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수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시선에 보인 것은 익숙하디익숙한 풍경이었다.
“마마!”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상궁이었다. 그녀는 마치 수현이 죽다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격한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습기를 머금은 그녀의 눈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마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옵니까. 어찌 소인이 없는 사이 이런 일을 벌이셨단 말입니까.”
옆에서 흐느끼는 장 상궁을 두고, 수현은 경황이 없어 누운 자리에서 눈만 껌뻑거려야 했다.
“마마…….”
한참이 지나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수현을 보고 장 상궁이 다가와 부축하였다. 겨우 몸을 추슬러 수현이 등을 기댄 채 앉았다.
“어찌 된 것입니까.”
“예?”
“왜 내가 여기에 있습니까.”
사실 수현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어째서, 어이하여 뇌옥이 아닌 영화궁에 저가 있는 것인지.
평소 황제의 성깔대로라면 뇌옥에서 평생 옥고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분명 그리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어찌한 일인지 눈을 떠보니 저가 있는 곳은 뇌옥이 아닌, 영화궁의 제 처소였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폐하께서 직접 명하셨다 하나이다. 마마를 영화궁으로 모시라고.”
“……폐하께서요?”
“네, 그러하옵니다.”
“어째서…….”
이번에야말로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어째서…….
그러다 수현은 지난밤을 떠올렸다. 태화궁을 몰래 빠져나가려다 잡혀 왔던 그날 밤을.
뇌옥에 갇혀 황제에게 개같이 겁탈당했다. 그것은 늘 있었던 일이었기에 어쩌면 수현에게는 그리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단 한 가지, 황제가 제게 했던 말을 빼놓고는.
“……!”
수현은 다급히 이불을 걷어치웠다. 앉은 자리에서 배에 손을 가져다 올리는데.
“이…… 이건…….”
평소와는 다른 낯선 느낌이 아래쪽에서 느껴졌다. 그가 늘 입어 왔던 속곳과는 다른, 훨씬 두꺼운 천이 가랑이 사이에 걸려 있던 터였다.
“어찌 된 것입니까. 내가 입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요.”
이에 장 상궁은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마께서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마마, 모르고 계셨나이까.”
“무엇을 말입니까.”
“본디 음인은 결착 이후 며칠간은 하혈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궁이 파열되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순간, 수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마?”
“그…… 그럼, 그 말은.”
“예, 감축드리옵니다. 마마께선 폐하의 결착을 받아 내셨나이다.”
수현의 입술이 덜덜 떨려 왔다. 핏기가 가신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설마…… 설마……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발 꿈이길 바랐는데, 정말이었어…… 황제가…… 내게…… 결착을…… 결착을!’
도무지 믿기 힘든 현실을 마주하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증발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수현이 뇌까렸다.
“아닙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내가…… 내가…… 폐하의 결착을 받아 내다니요…… 절대…….”
텅 빈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고, 한곳에 집중 못하는 손이 마구잡이로 이불을 쥐어뜯었다. 현실 부정이라도 하듯, 쉴 새 없이 아니라고 떠들어 대는 수현을 보며 놀란 듯 장 상궁이 손을 붙잡았다.
“마마, 고정하시어요. 왜 이러시나이까.”
“말도…… 말도 안 됩니다…… 결착이라니요…… 결착…… 결착…….”
“마마, 진정하십시오. 몸에 좋지 않습니다. 마마…….”
어찌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던 수현의 손이 멈추었다. 그대로 획 고개를 돌린 그가 장 상궁을 향해 다그쳤다.
“그럼, 나는…… 나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마마.”
“설마…… 폐하의…… 씨를…… 아이를…….”
“…….”
장 상궁은 마주 잡은 손에 힘을 꾹 주었다. 마치 엄마 같은 얼굴로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마마, 비록 폐하의 결착을 받아 냈다고는 하나. 그것이 바로 회임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음인은 그 어떤 형질보다도 씨를 정착시키기 힘든 형질이니까요.”
“하면.”
“아직은 모릅니다. 적어도 보름은 지켜보아야 회임 여부를 알 수 있게 되지요.”
“…….”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아직은 속단하기 이르옵니다.”
절망 어린 수현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이제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이제 황제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유로워지나 했는데…… 옛 성해 백성의 품으로 돌아가 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일순, 수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성해의 백성…… 나의 잃어버린 백성…….
“마마! 왜 이러십니까, 마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수현에 놀란 듯 장 상궁이 소릴 내질렀다. 기겁하며 수현을 쫓아 나서는 장 상궁을 뒤로 한 채 수현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마마! 대체 왜 이러십니까. 고정하시어요, 마마!”
“놓으세요.”
“마마…….”
“전 가 봐야 합니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니 되옵니다. 마마, 제발 고정하시…….”
수현을 뒤따라가며 절실하게 소리치던 장 상궁의 입이 멎은 것은, 수현이 침전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을 때였다.
문 앞에 우뚝 선 수현은 마치 비석처럼 자리에 굳어 버렸다. 놀란 듯 크게 떠진 두 눈의 동공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이게…… 대체…… 무슨…….”
빨갛게 충혈된 눈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침전 앞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시위의 모습이었다.
둘, 셋, 아니, 넷. 총 네 명의 거대한 장정이 마치 수호신처럼 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하나같이 긴 칼을 허리춤에 매고 단단히 무장을 한 채였다.
“이게 다 뭡니까. 대체 이들이 왜 여기에 있단 말입니까?”
얼이 빠진 채로 수현이 말했다.
“마마…….”
“대체 이들이 왜 여기에 있느냐 물었습니다.”
“폐하께서…… 앞으로 마마를 영화궁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 명하셔서…….”
“……뭐라고요?”
“그뿐만이 아니오라, 앞으로 그 누구든 영화궁의 출입을 불허하시겠다고.”
“…….”
“송구하옵니다…… 마마…….”
수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그가 침전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문의 양옆을 지키고 서 있던 시위들이 앞을 막아섰다. 좀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마마.”
“비켜라.”
“아니 된다 하였습니다.”
“비키라 하였다!”
수현이 억지로 그들을 밀치고 나서려 했다. 그러자 거구의 장정들은 자리에서 꼼짝조차 하지 않고 팔로만 수현을 제지했다.
“이거 놓아라! 놓으란 말이다!”
“소신들은 폐하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놔! 비켜!”
“송구하옵니다.”
가뜩이나 허약해진 몸뚱이가 거대한 장정들을 이겨 낼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수현은 미친 듯 매달리며 그들을 뚫고자 발악하였다.
“마마! 이러지 마시어요! 마마! 아니 되옵니다, 마마!”
울부짖는 장 상궁의 목소리가 침전을 울리고, 수현은 눈앞에 보이는 게 없는 사람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였다.
“비켜라! 비키란 말이다! 나는 가야 한다. 나는 여기서 나가야 한다…… 당장 비켜…… 비키라고!”
“마마!”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영화궁 침전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켜보는 것조차 가슴이 너무 아려 나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훌쩍이고만 있었다.
“마마…… 제발…… 제발…… 마마…… 마마……!”
흐느끼던 나인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마저도 견디지 못하고 수현이 기절해 버렸을 때였다. 놀란 장 상궁이 의식을 잃은 제 상전을 부축하였다.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가 소리쳤다.
“태의를! 태의를 들라 하여라! 어서!”
나인들이 허겁지겁 발을 놀렸다. 난리 통에서도 장 상궁은 상전을 안고 침상으로 옮기려 애썼다. 나인들이 달려와 장 상궁을 도와 수현의 몸을 부축하였다.
“마마……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대체 왜 이러시나이까…… 마마…….”
의식이 없는 수현을 두고 침상 옆에 선 장 상궁이 눈물 지었다. 여전히 문밖을 지키고 있는 시위들은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각. 양심전에서는 명휘가 환관으로부터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귀비가 깨어났다고.”
“예, 폐하. 그렇다고 하옵니다.”
“그래, 깨어나서 어찌했다 하더냐.”
“그것이…… 어디론가 가야 한다고,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하나이다.”
“소동이라…….”
“마마께서는 시위들에 막혀 침전 밖으로 향하지 못하시다가 끝내 혼절하셨다 하옵니다.”
이제껏 감정을 지운 얼굴로 보고를 듣던 명휘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제자리를 찾은 눈썹처럼 명휘도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을 해 보였다.
“태의는 영화궁에 들었다고 하더냐.”
“예, 방금 태의가 영화궁으로 향하였다 들었나이다.”
“알았다, 물러가거라.”
“예, 폐하.”
그대로 몸을 조아린 채로 환관이 뒤로 물러섰다. 종종 발걸음으로 그가 양심전을 빠져나가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태감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찌하시겠나이까. 영화궁으로 가 보시겠나이까.”
명휘는 딱히 답이 없었다. 가지 않겠다는 의사로 보였다.
자리에 앉은 채로 명휘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연죽을 달라는 의미인 것을 아는 나인들이 준비하기 시작했다. 담배통에 연초를 채우고 설대를 연결하였다. 물부리까지 연결한 그녀들이 폐하의 앞으로 연죽을 내밀었다.
“하온데, 폐하.”
나인들이 담배통에 불을 붙이고 꺼서 연기를 퍼뜨리자 명휘가 자리에 앉은 채로 진한 연기를 들이마셨다.
“기태주는 어찌하시겠나이까. 이대로 그냥 두실 작정이시나이까.”
내뿜는 회색빛 연기가 느른한 눈길을 앞에 두고 퍼져 나갔다. 천하를 내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자의 수려한 얼굴은 짙은 색 연기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이번 귀비마마의 일은 분명 배후에 기태주가 있었을 터, 기태주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은 명휘는 계속해서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뿜기만을 반복하였다. 알싸한 연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명휘의 눈빛은 더욱 나른해졌다.
“폐하.”
