가 들었다. 병원 안에서 일이 터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화기를 붙들고 비명처럼 외친다. “그 불곰같이 생긴 시큐 좀 보내 주세요!”

당연히 이름이 ‘그 불곰같이 생긴’은 아니다. 그냥 시큐리티 중에서도 유독 덩치가 크고 인상도 사나워서 불곰이니 뭐니 하는 살벌한 별명이 붙었을 뿐이다. 이 남자는 세 가지로 유명했다. 묵묵하게 일을 잘하는 것으로, 덩치가 큰 것으로, 그리고 잘생긴 것으로. 가까이서 보니 과연 일반인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생겼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아…….”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남아 있던 긴장이 단숨에 풀린 건지 귀가 윙윙 울리면서 시야가 뒤집혔다. 이번에야말로 풀썩 미끄러지듯 주저앉았으나 바닥에 엉덩이가 닿진 않았다. 불곰이 내 몸을 따라 앉아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어지러운 머리를 두 손으로 짚고 있다가 천천히 들자 나는 불곰의 품 안에 안기듯 앉아 있었다.

아니, 정신 좀 차리자, 한지원…… 서른이나 먹어서 이게 무슨 추태냐. 머리를 흔들며 한 손으로 차체를 짚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자 조금이나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무엇에 가장 놀란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카드를 꽂아 놓고 가는 강박 환자 때문인지, 내 비명에 뛰쳐나간 누군지 모를 그림자 때문인지, 팔을 붙들려서인지. 아니면 그게 전부 합쳐져서인지.

아마 네 번째 이유일 것이다. 원래 어느 병증이든 복합 증상이 가장 어려운 법이었다.

나는 어지러운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려 간신히 제대로 떴다. 불곰이 진중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강주경 씨?”

내가 이름을 부르자 불곰이 희미하게 움찔했다. 그는 과장을 좀 보태서 내 덩치의 두 배는 됐다. 키도 20cm는 커 보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팔목을 잡았을 때 손의 힘이나 그 크기라니. 이 손으로 툭 밀치기만 해도 운동이라곤 검사 도구 들고 병원 계단 오르내리기밖에 안 하는 나는 가랑잎처럼 무력하게 굴러가고 말 것이다. 지금도 불곰의 뒤에 서서 보면 나는 보이지도 않을 듯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팔 잡아서 놀라셨죠.”

“네, 엄청.”

“서두르느라…….”

“그거에만 놀란 거 아니니까 괜찮아요.”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검사실이나 병동에서는 더 충격적인 일도 많이 일어난다. 어지간한 일에는 단련이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퇴근해서 방심한 상태로 갑자기 공격당해 충격을 더 받은 모양이었다. 기습이라는 게 이렇게 무섭다.

“혹시 늘 여기에 차 세우세요?”

“아니요?”

이 넓은 직원 주차장에서 어떻게 매일 같은 자리에 차를 세우겠는가? 내가 병원장도 아니고. 그러자 불곰은 난감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얼굴에 나는 평균 수준의 간덩이를 가진 사람답게 시선을 약간 피했다. 잘생겼지만 역시 무섭다.

“조금 전에 도망친 사람.”

“……네?”

“쫓아가는 것보다 선생님 옆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게 했는데, 쫓아갈 걸 그랬나요?”

“아니, 아니요. 이게 나아요. 고마워요.”

어쩌면 한패가 있을 수도 있고, 괜히 쫓아가 자극하는 것보단 차라리 도망치게 두는 게 나았다.

“카드도 그 사람이 꽂아 놓은 겁니다. 사실 카드 꽂아 놓을 때부터 이상해서 잠깐 보고 있었는데, 마침 선생님이 내려오셔서.”

“아…….”

카드 꽂아 놓던 사람이랑 동일 인물이었군. 사흘 만에 직접 앞에 나타난 건지, 아니면 차 근처에서 미처 사라지기 전에 내가 내려오는 바람에 그렇게 도망친 건지.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프게 됐다.

“어떻게 생겼는지 봤어요?”

“모자를 쓰고 있어서요. 자세히는 못 봤고 키 작은 남자였습니다.”

나는 눈썹을 긁적였다. 키 작은 남자 환자는 너무 많은데. 게다가 이 사람 기준에서 작은 키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문득 시선을 들었다.

“그럼 도와주려고 보고 있었던 거예요?”

“도와드리는 것까진 아니지만, 위험할 것 같아서…….”

불곰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생각보다 착하네. 병원 안에서 보던 게 늘 누군가를 제압해 끌고 가거나 무서운 표정으로 뛰어가는 모습이어서, 이렇게 보니 꽤 신선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생색을 낼 법도 한데 불곰은 별일 아니라는 태도였다.

190cm쯤 되지 않을까? 게다가 사복을 입고 있으니 정장 차림일 때보다 오히려 몸이 더 부각되었는데, 이대로 올림픽 유도 경기장에 가서 서도 어색하지 않을 덩치였다.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이상한 놈이 다가오다가도 도망갈 것이다.

그보다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 한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차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그보다 빨리 불곰이 말했다.

“모셔다드릴까요?”

“네?”

“안 불편하시면…… 지금 운전하면 위험하실 것 같아서요.”

그 말에 나는 차를 짚은 내 손을 보았다. 여전히 달달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차를 몰고 가다간 정말 사고라도 낼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면에 가까운 다른 부서 직원에게 대리 기사 노릇을 시킬 수야 없다.

“괜찮아요, 올라가서 택시 잡으면 돼요.”

“이 상태로요? 선생님 얼굴도 창백해요.”

불곰이 당황한 듯 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아까 그 사람이 따라갈 수도 있고…….”

“아.”

아까 그 사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일단 오늘 처음으로 다가왔고, 아무리 불곰이 있었다지만 곧바로 도망쳤다. 카드 내용은 안정적인 데다 당장 대단한 공격성을 보이지도 않았다.

내 차는 주차장에서 감시하다가 알았거나, 내가 상대한 환자였다면 번호를 알 테니 직원 주차장의 차를 하나씩 다 살펴보며 앞에 붙은 전화번호를 대조했을 수도 있다. 이러면 CCTV에 확실히 찍혔을 테니까 누구인지 특정이 가능해진다. 내일 주차장 CCTV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블랙박스 다는 게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던 중에 하필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불곰은 눈을 느리게 끔뻑거렸다. 왠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제가 괜한 참견을…… 불편하신 거면 그냥 갈게요.”

혹시나 아까 그 남자는 연막이고 이 불곰이 카드를 꽂아 놓던 스토커인 건……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같은 병원에 다니면서 스토킹이라니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에게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보통 파견 업체를 쓰는 다른 병원과 달리 여긴 시큐리티를 직접 고용했다. 그만큼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고, 관리도 철저하다. 주차장에 고화질 CCTV가 수도 없이 많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하필 주차장에서? 상식이 조금만 있다면 안 할 짓이었다.

“불편한 건 아닌데…….”

다른 의미로 불편하긴 하지. 이런 상황에서 덥석 ‘그럼 데려다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매우 평균적인 양심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아직도 손 떨고 계세요.”

“…….”

불곰의 말이 사실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미안한데…… 부탁해도 돼요?”

“네.”

신기하게도 불곰은 오히려 기쁜 일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 일으켜 조수석에 집어넣었다. 아마도 그는 곤경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꽤 남을 잘 챙기고 다정한 성격인 듯했다.

움찔거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데 불곰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내가 타고 다닐 땐 한 번도 좁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중형 국산차가 불곰의 탑승에 갑자기 좁아졌다. 그는 SM5를 마티즈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슬쩍 룸미러를 보자 거기에 비친 나와 불곰의 모습이 원근감을 신나게 때려 부수는 중이었다. 내가 내비게이션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하는 사이, 앉자마자 의자를 뒤로 민 그는 시동을 걸고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가 도로에 올라탈 때까지 불곰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옆에 앉아서 나는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보답할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1)돈을 준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무례했다. 2)밥을 사 주겠다고 한다. 괜히 나중에 약속까지 잡아야 하니 상대도, 나도 귀찮을 수 있다. 3)진심을 담아 고맙다고 말한다. 아니, 그냥 입 닦고 넘어가자는 것 아닌가, 이건? 앞 유리로 보이는 차량의 긴 행렬을 보며 머리를 굴린 결과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저녁 먹었어요?”

“아직 안 먹었습니다.”

“아, 그럼 우리 집에서 먹고 갈래요?”

그 말에 불곰이 나를 보았다. 응? 귀찮은가? 잘못 선택했나?

“강요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아닙니다. 전 좋습니다.”

“네.”

다행히 아주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좀 머쓱해하는 것 같긴 하다. 순순히 대답하는 게 생각보다 귀여웠다.

병원에서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퇴근 시간의 정체를 타고도 30분이 채 안 걸려 도착해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 차에 구겨져 앉아 있던 거대한 남자는 어깨를 웅크리며 운전석에서 빠져나왔다. 음…… 아무래도 내 차가 좀 작긴 한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 차가 작은 게 아니라 이 남자가 큰 것이다. 그때쯤 놀란 가슴이 드디어 진정했는지 다리에도, 손에도 충분히 힘이 들어갔다.

불곰을 뒤에 달고 아파트 현관을 지났다. 그가 보안장치와 아파트 현관을 두리번거렸다. 현관 밖의 무인 택배 시설, 카드를 대거나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현관. 배달이나 택배도 아래에서 호출 버튼을 눌러야 들어올 수 있으니 건물 안쪽은 안전한 편이었다.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일단 양념해 둔 불고기가 있고, 어젯밤에 끓여 두고 정작 아침엔 늦게 일어나 손도 못 댄 미역국이 있었다. 그리고 숙주와 가지가 있으니까 대강 무치면 손님을 불러 놓고 초라하지 않을 정도는 될 것이다. 안심하고 현관문을 열자 불곰이 어색한 태도로 들어왔다.

“저기가 욕실. 손 씻고 나와요.”

고개를 끄덕인 불곰이 욕실로 들어간 뒤 나도 싱크대에서 손을 씻었다. 냉장고에서 필요한 걸 꺼내고 있는데 그가 뒤로 다가왔다. 핸드워시 냄새가 옅게 떠돌았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혼자 하는 게 더 편한데.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주면 안 돼요?”

“……네.”

