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15)

13.

똑. 똑.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져 내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수현은 넋을 놓은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그의 곁으로 태주가 다가와서는 제 손에 들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이제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수현을 위해 태주는 여관 주인에게 말하여 생강차를 내어 왔다. 마침 날씨도 춥고, 입덧에 좋은 차라 하여 그리한 것이었다. 태주에게 차를 받아 들고 수현은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싸늘한 날씨에 비까지 와 잔뜩 얼어 있던 몸이 따끈한 차 한 잔에 녹아들었다.

태화의 황궁이 불타오르던 날, 수현은 태주와 함께 말을 타고 사정없이 내달렸다. 그들은 성벽을 지나쳐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어둠이 걷히고 동이 터 올 때까지 수현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태주의 품에서 한없이 눈물을 쏟아 내기만 했다.

우는 것조차 지쳤는지 수현이 잠잠해졌을 무렵, 태주가 달리던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멈춘 곳에서 뒤돌아보니 태화의 황궁이 먼 곳에서 까마득하게 보였다. 그새 꽤 많이 달려온 것이었다.

그렇게 불씨를 나르며 세찬 바람이 불어오더니, 이제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비가 내릴 것 같았다. 태주는 이미 수현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회임한 마마가 비를 맞게 할 순 없었다. 그리하여 근처 여관을 마마와 함께 찾게 된 것이었다.

“마마. 속은 좀 어떠신지요, 이제 좀 나아지셨습니까.”

차를 조심스럽게 넘기는 수현을 태주는 빤히 바라보았다.

일어나자마자 빈속에 괴로워하며 헛구역질을 올리던 수현은 죽을 몇 모금 먹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많이 먹지 못했다. 거의 다 남겨야 했다.

아마도 회임한 이후, 씨를 심은 양인의 체향을 맡지 못했기에 이리 괴로워하는 것일 터였다.

그리 생각하니 태주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마마의 배 속에 든 씨가…… 그의 것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마마께서 회임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네.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현은 태주의 배려가 한없이 고맙게 느껴졌다. 성치 않은 몸인데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먼 길을 동행하는 그가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저 때문에 굳이 이 고생을 하게 된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아마 원하는 곳까지 당도하려면 십수 일은 더 걸릴 것이 옵니다. 그때까지만 불편하셔도 참아 주십시오. 최대한 마마의 몸이 편할 수 있도록 쉬면서 가겠습니다.”

그런 수현의 마음과 달리 태주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했다. 더 이상 그 지옥 같은 곳에 마마를 혼자 두지 않아도 되었기에, 마마와 함께 있을 수 있었기에.

이제 그는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도 마마와 얘길 나누고 함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으니…… 원래 하시던 대로 하시지요.”

“마마의 안위가 우선입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언정 그렇게 하시지요.”

한껏 웃으며 하는 말에 수현은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저 손끝에 퍼져 나가는 온기를 느끼며 찻잔을 꼭 쥐었을 뿐.

빗방울은 점점 잦아들고 어둡던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잔뜩 모여 있던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태양 앞에서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들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고즈넉한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분명, 그리해야만 정상일 텐데. 어쩐지 그것들을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질 줄을 몰랐다. 점점 더 어두워져만 가는 것이었다.

그런 수현의 모습이 태주는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그토록 그리던 이들의 곁으로 가실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지긋지긋하던 궐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셨는데. 어찌하여 마마의 얼굴이 이토록 어두운 것일까.

“마마. 무슨 걱정이 있으시옵니까.”

태주의 물음에 수현이 살짝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밝게 갠 하늘 아래, 촉촉하게 젖은 마당을 주시했다.

“마마. 괜찮습니다.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지금 마마께서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고 계시는지.”

다정하게 물어 오는 말에 수현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마마. 말씀해 주시지요.”

수현이 천천히 태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를 직시하는 따뜻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한없이 목구멍에서만 맴도는 말을 꺼내기 위해 수현은 많은 시간을 들였다.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처럼, 묵묵히 저의 얘기를 기다리는 태주를 위해 기어이 입술을 열었다.

“나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을 말입니까.”

태주가 더욱 바짝 수현에게 다가섰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특유의 미소로 수현의 마음을 다독였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수현이 제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점점 식어 가는 찻잔을 손으로 지분거리다 겨우 입술을 풀었다.

“태화의 황제가…… 나를 위해 불구덩이에 뛰어들었습니다.”

일순, 태주의 미간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에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왜 나를 살리고자 스스로 불 속에 갇히기를 자초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태주는 그날을 떠올렸다. 검은 연기를 보고 급하게 궐로 달려가 영화궁을 찾았던 그 순간을.

이미 영화궁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불에 타고 있었다. 혹여나 소중한 그분을 잃게 되었을까 태주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마마는 건물 밖에 피신해 있었고, 태주는 곧장 마마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울고불고 소리치는 마마를 말에 태워 궐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렇게 정신이 없는 마마를 데리고 활활 타오르는 궐에서 멀리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 영화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마…… 그 말씀은…….”

“저 때문에…… 저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불 속에서…… 불 속에서…….”

“마마!”

울먹이는 수현을 태주가 끌어안았다. 흐느끼며 정신없이 흔들리는 어깨가 태주의 넓은 가슴속에 파묻혔다. 태주의 품 안에서도 수현은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눈물을 떨구어 냈다. 태주의 옷깃이 점점 젖어 들고. 뜨겁게 달아오른 수현의 숨결이 번져 나갔다.

“어째서…… 어째서……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마마.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마마 때문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나 때문이에요…… 내 목숨을 살리자고…… 나 대신…… 나 대신…… 그곳으로 뛰어든 겁니다. 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태주가 흐느끼는 수현을 제품에서 떼어 냈다. 그러곤 으스러질 듯 여린 양어깨를 그러잡았다.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 내는 수현의 얼굴로 제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숨결이 닿을 듯한 위치에서 그가 힘주어 말했다.

“소인이었어도…… 소인이었다 하더라도 그리했을 것입니다.”

“공자…… 님…….”

“아니. 비단 소인이 아니었더라도! 그 누구였더라도 마마를 구하기 위해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

“마마는 그런 분이시니까요…….”

목숨을 바쳐서라도 반드시 살리고 싶은.

“그런 분이시니까요…….”

태주의 말에도 수현은 그저 눈물만 흘려 댈 뿐이었다. 가뜩이나 애처로운 얼굴이 눈물에 젖어 더욱 안쓰럽게만 보였다.

너무도 안쓰러워서…… 태주는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에 제 손을 가져갔다. 뜨겁게 달아오른 볼로 그가 손을 얹었다. 촉촉이 젖은 부드러운 볼살을 그가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

화들짝 놀란 수현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갈 곳을 잃은 손이 무안하게 공중에 떠 버렸다. 태주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아래로 늘어뜨린 손이 빈주먹을 그러쥐며 살짝 떨리었다.

“송구하옵니다.”

곧 태주가 사과하자 수현이 고개를 추어올렸다. 아니란 듯 고개를 내젓는 수현을 보며 태주가 살포시 웃어 보였다.

“마마. 힘드시겠지만. 심려치 마시옵소서. 지금은 마마의 몸을 챙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한시바삐 몸을 챙기시어 마마를 기다리는 백성들의 품으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자님…….”

“그리고 어쩌면.”

여기까지 말하던 태주는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직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기에.

“아닙니다…….”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도 모르게 덩달아 일어나며 수현이 눈물을 훔쳤다. 쉬지 않고 눈물을 쏟아 낸 눈가가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내일 다시 길을 떠날 것입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하루 머물 터이니, 편안히 쉬십시오.”

수현을 향해 예를 갖춘 태주가 자리에서 물러났다.

자리를 떠난 태주는 곧장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그가 다짜고짜 벽을 내리쳤다. 쾅 하는 마찰음이 고요했던 허공을 울렸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곧장 입술을 깨물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어지럽게 얽힌 머릿속을 헤집어 보았다.

명휘가…… 명휘가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것도 마마를 불구덩이에서 구하기 위해서.

온갖 복잡한 심경이 그의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 왔던 붕우를 잃었을지도 모른다는 슬픔과 어쩌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묘하게 뒤엉켰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서도 그를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진심이었다. 그조차도 바로 알아챌 수 없었던 명휘의 진심.

그는 명휘의 곁에 있는 마마가 너무도 가여웠다. 명휘의 손아귀에서 시들어 가는 마마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마에게 자유를 찾아 주고자 했다. 마마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의 잃어버린 백성 품으로 데려다 주려 했다.

하지만…… 명휘가 마마를 위해 불구덩이까지 뛰어들었을 줄은 몰랐다. 제 목숨이 위험해질 것을 알면서도 마마를 위해 기어이 뛰어든 것이다. 마마의 말대로 그렇게 괴롭혔으면서. 그렇게 마마를 괴롭게 만들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왜…….

“명휘……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깊은 한숨이 두꺼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수려한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진정…… 너는 마마를…… 연모하고 있었던 거냐…….”

너조차도 네 마음을 몰랐던 채로.

그렇게 내뱉지 못한 마지막 말이 목구멍 너머로 쓰게 넘어갔다.

붉은빛이 도는 털에 토끼처럼 빠른 속도를 가져 적토마(赤兎馬)라 이름 붙여진 커다란 말이 두 남자를 태운 채로 달리고 있었다.

이윽고 고삐를 쥔 자가 긴 줄을 잡아당겼다. 워, 워. 능숙한 몸짓에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자리에 멈춰 섰다.

“…….”

주변을 둘러보다, 제 생각이 틀리지 않음을 확신한 태주는 다급히 제 앞에 앉은 수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달리는 동안 언제 잠이 들었는지 수현은 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마마.”

혹여나 잠든 수현이 놀랄까, 태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마마.”

미동조차 없는 수현에 다시 한번 더 목소리를 내었다. 길게 속눈썹을 늘어뜨린 눈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수현이 일어날 때까지 태주는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런 그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게 수현이 곧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저가 태주의 품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수현이 놀라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미안합니다…….”

수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잠이 많이 쏟아지시겠죠. 그럴 시기니까요.”

태주는 차마 제 입으로 회임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못했다. 그 단어를 담을 때마다 제 심장이 쿡쿡 쑤시는 것만 같았으므로.

“마마. 주변을 한번 둘러보시겠사옵니까.”

태주의 상냥한 목소리에 수현은 별안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앞에 광활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저만치 멀리 자리한 거대한 도시를 보며, 수현의 목소리가 한껏 떨리었다.

“예. 맞습니다.”

“…….”

“성해의 옛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아…… 수현이 길게 탄식을 뱉었다. 그의 마음이 깊은 감동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벅차올랐다. 눈물이 쏟아지려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그가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이제 백성들의 품으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마마.”

“…….”

“먼 길 오시느라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태주가 수현을 보며 한껏 웃어 보였다. 수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이윽고 태주가 적토마의 배를 발로 찼다. 이랴, 우렁찬 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십 리를 채 가지 않아 두 사람은 옛 성해 터의 중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주는 도시의 중심부에서도 한참을 더 가 다소 외진 곳으로 향했다. 도시를 벗어나니 길이 험했다. 비탈길을 따라 오를수록 제법 산세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산 정상에 부근까지 다다른 태주가 먼저 말에서 내려왔다. 여전히 수현을 말에 태운 채로 고삐를 잡은 그가 앞장서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구냐!”

불현듯 험상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뜨면서도 똑바로 앞을 주시했다. 무시무시한 칼을 허리춤에 찬 덩치 큰 사내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산을 쩌렁쩌렁 울리는 호통과 함께, 다른 사내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덩치가 산만 했고 칼로 무장하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생김새가 보는 이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하였다. 

수현은 당혹스러워 그저 입술만 짓씹고 있는데, 꽤 여유로운 목소리로 태주가 그들의 앞에 나섰다.

“저는 기태주라고 합니다.”

“기태주? 태화 대상단 기씨 가문의 장남이 아니더냐?”

“네. 그렇습니다.”

“한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단 말이냐?”

“성해의 왕손, 수현 왕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일순, 사내들의 시선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의심의 눈초리를 수현에게로 향했다.

수현은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 수현 왕자님이라면. 태화의 후궁이 되었다 하지 않았는가?”

“아무렴. 분명 태화 황제의 씨를 품어 황후가 된다 하였거늘.”

“그런데 그분이 이곳을 찾아오셨다고?”

아무도 얼굴을 아는 이가 없으니, 진짜 수현을 앞에 두고도 누구 하나 반기지 않았다. 

태주는 무리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마는 어렸을 때 나라가 침략을 당하여 가족과 생이별하셨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네놈의 말을 우리가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이냐?”

그들 중 한 명이 태주에게 따지듯 물었다. 위협적인 목소리 나마, 태주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차분한, 누가 들어도 신뢰가 가는 목소리가 잔잔히 숲속을 울렸다.

“분명, 왕자님의 얼굴을 알아보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우선, 안으로 데려가 주시지요. 왕자님께선 오랜 시간 여행길에 꽤 지쳐 계십니다.”

태주의 태도를 보아,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나, 그렇다고 해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기씨 가문이라면 황실과도 꽤 친한 가문이었기에. 함부로 들였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게 될지 모르는 터였다.

“이보시게.”

그때, 그들 중 한 명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근데 저 수현 왕자님이라 우기는 사람 말일세. 중전마마와 닮지 않았는가.”

그의 말에 사내들의 수군거림이 뚝 그쳤다. 그들 중 한 명이 수현에게 다가왔다. 우악스럽게 수현의 얼굴로 손을 내민 사내가 턱을 그러쥐었다. 

손아귀에 힘을 주어 추어올리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단번에 드러났다. 속눈썹을 늘어뜨린 눈이 불안함에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흠…….”

실로 그러했다. 하얗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살결도, 길고 곱상한 눈매도. 오똑한 코와 작고 도톰한 입술마저도 성해의 중전마마와 똑 닮은 것이었다.

“일단 안으로 데려가 보세. 안에 데려가 보면 저들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게 되겠지.”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말하자, 나머지 이들이 태주에게 다가왔다. 태주의 양팔을 뒤로 잡아끈 그들이 줄로 단단하게 묶어 포박하였다. 태주에게는 그리하였으나, 수현에게는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에서 내리게 하여 저의 의지대로 걷게 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눈을 가릴 것이다.”