좀처럼 답을 주지 않는 상전을 두고 애가 탄 태감이 다시금 힘주어 명휘를 불렀을 때, 명휘는 비로소 빨고 있던 연죽을 내려놓았다.
삼면이 하얀 날카로운 눈매가 태감을 직시하였다. 태감은 그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도 털이 바짝 서고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회임에 좋은 약재를 영화궁에 넣도록 이르거라.”
잔뜩 굳은 태감이 무색해지리만큼, 명휘는 태주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폐하.”
“그뿐 아니라, 태교에 좋다는 것들은 모두 준비해야 할 것이야.”
애초에 태주의 얘기는 거론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보이는 상전에 태감도 결국 입을 다물어야 했다.
예, 폐하.
그가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의 명을 전하기 위해 자릴 떠나는 태감을 보며 명휘는 다시금 연죽을 잡아 들었다.
그런 그의 입에선 나지막이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이번만이다, 기태주.”
그가 연기를 들이마셨다. 다시금 방 안에 회색빛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릿한 탕약 냄새가 영화궁의 침전에 퍼졌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에 감겨 있던 수현의 눈이 힘겹게 뜨였다. 혼절한 이후 줄곧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던 그였다.
“마마, 정신이 드시나이까.”
수현의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당연히 장 상궁이었다. 그녀는 수현이 혼절한 이후 지금껏 줄곧 잠을 청하지 못하고 수현의 옆을 지켰었다.
언제나 그래 왔지만, 이번만큼은 더욱 시름이 깊었다. 마마의 몸도 몸이었지만, 혹여나 그 안에 아기씨가 들어 있을까 걱정이 되었던 터였다.
회임하신 거라면, 이리 계속 아프셔서는 안 될 텐데. 마마를 위해서라도, 배 속에 있는 아기씨를 위해서라도 어서 기운 차리셔야 할 텐데……
수현이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주름살만 늘어 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피를 말리며 기다리던 끝에, 닷새째 되는 날 수현이 눈을 떴던 것이다.
“마마, 소인을 알아보시겠나이까? 소인, 장 상궁이옵니다.”
어쩐지 눈을 뜨고도 딱히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은 조바심이 났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게 아닐까 잔뜩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별안간 수현의 입에서 나직하게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 상궁님…….”
“예, 마마. 소인 여기 있사옵니다.”
“내가…… 얼마나…… 자리에…….”
“마마께선 오늘로 닷새째 자리에 계셨나이다.”
장 상궁의 말을 들은 수현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가뜩이나 핏기가 없는 얼굴에 감은 눈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볼을 따라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며 장 상궁은 가슴이 문드러질 것만 같았다. 하늘 아래, 황제에게 결착을 받아 내고 이리도 슬퍼하는 음인은 없을 터였다.
어찌하여 마마만 이리 모진 시련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만 행복해지시면 좋을 텐데…….
“상궁 마마님, 귀비마마께서 이제 탕약을 드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영화궁의 침전을 지키고 있던 한 나인이 장 상궁에게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이에 장 상궁은 짐짓 제 감정을 추슬렀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수현에게 말하였다.
“마마, 탕약을 드실 시간입니다.”
그 말에 수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두 뺨을 타고 눈물만 흘러내리는데,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만은 없어 장 상궁이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하였다.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가뜩이나 몸도 성치 않으신데…… 어서 탕약을 드시고 기운 차리셔야지요.”
“…….”
“마마…….”
한참 눈물을 흘린 끝에 수현이 감은 눈을 힘겹게 뜨고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장 상궁의 부축을 받아 벽에 기대어 앉았다.
한 나인이 침상에 다가섰다. 그녀는 거름망에 한번 거른 탕약을 잔에 담아침상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상전을 향해 탕약을 들어 올렸다. 지독한 탕약 냄새가 수현의 코를 찔렀다.
“마마, 어서 드시지요.”
수현은 탕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저 앉은 자리에서 입술만 짓씹고 있을 뿐이었다.
“마마.”
애가 탄 장 상궁이 다시 한번 불렀을 때, 수현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는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위한 탕약입니까.”
“마마, 그것이 무슨…….”
“무엇을 위한 탕약이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이…….”
장 상궁은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이 회임에 도움을 주는 탕약임을 알고 있었기에. 바른대로 말한다면 마마께서 안 드시겠다고 할 것이 뻔하였다. 황제의 씨를 품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고 계시니까.
“네가 대신 말해 보아라.”
머뭇거리는 장 상궁을 한참 보던 수현이 탕약을 올린 나인에게 말했다.
“예?”
“이 탕약이 무엇인지 네 입으로 말해 보아라.”
수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탕약을 들고 있는 나인의 손이 벌벌 떨리었다. 항상 자상하시던 마마께서 오늘따라 왜 이리 무서운 것인지.
“소인이 미천하여 정확히는 알 수 없사오나, 마마의 기를 보강하고음기를 북돋아 양인의 씨가 자궁 안에 무사히 착상할 수 있도록 돕는 탕약이라 들었사옵니다.”
순간, 수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장 상궁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을 모르는 나인만 혹여 저가 무엇을 잘못했나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양인의 씨가…… 자궁 안에…… 무사히 착상할 수 있도록 돕는 탕약이라 하였느냐.”
나인은 잔뜩 주눅이 들어 떨리는 입술을 겨우 떼어 냈다.
“그, 그러하옵니다. 마마…….”
수현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기었다. 그러다 탕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탕약이 담긴 잔의 손잡이를 잡고 그들어 올려 그대로 바닥에 내리부었다. 뜨끈한 갈색 액체가 바닥으로 좍 쏟아져 내렸다.
“마마!”
빈 잔을 나인이 들고 있던 받침에 내려 둔 수현이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 누웠다. 돌아누운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이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듣기 싫습니다.”
“회임을 돕는 탕약이 맞긴 하나, 또한 마마의 건강을 위한 탕약이기도 합니다. 마마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챙겨 드셔야만 합니다.”
“듣기 싫다고 하였습니다.”
“마마, 제발…… 이러지 마시옵소서. 이러다 건청궁에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분명 폐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
“마마…….”
때마침,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창호지를 바른 얇은 문 너머로 환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하필 이 순간에……! 장 상궁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찌 이런 순간에 폐하가 영화궁에 드신단 말인가……
벌써 앞날이 그려지는 것 같아 손이 벌벌 떨려 오는데, 그런 장 상궁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얇은 문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열리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나인이 일제히 몸을 조아리며 예를 갖췄다.
명휘는 그 어느 때보다 거만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걸음걸음 옮기는 그에게서 특유의 사향이 맴돌고 있었다.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사향에 수현은 누운 자리에서 입술을 짓씹었다.
“…….”
저가 온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기는커녕, 뒤돌지조차 않는 수현의 모습에 명휘가 피식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궁 안에서 아니, 태화의 모든 영토를 죄다 뒤져 보아도 저보다 오만방자한 이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었다. 그것도 곧 끝나 버릴 테지만.
“분명 귀비가 깨어났다 들었거늘, 아직 침상에서 몸조차 일으키지 못하였구나. 짐이 보고를 잘못 받은 것이더냐.”
비아냥거리는 말에 잠자코 있던 장 상궁이 나섰다.
“폐하, 그것이…… 아직 마마께선 몸이 온전히 회복된 것이 아니어서 그러하옵니다. 부디 이를 가여이 여기시어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같잖은 변명 따위 통할 리가 없었다. 장 상궁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명휘가 침상에 다가섰다. 그렇게 수현의 몸을 잡아 돌리려는데.
“……?”
바닥에 흩뿌려진 탕약으로 그의 시선이 꽂혔다. 어쩐지 탕약 냄새가 진동한다 싶더니만, 귀비의 배 속에 있어야 할 탕약이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는 것이었다.
명휘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고분고분하게 굴 귀비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괘씸한 꼴이 꽤 신경에 거슬렸다.
“이러라고 내린 탕약이 아니었을 텐데.”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나인들이 잔뜩 긴장했다. 명휘의 시선이 곧장 장 상궁에게 향했다. 어쩌면 이는 장 상궁의 책임이기도 했기에.
“말해 보아라,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장 상궁은 차마 제 입으로 마마께서 버리셨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에서 미끄러졌나이다 하고 거짓을 고하는 건 더더욱 안 되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씨알도 안 먹힐 얘기를 꺼냈다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터였다.
제 목숨 따위가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다만 이리 허망한 일로 잃어선 안 됐다. 언젠가 마마를 위해 써야 할 목숨이었으니.
“어찌 대답이 없지? 네년은 참으로 안하무인하게 입을 놀려 대던 년이 아니더냐?”
명휘가 장 상궁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대로 장 상궁의 멱살이라도 잡아 올리려는 듯 손을 움직이는데.
“제가 그리하였습니다.”
이제껏 죽은 듯 누워 있던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입술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명휘가 몸을 돌렸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귀비를 바라보며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구나.”
성큼성큼. 침상으로 발걸음을 옮긴 그가 귀비의 얼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밀어 달달 떨리는 턱을 살포시 감싸 쥐었다.
수현은 사향을 머금은 손끝에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눈앞이 새하얘지면서 그날의 감각이 떠올랐다. 황제의 양물에 의해 자궁이 찢길 듯했던 그날의 감각이, 씨를 받아 냈던 그 순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
순간, 명휘는 손끝에서 수현의 떨림을 느꼈다. 단지 턱을 잡힌 것뿐인데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이것 봐라, 체향에 이리 민감하게 되었단 말이지.’
물론 음인이 양인의 체향에 약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명휘 같은 극양인이 내뿜는 체향에는 더욱더.
하지만 그럼에도 수현은 늘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올리고 보란 듯 대들었다. 근래에 이토록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명휘의 눈빛에 어느덧 호기심이 어렸다. 확인해 보려는 듯, 그가 체향을 조금 더 풀었다. 그러자 수현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려 오는 게 보였다.