음식을 만들 때 누가 도와주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더 편하다. 이걸 기다리는 동안 저걸 하고, 또 다른 걸 기다리는 동안 사용한 그릇이나 냄비를 정리하고, 여기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뭘 거드는 게 오히려 불편했다. 사실 잡다한 일을 옆에서 해 주는 게 더 편하리라는 걸 알지만 습관이 이렇게 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파로 간 불곰을 흘끗 보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정도는 할 법도 한데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신기한 사람이군. 언뜻 어색한 것 같기도 했다. 오며 가며 얼굴만 봤을 뿐 거의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인데 갑자기 집에 와서 밥 차리는 걸 기다리고 있으니 어색한 게 당연했다.

있는 것을 대강 데우고 간단한 반찬 몇 개만 더 만드는 정도여서 밥상은 금방 차려졌다. 와서 먹으라고 말하자 불곰은 커다란 몸을 느리게 일으켜 다가왔다. 그가 앉으니까 심지어 식탁도 작아 보였다. 주위의 모든 것을 미니 사이즈로 만들어 놓는 사람이다. 집에 손님이 많이 올 일이 없어 식탁도 굳이 큰 걸 사지 않았는데, 설마 이런 문제가 생길 줄이야.

“잘 먹겠습니다.”

“네에.”

불곰은 조용하게 밥을 먹었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거의 나지 않을 정도로. 덩치를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몇 가지 반찬 위로 깨끗한 젓가락질이 고루 오가고, 수저와 젓가락을 한 손에 들지도 않고, 입을 다문 채 천천히 음식을 씹었다.

나는 식사 예절이 말끔한 사람을 좋아한다. 내 안에서 불곰을 향한 호감도가 스르륵 올라갔다. 조금 전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 채 느끼지 못한 것이 식사를 하고 있자니 하나씩 떠올랐다. 내 몸이 푹 안기던 커다란 몸집이며 팔과 허리에 닿은 크고 따뜻한 손이며, 운전하던 모습 같은 것.

‘생각해 보면 설정이 과하다고 할 정도로 내 취향인데.’

“……선생님?”

“네?”

불곰이 고개를 약간 모로 기울이고 있었다. 무심코 너무 쳐다본 모양이다.

“아니요, 새삼 고마워서요.”

“이 정도로 뭘요.”

“강주경 씨는…….”

“저.”

“응?”

“말 편하게 해 주세요, 선생님.”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불곰이 조금 쑥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여타 직장인들이 그렇듯 나 역시 모든 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게 익숙했다. 하물며 초면에 가까운 사람이면 더욱.

“제가 더 어려요.”

“그야 그렇지만…… 뭐, 알겠어. 주경아.”

“…….”

응? 갑자기 이름까지 막 부른 건 좀 그랬나?

“미안, 주경 씨.”

“아니. 아니요. 편하게 불러 주시는 게 더 좋습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마음속에서 계속 불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불곰…… 아니, 강주경은 모를 사실을 슬그머니 감추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살이야?”

“스물여섯이요.”

내 수저가 멈췄다. 생각보다 어렸다. 나랑 한두 살 차이일 줄 알았는데. 네 살이라, 내 쪽에서는 그다지 차이를 느끼지 않는 정도였지만 상대방이야 어떨지 모른다. 게다가 저쪽은 이십 대, 나는 삼십 대. 역시 앞자리가 다른 게 꽤 크지 않을까?

간간히 이야기가 오가며 식사가 끝났다. 차려 준 보람이 있게 식탁은 깨끗했다. 그릇을 정리하려 하는데 강주경이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할게요.”

“괜찮아, 설거지는 쟤가 할 거야.”

예의 바르게 제안하는 강주경을 말리며 나는 식기세척기를 가리켰다. 그럼 정리라도, 하며 커다란 손에 그릇을 조용히 올리는 것까진 거절하지 않았다. 혼자 했다면 식탁과 싱크대를 서너 번은 왕복했을 텐데 강주경이 있으니 한 번에 끝났다.

그릇을 정리해 식기세척기에 돌린 뒤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가자 그는 이번엔 소파 앞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여섯이라고 했던가? 계속 보고 있자니 나이에 맞게 귀여운 느낌이었다. 아니, 태도는 그냥 평범한데 평소 인상이 워낙 강하다 보니 갭 때문에 귀엽게 느껴지는 것 같다.

“생각보다 귀엽네.”

“…….”

앗, 무심코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다. 나는 그에게 머그잔을 내밀며 얼버무렸다.

“아, 미안. 다 큰 어른한테 귀엽다는 말은 좀 그런가?”

“……귀엽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

“그래?”

라고 물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겠다. 이런 거구에 무뚝뚝한 성격인데. 내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선생님은 많이 들어 보셨을 것 같은데…….”

이 말에는 커피를 뿜을 뻔했다. 간신히 삼키고 주경을 보자 그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도 방금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웃음이 풉 튀어나왔다.

“솔직히 부정은 못 하겠다.”

“죄송해요.”

“죄송할 건 뭐야.”

귀엽다는 말은 내가 먼저 했는데. 그 말이 나쁜 뜻도 아니고. 그를 소파에 앉히고 나도 테이블 옆 바닥에 앉았는데, 강주경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이런 일?”

“이상한 사람이 쫓아다니거나.”

“아…… 뭐, 우리보다는 의사한테 많지. 자주는 아니지만 없지도 않아.”

강주경이 미간을 약간 좁혔다.

“환자가 그러는 건가요?”

나는 눈썹을 긁적였다. 다른 사람보다 이 직종에서 많이 일어나는 일이긴 했고, 백 퍼센트 환자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거의?”

“위험한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다가온 사람을 직접 봤기 때문인지 강주경은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렇긴 한데…… 당장 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누가 그러는 건지도 모르고. 알잖아? 이 정도로 경찰에 신고해 봐야 도움 안 되는 거.”

이건 정말이다. 경찰은 어지간해선 도와주지 않는 데다, 상대가 환자인 만큼 위험한 걸 알면서도 우리로서는 조심할 수밖에 없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주경이 다시 말했다.

“그럼 제가 며칠 계속 모셔다드리면 안 될까요?”

“응?”

“해결될 때까지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 해 준다면 나야 당연히 좋지만…….

“아파트 건물 안은 괜찮은 것 같으니까 출퇴근하실 때만 같이 다녀요.”

“아니, 네 출퇴근 시간도 있고. 여기 들렀다 가려면 귀찮잖아. 내가 너무 미안한데.”

“집이 여기서 가까워요. 출퇴근은, 저는 주간만 해서 선생님이랑 비슷하고요.”

“그래도…….”

“싫으세요?”

“싫진 않지…… 미안해서 그러지.”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강주경의 얼굴은 진지했다. 덥석 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내가 고민하자 그는 내가 대답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으음, 이런 생각 할 상황이 아니지만 한번 강주경이 귀엽다고 생각하자 이 모습도 먹이 앞에서 기다리는 강아지 같다. 크기가 좀 크긴 해도.

“혼자 살아?”

“네? 네.”

“그럼…… 데려다주는 대신 우리 집에서 저녁 먹을래?”

“……그래도 돼요?”

새카만 눈이 짧게 반짝거렸다. 뭐야, 겨우 저녁 대접해 준다는 말에 강주경은 생각보다 기뻐했다.

“저는 요리를 못해서…….”

“그럼? 집에서는 아예 안 해 먹어?”

“네. 나가서 사 먹고 들어와요.”

“매일?”

“네.”

저런. 외식이나 배달 음식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그러려면 메뉴도 한정적이고 질린다. 사적인 대화도 오늘 처음 해 본 사람에게 귀찮은 일을 떠맡긴다는 미안함이 아주 조금 누그러졌다. 내가 요리를 잘하는 편이라서 다행이다.

“그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말해.”

“전 그냥 아무거나.”

“싫어하는 건?”

“없습니다.”

그렇구나. 하긴 편식을 안 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아까 밥 먹을 때도 젓가락이 더 가는 것도, 덜 가는 것도 없이 골고루 먹고 있었고. 어쨌거나 고마운 일이었다. 물론 저녁 대접 정도로 출퇴근길에 같이 다녀 주는 귀찮음을 보상할 수야 없으니 나중에 뭐라도 해 줘야겠지만. 강주경이 다시 말했다.

“제 차로 다니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어?”

그제야 나는 눈을 둥글게 떴다. 생각해 보니 사복 차림으로 주차장에 내려왔다는 건 차가 거기 있다는 건데, 내 차를 타고 같이 왔다. 그럼 강주경 차는?

“병원에 차 두고 온 거야?”

“네.”

“아…… 내가 정신이 없어서 생각도 못 했네. 말을 하지.”

“괜찮아요.”

“미안해.”

“진짜 괜찮아요. 내일 아파트 현관으로 오겠습니다.”

강주경이 몸을 일으키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새 커피가 들어 있던 머그잔은 비어 있었다. 지금 나가서 버스나 택시로 돌아가고, 내일 아침에 또 여기까지 오고. 내가 하는 게 아닌데도 벌써 피곤하다. 나는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하는 강주경의 옷을 붙잡았다.

“그러지 말고 집에서 자고 가. 자고 내일 아침에 같이 택시 타고 가자.”

“……네?”

“남는 방 있으니까 거기서 자면 돼.”

“아니, 그래도…… 선생님 불편하실 텐데.”

“너 그냥 가는 게 더 불편해.”

걱정된다고 자기 차도 버리고 데려다준 손님을 그냥 내쫓을 수 있을 만큼 내 양심이 튼튼하진 못했다. 게다가 가족용 아파트라서 남는 방에 남는 욕실까지 있었다. 나나 강주경이나 불편할 일은 없다.

“그럼…….”

그가 조금 어색한 얼굴을 하며 돌아섰다. 커다란 몸집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것만으로 내 앞에 그림자가 졌다. 나는 강주경을 끌고 와 현관 옆 손님방 문을 열었다. 손님방이라고 해도 매트리스와 작은 소파, 옷장에 책상도 있다. 강주경이 그 방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 사는 사람 있으세요?”

“아니. 예전 집에 살 때 쓰던 건데 버리기도 그렇고 해서 거기 둔 거야. 갑자기 누구 재워 줘야 할 때 좋더라. 이번처럼.”

여기로 이사 오기 전 오피스텔에 살 때 쓰던 가구였다. 거기 살 때와 똑같은 배치로 놓아두니 제법 괜찮은 손님방이 되었다. 신기하다는 듯 손님방을 보던 강주경이 나를 보며 웃었다.