입구까지 두 사람을 끌고 온 그들이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태주와 수현은 시야가 차단된 상태로 사내들에 이끌려 걸음을 옮겨 나갔다.

한참을 어둠 속에서 발걸음을 옮기니, 발아래 닫는 느낌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태주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흙길이 아닌 것으로 보아, 집안에 들어선 것이라고.

태주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새 그들의 요새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자리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읏!”

방 안에 멈춰 선 사내 중 한 명이 수현의 얼굴에 둘린 검은 천을 풀었다. 수현은 놀라 몸을 흠칫 떨다가,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몸을 펴고 주변을 둘러보니, 정면으로 발 너머에 몸을 숨긴 이가 보였다.

붉고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발 때문에 상대의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충 비치는 음영으로 남자가 아닌 여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의 신분을 판단해 줄 누군가 중 한 명일 거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거라!”

자리에 서서 굳어 버린 수현에게 사내가 호령했다. 수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떨구니, 다시 한번 불호령이 내려졌다.

“고개를 들라!”

수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 수현은 언뜻 제 콧속을 파고드는 달콤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향에 수현은 미치도록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 향은 분명…… 이 향기는 분명…… 어릴 적 오래도록 맡아 왔던…… 미치도록 그리워했던…….

“흐읍!”

일순, 발이 급하게 걷히며 그 안에 있던 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현 대군!”

다짜고짜 다가와 다급하게 끌어안는 이에 수현은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그러곤 곧 수현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이처럼, 수현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저를 끌어안은 이는. 저를 끌어안고 있는 이는. 바로…….

“어마마마…….”

어렸을 적 떠나보낸, 그의 엄마였다.

“수현 대군. 수현아…… 내 아가…… 아가…….”

“어마마마…….”

“수현아…… 수현아…….”

“어마마마…….”

수현은 믿을 수 없었다. 커다란 바위에 머리라도 찍힌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어마마마를 마주한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정신이 멍하기만 했다.

분명, 적들의 손에 목숨을 다하신 줄로만 알았다. 분명, 태화 황제의 손에 그렇게 가족 모두를 잃게 되었다고 그리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어찌하여…….

“수현아…… 내 아들. 우리 수현이…….”

넋이 나간 채로 눈물만 뚝, 뚝 흘려 대는 수현을 부여잡고 그의 엄마는 한없이 오열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훑으며 이제는 꽤 주름이 잡힌 얼굴이 계속해서 눈물에 젖어들었다.

“수현아…….”

한참 동안 넋이 나가 있던 수현은 별안간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곤 제 몸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간 흘러 버린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풍겨 오는 향기만큼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어릴 적, 품에 안겨 있으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던 엄마의 향기였다.

수현은 그제야 멍한 정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이제껏 살아오며 한 번도 잊지 않았던 향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제 앞에 자리한 엄마를 세게 끌어안았다.

“어마마마! 소자가, 소자가…… 못나서…… 어마마마가 여태 살아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이제껏 당연히 엄마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한 저 자신이 미웠다. 그리하여 통곡하며 울부짖는데, 오히려 그의 어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대군의 잘못이 아닙니다. 대군을 조금 더 빨리 찾아가지 못한 못난 어미의 잘못입니다.”

“아닙니다. 소자가 진작에 어마마마를 찾았어야 했습니다. 소자의 불효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닙니다…… 대군의 잘못이…… 그러니까…… 대군…… 대군…….”

두 사람은 다시금 뜨겁게 포옹했다. 꿈에서도 그리워했던 서로를 끌어안고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이고 목놓아 울었다. 

모자지간의 상봉에 주변에서 지켜보는 이들도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마마께서 얼마나 막내 왕자님을 그리워하는지 알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그런 그들 중 한 명이 태주에게 다가왔다. 수현의 신원이 드러난바, 더는 묶어 둘 수 없었던 터였다. 눈을 가렸던 검은색 천과 손을 포박한 끈을 그들이 풀어 주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태주는 성해의 중전마마를 향해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마마. 이자가 왕자님을 이곳까지 모시고 왔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아뢰니, 태주가 이어 입을 열었다.

“마마를 뵈옵니다. 기씨 가문의 장남, 태주라고 하옵니다.”

이제껏 수현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중전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향했다. 안고 있던 수현을 놓고, 그녀가 젖은 눈가를 수습하였다. 매화를 닮은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태주를 향해 한껏 웃어 보였다.

“참으로 훌륭한 향을 가진 공자님이시군요. 고맙습니다. 우리 수현이를 여기까지 데려와 줘서.”

매화 향기를 가득 품은 그 미소에 태주 또한 햇살 같은 미소로 화답하였다.

* * *

산속에 자리 잡은 이 요새는 생각보다 견고하고 규모가 컸다. 꽤 체계적으로 마을의 모습을 갖춘 요새를 둘러보며 수현은 엄마와 함께 발맞춰 걸어 나갔다.

“참으로 장성하셨습니다. 훌륭한 음인으로 발현하였군요.”

“어마마마.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자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아닙니다. 참으로 멋지게 크셨습니다. 이리 아름다운 색향도 풍기시고.”

옮기던 발걸음을 수현의 엄마가 멈추었다.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긋한 자정향이 한가득 풍겨 왔다.

“역시 자정향이였군요.”

그녀의 말에 수현은 그저 살포시 미소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릴 적 그때가 떠올랐다.

자신이 음인으로 발현하면 반드시 그 색향은 자정향을 닮았을 거라고 어마마마가 얘기해 주셨던 그때가.

“참으로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대군의 용모와도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어미의 칭찬에 수현이 살짝 얼굴을 붉히었다. 중전은 멈추었던 걸음걸이를 다시금 옮겼다. 그녀의 짧은 보폭에 맞춰 수현도 발걸음을 옮겼다.

“참.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회임했다고요.”

그녀의 말에 수현은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야만 했다. 원수의 아이를 가진 죄인이라서,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하드립니다, 대군.”

수현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마마마.”

“비록, 찾아갈 수 없는 몸이나마. 대군의 소식을 전해 듣고 이 어미는 참으로 기뻤답니다.”

“어째서…….”

“어째서라니요. 내 아들이 어느덧 성인이 되어 아이까지 가졌다 하니, 당연히 기쁠 수밖에요.”

그 말에 수현은 울컥 감정이 북받치는 것만 같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진정하며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러쥔 빈 주먹이 자꾸만 떨리었다.

“어마마마께선. 소자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원망이라니요.”

“소자의 배 속에 있는 씨가…… 누구의 것인지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

“국수의 아이를 가졌거늘…… 어찌 소자가 원망스럽지 않으시겠습니까.”

중전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 특유의 인자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여리디여린 손을 붙잡고, 그녀가 다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대군. 이 어미는 대군을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습니다.”

“하오나…….”

“그리고 대군의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국수라니요.”

“……예?”

“지금 태화의 황제를…… 이 어미는 국수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찌…… 그런…….”

“이 어미의 목숨을 살려 주신 분이신걸요.”

순간, 수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저가 혹여나 잘못 들은 것일까 싶어, 수현은 다급히 되물었다.

“어마마마. 그게 대체 무슨…… 태화의 황제가 어마마마의 목숨을 살려 주셨다니요!”

“아…… 대군은 모르고 있겠군요.”

“어마마마.”

아들의 손을 붙잡고 중전은 회상에 잠겼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아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마도 봄날이었죠. 자정향이 흐드러지던 그 날. 수현 대군을 내 손으로 떠나보내야 했지요.”

아들을 억지로 떠나보낸 중전은 바로 궁으로 향했다. 죽어도 궐 안에서 죽겠다는 의지 하나로 그리한 것이었다.

궐에 도착했을 때부터 그곳의 모습은 참으로 참담했다. 여기저기 불에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고, 그을린 냄새와 뒤섞인 비릿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중전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길을 헤치고 헤쳐 가족을 찾았다. 그녀가 죽기 전 궐을 찾았듯, 성해의 왕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죽어도, 왕좌에 앉아 죽음을 맞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성해의 왕 앞으로는 왕자와 공주들이 모여 벌벌 떨고 있었다.

오직 한 왕자, 수현을 제외한 모든 왕가의 식구들이 그곳에 모여 있었다.

‘여기다!’

곧 그곳으로 적들이 들이닥쳤다. 중전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숨 막히는 체향을 내뿜으며 들어서는 거만한 이가 보였다.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태화의 냉혹한 군주였던 것이었다.

‘성해의 왕은 어서 나와 대태화의 왕을 맞이하여라!’

갑옷으로 무장한 태화의 장군이 소리쳤다. 이에, 성해의 왕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얼굴을 굳힌 채로 왕좌를 지켰을 뿐.

‘무엄하다! 무엇 하는가! 어서 예를 갖추어라!’

쩌렁, 쩌렁. 태화 장군의 목소리가 왕궁을 울렸다. 그 끔찍한 소리에 어린 왕자와 공주들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살려 주시어요, 살려 주시어요. 그들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어서 예를 갖추라 하였거늘!’

‘그만두어라.’

태화의 왕이 장군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러곤 그가 직접 성해의 왕 앞으로 걸어갔다. 높은 단상까지 단번에 올라선 그가 다짜고짜 성해 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크윽, 성해 왕의 짧은 비명이 궐 안을 울리고, 태화의 왕은 단번에 거구의 사내를 왕좌로부터 끄집어 냈다.

‘아바마마!’

놀란 왕자와 공주들은 자지러지며 울부짖었다. 바닥에 놔 뒹구는 아비의 품에 달려들어 끌어안고 오열했다.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도 성해의 왕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태화의 왕을 노려보며 태도를 굽히지 않는 것이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 구걸할 생각 따윈 없겠지.’

그의 표정을 읽은 태화의 왕은 더는 지체할 것 없이 제 허리춤에 차고 있는 칼을 꺼내었다.

챙, 징그러운 소리와 함께 칼집에서 기다란 칼이 꺼내졌다. 달빛보다 더 시퍼런 칼을 들고 태화의 왕은 성해의 왕에게 다가섰다. 핏줄이 바짝 설 정도로 눈을 부라리며, 그대로 성해 왕의 목을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꺄악!’

‘아바마마!’

단 한 번의 칼부림으로 성해 왕의 목숨이 끊기었다. 제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아비의 모습을 보곤, 왕자들과 공주들은 실신할 듯 떨며 소리쳤다. 그들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제 아비의 피로 물든 칼을 든 군주를 향해 읍소하며 용서를 구했다.

‘태화의 왕이시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태화의 왕을 주군으로 모실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목숨만 부지하게 해 주시옵소서! 태화의 왕이시어!’

아비의 뜻을 따르지는 못할망정, 제 목숨 구걸에 급급한 그들을 보며, 성해의 국모는 그저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는 적의 칼 아래 목숨을 잃을지언정, 비굴한 모습을 보일 순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저물어 가는 왕국의 왕족일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있었기에.

‘짐을 군주로 모시겠다 하였느냐?’

울고불고 빌어 대는 아이들을 보며, 태화의 왕이 야비하게 물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태화의 왕이시어,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그래? 그리하면 짐이 자비를 베풀어 너희 중 하나만 살려 주겠다. 자, 누구를 살려 주는 게 마땅하겠느냐.’

잔인한 물음에 아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서로 저를 살려 달라며 아우성이었다. 서로 살겠다고 형제, 자매를 물어뜯는 그들의 모습에 태화의 왕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리 모자란 것들이 왕족이라고.

‘네놈들이 하는 꼴을 보아하니. 살려 줄 가치를 못 느끼겠도다.’

챙강. 그대로 태화의 왕이 날카로운 칼을 휘둘렀다. 잘 벼린 칼날이 아이들의 몸을 사정없이 베었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홍색 핏줄이 여기저기 흩뿌려졌다.

칼날 아래 쓰러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어미의 심장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앙다문 입술로 눈물만 뚝, 뚝 떨어뜨리는 왕비에게로 태화 왕의 시선이 꽂혔다.

먼저 떠난 남편처럼 목숨 구걸은커녕,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올린 그녀의 모습이 그에게는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

저자를 어찌 처리하면 능욕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녀를 바라보며 태화의 왕이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어린 제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새파랗게 질려서 죽은 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여리디여린 아들의 모습이.

‘남은 성해의 왕족은 네 손으로 처단하거라.’

부왕의 말에 떨고만 있던 소년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추어올렸다. 감히 누구의 명령이라 불복하겠냐마는, 그는 애써 입을 열어야만 했다.

‘아바마마. 소자가 아직 미천하여. 검을 다룸이 부족하오니…….’

‘듣기 싫다. 어서 칼을 꺼내거라.’

‘아바마마.’

‘듣기 싫다 하였느니라.’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륵, 징그러운 소릴 내며 칼집에서 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뚜벅뚜벅. 떨리는 발걸음으로 소년이 앞을 향했다.

눈물로 흠뻑 적신 채 저를 노려보는 여인을 향하여 칼을 내밀었다.

‘그냥 죽이시오.’

망설이는 듯한 소년을 보며 여인이 차갑게 말하였다. 죽음을 앞두고도 절대 꺾이지 않는 그녀의 기백에 소년은 더더욱 칼을 휘두를 수 없게 되었다.

소년이 이를 악물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조용한 말로 그녀에게 무엇인가 속삭였다.

‘어서! 무얼 하느냐!’

다시금 제 아비로부터 호통이 떨어졌을 때, 소년은 기어이 칼을 휘두르고야 말았다. 그대로 성해 왕비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그녀의 옷자락을 적시며 피가 흘러나왔다.

바닥에 고여 드는 피를 보며, 태화의 왕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렴. 내 자식인데. 이래야지.

‘가자.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을 테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부터 성해는 없다. 망국, 성해의 터전은 앞으로 태화의 국토가 될 것이다!’

‘태화 만세!’

만세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그런 그들을 지나쳐 태화의 왕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라, 소년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다 망가져 버린 성해의 궐을 떠나면서도, 소년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차마 내색하지 못한 채, 미망인의 안위를 속으로 빌며.