그 여린 눈동자는 잔뜩 겁을 집어먹고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명휘가 가장 좋아했던, 수현의 눈빛이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 떨고 있는 게냐. 짐이 그대를 어찌하였다고.”
명휘는 한껏 조롱하는 어투로 말하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저가 내뿜는 체향 아래, 쥐 죽은 듯 얌전해진 수현의 모습이 끔찍하게 보기 좋았다.
아마 이리된 것은 회임했기 때문일 테지. 양인의 씨를 품었기에 양인의 체향에 이리 더 민감해진 터일 테지.
명휘가 수현의 턱을 감싸 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 아랫것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니, 대기하고 있던 환관이 그의 손짓에 답하였다.
“예, 폐하.”
“가서 귀비의 탕약을 다시 대령하라 하여라.”
“예, 그리하겠나이다.”
환관이 눈짓하자 아까 수현에게 탕약을 올렸던 나인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명휘는 짐짓 다정한 얼굴을 해 보이며 귀비의 옆, 침상에 걸터앉았다. 가늘게 떨리는 수현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 몸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수현은 창백하게 질린 채로 하릴없이 명휘의 품에 안겼다. 이가 달달 떨려 입술조차 제대로 닫히지 않았다.
“지금 그대는 한창 조심해야 할 시기가 아니더냐. 그대의 배 속에 내 씨가 심어졌을지도 모르는데.”
명휘의 말에 수현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세차게 흔들렸다. 어느덧 시뻘겋게 실핏줄이 솟은 눈에 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새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한 줄기 눈물을 명휘가 닦아 냈다. 다정함을 가장한 손길에 수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손끝에서 묻어나는 짙은 사향이 수현의 코끝을 타고 파고들었다. 폐 속 깊숙이까지 파고드는 그 향기에 수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수현은 몸의 이상한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참을 수 없이 무섭고 두려웠는데 어째서인지 몸은 편안하게 늘어지는 것이었다.
예민했던 신경이 노곤하게 풀어지며 잠이 오는 듯 나른해지고, 불안하게 뛰어 대던 심장의 두근거림이 점점 잦으면서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수현의 몸은 명휘의 체향에 빠르게 안정을 찾아 나갔다. 아무리 부정해 보려 해도, 몸의 변화를 이길 순 없었다. 살포시 눈꺼풀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
결국, 제 의지와 상관없이 수현이 명휘의 품 안에서 몸을 편하게 늘어뜨렸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명휘의 동공이 잠시나마 미세하게 흔들렸다.
“폐하, 탕약이 준비되었나이다.”
마침, 밖에서 환관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을 품에 안은 채로 명휘가 한쪽 손만 내밀었다.
나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고 탕약을 들어 올렸다. 황제가 탕약이 든 잔을 건네받았다.
명휘는 아무 말 없이 수현의 입가에 잔을 가져다 대었다. 뜨끈하게 달여 낸 탕약이 입술에 닿자 수현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기와도 같은 행동에 명휘는 잔으로 수현의 아랫입술을 슬며시 눌렀다.
수현의 입술이 하릴없이 열리고, 명휘는 잔을 기울여 그 안으로 탕약을 흘려 보냈다.
점점 늘어지는 몸에, 수현은 포기하듯 탕약을 받아 마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먹지 않겠다며 바닥에 버리기까지 했던 그가 황제의 손길에 탕약을 받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모습을 지켜보는 장 상궁은 도무지 제가 아는 마마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 없어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수현은 앉은자리에서 쓰디쓴 탕약을 끝까지 다 받아 마셨다. 그것도 반항 한번 없이 고분고분하게.
그렇게 탕약을 다 받아먹은 수현은 복잡한 심경과 더불어 나른해진 몸뚱이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마마!”
놀란 장 상궁이 다급히 다가왔지만, 명휘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명휘는 제 품 안에 안겨 있는 귀비의 숨소리를 확인하고, 그대로 침상 위에 눕혀 주었다. 베개 위로 작은 머리통을 올리고, 가슴까지 이불을 끌어 덮어 주었다.
침상에 누운 귀비는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이 살짝 벌어진 입을 통해 드나들었다. 새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에 핏기가 돌며 뺨과 입술이 붉게 혈색을 찾았다.
“그만 나가 보거라.”
여전히 시선을 수현에게 고정한 채로 명휘가 말하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한 번쯤 안 된다며 의사를 표했을 장 상궁도 이번만큼은 단번에 고개를 조아렸다. 장 상궁을 비롯한 나인들, 환관들이 줄지어 방 안에서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홀로 남아, 명휘는 가만히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일어난 믿을 수 없는 일을 되새겨 보았다.
아무리 독한 체향을 풀어도 날 선 야생동물처럼 굴었던 귀비가 처음으로 제 품에서 몸을 늘어뜨리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성감을 일으키는 체향을 푼 게 아니었음에도.
‘아마도 배 속에 든 씨 때문일 테지.’
그렇게 생각하니 명휘는 기분이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여태 두려움에 절어 있는 귀비의 모습만이 그의 즐거움이라 생각했는데, 이리 제 품 안에 안겨드는 귀비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느낌이 색달랐던 것이었다.
명휘는 침상 옆에 걸터앉은 채로 이불 위에 손을 얹었다.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던 그의 손이 수현의 복부에서 멈추었다.
판판하기만 한 복부를 가만히 보다, 살며시 어루만졌다. 제 씨가 들어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했다.
“귀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곤히 잠든 이를 두고 명휘가 혼잣말처럼 말을 건네었다.
“그대는 감히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배 속에 짐의 씨가 들어 있음을.”
귓속을 파고드는 목소리에도 수현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상하리 만큼 무거워진 몸에 그저 속절없이 꿈속을 헤맸을 뿐.
“결국, 그대가 아무리 달아나고자 발버둥 친들 다시 짐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구나.”
명휘가 상체를 숙였다. 복부를 뒤덮은 이불 위로 그가 살포시 입 맞추었다.
“이제, 완벽하게 짐의 것이 된 채로.”
방 안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간혹 잠든 수현의 숨소리만이 고요 속에 섞여 들었다.
* * *
한 남자가 넓은 마당을 가로질러 급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태화에서 황궁을 제외하고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저택답게 갖가지 나무와 화초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지나, 남자가 한 건물 앞에 당도하였다.
커다란 문 앞에서 숨을 한번 고른 남자가 자세를 바로 했다. 꾹 닫힌 문에 대고 그가 소리쳤다.
“공자님, 소인이옵니다.”
이에 소리 없이 문이 열리었다. 남자가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외관에 걸맞게 서방에서 온 귀한 것들로 채워진 방 안에 한 남자가 등을 지고 서 있었다.
커다란 키, 떡 벌어진 어깨, 짧은 머리에 양복 차림을 한 사내는 다름 아닌 태주였다. 이 거대한 저택의 주인.
“공자님.”
남자는 태주를 향해 허릴 굽혀 인사했다. 태주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봄날에 내리쬐는 햇볕만큼이나 다정했던 얼굴이 초췌하게 변해 있었다. 몇 날 동안 잠을 청하지 못한 탓이었다.
“어찌 되었습니까.”
그의 얼굴만큼이나 목소리 또한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예, 일단 마마께서는 영화궁에 계신다고 하옵니다.”
사내의 말에 태주는 그나마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나마 다행이었다. 적어도 뇌옥보다는 나았으니까.
“그래서요. 마마는 어찌하고 계신다고 합니까.”
“예, 영화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신다 합니다. 영화궁의 처소 앞에는 시위들이 지키고 있어 그 어떤 누구의 출입도 허하지 않고 있다고요.”
태주가 입술을 짓씹었다. 비록 뇌옥보다는 나았지만, 최악의 상황임은 변함이 없었다. 이제 마마는 어디에도 오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가뜩이나 심각하게 굳은 태주의 표정을 보면서 사내는 어쩐지 다음 말을 아끼는 듯 보였다. 망설이는 그를 보며 태주가 말없이 표정으로만 재촉하였다. 이에 남자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꽤 신중한 목소리였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오나.”
“네.”
“귀비마마께서 회임을 하셨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태주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두고 태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잔뜩 떨리는 목소리가 듣기에 안쓰러울 정도였다.
“지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공자님…….”
“마마께서…… 회임을요?”
“그렇습니다.”
“확실한 것입니까? 무슨 근거로 그런 얘기가 돈단 말입니까.”
말을 꺼내는 사내의 표정은 다소 곤란해 보였다.
“그것이…… 회임에 좋다 하는 약재들을 궐에서 모조리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귀비마마의 처소에 들이기 위해서요. 뿐만 아니라 태교를 위한 나인 무리를 따로 만들어 영화궁에 추가로 들인다는 얘기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말이 없는 태주를 보며 사내가 의기소침해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태주는 그렇다 아니다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되었으니 돌아가 보라고 했을 뿐이었다.
자리를 떠나면서도 사내의 얼굴엔 찜찜함이 가시지 않았다. 얼마 전 태주가 직접 지시한 가운데 귀비마마의 도주를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비록 이어질 수 없는 연이라 할지라도 사내는 태주를 응원했었다. 오래도록 그를 알아 왔지만 이토록 진심인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아마 모르긴 몰라도 특별한 감정이었을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태화의 황제와 등을 지려고 하겠는가. 제 목숨을 버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사내가 떠나버린 방, 태주는 다시 창가 앞으로 자릴 옮겼다. 창을 열어 제법 쌀쌀해진 바람을 몸소 맞았다.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은 뒤뜰에는 초록 잎은 온데간데없고, 붉게 물든 나뭇잎만 무성하였다. 쓸쓸해진 풍경만큼이나 그것을 바라보는 태주의 마음도 쓸쓸해졌다.