“거실이랑 주방도 예쁘던데. 선생님은 뭐든 다 잘하시네요.”

예쁜가? 마음에 드는 가구를 사서 마음에 드는 자리에 놨을 뿐인데. 그보다 강주경은 웃으니 제 나이로 보였다. 나는 묘한 칭찬에 대답하지 않고 방 안을 가리켰다.

“거기 옷장에 옷이랑 새 속옷이랑 다 있을 거야. 형 거긴 한데, 내일 똑같은 옷 입고 출근하기 좀 그렇잖아. 아무거나 입어도 돼.”

어릴 땐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는 게 왜 이상한 시선을 끄는 일인지 몰랐었다. 이유를 알고 나니 사람들의 상상력이란 대체 뭔가 싶었고, 좀 더 나이를 먹자 싫어도 이해하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욕실은 거실에 있는 거 쓰고.”

“선생님은요?”

“침실에.”

강주경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거실 욕실은 욕조에 들어갈 때 아니면 나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도 갖춰 둘 건 다 갖춰 두었으니 괜찮겠지.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시계는 어느새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까 병원에서 ‘집에 가서 할 일’로 배분해 둔 서류가 조금 있다.

“난 씻고 일 좀 할 거니까 편하게 있어. 거실에서 TV 봐도 되고, 서재에 책 있으니까 들어와서 골라 가도 괜찮아.”

“선생님은 서재에서 일하세요?”

“응.”

“그럼…… 책 먼저 골라서 나올게요. 괜히 방해할 것 같아서.”

“그럴래?”

손님방 바로 옆방이 서재였다. 문을 열어 주자 강주경은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집 자체가 좁은 건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이었으면 불곰이 안에 들어온 것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강주경의 시선이 책장 위로 흘렀다. 소설을 꽂아 둔 칸에서 멈추더니 제일 위에 꽂혀 있던 꽤 음산한 공포소설을 꺼내 든다. 나는 팔을 머리 위로 뻗어야 하는 칸인데 강주경은 쉽게도 책을 꺼냈다. 역시 키가 저만큼 크면 여러모로 이득일까?

“선생님, 책 많이 읽으시네요.”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나는 그 말에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응? 아냐, 사 놓고 못 읽은 게 더 많아.”

시간 나면 읽어야지, 하고 신간이 나올 때마다 사서 쌓아 두고 못 읽는 게 태반이었다. 강주경이 지금 꺼낸 공포소설도 여름에 나오자마자 산 건데 초겨울이 된 지금까지 한 번도 펼치지 못했다.

차라리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면서 오가는 길에 읽을까 하고 지하철에 한 번 올라 봤으나, 다시는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에서 서 있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하겠다는 마음은 먹지 말자는 다짐으로 끝났다. 덤으로 차가 아무리 밀려도 자가용을 포기하지 말자는 다짐도.

“난 씻으러 갈게.”

“네.”

침실에 딸린 작은 욕실에서 쏟아지는 물에 머리를 다 적시고 나서야 자기 전에 따로 인사할 필요 없다느니, 편하게 있다가 편하게 자라느니,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하라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강주경이 있는 방을 손님방으로 잘 쓰는 건 맞지만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이 와서 자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샤워젤, 샴푸, 익숙한 냄새가 차례로 욕실을 채우자 온몸의 살이 천천히 말랑말랑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아직 위험도가 낮은 환자라지만 지하 주차장에서 날 노린 사람과 불쑥 마주친 일은 정신에 제법 큰 타격을 준 듯했다.

습기로 매끄러워진 벽에 손끝을 짚었다. 아까 언뜻 봤을 때 새파랗게 죽어 있던 손톱은 어느새 원래 색을 되찾았다. 문득 강주경을 집에 재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려다줄까요, 라는 말이 무척이나 큰 배려라는 것도.

‘착하네.’

내일은 우선 주차장 CCTV를 확인하고, 그리고 차에 블랙박스를 달아야겠다.

노곤하게 풀어진 몸으로 써야 할 보고서 내용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며 서재로 향했다. 지나치며 힐끗 본 욕실은 수증기가 희미하게 남은 걸 빼면 누가 사용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깔끔했다.

평소와 똑같이 서재 문을 열어 두고 책상에 앉았다. 클라우드에서 파일을 불러와 오늘 내게 독 바른 종이컵을 준 노년의 환자에 대해 한참 보고서를 쓰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강주경은 정말 조용했다. 조금 전까지 집에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을 정도로. 바로 옆방이고, 문을 열어 두었으니 인기척이 들릴 법도 한데 아무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기했다. 커다란 몸 때문에 걷기만 해도 땅 울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데. 하루……도 아니고 몇 시간 만에 불곰에 대한 내 평가는 ‘무섭게 생겼고 덩치 크고 일 잘하는 시큐리티’에서 ‘잘생겼고 덩치 크고 예의 바르고 착한 강주경’으로 바뀌었다.

나는 옆방이 있는 쪽 벽을 한 번 보았다. 책장이 비는 곳마다 북앤드를 받쳐 빈틈이 거의 없는 책 사이로 딱 한 권이 빠져나간 자리가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있던 책이 조금 기울어진 채 다른 책에 기대어져 있었다. 잠시 그곳을 보고 있다가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에 가지고 온 일을 끝낸 건 자정 조금 전이었다. 여전히 집 안은 조용했다. 서재의 불을 끄고 문도 닫으니 거실의 간접조명만 남아서 어슴푸레했는데, 손님방 문틈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직 안 자나.’

침대나 소파에서 아까 꺼내 간 책을 보고 있을까. 손님방의 더블베드가 강주경에겐 조금 작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 *

다음 날, 보안팀에 부탁해 주차장 CCTV를 확인했지만 워낙 영상이 많으니 혼자 그걸 다 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스토커가 모습을 드러냈던 그날은 어느 자리에 차를 세웠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어서 확인했으나 카드를 꽂아 두고 가는 것부터 내게 접근하는 모습까지,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감싼 채 모자까지 쓰고 있었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러면 다른 날 영상을 찾아도 별 쓸모는 없을 듯했다. 내가 안이했다.

그리고 생각한 것보다 강주경에게 안겨 있던 시간이 길었다. 몇 배속으로 영상을 돌리고 있는데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곧바로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한 강주경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저렇게 오래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그냥 보냈다가 운전을 하고 가든 택시를 타고 가든 사고가 날까 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CCTV에서 별다른 수확을 건지지 못했으니 손을 놓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강주경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벌써 사흘째 나를 데리러 오고, 데려다주었다. 병원에 내 차가 없다 보니 카드는 더 이상 도착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서 드나들 때마다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 둔 차를 확인했지만, 늘 아무도 손댄 흔적 없이 깔끔했다.

출퇴근 시간에는 나오는 시간이 5분만 빨라져도 도착은 훨씬 앞당겨지곤 한다. 강주경은 내가 평소 나가는 시간보다 약간 빠르게 도착했다. 덕분에 20분이나 일찍 출근해서 아무도 없는 심리실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켰다.

모니터에 익숙한 대기화면이 떠오른 걸 확인한 뒤 커피를 타러 가려고 일어서는데, 행정 직원이 와서 문을 두드렸다.

“한 선생님, 택배요.”

“네?”

뭘 주문했던가? 출입문으로 다가가자 행정 직원이 수레에서 작은 상자를 집어 내밀었다. 리스트에 사인을 받은 그가 멀어진 후 상자를 보니 더더욱 의문이었다. 뭘 주문한 적이 없는데. 병원으로 개인적인 택배는 받지 않고, 누가 검사도구나 검사지를 내 이름으로 주문했다고 하기엔 상자가 너무 작았다. 발신인도 생소하다.

“뭐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상자를 뜯은 나는 그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상자 안에는 인화한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것도 내 사진.

강주경과 같이 차를 타는 사진, 그리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내리는 사진이었다. 차가 내 차인 걸 보면 찍은 날은 사흘 전이다. 사진의 화질은 흐릿했다.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포토프린터로 출력한 것 같았다.

사진을 들춰 보니 아래에 익숙한 봉투가 깔려 있었다. 하나하나 열어 보니 역시 전부 복제라도 한 것처럼 똑같은 모양에 같은 내용이었다. 나는 상자를 다시 닫아 택배 송장의 모양을 확인했다. 송장과 비율이 같은 직사각형 상자에 위아래, 양옆 간격은 눈으로만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한가운데였다.

병원으로 오는 택배는 행정실에 모아 두었다가 직원이 다음 날 아침에 각 과를 돌아다니며 가져다준다. 그러니 이게 도착한 건 어제일 것이다. 즉 그날 밤에 찍고, 다음 날 인화해 병원으로 택배를 보냈다. 내 집을 알고 있으면서 카드를 집이 아닌 병원으로 보낸 것은 이걸 ‘병원에 있는’ 나에게 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 거고.

나는 눈썹을 긁적였다. 소름이 끼치고도 남을 일이었으나 오히려 안심했다. 이 사진을 보니 누구의 짓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에 발신인의 번지수를 검색해 보았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주소였다.

이런 일은 빈번히 일어나지만 경찰에 신고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심지어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범인이 환자인 이상 죄가 감경된다. 나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범인이 누구인지만 알아내면, 내부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상자를 한 손에 든 채 책상에 걸터앉아서 내선 번호를 눌렀다. 신호 한 번에 곧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네, 서영우입니다.

전화 너머에서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교수님? 지원인데요.”

-응,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저 지금 연구실로 잠깐 가도 괜찮아요?”

-그래.

아직 진료 시작 시간 전이었다. 나는 상자를 들고 서 교수님의 연구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고 바로 들어가자 교수님은 커피머신 앞에 서서 휴대폰으로 오늘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가운을 입은 교수님은 오늘도 머리를 말끔하게 넘기고, 안경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기계음을 내던 커피머신이 두 번째 잔까지 채워 놓고 조용해졌다.

“그게…….”

나는 교수님이 주는 커피를 받아 들며 며칠 전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상자를 내밀었다. 사진을 확인한 교수님은 으음, 하며 미간을 좁혔다.

“이름이 뭐더라…….”

“김진석 환자요.”

“아, 그래.”

그는 어렵지 않게 그 환자를 떠올린 듯했다. 보통 환자가 문제를 일으키면 담당의와 간호사가 보호자에게 연락을 넣는다. 이러저러한 일이 있으니 내원해 달라고 말하고, 문제가 심각한 경우에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 입원하도록 권유한다. 범죄의 영역에 걸쳐지는 문제였기에 보호자들도 쉽게 수긍하는 편이었다.

