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름이 지나간 계절, 숲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가을의 옷으로 갈아입은 산하를 바라보며 태주가 자리에 멈췄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앞머리를 간지럽히며 지나쳤다. 품이 넉넉한 하얀색 셔츠가 바람에 나부끼고 수려한 군의 얼굴이 햇살 아래 빛난다.
“…….”
한참 동안 넋을 놓고 먼 곳을 바라보던 태주가 말의 배를 찼다. 이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말이 달리기 시작한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건장한 말이 대지 위를 날뛰고, 부드러운 갈색의 머릿결이 바람에 나부낀다.
이윽고 그의 눈앞에 화려한 성의 외곽이 들어온다. 도성이다.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태화의 수도.
태주는 지체할 것 없이 계속 달려 나간다. 황궁을 향해. 태화의 냉혹한 주인이 사는 그곳을 향해. 슬픔을 감춘 한 송이 꽃을 품고 있는 그곳을 향해.
미시(未時)의 황궁은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어지간해선 긴장을 늦추지 않는 궁인들조차도 늘어질 무렵,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바로 영화궁에 소속된 나인들이었다. 그네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침전에서 터져 나오는 귀비의 비명에 늘 불안에 떨어야 했다.
“아흐윽!”
참담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수현은 제 양손을 묶은 줄에 의지해 몸을 뒤틀었다. 침상의 네 귀퉁이를 따라 세워진 나무 틀에 긴 줄이 하나 드리워져 있었다. 그 줄은 귀비의 두 손목을 하나로 포박하고 있었다. 얼마나 단단한 끈이었는지, 귀비가 아무리 몸부림을 쳐 대도 끊어질 줄을 몰랐다.
가는 손목이 동여맨 끈을 따라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시뻘겋다 못해 퍼렇게 멍이 들어 흉측해 보였다. 몇 사진을 이리 묶인 채 매달려 있으니 그럴만했다.
장소만 옥부정이 아닐 뿐, 그곳에서 당했던 고문과 다를 바가 없는 행위였다.
“흐아아, 흐아, 아!”
이윽고 매달려 있던 귀비의 몸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고개가 꺾이고 한껏 벌어진 입으로 울부짖는다. 매달린 손은 끝이 곱아들고 허리는 뻣뻣하게 선다. 붉은빛의 침구 위로 하얀 액체가 후드득 떨어진다. 이미 몇 번이고 싸지른 탓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침구에 스며든다.
“후…….”
귀비의 뒤에 붙어 있던 황제가 떨어졌다. 이제껏 귀비의 안을 쑤셔 대던 살덩이를 따라 끈적한 액체가 길게 늘어졌다. 그가 쾌감에 절은 표정으로 미끈하게 젖은 좆을 문질러 댔다. 하얀 거품을 머금은 수현의 아래 구멍을 보고 있으려니 사정 후에도 살덩이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맛있어 보이는 것을 두고 입맛을 다시던 그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내뻗었다. 온종일 쑤셔 대도 여전히 꽉 오므려져 있는 작은 구멍 안으로 그가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주르륵, 주르륵. 안을 긁어 대는 손가락 끝에서 멀건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정액과 애액, 그리고 피가 섞인 그 탁한 액체는 귀비의 회음부를 타고 흘러 고환을 적시며 침구 위에 떨어졌다.
수현의 속을 비워 낸 명휘가 다시금 제 좆을 그러잡았다. 그렇게 무심히 구멍 입구에 좆 끄트머리를 맞추려는데.
“폐하.”
난데없이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을 안을 파고들려던 명휘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영화궁에 들어 있을 때면 좀처럼 저를 찾지 않는 태감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뭐냐.”
침상에서 말하자 얇은 문을 두고 태감이 아뢰었다.
“남방에서 기태주가 당도하였나이다. 명일 다시 들르라 이르나이까.”
제 상전이 영화궁에 한번 들으면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나름 고심해서 한 말이었다.
“아니다. 양심전으로 갈 것이다.”
“예, 그럼 기다리라 이르겠나이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명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껏 번들거리는 좆을 옆에 둔 무명천으로 닦으며 그가 수현을 바라보았다.
수현은 땀으로 잔뜩 젖어 늘어진 채였고, 매달린 끈에 겨우 의지하고 있었다. 눈은 이미 풀어질 대로 풀어진 데다 입 밖으로 내빼진 혀를 따라 침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피식. 그를 바라보는 명휘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수현의 등 뒤에서 어깨너머로 손을 뻗었다. 맥없이 풀린 턱을 들어 올려 이마 위에 입을 맞춘다. 수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황제가 혀끝으로 핥아 대는 와중에도 그는 죽은 듯 꼼짝하지 않았다.
문득, 수현의 볼을 핥던 황제의 시선이 끈에 꽁꽁 묶인 손목으로 향했다. 시퍼렇게 변해 살아 있는 자의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손목으로.
“그대의 몸에 난 상처를 볼 때마다 짐의 가슴이 참으로 미어지는구나.”
다정을 가장한 손길이 제가 만든 상처를 쓰다듬는다. 마치, 제가 만든 것이 아닌 것처럼. 저는 모르는 일인 것처럼.
“하지만 그대는 알고 있는가.”
명휘의 입술이 수현의 팔목 위로 향한다. 시체의 것처럼 퍼렇게 죽은 살 위로 명휘가 입을 맞춘다.
“오히려 망가진 그대의 모습이 짐에게는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는 것을.”
소름 끼치는 미소가 명휘의 입가에 드리워진다. 이를 세운 그가 잔뜩 부은 팔목을 살짝 깨문다. 아예 손목에 감각을 잃어버린 것인지, 지독한 통증에도 수현은 미동하지 않는다. 이젠 흐를 눈물조차 없는지 그의 볼을 적신 눈물이 매말라 있다.
“이만 가 볼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명휘가 말했다.
문이 열리고 나인들이 방 안에 들어왔다. 그들이 황제의 나신에 옷을 걸치는 사이, 또 다른 나인들이 들어와 줄에 묶인 수현의 손목을 풀기 시작한다.
“…….”
무심결에 황제의 시선은 장 상궁에게 닿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 상전을 바라보며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는 장 상궁에게로.
의복을 갖춰 입은 황제에게서 나인들이 떨어진다. 황제가 발걸음을 옮기자 그를 따라 나인들이 줄지어 선다. 그렇게 황제는 넋이 나간 듯한 장 상궁을 지나쳐 영화궁의 침전을 나섰다. 양심전으로 향하는 그의 입가엔 악귀와도 같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기태주.”
명휘가 양심전에 당도하니 태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 하얀 피부를 가진 그였지만, 여름 내내 타지에서 고생한 탓인지 피부가 다소 그을려 있었다. 가을이 되어 바람이 꽤 시원했지만 먼 곳을 달려오는 동안 땀이 많이 났는지 셔츠가 살짝 눅눅했다. 습기를 머금은 셔츠를 따라 훌륭한 몸의 선이 은근히 드러나 눈길을 사로잡았다.
“폐하.”
“그래. 여행길이 고단하지 않던가. 이리 바로 짐을 찾아오다니.”
“아니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 같아 서둘렀나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무심한 듯 뼈를 감추고 있는 말에 태주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하나 그는 그새 표정을 수습하고 웃을 수 있었다.
“소인에게 어찌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농이었네.”
명휘가 먼저 탁자에 앉았다. 그가 맞은편을 가리키며 태주에게 앉길 권하였다.
태주마저 자리에 앉으니 기다리고 있던 나인들이 다과를 내어 왔다. 감히 평민들은 구경조차 못할 귀한 차와 과일이었다.
“그래. 남방에서 지내는 것은 어떠했는가.”
차 시중을 드는 나인이 채운 찻잔을 명휘가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영화궁의 처소에 있었던 그에겐 은은한 수현의 색향이 묻어 있었다. 차향을 뒤덮을 정도로 진한 향기는 아니었지만 은근히 배어나는 그 향기에 태주는 미간이 아린 듯한 느낌이었다.
“폐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평온하였습니다.”
“짐이 무얼 해 준 게 있다고.”
여기까지 말한 명휘는 마치 무엇인가 뒤늦게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아니다. 그대에게 음인을 선사해 주었었지.”
“예, 그리하셨죠.”
“어떠했는가. 그 음인은.”
명휘가 빤히 태주를 쳐다보았다. 유난히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눈빛을 태주는 감히 피하지 않았다.
“가히 남방의 음인이라 불릴 만하였습니다.”
“그러하더냐.”
“예.”
“그랬단 말이지.”
명휘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래. 짐이 명한 일은 어찌 진행되었는가.”
몇 마디 사담을 나눈 후에야 명휘는 일의 진행을 물어보았다. 관직이 없는 태주에게 은밀히 지시한 것이 있었으니.
이에 태주는 지금까지 진행 상황을 보고하였다. 태주의 얘기를 듣는 동안 명휘는 그저 무심한 듯 듣고 있었다. 특별히 명한 일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폐하, 소인이 어찌하길 원하십니까. 폐하께서 명하시는 대로 하겠나이다.”
보고를 끝낸 태주가 물었다. 이에 명휘는 여전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그 정도면 되었네.”
“하오면 폐하.”
“자네는 이만 이 일에서 물러나는 게 좋겠네.”
순간, 태주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분명 몇 달 전 저가 아니면 안 될 것처럼 얘기하던 황제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짐이라도 자넬 오랫동안 묶어 둘 순 없지 않겠는가. 아니 그런가.”
“폐하께서 못하실 일이 무엇이 있겠사옵니까.”
“글쎄. 그리했던가.”
뼈를 감춘 말.
태주는 명휘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나,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날의 일 때문일 테지.
“그럼, 폐하의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태주는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그저 명휘가 시키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고 이만 얘기를 끝내려는데.
“참. 그건 그렇고.”
명휘가 다른 얘기를 꺼냈다.
“먼 길을 다녀왔으니 여독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떠한가. 궐에서 한잔하고 가는 것이.”
“황송합니다, 폐하. 하나, 소인은 폐하의 말씀대로 먼 곳을 다녀와 매우 지쳤나이다. 다음에 불러 주시면 그때는 기꺼이 소인이 폐하께 잔을 올리겠사오니…….”
“자네는 짐을 무심한 군주로 만들 참인가.”
“…….”
“어찌 내 자네에게 술 한잔을 내리지 않고 보낼 수 있겠는가.”
명휘의 권유가 태주는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안전이라고 계속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천하에 유일한 천자였으니까.
“알겠사옵니다. 소인, 폐하의 명을 따르겠나이다.”
이에 명휘가 크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가 태감을 찾았다.
나이가 들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잔뜩 조아리며 태감이 황제께 다가왔다.
“예, 폐하. 찾으셨나이까.”
“영화궁의 화원으로 갈 것이다.”
“영화궁 화원 말씀이시옵니까.”
“그곳 누각에 주안상을 마련하거라. 짐의 오랜 벗과 들를 터이니.”
“예, 폐하.”
“그리고.”
명휘가 태주를 바라보았다. 분명 말을 태감에게 하고 있었으나, 그의 시선은 태주에게로 향해 있었다. 마치, 태주에게 말하는 것처럼.
“귀비를 들라 이르시게.”
그리고 태주는.
“영화궁 화원의 누각으로. 귀비도 나오라 전하시게.”
그리 말하는 명휘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오늘 몇 번이고 이상하게 쳐다보았을 때 그리했던 것처럼.
* * *
황제가 떠나고 난 뒤 영화궁, 수현은 욕탕에 들어 있었다.
땀과 정액, 애액으로 범벅이 된 몸 위로 나인들이 따뜻한 물을 끼얹었다. 깡마른 몸에는 황제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몸을 보며 옆에서 장 상궁이 한숨을 내쉬었다. 날이 갈수록 황제의 행위가 포악해지니 한없이 심란한 그녀였다.
“마마. 어디 편찮은 곳은 없으시나이까.”
수현은 딱히 답이 없었다. 그저 물을 끼얹고 부드러운 천으로 문질러 대는 나인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숨을 죽이고 있을 뿐.
곧 물 안에 붉은색 액체가 섞여 들었다. 이를 보고 놀란 나인들이 얼굴을 잔뜩 굳었지만, 정작 수현은 아무렇지 않아 했다. 황제와 관계하며 피를 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퍼렇게 멍든 손목을 보며 장 상궁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남몰래 쓰린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망가지는 마마를 보고 있는 게 너무도 괴로웠기에.
그때부터였다.
전에도 그러했지만, 정확히 남순에 다녀온 후부터 귀비를 대하는 황제의 행위는 더욱 포악해졌다. 예전에는 그래도 폐하가 마마를 아끼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보였다. 관계는 거칠었을지언정, 은근히 마마를 챙기는 모습이었으니.
그래서 장 상궁은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다. 물론 수현의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폐하가 죽도록 미우실 터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행복해지는 길은 과거를 잊고 폐하를 받아들이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마마께서 폐하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폐하 또한 마마를 소중히 아껴 줄 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장 상궁의 생각은 요즘 들어 달라지고 있었다. 폐하와 관계 후에 시체 같은 몰골로 온몸에 멍을 달고 침상 위에 쓰러져 있는 마마를 보자면 정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이해가 가질 않는다. 마마를 바라보는 폐하의 눈빛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폐하께선 분명 마마를 진심으로 아끼고 계셨는데. 하루아침에……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욕탕이 정적에 파묻혀 있던 와중에 침묵을 깨고 문밖에서 한 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양심전에서 전언이 있었나이다.”
양심전이라는 말에 장 상궁의 미간이 좁아졌다. 폐하께서 영화궁을 떠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마마를 찾으신단 말인가.
“그래. 그 전언이 무엇이더냐.”
“채비가 끝나는 대로 마마를 영화궁 화원의 누각으로 오라 하셨나이다.”
“영화궁 화원의…… 누각 말이더냐?”
“예. 그렇사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은 없으셨고. 속히 채비하라는 말만이 있었나이다.”
나인의 말에 장 상궁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였다.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았는데, 이대로 또 폐하와 관계한다면 모르긴 몰라도 사달이 날 터였다.
“마마.”
그녀의 목소리가 다소 떨리었다.
“지금은 몸을 회복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폐하께 마마의 몸이 좋지 않아 침상에 누워 있다고 하면 이해하실 것입니다. 소인이 직접 양심전에 다녀오겠나이다.”
장 상궁의 긴 설득에도 수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촤르륵, 하얀 피부를 타고 물이 흘러내리고 나인들이 서둘러 천을 들고 물기를 닦아 냈다.
“가겠다고 전하거라.”
장 상궁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양심전에 곧 채비하고 가겠다고 그리 전하거라.”
“예, 마마.”
수현의 말을 듣고 욕탕밖에서 아뢰던 나인이 물러갔다.
“마마!”
다소 격한 목소리로 장 상궁이 수현을 불렀다.
“어이하여 영화궁 화원의 누각으로 향하겠다 하셨나이까.”
“폐하께서 오라 하셔서 가겠다 하였는데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마마, 단지 마마가 보고 싶어 오라 하신 것은 아닐 터. 마마께서 나가신다면 분명 몸에 무리가 갈 것입니다. 고작 한 시진입니다. 폐하께서 영화궁을 나선 지 고작 한 시진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몸이 회복조차 되지 않았는데, 또 폐하의 몸을 받아 내실 순 없습니다. 마마, 부디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기나긴 장 상궁의 말을 다 듣고 수현은 표정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그게 대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씀입니까.”
일순 장 상궁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마마.”
“내 몸이 망가져 산산조각이 난다 한들 그것이 대체 무슨 문제가 된다고, 이리 호들갑입니까.”
귀비는 오히려 장 상궁을 향해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웃음이 너무도 섬뜩하여 장 상궁은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마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
장 상궁의 물음에 수현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인들의 손에 물기를 걷어 내고 욕탕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을 뿐.
“마마.”
상전이 욕탕에서 나오자 나인들이 달라붙어 의복을 챙기기 시작하였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 수현은 그저 말없이 경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죽어야 할 몸이었다. 옛 성해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이리 살고 있으나, 그것은 황제의 명일 뿐. 차라리 그의 손에 죽어 사라지면 내 백성만큼은 살릴 수 있겠지.’
“마마, 채비를 끝냈나이다.”
나인이 아뢰는 말에 수현의 시선이 경대로 향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빨갛게 입술을 바른 꼭두각시가 그곳에 서 있었다. 영혼이라고는 전혀 깃들어 있지 않은 껍데기.
“그만 화원으로 향할 것이다.”
“예, 마마.”
그렇게 수현이 나인 무리를 이끌고 밖으로 향하였다.
태화 황궁에 있는 화원 중에서 가장 어여쁘다고 알려진 영화궁의 화원으로 수현이 당도하였다. 가을빛으로 물든 화원은 온통 울긋불긋하였다. 누각을 따라 졸졸졸 흐르는 냇물은 저무는 해에 물들어 다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두고 누각으로 향하는 이의 얼굴엔 웃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폐하. 귀비마마께서 드셨나이다.”
환관이 아뢰자 누각에 앉아 있던 두 명의 사내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황금색 용이 수놓아진 흑룡포를 차려입고 있는 자, 명휘였다.
“들라 하라.”
“예, 폐하.”
환관이 고갤 조아리며 물러났다. 구비의 앞으로 다가온 그가 다시 한번 귀비를 수현의 앞에 고갤 조아렸다.
“마마, 드시지요.”
긴 옷자락을 끌며 수현이 누각의 계단에 발을 옮겼다. 붉은 깃털의 공작이 있다면 이리 보였을까? 긴 계단 위에 늘어진 긴 옷자락이 마치 우아한 수컷 공작새의 꼬리처럼 보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수현이 예를 갖추자 명휘가 한껏 웃어 보였다. 그가 수현에게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가리켜 보였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서방의 양식으로 의복을 차려입은 사내였다.
“귀비. 기태주를 알고 있을 테지?”
수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주를 바라보았다. 수현은 짧은 시간 안에 그가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언젠가 몽환화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맸을 때, 그때 처음 눈을 떠 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남순에서도 폐하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기도 했고.
“예, 신첩 기억하고 있나이다.”
꽃잎이 하늘거리듯, 수현의 붉은 입술이 움직인다. 살랑이는 옷자락에선 자정향이 흘러나오고, 아직 채 말리지 못한 머리는 젖어 옷 위로 드리워져 있다.
감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뭇 양인의 마음을 홀리는 모습을 마주하며 태주는 덤덤해지려 애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방의 방식으로 그가 귀비를 향하여 인사하였다.
“소인, 마마를 뵈옵니다.”
수현은 태주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이리 와 앉으시게.”
명휘가 제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현은 이렇다 할 대꾸 없이 명휘의 옆자리로 가 앉았다. 태주를 앞에 두고 황실의 두 사람이 나란히 자리하게 되었다.
명휘가 빈 잔을 수현을 향해 내밀어 보였다. 수현이 말없이 술병을 그러잡았다. 백자 잔에 투명한 액체가 졸졸졸 흘러들었다. 빈 잔에 금방 술이 가득 찼다. 그렇게 옆으로 수현이 손을 거두는데.
“…….”
명휘가 수현의 손을 잡았다. 수현이 놀라 멈칫하려니, 하얀 손으로부터 술병을 상 위로 치운 명휘가 제 입술을 붙여 왔다.
다정을 가장한 입맞춤. 수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전에 남순에서도 술자리에 저를 불러 술 시중을 들게 하였지만,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땐 신료 앞에서 대놓고 희롱하는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정말 다정한 척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보란 듯이, 우린 행복하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참. 자네 생각나는가?”
이어 수현의 손으로 입을 가져간 명휘가 태주에게 물었다. 안주 대신 수현의 살이라도 핥기로 작정한 것인지, 손에서 입술을 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폐하.”
태주는 애써 저에게 보란 듯 수현의 손을 핥아 대는 명휘에게로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결실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그의 시선은 수현의 손에 닿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는 동시에 보고야 말았다. 긴 옷자락이 흘러내려 드러난 손목의 퍼런 멍 자국을.