“그때, 소년이 나에게 무어라 속삭였는지 아십니까.”

긴 이야기 끝에 수현의 엄마가 아들을 향해 물었다.

“무어라 하였습니까.”

“내 칼 아래 죽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대로 쓰러져 있다, 사람들이 떠나면 바로 도망가십시오. 절대, 태화 군대의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수현의 두 눈이 일렁였다. 묵직한 돌에 짓눌린 듯, 가슴속이 답답해졌다.

“나는 진심으로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말을 듣는 순간. 왜인지 모르게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어마마마…….”

“그리고 훗날. 내 아들이 나를 살려 준 그 소년의 정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때야말로 깨닫게 되었죠. 비록, 원수의 아들일지언정. 그 소년이 정말…… 나와, 내 가족과 인연이 있었구나…….”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흐릿한 시야에 따뜻하게 미소 지어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결국, 담아내지 못한 눈물이 후드득 볼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서러워서, 수현은 진심으로 서러워서 목놓아 울었다.

그동안 저가 원수라 여기며 미워했던 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제 어미의 목숨을 살려 준 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토록 미워했던 게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마마마…… 소자는…… 소자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러한 줄도 모르고…….”

“대군.”

“소자가 어리석었습니다. 소자가 어리석었습니다…… 어마마마의 목숨을 구해 주신 분인데…… 그런 폐하인데…….”

또다시 소자를 위해 그분이 목숨을 내던지셨습니다. 이날 이때까지 그렇게 증오하며 미워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분이 소자를 위해 감히 목숨을 내던지셨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어찌하면…….”

진심으로 서글퍼 우는 수현을 그의 엄마가 포근히 안아 주었다.

따뜻한 엄마의 품속에서 수현은 그렇게 오래도록 목 놓아 울어야만 했다.

어느덧 날은 저물어 숲속 깊은 곳에 위치한 요새가 어둠 속에 파묻히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지는 요새처럼, 수현의 마음은 한없이 심연을 향해 가라앉고 있었다.

깊은 밤. 잠을 청하기가 어려워 수현은 숙소 바깥으로 나왔다. 

달빛은 포근히 내려 산세를 밝히고, 옅은 바람에 사부작사부작 나뭇잎이 흔들렸다. 먼 데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들을 바라보며 수현은 제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하염없이 밀려오는 아픔에 가슴 위에 놓인 손이 파르르 떨려 왔다. 깊은 한숨이 가슴에서부터 절로 새어 나왔다.

“왕자님. 밤이 깊었사옵니다.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수현이 황급히 손을 내렸다. 감정을 수습하며 애써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늘 같은 자리에서 저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양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바깥 공기를 쐬러 나왔습니다. 공자님께선 어찌 이곳에 오셨습니까.”

“달빛이 유난히 밝아 잠시 창 너머로 밖을 쳐다보려니, 왕자님의 모습이 보여 오게 되었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니지요. 왕자님 덕분에 이리 멋진 달빛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게지요.”

늘 배려해 주는 태주에 수현은 말없이 웃기만 하였다. 먼 곳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는 수현을 바라보며 태주 또한 같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첩첩산중이나마 한밤중의 달빛이 밝혀 주는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그가 조용히 물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어떤…….”

“중전마마께서 무사히 살아 계셔서요.”

“아…….”

“왕자님의 모친께서 살아 계시다니 이 얼마나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아니, 실로 그러합니다…….”

어쩐지 긴 여운을 남기는 수현의 말에 태주는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모친을 만나 분명 기쁘고 행복하신 줄로만 알았는데, 왜 아직까지도 표정이 어두운 것인지, 태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아직도 명휘를 생각하고 계신 것인가?’

태주는 수현이 걱정되었다.

“중전마마와는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습니까.”

“네…… 그리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나 뵙게 되었으니, 할 말이 참으로 많으셨겠습니다.”

“예…… 그러하온데…….”

말끝을 길게 흐리는 수현에 태주는 결국 무겁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목소리로 그가 수현을 불렀다.

“왕자님.”

“예…….”

“황제 폐하 때문입니까…….”

“…….”

“중전마마까지 만났는데도, 왕자님 얼굴에 그늘이 떠나지 않는 이유가.”

“공자님…….”

“명휘…… 때문입니까.”

어쩐지 평소보다 더 무거운 목소리에 수현은 천천히 태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간절하게 답을 갈구하는 눈빛이 수현을 덮쳐 와 숨 막히게 했다. 무겁게 짓눌리는 마음이 답답해 수현은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의 하얀 손안에서 옷깃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말씀해 주십시오. 왕자님.”

애타는 그 눈빛을 외면할 수 없어 수현은 겨우 입을 열었다. 말하는 한마디, 한 마디가 복잡한 감정을 대변하듯, 한껏 떨리고 있었다.

“어마마마께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어마마마가 어떻게 살아남게 되셨는지를요.”

“…….”

“저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

“그분의 도움이 어마마마를 살게 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왕자님. 그분이라 하면…….”

여기까지 말을 하던 태주는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갔다. 태주의 손이 떨리었다. 뻣뻣해진 목덜미에 잔털이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폐하입니까.”

“…….”

“혹시. 중전마마를 살리신 분이…… 폐하입니까.”

수현은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것만으로도 태주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얘기에 부정조차 하지 않는다는 건, 맞다는 뜻이었으니까.

설마 했던 생각이 사실로 드러나자 태주의 머릿속에는 오만 가지 생각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명휘는 알고 있던 것이다. 수현의 생모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남방의 반란군에 집착했던 것이다. 단순히 태화가 위협받아서가 아니라, 수현의 생모를 찾고 싶어서.

왜? 수현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을 테니까. 수현에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을 해 주고 싶었을 테니까. 그만큼…… 수현을 아끼고 있었으니까…….

“아…….”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는 품고 있던 모든 의문이 확실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애초에 명휘는 수현을 연모하고 있었던 거다. 자신도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그토록 잔인하게 괴롭혀 가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수현을 지독하게 아끼고 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마음을 화마에 갇힌 수현을 보고 깨닫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수현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깨닫게 된 것일 테지……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 내야겠다고 생각을 했을 테니…….

‘왜 그렇게 모질게 군 것이냐. 이토록 아끼고 있으면서. 제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면서. 바보같이. 왜…….’

태주는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진심으로 가슴 아팠다. 수현을 진심으로 연모하는 명휘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 아니라, 오랜 벗이 안타깝게 느껴져서였다.

비록 저 또한 마음에 두고 있는 수현일지언정, 오랜 붕우의 진심 앞에서는 그저 한없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기에…….

“왕자님.”

이 순간, 태주는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아무리 명휘의 진심을 저가 알게 되었다 한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달리 있었다. 바로 명휘를 생각하는 수현의 마음이었다. 수현의 진심이야말로 지금 그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왕자님은…….”

그 순간.

와아! 와아! 별안간 엄청난 함성이 산을 울렸다. 말을 하던 태주도, 듣고 있던 수현도 놀라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새의 입구를 잔뜩 밝히며 빼곡히 들어선 횃불이 보였다. 사방이 조용했던 요새에서 지금껏 봐 오지 못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단 내려가 보시지요, 왕자님.”

험한 산길에 태주가 앞장섰다. 태주의 뒤를 따르며 수현도 발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소리의 근원지로 향하니, 이미 두 사람 말고도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만세, 만세! 성해군 만만세!’ 같은 부호를 외치며 환호하고 있었다.

“수현 대군!”

수많은 인파를 속에서 수현의 모친이 소리쳤다. 수현과 태주는 바삐 그녀의 곁으로 향했다.

“어마마마.”

“수현 대군.”

“어마마마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성해의 저항군이 돌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태화의 황군으로 향했던 저항군이…….”

말을 하던 중전의 입술이 멈추었다. 그러고는 앞을 보며 잔뜩 얼굴을 굳혔다. 수현은 가만히 쳐다보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앞에는 들짐승처럼 날카로운 눈을 가진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중전마마. 신, 장왕명. 대사를 끝내고 복귀하여 마마의 앞에 섰습니다.”

중전마마의 앞에 예를 갖추며 무릎을 꿇는 이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얼굴에 깊게 팬 칼자국이 그가 얼마나 험악한 인생을 살았는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거대한 풍채는 두툼한 갑옷 속에 숨겨져 있었다.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 아마도 어마마마께서 이른 ‘저항군’의 수장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성해의 염원이었던 태화의 황궁을 점령하고, 성해의 국수인 태화 황제의 목숨을 취했사오니. 이제 중전마마께서는 모든 시름을 놓으소서.”

그의 말에 수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분명, 태화 황제의 목숨을 취했다고 했다.

어쩌면 불에 타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 제게 전해진 것이었다.

“수, 수현 대군!”

수현이 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뻔한 것을 태주가 부축하였다. 제 짝을 잃은 아들을 보며 중전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그녀가 소리쳤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태화 황제의 목숨을 취하다니요. 절대 그것은 아니 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쩌렁쩌렁. 산으로 둘러싸인 허공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순, 환호하던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귀신이 지나치기라도 한 듯, 조용해진 공간에서 상전의 앞에 무릎 꿇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매서운 눈빛으로 감히 높으신 분을 노려보며 두툼한 입술을 욱신거렸다.

“마마. 신은 그저 옛 성해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움직일 뿐입니다.”

“이보시오, 장군!”

“한데. 어찌하여 마마께선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 대사를 그르치려 하시는지요.”

“장군.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겝니까. 사사로운 정이라니요.”

“아니 그렇습니까? 혹, 태화 황제의 후궁 자리에 오른 대군마마 때문이 아니신지요.”

수현의 동공이 하릴없이 떨리었다. 숨이 턱, 막혀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몸을 휘청이는데, 이제껏 중전마마에게 향해 있던 왕명의 시선이 수현에게로 향했다.

“…….”

뱀 같은 눈이 수현을 꼼꼼히 훑었다. 초면이었지만 낯익은 인상으로 미루었을 때, 왕명은 단번에 그가 잃어버린 왕자 수현임을 알 수 있었다.

중전마마를 꼭 박아 놓은 듯한 눈매가, 새하얀 피부가 그가 그것을 증명하는 듯 보였다.

“하.”

왕명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국수에게 몸과 마음을 팔아 버린 파렴치한. 제 부모와 형제가 모두 국수의 손에 죽었거늘, 제가 살고자 태화의 황제에게 붙어 버린 천하에 둘도 없는 패륜아.

감히 성해의 왕족이라고 부르기도 꺼려지는 수현이 그의 눈엣가시처럼 들어왔다.

‘태화 황궁을 치러 들어갔을 때, 이미 피신하여 찾질 못하였거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단 말인가.’

왕명은 염치도 없이 이곳에 떡하니 와 있는 수현이 증오스러웠다. 그런 그의 몸에서는 수현을 향한 혐오를 담은 체향이 한껏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웁!”

살기를 담아 달려드는 체향에 수현이 급격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가뜩이나 명휘의 체향이 없어 고전하고 있거늘. 대놓고 저에게 위험을 가하는 체향은 그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장군!”

왕명의 체향을 눈치챈 중전이 호통을 내질렀다. 그 하얗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도록 흥분에 차 소리치기 시작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체향을 푸는 겝니까. 지금, 장군의 눈에는 뵈는 게 없습니까?”

중전의 분노에도 왕명은 딱히 수그리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옛 성해의 백성은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을 통솔하는 것이 왕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나서서 중전마마를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짐짓 왕명이 저자세를 취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 진심이라곤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저 도리를 지키기 위해 물러나는 척해야 했을 뿐.

“하면,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명일 다시 찾아뵐 터이니, 그때 다시 얘기 나누시지요.”

그렇게 왕명이 돌아섰다. 그를 따라 추종하는 무리가 길게 따라서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왕명을 칭송하며 다시금 환호성을 높였다.

“수현 대군!”

하늘이 떠나가라 외치는 환호성 속에서, 수현은 결국 자리에서 혼절하고야 말았다. 놀란 중전이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안아 들었다.

어느덧 멀어지는 환호성과 함께 주변은 밝히던 횃불도 멀어져만 갔다. 유난히 밝았던 달빛은 구름 뒤에 숨어 점차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 * *

요새에서도 수현의 생활은 좀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왕명이 요새에 돌아온 이후로 성해의 백성들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변해 버린 터였다.

가뜩이나 명휘의 체향을 맡은 지 오래되어 입덧은 더욱 심해져만 가는데,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으니 수현의 몸은 나날이 야위어 갈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품에 돌아왔는데 고생만 하는 수현이 그의 모친은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아무리 임신에 좋다는 음식과 약재를 먹여 보아도 수현의 증세는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증세만 악화될 뿐이었다.

그런 수현도, 지켜보는 중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어떤 진귀한 음식과 약재로도 수현의 상태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오직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명휘의 체향. 이제는 정말 만날 수도, 볼 수도 없게 되어 버린 그의 체향만이 오직 수현에게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그 때문에 수현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다시는 명휘를 볼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제 두 번 다시는 그의 품에 안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왕자님. 이제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오늘도 한참 동안 속을 게워 낸 수현이 자리에 앉자 걱정스러운 듯 태주가 물어 왔다.

수현은 숨을 몰아쉬며 속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태주는 잔에 미온수를 따라 수현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수현은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고 입술만 적신 채 내려 두었다. 물을 마셨다간 그대로 다 쏟아 낼까, 감히 마실 수 없던 것이다.

“이제…… 조금 진정되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자님…….”

다소 가라앉은 토기에 수현이 겨우 대답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열이 올라 두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던 태주는 남몰래 입술을 짓씹었다.

“마마. 잠시 바깥 공기를 좀 쐬고 오실는지요.”

수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속이 너무도 메슥거려 찬 바람을 쐬면 좀 가라앉을까 싶었던 터였다.

수현의 겉옷을 챙긴 태주가 살며시 수현의 어깨 위로 걸쳐 주었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이 여린 몸을 타며 흘러내렸다.

밖으로 나오니 여느 마을과 같은 평화로운 일상이 펼쳐져 있었다.