담당의가 다른 사람, 예순이 넘은 교수들 중 하나였다면 말을 꺼내기가 더 어려웠겠지만 다행히도 서 교수님의 담당 환자였다. 김진석, 취업 스트레스에서 기인한 단기 정신병적 장애 환자.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강박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원하던 회사에 연달아 불합격하면서 망상까지 심해져 정신증으로 발전했다.

김진석 환자는 이전에도 비슷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 자신이 유명 사진작가라는 망상 위에 내가 자신의 모델이라는 관계망상에도 빠져 있었다. 사진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될 사진을 미리 보여 준다면서 내 사진을 수없이 찍어 보냈다. 인화해서 진료실이나 간호사실에 두고 전해 달라고 하거나, 오늘처럼 택배로 보내기도 했다.

한동안 비슷한 일을 하다가 투약으로 증세가 호전되면서 멈췄다. 서 교수님에게 ‘그 선생님한테 정말 죄송했다고 전해 주세요.’라는 말을 남긴 게 마지막이었고, 경과를 보기 위해 삼 개월 후 예약을 잡아 두었는데 진료일 보름쯤 전에 취소한 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사람의 증세가 다시 심해진 것 같다. 사진과 카드를 넘겨 본 교수님이 표정을 더 굳혔다. 당장 흐려진 표정에 주차장에서 강주경이 도와줬고, 아침저녁으로 같이 다닌다는 말까지 덧붙인 후에야 그의 걱정을 지워 놓을 수 있었다.

“내가 보호자한테 연락해 볼게.”

“네. 감사합니다.”

“그 전에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말하고. 지금 내려갈 거야?”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검사 있어서.”

“그래. 연락해 보고 알려 줄게.”

어깨를 두드리는 교수님에게 인사하고 심리실로 내려왔다. 그새 수련생들이 출근해 있었다. 내 의자에 앉아서 한 모금 마시자 커피는 딱 좋을 정도로 식어 있었다. 누구인지도 알았고, 그 환자의 보호자는 치료에 굉장히 협조적인 편이다. 며칠 걱정하긴 했지만 잘 해결될 것 같다.

이른 아침부터 검사가 있었다. 환자 정보를 확인한 나는 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하필 또 위험한 환자네.’

산 넘어 산이었다. 전 병원에서 의료진을 폭행하고 우리 병원으로 넘어온 *SPR. 일주일 전 첫 진료가 있었고 위험도가 높다고 판단되어 우선순위가 올라가서 오늘 바로 검사하게 된 환자였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이번엔 두 번쯤 신호가 간 후에 연결이 되었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정신건강의학과 검사실로 시큐 한 분만 보내 주시겠어요?”

-네, 무슨 일로 그러세요? 바로 보내 드릴까요?

“환자 위험도가 높아서요. 대기 부탁드리려고요.”

-알겠습니다.

이 정도로 위험한 환자인 경우에는 비상벨을 눌러도 제때 시큐리티가 오지 못할 수 있다. 그럴 땐 검사실 밖에서 티 나지 않게 안을 살피다가, 상황이 벌어지면 곧바로 들어와야 한다.

시간을 확인하고 다소 긴장하며 검사실에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온 환자는 꽤 쌀쌀한 날씨인데도 한여름 옷을 입고 있었다. 170cm쯤 될까. 보통 체격에 피부가 검은 편이었다.

“안녕하세요, 이경민 씨.”

“……네.”

음울한 인상의 남자였다. 생각보다 얌전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자마자 시선을 떨어뜨려 내 손만 쳐다봤다. 책상 아래에 비상벨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미리 시큐리티를 불러 둔 게 다행이었다. 손을 아래로 가져가는 것만으로 환자는 자극받아 공격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창밖을 확인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큰 체구의 남자가 슥 지나갔다. 고맙게도 강주경이었다. 마음이 놓이는 걸 느끼며 환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가워요. 병원 안은 좀 덥죠?”

환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쌀쌀한 날은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하겠지만 이 사람은 여름옷을 입고 있었다. 어떤 자극으로 폭발할지 모르는 폭력성을 차치하고서라도, 환자의 행동에 ‘왜 그래요?’라고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여 줄 순 없었다.

“저랑 몇 가지 검사를 할 건데…….”

다행히도 환자는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BGT로 시작해 *웨이즈, *로샤, 면담까지. 차례로 검사를 진행하는 내내 생각보다 얌전했다. 속도도 꽤 빠른 편이라 두 시간을 조금 덜 채우고 끝났다.

“수고하셨어요. 이게 워낙 오래 걸리는 테스트라서…….”

“저 고지능이잖아요.”

그가 마지막 문항을 채운 샤프 끝으로 계속해서 자기 손가락 끝을 쓸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검사지를 정돈하고 있는데 이경민이 내 손을 시선으로 따라왔다.

“선생님 손이 예쁘네요.”

“손이요?”

“제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거예요. 지금 제 손이 뭐가 예뻐요, 라고 하려고 그런 것 같은데 제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거거든요.”

고저가 없고 약간 웅얼거리고, 아주 가볍게 흥분한 말투. 대화의 템포는 미묘했다. ‘저 고지능이잖아요’라는 대답은 정신과 검사의 경우, 지능이 높을수록 검사가 빨리 끝난다는 말이 있어서일 것이다. 자랑하겠다는 뜻. 그러다 맥락에 안 맞게 내 손을 칭찬하고.

앞선 검사 결과를 대충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전 병원에서 의료진을 폭행한 이유도. 그는 공격성이 대단히 높고 폭력적이다. 나는 ‘손 예쁜 거야 좋은 일이죠.’하면서 이경민을 달래 일어나게 했다. 검사실 밖으로 나가면서도 이경민은 계속 내 쪽을 흘끔거리며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었다. 보고서에 쓸 내용이 터져 나가도록 많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건 입원 소견이다. 할 수만 있으면 별표 열 개를 쳐 놓고 싶었다.

그가 문을 열었을 때 강주경은 멀찍이서 지나가는 척을 하고 있었다. 환자는 잠시 그쪽을 보긴 했지만 별다른 말 없이 멀어졌다.

검사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네?”

얼굴을 내민 건 강주경이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문가에 똑바로 선 그는 방금까지 검사실 앞을 맴돌며 언제 난폭하게 변할지 모르는 환자를 살피던 사람이 아니라, 아무런 용건도 없이 불쑥 찾아온 손님 같았다. 가슴의 동그란 배지가 눈에 들어왔다.

분홍색 테두리에 ‘도와드립니다’라고 쓰인 배지는 요즘 시큐리티들이 다들 달고 다니는 것이었다. 강주경의 체격이 체격이다 보니 위압적인 조각상에 배지를 달아 놓은 것 같아서 조금 재미있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응. 고마워. 별일 없이 끝났네.”

강주경이 다른 말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오늘 좀 일찍 끝나요.”

“그래?”

나는 퇴근이 5시 30분이고, 강주경은 6시에 일간 보고나 옷 갈아입는 시간까지 해서 30분은 더 있어야 했기에 남는 한 시간 동안 심리실에서 서류 처리를 하며 기다려야 했다. 난 할 일이 아주 많은 날만 아니면 회사에 남아서 하는 것보단 집에서 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었기에 퇴근이 이르다는 말이 반가웠다.

강주경과 인사하고 심리실로 돌아와 또다시 바쁜 하루를 보냈다. 해결책이 발견돼서인지 사진과 카드에 대해서는 잠시 잊을 수 있었다. 5시 30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강주경이 주차장에서 기다리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메시지 창을 보며 새삼 미안해졌다. 기껏 일찍 퇴근했을 텐데.

정시에 자리를 정리하자 마침 선배도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선배, 지금 가세요?”

“응. 오늘 동생이 집에 온다고 해서 일찍 가려고. 한 선생도 지금 가게?”

“네. 같이 내려가실래요?”

“그래.”

선배와 잡담을 하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로 김진석 환자에 대한 내용이었다. 스토킹의 대상이 나뿐이라고 단정할 순 없었기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심리실 사람들과는 내용 공유를 하는 편이었다. 이번 일은 피해를 입고 있는 게 나뿐이었으나, 누구인지 밝혀졌고 그게 서 교수님의 환자라는 말에 선배도 진심으로 안도해 주었다.

지하로 내려가자 엘리베이터 앞에 사복 차림의 강주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강주경 씨다. 안녕하세요.”

선배의 인사에 강주경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벌써 사흘째 그가 데려다주고 있다는 것도 이미 선배는 알고 있다. 강주경의 시선이 선배에게 한 번, 내게 한 번 닿으며 움직였다.

“강주경 씨가 데려다주면 진짜 든든하겠다. 용병들이 납치하러 와도 무사하겠는데?”

“용병들이 저를 납치하러 올까요?”

한국의 소심한 삼십 대 남성을?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며(주로 선배와 내가 하고 강주경은 옆에서 들으며) 주차 구역으로 나왔다. 아침에 운 좋게 엘리베이터 가까이 자리가 있어서 그곳에 차를 세웠고, 선배는 좀 더 떨어진 곳까지 가야 했다. 강주경의 차를 본 선배가 오, 하는 소리를 냈다.

“차 좋은 거 타고 다니네.”

좋은 건가? 강주경의 차는 값이 나가는 브랜드인 건 알았지만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를, 차체가 높은 박스 모양의 SUV였다. 선배는 더 덧붙이지 않고 손을 흔들며 자기 차가 있는 곳을 향해 멀어졌다.

“비싼 차야?”

강주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비싸진 않아요.”

검은색의 묵직해 보이는 SUV는 그에게 잘 어울렸다. 차체가 두껍고 커서 도시보다는 비탈과 흙먼지가 가득한 오프로드에 서 있어야 할 것 같다. 강주경이 서울 시내 병원의 시큐리티보다는 영화 속 경호원이 더 어울려 보이는 것처럼.

조수석에 타서 안전벨트를 맨 후 나는 갑작스러운 궁금증에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그리고 강주경에게 차종 이름을 물어 검색했다가 그대로 조수석에서 10센티 정도 튀어 올랐다. 안전벨트가 없었다면 정말 몸이 붕 떴을지도 모른다. 내가 2억짜리 차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공식 가격이 그 정도였으니 옵션이 들어간 실제 가격은…… 이 차종이 비싸다는 건 막연하게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비쌀 줄은 몰랐다.