“어렸을 때 말이야. 자주 오르던 나무가 있었지.”
명휘가 수현의 손에서 입을 떼어 냈다. 다만, 수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 기억납니다.”
“그때 짐이 나무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것도 기억나는가.”
“네.”
“매미를 잡겠다고 그리했었지. 그때 자네가 짐을 업고 궁까지 뛰어왔었지. 그땐 자네의 키가 짐보다 훨씬 컸으니까.”
명휘가 큰 소릴 내며 웃었다. 이에 태주는 적당히 웃어 보였다. 경쾌하게 웃지 못한 것은, 어쩌면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한곳에 이끌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면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그렇게 어릴 적 기억인데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생각나는 것이.”
추억을 회상하는 듯 명휘의 눈빛이 아련했다. 그만이 홀로 즐거운데, 그의 곁에 있는 두 사람은 전혀 그럴 수 없었다. 각자의 이유로 그들은 즐겁게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참으로 자네와 즐겁게 보낸 시간이 참 많았는데 말이야.”
대화가 계속되는 와중에도 태주는 계속해서 수현의 손목이 신경 쓰였다. 그런 태주의 시선은 금방 명휘에게 읽혔다. 피식, 명휘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명휘가 수현의 손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수현이 재빨리 제 손을 긴 소매 속으로 감추었다.
“귀비는 알고 있는가. 태주가 그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지금껏 태주와 대화를 나누던 명휘가 수현에게 말했다. 이에, 수현이 조용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신첩도 들은 바가 있어 알고 있었나이다.”
이에 명휘가 대소하였다. 그가 한참이나 껄껄대고 웃어 대는 동안 태주의 표정은 밝을 수가 없었다.
“그래, 참으로 대단하지. 서방에서 구하기 힘든 약재를 그리 단시일 만에 구해 왔으니.”
명휘의 칭찬에도 태주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을 유지한 채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짐이 아끼는 귀비를 위해 그리 애를 써 주다니 자네의 우의에 참으로 감격했네. 무리한 부탁임에도 거절하지 않고 들어주었으니.”
“과찬이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명휘가 술병을 잡아 들었다. 태주가 잔을 내미니 그가 빈 잔으로 술을 따랐다.
“그러고 보니, 이번 남방에선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네. 그 어느 때보다 흥미로운 남순이었지.”
태주의 잔에 술이 가득 찼다. 태주는 황제가 하사한 술로 입술을 한 모금 적시고 잔을 상 위에 내려 두었다. 이윽고 태주가 황제에게서 술병을 건네받았다. 명휘가 그랬던 것처럼, 태주가 황제의 빈 잔에 술을 올렸다.
“마지막 날 연회가 기억나는가?”
“예, 폐하. 기억납니다.”
어느덧 황제의 잔에도 청아한 술이 가득 채워졌다. 술병을 내려 두고 태주가 명휘를 주시한다. 저를 빤히 바라보는 명휘를 향해 눈을 맞춘다.
“짐은 참으로 그 연회가 즐거웠네. 다들 쥐새끼처럼 귀비를 힐끔거리던데, 어찌나 웃기던지.”
명휘가 잔에 든 술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눈빛만으로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네.”
묘한 눈빛으로 태주를 주시한다.
“눈빛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일순, 세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태주를 보는 명휘의 눈빛이 날카롭다. 가시가 숨어 있는 명휘의 말에 태주의 얼굴이 굳는다. 하지만 그는 굳이 변명하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그저 황제의 눈빛을 덤덤히 받아 낼 뿐.
“혹,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른하게 눈꺼풀이 내려앉고.
“자네의 눈에도 귀비가 그리 아름다워 보이는가?”
황제의 손이 상 아래로 향한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수현의 가랑이 사이에 커다란 손이 자리한다. 아랫도리로 속으로 파고든 손이 태주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 은밀한 부위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
놀란 수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앞에 사람이 있음에도 대놓고 국부를 주물러 대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수현이 명휘의 손을 잡아 제지하였다. 하지만 거친 양인의 손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뿌리치는 손길에도 명휘는 집요하게 계속 손을 움직였다.
폭신하기만 하던 살덩이는 손길 몇 번에 그새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빳빳하게 발기한 기둥을 잡고 명휘가 위아래로 문질러 댔다. 버섯 모양을 한 선단을 둥글게 쥐고 손목을 돌려 애무한다. 옷 속에 손을 넣어 만져 대느라 움직임이 편하진 못했지만, 수현의 흥분시키기엔 충분한 손길이었다.
“흐으…….”
어떻게든 흥분하지 않으려 애쓰던 수현의 입에서 결국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사향 냄새가 조금씩 새어 나올 즈음이었다. 음인의 약점과도 같은 사향에 단번에 수현의 얼굴이 변해 버렸다. 그는 눈조차 바로 뜨지 못한 채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볼이 새빨갛게 물들고, 입술이 벌어졌다.
“으응…….”
수현이 내뱉는 야한 소리를 들으며 태주의 시선은 여전히 명휘에게 꽂혀 있었다. 명휘 또한 수현의 좆을 문지르며 계속 태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먼저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도 되는 양, 두 사람은 절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응…… 아…….”
수현의 신음은 계속되고, 그의 양물을 움켜쥔 명휘의 손은 움직임이 더욱 빨라져만 갔다. 수현은 다른 이를 앞에 두고 음란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극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머릿속 생각일 뿐, 그의 몸뚱어리는 그럴 수 없었다. 양물을 쥐고 흔들어 대는 손길이 미치도록 좋았으므로.
뿌리부터 힘줄이 곧게 선 기둥을 따라 왕복하는 손놀림이 미치도록 달콤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귀두가 뱉어 낸 끈적한 선액에 손바닥이 계속 마찰하고, 힘주어 탁탁 기둥을 쓸어 올리는 손길에 하릴없이 몸이 늘어졌다. 단단한 살덩이가 한 번 더 덩치를 키워 내고, 명휘의 손 안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그만. 그만…….”
수현이 애원했다. 사정이 가까워졌음을 안 명휘는 둥글게 쥔 좆기둥을 더욱 세차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수현의 몸이 들썩이고 옷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응, 응, 응, 응. 아아, 아! 아!”
빨라진 손길을 따라 수현이 내뱉는 신음의 간격도 짧아졌다.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쾌락에 수현이 완전히 몸을 내맡겼다. 아래서부터 끓어오른 무언가가 그의 몸속에서 팍, 터져 나왔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가 모든 걸 쏟아 낸다.
“아으응, 으응! 하으읏, 흣!”
온갖 교성이 터져 나왔다. 사정이 주는 황홀감을 느끼며 귀비가 명휘의 한쪽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야한 목소리를 쏟아 내며 그가 몸을 들썩였다.
꿀렁꿀렁. 수현의 좆이 뱉어 낸 끈적한 물이 명휘의 손을 적셨다. 명휘는 끈적해진 손으로 계속해서 수현의 좆머리를 비벼 댔다. 사정 후에 가장 예민한 부위를 문질러 대니 수현이 자지러지며 눈물 흘렸다.
쾌락과 번갈아 찾아오는 수치스러움에 수현이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이미 이성을 지운 그의 머릿속에 태주의 존재는 잊힌 지 오래였다. 사정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잡고 놓아주지 않는 명휘 때문에 그는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본능에 몸을 맡긴 채 신음하며 허릴 흔들었다.
“하아, 아. 하아. 하아…… 하.”
수현의 양물을 잡고 비벼 대던 명휘가 손을 꺼내었다. 수현은 가라앉지 않는 흥분에 몸을 달싹이며 명휘의 어깨에 더 깊게 얼굴을 묻었다.
정액으로 범벅이 된 손을 명휘가 들어 올렸다. 하얀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손을 그가 얼굴 앞으로 가져온다. 제 손을 물들인 끈적한 액체를 빤히 바라본다.
나른한 눈빛을 한 채로 그가 손을 내렸다. 상위에 놓인 빈 잔에 손가락을 담그고 그 위로 술을 부었다. 손을 뒤덮고 있던 끈적한 액체가 술에 씻겨 내려갔다. 정액을 씻어 낸 술이 잔에 가득 차고도 남아 술잔 밖으로 흘러내렸고, 상 위로 알싸한 향의 술이 고여들기 시작했다.
명휘가 술잔에서 손가락을 빼내었다. 수현의 정액이 담긴 술잔을 그가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정액과 섞여 뿌옇게 변해 버린 술을 태주에게 권한다.
수현의 정액이 담긴 그 술을, 하나밖에 없는 제 벗에게 권하는 것이다.
“…….”
“마시거라.”
“…….”
“오랜 벗에게 주는 짐의 성의이거늘.”
술잔을 사이에 두고 두 양인의 시선이 다시 부딪친다. 마치 잘 벼린 칼날이 맞붙듯,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이 날카롭다.
“어서.”
한참을 노려보다 결국 태주가 손을 내밀었다. 수현의 정액이 담긴 술잔을 받아 들고 그가 한입에 털어 넣는다. 목구멍으로 알싸한 술이 넘어간다. 첫맛은 씁쓸하나 끝맛은 달콤하다. 음인의 색향만큼이나 달콤한 맛이 난다.
“……폐하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빈 잔을 상위로 탁, 소리 나게 내려 두고 태주가 명휘를 노려본다.
이에 명휘는 빙그르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니라는 듯 그가 무심하게 말한다.
“딱히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네. 다만.”
“다만.”
“짐이 특별히 하사한 음인과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것이 다소 의아해서.”
웃음기를 걷어 낸 얼굴이 차갑게 굳는다.
“혹, 자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태주의 눈동자를 꿰뚫을 듯하다.
“어떠한가. 짐의 말이 틀렸던가?”
침묵.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침묵의 벽.
오랜 붕우인 만큼 둘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고, 유일하게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그런 사이였기에.
“마음에 두고 있는 음인이라니요. 당치 않으십니다.”
“그래?”
“소인은 아직 혼사에 관심 없습니다.”
명휘가 한쪽 입꼬리가 틀어 올라간다. 조소하는 시선으로 태주를 쳐다본다.
“혹, 혼사를 치를 수 없는 이를 마음에 둔 건 아니고?”
장난처럼 툭 뱉는 말.
태주의 얼굴이 다시금 굳는다. 수려한 얼굴이 다소 일그러져 있다. 좁아진 미간에 화사했던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이다.
“풉.”
그런 태주를 바라보며 명휘가 웃음을 터뜨린다. 쩌렁쩌렁, 영화궁의 화원에 황제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친다.
“뭘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그가 다시금 술병을 잡아 든다. 태주의 잔에 술을 채우며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한다.
“농일세. 어서 한잔 받게나.”
태주를 바라보는 명휘의 얼굴엔 웃음이 완연했다.
* * *
눈을 뜨자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부셨는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기침하셨나이까.”
역시 익숙한 목소리. 장 상궁이 수현의 침상으로 다가왔다. 혹여나 제 상전이 어디 불편한 곳이 있진 않을까, 그녀가 수현의 혈색을 살피었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과 달리 수현의 얼굴은 여느 때와 다름없어 보였다. 여전히 손목에 드리워진 멍이 거슬리긴 했지만.
“조반상을 들라 이르겠나이다.”
장 상궁이 물러났다. 문밖을 지키고 있는 나인들에게 조반상을 준비하라 이르는데, 수현은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제 그건 무슨 일이었을까.’
그는 어제 화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제 황제가 저를 불러 양인을 앞에 두고 희롱하였다. 황제가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저를 희롱했던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다만, 어제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토정하게 만들었다. 다른 양인이 보는 앞에서 국부를 주무르고 비벼서 기어이 토정하는 꼴을 보이게 하고야 말았다. 그나마 거기서 잠들었기에 망정이지, 정신이 있었다면 낯을 들지 못했을 터였다.
그것은 더없이 수치스럽고 모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는 저를 욕보이고자 그리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보다 그 양인을 더 신경 쓰고 있는 듯했어. 마치, 나를 능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양인을 도발하려는 것인 양…….’
수현은 도무지 황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도 상식을 뛰어넘는 짓을 많이 하는 자였지만, 이번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 양인이 어떤 자이길래 도발하려 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 때문에…….’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그새 조반상이 도착하였다. 식탁 위에 모락모락 김을 내뿜으며 조반상이 차려지는 동안 장 상궁이 다시금 수현의 곁으로 다가왔다.
“마마, 그만 일어나시지요.”
장 상궁에게 부축을 받으며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탁으로 가 자리에 앉으니 따뜻한 죽그릇이 눈에 보였다.
“부러 아침은 죽을 준비하였나이다. 아무래도 입맛이 없으실 것 같아.”
장 상궁이 웃으며 수현에게 수저를 챙겨 주었다. 수현은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서 수저를 건네받았을 뿐이었다.
식사를 끝낸 수현은 나인들을 물리고 장 상궁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실로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몽환화 사건 이후로 거의 영화궁의 침소 밖을 나서지 않았으니 정녕 그러했다.
“마마. 그새 날씨가 매우 선선해지지 않았나이까?”
여름의 끝자락, 확실히 꽤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현이 궁에 들어온 것도 꽤 오래된 일이었다. 벌써 두 번이나 계절이 변하였으니, 반년을 이곳에서 보낸 참이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궐 안에 사연 없는 이 없다지만, 마마처럼 다난한 나날을 보낸 분은 없을 것입니다.”
웃음 반, 진담 반을 섞어서 하는 말. 언제나 그랬듯, 장 상궁의 말에 수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수현은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기에 장 상궁 또한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나가던 두 사람은 어느덧 누각 근처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어제, 명휘와 태주 셋이서 함께 술자리를 가졌던 그 누각이었다.
“어?”
걸음을 옮기던 두 사람이 자리에 멈춰 선 것은 장 상궁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누각 위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한 장 상궁이 가는 눈을 해 보였다.
“공자님이 아니옵니까?”
장 상궁의 말에 수현이 슬쩍 고갤 돌려 누각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봐도 누구인지 단번에 알 것 같았다. 태화 궁 안에 저리 짧은 머릴 하고 서방의 옷을 입은 채 돌아다니는 이는 유일했으니까.
“어찌하시겠나이까. 다른 곳으로 가시겠나이까.”
장 상궁의 말에 수현이 발걸음을 돌렸다. 어제 일 때문에라도 딱히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기에.
하지만.
“귀비마마.”
돌아서는 수현을 상대가 먼저 불렀다. 수현이 자리에 멈칫했다. 어찌해야 할까 수현이 망설이고 있는 사이, 어제 있었던 일을 알 리 없는 장 상궁이 눈치 없이 대꾸하였다.
“공자님, 오랜만에 뵈옵니다.”
어제 누각까지는 수현과 함께 갔으나, 누각 위로는 오르지 못한 그녀였다.
“오랜만입니다.”
누각에서 내려온 태주가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어제와 같은 옷을 입은 걸 봐서는 궐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 같았다. 황제와 밤새 술잔을 주고받았던 것일 터였다.
“마마, 밤새 편히 주무셨는지요.”
완전히 돌아선 것도 아닌, 그렇다고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자세로 서 있는 수현을 보며 태주가 말했다. 예, 입술을 그저 잘근잘근 씹어 대다 수현이 마지못해 대답하였다. 어제 그의 앞에서 벌어진 수치스러운 일이 다시금 떠올라 얼굴을 쳐다보기 민망했던 탓이었다.
“소인이 어제 술이 많이 되어 경황이 없었나이다. 워낙 취기가 올랐던 터라 큰 결례를 저질렀으니, 마마께선 부디 소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의 말에 수현은 얼굴이 확 붉어졌다. 결례라 함은, 분명 저가 사정한 모습을 본 것을 두고 한 말일 터. 분명, 그것이 태주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의 잘못이라고 되려 사과하는 모습에 수현은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함마저 느껴야 했다.
“그리해 주시겠사옵니까?”
낮지만 부드러운, 신뢰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유난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 목소리에 수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쏟아지는 햇살 아래, 햇살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태양에 그을린 피부는 다소 어두운색을 띠었으나, 오히려 더 건강해 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짧고 곱슬한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살포시 나부끼고, 커다란 눈망울은 마치 거울처럼 제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
눈 끝이 다소 쳐져 한없이 다정해 보이는 얼굴과 달리 몸은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끝까지 잠그지 않은 품 넓은 셔츠가 바람에 펄럭이며 은근히 그의 가슴선이 드러났다. 넓은 가슴을 보자면, 남순에서 음인들이 모조리 구애했던 것이 이해될 정도였다. 당장 뛰어 들어가 안겨도 남아돌 정도로 넓은 가슴이었다.
“공자님께서는 참 재밌게 말씀을 하시는군요.”
쌀쌀맞은 목소리가 귀비의 도도한 얼굴과 잘 맞아떨어졌다.
차가운 태도에도 태주는 주눅 들거나 하지 않았다. 여전히 햇살 같은 미소와 함께 귀비마마에게 말을 붙였을 뿐.
“어제 내심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슨…….”
“갑자기 잠이 드시니 놀랄 수밖에요.”
“그건.”
“혹, 어디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셨습니까?”
수현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사정하여 잠이 든 것을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모른 척하자는 건지, 아니면 은근히 사람을 놀리는 것인지. 전자라고 생각하기엔 조금 뻔뻔했고, 후자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도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전자가 맞는 듯한데.
“공자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일단은 적당히 선을 그어 두기로 하였다. 이쯤하면 저도 물러서겠지.
“어찌 소인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 하십니까. 잊으셨습니까, 마마의 목숨을 구한 것이 소인이라는 것을.”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는 말. 그 능글맞은 말투에 수현은 잠시 울컥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몽환화에 중독된 수현의 목숨을 구한 것은 그였으니까.
“예. 덕분에 이리 궐 안에 더 눌러앉게 되었으니, 어찌나 고마운지요.”
뼈 있는 말임에도 어쩐지 태주는 틱틱대는 수현이 귀엽게 느껴졌다. 저리 도도한 얼굴을 하고 은근히 당황한 모습이라니…… 태주는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담아야 했다.
“마마께서 이리 고마워해 주시니 소인은 그저 황송하기 그지없사옵니다.”
끝까지! 수현은 더 말을 섞어 봤자 피곤해질 것 같아 그만 자릴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공자께선 이만 몸을 추스르고 조심히 돌아가시지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는데.
“잠시만요, 마마.”
염치는 대체 어디에다 두고 온 것인지, 양인이 다시금 저를 붙잡았다. 수현이 다소 언짢은 얼굴로 뒤를 돌려니, 난데없이 태주가 저를 향해 무엇인가 내밀어 보였다.
“무엇입니까.”
양인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기다란 나무 상자였다. 정체를 감춘 낯선 물건에 수현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남방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남방이라는 말에 수현은 움찔했다. 남방이라면, 수현의 고향이기에.
“마마가 생각나 가져온 것이니, 받아 주시겠나이까.”
꿀꺽, 목구멍을 타고 침이 넘어갔다. 저자가 무엇을 내밀던 별로 받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남방이라는 말에 흔들린 것이다.
‘저 상자 안엔 무엇이 들었을까? 잠시 확인만 해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일단 뭔지만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수현이 장 상궁에게 눈짓했다. 상전의 지시를 받고 장 상궁이 태주로부터 상자를 건네받았다. 그녀가 두 손으로 잡고 기다란 상자의 작은 뚜껑을 여니, 그 안에 조심스럽게 자리한 물건이 하나 보였다.
“이것이…….”
장 상궁이 상자 안에서 물건을 꺼내 수현에게 건네었다. 그것은 손바닥보다 조금 긴 나무 기둥을 양각으로 파 만든 조각상이었다. 어찌 보면 용 같기도 했고, 어찌 보면 주작 같기도 했고. 현실에는 없는 묘하게 생긴 동물이 마치 하늘로 승천하듯 길게 뻗어 올라가는 형세를 하고 있었다.
“남방에서 일을 보는 동안 그곳 사람들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남방에서는 예로부터 이 조각상을 머리맡에 놓고 잔다 하더군요.”