성해의 주민들은 요새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각자의 위치에 맞춰 착실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저항군은 아니었으나, 모두가 저항군의 열렬한 지지층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저항군의 중심인 왕명 또한 크게 추앙을 받고 있었다. 일국의 왕이나 황제에 비견될 정도로.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컸다.

“왕자님. 춥지는 않으신지요.”

아직 대낮이라 해가 중천에 있었지만, 바람이 매우 차가웠다. 이제 정말 겨울이 코앞까지 왔기에 산속이라 더욱 춥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태주는 수현이 혹여나 추워할까 걸으면서도 계속해서 얼굴을 살피었다. 다행히 찬바람에 붉게 물들었던 볼이 다소 본래의 색을 찾아가고 있었다. 볼을 타고 흘렀던 땀방울이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예. 괜찮습니다. 공자님의 말대로 밖에 나오니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다행입니다. 왕자님의 몸이 평안해지셨다니요.”

두 사람은 발걸음을 맞춰 산길을 밟아 나갔다. 걸음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몸은 더욱 가벼워지고 숨도 트이는 듯했으나, 여전히 수현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왕명이 요새로 돌아온 날. 황제를 제 손으로 처단했다는 그 말을 듣고 수현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버티다 보니 날이 밝았다.

그때부터 그런 날의 반복이었다. 밤 깊도록 잠을 못 이루고, 버티다 보면 날이 밝고.

저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키려면, 때가 되었다는 듯 입덧이 찾아왔다. 

그렇게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흘리는 눈물만 나날이 늘어 갔다.

“왕자님. 조심하십시오. 길이 험합니다.”

산길을 걷다 보니 발에 차이는 게 많았다. 몸이 약해진 수현이 혹여나 걷다 다칠세라, 태주는 그저 걱정스럽기만 하였다. 한 발짝, 한 발짝 앞을 향해 내디디면서도 그의 시선은 줄곧 수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런 태주의 마음이 무색하리만큼 수현의 몸짓은 그저 위태롭기만 하였다. 통 먹은 것이 없어 몸에 힘이 없었던 탓이었다.

“왕자님!”

결국,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던 수현은 돌뿌리에 걸려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넘어질 뻔한 수현을 태주가 겨우 붙잡아 안았다. 저도 모르게 뻗은 손에 정신을 차려 보니 제 품 안에 있는 수현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힘겨운 듯, 격하게 드나드는 숨결이 태주의 목덜미를 데웠다.

“아…….”

두근. 제 의지와 상관없이 태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서 몸을 수습하고 일어나서 마마의 안위를 살펴야 하건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본능이 그의 몸을 옴짝달싹도 못하게 했다.

“공자님……?”

그래서 태주는 수현이 저를 의아한 듯 부르고 나서야 겨우 수현의 몸에서 손을 떼어 낼 수 있었다. 세차게 뛰어 대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가 겨우 한 발짝 물러섰다.

“송구하옵니다…….”

“아닙니다. 내가 넘어졌는걸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요.”

“공자님 덕분에 무탈하옵니다.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현은 그저 매번 저를 도와주는 태주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미안해 그만 놓아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저, 공자님.”

“예. 왕자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저 그게…….”

그래서 수현은 이만 태주에게 도읍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비록 저를 반기는 것 같지는 않으나, 어쨌든 성해의 백성들 품으로 돌아왔고, 태주를 이곳에 오래 묶어 둘 순 없던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공자님께선 이만…….”

그때. 수현의 말을 잘라먹으며 누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군마마가 아니십니까.”

수현과 태주는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언제 온 것인지 평상복을 한 왕명이 저의 패거리와 함께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 죽은 산짐승들이 들려 있는 것을 보아 사냥하러 다녀온 듯했다. 오늘 저항군의 환송 잔치가 있을 거라고 하더니, 거기에 쓰일 음식 재료인 듯했다.

“…….”

거들먹거리며 가까이 다가선 왕명에 수현은 어떤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제 막 안색을 찾아가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새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옷소매에 감춘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대군마마의 향이 아주 숲에 진동합니다. 태화 황궁에 사는 귀비의 색향이 그리도 매혹적이라 양인들이 꼼짝을 못한다 하더니. 이 험한 곳에서도 양인이 달라붙었나 봅니다.”

치욕적인 말에 수현의 몸이 잔뜩 굳어 버렸다. 무어라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떨어 대는 그를 대신해 태주가 맞받아쳤다.

“장군님께선 말씀을 삼가시지요. 왕자님께서 험한 길에 넘어지실 뻔하여 잠시 부축해 드렸을 뿐입니다.”

“예, 뭐. 그러시겠지요. 회임까지 한 몸이시니 오죽하시겠습니까.”

대놓고 수현을 능멸하는 태도였다. 황제의 씨를 가진 수현을 비꼬는 것이었다.

“참. 이리 누추한 곳에서 지내시기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곧 태화의 황후가 되실 몸이신데. 아…… 이제 태화의 황제가 죽어서 어차피 갈 곳도 없으시던가요?”

선을 넘은 그의 말에 태주는 울컥했다.

“참으로 안타까우시겠습니다. 태화 황제가 끔찍이 아낀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이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셨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장군님.”

“……?”

“장군님께선 신하 된 도리로 어찌 그런 말씀을 스스럼없이 하십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장군님은 성해 왕족의 신하가 아니십니까. 어찌 한낱 장군 따위가 주군께 그리 방자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단 말입니까.”

분노를 억누르고 차분하게 잘못됨을 이르는 태주에 왕명이 울컥하였다. 하지만 곧 그는 스스로 화를 다스리며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왕명 또한 정치에 능하고, 농간질에 통달한 자였다.

“공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나는 성해 왕족의 신하입니다. 도리를 저버리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저버린 선왕 전하께 충성을 다하고자 신하를 자청하여 이 자리에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충심을 엉뚱한 이에게 쓰고 싶지는 않군요. 침략자에 무릎을 꿇은 나약한 자에게 쓰기에는 충성심이 너무나 깊기에 말이지요.”

거들먹거리며 말하는 왕명에 태주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마마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모르면서!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왕명의 얘기에 반박하려 하는데.

“……공자님.”

수현이 조심스럽게 태주를 불렀다. 왕명에게 꽂혀 있던 시선을 돌려 수현을 바라보려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도리질 치는 수현이 보였다. 그만해 주세요, 공자님. 그의 시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억울한 마음에도 태주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뭐. 대군마마께서도 크게 부정은 안 하시는 듯 보입니다. 태화 황궁의 귀비가 그 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건,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니까요.”

피식, 왕명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구역질이 날 만큼 야비한 표정에도 수현은 침묵을 지켰다. 어쩌면 그는 왕명의 얘기가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제 백성들이 이토록 고생하며 왕국을 재건하려 하고 있을 때, 저는 황궁에 숨어 사치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여하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보아하니 황제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새 정인을 만나신 듯한데. 아, 하기야 회임까지 한 몸이니, 양인의 돌봄이 필요하시겠지요.”

끝까지 비아냥거리며 말을 내뱉은 왕명이 수현에게 보란 듯이 건성으로 예를 갖추고는 그대로 수현을 지나쳐 산길을 밟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뒤따르며 무리가 웅성거리며 지나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태화 황제의 개가 된 천박한 음인 주제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웅성거리며 멀어지는 무리를 보다가, 태주가 걱정스러운 듯 수현에게 물었다. 수현은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을 하고선 괜찮다고 애써 말하였다. 그새 멈추었던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태주는 그런 수현이 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했다. 수현이 고생하는 모습을 옆에서 생생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태주였기에.

“왜 부정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구보다 힘겨운 시간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성해의 백성들을 찾기 위해, 탈궁까지 감행하셨던 왕자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어째서. 그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이에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날이…… 춥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수현은 끝끝내 제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저 가슴속으로 혼자 껴안아 깊은 곳에 꼭, 꼭 숨겨 놓았을 뿐.

“…….”

그런 수현을 태주도 더는 다그치지 못하였다. 그러기엔 수현이 너무도 안쓰러워 보였으니까.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왕자님. 그만 내려가시지요.”

그렇게 태주가 먼저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 수현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날이 어둑해지기 전, 숙소에서 쉬고 있던 수현을 밖에서 다급히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군마마, 누군가 대군마마를 찾아왔습니다.”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가로 발걸음을 옮기니, 굳게 닫혀 있던 나무문이 열리며 익숙한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마마!”

수현을 보자마자 다급히 소리치는 이는 다름 아닌 장 상궁이었다. 수현은 놀라움 반, 반가운 마음 반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장 상궁님!”

“마마!”

오랜만에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지었다. 그간, 더욱더 핼쑥해진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은 마음이 매어 왔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으면…….

“그간 어찌 지내셨습니까. 소인이 없어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아닙니다. 불편하다니요. 장 상궁님은 어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입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어찌 알고.”

“공자님께서 시종에게 이곳의 위치를 미리 일러두셨나이다. 그리하여 공자님의 시종과 함께 이곳까지 올 수 있었나이다.”

“이 먼 곳까지…… 참으로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이라니요. 소인은 마마가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 것입니다. 더 일찍 찾아뵙지 못하여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장 상궁님…….”

“마마…….”

두 사람이 그렇게 눈물로 해후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언제 나타난 것인지 태주가 그들의 곁에 다가섰다.

“아…… 공자님…….”

장 상궁은 눈가에 흐른 눈물을 닦고 태주를 마주했다.

“오랜만입니다, 장 상궁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공자님이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여기까지 수월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앉으시지요. 먼 길 오느라 힘드셨을 텐데요.”

태주의 안내로 장 상궁은 방 안 중앙에 놓인 탁자로 향할 수 있었다. 수현과 태주, 장 상궁이 동그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곧 요새에서 수현의 시중을 담당하고 있는 이가 따끈한 차를 내왔다.

“이곳에 들어오는 게 혹, 험난하지는 않으셨습니까.”

태주가 묻자 장 상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공자님께서 미리 일러 주신 덕에 문지기들에게 얘기하니 바로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그렇군요. 참으로 다행입니다.”

“네. 그렇지요.”

잠시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이 순간, 수현은 무엇보다 장 상궁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명휘의 생사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입 밖으로 그것을 꺼낼 수 없었다. 정말, 장왕명의 말대로 그가 죽기라도 했다면…… 그렇다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기에.

“장 상궁님.”

그런 수현의 마음을 알아서였을까? 태주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황제 폐하…… 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태주의 말에 장 상궁의 얼굴은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런 그녀의 얼굴 못지않게 수현의 얼굴도 잔뜩 경직되었다.

“폐하께선…….”

장 상궁은 말을 잇기 전 잠시 뜸을 들였다. 마른 목을 차로 적셨다. 한숨을 깊게 내쉰 그녀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날 영화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장 상궁의 얘기에 수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충격받은 표정을 해 보였다. 탁자 위에 올려 둔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가 겨우 입술을 떼어 냈다.

“그렇다면…… 폐하는…… 폐하는 정말 승하하셨단 말입니까…….”

이에 장 상궁이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말을 아끼는 장 상궁에 수현도, 태주도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저 빈 주먹을 그러쥔 채로 장 상궁의 말을 기다려야만 했다.

“참으로 애매합니다. 화기가 잡힌 영화궁의 터, 그 어디에서도 폐하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비단, 영화궁뿐만이 아니라. 황궁 어디에서도 찾질 못하였나이다.”

장 상궁의 말에 수현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장 상궁의 말대로라면 명휘는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는 거였다. 시신이 없다는 것은 죽은 것이 확실하지 않다는 말일 수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폐하께선 살아 계실지도 모르겠군요.”

수현과 같은 생각을 한 태주가 먼저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하오나 불길이 워낙 거세었던 탓에 영화궁을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폐하라면 그들과 다릅니다. 형질 중에서 가장 체력이 뛰어난 극양인이시니, 어쩌면 죽음을 피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수현이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너무도 떨려 잘 넘어가지 않는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소리가 고막까지 생생하기 전해지는 듯했다. 새파랗게 질렸던 얼굴에 피가 돌며 조금씩 붉은 기운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럼. 정사는 어찌 돌아가고 있습니까. 반란군에 점령당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태주의 목소리에 장 상궁은 슬픈 눈빛을 해 보였다.

“공자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그 말은…….”

“예. 태화의 황궁은 성해의 옛 백성들이 점령했으며, 그들이 이제 태화의 황족을 대신해 이 나라를 통솔한다 선포하였나이다.”

“어찌 그런…….”

“만약 폐하께서 자리에 계셨더라면 이 지경까지 일이 되진 않았을 터지만…… 폐하께서 안 계시는 바람에…… 이리 쉽게 반란군의 손에 태화를 빼앗기게 되었나이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들으며 수현의 가슴속은 상반된 두 개의 감정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토록 염원했던 성해의 재건에 대한 기쁨과 한편으로는 마냥 기쁠 수만은 없는 구슬픈 감정이 그것이었다.

분명, 성해의 왕국이 재건되는 날이 온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쁠 줄로만 알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것인지는 수현조차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저 때문에 명휘가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몰랐고.

“수현 왕자님.”

급격하게 어두워져 가는 수현을 보며 태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이 모든 것은 태화 선황이 쌓아 온 업보입니다.”

“공자님…….”

“왕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니, 왕자님.”

“…….”

“절대 자책하지 마시옵소서.”

태주의 말에도 수현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질 수 없었다. 그저 기나긴 속눈썹을 늘어뜨리며 눈을 내리깐 채로 입술만 짓씹는데, 별안간 밖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군마마. 이제 술시(戌時)이옵니다. 곧 환송연이 시작될 것이 옵니다.”

이에 수현이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록, 죄 많은 죄인이나마 성해의 왕족으로서 황송연에 빠질 수 없었던 터였다.

“네. 곧 채비하여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따라 태주도 장 상궁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 상궁님께선 먼 길을 오셨으니 제 처소에서 쉬도록 하시지요. 시종에게 시켜 음식을 들이라 이르겠습니다.”

장 상궁은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제 겨우 마마를 다시 모실 수 있게 되었거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하지만…….”

“괜찮습니다. 비록, 태화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소인은 마마의 사람입니다. 마마의 영광이 소인의 영광이기도 하옵니다. 소인도 마마와 함께 환송연으로 향할 것입니다.”