나야 차에 별 관심이 없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감탄하는 비싼 차를 몰고 싶어 한다는 건 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강주경을 흘끔거렸다. 강주경이 운전석에 앉아도 전혀 좁은 감이 들지 않는 이 단단한 차가 혹시나 막대한 이자를 매달 빼앗아 가는 빚 덩어리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강주경의 인생이니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모님이 취업 선물로 사 주신 거예요.”

나는 움찔하며 그를 보았다. 너무 흘끔흘끔 쳐다본 모양이다. 괜히 머쓱했다.

“좀…… 그런가요?”

“응?”

“부모님이 사 준 차 끌고 다니는 게.”

“그게 왜? 빚내서 산 것만 아니면 됐지.”

“…….”

강주경이 시동을 걸려다 말고 나를 보았다. 무표정했지만 자세히 보니 눈에 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뭔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중얼거리더니 핸들을 잡았다.

“오늘은 별일 없으셨죠?”

“아, 그 일 곧 해결될 것 같아.”

“그래요?”

“응. 누구인지 알았거든.”

강주경의 시선이 룸미러를 통해 잠시 내게 닿았다 떨어졌다.

“누구인지 알면 해결되는 일인가요?”

“보통은. 이번에는 더 쉬울 거고. 너 없었으면 며칠 불안했을 텐데, 고마워.”

“……아니에요.”

사흘 사이 강주경의 말투도 꽤 친근해져 있었다. 며칠 강주경과 출퇴근을 같이 하고, 저녁을 먹으며 느낀 건 그가 불곰보다는 곰 인형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침대에 올리면 내가 잘 자리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지만 포악함은 없고 진지함과 귀여움만 있다. 친한 사람들은 강주경이 이런 성격이라는 걸 다 알겠지.

“오늘은 장 봐서 들어가자.”

“네.”

그가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 무거운 엔진 소리와 함께 움직인 차는 서서히 정체가 시작되는 도로를 타고 집 근처 마트로 향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갑만 주머니에 넣고 내리며 묻자 강주경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전 뭐든…….”

“그럼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걸로 사자.”

“네.”

식품 매장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옆면 벽에 행사 상품을 안내하는 광고지가 잔뜩 붙어 있었다. 돼지고기, 새우, 배추…… 눈에 잘 띄는 글씨로 ‘특가’라고 쓰인 식재료 사진이 지나갔으나 딱히 시선을 끄는 게 없었다.

빠른 박자의 음악과 호객하는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로 가득한 식품 매장은 부산스러웠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과일을 몇 가지 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있을 때도 제대로 차려 먹는 편이지만 손님이 생기니 고민이 좀 더 많아졌다.

조용히 따라오는 강주경을 옆에 둔 채 생선 코너를 지나는데 마침 잘 손질된 도미를 팔고 있었다. 살만 큼직하게 발라 놓았는데도 꽤 싱싱했다.

“주경아, 생선 좋아해?”

“좋아해요.”

강주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 한 팩과 달걀이며 우유며, 냉장고를 채울 것들을 이것저것 담고 집에 돌아왔는데도 일찍 퇴근한 덕분인지 평소보다 오히려 이른 시간이었다.

“구운 게 좋아, 튀긴 게 좋아?”

습관처럼 손을 씻으러 들어가는 강주경의 등 뒤에 대고 묻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전 둘 다…… 저, 대충 대답하는 게 아니라 정말 둘 다 좋아요.”

그 말에 나는 눈을 둥글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다.

“……혹시 무성의하다고 생각하실까 봐.”

“하하, 뭐야. 대충 대답한다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러자 강주경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로 들어갔다. 하긴 이것도 좋아요, 저것도 좋아요, 그렇게 대답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까다롭게 구는 것보단 저런 무던한 답이 더 좋았다. 또 강주경이 대충 대답한다고 느낀 적도 없다.

정말 대충 대답하는 사람은 말로는 뭐든 좋다고 해 놓고 정작 해 주면 투덜거리곤 한다. 그러는 것보다야 강주경처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게 훨씬 낫다. 그리고 강주경은 뭘 해 줘도 맛있게 먹고, 가리는 음식도 없었다. 제법 만든 보람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었다.

도미는 튀기고, 시금치만 넣어서 된장국을 끓였다. 식탁에 앉아 레몬과 파슬리가 옆에 놓인 생선튀김 접시를 보던 강주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선생님, 요리 정말 잘하시네요.”

“응. 취미야.”

음식 만드는 건 정말 좋아했다. 몇 가지 음식을 같이 만들면서 틈틈이 주방을 정리하고,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며 움직이면 기분이 꽤 즐겁다. 다 만든 뒤에도 주방이 어질러지지 않은 걸 볼 때면 더욱. 구색을 잘 갖춘 식기에 음식을 담고 앉아서 먹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회사에서 얻는 스트레스는 대체로 저녁을 만들며 풀곤 했다.

“너는?”

“네?”

“취미.”

“운동이요.”

“아…… 어쩐지 몸이 좋더라.”

말하고 나서 혼자 괜히 움찔했다. 몸이 좋다고 하는 건 좀 묘한 칭찬이었나? 힐끗 강주경을 보았으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약간 안심하는데 소매를 걷고 있는 그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가가 공들여 깎아 놓은 것 같은 팔이었다.

“몸무게 물어봐도 돼?”

“98kg이요.”

“와.”

잠시 내 몸무게를 생각하고 순수하게 놀랐다. 내 몸에 쌀 반 가마니에서 약간 덜어 낸 만큼을 더해야 강주경이었다. 한 팔로 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갑자기 두근거리려 하는 방정맞은 가슴을 잘 달랬다.

“운동 진짜 열심히 하나 보다. 원래 체격도 크지?”

“네…….”

“체육학과?”

“아니요, 경호학과요.”

거기서 학과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강주경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경호학과가 있는 대학교를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조금 뜻밖이었다. 아니, 우리 병원이 뭐 엄청 별로라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병원 시큐리티로 있기에는 오버스펙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강주경이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경호원이나 시큐리티 쪽으로 가려고 했었어요. 저는 누굴…….”

누굴, 까지 말해 놓고 그는 한 번 말을 멈췄다.

“누굴 지켜 주는 게 좋아서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식탁이라는 것도 잊고 움직임을 뚝 멈춘 채 강주경만 쳐다보았다. 뚜렷하고 분명하지만 낮은 목소리가 내 집 거실을 떠돌고 있었다. 이런 말을 이렇게 진중한 얼굴로 하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나를 지켜 주겠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강주경의 그 목소리는 불쑥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안 되는데. 1초만 더 지나면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다. 그 전에, 그 전에 빨리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하는데. 급하게 입을 달싹거리는 날 도와준 건 또다시 강주경이었다.

“선생님도…… 오래 공부하셔야 하죠?”

“……아.”

화제가 나를 향해 돌아오자 마음이 빠르게 침착해졌다. 뛰쳐나가려 하던 정신머리가 제자리를 찾자 갑자기 창피해졌다. 밥 먹다 말고 네 살 어린 남자에게 설레려고 하다니 나도 참 구제 불능이었다. 괜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물을 마신 뒤에야 뒤집히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할 수 있었다.

“응, 그렇긴 하지.”

“대학교, 대학원. 병원에서도 공부해야 하고요.”

“잘 아네. 관심 있었어?”

“……조금요.”

“그렇구나. 그래도 공부한 보람은 있어. 나는 이 일 좋아해.”

사실 좋은 일만 있진 않다. 이번 같은 스토킹이나, 환자의…… 사고. 여느 직업이 그렇듯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지만 이 일의 ‘나쁜 부분’은 정신에 강하고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굳이 지금 할 필요는 없었다. 강주경은 고작 출퇴근길과 저녁 식사를 며칠 같이 했을 뿐, 부서도 멀리 떨어진 회사 동료일 뿐이고 지금 화제는 내 직업의 어두운 부분이 아니라 표면의 밝은 부분에 대해서였다.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면 자칫 이상해졌을 뻔한 대화는 금세 평소 분위기로 돌아왔다. 내가 생선튀김 옆의 파슬리를 먹고 있자 미미하게 ‘?’를 띄운 강주경의 표정 때문에. 가루로 뿌려진 것 말고 장식된 파슬리를 먹으면 다섯 명 중 네 명은 보이는 반응이었다.

“어디서 본 건데, 농부한테 파슬리는 장식으로만 쓰고 버려진다고 말했더니 맛있게 키우려고 무척 노력했다고 하면서 슬퍼했대. 그걸 들은 후로는 버릴 수 없더라고.”

“……네.”

어디서 본 건지도 잊었지만 파슬리를 살 때마다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말려서 가루로 뿌리면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데, 장식으로 놓인 생 파슬리를 먹으면 고개를 갸웃거린다는 것도 오히려 이상했다. 못 먹을 걸 먹은 것도 아닌데.

“네 것도 먹으라고 놓은 거야.”

“네.”

강주경은 두말도 하지 않고 젓가락으로 파슬리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 행동에 나는 오히려 조금 놀라서 그를 보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덥석 먹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맛있네요.”

“응…… 그렇긴 해.”

파슬리 덕분에 내 일방적 어색함이 덜어 내진 식사는 그 후 금방 끝났다. 치우는 것을 강주경이 도와주고, 대강 씻어 낸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있는데 낮에 택배 도착 문자가 왔었다는 게 떠올랐다. 아까 들어오면서 가지고 들어온다는 게 깜빡 잊었다.

“가 볼게요, 선생님.”

“아, 잠깐. 같이 나가.”

“네?”

얇은 점퍼를 걸치고 따라나서자 그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택배를 안 찾아왔어. 지금 가서 가지고 오려고.”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뭐야, 그렇게까지 안 해 줘도 돼.”

강주경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결국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에 있을 땐 괜찮았는데 왜인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니 어색함이 되살아났다. 오늘따라 느리게 내려가는 붉은 숫자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겨우 지하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렸다. 강주경은 내가 무인택배실로 들어가 택배를 꺼내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있었다.

택배함을 열자 상자가 두 개였다. 이상하다, 도착했다는 문자는 하나였는데. 그리고 하나는 뭘 주문한 건지 알지만 다른 하나는 알 수 없었다.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크기의 상자를 꺼낸 나는 곧바로 인상을 구겼다. 상자에 작은 비뚤어짐도 없이 송장이 붙어 있었다. 아침에 병원으로 온 것과 정확히 똑같은 상자였다.