순간, 수현은 언뜻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어렸을 적, 수현의 침소에도 이런 작은 조각상이 있었다. 어렸을 때라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어마마마가 그리 두라 일렀기에 두었는데, 그 기억이 불현듯 난 것이다.
“이 조각상이 잠을 자는 동안 흉흉한 꿈자리에서 마마를 지켜 줄 것입니다.”
조각상을 한참 바라보던 수현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말인즉슨, 태주도 이 물건의 용도를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것이 옛 성해의 풍습에서 유래된 물건이라는 것도 안다는 뜻일 터.
“무엇 때문입니까.”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수현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물건을 주는 겁니까.”
부드러운 미소가 태주의 입가에 걸렸다. 햇살처럼 따뜻한 목소리가 수현의 귓가를 두드렸다.
“마마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셨으면 해서요.”
“……그게 무슨.”
“마마의 늘 어두운 얼굴이 마음에 쓰였습니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나셨을 때, 저를 두고 한 말도 그랬고요.”
왜 나를 다시 지옥으로 불러들였나요, 수현은 어렴풋이나마 저가 했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소인이 마마께 힘이 되어 드릴 순 없지만. 작은 물건으로나마 위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하였다. 너무도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기에.
만약 태주가 내민 것이 값지고 귀한 물건이었다면, 수현이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작은 조각상이었기에. 고작 작은 조각상 따위였기에. 어쩌면 그는 태주가 하는 말을 더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몰랐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조심스러운 그 목소리에 수현은 말없이 입술을 짓씹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주치기 껄끄러운 이라고 느꼈는데…… 그런 수현의 생각은 어느 순간 오간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너무도 따뜻한 기분. 대지를 내리쬐는 햇살처럼 너무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람.
“고맙…… 습니다.”
수현이 작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태주는 그런 수현을 바라보며 씽긋 웃었다. 수현도 이번엔 피하지 않고 태주의 얼굴을 바로 마주했다.
“소인이 마마의 귀한 시간을 많이 뺏은 것 같습니다.”
태주가 먼저 그리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마마께선 편히 쉬시옵소서.”
한쪽 팔을 허리 뒤로 두르고 태주가 고갤 숙였다. 늠름해 보이는 자태로 인사를 끝낸 명휘가 수현을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태주가 수현으로부터 멀어지려는데.
“잠시만.”
이번엔 수현이 태주를 붙잡았다.
발걸음을 옮기던 태주가 자리에 섰다. 천천히 수현을 향해 뒤를 돌았다.
“공자께선 남방의 얘기를 많이 들으셨다 하셨습니까.”
뜻 모를 이야기에 태주가 고개를 까닥였다.
“예.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수현은 잠시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곧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나에게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예?”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공자께서 남방에서 보고 겪었던 것들을 얘기해 주시지요.”
뜻밖의 명에 태주는 다소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태주는 곧 웃어 보였다. 가식이 없는 미소였다.
“어느 분의 명이라고 소인이 거절하겠나이까. 마마께서 원하신다면 소인, 얼마든지 얘기해 드리겠나이다.”
그의 말에 수현의 얼굴이 다소 풀어졌다.
“하면 조만간 기별하겠습니다.”
마지막 말을 전한 수현이 가볍게 고갤 까닥이며 태주에게 인사하였다. 먼저 자릴 떠나는 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대로 태주도 자릴 떠났다. 그렇게 영화궁의 화원을 나서는 태주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침상에 앉은 수현은 머리맡에 놓아둔 작은 조각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찌 보면 나무를 깎아 만든 보잘것없는 물건이었지만, 수현에게는 이 방 안을 채우고 있는 그 어떤 물건보다도 소중했다. 조각상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어렸을 적으로 돌아가 어마마마의 품 안에서 잠을 청하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었다.
아마도 오늘 밤은 조금이나마 편히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적어도 황제가 영화궁을 찾기 전까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오는 황제가 저의 침소로 찾아오기 전까지는.
“폐하를 뵈옵니다.”
예를 갖추는 장 상궁의 목소리를 듣고 수현이 애써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를…… 뵈옵니다.”
수현은 조금 전까지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저가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궁 안에 있는 수많은 후궁을 버려 두고 밤마다 영화궁을 찾는 황제를 어찌 잊을 수 있었을까.
“그대는 참으로 무심한 사람이 아니더냐. 매일 밤 그대를 찾아와도 웃는 모습을 한번을 보여 주지 않으니.”
명휘가 조소했다. 희롱하는 말이라면 이미 진력날 정도로 들어왔던 수현이었기에, 황제가 지껄이는 헛소리를 그저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이제부터 시작될 짓거리에 비하면, 지금 이 희롱은 어디 새의 발톱만큼이나 되려나.
“근데. 저것이 무엇이더냐.”
수현이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되뇌고 있는 사이, 침상 위의 조각상을 발견한 명휘가 불현듯 물어 왔다. 수현은 아무 생각 없이 태주에게 받았다고 말하려 하는데.
“소인이 구해 왔나이다.”
어찌한 일인지 장 상궁이 나섰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를 몰라 수현이 의아한 듯 쳐다보려니, 장 상궁이 계속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린다 하시어 수소문하여 구해 왔나이다. 예로부터 잠자리의 악귀를 몰아내는 물건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여 마마께 도움이 될까 싶어 그리했나이다.”
장 상궁의 말이 끝나도록 수현의 의아함은 풀리지 않았다. 도대체 저이가 왜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 혼란스러운데, 그걸 들은 명휘가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매일 밤 귀비를 괴롭히는 게 악몽이 맞긴 하더냐. 짐이 아니고?”
황제가 하는 말을 듣고 수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되었다.”
명휘가 귀찮다는 듯 장 상궁을 향해 손짓해 보였다. 그걸 본 장 상궁이 고갤 조아려 예를 갖추었다.
종종걸음으로 문을 향하는 그녀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또 오늘 밤은 얼마나 마마를 괴롭히실까. 벌써 귓가에 수현의 비명이 들리는 듯했다.
“뭐 하느냐. 벗지 않고.”
명휘가 침상으로 가 걸터앉았다. 무심한 눈길로 그가 자리에 선 수현을 빤히 응시했다. 제 입술을 짓씹던 수현이 천천히 옷고름을 풀었다. 툭. 몸을 가리고 있던 옷가지가 하나둘 바닥 위로 떨어지고 완전히 나신이 된 수현이 명휘 앞에 섰다.
피식.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수현의 알몸을 바라보며 명휘가 조소하였다. 깡마른 몸에는 명휘가 만들어 낸 수많은 흔적이 자리해 있었다. 하얀 살결 위에 덧그려진 붉은 자국들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금세 얼굴이 달뜨기 시작했다.
“흣!”
명휘가 거칠게 수현을 잡아끌었다. 침상 위에 내던져 자리에 엎드리게 하였다. 둔부를 잔뜩 드러낸 채로 수현이 얼굴을 침상 위에 묻었다.
침상에 앉아 명휘가 수현의 둔부 사이를 벌렸다. 두 개의 하얀 둔덕 사이, 주름진 작은 구멍이 수줍게 오므려져 있었다. 살이 워낙 하얀 터라 분홍빛 주름진 구멍이 마치 못다 핀 꽃봉오리처럼 보였다.
하체를 들어 올리고 엎드린 자세 덕분에 다리 사이에 덜렁거리는 알집과 기둥이 보였다. 잔뜩 긴장한 탓에 쪼그라든 알집 또한 분홍빛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였다.
발기하지 않아 말랑한 살덩이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리니 수현의 엉덩이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성기를 몇 번 건드렸다고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는 구멍을 바라보며 명휘의 얼굴엔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먹이를 주건만 그대의 구멍은 이리 배고프다 보채니, 참으로 음탕하기 짝이 없도다.”
매번 듣는 희롱이었건만, 늘 그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수현의 귓가가 붉어졌다.
명휘는 가운데 손가락을 쭉 펼쳐 주름진 구멍의 가운데를 푹, 찔렀다. 수현의 허리가 반사적으로 얕게 튀어 올랐다. 놀라서 잔뜩 입을 오므린 구멍을 펼치기 위해 명휘가 손가락으로 안을 들쑤셨다.
엉덩이 사이에 자리한 꽃봉오리가 들락대는 손가락에 점점 잎을 펼치더니 기어이 숨겨 둔 붉은 속살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엉덩이를 잡아당기며 주름을 벌리고, 명휘가 더 안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살살살살 긁으며 쑤셔 대니 조금씩 내벽이 젖기 시작했다.
조금씩 축축해지는 여린 살을 느끼며 명휘가 손가락을 휘저었다. 찰박찰박 손가락에 마찰하는 애액의 느낌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내벽의 느낌은 말할 것도 없었고.
어느 정도 후문이 녹진하게 풀렸을 때, 명휘가 혀를 내밀었다. 끝을 살짝 구멍에 가져가니 뜨겁게 달아오른 살덩이가 혀를 감아오는 게 느껴졌다. 좁고 폭신한 사이로 혀를 넣어 할짝대자 안쪽 살이 꿈틀대며 반겨 왔다.
명휘는 혀를 크게 돌려 내벽 구석구석을 핥았다. 보드라운 살덩이가 비벼 대자 내벽은 더욱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안을 다 적시다 못해 살을 타고 질질 흘러내리는 애액을 명휘가 빨아들였다.
쭈읍, 쭙. 안을 헤집으며 애액을 빨아들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 안을 울렸다. 엉덩이 사이가 뜨끈하게 달아오르자 희열을 참지 못하고 수현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열락이 차오른 얼굴은 붉어져 침상 위에서 도리질 치고, 아찔하게 들어 올린 허리가 들썩였다. 어느덧 덜렁거리던 성기가 빳빳하게 굳어 벌어진 아가리에 한 방울 선액을 매달고 있었다.
달큼한 애액을 내뿜는 구멍의 맛을 한참 음미하던 명휘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애액과 침으로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아 내곤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뒤를 한번 빨린 것만으로 그새 이리 세운 게냐. 누가 천한 몸뚱이 아니랄까 봐.”
수현이 뭐라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술을 헐떡이는 사이, 명휘가 다시금 수현의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명휘가 거칠게 구멍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감아오는 폭신한 살을 헤치고, 손끝의 감각을 좇아 수현이 가장 달뜬 반응을 보이는 지점을 찾으려 했다.
“흣!”
얇은 살을 사이에 두고 조약돌만 한 크기의 둥근 내부 기관의 느낌이 느껴졌을 때, 수현의 입에서 거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칠게 푹푹, 찍어 대며 문지르자 내벽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엉덩이 살이 요동하고, 내벽이 빠른 속도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하으읏! 흣!”
수현의 좆 머리에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침구를 물들이며 정액이 뚝, 뚝 흘러내렸다. 가는 두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들어찬 손가락을 씹어 대려 구멍이 바쁘게 움직였다. 출렁이는 엉덩이 살을 보며 명휘가 입안에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그대의 몸은 어찌 이리도 경박하단 말이더냐. 뒤를 쑤셔 주었더니 앞뒤로 물을 내뿜어? 천한 무희의 몸이라 걸레짝이라도 된 게냐? 응?”
온몸은 열락에 들떠 녹아내리고 있었지만 수현의 마음은 그럴 수 없었다. 오늘따라 명휘가 내뱉는 저속한 농지거리가 수현의 심장을 쿡쿡 쑤셔 왔다. 매번 천박하다 욕보이는 황제로 인해 수치심이 극심했다.
“그래. 걸레짝이나마 짐이 친히 옥근으로 쑤셔 줄 터이니, 어디 견뎌 보거라.”
명휘가 제 바지춤을 풀었다. 수현을 괴롭힐 생각에 잔뜩 성이 난 살덩이를 들고 그대로 수현의 구멍에 파고들려는데.
“폐하께서…… 이리 만들지 않으셨습니까.”
얼굴을 침구 위에 처박은 채로 수현이 겨우 말을 내뱉었다.
일순, 명휘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재밌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가 수현에게 되물었다.
“짐이 그랬다고?”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모르겠구나.”
“폐하께선 잊으셨습니까. 어제 양인이 보는 앞에서 신첩의 양물을 주무른 것을.”
수현의 말에 명휘가 대소하였다.
“참으로 개소리를 정성껏 하는구나. 그래. 그래서 그대는 짐이 좀 주물렀다고 양인이 보는 앞에서 실컷 싸질렀겠다?”
어이없다는 듯 명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데, 고개를 처박은 채로 힘겹게 수현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셨습니까. 신첩의 몸뚱이가 양인들의 눈요기가 되는 게 즐거워 그리하신 게 아니십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냐?”
“폐하께서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경하드린다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뭐라.”
“오늘 기태주가 찾아왔나이다. 어제 일이 신경 쓰였는지, 신첩에게 선물까지 가져왔나이다. 침상에 두고 자면 조금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명휘가 굳은 얼굴로 뒤를 돌았다. 침상 머리맡에 놓인 작은 조각상에 그의 시선이 꽂혔다. 정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반듯한 얼굴이 일그러지며 붉게 달아올랐다. 핏줄이 시뻘겋게 선 눈으로 그가 조각상을 노려보았다.
“……뭐라 하였느냐.”
“…….”
“기태주가 찾아왔다 하였느냐.”
“…….”
“저 나무 쪼가리를 들고?”
명휘의 감정을 담은 사향이 침상 위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슬슬 목을 조여 오는 사향에 숨을 헐떡이며 수현이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께는…… 고작 나무 쪼가리로 보이겠지만…….”
“…….”
“신첩에게는…… 아니었습니다.”
“…….”
“신첩에게는…… 그 무엇보다…… 흣!”
말하던 수현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건, 제 뒷구멍에 끔찍한 감각이 느껴졌을 때였다. 그것은 말로 차마 설명하지 못할 만한 고통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지독한 감각. 통증.
“하으읏!”
살덩이가 아닌 딱딱한 물체가 안쪽 살을 날카롭게 긁으며 들어찼다. 그것은 여린 살을 할퀴며 들어와 콱, 하고 안에 처박혔다. 주름이 죄다 펴질 만큼 빠듯하게 벌어진 항문의 꼬리가 찢어져 피가 새어 나왔다. 힘조차 줄 수 없을 만큼 안을 가득 메운 물체에 속이 더부룩했다.
“하으, 하아. 하으으……! 흐……!”
수현이 가까스로 몸을 진정하려 애썼다. 숨을 내쉴 때마다 빠듯한 뒤가 쑤시며 내장이 찢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것이 단숨에 쑥 빠져나가고 나서야 그가 겨우 몸을 추스르며 겨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뒤를 보는데.
“……!”
그는 보고야 말았다.
“그래. 마저 지껄여 보아라. 이게 뭐라고……?”
제 엉덩이를 쑤셨다 나온 무언가를, 애액과 선혈로 범벅이 된 그것의 정체를.
“지껄여 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서 말하라고!”
“신첩에게…… 소중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끼얹듯, 수현의 말이 명휘의 화를 더욱 불 지폈다. 거친 손길로 그가 조각상의 밑동을 잡고 수현의 안을 마구 헤집기 시작하였다. 여린 살이 단단한 물체에 짓이겨지며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다.
“아으윽!”
수현의 비명이 다시금 방 안을 가로질렀다. 사람 손목만 한 굵기의 나무 기둥이 항문에 틀어박히자 수현이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어 댔다. 분명 황제의 옥근보다 짧고 얇았지만, 단단하기도 단단했거니와 우둘투둘 조각되어 있어 황제의 것을 넣고 쑤셔 대는 것보다 훨씬 괴로웠다.
“그래. 너에게 소중한 것이라면 이리 안으로 품고 있어 마땅하지 않겠느냐?”
격분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린다. 목소리만큼이나 흥분한 손길이 한없이 거세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나무조각상이 수현의 안에 처박혔다. 각지고 울퉁불퉁한 물체는 항문 내벽을 마구 난도질하며 드나들었다.
흡사 용의 얼굴과 같아 보이는 조각상의 머리가 항문 내벽에 틀어막힌 채 강제로 짓쳐들어올 때면 수현의 몸이 튀어 올랐다. 오로지 고통만이 존재하는 행위에 수현의 눈에선 생리적 눈물이 흘렀다. 벌겋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꺾고 입을 내 벌리며 한없이 신음했다.
“흐읏! 하으으, 으읏! 읏!”
꺼질 줄 모르는 화기에 명휘의 손짓이 더욱 빨라졌다. 철벅철벅, 애액이 가득 찬 좁은 구멍을 들쑤시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함부로 짓이기고 멋대로 할퀴어 대는 이물질에 여린 속살이 계속 떨린다. 마찰로 인해 한껏 열이 올라 부푼 속살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을 쳐 댄다.
“그…… 마안! 제발, 그만. 흐읏!”
거세게, 그리고 빠르게 치대는 움직임에 수현의 몸이 자꾸만 앞으로 쏠렸다. 한계를 넘어선 고통에 수현이 침대보를 쥐어뜯어 댔다. 도리질 치며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침대 위를 기는데, 멀어지는 수현의 골반 아래로 팔을 넣은 명휘가 들쳐 올렸다.
“왜 도망가는 거지? 네게 소중한 것이라 하여 이리 품게 해 주었거늘.”
“그만. 제발, 그만.”
“너는 항상 몸과 다른 말을 하는구나. 네 아래는 이리도 좋다고 빨아 대는데.”
퍽, 명휘가 조각상의 기둥 끝까지 수현의 항문에 처넣었다.
“흐아아!”
내장이 그대로 뚫려 버린 듯한 고통과 함께, 수현의 좆에서 정액이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수현은 어딘가 망가진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배 속에 품은 조각상의 모양을 따라 배가 불룩하게 튀어 올랐다. 버거운 것을 문 구멍이 다물릴 생각은커녕 빠듯함에 끔뻑거리고 있었다.
“하으, 흐으으, 흐. 흐으…… 흐…….”
사정을 끝낸 수현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눈물로 젖은 눈을 겨우 뜨며 그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으로 숨이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아래가 칼날을 품은 것처럼 아팠다.
아직 사그라지지 않는 분노를 담아 명휘가 수현을 노려보았다. 조각상의 모양대로 언덕을 이룬 수현의 뱃살을 그가 주물렀다. 흐아아, 다시 한번 쏟아져 나오는 수현의 비명을 들으며 그의 한쪽 입꼬리가 추어올라 간다.
“아마도 기태주가 그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선물해 준 듯하구나. 이리 아래에 넣고 즐거워하라고.”
열어젖혔던 바지춤을 추스르고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조각상을 품은 채로 힘겨워하는 수현을 내려다보다 그가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창호지가 발라진 얇은 나무문을 활짝 열어젖히니, 이제껏 쥐 죽은 듯 방 안의 상황을 살피던 장 상궁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곧 죽을 것처럼 굳어 있다.
“흡!”
장 상궁의 턱을 명휘가 거칠게 잡아 들어 올렸다. 차마 눈조차 바로 뜨지 못하고 잔뜩 떨고만 있는 그녀의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한 번만 더 입을 그따위로 놀려 보거라.”
“폐, 폐하.”
“그땐 네년의 아가리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터이니.”
나무 조각상을 두고 거짓을 고한 이에 대한 경고였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장 상궁이었기에 그저 아무 말 못 하고 계속 얼어붙어 있는데, 명휘가 그러잡고 있던 턱을 거칠게 떨쳐 냈다.
“가자.”
그렇게 수많은 환관과 나인들을 이끌고 명휘가 돌아섰다. 멀어져 가는 황제를 보며 털썩 장 상궁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침소로 향하는 동안에도 명휘의 화는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온통 가슴을 들썩거리는 그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빨랐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의 이름만이 맴돌고 있었다.
‘기태주. 기태주. 기태주…… 기태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분해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알고 있었다. 수현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빛을.
남순 연회에서 자꾸만 수현을 향하는 태주의 눈빛은 분명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단지 제가 목숨을 살린 이에 대한 감상으로 치부하기엔 한없이 아련했고,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그런 태주의 눈빛을 명휘는 무시하고 싶었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친우였기에.