“장 상궁님…….”

수현은 장 상궁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하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태화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었다. 혹여나 장 상궁이 환송연에 함께 참여하였다가 못 볼 꼴을 보게 될까 걱정스러웠던 터였다.

“그렇게 하시지요. 별일 없을 것입니다.”

태주는 수현의 걱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함께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여 그리 설득하였다.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이곳을 찾은 장 상궁일 터였으니.

“마마, 그렇게 해 주시어요. 소인은 죽는 날까지 마마의 곁에서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결국,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전의 허락이 떨어지자, 장 상궁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죽는 날까지 수현을 곁에서 보필할 작정이었다. 한번 상전은 영원한 상전이었으니까.

“그럼 가시지요.”

그렇게 세 사람이 방을 나섰다. 중앙에 자리한 큰 터로 걸음을 옮기니 자욱한 연기가 온 산에 가득했다. 잔치를 위해 여기저기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음식을 해 대는 탓이었다. 잔치가 있는 공터에 가까워질수록 고기 냄새, 음식 냄새가 더욱 진해졌다.

흥겨움에 취한 이들의 목소리가 구름같이 모여 사방이 시끌벅적했다.

“수현 대군!”

비록 임시로 만들어진 곳이라 태화 황궁의 것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나름 왕족과 간부를 위한 단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중앙에는 중전이 앉아 있었으며, 그녀의 오른쪽으로는 장왕명이 자리해 있었다.

왼쪽 자리는 비어 있었다. 수현의 자리였던 것이다.

“어마마마.”

수현은 일행과 함께 단상으로 향했다.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오르니, 그간 자리에 앉아 있던 왕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는 인파들을 뒤로하고 수현이 중전의 가까이에 다가섰다. 의아한 듯 장 상궁을 바라보는 그녀를 위해, 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자가 궐…… 에 있을 때. 소자를 보필하던 상궁이옵니다.”

수현의 말에 중전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만,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는 왕명의 얼굴은 그러지 못했다. 이젠 태화 황궁의 상궁까지 들여와? 그가 한쪽 입꼬리를 추어올리며 비소를 내뱉었다.

“장 상궁님, 성해의 중전마마이시옵니다.”

수현이 소개하자, 장 상궁은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었다. 이미, 이곳에 들어서며 성해의 중전이 살아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던 터라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소인, 그간 수현 마마를 모셔 온 장 상궁이라 하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니옵니다. 마마를 모시는 것이 소인의 천명인 것을요.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한 것이 그저 한이옵니다.”

갸륵한 그 말에 중전은 한껏 만족스러운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그녀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기특한 자가 아니옵니까.”

수현은 얼굴을 붉히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그대의 충심에 감복하였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우리 수현 대군의 손과 발이 되어 주셔요.”

“여부가 있겠나이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왕명은 심기가 불편한 듯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수현인데, 자꾸만 태화의 사람을 하나둘 끌어들이니 이 어찌 아니꼽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럼. 다들 자리에 착석하지요. 곧 연회가 시작될 것입니다.”

중전이 먼저 자리에 앉자, 그녀의 옆으로 수현이 앉았다. 태주는 수현의 옆자리에, 장 상궁은 그들의 뒤편에 자리했다.

모두 착석하자 요란한 피리 소리가 산을 울리기 시작했다. 곧 화려한 가면을 쓴 이들이 등장하여 단상의 앞에 섰다. 수뇌부를 향해 예를 올린 그들이 산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 소리를 내뱉었다.

“성해가 적국의 황궁을 불태우고 그들의 심장에 성해의 기를 꽂았나이다. 성해의 앞날이 창창하니 이와 같은 경사가 어디 또 있으랴. 오늘 성해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으니, 성해의 선조들은 하늘에서 이를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렇게 제문 낭독을 시작으로 연회의 막이 올랐다. 불길은 더욱 높게 타오르고, 요란한 악기 소리가 산을 울렸다. 성해의 재건을 염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다 같이 승리에 취해 술과 고기를 즐기며 흥겨워하는 그 시각, 수현의 얼굴만은 여전히 어두운 채로 좀처럼 나아질 줄 모르고 있었다.

연회의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어 갔다. 한껏 흥이 차오른 성해의 백성들은 만취해 저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산세를 밝혀 주던 태양은 모습을 감추어 어두운 밤이 되었다. 곳곳을 밝히고 있는 모닥불에 저녁이 되어도 여전히 연회장은 밝기만 하였다.

“잠시, 주목!”

왁자지껄한 공터에 왕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어찌나 큰 목소리였는지, 웅성거리던 군중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왕명이 단상의 앞으로 나섰다. 중전의 앞에 선 그가 아뢨다.

“신, 장왕명. 감히 중전마마를 대신하여 성해의 대사를 알리려 하오니, 마마께서는 이를 허하여 주시옵소서.”

이에, 중전은 너그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오늘 같은 날, 무엇보다 사기가 중요한 것을 아는 그녀였다.

“황송하옵니다. 그럼, 미천하나마, 소신이 고하겠나이다.”

그가 뒤돌아섰다. 저를 향한 군중들을 천천히 훑어보다, 더없이 커진 목소리로 그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 성해는 적국의 궐을 점령하고 국수의 목숨을 쟁취하였다!”

와아, 와아. 함성이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흥분한 이들의 얼굴이 더없이 붉게 타올랐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찾은 것은 물론, 그들의 영토 또한 우리의 차지가 되었나니!”

이에, 더 커질 수 없을 것 같았던 함성이 더욱 거세졌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지으며 흥분하여 소리치며 만세를 외쳤다.

“이제 정들었던 요새를 떠나 새로운 성해의 황궁으로 갈 것이다!”

모든 이들이 흥분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격의 도가니에서 울부짖으며 소리쳐 대는 그들을 보며 왕명은 더없이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수현이었다. 지금 이 순간, 반드시 바로잡지 못하면 안 될 것이 하나 있기에.

“하여, 감히 중전마마께 고하옵니다. 성해의 새 도읍, 새 황궁으로 향하기 전, 새로운 지도자를 마마께서 친히 지목하여 주시옵소서.”

순간, 떠들썩하던 장안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분위기처럼, 중전 또한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그녀는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왕명의 성정을 이미 꿰뚫고 있는바, 이러한 일이 언젠가 있으리라 줄곧 생각해 왔던 그녀였다.

“마마. 부디, 소신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마마.”

왕명의 말에 이어 모든 이가 같은 목소리로 고하였다. 백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중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 낸, 그렇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그 얼굴로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보였다.

“신들의 청이 그러하니, 이 자리에서 뜻을 밝힘이 옳은 듯싶습니다.”

중전의 말에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환호를 들으며 왕명은 속으로 은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거사가 있기 전, 이와 비슷한 얘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당시 수현이 태화의 귀비로 있었기에, 사실상 성해의 왕손 중에서는 왕위를 이을 자가 없었다. 하여, 모든 이들이 왕명을 새로운 지도자로 옹립하여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비록, 수현이 돌아왔으나 태화 황제의 후손도 잉태한 마당에 지도자로는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그는 음인이기도 했고. 역사상 양인이 아닌 왕은 없었으니, 저에게 자리가 돌아오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괜히 대군의 입지가 높아져 애매하게 돼버리면 곤란했으니까.

“다시 시작될 성해 대국의 왕은.”

모두의 이목이 중전의 목소리에 집중되었다. 누구 하나 침 넘기는 소리조차 내지 않는 가운데, 다들 중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바로.”

그렇게 왕명이 으스대며 앞으로 나서려는데.

“수현 대군입니다.”

뜻밖에 말에 물을 끼얹은 듯 사방이 조용해졌다. 당연히 제 이름이 호명될 줄 알았던 왕명은 저가 들은 게 무엇인가 싶어 충격받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시선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왕명을 쳐다보는 중전이 보였다.

“어마마마. 그것이 무슨…….”

너무도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데, 불현듯 왕명의 눈에 저보다 더 충격받은 듯한 수현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왕명은 분노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저는 이런 걸 기대한 게 아니란 듯 얼빠진 표정을 지어 보이는 수현에 화가 났던 것이다.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성해의 유일한 왕손이신데. 당연히 대를 이어 왕좌에 오르셔야지요.”

“하오나…… 소자는 음인이 아니옵니까. 여태껏 선대의 왕은 모두 양인이었사옵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를 잇는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장군?”

중전은 되려 대놓고 왕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왕명은 이를 으득, 갈았다. 저가 보상받아야 마땅할 자리에 수현을 올리겠다는 중전이 너무도 미워 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마마의 말씀이 지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중전의 물음에 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았다. 여기서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전의 말에 반기를 들만한 명분이 저에게는 없었다.

비록 허수아비처럼 자릴 지키고 있다 할지라도, 엄연한 중전이었다. 지금은 한 발짝 물러남이 옳았다.

“장군의 뜻이 그러하니 참으로 기쁩니다. 이 기쁜 날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중전이 능숙하게 수현을 자리에서 일으켰다. 수현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이제 새롭게 맞이할 성해의 앞날을 위해.”

수현의 손을 마주 잡은 손으로 중전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함성이 요새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새롭게 다가올 성해의 앞날을 위해, 곧 왕위로 추대될 수현을 위해 잔을 들어 올렸다. 이윽고 성해 만세! 구호와 함께 모두가 잔을 들이켰다.

“어마마마…….”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수현을 보다, 왕명은 자리에서 돌아섰다. 다시금 잔치의 흥겨운 분위기가 시작되고 다들 술과 분위기에 취해 흥청망청하는 사이, 왕명은 아예 자리를 벗어났다.

중전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힐끔 보곤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을 뿐이었다.

“젠장!”

연회가 열리는 중앙 터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 왕명은 그곳에 도착해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분에 겨워 몸을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데, 멀리서 그를 쫓아온 무리가 있었다. 그의 수족들이자, 이번 대사의 주요 인물들이었다.

“장군님!”

그들 역시 분하고 억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 자리에 왕명이 오를 것으로 생각했던 터였다. 왕명이 그러하듯, 그들 또한 수현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태화의 황궁에서 온실의 화초처럼 편하게 지내다 와서 이제 와 성해의 왕손 행세를 하다니, 참으로 역겹기 짝이 없었던 터였다.

“중전마마께선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어찌 대군을 왕의 자리에 추대하느냔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 자리는 장군님의 자리가 아니 옵니까? 이미 그리 얘기가 된 것을. 어찌 저희와 상의도 없이 번복하신단 말씀입니까.”

“백성들도 너무합니다. 아니, 그렇게 장군님을 왕위로 추대해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또 중전마마의 말을 듣고 저리 환호하니. 이 어찌 우매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진심으로 화가 나 한마디씩 내뱉는 동안, 왕명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자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을 뿐.

비록 화가 나고 억울하긴 하였으나, 중전의 말이 아예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정통성을 따지자면 수현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맞았다.

태화 후궁으로 있었던 예전이라면 불가능했을지 몰라도 지금이라면 아니었다. 태화의 황제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러다 순간, 왕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꽂혔다. 태화의 황제가 죽은 것이 확실하던가……?

그는 요새로 돌아온 이후 줄곧 태화의 황제가 저의 손에 사살되었다고 떠들어 댔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위치를 굳건히 하기 위해 한 거짓말일 뿐,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것은 물론, 하다못해 시신조차 찾지 못한 것이다.

왕명은 급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서 태화의 황제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떠들어 봤자, 제 얼굴에 침뱉는 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장군님.”

왕명은 머리를 더 쥐어짜 보았다. 중전조차도 꼼짝 못 할 만한 명분이 무어가 있을까. 대체, 어떤 걸 들이밀어야 중전이 아무 소리 없이 저에게 왕위를 준단 말인가.

음인이라 정사를 돌봄에 어려움이 있다 얘기해야 하는가. 더군다나 지금으로선 홑몸이 아니라 혼례를 치름이 어려운데, 국수의 자식으로 왕위를 이을 수 없다 하여야 하는가.

일순, 여기까지 생각한 왕명은 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장군님……?”

의아한 듯 저를 바라보는 무리에게로 왕명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뱀같이 징그러운 눈을 번뜩이며 그가 추종자들을 향해 한마디 물었다.

“그대들은 적국의 씨가 이 나라의 왕위를 이어받게 되면 어찌 되리라 생각하는가.”

난데없는 질문에 무리가 의아한 듯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한 명이 답을 하였다.

“그야…… 제 뿌리가 태화의 것이란 것을 알면 난리 나지 않겠습니까.”

왕명의 표정이 밝아졌다.

“분명, 그리할 것이다. 제 아비를 죽인 자들을 벌하려 들 것이다.”

“장군님. 그 말인즉슨…….”

“대군마마가 왕위를 잇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태화 황제의 씨에게까지 왕위를 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과연 맞는 말이었다. 제아무리 심정이 곧은 자라도, 제 아비를 죽인 원수는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현재 요새를 꾸리고 있는 주요 인물들과 그들 가문의 자식들이 모두 복수의 대상이 될 텐데. 그렇다면 성해에는 살아남을 자가 한 명도 없는 것이었다.

“장군님!”

왕명의 뜻을 눈치챈 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들이 희망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과연 장군님의 말이 맞사옵니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야비한 웃음이 왕명의 입가에 걸렸다. 어둠 속에서,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이 밝으면 중전마마를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마마께 청할 것이다. 대군마마가 배 속에 든 아이를 포기하기 전까진, 그분은 왕위에 오를 수 없다고.”

그의 말을 듣고 무리는 크게 감복하며 기뻐하였다. 다시금 환호하는 그들 속에서 왕명은 여전히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속에는 독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수현을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르겠다는 독기가 한껏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침에 날이 밝는 대로 수현은 중전의 처소를 찾았다. 중전은 언제나 그랬듯, 온화한 얼굴로 수현을 맞아 밝게 웃어 보였다. 그런 중전을 보며 어쩐지 수현의 얼굴은 밝을 수만은 없었다. 밤새 고민하던 끝에 어마마마를 찾아온 탓이었다.

“어마마마. 밤새 평안하셨는지요.”

“평안하다마다요. 대군도 평온한 밤 보냈는지요.”

“예. 그러하옵니다.”