저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저 때문이었다. 마마를 지켜 드리고 싶었다. 마마께 힘이 되고 싶었고, 마마가 그토록 아끼는 옛 백성들에게 마마를 모셔다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마마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된 저의 욕심이라는 것을.
마마의 행복을 바라는 이면에는 그를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처음엔 동정심이라고 치부해도 좋을 만큼 작은 감정이었으나,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감정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버렸다.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 명휘의 옆자리가 아닌, 제 옆에 두고 싶었다. 마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셨으니까.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웃을 자격이 있는 분이셨으니까.
결국, 마마에 대한 태주 자신의 욕망이 마마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이다. 저의 과오로 인해 마마는 다시 한번 그 지옥 같은 곳에 갇히게 된 것이다.
‘마마가 다시 궁 안에 갇힌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회임이라니. 회임…….’
쾅. 태주가 벽을 세게 내리쳤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상황 중에서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사실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궐 안에 터무니없는 허언이 돌지는 않을 터.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결국, 절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고개가 푹 꺾이었다. 벽을 짚고 있는 빈주먹이 바들바들 떨리었다. 억누른 마음에, 터져 나오지 못한 분노가 그의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어떻게 해서든 돌려놓아야 한다. 다시 예전으로…… 마마의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그때로……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하지만 정말 마마가 회임이라도 하신 것이라면 제게 씨를 심은 양인의 체향 없이는 잠시도 못 버티실 텐데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끝없이 제게 물었음에도 해가 지도록, 밤이 깊도록 질문에 대한 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미시가 되도록 수현은 잠에서 깨어나질 않았다. 침상에 누운 수현을 바라보는 장 상궁의 얼굴은 간만에 평온해 보였다.
다름 아닌, 얼마 전 황제가 방문했을 때 마마가 보인 행동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마마가 황제에게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굉장히 안화해 보이는 모습으로.
처음 보는 마마의 모습에 장 상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마의 행동 변화의 까닭을 깨달은 그녀는 크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답은 그뿐이었다. 마마가 회임을 한 것.
임신한 음인은 저에게 씨를 심은 양인의 체향에 극도로 온순해질 수밖에 없다.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제 아비의 체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에.
이런 장 상궁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듯, 수현은 종종 임신 증상을 보였다. 지금처럼 미시가 되도록 자리에서 못 일어나는 것도 그랬고.
그렇게 생각하니 장 상궁의 마음엔 기쁨이 넘치었다. 정말로 마마가 회임을 하셨다니. 황후마마조차도 못한 회임을, 마마께서 해내셨다니.
아마 폐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계신 듯했다. 그때 마마를 대하는 폐하의 태도가 평소와는 묘하게 달랐으니까.
그리 마마를 모질게 대하셨던 폐하라도, 제 씨를 품은 이를 함부로 하진 않을 터였다. 이제 마마가 순산만 한다면, 앞으로 남은 날들에 고통은 없을 것이다. 이보다 다행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으응…….”
잠든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이 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수현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같은 자상한 얼굴과 함께 장 상궁이 수현에게 바짝 다가섰다. 눈이 부신지 얼굴을 찡그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수현에게로 다정하게 물었다.
“마마, 기침하셨나이까.”
잠에서 깨어났음에도 어쩐지 수현은 몸이 무거워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는 그를 장 상궁이 도왔다. 침상 위에서 간신히 벽에 기대어 앉은 채로 수현이 물었다.
“내가 오래 잤습니까?”
“예, 마마. 벌써 미시이옵니다.”
“그렇게나요……?”
놀란 듯한 수현과 달리, 장 상궁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좋은 징조입니다. 그동안 마마의 몸이 평온하지 못하셨기에 되레 좋아지려 잠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마시지요.”
장 상궁은 일부러 회임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또 마마가 난리 난리를 치며 싫어할지도 모를 일이니.
“마마, 시장하시지요. 오반을 준비하겠습니다.”
장 상궁이 침전을 지키고 있는 나인 한 명에게 눈짓해 보였다. 마마의 식사를 들여오기 위해 나인이 준비하는 동안, 수현은 장 상궁에게 부축 받아 자리에서 내려왔다.
침의 위로 옷을 걸치고 그가 탁상에 앉았다. 분명 오랜 시간 숙면을 취하였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몸이 무거웠다.
“마마, 오반을 대령했나이다.”
문이 열리고, 음식을 든 나인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그네들은 들고 있던 음식을 차례차례 탁상 위에 늘어놓았다.
순식간에 상다리가 휠 정도로 수많은 음식이 상 위에 가득 놓였다. 식욕을 돋우는 맛있는 냄새가 침전을 가득 채웠다.
“마마, 어서 자시지요.”
말을 하고 장 상궁은 은근히 수현의 내색을 살피었다. 평소 마마라면 되었다며 밥상을 물렸을 터였다. 아니면 고작 몇 숟가락 깨작이거나.
하지만 지금 밥상 앞에 앉은 수현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군침이 도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수현이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우선 국을 한 입 떠먹은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국을 퍼먹기 시작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밥이며, 반찬이며, 고기며, 나물이며 가릴 것 없이 마구 닥치는 대로 입안에 처넣었다.
이 궁에 들어와 마마가 이리도 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마마, 입맛에 맞으신지요.”
장 상궁의 묻는 말에 수현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그의 표정은 꽤 심각해 보였다. 실로 수현은 지금 꽤 당혹스러웠다. 입에 넣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음식들이 맛있어도 너무 맛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 괴로웠다. 이리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도 죄스러운데, 음식을 집어 먹는 손을 멈출 수가 없어서.
황제가 언제 저의 옛 백성들을 치러 갈지 모른다. 성해의 옛 백성들이 그리도 위기에 처해 있거늘, 저는 여기 앉아 맛있는 음식이나 배불리 먹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혼자서 이렇게 마음 편히 있을 순 없는데…….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워 몸을 가만히 두기 힘들었다.
그런 수현의 마음과 달리 맛있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더 달라고 보채는 몸뚱어리가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무엇 때문인지 평소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마치 배 속에서 굶주린 누군가가 계속 달라고 아우성이라도 치는 것처럼. 집어넣는 족족 모자란다며 다음 음식을 집어 올리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수현은 본능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속상한 마음으로 억누르기엔 너무도 강한 본능이었기에.
“마마, 음식을 더 올리라 하나이까.”
“아니, 아닙니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아니옵니다. 마마께서 몸이 좋아지시려고 입맛이 도는 듯한데, 이럴 때 많이 드셔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디 사양치 마시옵소서. 이리 잘 드시는 것도 오랜만인데, 조금 더 드시지요.”
어느 정도 동의를 얻었다고 생각한 장 상궁이 나인에게 눈짓했다. 다시금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나인이 떠나는 동안, 장 상궁은 흐뭇한 얼굴로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장 상궁이 보기에 수현은 저의 몸 상태를 전혀 모르는 듯하였다. 아니, 어쩌면 임신 자체에 대해 전혀 모르는지도.
어려서 부모와 헤어져 흥청에 들어가셨다 하였다. 그런 곳에서 임신한 음인을 봤을 리 만무했다. 누군가가 가르쳐 줄 리는 더욱 만무했고. 그래서 잠이 쏟아지고, 입맛이 도는 제 몸의 상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히려 잘되었다. 안정기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한 상태이시니. 회임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편이 마마의 안정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마마, 음식을 대령했나이다.”
상 위에 놓인 빈 그릇들이 치워지고, 새 음식들이 그 자리에 놓였다. 수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채워진 음식들을 쳐다보았다.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배 속에서는 먹을 걸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고.
결국 수현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대로 나물을 집어 들어 입안에 넣었다. 신선한 청경채로 만든 나물이 아삭 씹히며 즙을 뿜어냈다. 입안에 퍼지는 야채와 짭조름한 장맛에 수현은 걸신들린 듯 젓가락질을 했다.
채워지기가 무섭게 그릇을 비워 나가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의 입꼬리가 귓가에 걸렸다. 장 상궁이 흐뭇이 바라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은 그저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계속 맛있게 먹어 치웠다.
어느덧 음식을 다 먹은 수현은 더는 들어갈 자리 없이 가득 찬 배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 두었다.
그대로 뜨끈한 차를 마시며 입안을 헹구는데, 회심의 미소와 함께 장 상궁이 무언가를 내밀어 보였다.
“이게…… 무엇입니까?”
수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여지를 말려 당에 재운 것입니다. 계절이 이러하여 여지를 더 구할 수 없으니, 여름에 미리 준비하라 일러두었습니다.”
여지라는 말에 수현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여지라면 수현이 그토록 좋아하는 과실이 아니었던가. 날이 꽤 차가워져 당분간 못 먹을 줄 알았는데, 저를 위해 장 상궁이 이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어서 드셔 보시지요, 마마.”
그릇에 놓인 여지를 하나 집어 수현이 입안에 가져갔다. 생것으로 먹는 것보다는 맛이 덜했지만, 달큼하니 꽤 먹을 만했다. 배가 가득 차 더 들어갈 자리가 없는 줄 알았는데.
수현은 결국 여지를 몇 개나 더 집어 먹은 후에야 식사를 끝마쳤다. 이제 정말로 더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마마, 식사는 입에 좀 맞으셨는지요.”
“네.”
“다행입니다. 마마의 마음에 드셨다니.”
하아암. 장 상궁과 얘기를 나누던 수현은 밀려오는 졸음에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저가 하고도 놀랐는지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상했다. 분명 미시까지 자다 일어났거늘, 밥을 먹자마자 또 졸리다니……. 도무지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마, 피곤하시나이까.”
수현은 뭐라 답도 못 하고 붉어진 얼굴로 장 상궁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하자니 게으른 저의 모습이 스스로도 한심했고, 아니라고 하자니 눈꺼풀이 너무도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침상으로 가고 싶은데…….