그래서 차라리 그 마음이 그 자리에 동석한 뭇 양인들과 같은 천박함이길 바랐다. 귀비는 좆 달린 양인들이라면 한 번쯤 품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몸과 향을 갖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회장에서 수현을 거칠게 탐하던 때에 마주친 태주의 눈빛은 단순한 호기심으로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제가 느끼는 분노와 닮아 있었다. 제 것을 다른 이에게 무참하게 뺏겨 버린 그 분노. 제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 놀아나며 망가지고 부서져서는 모습을 보는 것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
그랬다. 그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눈이었다.
‘감히. 제가 무어라고.’
귀비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올곧이 제 것이었다.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유일한 저만의 사람이었다. 한데,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태주를 참을 수가 없었다. 태주와 저의 사이가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을 정도로, 그만큼이나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분명 네게 기회를 주려 했었다.’
분명, 명휘는 그러했다. 태주에게 기회를 주려 했다. 적당한 선에서 경고만 주는 선으로.
남방에서 돌아온 태주와의 술자리에 귀비를 부른 것은 그 이유였다. 그와 수현의 위치를 확실히 하고 싶었다. 수현이 누구의 사람인지 보여 주고, 그에게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는 귀비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네가 품고 있는 하찮은 감정 따위 접어 두는 게 좋을 거라고. 분명 그렇게 경고했던 것이다.
당연히 그도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귀비에게 선물을 갖고 찾아와……? 그걸 또 귀비는 단번에 소중하다고 하고?’
자존심 상했다. 온갖 금은보화를 수현에게 가져다주었다. 남들은 한번 받아 보질 못해 안달이었거늘, 수현은 단 한 번도 고마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 진귀한 것들을 가져다 주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니, 어찌 그깟 조각상 따위를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뚝, 발걸음을 옮기던 명휘가 자리에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다정한 눈빛을 한 태주와 그의 앞에 웃으며 서 있는 수현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다시 한번 분노가 끓어올랐다. 귀비를 소중히 여기는 듯한 태주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 속을 달랠 수가 없었다.
저는 해 주지 못한 것이기에.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귀비의 웃음이었기에.
“폐하!”
일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명휘가 제 옆에 있는 벽을 내리쳤다. 어찌나 세게 내리쳤는지 벽에 금이 가며 쩍쩍 갈라지는데, 정작 명휘는 분함에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폐하. 괜찮으시나이까! 폐하!”
태감이 놀란 듯 달려와 황제의 손을 살폈다. 옥체에 흠이라도 생길까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는데, 명휘는 여전히 울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짐의 것을 탐할 수 있단 말이더냐. 어찌, 한낱 인간이 천자의 것을 탐할 수 있단 말이더냐.”
하물며, 저조차도 온전히 갖지 못한 것을. 그토록 애를 써도 제 손에 넘어오지 않는 것을…….
“폐하.”
시름에 잠긴 상전을 태감이 조심스레 부른다. 밤하늘에 어스름히 떠 있는 달처럼 얄팍한 목소리로 그가 황제를 위로한다.
“천하에 폐하의 것을 탐할 수 있는 자는 없나이다.”
“…….”
“어째서 폐하께선 조급해하시나이까. 이미 천하가 폐하의 것인데.”
“…….”
“설령,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그런 자가 있다 하더라도 폐하께선 조금도 염려치 마시옵소서. 그 누구도 폐하의 것을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온 이가 하는 말이 황제의 화기를 잠재운다.
들썩거리는 황제의 숨통이 다소 잠잠해진다. 조금씩 평상심을 되찾아가며 명휘의 혈색이 돌아온다. 분한 마음을 모두 가라앉힐 수는 없으나, 태감의 말에 조금씩 위안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래. 누가 뭐라 하더라도 나는 천자다. 하늘의 자식이다. 감히 내 것을 빼앗을 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기태주라 할지라도.’
“폐하. 이만 들어가시지요. 이제 밤공기가 찹니다.”
그렇게 어루고달래어 태감이 명휘를 침전에 모신다.
겨우 자리에 든 상전을 바라보다, 태감이 문밖으로 나왔다. 달도 저물어 가는 늦은 새벽, 그가 은밀히 아래 것을 찾는다.
“기태주에게 명일 나를 찾아오라 하시게.”
“예, 태감 어른.”
“은밀히 해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나이까.”
태감의 명을 받들고 환관이 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새벽을 거둔 미명이 조금씩 낯빛을 내밀기 시작하였다.
이튿날. 태주는 태감의 부름을 받아 궁에 들었다.
“어서 오시게.”
“반갑습니다, 태감 어른.”
자리에 앉아 맞이하는 태감을 향해 태주가 격식을 차려 인사하였다. 태감은 결코 단순한 환관이 아니었다. 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만큼 재상에 버금가는 권력을 지닌 것이다. 하여, 태감은 태주에게 말을 편히 할 수 있었다. 비록 태주가 황제와 친분이 두텁고 대단한 집안의 자제일지라도, 한참 저보다 어렸던 탓이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인생의 굴곡이 느껴지는 주름이 깊게 팬 얼굴로 태감이 웃으며 저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니 태주가 그곳에 가 앉았다. 곧 시중을 드는 이가 다과를 가지고 그들에게로 와 다기를 늘어놓고 총총 사라졌다.
“자네에겐 늘 고마운 마음일세.”
“어찌하여 그러하십니까.”
“폐하께서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어디 흔하겠는가. 폐하께선 자네 말고는 곁에 두는 이가 없으니. 내 어찌 자네를 고맙다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무슨 까닭으로 태감이 이런 말을 늘어놓는지 알 길이 없었으나, 일단 태주는 잠자코 경청하였다. 대나무를 쪼개 놓은 듯 반듯한 자세로 그가 대답하였다.
“과찬이십니다.”
수려한 그 자태에 태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태화에서 감히 폐하의 용모와 비교되는 이였다. 비단, 외모뿐만 아니라 군자 같은 인격까지 더해져 칭송하는 이가 많았으니, 과연 그러할 만하다고 태감이 생각하였다.
“내 나이쯤 되면 말일세.”
하지만 오늘 자리는 그의 뛰어난 됨됨이를 칭찬하고자 부른 자리가 아니었다. 본론을 꺼내기 전, 태감이 잠시 뜸을 들였다. 노군의 손이 따뜻한 찻잔을 감싸고,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그의 얼굴을 덮는다. 호로록, 차를 들이마시는 소리가 고용한 방 안에 울려 퍼진다. 경박하지 않은, 정제된 그런 소리다.
“간혹,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네.”
“그렇습니까.”
“늙은이의 눈이란 보이지 않는 것조차 읽어 낼 수 있는 법이거든.”
“…….”
“특히나,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에 관해선 참으로 예리한 편이라네.”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태주는 태감이 저를 부른 이유를 언뜻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저와 귀비마마를 두고 하는 말일 터였다. 요즘 들어 귀비마마와의 자리에 자주 드나들었으니, 그도 느끼는 것이 있어서 부른 것이리라.
“어르신께선.”
이제까지와는 꽤 다른, 다소 낮은 목소리가 태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까닭이 따로 있으신지요.”
힐끔, 눈꺼풀이 푹 꺼진 눈을 가늘게 뜨고 태감이 태주를 직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반듯하게 맞닿고, 꾸욱 다문 입에 침묵이 잠시 맴돌았다. 따뜻한 찻잔이 뿜어내는 온기가 무색하리만큼 방 안의 공기가 차가웠다. 가을 초입이라는 계절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자네는 영리한 사람이니 잘 알고 있을 것이네.”
“무엇을 말씀입니까.”
“폐하께서 귀비마마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태주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비록, 폐하께서 표현하는 법이 서툴러 마마께 온전히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계시지만, 그분이 마마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니…….”
“어르신께선.”
윗사람의 말을 끊고 태주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 생각하십니까.”
하물며 윗사람의 말을 자르는 것도 예의에 어긋난 일이거늘, 그가 내뱉은 말은 더욱 무엄한 것이었다. 감히, 천자가 행하는 것을 두고 어찌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태감은 잠자코 가는 눈을 뜬 채로 태주를 바라보았다. 할 말 있으면 더 해 보라는 것이었다.
“감히 말씀드리옵건대, 미천한 저로서는 그것이 사람을 아끼는 방도라 생각되질 않사옵니다. 저는 늘 보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름을 짊어진 듯한 귀비마마의 눈빛을. 처음엔 그것의 연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저같이 미천한 이에게 궐 안의 일은 까마득히 먼 곳의 일이니까요.”
“…….”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귀비마마와 마주하는 횟수가 늘어 갈수록. 그 까닭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엔 늘 폐하가 계셨습니다. 그분의 시름을 만든 것이 폐하라는 것을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태주의 진심을 비웃듯 태감의 입가엔 비소가 걸쳐졌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 두고, 그가 짐짓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자네는 참으로 어리석네.”
“어르신.”
“나는 지금 자네에게 귀비마마의 일을 말하는 게 아닐세. 폐하의 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
태주의 미간이 좁아졌다.
“귀비마마께서 무엇을 어떻게 느끼든, 그것은 상관없네.”
“어르신!”
“중요한 건 폐하의 마음이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 말이 틀렸다는 겐가?”
“어르신.”
“나는 폐하의 사람일세. 더욱이 태화 황실의 충신이기도 하고.”
비릿한 웃음이 태주의 가슴을 갉아 먹으며 들어찼다.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태화는 폐하의 것이네. 즉, 태화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폐하를 위해 존재해야 함이야. 하물며, 그것이 고귀한 사람의 마음일지라도. 반드시, 폐하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네.”
태감이 다시금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가 여유롭게 차향까지 음미하며 한 모금 들이마셨다. 몸의 구석구석으로 퍼지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자네와 같이 젊고, 영특한 양인이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리라 믿네.”
“…….”
“자네를 아끼는 폐하의 마음을 배신하지 마시게나.”
탁, 소리 나게 찻잔을 내려 둔 태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태주를 지나쳐 그가 문가로 향하는데.
“태감 어르신.”
자리에 앉은 상태로 태주가 그를 불렀다. 발을 옮기다 말고 태감이 자리에 멈추어 섰다. 뒤를 향해 몸을 돌리려니, 그새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뚜벅, 뚜벅. 태주가 그의 앞에 섰다. 저보다 훨씬 키가 큰, 장신의 젊은 양인을 그가 올려다보았다.
“어르신의 말씀이 맞습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
“예. 분명, 태화는 황제 폐하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오나.”
“……?”
“그런 폐하조차도 태화에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있사옵니다.”
“……뭐라.”
“귀비마마의 마음.”
“……!”
“그분의 마음을 얻지 못하시지 않았습니까.”
태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네, 지금 그게 무슨!”
“아닙니까?”
“자네!”
“폐하께서 그분의 마음을 얻으셨다면, 오늘 이 자리에 제가 불려 올 일 또한 없었겠지요.”
태주가 똑바로 태감의 눈을 마주 보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태감의 눈동자를 보며, 전에 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태주가 말했다.
“폐하에 대한 어르신의 충심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폐하의 모든 것을 두둔하려 하신다면 진정한 충신이 아닐 테지요.”
“자네. 지금 나한테 충고하는 겐가?”
“아니요. 권유하고 있는 겁니다. 부디, 폐하께서 귀비마마의 마음을 얻고자 하신다면 그분께 하는 모든 행동을 그만두셔야 한다고, 그리 말씀드리길 청하고 있는 겁니다.”
“자네, 지금 지나치네.”
“그분이 당해 온 것에 비하면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분이 폐하께 어떠한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눈앞에서 본 저로서는.
“절대,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유롭던 기세는 오간 데 없이 젊은 양인의 기에 눌린 태감이 그저 말을 잇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어 대기만 했다.
“그럼, 어르신이 하실 말씀은 다 전해 들은 것 같으니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를 건넨 태주가 태감을 지나쳐 나서려는데.
“이미 폐하와 부부의 연을 맺으신 분이시네!”
뒤에서 태감이 소리쳤다.
“이미 폐하와 부부로서 연을 다하기로 맹세한 분이란 말이세!”
이에, 태주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뒤도 돌지 않은 상태로 그가 말했다.
“껍데기뿐인 맹세가 언제까지 두 사람을 묶어 둘 수 있을는지요.”
“무, 무어라!”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치는 태감을 두고 태주가 문을 나섰다. 발걸음을 옮기는 그는 어느덧 저도 모르게 빈주먹을 꽉 그러쥐고 있었다.
* * *
수현은 해가 중천에 걸치고 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지난밤, 황제의 포악한 행위를 직접 맨몸으로 받아 내야 했던 그는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아래가 완전히 갈린 것 같은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새벽녘, 급한 대로 태의를 불러 응급조치를 취했다. 밀부에 들어찬 물건을 귀비가 스스로 토해 내질 못해 태의의 손을 빌렸다. 차마 귀하신 분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어, 얇은 쇠막대기를 가져와 구멍 안에 든 조각상을 빼내어야 했다.
피와 애액으로 얼룩진 나무 조각이 항문에서 빠져나오는 대로 귀비는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기절한 귀비를 자리에 눕혀 두고 태의가 고군분투하였다.
채 닫히지 않고 벌건 속살을 훤히 내보이는 구멍을 얇은 천으로 가리어 둔 채 지혈하고 막대로 연고를 발랐다. 어찌나 거칠게 다뤘는지, 까무룩 기절한 채로도 귀비는 끙끙 앓았다. 이걸 참고 견뎌 내며 얼마나 괴로웠을까. 태의의 옆에서 지켜보던 장 상궁이 계속 가슴을 쳐 댔다. 정말인지 참혹한 광경이었다.
“마마, 몸은 좀 어떠하시나이까.”
수현의 얼굴을 뒤덮은 식은땀을 닦으며 장 상궁이 걱정스레 물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 색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팠다. 짐승이라도 이리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하물며 사람인데, 그것도 어디 떠돌다 만난 하룻밤 인연도 아니고 부부의 연을 맺은 귀비건만, 어찌 이리도 포악하게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분으로 미어터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다, 결국 장 상궁이 눈물을 흘렸다. 이대로는 너무하다 싶어 저라도 마마를 붙들고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심정인데, 오히려 당사자인 수현은 초연하기만 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무색하리만큼, 그는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마마.”
눈물 섞인 목소리로 통탄하여 말한다.
“소인이 잘못했나이다. 소인이…… 잘못 생각하였나이다. 소인은 폐하께서 마마를 행복하게 해 주실 거라 생각하였나이다. 분명, 마마를 바라보는 폐하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폐하께선 마마를 어여삐 여기시어 아껴 줄 것이라 그리 생각하였나이다.”
슬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고개가 떨구어진다. 소인이 어리석었나이다. 소인이 어리석었나이다…… 도리질을 치며 계속해서 되뇐다.
“어디, 이것이 장 상궁의 잘못이겠습니까.”
무심한 목소리가 장 상궁의 귓가를 적신다. 퍼뜩 고갤 들어 그녀의 상전을 바라보니,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생기 없는 얼굴이 다시 한번 가슴을 후벼 판다.
“아흐윽. 마마.”
“왜 자꾸 우십니까.”
“마마…… 소인은, 소인은…….”
“내가 자처한 일입니다. 폐하의 손에 죽고자, 내가 벌인 일입니다.”
“마마!”
“이 몸이 죽어 없어지면 더는 폐하께서 성해 백성들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 치지 못하겠지요.”
“마마…….”
장 상궁의 눈물이 뚝, 멈췄다. 이제껏 그에게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도 두려워 그녀가 벌벌 떨며 수현을 쳐다보려니 밖에서 얇은 문을 두고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마마. 기태주가 마마를 뵙기를 청하옵니다.”
장 상궁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 마마께서 따로 기별을 준다 하였다. 아직 언제 찾아오라 전한 것이 없는데 기태주 그가 먼저 찾아온 것이다.
사실, 그가 먼저 찾아온다 한들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마마가 지금 그와 만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었다. 그가 마마께 드린 선물로 인해 그 사달이 났으므로.
두 사람이 만났다는 것이 폐하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이는 반드시 큰 화가 되어 마마께 되돌아올 터였다.
“마마, 오늘은 안 됩니다. 물러가라 이르시지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장 상궁이 아뢰었다. 진심으로 수현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인데, 어쩐지 수현의 얼굴엔 동요하는 기색이 없다.
“마마.”
아무 말 없이 수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닦아 내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방 안을 가른다. 경대 앞에 선 그가 두 팔을 벌린다. 겨우 땅을 딛고 서 있는 고목(枯木) 같은 몰골을 하고, 그가 조용히 말한다.
“옷을 주세요.”
“마마!”
장 상궁이 놀라 그를 만류한다.
“아니 되옵니다. 어제 그리 당하시고선, 어찌 기태주를 만나겠다 이르시나이까.”
“나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옷을 주세요.”
“마마.”
“내가 필요해 부른 사람입니다. 애써 나를 위해 찾아온 사람을 내칠 수는 없습니다.”
“하오나. 다른 날 만나셔도 되지 않습니까. 마마께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찾아온 이를 무른다고 하신들, 문제 될 것이 없사옵니다.”
설득하려 해도 듣지 않는 상전에 장 상궁은 속이 타들어 갔다.
“마마.”
“어서요.”
끝내, 수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옷을 달라고 하는데, 장 상궁은 내키지가 않아 한참이나 망설였다. 앞으로 마마가 어떤 화를 당하게 될지 불 보듯 뻔한데, 제 손으로 옷을 내어 드릴 순 없었다.
“옷을 내주시게.”
장 상궁을 대신해 수현이 아랫것에 일렀다. 장 상궁의 눈치를 보다 나인들이 수현의 겉옷을 챙겨 왔다. 침의 위로 붉은색의 옷을 걸치고 그네들이 수현을 단장하였다. 단지 머리만 살짝 묶었을 뿐이었는데도, 고운 기색이 확 살아났다.
“공자님께 들어오라 이르시게.”
수현이 방 안에 마련된 탁자에 가 앉자, 한 나인이 문으로 다가갔다. 얇은 문에 대고 상전의 뜻을 전하니, 그새 창호지를 바른 나무 문이 열렸다.
성큼성큼. 건장한 풍채를 지닌 양인이 방 안에 들어섰다. 금빛 술이 달린 검은색 양복을 갖춰 입고, 그가 귀비의 앞에 섰다. 몽환화에 중독된 귀비가 처음 눈을 떠 맞이했을 때처럼, 그가 수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한쪽 팔을 접고 들어 올린 채로 그가 고개를 숙였다.
“마마를 뵈옵니다.”
귀공자의 절도 있는 인사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궁녀들의 얼굴이 덩달아 새빨개졌다. 수려한 얼굴만 봐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오는데, 저리 근사하게 인사를 하니 어찌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서 오세요.”
그런 그들과 달리 수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정작 태주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수현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그저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뿐이었다.
“소인이 궐에 들를 일이 있어 이리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거기 앉으세요.”
수현이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태주는 그가 시키는 대로 수현을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았다.
나인들이 다과를 준비하여 내오는 동안 수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빗겨 나간 시선으로 먼 곳을 주시하고 있으려니, 태주만 홀로 수현을 바라보아야 했다. 언제 보아도 슬퍼 보이는 눈빛. 수현의 눈가에 드리워진 아픔이 태주의 심장을 긁어 대는 것만 같았다.
‘한 번쯤 웃으시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이윽고 빈 탁자 위를 차와 과일이 채웠다. 나인이 채운 찻잔을 수현이 먼저 들어 올리니, 태주는 그걸 빤히 쳐다보며 제 잔을 잡지는 않았다.
따뜻한 차 한 모금으로 입을 적신 수현이 고갤 들어 올렸다. 빤히 응시하는 감은빛 눈동자가 태주의 가슴을 비집고 들어온다. 새하얀 눈밭에 떨궈진 한 떨기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살포시 움직인다. 화려하지만, 절대 천박하지 않은 자정향이 코끝을 건드린다.