“잘하셨습니다. 어서 앉아요. 서 있지 말고.”

어쩐지 어두운 기색이 도는 수현의 얼굴이 의아했지만, 중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녀가 수현을 자리로 인도했다. 곧 시중을 드는 이가 차를 들고 방에 나타났다. 탁자에 놓인 찻잔으로부터 추운 날씨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수현이 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아침에 한차례 게운 속이 따뜻한 차에 위로를 받는 듯 느껴졌다.

“몸은 좀 어떤가요. 아직도 입덧이 매우 심하십니까.”

“아닙니다.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도 이 어미는 걱정입니다. 큰일을 앞두고 계시니, 어서 입덧이 끝나야 할 텐데요.”

중전의 말에 수현의 얼굴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어마마마.”

“예, 대군.”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사뭇 진지한 아들의 목소리에 중전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성해의 새로운 지도자와 관련하여…….”

수현은 차마 실망하는 어마마마의 모습을 보기가 두려워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곧 그는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점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부디, 어마마마의 뜻을 물려 주시옵소서.”

수현의 예상과 다르지 않게 중전의 얼굴이 굳었다. 어마마마를 실망케 한 것 같아 죄송했지만, 수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자리는 제 것이 아니라고 느꼈던 터였다.

“소자, 어마마마께 간곡히 청하옵니다. 부디, 소자의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어마마마.”

“당연히 승하하신 선왕의 적자이신 대군이 그 자리에 가야 마땅한 것을, 어찌 대군께선 아니 된다 하십니까.”

조금도 물러섬이 없는 어마마마를 보며 수현은 애가 타들어 갔다. 어마마마의 가슴에 못을 박는 짓은 조금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절대 물러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자는 태화 황제의 후궁이었던 몸입니다.”

“그래서요.”

“지금 배 속의 아이도…… 태화 황실의 피를 물려받은 아이입니다. 성해의 백성들은 이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이는 백성들의 반감을 사 큰 문제를 야기시킬 것입니다.”

“…….”

“그러니 어마마마. 새로이 건설될 성해를 위해서라도 저보다는 다른 이가 지도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 맞사옵니다. 명분이 아니라, 실리를 따지소서. 분명, 제가 아닌 다른 적임자가 있을 것이 옵니다.”

수현의 말은 분명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걸 쉽게 받아들일 중전은 아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명분을 이야기했지만, 실은 수현의 안위를 위해 지도자로 결정한 것이었다. 만약, 수현이 그 자리에 오르지 않는다면 새로운 지도자가 버젓이 살아 있는 왕손을 그냥 놓아둘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러니 아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수현이 올라야 했다. 중전의 욕심이 아니라,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리되었으면 하는 거였다.

“대군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릇 한 나라의 지도자란, 그리 실리만을 따져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성해의 역사와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도 절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대군은 청을 거두어 주시지요.”

두 사람의 이견은 좀처럼 좁아질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현의 성품 또한 여린듯하면서도 강인한 구석이 있었기에, 한번 생각한 뜻을 쉽사리 굽힐 수 없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어마마마의 뜻일지라도.

“어마마마…….”

“오늘 대군에게 들은 말은 못 들었다 여기겠습니다.”

“…….”

“대군도 마음을 단단히 하십시오. 앞으로 이보다 더한 난제가 많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약해지셔선 안 됩니다. 잊지 마십시오. 대군은 성해의 유일한 왕손이라는 것을.”

단호한 중전의 말에 수현은 우선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한번 얘기해서는 어마마마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수현이 가만히 찻잔을 들어 올리던 그때.

“중전마마. 장왕명이 마마를 뵈옵기를 청하나이다.”

불현듯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하루가 멀다고 저를 찾아오는 그였기에, 중전은 새삼스러울 것 없이 말했다.

“들어오라 일러라.”

딱히, 마주치면 좋은 자가 아니었기에 수현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어마마마에게 인사를 고하고 그만 밖으로 향하려는데, 귀신같이 장왕명이 중전의 처소에 들어섰다.

“마마, 밤새 강녕하셨는지요.”

중전을 향해 예를 갖춘 그가 단번에 쭉 찢어진 눈으로 수현을 쳐다보았다. 피식, 비릿한 웃음을 흘린 그가 수현을 향해서도 한마디 내뱉었다.

“마침 대군마마님도 계시는군요.”

마침……? 무언가 저에게 할 말이 있는 듯한 말에 수현의 얼굴이 굳었다.

어제 연회에서도 내내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던 그였기에, 지금 이 순간 수현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두 분 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분위기만 보아도 절대 좋은 얘기는 아닐 터, 중전의 얼굴 또한 굳어졌다.

“어제 중전마마가 선포하신, 대군마마의 직위와 관련한 것입니다.”

역시나 그가 꺼내는 얘기라곤,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중전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왕명이 조용히 지나갈 자가 아니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건가요.”

연륜이 느껴지는 여유로운 모습에 왕명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소신은 마마가 선포하신 대로 대군마마가 성해의 새로운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백 번, 천 번 지당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암요. 당연한 일이지요.”

“하오나.”

“…….”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군마마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타국 황제의 씨가 절대 성해 왕실에 발을 들이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생각하옵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 그대로입니다. 대군마마는 왕위에 오르시되, 대군마마 배 속에 아이는 낙태하는 것이 맞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뭐, 뭐라고요?”

놀란 중전이 소리쳤다.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싶어 그녀가 손끝을 바들바들 떠는데, 옆에 선 수현은 그저 얼어붙은 채로 두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장군. 이게 대체 무슨 망발이란 말입니까.”

“비단 이것이 소신만의 생각은 아니옵니다.”

“그럼.”

“성해의 저항군을 대표하여 드린 말씀이 옵니다. 모두 이미 그리 뜻을 굳혔습니다.”

“장군!”

“잊으셨습니까. 우리 성해가 태화에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를.”

“…….”

“비단 저항군뿐만 아니라 성해의 그 어떤 백성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적국 황제의 자손이 후대에 성해 왕이 된다니요. 이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얘기가 아니 옵니까?”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반기를 들어 올리는 왕명에 중전조차도 할 말을 잃어야 했다. 그녀가 그저 차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왕명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데, 왕명은 야비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어 나갔다.

“하여, 대군마마께서는 선택하시지요. 대군마마께서 아이를 포기하신다면 성해의 백성들은 마마를 왕으로 모실 것이나, 반대로 마마께서 끝까지 아이를 고집하신다면 저희는 마마를 절대 왕위에 옹립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보시오! 왕명!”

듣다 못 한 중전이 큰 소리를 내었다.

“하늘이 무섭지도 않습니까? 선왕께서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대는 선왕 전하를 마음으로 따르던 신하가 아니었습니까?”

“맞습니다. 소신은 선어하신 선왕 전하께 충절을 맹세하였나이다.”

“그런데 어찌. 어찌 수현 대군에게 이리 무엄하게 군단 말입니까?”

“소신은 오로지 성해의 존위를 위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대군마마께 무험하게 굴다니요. 신, 맹세코 단 한 번도 대군마마께 불충을 품어 본 적 없나이다.”

“왕명 장군!”

“마마께서도 이미 생각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국수의 자식을 왕위에 올렸다간 피바람이 불지도 모른다는 것을.”

과연 왕명의 말이 맞았다. 수현의 대를 이어 태화 황제의 씨가 왕위에 오른다면, 또다른 피의 복수극을 낳을 수도 있었다. 감추려야 감추어질 수 없는 것일 테고, 진실을 안 그가 분명 제 아비의 복수를 하겠다 난동을 부릴 것 역시 전혀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국수의 씨를 살려 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제거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말이지요.”

여기까지 말한 왕명은 바들바들 떨어 대는 모자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제 승리를 직감한 그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크게 말했다.

“들어오너라!”

난데없는 장왕명의 말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위들이 들어섰다. 두 눈이 휘둥그레져 중전과 수현은 뒷걸음질 쳤다.

방 안에 들이닥친 이들은 들고 온 것을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그것은 사발에 든 탕약이었다. 어떤 효능이 있는지도 모르는, 탕약을 그들이 가져온 것이다.

“장군! 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중전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었다. 그녀와 대조적으로 왕명의 얼굴엔 비소가 가득하였다.

분명, 중전을 상대로 이리할 수 없는 신분임에도 그는 무례한 태도를 계속해서 고수했다.

“이는 대군마마를 위해서라도 속히 진행되어야 할 일이옵니다.”

“장군!”

“마마도 아시지 않습니까. 배 속의 아이가 자랄수록 대군마마의 옥체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대체 왜 이다지도 방자하게 군단 말입니까.”

“방자하다니요. 소신은 분명, 성해 백성을 대신해 말씀드리는 거라 하였습니다.”

성해의 백성을 들먹이며 대놓고 협박하는 왕명에 중전마저 기가 질려야 했다. 어제 연회에서만 해도 아무 말 않더니, 이렇게 뒤에 와서 비겁하게 겁박하며 반기를 들어 올릴 줄 몰랐다. 

차라리, 차라리 막무가내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떼를 쓰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쉬울 텐데. 왕명은 그런 것조차도 이미 계산해 두었다는 듯, 더 치밀한 방법으로 수현 배 속의 아이를 들먹이며 이 난리인 것이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대군마마께선 어서 결단을 내리시지요.”

말로만 결단을 내리라 할 뿐, 이것은 협박에 가까웠다. 무너져 버린 성해의 왕실을 우습게 봐도 한참 우습게 보는 처사였다.

“어서 결단을 내리시지요.”

두려움에 잔뜩 떨리는 수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왕명은 다시 한번 다그쳤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의 눈빛이 수현에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네가 감히 왕의 자리를 고사하지 않고 배기겠느냐고.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결국, 수현이 입을 열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급하게 결정할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러니 시간을…….”

수현의 말에 중전이 목소리를 높였다.

“수현 대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어째서…… 대군에게 소중한 것을 저들이 빼앗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어마마마. 왕명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대군!”

“그러니 생각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분명…… 저들에게도 명분은 있으니까요.”

수현의 말에 왕명은 비소를 내비쳤다. 뻔뻔하기는 하나 양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네,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만 물러가거라.”

왕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험상궂은 사내들이 방을 빠져나갔다.

“대군마마의 뜻을 존중하여 수일의 시간을 드리겠나이다.”

한껏 선심 쓰는 듯한 말투에 중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럼,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게 정말 마마와 성해를 위해 좋은 길인지.”

마지막 말을 끝낸 왕명은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춘 채 자리에서 돌아섰다.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춘 그를 보며 중전은 끝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야 말았다.

“어마마마!”

놀란 수현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였다. 충격이 심했는지 중전은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런 어마마마를 보며 수현의 마음을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또다시 저 때문에…… 어마마마가…… 어마마마가…….

“수현 대군…….”

“예, 어마마마.”

“이 어미가 미안합니다.”

“어마마마…….”

“내가 대군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해…… 그래서 미안합니다.”

“아니옵니다. 소자는 그저 어마마마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옵니다.”

“아니요. 내 손으로 지켰어야 합니다. 어떻게든…… 내 손으로…… 지켰어야…….”

그 말을 끝으로 중전은 끝내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수현은 소리 없이 쓰디쓴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혹여나 저가 우는 모습을 보면 어마마마가 더 속상해하실까, 그리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중전의 침소에는 비탄 섞인 눈물 소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칼같이 매서운 바람이 뾰족한 산봉우리를 스치며 역시 서럽게 울어 댔다.

* * *

성해의 요새는 남방에 위치해 북방에 비하면 매우 따뜻한 곳이었지만, 산속에 있는 터에 겨울은 더 춥게 느껴졌다.

새소리마저 청승맞게 들리는 늦은 밤, 수현은 홀로 처소를 나섰다. 둥근 달은 가까이에 떠올라 오늘따라 더 크게만 느껴지는데 포근하게 내려앉은 달빛이 무색하리만큼 수현의 마음은 괴롭기만 하였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거늘, 수현의 마음은 좀처럼 편해질 수 없었다.

저가 그토록 꿈꾸어 왔던 성해 백성의 품속에 돌아오게 되었거늘, 그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차가운 시선에 오히려 살얼음을 걷는 것만 못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곳에 와서 마음고생이 심하니, 수현은 미안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은 어마마마에게 가장 미안했다. 긴 세월 생사도 모르고 살았던 만큼 모자 간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실 텐데, 미천한 몸뚱이가 도무지 어마마마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저 때문에 분란이 계속되는 것만 같아 송구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곳을 찾아온 것이 잘못된 일인가 싶기도 했고…… 그리고 또 태주에게도 미안했다. 저를 애써 이 먼 곳까지 데려왔는데, 매번 이런 곤란한 상황만 겪게 하니 그의 낯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리고…… 제 배 속에 든 아이에게도.

“아…….”

아이를 생각하니 왈칵 감정이 치솟았다. 분명, 엄마가 이리도 심란하면 아이에게도 악영향을 끼칠 터였다. 변변치 못한 어미를 만나 태어나기 전부터 마음고생을 할 아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저가 아니었다면…… 태화 황제의 씨를 품은 이가 이 몸이 아니었다면…… 궁에서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평온하게 잘 자랐을 텐데…….

‘나는 참으로 못난 어미가 아니던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참으로 그랬다. 하물며 아이를 지우라는 겁박까지 듣게 만들고.

배 속에 아이가 그걸 듣고 얼마나 불안에 떨었을까. 혹여나 어미가 저를 버리나 싶어 얼마나 구슬프고 무서웠을까. 

이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흐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구슬 같은 눈물이 수현의 눈동자를 타고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왕자님…….”

달빛 아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수현에게로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마 돌아볼 정신이 없어 그저 숨죽여 눈물을 삼키는데, 그런 수현에게로 태주가 천천히 다가섰다.

하얀 달빛이 내려앉은 어깨가 정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날개를 다친 작은 새처럼 한없이 안타까운 모습에 태주는 할 말조차 잃어버려야 했다. 커다란 달을 등지고 자리에 선 음인의 모습이 그의 심장에 아프게 새겨졌다. 

이토록 아름다운, 누구도 넘볼 수 없이 고귀한 이가 왜 이다지도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라면…… 저였다면 절대 이리 울게 두지 않았을 텐데…….