강주경은 주차장 쪽을 보며 서 있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택배 상자 두 개를 들고 나왔다. 그는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까지 아파트 현관 앞에 있었다. 따라 들어가는 사람이 없는지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상자를 뜯어 보았다. 발신인의 주소 역시 병원으로 온 것과 같았다. 우편번호를 적지 않아도 발송이 가능한 회사였기에, 보내는 사람의 주소가 엉터리여도 무사히 배달되는 모양이다.

안에 들어 있는 건 역시 사진이었다. 강주경의 차에 타고 내리는 모습. 이번엔 조금 멀리서 확대해 찍었는지 가장자리가 흐릿했다.

‘……집 호수.’

병원에서는 의료진이나 병원 관계자의 개인정보를 절대 알려 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위험해질 수 있으니까. 이전에도 김진석 환자는 날 미행해 아파트 몇 동인지까진 알아냈지만, 정확한 호수는 찾지 못해 집에 침범하진 못했다. 그래서 차를 타고 따라와 주차장에 세워 둔 차 사진이나, 현관으로 들어가는 내 사진을 찍는 정도에 그쳤다.

이 상자도 그렇다. 호수는 적히지 않았지만 대신 내 전화번호와 이름이 선명했다.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다른 회사에서 배달된 택배와 같은 칸에 들어가 있고, 그렇다면 이미 내 집 호수를 알아냈을 것이다.

일단 거실 테이블에 상자를 올려 두고 현관으로 향했다. 공동 현관에 보안 장치가 있다고 해도, 택배회사나 배달하는 사람들에게 비밀번호를 알려 주는 사람은 많았다. 주민이 들어올 때 따라 들어와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고.

가만히 현관문을 보고 있었으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바깥에서는 작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옆집도 이사를 가서 비어 있다. 왜 다음 사람이 안 들어오는지까진 나도 모르지만…… 도어락 수동 잠금장치를 돌려 두고 체인까지 걸었다. 걸쇠가 걸리는 철컥 소리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 * *

강주경은 습관처럼 밤에 무슨 일은 없었는지 물었지만 거기에 미주알고주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낯짝이 두껍지 못했다. 아침에는 첫날 사진, 저녁에는 두 번째 날 사진을 받았다니 무슨 아침에는 네 발 저녁에는 두 발 스핑크스도 아니고…… 심지어 무서워서 체인까지 잠그고 자다가 악몽도 꿨다는 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안 그래도 사적인 첫 만남이 놀라 쓰러져서 허우적거리던 모습인데 또 심약함을 티 내는 게 부끄러웠다.

주차장에서 강주경과 헤어지자마자 휴대폰으로 서 교수님에게 연락했다. 심리실까지 가서 연구실 내선을 누를 시간도 아까웠다. 어젯밤에 전화해 징징대지 않은 것만 해도 교수님을 향한 내 사회적 체면은 지켰다.

교수님은 방금 연구실에 들어왔다며 바로 올라와도 된다고 말했다. 심리실이 있는 층을 그냥 지나쳐 연구실로 들어가자 그는 재킷을 걸고, 가운을 막 꺼내는 참이었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놀랐어?”

“상자가 집에도 왔어요. 집 호수를 알아낸 것 같더라고요.”

“뭐?”

이 말에는 교수님도 놀랐다. 아무리 단기적이고, 약을 먹으면 호전될 증상이라지만 집이 몇 층, 몇 호인지까지 노출되었으니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김진석 환자는 로컬 병원에서 우리 병원으로 올라온 이후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았다. 당시에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주던 단계에서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하여 그 이상의 문제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이상의 문제’였다. 관계망상에 빠진 사람은 극단적으로 커진 상상의 산물을 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가 내 집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 환자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게 사진을 들이미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었다.

“큰일이네. 사실 그 환자 보호자랑 연락이 안 돼.”

“네?”

“계속 전화가 꺼져 있거든.”

낭패였다. 괜찮겠지, 라고 생각했던 이유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교수님도 난감한 얼굴이었다.

“어제도 왔어?”

“네. 처음 찍은 다음 날 사진이요.”

“대체 집 호수는 어떻게 안 거야…… 아무튼, 집에 있는 건 좀 위험하겠다. 보호자랑 연락될 때까지 내 집에 와 있을래?”

“교수님 댁이요?”

나는 눈을 둥글게 떴다. 교수님은 내 집의 두 배 크기인 복층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병원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몇 번인가 놀러 간 적도 있어서 익숙하지만 선뜻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강주경의 제안에 대답을 머뭇거린 것과는 이유가 조금 달랐다. 그때는 끄덕이고 싶은데 미안해서였고, 지금은 단순히 내가 불편해서다. 아무리 넓고 생활공간이 나뉜다 해도 나는 집 밖에서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좋고 싫고를 따질 처지인가? 교수님 집이 아니라 병원 숙직실에서 자야 한다고 해도 당장은 집을 비워 두는 게 나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교수님 집은 넓고, 거실에서 한강이 보이고, 가사도우미가 매일 와서 집안일을 다 해 주고…… 헉, 생각해 보니 엄청나게 안락한 생활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늘 저녁에 바로 올래? 너희 집에 들러서 짐 챙기고.”

“네.”

“끝나고 심리실로 갈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서 교수님의 퇴근은 7시쯤이니 서류 정리를 하며 기다려야겠다. 다시 한숨이 나왔다.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보호자와 빨리 연락이 닿기를 바라는 수밖에.

3층으로 내려온 나는 심리실 밖을 어슬렁거리는 거대한 곰을 보고 움찔했다. 어느새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은 강주경이 서 있었다.

“주경아.”

“……선생님.”

“무슨 일이야?”

“오늘 아침에 좀 불안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응?”

그렇게 티가 났나? 강주경은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운전만 한 것 같은데, 대체 언제 그걸 알아본 걸까. 어쩐지 아까 주차장에서 올라올 때 뭘 말하려다 마는 기색이더니.

“마침 잘 왔어. 이제 나 안 데려다줘도 될 것 같아.”

강주경이 눈을 아주 조금 크게 떴다.

“그게, 바로 해결될 줄 알았는데 좀 더 걸리지 않을까 해서…… 서 교수님 댁에서 며칠 지내기로 했거든.”

그리고 이 말에는 그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놀란 기색, 아니, 그보단 뜻밖이라는 기색? 어느 쪽도 아닌 것 같다. 나는 강주경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얼마 후 답을 알 수 있었다. 당혹.

당혹? 아니, 설마 그럴 리가. 강주경이 왜? 하지만 강주경은 내가 맞게 읽었다고 확인이라도 해 주듯 물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 댁에서 지내면 안 되나요?”

“……응?”

순간 ‘응? 나 없을 때? 그래도 괜찮아. 그 집이 편했구나?’ 같은 미친 소리를 떠들어 볼까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심한 또라이로 보일 것 같아서 멈췄다. 며칠 동안 자기 시간을 할애하며 나를 데려다주고, 내가 ‘이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자 당혹한다.

혹시…….

거기까지 생각하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주경은 남자다, 남자.

나는 스무 살 이후로 몇 번쯤 그런 것에 속았다.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으니 아무런 자각도 없이 기대의 싹을 던지다가 정작 ‘괜찮은 걸까?’하고 다가가기 시작하면 소름 끼쳐 하는 것.

꽤 많은 경우 상대가 이성이라면 사귀는 사이 외에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동성 간에는 아주 쉽게 해 버린다. 상대의 성별만 바꾸어 생각하면 누가 봐도 연애 거는 걸로 보이는 행동을. 아직 어리고 순진하던 시절의 한지원은 이런 오해 때문에 시련에 청승 떨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우리 집에서?”

강주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이 상황이 왜 벌어졌는지도,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잊고 가슴이 덜컹 뛰었다. 통 하나만 얹어 놓은 수레가 바닥의 커다란 자갈을 밟은 것처럼 요란하게. 나는 마음속에서 허둥거리며 팔을 뻗어 수레 위의 덜걱대는 통이 굴러가지 않게 붙잡아야 했다. 왜? 그게 지금 굴러가면 나는 이성의 끈을 놓고 새빨개진 얼굴로 배시시 웃을 것 같았으니까.

“그건…… 내가 너무 미안한데.”

“전 괜찮아요.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거기서 멈췄다. 예상하건대, 서 교수님 댁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하시다면 어쩌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멈춘 이유는 내가 ‘응, 사실 그게 더 편해.’라고 말할까 봐서. 어떡하지? 강주경, 너무 귀엽다.

“정말 괜찮아?”

“네.”

“사실 나도 그게 훨씬 편해…….”

강주경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동요를 감추고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아…… 헷갈린다. 하지만 헷갈릴 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최고였다. 나는 ‘얘가 왜 이럴까?’하는 기대를 멀리 걷어찼다.

“고마워. 으음…… 그래도 그냥 부탁하긴 미안한데. 혹시 필요한 거나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이야기해. 먹고 싶은 것도.”

자연스레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순간 긴장했다. 2억짜리 벤츠를 타고 다니는 강주경에게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라고 했다가 쟤 기준에선 아무것도 아닌데 내 기준에선 엄청난 품목이 나오면 어쩌지. 강주경은 내 말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럼…….”

“응.”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강주경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뜻밖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영화 보러 가실래요?”

“……영화?”

“네. 가 본 지 오래돼서요.”

영화라니…… 나도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갔던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했다. 유명한 외국 스파이 영화의 최신 시리즈가 개봉했을 때 갔던 것 같다. 아니, 당시의 최신 시리즈다. 얼마 전 그다음편이 상영되다가 지금은 거의 내려갔으니 내가 영화관에 갔던 건 거의 몇 년쯤 된 일이었다.

“그래. 나도 영화관에서 본 지 오래됐어. 이번 주 토요일?”

“네.”

“좋아. 보고 싶은 거 있어?”

“아니요, 아직 없어요.”

“그럼 같이 찾아보자.”

강주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그가 귀에 차고 있던 무전기에서 삐빅, 하는 소리가 났다.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응. 수고해. 저녁에 봐.”

그가 꾸벅 인사하고 돌아섰다. 귀 끝이 조금 빨갰다.