“그래. 나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요.”
태화의 남방, 옛 성해의 터에 사는 백성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비록, 지금은 태화라는 이름 아래 사는 이들이었지만, 분명 그들의 삶은 성해의 백성이었을 때와 비단 다르지 않을 것이었기에.
“무엇을 먼저 말씀드려야 할까요.”
말문을 열며 태주가 의자에 기대었다. 가뜩이나 넓은 어깨가 쫙 펴지니 마치 끝없이 펼쳐진 대지와도 같았다. 그 늠름한 자태로 태주가 계속 말을 이었다. 듣기 좋은 양인의 목소리가 방 안을 뒤덮었다.
“아, 그것이 좋겠네요. 제가 여름날 밤, 강가에서 보았던 것이요.”
“여름밤. 강가…… 그곳에서 공자님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등불을 보았습니다.”
“등불이요?”
“예. 태화 남방에서는 여름밤이 되면 꽃등 놀이를 즐긴다 합니다.”
“꽃등…… 놀이…….”
“예. 참깨, 달걀껍데기, 볏짚, 조수화수(鳥獸樹花), 경극 배우들의 얼굴 같은 것들을 본떠 만든 등을 밤에 강가에 띄워 구경하는 것이지요.”
그의 말에 수현은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칠흑같이 어둡게 물든 강 위로 수백 개의 등불이 떠올라 있었다. 넘실거리는 물은 불빛이 반사되어 별빛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였고, 하늘과 맞닿은 곳으로 떠오르는 등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아, 그걸 보고 있는 어린 수현의 마음을 마구 설레게 했다.
“어딜 보아도 별천지라 참으로 어여뻤습니다. 남방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장면이었지요.”
어미의 손을 꼭 잡고 어린 수현은 자꾸만 멀어져 가는 등불들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등불처럼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추억이었지만. 어쩐지 그날의 장면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작은 손을 꼬옥 붙잡고 있던 어미의 따뜻한 온기도.
“정말 아름…… 다웠겠군요.”
“예. 그러하였습니다.”
새하얗던 수현의 얼굴에 살며시 핏기가 돌았다. 두근, 두근. 기분 좋은 심장의 울림에 수현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슬며시 웃음이 피어나는 입가를 차로 적시며 숨을 돌리는데, 이어 양인이 말했다.
“남방의 여름은 특히나 더워 밤이 되면 저잣거리로 아이며, 어른이며 할 것 없이 많이들 몰려 나왔지요. 특히나 보름이 되면 하늘에 뜬 보름달을 뜨기 위해 수많은 이가 밖을 찾았습니다.”
“달이요?”
“예.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는데, 손바닥을 쫙 펴도 다 가리지 못할 만큼 커다란 달이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유난히 밝은 달빛에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좋아했고, 어른들은 소중한 이의 손을 잡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말에 수현은 어쩐지 가슴 한쪽 편이 저릿한 느낌이었다. 비록, 저는 가족을 잃고 태화의 궁에 들어와 모진 삶을 살고 있었으나, 저의 옛 백성만큼은 아닌듯했다. 그것이 몹시 기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이제 성해를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저뿐인가 싶어서.
“남방의 아이들은 참으로 짓궂고 활달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낯선 이가 와도 경계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을 붙이고 웃어 주었지요. 하물며 불한당 같은 저의 모습을 보고도 그리하였으니, 더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불한당이라 칭하는 그를 보며 수현이 살포시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공자님은 스스로를 불한당이라 칭하십니까.”
“왜 아니 그러겠습니까. 이리 짧은 머릴 하고 요상한 복장을 하고 있으니 아이들의 눈엔 그리 보이지 않겠습니까.”
“아닙니다. 공자님께선 누구보다 따뜻한 눈을 가지고 계시니, 필시 아이들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을 것입니다.”
“정녕 그리 생각하시옵니까.”
“예. 그렇습니다.”
조금 달라진 수현의 모습. 생기가 도는 볼과 웃음이 묻어나는 입, 그에 태주도 덩달아 웃게 되었다.
“참.”
무엇인가 생각난 듯, 태주가 들고 온 것을 탁자 위로 올렸다. 지난번처럼 작은 상자 속에 모습을 감춘 물건을 보며, 수현이 두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떴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남방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입니다.”
“장난감이요?”
입술까지 뾰족이 내밀며 물어 오는 수현이 태주는 귀엽게 느껴졌다. 얼음장 같았던 지금까지의 모습과 대조되는 그 모습에 설레는 것도 잠시, 기다리고 있는 이를 위하여 태주가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것은…….”
“예.”
“투예(兔爺)가 아닙니까?”
“마마께선 투예를 알고 계시옵니까?”
“알다마다요. 어렸을 때, 나도 가지고 논 기억이 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 만든 작은 토끼 인형이었다. 커다란 귀를 바짝 올리고 입을 한껏 끌어올려 방끗 웃고 있는 이 토끼 할아버지는, 사람처럼 전통 의상을 입고 당당하게 두 발로 서 있었다.
“이것을 아직도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지 몰랐습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한껏 들뜬 수현에게로 태주가 장난감을 내밀었다. 망설임 없이 섬섬옥수가 작은 진흙 인형을 받아 든다. 함부로 하면 혹여 깨지기라도 할까, 장난감을 어루만지는 수현의 손이 조심스럽다.
“마음에 드시옵니까.”
“들다마다요!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것과 똑같습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난감에 수현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양인의 눈빛을 눈치챌 겨를도 없었다. 그저 손에 든 것을 가지고 기뻐하며 만져 대는데, 그것이 태주의 심장 박동을 더욱 빨라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기뻐하셔서 다행입니다.”
마음을 적셔 오는 근사한 목소리.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르게 느껴지는 진지한 목소리에 수현이 고갤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수현의 두 눈동자를 꿰뚫듯 직시하는 양인의 눈이 보였다. 조금도 흔들림 없이 빤히 바라보는 태주에 수현은 어쩐지 뒷덜미가 홧홧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괜히 어색해지는 느낌에 수현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어찌 저리도 빤히 쳐다보는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러워하려니, 다시금 양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마마.”
“……?”
“송구스럽사옵니다만. 전에 드린 것은 어째서…….”
그제야 수현은 태주가 저의 침상 머리맡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수현이 얼굴을 붉혔다. 어찌 말해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이제껏 잠자코 듣고만 있던 장 상궁이 끼어들었다.
“마마께선 그것을 아끼시어 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나이다.”
“하나.”
“공자님의 성의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마의 마음이니 공자님께선 이를 헤아려 주시지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태주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머리맡에 두어야 쓸모 있는 물건인데, 치워둔 것은 어떠한 이유가 있을 터. 그것이 마마를 곤란해하는 것이라면 더는 묻지 말아야지 싶었던 것이다.
“마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나이다.”
은근히 태주를 경계하며 장 상궁이 말하였다. 어젯밤 일로 태주가 영화궁에 있는 게 꺼림칙했던 그녀였다. 그런 장 상궁의 말에 수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간만에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는데, 그걸 뺏기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던 탓이었다.
“소인에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태주가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따라 수현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현은 다소 아쉬웠으나, 떠나는 이를 붙잡진 않았다. 그에게도 다른 용무가 있을지 모르는 것이니.
하지만.
“다음에.”
이대로는 보낼 수 없어, 망설이듯 붉은 입술이 살포시 움직인다.
“다음에도 공자님께선 영화궁에 들르시렵니까.”
수현의 말에 태주는 활짝 웃어 보였다.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가 답하였다.
“마마만 괜찮으시다면, 언제든지.”
마지막 말을 끝으로 태주가 귀비를 향해 인사했다. 돌아서서 방을 빠져나가는 그를 바라보다 수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시선에 토끼 인형이 들어왔다. 그 작은 장난감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수현의 입가엔 은은한 웃음이 떠올랐다.
* * *
그날 이후로도 태주는 줄곧 영화궁에 드나들었다. 태주의 방문이 잦아들수록 장 상궁의 불안감은 쌓여만 갔다.
이쯤 되면 건청궁 나인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분명, 폐하께서도 두 사람이 만난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이상하리만큼 잠잠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마치 태풍 전야처럼, 지금의 고요함이 곧 불어닥칠 불행을 암시하는 것만 같아서.
“마마. 오늘도 기태주를 만나시렵니까.”
약속한 시각을 앞두고 경대 앞에 앉은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이 근심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인은 너무도 두렵습니다. 마마께서 계속해서 공자님을 만나시다 화라도 입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너무도 두렵사옵니다.”
그녀의 말에 수현은 아무 대답 없이 입 모양만으로 방긋 웃었다.
“마마. 그러지 말고 며칠이라도 몸을 사리시는 것이…….”
“오늘은 화원을 좀 걸을까 합니다.”
“마마.”
“날이 점점 더 추워지니 조금이라도 볕이 따뜻할 때 걷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 될 말이었다. 영화궁 내부에서 만나는 것도 손이 벌벌 떨릴 만큼 두려운데, 하물며 화원을 그와 함께 거니시겠다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장 상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현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단장을 끝낸 수현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마침 문밖에서 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기태주가 당도하였나이다.”
수현이 그대로 자리에서 발걸음을 떼어 냈다. 얇은 문을 앞에 두고 자리에 멈추니 벌써부터 양인의 체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알싸한 박하 향이었다.
“마마를 뵈옵니다.”
문이 열리자 단박에 드러나는 우아한 자태에 태주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런 태주에게로 수현이 다가섰다. 언제부턴가 웃음이 자연스럽게 걸리게 된 얼굴로 그가 태주에게 말을 붙였다.
“참으로 따뜻한 볕이 아니옵니까.”
“그렇사옵니다.”
“잠시 걸으시죠.”
“그리하시겠습니까.”
수현과 태주가 나란히 앞서고 그 뒤를 영화궁의 나인들이 뒤따랐다. 긴 무리를 이끌고 수현은 영화궁의 화원으로 향했다. 가을의 풍성함으로 뒤덮인 화원은 온통 알록달록 고운 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붉고 노란 단풍이 진 나무들을 지나치며 두 사람은 조용히 담소를 나누었다.
“참으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끼십니까.”
“공자님과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 바로 엊그제인 것만 같은데. 어느새 가을이 저물어 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부쩍 말수가 많아진 수현을 느끼며 태주는 말없이 웃어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 슬픔을 감추고 있던 그 눈빛은 요새 들어 밝은 빛을 보일 때가 많았다. 애초에 이런 모습을 보고자 시작한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웃음을 찾은 마마를 보며 태주는 마음속에 은근히 기쁨이 차올랐다.
“소인은 마마와 이리 걷고 있는 게, 마치 꿈만 같사옵니다.”
그래서였을까? 이제껏 줄곧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 왔던 태주는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꺼내고야 말았다. 그의 말에 수현은 처음에 다소 놀란 듯했으나, 이내 웃어 보였다. 그저 인사치레라고 치부한 탓이었다.
“공자님께선 이리 다정하시니 따르는 음인들이 많겠습니다. 혹, 공자님께선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이라도 있으신지요.”
수현은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말이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양인의 마음이 어떤지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그는 그저 해맑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소인이 미천해 아직 마음을 나눈 정인은 없습니다.”
“어찌 그렇습니까. 혹, 공자님의 성에 차는 음인을 못 만나신 겐지요.”
“글쎄요…….”
태주는 말꼬리를 흐리며 길게 여운을 담아 대답했다. 언제나 늘 햇살 같은 웃음으로 상대방을 따뜻하게 만들었던 태주의 얼굴에 어쩐지 그늘이 드리워졌다.
마치, 수현의 슬픔이 그에게 옮겨 가기라도 한 듯, 수현의 웃는 날이 늘수록, 그의 곁에 함께하면 할수록, 태주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횟수도 늘어가고 있었다.
“이럴 땐 천애 고아라 참으로 구슬픕니다. 사가라도 있다면 참한 음인을 물색해 달라 부탁하여 공자님과 연결해 드릴 텐데요.”
악의 없는 얘기에 결국 태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난데없이 그가 왜 웃는지를 몰라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려니 태주가 몸을 돌려 마주 섰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잠시 멎고, 붉은색 낙엽을 떨구는 나무 아래 멈추어 섰다.
“마마께선. 누군가를 진심으로 연모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바람을 타고 낙엽이 마치 꽃잎처럼 흩날렸다. 붉은 꽃보라에 파묻힌 하얀색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하나, 하나에서 꽃향기가 은은하게 배어났다.
“연모…… 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리 말했습니다.”
수현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사실 그에게는 너무도 먼 단어였다. 어려서는 궁에 들어오겠다는 일념 하나로. 궁에 들어와서는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리고 그 복수마저 실패했을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연모라는 그 하찮은 감정 따위, 그는 생각할 수도,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훌륭한 이가 곧게 바라보며 연모를 들먹이니 기분이 썩 이상해져 버렸다. 괜히 가슴이 뛰는 것도 같고, 볼에 열이 오르는 것도 같았다.
“그런 감정은…… 나에게 사치일 뿐입니다.”
붉어진 볼을 들킬세라 시선을 아래로 떨군 수현이 답했다. 소년과도 같은 그 모습에 태주는 가슴을 할퀸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손을 내밀어 여린 어깨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얀 이마에 입 맞추며 아프지 말라고, 당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그렇게 속삭여 주고 싶었다.
이 모든 게 부질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절대로 이뤄질 수 없는 상상일 뿐이었지만.
“공자님……?”
어쩐지 말이 없는 태주를 보며 수현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수현이 저를 부르는 것도 모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태주가 뒤늦게 정신 차렸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이는 태주를 보며 수현도 얼굴에서 의아함을 지워냈다.
“마마께선 어째서 그것이 사치라고 생각하십니까.”
발걸음을 옮기는 수현을 따라 걸으며 태주가 조용하게 물었다. 이에 수현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답하였다.
“공자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태화의 황제가 나와 내 나라에 무슨 짓을 했는지요.”
태주가 명휘의 절친한 친구임을 알면서도 수현은 거리낌 없이 말을 이었다.
“나는 태화의 황제를 죽이기 위해 궐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저의 운명이자 살아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지요. 그마저도 뜻대로 하지 못하고 이리 후궁이 되어 눌러앉게 되었지만.”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수현을 보며 태주의 얼굴을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난 죽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이미 죽어 버린 몸입니다. 나에게 삶은 그저 옛 성해 백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입니다. 적어도 나로 인해 그들이 개죽음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요.”
순간, 태주의 머릿속에 그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이제껏 태주가 풀지 못한 어떠한 숙제의 실마리이자 중요한 단초였다.
그는 왜 마마께서 이리도 힘들어하면서 후궁으로 머물고 있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막연하게나마 성해 와 관련된 일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수현의 말을 들은 이 순간, 그는 명확하게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마마가 후궁으로 머무는 이유가 바로.
“옛 성해의…… 백성 때문에 후궁이 되셨습니까.”
옛 성해의 백성 때문임을.
“공자님.”
“정말 그뿐입니까. 그것 때문에 이 태화의 황궁에 남으신 겁니까.”
“…….”
“폐하께서 그리하라 겁박하셨습니까. 옛 성해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폐하의 후궁이 되라고요.”
지금까지 제 속 얘길 잘도 꺼내었던 수현이었건만, 이번만은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태도를 바꿔 자리에서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공자님께 괜한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딱 잘라 말하고 더는 언급하지 않으려는데, 뒤에서 태주가 바짝 따라붙었다. 평소답지 않은 태도로 그가 수현을 다그쳤다.
“마마, 소인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정말 폐하께서 그리하셨습니까.”
“공자님께서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아니요. 소인은 알아야겠습니다.”
“공자님.”
“소인이 마마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소인에게 말씀하여 주십시오.”
수현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저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속으로 되뇌는데, 마치 그런 그에게 확실히 인지시키려는 듯, 태주가 힘주어 얘기했다.
“마마가 옛 성해의 백성을 태화로부터 지키고자 하신다면, 소인이 마마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그런.”
“옛 성해의 백성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면.”
“……공자님.”
“믿으시겠습니까?”
일순, 수현의 얼굴이 더없이 일그러졌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지는데, 어찌한 일인지 배 속이 갑자기 뒤틀리며 격한 통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지금…… 공자님…… 말씀이…….”
띄엄, 띄엄. 힘겹게 말을 내뱉는 수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갑자기 열이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마. 갑자기 무슨…….”
급변한 수현의 얼굴을 보며 태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더욱 가까이 다가가 지켜보려는데, 별안간 확 풍겨 오는 진한 자정향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진해진 자정향만큼이나 수현의 낯이 묘하게 색정적인 모양새로 변해 가고 있었다. 일그러뜨린 얼굴은 뜨거운 열이 올라 두 볼이 붉게 변해 있었고, 빨갛게 달아오른 입술은 살짝 벌어져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재빠르게 차오르는 성욕을 이기지 못하고 수현이 몸을 움츠렸다. 저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가랑이 사이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잠자코 숨죽여 있던 살덩이가 조금씩 고갤 치켜들며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마마!”
조금 차이를 두고 뒤따라오던 장 상궁이 마마를 외치며 그들의 곁으로 달려온 건, 쓰러지는 수현의 몸을 태주가 부축했을 때였다. 땀으로 축축해진 몸이 양인의 곁에 닿자마자 더 급격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신음까지 흘려 대며 수현이 몸을 들썩였다. 향기를 머금은 몸이 비벼 댈 때마다 태주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공자님. 이건…….”
“예. 희락기가 맞는 듯합니다.”
수현이 궁에 들어와 두 번째 겪는 희락기였다. 그때만큼이나 경황이 없어 장 상궁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태주가 수현을 부축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태의를 불러 주십시오. 마마를 영화궁으로 모실 것입니다.”
“예? 아, 예.”
장 상궁이 곁에 있던 나인을 한 명 불렀다. 어서 태의를 모셔 오라는 명을 받고 나인이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마, 조금만 참으십시오. 곧 태의가 올 것입니다.”
그렇게 수현을 부축한 채로 태주가 영화궁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을 따라 진한 자정향이 흩뿌려졌다.
영화궁에 도착하는 대로 태주는 수현을 침상에 눕혔다. 그새 상태가 더 심각해진 수현은 이제 몸을 뒤틀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영화궁의 나인들이 급히 물에 젖은 무명천을 준비해 와 수현의 얼굴 위에 가득 덮은 땀을 닦아 냈다. 열이 오른 볼은 불그스름하게 변해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선 신음을 섞은 거친 숨소리가 계속 터져 나오고, 뒤틀어 대는 몸은 은근히 색정적인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공자님께서는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수현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곁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태주에게 장 상궁이 말했다. 태주는 그녀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발걸음이 쉬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수현이 겪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기에.
“공자님.”
어쩐지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태주를 장 상궁이 다시 한번 힘주어 불렀다. 한시라도 더 지체하였다간 건청궁에서 사람이 올 터였다. 후궁이 희락기에 들었다는 것만큼 빠르게 궐 안에 퍼지는 소문 또한 없을 터이니.
“공자…….”
“알겠습니다.”
“송구합니다.”
마음이 내키진 않았으나 방법이 없었다. 저 때문에 마마가 곤경에 처하는 것은 원치 않았기에.
몸을 돌려 발걸음을 내딛는 그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이대로 눈앞에 수현의 모습이 밟혀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으읏!”
그런 태주의 마음을 들쑤시며 수현의 긴 비명이 영화궁을 울렸다. 어렵게 발걸음을 옮기던 태주가 멈칫했다.
“아으응, 으응. 하아응……!”
그 절박한 목소리와 함께 영화궁 내부를 가득 채운 자정향이 양인의 가슴을 마구 흔들었다. 아까부터 줄곧 아래로 몰려드는 피에 가랑이 사이에 자리한 살덩이가 조금씩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 음인만큼이나 향에 약한 양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본능이 그의 마음을 자꾸만 괴롭히고 있었다.
“으응, 아! 으응, 응……! 하아, 하.”