“왜…… 왜 이리 구슬프게 울고 계십니까.”

한탄하듯 태주가 말했다. 수현은, 차마 입조차 뗄 수 없는 수현은 어떻게든 눈물을 삼켜 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슬픔은 더욱 차올랐다.

심장이 너무 작아서, 그 많은 눈물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그렇게 계속해서 흘러넘쳤다.

“왕자님…….”

태주는 당장에라도 손을 내밀어 수현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다. 혹여라도 저이의 손을 대었다간, 걷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다시는 벗어날 수 없게 제품 안에 가두고만 싶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공자님…….”

물기에 젖은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달빛 아래 하얗게 젖은 얼굴이 들어 올려졌다. 감히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눈빛이 태주를 향했다.

촉촉이 젖은 눈으로, 서글프리만큼 어여쁜 그 입술로 수현은 슬픔을 부르짖고 있었다. 태주의 마음은 알지도 못한 채.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나는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도무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운을 떼는 중간중간에도 수현은 억지로 눈물을 집어삼켰다.

“나는 평생 한 사람을 미워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그이는 저와 제 가족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은인이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요.”

수현이 크게 숨을 들이셨다. 떨리는 손길로 옷자락을 붙잡았다.

“나는 평생 그들을 그리워하며 살았습니다. 보란 듯 그들의 품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사는 날만을 기다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배 속에 든 아이를 죽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태주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공자님, 나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평생 누구를 미워했으며, 누구를 그리워한 것일까요.”

“왕자님.”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해 여태껏 살아온 것일까요…….”

“…….”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하여 그토록 그를 미워했단 말인가요…….”

“…….”

“이제껏…… 나는 무엇을 한 것일까요…….”

순간, 태주의 손이 결국 수현을 향해 뻗어졌다. 뜨거운 체온만큼, 세차게 뛰는 가슴으로 태주가 수현을 품에 안았다. 

저를 품에 안고도 한참 남는 커다란 어깨가 수현의 몸을 감쌌다. 마주 닿은 가슴이 터질 듯 뛰며 심장 박동이 수현에게로 전해졌다.

수현은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그의 손길을 뿌리치기엔 이미 너무도 지쳐 있었기에. 그저 태주의 품에 안겨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이젠 삼켜지지도 않는 그 눈물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왕자님. 수현 왕자님.”

너무 가여워서. 이대로 두면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아서. 수현을 부르는 태주의 목소리는 너무도 간절했다.

“왕자님이 이토록 힘들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공자님…….”

“왕자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더는 누구 때문에 고통받으며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부디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지 마시옵소서.”

“하지만…… 하지만…… 나는…….”

“저는 누구를 미워할 필요도. 그리워할 필요도 없으십니다.”

“…….”

“그저 왕자님만 생각하시옵소서. 왕자님과 배 속의 아기만.”

눈물이 그득 담긴 동공이 일렁였다. 태주의 품 안에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곳, 성해의 백성들이 왕자님께 고통을 준다면, 왕자님께서 굳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

“왕자님의 배 속에 든 아이를 해하려 하는 이들인데, 어찌하여 왕자님께서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성해도 아닌, 태화도 아닌 새로운 곳으로. 아무도 왕자님을 괴롭게 하지 않는 곳으로…….”

“…….”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그곳에서는 왕자님도 더 이상 고통받지 않을 겁니다. 왕자님과 왕자님의 아기만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소인이 그리 만들겠습니다.”

다시 한번 태주가 수현을 꽉 끌어안았다. 수현은 여전히 슬픔이 가득하여,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당장 소인과 함께 이곳을 떠나시지요. 날이 밝는 대로. 바로…… 왕자님과 왕자님의 아이를 위하여…….”

수현은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었을 뿐.

그새 밤은 더 깊어져 불어오는 바람에 눈물 젖은 살이 아렸다. 살을 엘 듯한 차가운 바람에 그대로 마음 또한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했다.

깊은 밤, 어둠을 밝힌 호롱불이 바람에 흔들렸다. 수현은 탁자에 앉아 붓을 들고 있었다. 하얀 종이를 펼친 채 검정 먹물을 붓끝에 묻혔다. 먹이 붓의 수염을 검게 물들여 갔다.

가장자리부터 글자를 빼곡히 채워 나가는 수현은 머릿속으로 지난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궁으로 들어가기까지 힘겹게 버텨 냈던 시간. 그리고 궁에 들어가서 보내 왔던 나날들.

그 기억의 처음과 끝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볼 수조차 없는 그 사람, 바로 명휘였다.

이상했다. 분명, 궁에서 그와 지낼 때는 미치도록 싫었던 그 순간들이 시간이 흘러 다시 돌이켜보니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렇게 죽이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저를 대신하여 불구덩이에 갇힌 모습을 보았을 때, 수현은 미친 듯이 가슴이 아려 왔다.

그때는 정신이 없고 너무 괴로워 알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알 것도 같았다. 그건 어쩌면…… 아마도…….

“아…….”

붓을 움직이던 수현의 손길이 멈추었다. 그것은 어느덧 저도 모르게 눈가에 차오른 눈물 때문이었다. 

저도 모르게 수현의 손이 배를 향했다. 안에 잠들어 있을 아이를 쓰다듬듯, 천천히 배를 어루만졌다.

오늘따라 배 속의 아이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두 번의 생명을 구해 준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었기에.

‘이 아이만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수현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기나긴 문장을 이어 간 끝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것을 받아 들 어마마마의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를 지켜야 했다.

그것이 저를 위해, 목숨까지 버려야 했던 그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왕자님, 준비되셨습니까.”

마침,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싸한 향기와 함께 등장한 것은 태주였다. 수현은 지체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글자가 빼곡히 채워진 종이를 곱게 접어 봉투에 담았다.

“네, 준비되었습니다.”

편지가 담긴 봉투를 들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마지막으로 방을 둘러보는 사이, 문이 열리고 태주가 들어섰다. 그 역시 외출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것은…….”

수현의 손에 들린 서찰을 보고 태주가 물었다.

“어마마마께 드릴 서찰입니다.”

“그렇군요.”

“차마 얼굴을 뵙고 말씀드리기가 어려워 글로 대신하였습니다.”

“힘든 결단을 하셨습니다.”

밤새 울었던 것인지, 붉게 물든 눈가가 태주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럼, 이만 나가시지요.”

수현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그렇게 처소를 벗어나려니,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저를 따라 이 먼 곳까지 온 장 상궁이었다.

“마마.”

그녀는 이미 태주에게 들었던바, 수현을 따라 먼 길을 떠날 각오를 하고 수현을 찾았다.

하나, 수현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현은 아예 태화를 떠날 작정이었다. 저 때문에 장 상궁까지 가족과 생이별하게 할 순 없었다.

“장 상궁님.”

“소인도 마마를 따라나설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이제 태화도 성해도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날 것입니다. 장 상궁님께서는 굳이 나를 위해 고향을 떠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장 상궁은 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번 마마께서는 미안하다, 아니 된다고만 하시니 소인은 그저 서운할 따름입니다.”

“……장 상궁님.”

“이제 소인의 마음을 알아줄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소인이 마마의 곁에 있을 수 없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소인의 생이 다했을 때일 것입니다. 정녕, 소인의 명이 다하기를 바라시고 이리하시는 것입니까.”

저가 뭐라고…… 어째서 이리도 과분할 정도로 아껴 주는 것인지 수현은 알 수가 없었다. 장 상궁도, 태주도 왜 저를 위해 이리 희생하는 것인지, 미안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자님. 그리하시지요. 지금 왕자님은 홑몸이 아니십니다. 장 상궁님께서도 그런 왕자님을 두고 홀로 떠나실 수 없을 것입니다.”

태주가 옆에서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수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에게, 그리고 장 상궁에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이 은혜를 갚고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잘 생각하셨습니다, 왕자님.”

태주는 한껏 웃어 보였다. 장 상궁의 얼굴 역시 활짝 웃어 보였다. 혹시나 마마께서 저를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던 터였다.

“그럼.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시지요.”

태주가 두 사람의 앞으로 나섰다. 날이 점점 밝아 오고 있던 터였다. 태주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두 사람은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중전의 처소였다. 수현이 서찰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던 터였다.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녀오시지요.”

중전의 처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태주가 멈춰 서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수현은 혼자서 처소 앞으로 걸어갔다. 

임시로 만들어진 곳이나마, 높으신 분을 위해 처소 앞은 시위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이른 시간, 중전을 찾은 수현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군마마. 이른 시간에 어인 일로 오셨나이까.”

시위의 물음에 수현은 품에 감추어 둔 서찰을 꺼내었다.

“어마마마께서 기침하시면 이것을 전해 주시겠습니까.”

시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이내 수현의 서찰을 받아 들었다.

“그리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리하여 주십시오.”

“예, 대군마마.”

시위에게 확답을 들은 수현은 그들에게서 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처소에서 다소 물러선 그가 중전의 처소를 마주 보고 섰다.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떼어 내며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마마마. 이 불효자를 용서하지 마시어요.”

수현이 조심스럽게 바닥 위에 엎드렸다. 중전이 자고 있을 처소의 문에 대고 그가 큰절을 올렸다. 

겨울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땅의 기운이 차갑게 몰려왔다. 제 어미를 두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수현의 마음처럼, 그렇게 싸늘한 공기가 그의 몸을 감싸고 돌았다.

“부디…… 소자를 잊으시고, 앞으로 무병장수 하시옵소서.”

쓰디쓴 눈물을 집어삼킨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겨우 돌아서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장 상궁이 달려와 부축하였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몸을 한 그의 상전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마마…….”

“나는…… 괜찮습니다.”

“…….”

“이제, 떠나야지요. 날이 밝아 오고 있습니다.”

잠자코 있던 태주가 그들의 앞으로 나섰다. 장 상궁에게서 수현을 넘겨받아 부축한 그가 수현을 말 위에 먼저 태웠다. 곧이어 태주도 말에 올라탔다. 장 상궁 역시 준비된 또 다른 말 위로 올라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왕자님.”

이랴, 태주가 세차게 말을 배를 걷어찼다. 힘차게 발을 내딛는 말과 함께 수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출구로 향하는 말 위에 올라앉아, 수현은 멀어져 가는 옛 성해 터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시선에서도 그는 중전의 처소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고요한 산속에 두 마리 말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덧 산등성이를 비추며 태양은 떠오르고 있었다.

* * *

겨울이 지나가 버린 뜰은 이제 막 솟아나는 새싹들로 푸릇푸릇했다. 창을 열어 밖을 바라보던 수현은 아예 밖으로 나섰다. 

밤새 비가 왔는지, 땅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비 덕분에 흙내음은 더욱 짙어져 코끝을 적셨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냄새가 유난히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엄마를 따라 아기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배 속에서 거세게 발길질을 해 댔다. 수현은 시선을 내려 제 배를 쳐다보았다. 이제 제법 불룩해진 배에서 강한 태동이 느껴졌다.

“아기씨. 기분이 좋아요? 오늘따라 발길질이 거세네요.”

다정한 목소리로 수현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태동이 잠잠해졌다. 

사랑스러운 존재에 수현의 얼굴은 한껏 미소가 번져 갔다. 배 속에서부터 이리 엄마 말을 잘 듣는 것을 보면 꽤 영특한 아이임이 분명했다. 아직 태어나지조차 않은 아이가 너무도 소중해 수현의 손을 배를 떠날 줄 몰랐다.

지난겨울, 수현은 혹독하디 혹독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또 한 번 먼 길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야 했던 터였다. 

요새를 빠져나온 수현은 태주를 따라 낯선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성해의 도읍이었던 곳보다 훨씬 남쪽의 지방이었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낯선 어촌마을이었다.

수현의 몸 상태도 그러했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태주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자고 하였다. 안정기에 접어들지 못한 임산부의 몸으로 먼 곳을 갈 수는 없었던 터였다.

그렇게 새로이 터를 잡은 태주는 도읍을 오가며 또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나갔다.

서방에 살 곳을 마련해야 했기에 저가 가진 모든 것을 처분한 것이다.

시간은 지나 찬 바람이 그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쯤 태주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서방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은 바뀌어 이제 태화는 오간 데 없고, 그 넓은 영토는 모조리 성해의 터가 되었다. 장왕명에 의해 새롭게 시작된 성해는 나날이 번창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 드디어 서방으로 떠나는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제, 수현은 태화도 아닌, 성해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가 또 다른 삶을 시작하게 될 것이었다.

배 속에 든 아이와 함께. 명휘가 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작은 아이와 함께.

“마마. 벌써 기침하셨나이까.”

아침부터 뜰을 거니는 수현을 보곤 장 상궁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 장 상궁님.”

따뜻한 봄날의 햇살을 한껏 맞으며 수현이 웃어 보였다. 그런 그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입덧이 멎은 탓인지 수현의 혈색은 예전보다 많이 좋아져 있었다. 이곳에 머물며 밥도 잘 먹었다.

덕분에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던 장 상궁이다.

“날씨가 참으로 따뜻합니다. 이제 바야흐로 봄이 된 게지요.”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피어난 새싹을 바라보며 수현이 말했다.

“과연 그러합니다. 이제 찬바람도 더는 불지 않으니,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내일부터 먼 길을 떠나셔야 하는데, 날씨가 이리도 좋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수현은 장 상궁의 말에 웃음으로 대꾸하였다. 젖은 흙의 느낌이 좋아 수현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따라 장 상궁도 덩달아 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은 뜰은 여기저기 빗방울이 맺혀, 내리쬐는 볕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참, 공자님께선 일어나셨습니까?”

“공자님께선 일찍이 외출하셨나이다.”

“아침부터요?”

“예. 급히 볼일이 있으시다면서 그리 나가셨습니다.”

“무슨 일이시길래…….”

수현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태주가 하는 모든 일을 그가 알 수 없었기에, 이번에도 무언가 중요한 일이 있겠거니 여긴 것이다.

“아무래도 내일 출항 준비로 매우 바쁘시겠죠.”

“왜 아니 그렇겠사옵니까. 그 먼 곳까지 가야 하니 준비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참으로 공자님께선 대단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도맡아 해 주시니…….”