심리실로 들어와 교수님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영화관 앱까지 깔아서 요즘엔 무슨 영화를 상영하는지 보고 있는데 수련생들과 선배가 차례로 출근했다. 출근 시간 사무실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모두 몽롱한 눈으로 목소리만 한껏 밝게 내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피곤한 얼굴의 선배가 탕비실로 빨려 들어갔다가 곧 진한 커피를 들고 나왔다.

“한 선생, 그건 어떻게 됐어?”

“아.”

나는 선배 쪽으로 돌아앉았다.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수련생들 앞에서 크게 떠들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집에도 택배가 와서요.”

“뭐? 주소를 어떻게 알았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보호자하고 연락도 안 되고.”

선배의 표정도 꽤 심각해졌다.

“좀 위험한데.”

정신과 병원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은 대부분 겪어 보았을 일이다. 선배 역시 비슷한 일이 있었고, 한동안 선배의 동생들이 출퇴근길을 같이 다녔다.

“내 동생 빌려줄까?”

“선배 동생들 바쁘잖아요…….”

서호 선배는 동생이 둘 있다. 쌍둥이, 그리고 일곱 살 터울. 쌍둥이 남동생은 선배와 체격이 비슷하지만 일곱 살 어린 쪽은 같은 유전자인가 싶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꽤 유명한 야구선수여서 선배를 데려다줄 때 상당히 화제가 되었었다. 둘 다 선배와 비슷한 정도로 바쁘다.

그때 일은 동생이 선배에게 접근하는 환자를 붙잡았고, 환자의 가족들이 다른 병원에 입원시키면서 끝났다.

“동생분들은 잘 지내요?”

“똑같지. 하나는 일하느라 바쁘고 하나는 연애하느라 바빠. 근데 정말 괜찮겠어?”

“으음, 네. 사실…… 주경이가 오늘부터 집에 와서 지내기로 했어요.”

“그래?”

선배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는 얼굴이었다. 강주경의 차를 같이 타고 다니게 되었다는 말에도 꽤 놀랐는데 아예 집에 들어와 지내기로 했다니 더더욱 놀란 기색이었다.

“뭐, 그래도 잘됐다. 걱정했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 말 나온 김에 선배. 추천하는 영화 있어요?”

“영화? 갑자기?”

“주경이가 토요일에 보러 가자고 해서요.”

내 말에 선배가 잠시 묘한 표정을 했다. 영화 보러 간다는 말이 이상한가?

“선배?”

“응? 아냐, 아무것도. 영화 요새 재미있는 거 많아. 메신저로 보내 줄게.”

“네.”

자리로 돌아간 선배가 요즘 상영하는 영화 몇 편을 보내 주었다. 장르가 다양했다. 공포, 스릴러, 액션, 로맨스, 애니메이션까지. 줄거리를 보면 다 그럭저럭 재미있을 것 같다. 강주경에게 목록을 그대로 보내 주고 일어나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는 세 시간을 조금 넘기고 끝났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다행히 오후 스케줄을 생각하면 뭐라도 위장에 넣을 시간은 있을 것 같았다. 샌드위치를 사러 카페로 내려가면서 메신저를 확인하자 주경에게서 답장이 돌아와 있었다.

[선생님은 뭐가 좋으세요?]

흠, 사실 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선배와 나는 취향이 꽤 비슷해서, 선배가 재미있게 본 건 나도 재미있을 테니까. 그래서 선택권은 넘겨주기로 했다.

[나는 다. 네가 골라 봐.]

그렇게 보내자 5분쯤 후에 답이 왔다. 왠지 모를 고정관념으로 액션을 좋아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가 고른 건 애니메이션이었다. 제목은 둥근 괴물, 포스터는 흰 바탕에 부드러운 곡선 하나가 그려진 게 전부였다. 유명 소설가의 소설이 원작이었다.

‘신기하네.’

생각보다 평온한 취향인가. 막 작고 귀여운 동물을 좋아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강주경이 토끼나 고양이를 소중하게 품에 안은 모습을 상상했다가 그만 손에서 카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음을 다스리고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서 올라가는 길에 또 강주경과 마주쳤다. 예전에도 이렇게 자주 마주쳤나? 하긴, 예전엔 마주쳐도 그냥 슥 지나쳤을 테니. 나를 발견한 강주경이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샌드위치에 시선을 주었다.

“식사 못 하셨어요?”

“검사가 조금 길어져서. 그런데 주경아.”

“네.”

“귀여운 거 좋아해?”

“…….”

“아니, 애니메이션을 골랐길래. 조금 찾아봤더니 귀엽던데?”

강주경이 고개를 약간 모로 기울였다.

“사실 그건 내용 때문에 고른 거예요. 예전에 책으로 본 거라서.”

“그렇더라. 책이 원작이라는 거 봤어. 아, 가야겠다.”

이야기가 길어질 뻔했지만 습관처럼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 정신이 들었다. 한 시부터 다른 일이 있으니 서둘러 먹으면서 준비해야 했다.

“저녁에 봐.”

“선생님.”

“응?”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 순간 병원의 소음이 뚝 끊겼다. 길을 묻거나 가족들과 이야기하거나 자기 증상에 대해 설명하는 모든 소리가 공백이 되었다. 바쁘게 오가는 환자, 보호자, 의사와 간호사와 다른 직원들, 전부 불분명해지고 강주경이 덜렁 남았다.

“……응?”

“귀여운 거요.”

“…….”

“전에는 몰랐어요.”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쉬는 것처럼 주변이 돌아왔다. 강주경은 나와 마주쳤을 때와 썩 다르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진짜, 한지원. 정신 좀 차리자.

“나 갈게. 저녁에 봐.”

후다닥 심리실로 돌아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샌드위치가 무슨 맛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 * *

다행히 일이 바빴기에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강주경을 현관 앞에서 배웅하지 않게 된 건 좀 이상했지만, 손님방을 쓰게 된 그는 여전히 있는 것도 잠깐씩 잊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대로 토요일까지 이틀은 평온했다. 아침저녁으로 택배가 도착했지만 스토커는 여전히 그것 말고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병원 밖에서는 대부분 강주경과 함께 있었기에 그날 주차장에서처럼 갑자기 덮쳐드는 일도 없었다.

토요일의 영화관은 소란스러웠다. 카페와 매점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고 무인 발권기의 커다란 화면에서 광고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상영관으로 통하는 통로 위쪽의 전광판에서 몇 관의 무슨 영화가 입장을 시작한다는 메시지가 깜박거렸다. 이렇게 북적거리는 곳이었나?

영화관에 잘 오지도 않지만,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평일 심야였기 때문에 어렴풋이 황량한 이미지가 남아 있었는데 오늘 티켓 부스가 있는 층에 올라오자마자 그것이 날아갔다.

발권기에서 티켓을 찾아 돌아서자 팝콘 냄새가 풍겼다. 사람들이 매점 앞에 옹기종기 모여서 팝콘이며 나초, 콜라 같은 걸 주문하고 있었다.

“주경아, 혹시 팝콘 좋아해?”

좋아한다면 사 들고 올 생각으로 묻자 강주경이 아주 짧게 눈을 깜빡였다. 어라.

“선생님 드실 거면…….”

나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참았다. 지금까지 이것도 좋아요, 저것도 좋아요 한 게 다 진심이었구나. 호불호가 딱히 없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방금 팝콘 소리에 순간이나마 별로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지나갔다.

“하하, 다행이다. 사실 난 싫어하거든. 커피는?”

“그건 좋아요.”

이번엔 조금 전 같은 표정이 아니었다. 팝콘 말고 또 싫어하는 건 뭘까. 궁금해졌다.

커피 한 잔씩을 사 들고 상영관으로 들어가자 로비와 달리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개봉하고 날짜가 꽤 지났고, 아무래도 블록버스터 종류보다는 사람들이 덜 보는 장르여서 그런 것 같았다. 아직 상영하고 있는 영화관이 많지 않아서 집에서 조금 떨어진 종합 쇼핑몰까지 찾아와야 했다.

긴 광고가 지나가고 영화가 시작되었다. 투자사와 배급사, 영화사의 로고가 차례로 지나가고 검은 화면이 차츰 밝아지면서 포스터의 그 흰 배경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어졌다. 곡선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조금씩 흔들렸다.

사람이 찾지 않는 넓은 들판에 둥근 괴물이 있었다. 그는 가만히 누워 구름이 흐르는 것만을 보며 살았다. 그러다 길을 잃어 들판까지 온 아이와 친해지게 된다. 아이가 사람들이 그를 ‘둥근 괴물’이라 부른다고 알려 주자 그는 기뻐했다.

-둥근 괴물. 나도 이름이 있구나.

-하지만 다들 널 괴물이라고 하는걸.

-나는 괴물이 뭔지 몰라. 하지만 내게도 이름이 있어서 좋아.

아이는 괴물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친구가 되어 매일 들판으로 찾아온다.

-우리 같이 여기서 나가지 않을래? 마을은 즐거워. 사람도 많아. 다들 너를 좋아할 거야.

-미안해.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왜?

-나는 여기에서 살아야 한대. 여기서 나가면 물이 되어 버린다고 했어.

언제 들은 말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는 그게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아이는 그의 말에 무척 아쉬워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아이는 해가 떠오르고 얼마 후에는 꼭 들판에 찾아왔지만 어느 날, 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데도 아이가 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그는 코를 킁킁거리다가 멀리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걸 느낀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의 위를 지나가던 새가 알려 주었다. 여기서 가까운 사람들의 마을에 불이 났다고. 그는 불을 본 적이 없지만, 물이 닿으면 꺼진다는 것은 알았다.

-나는 여기서 나가면 녹아 버려. 녹아서 물이 돼.

그렇게 말한 그는 몸을 일으켰다. 들판을 나가 마을로 다가갈수록 그의 몸은 조금씩 녹아서 물이 되었고, 불길에 휩싸인 마을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불은 꺼졌지만, 마을의 낮은 곳으로 흘러가 작은 강이 된 물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이 흘러오면서 목숨을 건진 사람 중에는 들판에 찾아오던 아이도 있었다.

-저건 둥근 괴물이에요.

어른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느새 강의 이름은 둥근 괴물이 되었다. 깨끗한 물이 흐르고, 얕고, 물살도 잔잔한 강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지만 모두가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흘러가는 구름이 강물 위에 비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났다.

한 시간이 조금 안 되는 짧은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한 것과 달리 꽤 재미있었다. 원작자가 나도 이름을 아는 공포소설가였지만 무서운 내용도 아니었다.