태주가 빈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감히 돌아가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는 제 처지를 탓하며 어금니를 힘주어 깨물었다. 그러쥔 주먹에 핏줄이 솟고, 힘주어 깨문 터에 턱 근육이 솟았다. 제 목숨이 어찌 되는 것은 상관없었다. 저가 죽을 일이라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마마를 안아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의 죽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 없었기에…….
“마마! 태의가 도착했나이다!”
때마침 밖에서 요란한 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멈춰 선 태주를 지나쳐 태의와 나인들이 영화궁의 침전에 들어섰다. 급박한 상황에 태의는 태주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수현의 침상으로 향했다.
“언제부터 마마께서 이리되셨습니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며 태주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주먹을 풀고 그가 다시금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그가 영화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수현이 희락기를 맞았다는 소식은 빠르게 건청궁에도 전해졌다. 태감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명휘는 어쩐지 가만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평소 성정대로라면 진즉 달려가고도 남았을 그였을 텐데, 이례적인 일이었다.
“폐하, 어찌하겠사옵니까. 영화궁에 들지 않으시렵니까.”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던 명휘가 나인을 향해 손짓했다. 상전의 부름에 나인이 연죽을 챙겨 왔다.
긴 설대를 들고 물부리를 입에 물자, 나인들이 담배통에 담뱃잎을 채워 넣었다. 불꽃을 피워 담배통에 가져간 나인이 입김을 불어 불을 꺼뜨렸다. 이윽고 연죽의 끝에서부터 회색 연기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기태주는.”
눈을 내리깔고 느릿하게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뿜으며 황제가 물었다.
“오늘도 영화궁에 들었다 하더냐.”
상전의 물음에 태감이 잔뜩 고갤 조아렸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명휘는 태주가 요즘 들어 영화궁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처음 소식을 접한 황제가 길길이 날뛰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황제는 곧 이성을 되찾은 듯 보였다. 그날 이후로도 황제는 보고를 받을 때마다 똑같은 태도를 보였다. 마치,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겠다는 듯이.
그래서였을까? 수현이 희락기를 맞이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명휘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그는 여전히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고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길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덧 건청궁의 침전에 뿌연 연기가 가득 흩뿌려졌다.
“폐하.”
생각의 뭍에 잠긴 명휘의 귀엔 태감이 부르는 소리 따위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그저 어찌해야 저를 실망하게 한 귀비를 벌할 수 있을까, 그 생각밖에 없었기에. 그러다 불현듯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있었다.
“혹, 희락기를 맞은 음인이 가장 힘들어할 만한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양인의 정을 얻지 못하였을 때가 아니겠사옵니까.”
태감의 답에 명휘의 입꼬리가 추어올라 갔다. 과연, 그러하겠지. 혼잣말처럼 내뱉은 그가 물고 있던 연죽을 내려 두었다.
“오늘 밤 영화궁에 들를 것이다.”
“그리하시겠습니까.”
“그리고.”
한껏 비소를 띄운 얼굴로 그가 앉은 자리에서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상전의 표정에 태감은 오금이 저리는 것만 같았다.
“그 전에 나인을 보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이르거라.”
명휘가 목소리를 낮춰 태감에게 지시하였다.
그의 얘길 다 들은 태감은 언뜻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듯하였으나 그걸 내색할 순 없었다. 그저 고갤 조아리며 그리하겠습니다, 대꾸해야 했을 뿐이었다.
* * *
그날 밤 늦은 시각, 수현은 여전히 사경을 헤매며 침상 위에 누워 몸을 뒤틀고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이 섞인 신음을 쏟아 내는 그를 보며 태의와 장 상궁의 속은 한없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무릇 희락기를 겪는 음인은 양인에게 평소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을 안겨 준다 알려져 있다. 그런 만큼 희락기의 음인을 마다하는 양인은 없었다. 일반 양인들도 그러할진대 극양인인 황제에겐 얼마나 큰 쾌락일지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명휘는 그리하지 않았다. 수현이 궁에 들어온 이후로는 다른 후궁의 처소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무정한 황제에게 버림받은 후궁들은 여태껏 탕약으로 희락기를 버텨야 했다. 다행히도 귀한 약재로 달인 탕약을 마시면 희락기의 고통이 다소 가라앉았다. 완전히 평소와 같은 건 아니어도 적어도 버틸 만은 했던 것이다.
한데 수현은 탕약이 몸에 받질 않는 듯했다. 이제 슬슬 희락기의 기운이 가라앉을 만도 하건만 수현의 상태는 더 심각해지기만 했다. 이런 적이 없었기에 태의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문헌에 이런 경우가 간혹 있다고는 적혀 있었으나 실제로는 본 적 없었기에.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입니까. 마마께서 왜 차도가 없으신 겁니까.”
장 상궁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묻자 태감은 얼굴을 한껏 굳힌 채 입을 열었다.
“그것이. 아마도 폐하의 영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폐하의…… 영향 때문이라니요.”
“폐하께선 워낙 강한 체향을 갖고 계신 데다가. 마마께서 폐하와 너무도 자주 관계하셔서 이미 그 체향에 길이 드신 게지요.”
“그렇다면…….”
“예. 지금 상황으로선 탕약도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오로지 폐하의 체향만이 마마의 희락기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의의 말에 장 상궁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며칠 전이었다면 이야기에 걱정을 품진 않았을 것이다. 폐하의 승은만이 마마의 희락기 고통을 멈출 수 있다는데 그것이 어찌 근심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복잡했다. 마마가 폐하와 관계하며 얼마나 고통받는지를 알고 있던 터였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희락기의 고통보다야 덜할 터이니, 그러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런 폐하가 어쩐 일인지 밤늦은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영화궁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멀다고 찾아오셨는데.
혹시 기태주 때문인가. 그가 영화궁을 자주 드나든다는 것을 알고 노하신 것일까. 대체 폐하께선 무슨 속셈인 걸까. 어째서, 어째서 희락기까지 맞이한 마마를 이리도 등한시한단 말인가.
장 상궁이 그렇게 근심에 쌓여 그 어떤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던 그때.
“마마. 건청궁에서 사람이 도착했나이다.”
문밖에서 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폐하가 찾으셨나 싶어 장 상궁이 서둘러 답하였다.
“들라 일러라.”
이윽고 문이 열리고 환관 세 사람이 방 안에 들어섰다.
“폐하께서 보내셨습니까.”
장 상궁이 예를 갖춰 물으니, 딱딱한 목소리로 환관 한 명이 답하였다.
“폐하께선 잠시 후 영화궁에 들르실 것입니다.”
그제야 굳어 있던 장 상궁의 얼굴이 조금 풀리었다. 이제 되었다. 폐하께서 찾으시려는 모양이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안에서 맴돌았다.
“한데.”
환관의 이어지는 말에 다소 느슨해졌던 장 상궁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니, 상궁께선 협조해 주시지요.”
말을 끝낸 환관이 제 뒤의 환관들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명령을 받은 두 명의 환관이 성큼성큼 귀비의 침상으로 향했다.
잔뜩 당황한 나인들이 자리에서 비키지 못하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굴러 대는데, 여태껏 장 상궁과 대화를 나누던 환관이 꽤 엄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허. 폐하의 명이라 하였다.”
나인들이 울먹이며 자리에서 비켜섰다. 수현의 곁을 지키고 있던 태의가 당혹스러워하며 두 명의 환관을 올려다보자, 그들이 명령하듯 태의에게 말했다.
“태의께선 이만 물러가시지요.”
“하, 하오나…….”
“폐하의 명이라 하였습니다.”
저리 상태가 좋지 않은 마마를 두고 돌아설 순 없었으나, 그는 힘없는 태의일 뿐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진찰 도구들을 챙긴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태의를 환관들이 거칠게 밀었다. 그들에게 떠밀리듯 침상에서 벗어나게 된 태의는 침전을 떠나는 마지막까지 뒤돌아 귀비의 상태를 살폈다.
“마마를 뫼셔라.”
태의가 방을 떠나는 즉시, 환관들이 침상에 누워 있던 수현을 끌어냈다. 영화궁의 나인들이 비명 지르는 소리가 사방을 울리는데, 환관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귀비를 침상에서 끌어내려 의자 위에 앉혔다.
그리고 그들은 준비해 온 끈으로 의자에 앉은 귀비를 묶기 시작했다. 하얀색 얇은 침의만 입은 채로 수현의 몸이 의자에 포박당하였다. 마치, 죄인처럼. 처절한 형벌을 기다리는, 아무 희망도 없는 죄인처럼 그렇게 수현은 의자에 꽁꽁 묶이었다.
“이, 이게 무슨…….”
넋이 나간 채로 장 상궁이 말하였다.
“폐하의 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폐하의 명일 수 있겠습니까…… 마마께선…… 마마께선 지금 희락기를 겪고 계십니다. 침상에 누워 계시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어찌 이리하십니까…….”
장 상궁의 말을 대변하듯 수현의 격한 비명이 방 안을 가로질렀다.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수현을 두고 포박을 끝낸 환관들이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럼.”
용무를 끝낸 환관들이 짧은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렇게 그들이 방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인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침전을 가득 메웠다. 수현은 여전히 의자에 묶인 채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고, 그걸 지켜보는 장 상궁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영화궁의 침전은 아수라장이 되어 누구 하나 제정신일 수 없는데, 그런 그들에게 다시금 청천 날벼락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장 상궁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몸을 곧추세웠다. 폐하의 방문에 방 안을 지키고 있던 나인들이 열을 지어 문 앞에 섰다. 귀하신 분의 등장에 그들이 울음을 뚝 멈추었다. 눈물로 젖은 얼굴을 애써 감추며 그들이 고갤 숙이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다 같이 한목소리를 내어 예를 갖추는데 그걸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명휘가 수현에게로 향했다. 제가 분부한 대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명휘가 아무렇지 않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만 다들 나가 보라는 것이었다.
어느 안전이라고 그 명을 무시할 수 있겠냐마는,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은 장 상궁은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런 장 상궁을 끌며 나인들이 밖으로 향했다. 그 언젠가, 귀비마마를 대신 해 죽겠다고 나선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사달이라도 날까 두려웠던 터였다.
그렇게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빠져나가고 오직 명휘와 수현 둘만이 남게 되었다. 명휘는 자리에 선 채로 가만히 수현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침의는 온통 땀에 절어 살갗에 진득하게 붙어 있었고, 꽉 조여 맨 끈을 따라 살집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팔뚝에도, 허벅지에도, 발목에도 끈이 단단하게 메 있었다. 조금도 몸을 뒤척일 수 없도록 꽉 붙들어 맨 탓에 수현은 그저 몸을 움찔거리며 신음을 흘려 대고 있었다. 열락이 차오른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고, 성욕을 갈구하는 입술은 살짝 벌어져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명휘의 시선은 수현의 얼굴에서부터 아래로 차츰 이동하기 시작했다. 땀으로 젖은 긴 목을 지나 그 아래로 시선을 꽂으니, 가슴팍을 두고 위아래로 두른 끈에 젖가슴이 뭉뚝하게 뛰어나온 것이 보였다. 땀에 젖은 얄팍한 천이 온통 달라붙어 분홍빛 꼭지가 두드러졌다. 희락기라 그런지 오늘따라 돌기의 색이 더 짙게 변해 있었다.
군침이 도는 젖꼭지를 바라보다, 명휘가 더 아래로 시선을 가져갔다. 가슴살과 마찬가지로 묶은 끈을 따라 차오른 허벅지 살을 쳐다보다 가랑이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욕망에 몸집을 불린 살덩이를 따라 언덕을 이루며 솟아오른 바지 가운데가 유독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명휘가 기다란 상의의 끝을 걷어치웠다. 그러자 그 안에 감추어 있던 바지가 드러나며 곤두선 성기의 모습이 더욱 적나라하게 보였다. 얇은 천이 끈적하게 달라붙은 둥근 귀두가 유독 부어올라 커다랗게 보였다. 가운데가 갈라져 둥근 설을 그리며 솟아오른 귀두가 마치 잘 익은 자두처럼 보였다. 붉고 예쁘게 생겨 입에 물고 한입 깨물면 새콤하면서도 단맛이 날 것 같았다.
명휘는 검지를 내밀어 잔뜩 젖은 귀두의 끝을 톡톡 건드려 보았다. 침을 줄줄 흘려 대는 귀두가 얇은 천을 두고 건드리는 느낌에 고갯짓하며 껄떡거렸다. 당장 입안에 넣고 빨아 대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 내며 명휘가 손가락을 떼어 냈다.
그가 수현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졌다. 괴로워하며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가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데 그대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자꾸만 멀어지는 이성 속에서 황제의 목소리만은 또렷이 들려왔다. 비단 황제의 목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 정신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수현의 몸이 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제 주인을 알아보듯, 온몸의 신경이 꿈틀대었다. 피부 세포 하나하나가 성감대라도 된 듯했다.
“그간 영화궁에 기태주가 자주 드나들었었다지?”
태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정신없는 와중에도 수현이 몸을 움찔거렸다. 수현이 반응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태주가 한쪽 입꼬리를 추어올렸다. 다시금 가까이 다가선 그가 수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눈조차 바로 뜨지 못하고 잔뜩 달아올라 있는 채로 수현의 고개가 한껏 쳐들렸다.
“오늘도 기태주와 함께 있었다고. 그놈에게도 이 꼴을 보여 줬겠지? 야한 얼굴을 하고 색향이나 폴폴 풍겨 대면서.”
쥐새끼를 농락하는 고양이처럼, 괴로워하는 수현을 바라보는 명휘의 얼굴엔 잔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생리적인 고통을 참아 내는 것도 못 견딜 일인데, 태주를 들먹이며 욕보이는 명휘의 얘기는 더욱 못 견딜 것 같았다.
“지금쯤 기태주는 그대를 떠올리며 수음하고 있겠지. 그대의 젖은 몸을 생각하면서. 촉촉이 젖어 남자 자지를 기다리는 비좁은 구멍을 떠올리며. 그 작은 구멍에 씹질하는 상상이나 하면서.”
“공자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현이 겨우 목청을 열었다. 명휘의 손끝으로 수현이 덜덜 떠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힘겨운 와중에도 한껏 노려보며 말하는 수현이 명휘는 가소로웠다.
“공자님은…… 폐하와 다릅니다.”
“짐과 다르다……?”
“적어도 그분은…… 사람을 개처럼 다루지는 않으니까요.”
수현의 말에 명휘가 박장대소하였다. 영화궁이 떠나가라 웃어 젖히던 그가 입을 다물고 수현을 노려보았다. 턱을 잡아당기며 가까운 곳에서 수현과 눈을 마주했다.
“짐이 사람을 개처럼 다뤘다는 말이더냐.”
“……신첩을 그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대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명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현은 더 말하는 것조차 버거워 그저 뜨거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온통 뜨거워 이대로 내장이 녹아내리는 듯한데, 불현듯 쥐고 있던 턱을 놓으며 명휘가 멀어져 갔다.
“짐이 그리 그대에게 개처럼 굴었단 말이지.”
혼잣말처럼 지껄인 황제는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수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서 점차 진한 체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짙은 사향에 수현의 잔뜩 일그러졌다.
“그대가 그리 말하니. 짐이 몸소 개 같은 짓을 해 주어야겠구나.”
순식간에 사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공기에 섞여 폐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사향에 수현의 몸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다. 지금까지도 무척이나 괴로웠지만, 사향을 접한 몸은 한층 더 달아오르며 수현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성욕에 절은 몸뚱이는 자제하기 어려울 만큼 양인의 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항문을 흠뻑 적시고도 모자랐는지 애액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뒷구멍 안쪽 어딘가가 쿡쿡 쑤시며 가려워 미칠 것 같았다. 손가락을 넣어 긁어 주고 싶을 정도로 심하게 찾아오는 통각에 온몸이 베베 꼬여 들었다. 당장에라도 굵고 단단한 것을 넣어 쑤셔 달라고 구멍을 계속 뻐끔대고 있었다.
“흐읏, 아!”
노골적으로 들이미는 체향을 이길 수 있는 음인은 없었다. 이성을 갉아 먹은 본능에 수현이 몸을 뒤틀며 의자에 가려운 아랫구멍을 비벼 댔다. 하지만 의자에 비벼 본다 한들 고작 겉부분을 마찰시키는 것일 뿐, 정작 가려운 구멍 안쪽 살을 자극할 수는 없었다.
고통보다 더한 욕망의 지옥에서 수현은 몸부림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람의 모습을 잊은, 그야말로 동물적인 모습만 남은 수현을 보며 명휘는 잔인하게도 체향을 더 풀었다.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듯 달려드는 체향이 수현이 고개를 꺾으며 몸을 뒤틀었다.
“기태주가 이런 모습을 보아야 했는데. 양인의 양물을 갈구하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그대의 꼴을 기태주가 꼭 보았어야 했는데.”
수현이 고통받는 모습이 즐거웠는지 명휘가 한껏 웃으며 조롱하였다.
“그대가 이리 짐승처럼 구는 모습을 본다면 기태주는 어찌할까. 여전히 점잖은 척, 지켜만 보고 있을까? 응?”
“흐아아……!”
희롱하는 말에도 수현은 대꾸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저 몸을 뒤틀며 버티기 힘든 욕구와 싸워야만 했다. 잔뜩 젖은 아래는 질척거려 살갗에 자꾸만 들러붙고, 바짝 선 좆은 몸을 흔들어 대며 사정을 갈구했다. 본능밖에 남지 않은 머릿속에 자꾸만 양인의 양물이 떠올랐다. 그 흉측하고 더러운 살덩이가 어서 제 몸을 함부로 헤집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밖에 없었다.
“벗어나고 싶더냐.”
그런 수현을 바라보며 명휘는 한껏 잔인하게 굴었다.
“그대의 몸을 괴롭혀 대는 짐의 체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더냐.”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수현이 황제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말해 보아라. 그대의 몸에 친히 씨물을 뿌려 달라고. 그대의 한마디면 짐이 친히 체향을 거두어 줄 터이니.”
차마 제 입으로 내뱉기 어려운 말을 요구하는 황제에 수현은 오기가 끓어올랐다. 혹여나 이성을 지운 제 몸이 모진 말을 뱉어 낼까, 아랫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얘진 입술만큼이나 그의 얼굴은 안쓰러워 보였다. 숨이 끊어질 듯 괴로워하면서도 황제에 굴하지 않는 그 모습을 보고 누군들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여전히 황제는 그에게 잔혹했다.
“끝까지 말하지 못하겠다?”
별안간 명휘가 손을 내뻗었다. 그대로 바짝 선 수현의 좆을 잡아 비트니, 수현이 자지러지며 소릴 내질렀다. 괴로움에 못 이겨 생리적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붉게 달아오른 볼과 턱이 눈물에 젖어 들었다. 눈조차 바로 뜨지 못하고 눈물만 흘려 대는 수현의 턱을 명휘가 잡아 올렸다.
“…….”
이제껏 수현을 희롱하기 바빴던 명휘의 눈빛이 짐짓 달라졌다. 느른하게 내려앉은 눈꺼풀 아래에서 검은빛 눈동자가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현이 괴로워하는 만큼, 그가 내뿜는 색향 또한 짙어져 있었다. 양인을 유혹하는 그 향기에 명휘조차도 현혹되는 것만 같았다.
명휘가 천천히 혀끝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구미가 당기는 향과 음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느긋하게 탁자에 기대어 섰다. 흑룡포를 헤치고 바지춤에서 그가 단단하게 굳은 기다란 살덩이를 끄집어 냈다. 수현의 것과는 달리 검붉은색을 띠고 있는 흉측한 살덩이는 성이 난 것처럼 뜨겁게 달구어져 껄떡대고 있었다.
한 손으로 잡기 벅찰 정도로 두꺼운 살덩이의 표피에 시퍼렇게 핏줄이 솟아 있었다. 속이 꽉 차올라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기둥을 손으로 쥐니, 울퉁불퉁 핏줄의 촉감이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한 손으로는 좆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탁자를 짚은 그가 삐딱하니 몸을 늘어뜨린 채 수음하기 시작했다. 수현의 야한 얼굴을 눈에 담고, 귀로는 울부짖는 그의 목소리를 담았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손짓에 따라 표피가 쓸리고, 자극을 받은 좆이 발광하기 시작하였다.