수현은 말끝을 흐렸다. 언젠가 태주에게 이 모든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배려가 너무도 커 과연 저가 다 갚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터였다.

‘내가 이렇게 계속 받기만 해도 괜찮은 것일까…… 이미 너무도 많은 것을 공자님께 받았거늘…….’

“저, 마마.”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네, 상궁님.”

“저, 그러니까. 그것이…….”

어서 말해 보라는 수현의 표정을 보며 어쩐지 장 상궁은 뜸을 들이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수현을 향한 태주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궐에 있었을 때는 그저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때 마마는 황제 폐하의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녀의 생각은 바뀌었다. 태주가 워낙 인격자인 데다가 마마에 대한 마음이 이토록 지극정성이니, 이제 그의 마음을 마마께서 알아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였다.

그에 더해 외람되지만 폐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앞으로 마마와 마마의 아이를 돌봐줄 아빠가 필요하지 않겠나 싶기도 했고.

“마마께서는 공자님을 어찌 생각하고 계신지요.”

결국, 장 상궁이 입을 열었다.

“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소인은 궁금하옵니다. 마마께서 공자님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계신지요.”

수현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해맑게 답하였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저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 주시니, 앞으로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을 정도입니다.”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답에 장 상궁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마마가 태주를 대하는 모습을 보자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답변이었다.

태주의 속마음을 전혀 알 리 없는 마마는 그저 고마운 분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마마. 혹, 공자님께서 마마를 마음에 품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신지요.”

장 상궁이 답답한 마음에 큰 수를 두었지만, 어쩐지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했다.

“장 상궁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자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니십니다. 혹여라도 그런 말씀 마시지요.”

호언장담하는 말에 장 상궁은 맥이 탁, 놓였다. 폐하 때도 그러더니, 공자님마저도…… 옆에서 보면 빤히 보이는 사람의 마음을 왜 저리도 알아채지 못하시는 걸까. 장 상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마마께 워낙 힘든 일이 많았으니, 그럴 수 있다. 지금 마마께는 양인의 정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을 것이다.’

“소인이 생각이 짧았습니다.”

결국, 장 상궁이 야심 차게 들어 올렸던 꼬리를 내렸다. 훗날을 기약하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조반을 준비하겠나이다. 마마께선 이제 슬슬 처소에 드시지요.”

“네, 그것이 좋겠습니다.”

수현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처소로 향하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장 상궁도 발걸음을 돌렸다.

태주는 해가 떨어지고서야 돌아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태주가 찾은 것은 수현의 처소였다. 그는 차마 방문 너머로 들어서지 못하고 멀거니 창가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단정한 차림을 한 채로 책을 펼쳐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이 눈에 아프게 들어왔다.

“공자님……?”

조금 더 멀리서 바라봤어야 했던 걸까. 그만 수현이 태주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창 너머로 빤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태주를 발견하고 수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오지 않고 창밖에 서서 쳐다보고 있던 것이 의아했던 것이다.

“이제 오셨습니까. 아침 일찍부터 나갔다고 하시더니, 오래 걸리셨군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수현은 이내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네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보며 태주가 체념하듯 고개를 돌렸다. 창가에서 벗어나, 문 앞으로 그가 이동했다.

“왜 들어오지 않으시고 그리 계셨습니까.”

문 앞에서 태주를 맞이하며 수현이 물었다. 복잡한 심경을 숨긴 채로 태주가 수현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였다.

“왕자님께서 혹여나 주무시고 계실까, 살펴보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셨습니까.”

다시 한번 태주의 배려심에 깊이 탄복하며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시간이지만.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무렴요.”

문지방 너머로 태주가 들어섰다. 방에 마련된 탁자에 앉으니, 맞은편으로 수현이 와서 앉았다.

“나가신 일은 잘 마무리되셨는지요.”

평소보다 조금 무거운 분위기에 수현이 먼저 말을 꺼내었다.

“예.”

태주는 평소보다 짧고 간결하게 답하였다. 수현은 그런 태주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제 앞에 앉아 있는 것은 언제나 다정하게 웃어 보이던 태주가 맞거늘…… 어쩐지 오늘따라 분위기가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한데 공자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혹여나 내일 떠나는 것과 관련하여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요.”

걱정스레 묻는 수현에 태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저희는 원래 예정대로 내일 서방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탈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곧 어색한 침묵 속에 파묻혀야 했다. 수현은 그저 무슨 말을 건네야 하나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한참 동안 말을 아끼던 태주가 말을 건네왔다.

“왕자님…….”

수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주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조차도 태주는 마음이 아파졌다.

“왕자님께서는…… 아직도 명휘를 그리워하고 계신지요.”

너무도 오랜만에 꺼낸 그 이름에 수현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수현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태주는 그것을 눈치채고 있던 것이다. 사실, 수현은 줄곧 명휘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눈시울을 붉히며, 때때로 떠오르는 명희에 가슴 아파 했던 것이다.

“알고…… 계셨습니까.”

수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피해 빨개진 얼굴을 푹 숙이었을 뿐.

“예.”

수현은 어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간사합니다. 그토록 모질게 굴었으면서…… 이제 와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태주는 말없이 물끄러미 수현을 응시하였다. 단지, 이것만으로는 안 되었다. 그는 더 알아야만 했다. 정확한 수현의 마음을.

“그것은 연모하는 감정입니까.”

그래서 태주는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놓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고, 공자님…… 그게…… 무슨…….”

“마마의 마음이. 명휘를 연모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공자님…….”

수현의 눈동자가 한없이 떨리었다. 차마 무어라 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넋을 놓는 수현. 태주는 그런 수현을 한 치 흔들림 없이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답을 요구하는 태주의 눈빛에 수현은 결국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의 대답에 태주의 눈동자마저 흔들렸다. 수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조금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왕자님의 대답이군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의 태주는 참을 수 없이 가슴이 아파 왔다. 묵직한 돌이 짓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껏 태주가 행한 일은 결단코 수현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아프고 아팠다. 그만큼 소중했기에. 그만큼…… 아끼고 있었기에.

“시간이 늦었습니다.”

쓰린 마음을 감추고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뜬금없이 명휘에 관해 물은 것도 모자라 금방 자리에서 일어서는 태주를 보며 수현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벌써 일어나십니까.”

“내일 먼 길을 떠나려면 일찍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긴 하온데…….”

“푹 쉬십시오.”

예를 갖춘 그가 자리에서 돌아섰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그 모습에 수현은 차마 더 붙잡지 못하고 멈춰 서 버렸다.

지금껏 제가 알던 태주의 모습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토록 쓸쓸해 보이는 태주는 본 적이 없었다.

“……공자님.”

듣는 이가 없는 곳에서 수현의 목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방 안을 비추는 호롱불이 살며시 이는 바람에 흔들렸다.

떠나는 날. 하늘은 매우 화창했다. 쏟아지는 볕을 맞으며 수현은 마차에 올라탔다. 항구로 향하는 마차였다. 서방으로 가는 데에는 육로가 용이했으나, 장기간 여행이 임산부에게 해로울 수 있으니 배편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간단한 짐을 마차에 옮긴 장 상궁도 수현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태주는 두 사람과 달리 말에 올라탔다. 그는 단독으로 말을 타고 항구로 향할 참이었다.

“저는 어디 들렀다 갈 곳이 있사오니, 먼저 배편에 올라 계십시오.”

말에 올라탄 태주가 수현에게 말했다.

“예? 공자님? 어디를 들렀다 오시길래…….”

“늦지 않게 갈 것입니다. 그러니 염려 마시고 먼저 가 계시지요.”

출항 당일에 어디 갈 곳이 있다는 태주가 의아했지만, 수현은 토를 달지 않았다. 태주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신뢰하는 그였기에, 이번에도 무슨 일이 있으려니 했던 것이다.

“그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화를 끝낸 수현이 마부에게 얘기했다.

“이만 출발하시지요.”

곧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푸히힝, 요란하게 콧바람을 내뿜으며 울어 젖힌 두 마리의 말이 서둘러 발을 굴렀다.

“…….”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마차를 보며 태주는 잠시 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그런 그는 한없이 아련한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현 왕자님…….”

부디, 행복해지십시오.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한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로 쓰디쓴 눈물을 삼킨 그가 말의 배를 찼다.

“으랴!”

힘찬 목소리와 함께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해를 닮은 커다란 눈동자가 물기에 잠기어 있었다. 

세차게 발을 내딛는 말과 함께 그가 길을 나섰다. 마차가 달린 곳과는 정반대의 길로 향하며, 그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구어졌다.

배에 도착한 수현은 태주가 올 때까지 먼 데 바다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정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절벽에 눈앞에 드리워져 있었다.

푸르른 물과, 병풍처럼 둘러 있는 적색의 절벽. 한 폭의 단아한 그림 같은 풍경을 눈에 담고 수현은 한참이고 제자리에 멈추어 있었다.

그런 그는 어느덧 기억 속 한때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 언젠가 명휘의 손에 의지해 절벽에 자리한 난간에 매달려 있던 그때로.

그때 불었던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눈앞에 저의 손을 붙잡은 명휘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휘날리는 바람 속에서 한없이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눈앞에 아련했다. 

그땐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던 그 눈빛이 기억을 되짚어 보니 한없이 슬프게만 보였다.

그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곤명호에 빠져 죽겠다며, 죽기를 자처하는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마치 눈앞에 있는 이에게 건네듯 수현이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를 향해 그날의 대화를 건네 보았다.

“……그리해 주시겠습니까.”

듣는 이는 말이 없다. 그저 그 슬퍼 보이는 눈으로 하염없이 쳐다볼 뿐.

“정녕, 그리해 주시렵니까.”

수현은 다시금 소리 내어 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 정녕, 그리해 주시렵니까.”

혹시라도, 그가 답해 줄까. 부르면 대답해 줄까. 허공에 대고 말을 건네 보았다.

“…….”

하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것은 무엇도 없었다. 점점 잦아드는 바람결에 눈앞에 잔상만 희미해질 뿐.

수현은 체념하듯 손을 거두었다. 이제 와서 불러 본다 한들, 답할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참아 왔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다시금 눈물이 흘렀다.

후회하고 싶지 않은데. 더는 그리워하고 싶지 않은데. 남아 있는 기억은 그를 계속해서 심연으로 끌고 들어갔다.

‘조금 더 일찍.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일찍, 그의 손을 잡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행복했을까?’

수현이 아픈 가슴을 부여잡았다. 바다에 이는 바람에 눈물이 흐른 볼이 쓰라렸다. 수현은 애써 눈물을 멈추려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이 시점에서 이렇게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저를 위해서라도, 저를 위해서 희생한 그를 위해서라도. 그가 남기고 간 배 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어찌 이 손으로 꽃 같은 그대를 해할 수 있을까.”

하지만 곧 수현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급히 고개를 추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혹여나 저가 잘못 들은 것일까 싶어 귀를 의심해 보지만, 그 목소리를 분명 환상이 아니었다.

“짐이 그대를 이리도 아끼니.”

그리고 다시 한번 그리운 그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비로소 수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를 감싼 바람이 몰고 온 달콤한 복숭아 향이 온통 진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는 오래도록 짐의 품에 안겨야 하지 않겠느냐.”

수현이 천천히 뒤돌았다. 곧 그의 시야에 저의 뒤에 자리한 한 양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수현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북받쳐 오르기 시작했다. 서러워서, 원망스러워서. 이제야 제 눈앞에 나타난 그가 미워서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그때 그대에게 그리 말했었는데…….”

양인이 수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복숭아 향기는 더욱 짙어져 수현의 가슴을 정신없이 뛰게 했다.

“그대는 답하지 않았었지.”

눈물 젖은 시야에 저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는 양인의 모습이 보였다. 환상이 아닌, 복숭아 향기를 머금은 실존하는 양인의 손길이 그렇게 수현의 볼에 닿았다.

눈물이 흘러내린 볼을 닦으며, 그가 살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따뜻한 미소였다.

“이제라도 답해 주지 않겠는가. 그대의 마음을.”

볼에 닿은 손이 너무도 따뜻해서. 몰려오는 복숭아 향기가 너무도 다정하게 느껴져서. 수현은 그대로 명휘의 품에 와락 안기었다. 

두 볼에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이 명휘의 가슴팍을 적셨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여린 어깨를 그가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맞닿은 두 사람의 가슴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수현아.”

낮지만 차갑지 않은, 명휘의 목소리가 수현의 귓가를 슬며시 물들였다. 수현은 답조차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흐느꼈다. 얼굴을 파묻은 가슴이 한없이 넓게만 느껴졌다.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다.”

제 품 안에 안긴 수현을 어루만지며, 명휘의 손길 또한 떨리고 있었다.

“너무 늦게 깨달아서…… 그래서 미안하다.”

그가 수현의 볼을 살며시 그러잡았다. 제게 시선을 맞춰 들어 올린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시 너를 안고 싶다. 황제가 아닌, 한 사람의 양인으로서 다시 그대와 시작하고 싶다.”

“…….”

“이런 날…… 받아 줄 수 있겠는가.”

왈칵, 터져 나오는 울음을 집어삼키며 수현이 입술을 열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떨리는 입술로 그가 답했다.

“다신 폐하를 볼 수 없는 줄만 알았습니다. 다시는 폐하의 품에 안길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

“이제라도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렇게 살아서 만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수현아…….”

“다시…… 폐하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명휘가 수현을 세게 끌어안았다. 흐느껴 우는 수현을 품에 한껏 안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네게 더 이상 폐하가 아니야.”

그렇게 명휘의 입술이 수현의 입술을 찾았다. 그토록 오랫동안 엇갈려 왔던 운명을 씻어 내듯, 두 사람은 서로의 진심을 담아 입 맞추었다.

날고 싶었다. 나비처럼 허공을 날고 싶었다.

황제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비가 되어 나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그리하여, 너무도 행복했는데, 그러했는데.

결국, 다시 또 황제의 품 안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의 품 안이 얼마나 따뜻한지를 수현은 알고 있었다. 저가 결국 잠들어야 할 곳이 곧 황제의 품 안임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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