“한숨 주무시는 게 어떠실지요, 마마. 요즘같이 날이 쌀쌀한 때에는 잠이 부족하기도 한 법입니다.”
장 상궁이 자연스럽게 수현은 침상으로 이끌었다. 수현은 갈등했다. 이렇게 제 몸이 편해도 될까 싶어서. 하지만 침상 위에 발을 하나 걸치는 순간, 그는 욕구를 이겨 낼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포근한 이불에 그대로 몸이 녹아드는 것 같았기에.
“그럼…… 저 잠시만…… 눈 좀…….”
“네, 마마. 염려 마시고 푹 주무십시옵소서.”
“아니…… 조금만…… 자고 일어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현의 두 눈이 감기었다. 침상에 누운 채로 색색 소리를 뱉어 내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은 한없이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마, 이제 불행은 잊고 행복한 길만 걸으소서.’ 그녀가 소리 없이 속으로만 말을 건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현은 한없이 순수한 얼굴로 그저 잠에 푹 빠져들었을 뿐이었다.
* * *
꽤 시간이 흘렀다. 그간 수현은 이상하리만큼 나태해지는 제 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마음은 편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의 몸은 계속 늘어졌다. 자도 자도 잠이 계속 쏟아졌고, 식욕 또한 여전히 왕성했다.
괴로운 마음과 그렇지 못한 몸 사이에서 갈등할 때마다 수현은 늘 본능을 이기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음인은 모든 형질을 통틀어 가장 모성애가 강하기 때문이었다.
임신한 사실은 몰랐을지언정, 본능적으로 배 속에 든 아이가 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낮의 길이가 꽤 짧아진 어느 추운 날, 예고도 없이 수현의 방에 낯선 이들이 찾아들었다. 궐 안에 음악을 관장하는 악사들이었다.
“이게…… 무슨…….”
수현은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소인들은 궁중 악사로 폐하의 명을 받아 마마의 처소를 찾게 되었나이다.”
“폐하께서…… 무슨 명을 내리셨단 말이냐.”
“마마의 처소에서 음악이 끊이지 않게 종일 연주하라 이르셨나이다.”
“뭐라…….”
수현은 이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왜 황제가 이런 명을 내렸는지 전혀 예상조차 되지 않았는데,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장 상궁만 속으로 좋아했다.
‘선황께서도 궐 안에서 태교를 위해 회임한 후궁의 처소에 악사를 들이셨었다고 들었다. 이는 아마 폐하께서 마마의 태교를 신경 쓰시기 시작했다는 뜻일 테지.’
“마마,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네?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마마를 아끼시어 악사를 보내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선황께서도 그리하셨음을 소인도 알고 있고요.”
“…….”
“그러니 마마께선 심려치 마시고 받아들이시지요.”
장 상궁의 말에 수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갑자기 아끼는 후궁이라니, 생소해도 너무 생소하게 느껴졌던 탓이었다.
장 상궁의 말이 의아한 것은 비단 수현만이 아니었다. 뭇 나인들 역시 왜 장 상궁이 사실대로 태교를 위해 악사를 들였다고 말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터였다.
하지만 궐에서는 원래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 본 척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들은 딱히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어서 연주를 시작하시게.”
수현을 대신해 장 상궁이 말하였다.
“예, 마마.”
장 상궁의 허가가 떨어지자 악사들은 침소의 안쪽으로 향했다. 일곱 줄이 달린 금(琴)과 스물다섯 줄이 달린 슬(瑟)을 들고 그들이 자릴 잡았다. 예로부터 금과 슬은 궁합이 좋은 악기로 유명했다. 그것에서 유래되어 궁합이 좋은 부부에게 ‘금슬이 좋다’라고 하기도 했고.
“그럼, 시작하겠나이다.”
이윽고 잔잔한 연주가 시작되었다. 금과 슬이 만들어 내는 가락은 조용했지만, 구슬픈 음색은 아니었다. 애초에 태교를 위한 음악이라 피리 같은 슬픈 감정을 일으키는 악기는 들이질 않았던 것이다.
가슴 따뜻해지는 선율이 침전 안에 퍼졌다. 수현은 처음엔 거부하는 듯 보였으나 이내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연주에 빠져들었다.
밝은 기운을 담고 있는 가락에 오히려 그의 불편했던 마음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 안고 있는 상처를 치유해 주듯, 맑디맑은 소리가 계속해서 수현의 마음을 두드렸다. 어느덧 수현은 저도 모르게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마마, 또 잠이 쏟아지시나이까.”
한껏 나른해 보이는 얼굴로 수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장 상궁은 아랫것에게 시켜 따뜻한 담요를 가져오게 하였다.
의자에 몸을 깊게 묻고 눈 감은 수현의 무릎 위로 그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듣기 좋은 음악은 계속해서 침전 안을 맴돌았다. 세상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귀비는 그저 잠에 푹 빠져들었다.
이후로도 수현에게 이상한 일은 계속 생겼다. 평소 예(禮)에 관한 것 외에는 딱히 배움을 사사할 것이 없는 궐 생활이었거늘. 어찌한 일인지 시(詩), 서(書), 화(畵)에 관한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또한 장 상궁은 연유를 알고 있었다. 궁에서는 예로부터 황손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산모를 대상으로 수업을 진행하곤 했었다.
아이는 배 속에서 들었던 모습과 소리를 닮으므로, 회임한 후궁에게 선한 것을 보고 듣게 해 장차 선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하여 아침에는 성현의 글을 새긴 말씀을 외워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낮과 밤에는 상궁과 나인으로 하여금 음독(音讀)하게 하여 태교를 돕게 했다.
“이상합니다. 대체 폐하가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럴 이유가 없지 싶어 수현이 의아한 듯 말했다.
“무엇이 말씀이옵니까.”
“갑자기 악사를 보내신 것도 그렇고, 평소에 신경조차 쓰지 않던 수업을 들으라 하시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이러시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장 상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마마께서 회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 무언가가…….”
그렇게 말하곤 수현은 가만히 생각에 잠기었다. 그는 생각했다. 대체 황제가 저에게 이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러다 그는 이런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황제가 하는 짓이라곤, 저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들뿐이었다. 음악을 들려주고, 수업을 듣게 하고.
그렇다면 저 몰래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 간섭 못 하게 하려고. 가령, 성해 옛 백성을 친다거나…… 그런 은밀한 일을 벌이려고…….
“……!”
순간, 수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간…… 성해의 옛 백성들이…… 나의 백성들이…….
“마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아니, 왜 또 그러하십니까.”
“어떻게든 여기를 나가야 합니다.”
“마마, 이러지 마시어요. 이제 평온함을 찾으셨나 싶었사온데…….”
“평온이라니요.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마마……?”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 몸입니다.”
여태껏 멀쩡하던 마마가 또 왜 이러나 싶어 장 상궁은 애가 탔다. 제발 그만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굴러 대는데, 뜻밖에 얘기를 수현이 꺼냈다.
“옛 성해의 백성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현의 말에 장 상궁이 크게 동요하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손이 벌벌 떨리는 얘기에 그녀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마마…… 그게…… 무슨…….”
“공자님께 들었습니다. 태화 남방에 모여 옛 성해의 백성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고요.”
“마마……!”
장 상궁은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마마께서 유난히 기태주를 가까이하셨던 이유도, 갑자기 저를 궐에서 내쫓고 도망가려 하셨던 이유도. 모두.
“나는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대로 있다간 그들은 태화 황제의 손에 모두 죽고 말 것입니다.”
“폐하…… 께서 알고 계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어찌, 그런…….”
“공자님께 그들의 은신처를 알아 오라 하신 것도 폐하입니다.”
“……!”
충격에 장 상궁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분명 기태주의 말이라면 허언은 아닐 터였다.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는 장 상궁도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마마가 그들을 찾아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미 마마는 태화 황실에 속한 몸이었다. 더욱이 황제 폐하의 씨를 품으신 분이 아니신가.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그렇다 한들, 마마께서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무리이옵니다.”
“아니요, 가야만 합니다.”
“마마, 마마께서는 이미 태화 황실의 사람이십니다. 황제 폐하의 후궁이시거늘, 대체 궁을 떠나 어딜 간다는 말씀이시옵니까.”
“장 상궁님.”
“하물며 마마께서는 회임까지 하셨사옵니다. 그런 몸으로 밖에 나가셨다간……!”
저가 말을 하고도 놀랐는지 장 상궁이 제 입을 황급히 막았다.
“장 상궁님…… 지금 그게 무슨…….”
놀란 수현이 물어보았지만, 장 상궁은 무어라 변명조차 하지 못했다. 그간 수현이 회임했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려 노력했던 그녀였다. 적어도 안정기에 들기 전까지만이라도. 이대로 회임했다는 사실을 알면 수현이 길길이 날뛸 것을 알았기에.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십니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묻질 않았습니까.”
“마마…….”
“말씀해 보십시오. 회임이라니요!”
수현은 기가 찼다. 사실 그도 어렴풋이나마 제가 회임한 게 아닐까 생각하긴 했었다. 하지만 결착 이후 한 달이 되어 가도록 별다른 변화가 없기에 그는 착상이 안 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분명 그럴 거라 믿고 싶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장 상궁은 단언하고 있었다. 저가 회임을 했다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랐는데. 황제의 씨 따위가 제 배 속에서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황제의 아이를 가졌단 말입니까?”
“마마…….”
“내 배 속에 태화의 후손이 자라고 있단 말입니까?”
“…….”
“말씀해 보십시오! 어서, 얘길해 보란 말입니다!”
몸에 무리가 갔는지 소리치던 수현의 몸이 일순 휘청였다. 놀란 장 상궁이 다가와 부축하였다. 그녀가 다급하게 말하였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절대로 흥분하시면 안 되옵니다!”