“후…… ….”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좆이었다. 수현의 처소를 찾지 않은 후부터는 도무지 쓸 일이 없었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던 좆이었다. 가뜩이나 성욕이 쌓일 대로 쌓여 있었는데, 희락기를 맞은 수현의 모습은 한없이 자극적이었다.
뜨겁게 달아올라 쫀쫀하게 제 살을 씹어 댔던 수현의 구멍 맛을 떠올리며 명휘가 천천히 손을 놀렸다. 수현의 둔부를 붙들고 씹질을 할 때처럼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양인의 생식기로부터 체향은 더욱 짙게 퍼져 나왔고, 그것은 금방 음인에게 반응을 끌어냈다. 이제껏 격하게 몸을 틀어 대며 비명을 내질러 대던 수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멈춘 채 향기가 짙게 피어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껏 숨이 끊어 버릴 듯 달려들던 사향과 달리 명휘의 체향이 달콤한 복숭아 향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황제의 옥근을 쳐다보게 되었다. 덩치를 한껏 부풀린 살덩이가 슥, 슥 문질러 대는 손아귀 안에서 놀아날 때면, 수현은 저도 모르게 제 구멍 안을 드나들던 살덩이의 감촉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게 황제에게 굴하지 않으려 애를 썼건만, 달콤해진 체향은 오히려 죽일 듯 달려드는 사향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수현은 본능에 항기를 들고야 말았다. 저를 탐하던 황제에게 몸을 맡기듯, 수현이 유연하게 허릴 움직였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꽉 묶인 탓에 몸을 흔들 때마다 살이 쓸리고 아팠지만, 성욕에 절은 몸뚱이는 제 살갗이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도 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성보다 한발 앞선 본능이 수현의 몸을 더 격하게 움직이게 하였다. 망막엔 오로지 명휘가 쥐고 흔드는 좆이 가득했다. 뜨거운 구멍은 스스로 조이고 풀며 어떻게든 안을 자극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입안에 자꾸만 침이 고여 들고, 아래 구멍에는 그 이상의 물이 고여 있었다. 야하게 흔들리는 자지에 의자에 꽉 묶인 두 다리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지금 제 앞에서 더럽게 수음을 하고 있는 자가 황제라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그만큼 온몸이 들끓어 올랐다.
“하아…… 하.”
끈적하게 변한 수현의 모습을 보면서 명휘의 사정감은 더욱 급하게 차올랐다. 이제껏 탄성이 섞인 신음 뱉으며 느릿하게 살덩이를 쓸어 올리던 그가 조금씩 손짓에 속도를 붙이기 시작했다. 손에 힘을 뺀 채로 손목의 반동만을 이용하여 탁, 탁 쳐올리니 사정감이 뿌리 끝에서부터 강하게 올라왔다.
명휘의 얼굴이 야하게 일그러졌다. 욕망에 젖은 눈빛으로 제 좆을 바라보는 수현을 느끼며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큭!”
그대로 수현의 가까이에 선 그가 좆을 잡고 수현을 향해 사정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좆물이 수현의 젖은 얼굴과 옷 위로 마구 흩뿌려졌다. 며칠간 참아 왔던 탓에, 쏘아지는 정액의 힘과 양이 대단했다. 이미 쏘아낸 정액이 수현의 얼굴을 흠뻑 적시며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동안에도 명휘는 계속해서 정액을 분출했다.
“으응…….”
수현은 제 얼굴에 몸에 쏟아지는 뜨끈한 물을 맞으면서 묘하게 야한 신음을 흘려 대고 있었다. 본능에 취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묻은 정액을 핥았다. 향기에 취한 여느 음인이 그러하듯, 혀끝에 닿아 오는 정액의 맛이 너무나도 달았다.
희락기가 주는 고통조차 잊게 만드는 뜨겁고 달콤한 액체에 수현이 정신이 나간 듯 신음해 댔다. 허릴 마구 흔들며 스스로 구멍을 비비고 잔뜩 발기한 좆을 뒤흔들었다. 온전하게 성욕에 절어 버린 모습이었다.
“하…….”
제가 뿌린 정액을 핥아먹는 수현을 보며 명휘 또한 이성이 완전히 나가 버렸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귀비에게 벌을 줄 작정이었다. 저를 무시한 채, 기태주와 보란 듯 만난 수현을 이렇게 의자에 묶어서 희락기 동안 내내 괴롭힐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현에 대한 제 욕망의 깊이를 알지 못했던 그만의 착오였다. 수현의 향기에, 수현이 하는 야한 행동에 오히려 이제는 그가 수현을 욕망하게 되었다. 제 정액을 뒤집어쓴 채로 잔뜩 젖은 수현을 보고 도무지 견뎌 낼 수 없었다. 수현의 모습이 너무도 색정적이었기에 그의 몸 안에 좆을 쑤셔 넣지 않고서는 버텨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흣!”
그래서 명휘는 급하게 수현의 입술을 덮쳤다. 뜨끈하게 달아오른 혀가 제 혀를 감싸 오자 수현은 거부감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오랜만에 마주한 두 개의 살덩이가 서로를 끌어안고 애무하며 비벼 댔다. 서로의 침을 받아먹으며 맛있는 것을 입에 문 듯, 서로 빨아 대기 바빴다.
“아읏!”
살짝 벌어진 수현의 아랫입술을 세게 빠는 것을 마지막으로 명휘가 입술을 떼어 냈다. 그간 수현에 대한 증오로 가득했던 마음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안달이 난 그가 서둘러 수현의 몸을 속박한 끈을 풀러 내기 시작했다.
팔뚝을 묶은 끈이 풀려 가고, 양 허벅지를 묶은 끈도 곧 풀렸다. 양 발목을 속박한 끈까지 풀어내니 수현의 몸이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명휘가 수현의 몸을 끌어안았다. 급격하게 풀려난 살덩이가 잔뜩 쓸려서 아팠지만 수현은 거부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기었다. 그대로 수현을 안아 든 명휘가 침상으로 이동했다.
침대에 누워 수현이 헐떡거리며 위를 올려다보는 동안, 명휘는 젖은 옷가지들을 벗기고 있었다. 땀과 선액, 애액으로 질척해진 옷가지를 걷어 내자 수현의 새하얀 알몸이 훤히 드러났다. 팔뚝과 허벅지에 묶어 둔 흔적을 따라 뻘겋게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은근히 사람을 달아오르게 하는 모양새에 명휘의 좆이 다시금 껄떡대기 시작했다.
“응!”
명휘가 허벅지에 드리워진 빨간 자국을 향해 입술을 묻었다. 뜨거운 혀를 꺼내 자국을 따라 핥아 올리니 수현이 허릴 움찔거리며 짧은 탄성을 뱉어 냈다. 금세 명휘의 손이 수현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흠뻑 젖어 미끈하게 손을 인도하는 애액을 따라 더 깊은, 은밀하게 감춰진 구멍의 입구에 가져갔다.
미끌미끌 애액이 발라진 구멍의 내벽이 침범해 들어간 명휘의 손가락에 끈적하게 닿아 왔다. 쫀쫀하게 물며 빨아 대는 느낌에 손가락이 절로 굽어들었다. 갈고리처럼 둥글게 굽혀 내벽의 구석구석을 훑었다. 손끝마다 닿아 오는 여린 살의 느낌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언제 만져도 질리지 않을 것 같은 촉감이었다.
“아으응, 응.”
드디어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명휘의 손길에 수현이 목소리가 한껏 녹아내렸다. 허벅지 안쪽은 계속해서 뜨거운 혀가 애무해 주고, 가려운 구멍 안은 손가락이 긁어 주니 허리가 절로 움직여졌다. 더 깊은 곳으로 그가 들어와 주길 바라며 수현의 가랑이 활짝 내벌렸다.
음인 특유의 야한 냄새가 명휘의 콧등을 뒤덮자 명휘는 이기지 못하여 허벅지에 있던 입술을 구멍으로 옮겼다. 손가락으로는 안을 벌려 헤집고 흘러내리는 애액을 혀로 빨아 마셨다. 혀끝으로 여린 살갗을 핥으며 비좁은 구멍을 들락날락하며 희롱하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진수성찬에 명휘의 체온이 한없이 올라갔다. 당장 터질 것만 같은 좆을 부여잡으며 그가 몸을 격하게 일으켰다. 그대로 배에 바짝 붙을 정도로 솟아오른 좆을 잡고 수현의 엉덩이 사이에 집어넣었다.
“아으응! 응! 하으으, 흐……!”
뜨겁고 두꺼운 살덩이가 안을 헤집으며 처들어오자 수현은 혼절할 듯 신음하며 허리를 틀었다. 거짓말처럼 좆이 구멍 안에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희락기의 고통이 멎었다. 대신 평소보다 배는 더한 쾌감이 배 안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온몸을 퍼져 나갔다.
완벽하게 쾌락에 잠식당한 몸은 명휘가 몇 번 허리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금방 사정감이 차올랐다. 그것은 이제껏 수현의 야한 모습을 보며 한껏 달아오른 명휘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싸지르긴 했지만, 손으로 문지르는 것과 수현의 구멍 안에 처넣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구멍이 뿌리까지 삼킨 채 입술로 꽉 물고 속살로 빨아 댈 때면 들어찬 살덩이는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쫀쫀하게 붙어 오는 속살에 몸뚱어리를 비벼 대며 들어찬 자지가 발광을 해 댔다.
“흣! 아흣, 읏! 아응! 아!”
명휘의 좆질에 맞춰 수현의 신음이 짧게 여러 번 터져 나왔다. 들어갈 땐 세차게 밀고 들어가 더는 파고 들 수 없는 내벽에 대가리를 처박고, 나올 땐 느릿하게 내벽을 긁으며 빠져나오는 살덩이에 수현의 얼굴엔 열락이 한가득 떠올랐다.
오롯이 쾌감만이 존재하는 행위에 수현의 몸은 완전히 녹아 있었다. 힘주어 안을 콱, 콱 찍어 대는 살덩이에 온몸이 행복해 비명을 내질렀다.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 주는 귀두의 느낌이 소름 끼치도록 좋았다.
명휘의 좆이 더욱 깊은 곳에 처박히길 바라며 그가 허리를 더 들어 올렸다. 쾌락에 못 이겨 그가 두 손으로 침구를 잡고 끌어당겼다. 손안에 잔뜩 말려 구겨지는 침구의 주름처럼, 수현이 얼굴도 쾌감에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더는 치달을 수 없는 감각의 끝에서 수현이 저도 모르게 소릴 내질렀다.
“아응, 그, 그만. 갈 것 같아! 그만, 그만.!”
사정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명휘는 저도 모르게 수현의 좆을 그러잡았다. 명휘의 좆이 들락임에 맞춰 덜렁덜렁 흔들리던 좆이 꽉 잡혀 버리자, 요도까지 차오른 정액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갇혀 버렸다.
“아, 안 돼! 못 견뎌. 그렇게 하면 못 견뎌. 안 돼……!”
사정하지 못하는 수현이 괴로운 듯 소릴 내지르며 울먹였다. 수현은 미칠 것만 같은데, 명휘는 오히려 더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재빠르게 구멍을 드나들며 그가 수현이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을 집중적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귀두의 선단이 긁고 들어간 곳을 곧장 핏줄이 잔뜩 서 울퉁불퉁한 좆 기둥이 빠르게 비벼 대니 수현으로서는 이겨 낼 방법이 없었다. 자꾸만 자극받는 전립선에 온몸이 끓어올랐다. 좆과 마찰하는 구멍에서 애액이 허연 거품이 되어 뭉개뭉개 퍼져 나왔다. 퍽퍽 살을 치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헉헉대는 명휘의 신음이 뒤따랐다.
“제발, 아으! 그만, 흐읏! 그만, 그마안……! 아으응!”
일순, 그만해 달라고 외쳐 대던 수현이 단발의 신음을 끝으로 말을 멈추었다. 그의 허리가 격하게 활처럼 휘어 올랐다. 눈을 까뒤집은 채로 고개를 꺾은 그가 별안간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어 대기 시작했다.
“하으, 흐. 하으으. 흐으…… 흐.”
경련하는 그의 입에서 비명도 아닌, 신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벌어진 입을 따라 혀가 길게 내빼지고 입꼬리에서 침이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놓아 버린 정신과 달리 그의 구멍은 들어찬 좆을 씹어 대며 빠른 속도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떨리는 것만으로도 견디기 힘든데, 씹어 대기까지 하니 버틸 재량이 없었던 명휘는 그대로 수현의 배 속에 사정을 해야만 했다.
“크읏!”
사정과 동시에 명휘가 잡고 있던 수현의 좆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이제껏 수현이 내뿜었던 것과는 다른 성질의 투명한 액체가 해방된 좆의 끝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물고를 튼 냇가의 물살처럼 콸콸 쏟아져 나오는 액체가 수현의 몸통 위로 쏟아져 내렸다.
“씹!”
수현이 내뿜는 액체를 정체를 모를 리 없는 명휘가 더 거세게 허리 짓을 했다. 사정이 끝나지 않은 자지가 세게 쾅쾅 찍어 댈 때마다 수현의 자지는 각성하기라도 한 듯 물을 울컥, 울컥 뱉어냈다. 끝나지 않는 물난리에 명휘의 자지도 끊임없이 좆물을 쏟아 냈다. 배 속 안을 잔뜩 적시는 정액처럼, 수현의 가슴과 뱃살이 투명한 액체에 잔뜩 젖어 들었다.
“흐으, 흐. 하으으, 하아, 하…….”
투명한 액체를 모조리 분출하고 나서도 수현은 사경을 헤매는 사람처럼 정신 차리지 못하고 이상한 신음을 뱉어 냈다. 흰자가 전부 드러날 정도로 눈깔이 뒤집히고, 잔뜩 빼낸 혀를 따라 계속해서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정의 쾌감과 더불어 완벽하게 가 버린 수현의 모습이 명휘에게 끝없는 황홀함을 선사하였다. 잔뜩 희열감에 들뜬 얼굴을 하고 명휘가 몸을 숙였다. 길게 내빼진 수현의 혀를 빨며 입술을 묻었다.
수현은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도 혀를 빠는 명휘에 달게 반응했다. 허리를 슬며시 돌리며 들어찬 좆으로 수현의 내벽을 문질렀다. 성교보다 더 야한 후희를 즐기며 명휘는 한없이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저로 인해 쾌락의 끝을 보인 수현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수현의 몸을 다시금 탐하는 명휘에게선 그간 수현을 향해 쌓아 왔던 애증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수현의 몸을 안고 허리를 놀리기 바빴을 뿐. 밤은 점점 깊어져 갔고, 영화궁 침전을 채운 뜨거운 열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날이 새도록 방 안에는 온통 달콤한 복숭아 향기와 자정향이 뒤섞여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난 수현의 몸은 한결 가뿐했다. 언제 희락기를 겪었냐는 듯, 그의 몸은 상쾌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현의 정신 상태는 전혀 상쾌할 수 없었다. 전날 황제와의 관계에서 저가 한 짓 때문이었다.
어제의 기억은 생생했다. 황제가 내뿜는 다디단 체향에 취해 관계 도중 정액도 아닌 이상한 물줄기를 뿜어 댔던 것. 반듯하게 발기한 좆 머리에서 한번 터지기 시작한 물은 황제가 구멍 안을 꽝, 꽝 쑤셔 댈 때마다 쉬지 않고 터져 나왔던 것. 물이 한 번씩 쏟아져 나올 때마다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쾌락에 달떴던 것조차.
황홀경에 빠져 수현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었다. 차마 사람이 낼 수 없는 신음을 흘려 대며 그렇게 황제의 품에 안기기까지 했었고.
‘그렇게 혐오하는 태화의 황제이거늘, 성욕에 절어 이성을 놓아 버리다니.’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하필 이럴 때 희락기가 찾아와서는…… 이럴 땐 음인으로 태어난 것이 참으로 한탄스러웠다. 비단 이번뿐만이 아니더라도 양인의 체향 앞에 무너질 때면 늘 느끼는 것이긴 했지만.
‘가만. 그때 곁에 공자님께서 계셨지.’
희락기를 떠올리다 보니 수현은 자연스럽게 태주가 생각이 났다. 희락기가 시작되었을 때 공자님이 옆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희락기를 맞은 제 모습을 보고 공자님이 놀라시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공자님 앞에서 추태를 부리다니 수치심이 한층 더 극심해졌다. 그런 모습을 보여 드리려고 했던 게 아닌데…….
그러다 수현은 불현듯 희락기가 오기 직전 태주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땐 정신없어서 제대로 묻질 못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마마, 기침하셨나이까.”
그렇게 잠에서 깬 수현이 긴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언제 온 것인지 장 상궁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왔다.
수현과 달리 장 상궁의 얼굴은 유난히 밝았다. 간밤에 그녀는 제 상전이 또 어떤 화를 당할까 걱정하며 밤을 지새운 참이었다. 하나 그녀의 걱정과 달리 영화전의 침전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은 예전과 같은 것이었다. 폐하가 마마를 거칠게 다루기 전, 분명 그때의 것과 같은 신음이었다.
장 상궁은 폐하가 나선 후 들어선 침전에서 곤히 잠든 마마를 보며 모든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편안한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이제 다시 폐하께서 예전으로 돌아가신 걸까. 그렇다면 소원이 없으련만…….’
그렇게 아랫것들을 시켜 마마의 몸을 단정히 한 그녀가 침전을 나섰다. 아침이 되면 최고의 아침을 대령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간밤은 평온하셨나이까. 혈색이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며 장 상궁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었다. 수현은 무슨 생각할 것이 있는지 잠을 깨고 나서도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는지, 여섯 개의 창을 다 열어젖힌 장 상궁이 다가섰다.
“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옵니까.”
수현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마마.”
“기태주를 불러 주세요.”
긴 생각의 끝에서 수현이 꺼낸 말은 다름 아닌 태주를 불러 달라는 말이었다. 일순, 장 상궁의 얼굴이 굳었다. 이제 겨우 폐하가 예전처럼 마마를 대하기 시작했는데, 어찌 마마께선 기태주부터 찾으신단 말인가. 장 상궁은 덜컥 겁이 났다. 또다시 폐하의 눈을 피해 기태주를 궁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마, 지금 마마께선 옥체를 보존하는 것이 더 먼저일 것으로…….”
“불러 주세요. 당장 궁에 들라고요.”
“마마.”
“어서요.”
이번만큼은 장 상궁도 물러설 수 없었다. 다시 지옥으로 마마를 내몰 순 없었기에. 이 정도 고생했으면 충분했다. 더는 마마가 사지로 몰리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소인, 마마의 명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수현의 고개가 추어올라 갔다. 감히 제 뜻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장 상궁을 보며 입술을 짓씹던 그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봐라. 가서 기태주에게 궁에 들라 전하여라.”
장 상궁 대신 아랫것을 불러 직접 지시한 수현이 성큼성큼 걸어 경대로 다가갔다. 그를 따라 장 상궁도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는 수현의 뒤에서 그녀가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겨우 폐하께서 마음을 돌리셨습니다.”
“장 상궁께서 그걸 어찌 아십니까.”
“간밤에 마마를 대하신 폐하의 행동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마마, 가볍게 여기실 일이 아닙니다. 마마는 폐하의 사람입니다. 어찌 폐하와 자꾸만 등지시려 합니까.”
빗질하던 수현의 손이 멈추었다. 탁, 소리 나도록 빗을 경대 위에 내려 둔 그가 굳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궁께선 오늘 잠시 출궁을 하셔야겠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장 상궁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예? 그게 무슨…….”
“서방에서 건너온 진귀한 차가 있다 합니다. 장안에 서는 장에서 구할 수도 있다 하니, 상궁께서 직접 구해다 주시지요.”