엔딩 크레딧이 거의 다 올라갔을 때쯤, 강주경도 재미있게 봤나 싶어서 옆을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눈가가 조금 글썽거리고 있었다. 화면의 하얀빛이 조명의 전부여서 혹시 잘못 본 건가 하고 잠시 더 바라보았으나 역시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주경아, 울었어?”

나는 작은 소리로 물으며 나도 모르게 강주경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내 손에 그가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고, 상영관이 확 밝아졌다. 난 손을 멈춘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굳었다.

멍하니 나를 보던 무뚝뚝한 얼굴이 눈가부터 시작해 조금씩 달아오르더니 한순간 단숨에 새빨개졌다. 나는 뜨거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손을 확 거뒀다. 뜨거운 것이긴 했다. 붉어진 얼굴은 동시에 뜨끈뜨끈해지기도 했으니.

“미, 미안. 놀랐어?”

“……아니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일어나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출구에 와서 선 직원이 좌석 쪽을 힐끗거리는 바람에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고 내가 앞서서 계단을 내려왔다. 뒤에 느껴지는 커다란 기척이 말할 수 없이 어색했다.

밖에서 식사까지 하고 들어올 예정이었지만 묘해진 분위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차피 가까이 있는 건 똑같아도 최소한 집은 강주경과 내 공간이 나뉘어 있으니까, 난 침실이든 서재든 처박혀 오늘 일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강주경은 원래 무뚝뚝했기에 내가 입을 다물자 대화는 거의 없어졌다. 둘 사이에 말이 오가기 시작한 건 집에 도착해서였다. 정확히는 현관 바깥. 문 앞 복도에 놓인 상자를 본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크기의 상자였다.

현관까지 택배가 오도록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그게 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무인 택배함을 사용하면 꼬리가 밟힐 수 있으니, 아예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생님?”

강주경이 옆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최대한 태연해 보이기를 바라며 상자를 집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것 같은데요.”

태연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강주경의 시선이 상자에 못 박혀 있었다. 눈치도 빠르지…….

결국 나는 강주경에게 며칠 동안 있었던 일을 실토했다. 아침저녁으로 데려다주고, 집에 있어 주기까지 하는데 그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순 없었다. 사진을 찍어 보냈다는 사실에 강주경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강주경과 거리가 가까워지고 며칠 만에 처음 보는 큰 표정 변화였다.

“그거.”

“응?”

“주세요.”

강주경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상자를 말하는 듯했다. 덩치며 표정에서 오는 위압감 때문에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손 위에 상자를 올려놓고 있었다. 강주경이 들자 상자는 엄청나게 작아 보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테이프를 뜯고 그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냈다. 역시나 사진이었다.

카드는 없었지만 사진은 평소와 비슷했다. 내가 지하 주차장에서 강주경과 같이 있는 모습이었다. 김진석은 차에 타고 내리는 모습만 사진으로 찍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사진을 본 강주경의 표정이 대번에 굳어졌다. 생각해 보니 사진에는 그도 찍혀 있다. 초점이 내게 맞춰져 있어서 배경처럼 나오긴 했어도, 강주경 역시 기분 나쁠 일이 아닐까. 진작 말했어야 했나? 난감해하고 있는데 이내 그가 사진을 다시 상자에 넣더니 송장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선생님, 이거 택배사 통해서 발송한 게 아니에요.”

“응?”

“보세요. 그냥 운송장만 붙인 거예요.”

그는 한눈에 그 사실을 알아보았다. 병원으로 오는 건 택배 회사를 통하지만, 택배함에 들어가 있던 것과 이것은 스토커가 직접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호수를 알아내고, 이젠 집 앞까지도 온다는 게 중요하지.

강주경의 표정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딱딱해졌다. 일단 뭐라고 수습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그의 손에서 상자를 찾아오려 하면서 말했다.

“그렇게 큰 문제 아니야. 서 교수님 담당 환자였고, 어떤 사람인지 알아. 예전에도 비슷한 행동 했었어. 그렇게 위험한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강주경은 팔을 위로 올려서 간단하게 내 행동을 막았다.

“집 주소까지 아는 사람이 이런 걸 두고 갔는데, 위험하지 않다고요? 며칠 전에 말씀하셨죠. 생각한 것보다 길어질 것 같다고. 그래서 교수님 댁에 가 있으려고 하셨잖아요.”

그는 어느새 내게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며칠 동안 가까이서 보며 익숙해진 얼굴이 아니라 내가 원래 알던 보안팀 강주경의 얼굴. 험악하고 무서운 표정.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 희망 사항일 뿐이다.

“몇 번째예요?”

“뭐?”

“며칠이나 받으신 거예요.”

“…….”

며칠이더라. 수요일 아침에 하나, 그날 저녁에 또 하나.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오늘. 강주경의 표정을 따라가듯 내 얼굴도 찌푸려졌다. 닷새라고 대답하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누구인지 알고 계시다고 했잖아요.”

“그야…… 일단 들어가자.”

“선생님.”

강주경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했다. 결국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환자의 개인정보랑 관련이 있으니까.”

이 일은 환자의 병증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내가 그 사람의 병명, 이름과 주소, 본인과 보호자의 전화번호까지 전부 알고 있다고 해도, 그걸 환자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강주경에게 말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판단이 역시 안이했나? 최소한 이런 사진을 받았다는 사실 정도는 미리 이야기해야 했을까? 사실 강주경이라면 환자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캐묻진 않았을 텐데. 고민으로 다음 말을 머뭇거리고 있는데 차츰 강주경의 표정이 풀어졌다.

“……죄송합니다.”

“…….”

사과가 이어질 줄은 몰랐기에 나는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렸다. 돌려줄 마음은 없어 보였지만. 아무래도 그는 그 상자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가 참견이 지나쳤어요.”

“……아니야.”

이번엔 내가 한숨을 쉴 차례였다. 나는 상자에 한 번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강주경을 보았다.

“말했다시피, 누가 한 일인지 짐작하고 있어. 심각한 환자가 아니어서 보호자하고 연락만 되면 금방 해결될 거고. 생각해 보면 네가 이렇게까지 해 주고 있는데 미리 말해야 했던 것 같아.”

솔직하게 사과하자 강주경은 오히려 놀란 얼굴을 했다. 사과를 들으려고 한 말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아니에요.”

목소리에도 허둥거림이 묻어 있었다.

“미안해.”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그냥.”

상자를 쥔 강주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첫날도 그랬고, 선생님이 걱정돼서.”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강주경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돼서라니, 그 말에 괜히 가슴이 간질거렸다. 짧은 침묵 뒤 먼저 입을 연 건 강주경이었다.

“생각하는 그 사람이 맞는 건 확실해요?”

“행동이 일치하거든. 맞을 거야. 이번에는…… 아직 치료를 안 받아서 조금 과해진 것 같고. 아까도 말했지만 아주 위험한 병은 아니야.”

“…….”

또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조금 비켜섰다. 들어가라고 말하듯이. 강주경이 열린 문을 잠시 보다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 잠기는 소리가 난 후 그는 나를 잠시 현관에 세워 두고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닫힌 방과 다용도실까지 살피고 돌아온 그의 표정은 평소와 같이 무뚝뚝했다.

집에 오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새로운 어색함이 덧씌워졌다. 뻣뻣한 분위기 속에서 저녁을 먹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어색해질 일이 아닌 것 같은데. 강주경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도 나는 복잡했다. 며칠 전 걷어찬 마음이 서너 배쯤 되는 크기로 불어나 다시 돌아와 있었다. 으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나마 지금까지 나를 착각하게 했던 건 내 실생활과 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스터디나 학원이나, 뭐 그런 슥 떠나 버리면 그만인 교집합. 하지만 강주경은 다르지 않은가? 같은 직장에 좁은 업계. 헛발질이었다고 반성하며 끝내기엔 위험도가 너무 높았다.

고민을 너무 했더니 목이 타는 것 같다. 슬슬 거실로 나가자 역시 강주경은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주방 불을 켜지 않고 거실의 간접조명 빛에만 의지해 정수기로 다가갔다.

손이 미끄러지지만 않았어도 찬물을 마시고 평온을 되찾은 뒤 방에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와장창하고 요란한 소리가 어둑어둑한 거실을 뒤집었다. 손에서 컵을 놓친 순간 당황했고 잡을 틈도 없이 도자기로 된 컵은 딱딱한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소리와 이리저리 튀는 파편에 놀라 내가 잠시 굳어진 사이 손님방 문이 벌컥 열리고 강주경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아, 미안…… 컵을 좀 깨서.”

“가만히 계세요.”

깨진 조각이 없는 곳을 가늠해 뻗으려던 발이 멈췄다. 강주경이 주방으로 다가와 큰 파편을 손으로 치우고, 구석구석까지 청소기를 돌렸다. 그가 청소기를 제자리에 두고 올 때까지 나는 정수기 앞에 못이 박힌 것처럼 서 있었다.

“손은 안 다치셨어요?”

강주경이 멍하니 있는 내 손을 끌고 갔다. 다친 곳은 없었다. 그냥 내 앞에서 파편을 주우며 움직이던 커다란 몸이 잔상처럼 아른거릴 뿐이다. 그는 내 손바닥을 크게 펼쳐 혹시 작은 조각이 들어가진 않았는지 살폈다. 손바닥과 손가락, 손목까지 세세히. 강주경의 단단한 손가락이 내 손을 꾹 누른 순간, 작은 마찰로 질감이 단순에 변하는 물질처럼 둘 사이의 공기가 일변했다.

둘 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가 먼저 봤을까. 어느 순간 시선이 똑바로 맞닿아 있었다. 강주경의 얼굴에 무뚝뚝함 대신 동요가 덮였다. 긴장이 삽시간에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주위를 꽉 채우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거울 같았다. 동시에 내 얼굴도 새빨개졌으니까.

“어…….”

멍한 소리를 낸 나는 강주경의 입이 열리기 전에 손을 홱 뿌리치고 도망치듯 침실로 들어왔다. 문이 부서져라 세게 닫아 버리고 침대로 뛰어들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심장이 마구 쳐 대는 북처럼 시끄럽게 쿵쿵거렸다.

도저히 모를 수 없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없는 긴장이 아직도 피부를 휘감고 있었다. 그 짧은 한 순간이 의기양양한 태도로 내 고민에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더는 신중함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는 열이 가라앉지 않는 얼굴을 베개에 짓누르며 끙끙거렸다. 한참 후에야 손님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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