새파랗게 질린 수현의 얼굴을 보며 장 상궁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이럴까 봐 절대 숨기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가뜩이나 씨를 정착시키기 힘든 음인이라 임신 초기에는 매우 위험했다. 어떻게든 안정기까지만 가면 괜찮을 터인데. 그만 입을 잘못 놀려 이렇게 상황을 악화시키고 말았다.
“마마, 제발……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마음을 평온하게…….”
그때 문밖에서 요란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곧 수현을 부축한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장 상궁의 귀에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어쩌면 시기도 이리 적절한 때에 나타나는 건지…… 장 상궁은 물론이고, 수현의 얼굴도 잔뜩 굳었다.
이 무슨 모진 우연이 있나 싶어 그저 어떻게든 막고만 싶은데, 그런 장 상궁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문이 속절없이 열리었다.
거만한 향을 내뿜으며 명휘가 방 안에 들어섰다. 문지방을 넘어서서 그가 방 안을 말없이 훑었다. 흰자위가 넓은, 삼백안이 날카롭게 수현과 장 상궁에게 향했다. 피식 조소가 뒤이었다.
장 상궁은 수현은 겨우 침상 위에 앉히고 그의 옆에 비켜섰다.
“폐하를 뵈옵니다.”
뒤늦게 그녀가 인사했다. 그나마도 명휘는 듣는 척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새 귀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더냐?”
명휘는 힘들어하는 수현에게 시선을 꽂은 채로 장 상궁에게 물었다. 이에 장 상궁은 뭐라 답조차 못하고 머뭇거렸다. 차마 마마께서 회임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격분하셨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평소에는 잘도 나불거리더니, 꼭 이럴 때만 네년의 주둥이가 얌전해지는구나?”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장 상궁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고개만 조아린 채로 입술을 짓씹는데.
“폐하.”
힘겹게 수현이 입을 열었다. 침상에 기댄 몸에 땀이 흥건했다.
“그래, 말해 보아라.”
자리에 선 채로 명휘가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짙은 검은색 동공의 반을 덮으며, 눈꺼풀이 낮게 내려앉았다.
“폐하께선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무엇을 말이더냐.”
명휘는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그걸 듣고 있는 장 상궁은 절대 무심할 수 없었다. 놀란 그녀가 고개를 추어올렸다.
“마마, 제발…… 그 말만은 제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장 상궁이 간청하였다. 묘한 반응에 명휘의 시선이 장 상궁에게 향했다. 지금 네년이 뭐라 지껄이는 게냐 막 물어보려는데, 다시 한번 그의 고막 속으로 수현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방에 있는…… 옛 성해의 백성……. 그들을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장 상궁은 그대로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지?”
하지만 장 상궁의 걱정과 달리 명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저 수현에게 시선을 돌린 채로 느릿하게 물었을 뿐이었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태화의 남방에서 옛 성해의 백성들이 모여 봉기…… 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명휘는 눈을 내리깐 채 한참 동안 수현을 응시했다. 수현은 날개 다친 어린 새처럼 어깻숨을 내쉬며 겨우 침상에 의지해 몸을 기대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땀에 잔뜩 절어 있었다. 안쓰러운 얼굴임에도 미색은 조금도 시들지 않았다.
“기태주가 그리 말하더냐.”
명휘는 딱히 수현에게 숨기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그가 물어 올 것이라 예상했기에.
“말씀해 주십시오. 폐하께선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정녕, 그들을 토벌하실 작정이십니까.”
힘겹게 말하는 수현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 보였다. 이는 회임한 음인에게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그대가 신경 쓸 것이 아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명휘는 한마디로 상황을 일축하려 했다. 수현과 더 얘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좋아 보였기에.
“아니요.”
하지만 수현의 의지는 꺾일 줄 몰랐다. 그는 힘들어하면서도 계속해서 명휘에게 다그쳤다.
“신첩, 폐하의 의중을 알아야겠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십시오.”
계속해서 다그치는 수현에 명휘의 수려한 미간이 일그러졌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다시 한번 강조해 말하려는데.
“욱!”
난데없이 수현이 헛구역질을 했다.
“욱, 우욱! 욱!”
뒤집히는 속에 입을 틀어막고 수현이 몸을 움츠렸다. 갑자기 밀려오는 메슥거림에 그렇게 헛구역질을 몇 번이나 하는데, 정작 속에서 넘어오는 것은 없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입가를 떠난 것은, 수현의 속이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였다. 수현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새파래진 얼굴로 겨우 숨을 들이쉬는데, 별안간 정적에 휩싸인 방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수현이 명휘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수현이 헛구역질하는 것을 바로 눈앞에서 확인한 명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징그럽도록 입꼬리를 추어올리며 사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무서워 수현의 몸을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여봐라.”
난데없이 그가 태감을 불렀다.
“예, 폐하.”
“명일부로 황후를 폐위시키거라.”
그의 말에 방 안에 있던 그 누구도 충격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다들 눈만 휘둥그레지는데, 명휘가 연이어 말했다.
“곤녕궁이 비워지는 대로 귀비의 처소를 옮길 것이다.”
“폐하, 그 말씀은…….”
태감의 묻는 말에 명휘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정처 없이 떨리는 수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그가 끝으로 말했다.
“귀비를 황후로 책봉할 것이다.”
“…….”
“이제, 귀비가 태화의 황후가 될 것이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방 안의 모든 이가 외쳤다. 그러곤 방 안의 나인들이 수현을 향해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경하드리옵니다.
장 상궁은 감격의 눈물을 훔치었다. 그토록 궁 안에 들어와 모진 일만 당하시던 마마께도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이야…….
방 안에 있는 모든 이가 수현을 축하하며 기뻐했지만, 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이 경사의 주인공, 수현이었다.
“…….”
그는 이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저 넋을 놓고 있는데, 그런 수현에게 명휘가 다가섰다.
얼굴을 다 감쌀 정도로 커다란 손이 수현의 볼에 닿아 왔다. 손끝에서 묻어나는 양인의 체향에 수현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가 제 볼을 쓸어내리는 이 순간이 끔찍하게도 싫은데, 이상하리만큼 메슥거리던 속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급하게 뛰어 대던 심장이 잠잠해지고 있었다.
“들었느냐.”
수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감기었다.
“그대를 황후로 맞이할 것이다.”
사르르…… 잠이 몰려들었다.
“이제, 그대가 이 나라의 황후가 되는 것이다.”
푹 그대로 수현의 몸이 꺾이었다. 그는 명휘의 품에 기대어 그대로 잠에 빠졌다.
명휘는 곤히 잠든 수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특유의 거만한 사향이 점점 달콤하게 변했다. 언젠가 수현의 몸을 녹였던 그 달콤한 향기가, 잠이 든 음인의 코를 타고 온몸에 퍼져 가고 있었다.
* * *
수현의 황후 책봉식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그간 궐 안에서 유령처럼 숨죽여 지내던 황후는 폐위와 동시에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말이 귀향이었지, 그것은 사형과도 같은 형벌이었다. 귀향길에 오른 이에게는 백성들 또한 예를 차리지 않아, 물이건 밥이건 한 입조차 내주는 일이 없었다.
말도, 가마도 없이 시종 한 명과 함께 걸어가야 했던 황후는 고향에 당도하기도 전, 길가에서 그대로 비명횡사했다. 쓸쓸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를 수발들던 시종만이 쓸쓸하게 시신을 수습하여 근처 야산에 매장해 주었을 뿐이었다.
대대로 태화의 황후만이 머물렀던 곤녕궁에 수현의 새로운 처소가 꾸며졌다. 황후가 사용하던 침상을 비롯한 모든 가구가 싹 교체되었다. 오로지 수현만을 위한 귀하디귀한 가구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곤녕궁에는 매일 악사들이 드나들어 아름다운 선율이 끊이지 않았고, 각지에서 수집한 최고급 식자재로 만든 식사가 올라왔다.
수현의 황후 책봉 소식을 듣고, 그에게 아첨하려는 이들로 곤녕궁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물론 수현이 만나기를 거부해, 그들이 준비해 온 선물들만 방 안에 가득 쌓여 갔다.
귀비가 황후로 책봉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저잣거리는 잠시 시끌시끌해졌으나, 그렇다고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워낙에 태평성대(太平聖代)라 백성들도 이를 기껍게 여겼던 터였다.
모두의 축복 속에 시간이 흘러 황후 책봉식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 있을 국가 최대의 행사를 앞두고 수많은 인부가 태화전 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이 망망대해와도 같은 광장을 붉은 천과 금으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붉은 천이 광장을 가르며 길게 깔렸다. 이 위로 태화의 황제 부부가 들어설 것이다. 그 옆으로는 붉은색의 천막을 치고, 금으로 만든 용이 장식될 터였다. 이 역시 황제 부부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이, 거기! 조심히 잡으라고! 이러다 쓰러지겠어!”
하지만 어찌한 일인지 천막의 기둥을 세우는 인부들은 꽤 애를 먹고 있었다. 세차도 너무 세찬 바람 때문이었다.
“어, 어어?”
급기야 인부들이 붙잡고 있던 높은 기둥이 세찬 바람에 쓸려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놀란 장정들이 달라붙어 겨우 붙들어 맸지만, 세워 두었던 또 다른 기둥이 흔들리면서 기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어이쿠야!”
가까스로 기둥을 피한 인부가 놀라서 소리쳤다.
“이보게! 괜찮은 겐가?”
다른 인부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소리친 인부는 다행히 별반 다치진 않아 보였으나, 꽤 놀란 듯했다. 사람보다 훨씬 큰 나무 기둥이 순식간에 쿵 하고 쓰러졌으니 그럴 만했다. 자칫했다가는 나무에 머릴 얻어맞고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원, 무슨 바람이 이리도 세찬지.”
“그러게 말일세. 이거 오늘 내로 작업은 다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 사람아, 안 돼도 되게 해야지. 당장 내일이 책봉식인데!”
인부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였다.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털고, 그들이 다시 자릴 잡았다. 쓰러진 나무 기둥을 세우고, 받침대로 고정하였다.
“원래 이맘때 바람이 심했지?”
“아무렴, 왜 아니겠는가. 작년엔 장안에 크게 산불이 나서 고생 많았었지.”
“아니, 재수 없게 그 얘긴 왜 해? 좋은 일 앞두고. 입조심하게, 자고로 말이 씨가 되는 법일세!”
“거참, 대단한 공자님 나셨네.”
끙끙대며 기둥 하나를 세운 그들이 다음 기둥으로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세찬 바람이 다시 한번 나무 기둥을 때려 대기 시작했다. 어어어! 나무 기둥을 붙들어 매며 인부들이 외치는 소리가 광장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대체 좋은 날을 앞두고 왜 이리 날씨가 염병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원, 이래서야…… 내일 식이나 제대로 치를 수 있을는지…….”
남은 작업물을 보며 그들 중 누군가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아직 못다 세운 나무 기둥이 산더미였다. 땅이 꺼지라 한숨 내뱉는 인부의 얼굴처럼, 어느덧 하늘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차가운 날씨에 건조한 공기를 담은 세찬 바람이 그들의 몸을 쉴 새 없이 후려갈기고 있었다.
책봉식을 하루 앞두고 수현은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잠이 쏟아질 땐 언제고, 입덧이 시작된 후로는 밤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제 내일이면 정말 태화의 황후가 될 거란 생각을 하니 심란하여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절대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성해의 왕손인 저가…… 이 태화의 국모가 되다니…….
“마마, 잠이 쉬이 오지 않으십니까.”
촛불만이 어스름하게 밝히고 있는 방 안에서 수현의 곁을 지키고 있던 장 상궁이 물었다.
수현은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 상궁에게 도움을 받아 벽에 기대어 앉았다. 불안함에 잔뜩 떨리는 눈동자가 허공을 주시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불빛을 따라 방 안에 드리워진 음영이 역시나 흔들리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친모 같은 다정한 목소리가 수현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수현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입니다. 내일 큰일을 치르셔야 하는데, 혹시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시면 안 되지요.”
수현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책봉식…… 책봉식……. 생각만으로도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이 나라의 황후 따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는데…… 그리되어 가고 있다.
수현은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했다. 이제 더는 황제도 옛 성해 백성의 안위를 보장해 주지 않으니. 하지만 그런 수현의 발목을 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새로운 생명, 바로 배 속에 든 아기였다.
수현은 배 속의 아기가 미웠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본능은 제 배 속에 든 작은 생명을 미워하도록 두지 않았다.
모성애가 유독 강한 형질이어서일까? 아직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콩알만 한 이 생명체에 정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무려 황제의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더 괴로웠다. 황제의 아이임에도 미워할 수 없어서. 옛 성해의 백성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그들을 배반한 채로 이리 황제의 씨까지 품어 버리게 되어서.
“마마, 아이가 걱정되시옵니까.”
저도 모르게 배를 쓸어 만지고 있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이 조심스레 물었다. 수현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마마께서는 폐하가 그리 원망스러우십니까.”
푹 떨궈진 고개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원망스러운 배를 끌어안고 몸을 떨고 있는데, 그 안쓰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장 상궁이 마저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여전히 폐하를 원망하신다 하여도, 태중 아기씨까지는 원망하실 수 없으시겠지요.”
“…….”
“마마,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아기씨를 위하시는 마음으로 폐하를 따르심은 어떠신지요.”
“…….”
“외람되오나 마마께선 폐하의 체향 없인 하루도 버티시기가 힘겨울 것입니다. 비단 체향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이에게 부친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입니다. 태중 아기씨의 행복을 고려하시어 폐하를 받아들이심이 옳은 줄 압니다.”
그녀의 말에 수현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그가 장 상궁을 바라보았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원망이 서린 눈빛으로.
“마마…….”
하지만 수현은 그마저도 체념하듯 고갤 떨궈야 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비록 저의 마음이 좋지 않아 이리도 괴로워하고 있지만, 아이를 생각한다면 명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쯤은.
아침부터 빈속에 괴로워 헛구역질을 하다가도, 황제가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잠잠해졌다. 속이 좋지 않아 종일 먹지 못하다가도 황제의 품에서 받아먹는 죽은 곧잘 넘어갔다.
이 모든 것은 수현의 의지가 아니었다. 괴로운 마음과 달리, 그의 몸은 미치도록 명휘를 원하고 있었다. 마치 배 속의 아기가 그걸 원한다는 듯이…….
“마마가 회임하신 이후, 폐하께서는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이토록 자상하게 대해 주시니, 폐하께서도 진정으로 아기씨를 기다리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마마께서도 이제 그만…….”
장 상궁은 언뜻 느껴지는 위화감에 말을 멈추었다. 무엇을 본 것인지, 장 상궁이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현은 갑자기 말을 멈춘 장 상궁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창가로 이동하는 그녀를 시선으로 좇았다.
“이게 무슨…….”
창살에 둘린 얇은 창호지 너머로 보이는 것이 온통 밝은 빛이었다.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장 상궁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온통 빨갛게 타오르는 궐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생생하게 들어왔다.
“……이, 이…… 이게, 대체…….”
“마마!”
때마침 밖에서 다급한 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과 장 상궁의 시선이 동시에 문가로 향했다. 감히 허락조차 받지 않고 방 안에 들어온 나인이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로 외쳤다.
“어서 몸을 피하시옵소서! 적이, 적군이 황궁을 급습하였다 하옵니다! 어서 몸을 피하시옵소서!”
일순, 수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생각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어릴 적 그날을 기억하고 있는 몸이 본능적으로 바들바들 떨려 오기 시작했다.
“마마! 이러시고 있을 시간이 없사옵니다! 어서, 빨리 피신을!”
나인이 외쳐 대는 소리에도 수현은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다급한 손길로 장 상궁이 그를 부축하였다.
“여봐라! 마마를 모셔라!”
장 상궁의 고함에 나인들이 달려들어 수현을 부축하였다. 하필 황제가 수현이 회임한 이후로 시위를 물린 터에 장 상궁이 나인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금군은! 금군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단 말이더냐!”
“그것이…… 지금 적군과 맞서 싸우느라…….”
“어찌…… 그런……!”
“어디로 마마를 모시나이까.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동문으로 가자.”
“네.”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일 테니!”
“알겠사옵니다!”
수현을 부축한 이들은 영화궁의 출구를 향하여 달려 나갔다. 거의 시체 같은 몰골을 한 수현은 그때까지도 넋이 나가 있었다.
콧속에 파고드는 그을음의 냄새가, 시야를 차단해 버린 검은 연기가, 그를 어렸을 적 그때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불타 버린 제 왕국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재생되며 그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다.
“마마! 제발 정신 차리셔요. 마마…….”
그런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은 애가 탔다. 가뜩이나 태중 아기씨로 인해 몸도 무거우실 텐데, 절대 충격받으시면 안 될 마마께 왜 하필 이런 일이…….
“마마. 제발 정신을 차리…… 헉!”
일순, 급히 발걸음을 옮기던 장 상궁이 자리에 딱 멈춰 섰다.
“꺄악!”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언제 이리된 것일까. 먼 곳에서 일었던 불길이 그새 바람을 타고 영화궁에까지 와 번져 있었다.
목재로 지어진 궁은 출구뿐만 아니라 궁 전체에 불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흡사 입을 크게 벌린 화마처럼 온통 불바다였다.
검은 연기가 여기저기 차오르고, 뜨거운 열기가 안에 갇힌 이들을 위협했다. 불길은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나 복도를 따라 안으로,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참으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마마!”
불이 붙은 기둥이 일순 쓰러지며 출입구를 막았다. 순식간에 가로막힌 탈로에 나인들은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는 정신조차 차리지 못하는 마마를 모시고 영화궁을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치솟는 불길을 보던 장 상궁의 손이 덜덜 떨리었다.
“마마를 호위하라! 어서 마마를!”
불길 안에서도 장 상궁은 어떻게든 수현을 지키려 애썼다. 영화궁 안의 모든 이가 죽는다 하더라도 마만큼은 꼭 지켜야 했다.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마만큼은…….
“장 상궁 마마님! 저기를 보십시오!”
한 나인이 다급히 장 상궁을 불렀다. 장 상궁의 시선이 나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가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불길 속에서…… 훨훨 타오르는 그 불구덩이 속에서 누군가가 영화궁으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침상에 누웠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태주는 언뜻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저편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치 검은 머리를 한껏 풀어헤친 마귀인 양 하늘로 솟아나는 무시무시한 연기였다.
“이, 이것은…… 분명…….”
화마였다.
화마가 도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날씨가 차고 바람이 거센 데다가 건조하기까지 하니, 분명 쉬이 꺼질 불은 아닐 것이다. 이대로라면 도성 전체가 위험했다.
“공자님! 공자님!”
다급한 목소리가 문밖에서부터 방 안을 울렸다. 태주는 달려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땀에 젖은 채로 헐레벌떡 뛰어오는 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가까이 두고 지내는 시종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저 불은 또 무어고.”
“궐이…… 궐에…… 적이 침입하여…….”
“적……?”
“성해의…… 옛 백성들이…… 봉기하여 궐을 침입하였다 하옵니다!”
“……!”
태주가 눈을 홉떴다. 전신이 번개라도 맞은 듯 아찔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이 떠올랐다. 궁 안에 있을 그분이, 꿈에서라도 잊지 못할 그분이…….
“마마!”
태주가 급히 겉옷을 걸쳤다. 옷을 제대로 챙겨 입을 시간조차 아까워, 발걸음을 옮기며 옷을 여미었다.
“당장 말을 준비하여라!”
“공자님……?”
“궐로 갈 것이다!”
“아니 되옵니다! 지금 궐로 가신다는 것은, 명을 포기하심과도 같사옵니다!”
시종의 말에 태주가 자리에 우뚝 섰다. 핏줄이 잔뜩 서 붉게 충혈된 눈이 시종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평소 다정하기로 유명했던 미남자의 얼굴이 무섭도록 일그러져 있었다.
“가서 마마를 구할 것이다.”
“공자님…….”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 난리 속에서 마마를 구해 내야만 한다.”
넋이 나간 듯 저를 바라보는 시종에게 태주가 크게 소릴 질렀다.
“그러니 말을 준비해라! 어서!”
“예, 예!”
시종이 허겁지겁 출구로 향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태주도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터뜨릴 듯 세게 아랫입술을 말아 물며 그가 속으로만 되뇌었다.
마마, 제발 무사하소서. 마마…….
* * *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장 상궁은 제 눈을 의심했다. 미간을 찌푸려 초점을 모아 다시금 출입구를 바로 직시했다. 틀림없이 누군가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 불구덩이를 뚫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면서.
“마, 말도 안 돼…….”
실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살고자 한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지 발을 들이지는 않을 터였다. 한데 눈앞의 이는 스스로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
그리고 그자가 조금 더 가까워졌을 때, 장 상궁은 다시 한번 충격과 함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이는…… 너무도 익숙한, 그러나 절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폐하!”
황제 폐하였던 것이다.
장 상궁만큼이나 놀란 나인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외쳤다. 장 상궁도, 나인들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찌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마마를 모시는 몸이니 마마를 호위해야 했지만, 불 속을 헤치며 혼자 들어선 폐하 또한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그런 그녀들과 달리 명휘는 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수현의 무리를 찾아낸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앞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불바다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그의 행동에 망설임이란 조금도 없었다.
그때 불붙은 기둥이 한 번 더 쓰러지며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그는 주저하지 않고, 불에 탄 기둥 아래를 지나 복도 안으로 계속 향했다.
이 난리 통 속에서도 그의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검은빛 눈동자엔 오로지 저가 지켜야 할 이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폐하!”
결국 명휘는 불바다를 헤치고 수현에게 당도하였다. 귀비를 찾는 손길에 나인들이 감싸고 있던 마마를 명휘에게 내주었다.
“귀비…….”
수현의 생사를 확인한 명휘는 그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그런 그의 심장은 이상하리만큼 급하게 뛰고 있었다.
궐에 불길이 번지는 모습을 발견한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황궁이 타오르고, 적으로부터 황실의 안위가 위협받는 그 순간에, 그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귀비뿐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미친 듯 번져 나가는 불길 속에서 귀비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했을 뿐. 그래서 말리는 환관과 시위들을 뿌리치고 결국 이 불구덩이로 뛰어들고야 만 것이다.
그리고 수현의 얼굴을 확인한 지금 이 순간……. 그는 미칠 듯이 제 심장이 찢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왜였을까. 왜…… 뭐 때문에…… 이렇게…… 심장이…….
“……폐하…….”
명휘의 체향 때문이었을까? 그토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수현은 어느덧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는 흐릿한 시야로 저를 안아 들고 있는 이를 확인했다. 그러곤 본능처럼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몸이, 그의 아이가 체향 속에서 평온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 불난리 속에서조차 명휘의 체향은 수현을 안심시켜 주고 있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폐하!”
장 상궁의 외침에 명휘가 수현을 안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명휘가 출구를 향해 뛰어나갔다. 이제 연기는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짙어진 상태였다.
코앞에 출구를 두고 쓰러져 앞으로 향하지 못하는 나인도 발생했다. 그녀는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다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녀의 위로 불덩이가 떨어졌다. 순식간에 그녀가 화염에 휩싸였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마, 조금만 힘을…… 조금만 힘내셔요. 거의 다 왔사옵니다. 마마…….”
장 상궁은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끝까지 수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런 그녀 또한 숨이 가빠 오고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저가 여기서 쓰러질 순 없었다. 쓰러지더라도 마마의 안위를 확인한 뒤 쓰러져야 하기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수현을 안아 든 명휘와 그들의 일행이 기어이 출입구에 다다랐다. 불타 쓰러진 기둥이 대각선으로 막고 있는 출입구로는 사람을 안은 채로 지나갈 수가 없었다. 명휘는 재빨리 장 상궁에게 말하였다.
“먼저 건너가 귀비를 모시거라!”
장 상궁을 먼저 건너가게 하여 반대쪽에서 수현을 받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자 장 상궁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제가 남아 있을 테니, 폐하께서 먼저 가시옵소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명휘의 채근에 결국 장 상궁이 먼저 쓰러진 기둥 아래로 기어 밖으로 향하였다. 뜨거운 열기에 얼굴이 따끔거리고, 숨이 가빴다. 불이 옮겨붙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둥 아래를 지나는 그녀의 머릿속엔 그런 걱정 따위 들 수조차 없었다. 마마를 밖으로 모시는 것이 먼저였기에.
“폐하! 마마를 옮겨 주시옵소서!”
명휘는 품 안에 있는 수현을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놀란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전, 건너편에서 소리치는 장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손을!”
장 상궁의 다급한 목소리에 수현이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장 상궁은 있는 힘껏 그의 손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장 상궁이 팔을 잡아끌고, 안에서는 명휘가 그의 몸을 밀었다.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는 불길 아래로 수현의 몸이 겨우 통과했다.
“마마!”
수현이 무사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장 상궁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겨우 구출해 낸 마마를 끌어안고 그녀가 눈물을 훔쳤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는데, 폐하의 등장으로 그를 무사히 구해 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마마, 참으로 다행이옵니다. 참으로…….”
그러다 그녀는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폐하만 밖으로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폐하!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이에 명휘는 몸을 낮추었다. 이만 불타 오르는 기둥 아래를 지나 밖으로 빠져나가려는데.
“꺄악!”
다시 한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나마 버텨 주었던 기둥이 툭 끊어지며 아예 출구를 가로막아 버린 것이었다.
“폐, 폐하!”
순식간에 출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빠져나올 조금의 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장 상궁은 궐이 떠나가라 폐하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폐하가 아무리 천자라지만, 이 불길 속을 헤치고 빠져나올 순 없을 터.
그야말로 불지옥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폐하…….”
그리고 장 상궁만큼이나, 아니 그녀 이상으로 충격받은 한 사람이 있었다. 저 대신 불 속에 갇힌 이를 멍하니 찾는 수현이었다.
“어째서…….”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너머에 있을 황제가.
왜…… 왜…… 나를 그토록 괴롭혔으면서,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었으면서. 왜…… 이제 와서…… 왜…….
“폐하!”
장 상궁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불길은 더욱 치솟았다.
수현은 홀린 듯 그 앞으로 다가섰다.
그렇게 그와 마주했다. 불로 가로막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그렇게 명휘와 마주했다.
“어째서…….”
계속해서 읊조리는 말에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질문을 들을 이는 화마 속에 갇혀 있었기에.
다만, 그 순간 명휘도 불길 속에서 한곳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잔해로 막혀 버린 출구 쪽, 정확히는 수현이 있을 곳을 향해서였다. 그는 불에 잡아먹히기 직전까지, 보이지 않는 수현을 보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지고 있었다. 불 속에 갇히고 나서야, 어쩌면 죽음에 가까워지고 나서야 그는 알 수 있었다. 제 마음을. 그동안 한 번도 깨닫지 못했던 저의 마음을.
“어째서…….”
그래서 명휘는 마지막에 웃을 수 있었다. 미안했지만, 용서를 구할 수 없을 만큼 후회스러웠지만. 이 순간 저의 목숨을 대신 바쳐 수현을 살릴 수 있었기에.
“어째서…….”
수현의 목숨을 살린 것이 저였기에.
“어째서…….”
그의 목숨만큼은 살려 낼 수 있었기에.
“어째서……!”
수현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영화궁의 출구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끝 모르고 타오르던 불길이 마침내 명휘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마마!”
그와 동시에 먼 데서 수현을 부르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뛰어오는 것은 태주였다. 그는 수현을 발견하고 곧장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실신할 듯 울부짖는 수현을 그가 끌어안았다.
“마마…….”
그렇게 좋아하던 태주였거늘, 수현의 눈엔 그가 들어오지조차 않았다. 수현은 진심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렇게 저 대신 불 속에 갇힌 명휘 때문에.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조차 알 수 없이 저를 대신해 목숨을 내다 버린 명휘 때문에.
하늘을 향해 검은 연기가 높게 치솟았다. 성난 불길은 더욱 번져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졌고, 이 와중에도 적에게 함락당한 궐은 온통 비명이 난무했다.
들려오는 소리에 태주가 고개를 추어올렸다. 이제 곧 이곳까지 적들이 들이닥칠 터였다.
“마마, 이곳은 위험합니다. 소인과 함께 가시지요.”
태주가 울부짖는 수현을 억지로 말 위로 올려 태웠다. 그런 그를 장 상궁이 도왔다. 그녀의 얼굴 또한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마마는 제가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공자님…….”
“상궁님께서는 제 처소로 찾아오십시오. 그곳에 제가 미리 일러둔 시종이 있으니, 그에게 물으면 저희가 있는 곳으로 상궁님을 모셔다 드릴 것입니다.”
다급하게 말을 끝낸 태주가 말에 올라탔다. 이랴! 세찬 발길질에 말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태주의 품에 안겨서 궐을 빠져나가면서도 수현은 계속해서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불 속에 파묻힌 궐을 뒤로하고 두 사람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그들은 성곽을 빠져나가 더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