“하오나, 그것은 다른 이들을 시키셔도.”
“아니요. 서방에서 건네온 것이면 무조건 값을 높게 받을 수 있으니, 거짓으로 꾸며 파는 상품이 많다 합니다. 아랫것들은 보는 눈이 없어 이를 가려 볼 수 없을 터, 상궁께서 직접 다녀오셨으면 좋겠습니다.”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많아 장 상궁은 쉬이 그러하겠노라 답하지 않았다. 마마께서 일부러 밖으로 돌리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는데, 그런 장 상궁의 마음을 눈치챈 수현이 다소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꼭 마셔 보고 싶어 그러합니다.”
“마마…….”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뭐든 말만 하라 하셨었지요. 나를 위해 다녀오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마마가 그리 말하니 또 장 상궁의 마음은 그새 녹아드는 듯했다. 여전히 찜찜한 면이 없지 않았으나 결국 그녀는 상전을 뜻을 따르기로 하였다.
“알겠사옵니다. 소인이 장시를 둘러보고 서방에서 건너온 차를 찾아오겠나이다.”
“고맙습니다.”
“혹,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요.”
“없습니다.”
그렇게 수현이 장 상궁을 향해 웃어 보였다. 다시금 경대로 시선을 돌린 그가 빗다 만 머리를 마저 빗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분명,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 하였어. 봉기를…….’
머리를 빗어 넘기는 그의 얼굴은 남모르게 굳어 가고 있었다.
인시(寅時)가 지나 기태주가 영화궁에 도착하였다. 이미 장 상궁은 수현의 명을 받들어 출궁한 상태였다.
“마마를 뵈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수려한 외모의 양인이 수현의 앞에 무릎 꿇어 인사했다.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수현이 벌떡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평소보다 저를 격하게 반기는 수현의 모습이 다소 의아했으나, 태주는 곧 그것이 오늘 부른 이유와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했고.
“한데, 장 상궁님은…….”
“잠시 출궁하였습니다.”
“그러하옵니까.”
“자리에 앉으시지요.”
수현의 권유대로 태주가 자리에 앉았다. 맞은편에 수현이 앉으니 적당한 다과를 나인들이 내어 왔다.
“너희는 그만 물러가 있거라.”
이제껏 그런 적이 없었는데, 수현이 아랫것들을 물렸다.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얘기를 해야 했기에.
“예, 마마.”
수현의 수족들이 침전에서 물러났다.
“마마께선 간밤에 별일 없으셨는지요.”
나인들이 물러간 방 안, 수현과 단둘이 남게 된 태주가 물어 왔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지난밤 단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희락기를 맞은 음인이 양인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그였기에. 명휘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현이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예. 공자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무탈하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아프게 가슴에 박혀 왔다. 이렇게 씻은 듯 나은 모습을 보면 분명 탕약의 힘은 아니었을 것이다. 명휘의 양기를 받았던 터겠지. 생각이 그리 미치자 마음이 쓰라렸다. 저도 모르게 상 아래로 내린 손을 꽉 그러쥐었다.
“그때.”
그런 태주의 속마음을 전혀 알 리 없는 수현은 저 나름대로 심각해져 다급하게 용무를 꺼내 놓았다.
“공자님께서 내게 한 말이 있었습니다.”
“마마…….”
수현은 말하기 전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혹여나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날까, 최대한 낮춘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옛 성해의 백성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고요.”
태주는 수현의 말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급하게 찾으신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부터 예상하였던지라.
“분명, 그리 말씀하셨지요?”
“예. 그리하였습니다.”
수현의 두 눈이 일렁였다. 가슴이 거칠게 뛰어 대고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태주에게 한 번 더 확언을 받은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의자를 더욱 끌어당기고, 상체를 바짝 태주 쪽으로 기울인 그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말하였다.
“공자님께선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폐하께서 소인에게 그리 명하셨습니다. 은밀히 남방에 존재하는 옛 성해 백성의 집단을 조사하라고요.”
수현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황제가 그리 명했다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져서였다.
“폐하께서 어찌 그리 명하셨단 말입니까.”
“연유는 소인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조사하라는 명에 임하였을 뿐.”
“그래서요. 그리해서 무엇을 알게 되셨습니까.”
“남방에는 비밀리에 성해를 재건하고자 하는 무리가 모여 집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독군어사와 함께 남방으로 향한 태주는 지방 곳곳을 뒤져 옛 성해 백성의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태화에 동화되어 태화의 백성으로 사는 듯했으나, 그곳에서 지내며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른 뜻을 지닌 무리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들과의 접촉은 시도해 보셨습니까.”
“아니요.”
“어째서…….”
“그것은 소인이 단독으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폐하의 명은 그들의 존재를 유무를 알아 오라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진작이 알고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예. 아마 그 전부터 눈치채고 있으셨던 듯합니다.”
수현이 생각에 잠기었다.
‘분명 태화의 황제는 봉기의 조짐을 알고 있었다.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조사할 정도였다면. 그렇다면 왜 이제껏 내색 없이 있었던 걸까. 그것도 대신들이 아닌, 관직이 없는 공자님까지 보내면서. 대체 그렇게까지 조용히 처리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일순 수현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분명, 이리도 은밀히 일을 진행한 것을 보면.
“폐하께선 그들을 척살할 작성이신 겁니다.”
“마마.”
“분명, 그것뿐입니다. 이리 은밀히 일을 진행하시는 걸 보면. 분명,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척살할 작정이신 겁니다.”
“단정 짓긴 어렵습니다. 폐하의 태도에서 그들에 대한 분노는 엿보이진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기습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이리 은밀히 일을 진행하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미 확신하는 듯한 수현을 보며 불현듯, 태주의 머릿속에 독군어사 장뢰의 말이 떠올랐다.
‘미천한 소인이 감히 폐하의 큰 뜻을 헤아리긴 어렵사오나. 감히 추측해 보건대, 이번에 내리신 분부가 귀비마마와 연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태주는 재차 물어 오는 수현에 짐짓 정신 차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었다.
“마마. 저는 폐하의 명을 따랐을 뿐이고, 그로 인해 옛 백성들이 봉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것 외에는 어떤 말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폐하의 뜻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요.”
태주의 말을 들은 수현은 그래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다는 듯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 대던 그가 여전히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황제가 알았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옛 백성들을 지키기 위하여 이 궁에 남았습니다. 그들이 해를 입게 된다면,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한 커다란 눈망울.
떨리는 수현의 눈동자는 태주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었다. 희락기를 맞은 마마가 쓰러지기 직전, 그때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다시금 그의 가슴속에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마…….”
긴 여운을 담아 그가 수현을 불렀다. 수현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태주에게 시선을 맞춰 왔다. 한없이 여리고 안쓰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차마 닿을 수 없는, 절대 닿아서는 안 되는 분에게로 그가 기어이 손을 내밀고야 말았다.
“…….”
제 손을 감싸 오는 커다란 손에 놀라 수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조차 못 하고 멍하니 태주를 바라보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눈빛이 그를 직시하고 있었다.
“마마께 힘이 되어 드리겠다 하였습니다. 마마를 도와드리겠다고요.”
“공자님…….”
“그리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
“소인이 마마를 도울 수 있게 해 주시겠습니까?”
* * *
장 상궁이 궁에 돌아왔을 때, 수현은 어쩐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전에서 어렵게 구해 온 차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장 상궁이 먼저 수현에게 말을 걸었다.
“마마, 무슨 생각을 그리하시옵니까.”
그제야 생각의 뭍에서 빠져나온 듯, 멍한 얼굴로 수현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아…… 돌아오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시었길래 소인이 오는 줄도 모르셨나이까.”
“아닙니다. 그냥 잠시 생각할 것이 있어서.”
의아한 듯 수현을 바라보던 장 상궁은 그저 별일 아니겠거니 넘기었다. 대신, 저가 구해 온 귀한 차의 포장을 풀러 마마께 보여 드렸다.
“다행히 시전에 들어온 물건이 있다 하여 소인이 구해 왔나이다. 바로 한잔 올리나이까?”
“아…… 그러세요. 안 그래도 입이 텁텁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리 마시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리만큼 차에 대한 수현의 태도는 무심했다. 장 상궁은 아랫것을 불러 차를 내리라 명하고서 수현의 옆에 섰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상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그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었다.
“마마.”
“……?”
“무슨 고민이 있으신 게지요.”
“아닙니다. 아까 말했듯이 그저 생각할 것이 있어.”
“무엇이옵니까.”
“…….”
“소인이 마마의 곁을 지킨 지도 벌써 반년이 넘어섰습니다. 마마의 고민을 부디 소인께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던 수현은 그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안 될 말이었다. 장 상궁에게 꺼내서는 절대 안 될 말이었다. 분명 말을 했다간 안 된다고 펄쩍 말릴 게 뻔했기에. 비단 그것이 아니더라도 이 위험한 일에 장 상궁까지 말려들게 할 수 없었던 터였다. 혹여라도 일이 잘못되기라도 할 시엔…….
“마마, 차를 대령했나이다.”
마침 한 나인이 다기를 들고 침전에 들어섰다.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찻잎을 우린 물을 따라내니, 단번에 향긋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서방에서 건너왔다더니, 그간 마셨던 차와는 다른 향기였다.
“향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리 귀한 것을 구해 오시다니, 상궁님의 능력에 새삼 감복하였습니다.”
애써 화제를 돌리기 위해 수현이 그리 말했다. 하지만 얄팍한 수법 따위 장 상궁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차를 준비해 온 나인이 물러가자마자 장 상궁이 말했다.
“혹, 오늘 기태주 공자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들으셨나이까.”
찻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수현이 흠칫 놀랐다. 차마 긍정도 부정도 못 하고 그저 잔을 탁자 위에 내려 두어야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었던. 소인은 묻지 않겠습니다.”
“상궁님.”
“다만.”
“…….”
“마마께서 소인을 믿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목숨을 걸고 나서야 할 사람이 소인입니다. 마마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인입니다. 마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간이라도 쓸개라도 받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소인입니다. 그러니, 마마.”
“…….”
“부디 소인에게 마음을 감추지 마시옵소서. 부디 헤아려 주시옵소서.”
장 상궁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수현은 알고 있었다. 매번 폭군에 맞서 마마를 지키려 했던 그녀였으니까.
그래서 더욱 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충심이 얼마나 깊은지 이미 알고 있기에. 또한 수현이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만큼 깊었기에.
“그리하겠습니다.”
“마마.”
“상궁님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차의 향기를 조금 더 즐기고 싶습니다. 말을 꺼낼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매혹적인 향이 아니겠습니까.”
방긋 웃으며 말하는 수현을 보며 그제야 장 상궁도 입을 다물었다. 뜨거운 찻잔을 들고 후후 불어 마시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은 어쩐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 * *
저녁이 되도록 수현은 계속 같은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낮에 태주가 했던 말이 계속 떠다니고 있었다.
‘마마께선 마음의 준비가 되시거든 소인에게 투예를 보내십시오. 마마께서 투예를 보내 오시면, 결심하신 것으로 판단하고 소인은 실행을 준비하겠습니다.’
긴 생각의 끝에 결심한 듯 수현이 고갤 들어 올렸다. 마침 하루 중 유일하게 장 상궁이 자릴 비운 시간이었다. 수현이 잠이 든 사이에도 항상 저의 곁을 지키는 그녀였기에,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다.
“거기 있느냐.”
수현이 부르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한 명의 나인이 대답했다.
“예, 마마. 여기 있사옵니다.”
“잠시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쪽이 진 머리를 한 나인이 방 안에 들어섰다. 나인을 곁에 세워 두고 수현은 서랍장 안에서 보자기에 둘둘 만 작은 물건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이것을 기태주에게 전하고 오너라.”
“예, 마마.”
“이 일은 필시 너와 나만 알아야 할 것이야.”
“여부가 있겠나이까.”
“장 상궁에게도 함구하거라.”
“예, 마마.”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들고 나인이 종종걸음으로 물러났다. 나인이 떠나는 대로 수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결국 내 손으로 시위를 당겼다. 이제는 돌이킬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이제 효시(嚆矢)는 쏘아졌다. 거대한 일이 시작될 터였다. 어쩌면, 어쩌면 이미 예견된 일인지도 몰랐다. 태주의 제안이 아니었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해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이곳에 숨어 있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저가 비겁하게 황궁에 숨어 있는 동안, 저의 백성들은 옛 성해를 되살리기 위해 그리도 노력하고 있었다. 성해의 왕족으로, 마지막 남은 왕손으로 두고만 볼 순 없었다. 당장 그들에게로 가야 한다. 이 감옥을 벗어나 제 백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수현이 굳은 결심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있던 그때. 별안간 문밖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일순, 수현의 낯이 퍼렇게 변하였다. 하필, 이런 순간에 황제가 찾아오다니. 하나, 달리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이미 투예는 보냈다. 다행한 일이었다.
문이 열리고, 거만한 사향의 주인이 방 안에 들어섰다. 그가 수현을 내려다보며 자리에 섰다. 하늘 아래 가장 미남자라 불리는 이답게 그을린 피부가, 정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높은 콧대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폐하를 뵈옵니다.”
수현은 애써 예를 갖췄다. 그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같은 생각을 되뇌고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황제의 의심을 살 만한 행동은 하지 말자.’
명휘는 다소 당황한 듯 붉어진 볼을 미심쩍게 바라보다 자리에 앉았다. 새삼 부끄러워하는 것도 아닐 테고, 유독 흥분감이 느껴지는 색향에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안상을 대령하나이까.”
수현이 명휘의 맞은편에 앉자, 부재중인 장 상궁을 대신해서 한 나인이 물어 왔다. 명휘는 이에 대꾸 없이 손짓해 보였다. 이만 모두 나가 보라는 의미였다.
모두가 물러가고 나니 방 안에는 명휘와 수현, 단둘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짙게 내려앉고, 아무런 말이 없는 명휘에 수현도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찰나의 시간이 마치 천금과도 같이 무겁게 느껴졌다. 침착하려 애쓰고 있지만, 자꾸만 손바닥에 땀이 고여 드는 것 같았다.
“혈색을 보아하니 안정을 찾은 듯 보이는구나.”
“폐하의 덕분입니다.”
“그래? 그대의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피식, 조소하는 명휘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수현은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저 눈을 내리깔고 부담스러운 시선을 버텨 내고 있는데, 불현듯 명휘가 그에게 손을 내뻗었다.
수현의 얼굴에 닿은 명휘의 손이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색기를 담은 느릿한 손길에 수현의 미간이 좁아졌다. 볼을 지나서 가는 목을 타고 명휘의 손길이 이어졌다. 유난히 긴 목선을 쫓아 부드러운 손끝이 훑고 지나쳤다. 빗장뼈까지 도달한 손가락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깃을 슬쩍 걷어 내니 동그랗고 하얀 어깨가 옷 속에 숨어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희락기 때 그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느냐.”
수현은 대답 없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기억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성욕에 절어 황제에게 몸을 받고 정액도 아닌 이상한 물줄기를 쏘아 대었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대의 양물이 뿜어 대던 물이 무엇인지, 그대는 알고 있는가?”
수현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부러 저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하려고 희롱하는 수작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달아오르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음인 중에서도 그리 물을 뿜어 댈 줄 아는 음인은 드물다지? 참으로 천박한 몸이 아니더냐, 그대의 몸뚱어리는.”
어찌 반박조차 못하고 수현이 그저 말아 문 아랫입술을 짓씹고 있는 사이, 명휘가 손을 걷어 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침상으로 향했다. 두 팔로 침상을 짚고, 느른한 눈빛으로 그가 걸터앉았다.
“그대의 천박한 입으로 짐을 기쁘게 해 보아라.”
황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 없는 수현은 한참을 자리에서 망설였다. 스스로 걸어가 그 더러운 옥근을 입으로 물고 싶지 않았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일어설 수밖에 없는 것이 수현의 운명이었다.
‘지금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된다. 황제를 방심하게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자리에서 일어선 수현이 천천히 황제에게 걸어갔다. 특유의 나른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황제의 앞에 손수 무릎을 꿇어앉았다. 강인한 허리에 내둘러진 황금색의 띠를 풀어내고, 흑색의 긴 상의를 걷어 냈다.
빼곡히 들어찬 복근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고, 이어 그 아래 자리한 하얀 바지가 보였다. 망설이다가, 수현이 바지춤에 손을 가져갔다. 여미어져 있는 하얀 끈을 풀어내니, 그대로 천이 갈라지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살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발기하지 않아 축 늘어진 살덩이였거늘. 한눈에 보기에도 수현의 손바닥보다 길었고, 한 손으로 쥐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두꺼웠다. 풍겨 오는 양인의 냄새를 맡으며 수현이 명휘의 가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기둥의 뿌리를 두 손으로 잡고 얼추 세워진 머리의 끝으로 입을 묻었다.
“후…….”
따뜻하고 축축한 입안으로 귀두가 감춰지는 동안 명휘는 고갤 젖히며 달뜬 숨을 뱉어 냈다. 들어찬 귀두부터 수현은 혀를 사용해 감싸듯 돌리며 빨기 시작했다. 좆이 속부터 꽉 차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단단해지는 좆의 기둥을 살며시 쓸며 수현이 고갯짓을 했다. 위아래로 머리를 움직이며 좆을 자극하던 그가 고개를 완전히 옆으로 꺾어 기둥을 샅샅이 빨아 댔다. 뜨거운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는 침을 빨아 마시다 다시 머릴 바로 세워 귀두를 머금었다.
순종적으로 제 좆을 빠는 수현을 바라보며, 명휘의 눈꺼풀이 점점 더 낮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명휘가 몸을 더욱 늘어뜨렸다. 미끈하고 부드러운 혀에 좆을 비벼 대며 그가 허릴 조금씩 움직였다.
끈적한 액체를 매개로 살이 빨리는 마찰음이 방 안에 울려 퍼지고. 어느덧 방 안을 가득 메우던 사향이 점차 다디단 복숭아향으로 변해 있었다. 단단해진 좆 머리가 수현의 목젖을 지나 점차 목구멍 너머로 침범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수현의 머리통을 짓누르고, 목구멍을 통해 씹질을 하듯 명휘가 허릴 움직였다.
어느덧 창밖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살포시 얼굴을 내민 밤 달이 은은하게 방 안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황궁이 온통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태화 최대 명절인 중양절을 앞두고 대량의 국화를 궐에 들여온 탓이었다. 태화전 앞의 너른 마당을 장식하고 남을 꽃들이 각 후궁의 처소에도 전달되었다. 물론 수현의 처소도 예외는 아니었다.
“역시 가을꽃 중에선 국화가 최고가 아니겠습니까.”
영화궁의 침전을 국화로 장식하는 나인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며 장 상궁이 말하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기쁨이 가득하였다. 근래에 들어서 폐하가 마마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같아졌기 때문이었다. 폐하께서 영화궁에 하루가 멀다고 찾으시는 것은 물론, 비명 소리 대신 잔뜩 달아오른 신음만 새어 나오니 두 분의 사이가 예전처럼 좋아진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물론, 마마께서 웃으신다거나 즐거운 기색을 딱히 보이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산송장처럼 겨우 목숨만 부지하던 그때를 떠올리면 많이 좋아지신 편이었다. 비록 가끔 긴 생각에 잠기셔서 말을 거는 것조차 모를 때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뭐.
“마마?”
방금도 수현은 장 상궁이 제게 말을 건네오는 것도 모르고 긴 생각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 정신 차렸다.
“네? 무어라 하셨습니까.”
“국화가 참으로 예쁘다 말씀드렸습니다.”
“아…….”
짐짓 수현이 방 안을 채운 국화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러하군요.”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목소리. 장 상궁은 더 말을 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마마께서 꽃을 감상할 시간을 드려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마마. 다되었나이다.”
방 안의 장식을 끝낸 나인들이 몸을 조아리며 침전에서 물러났다. 수현은 방 안을 채운 노란빛의 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치 잠꼬대 같은 말투로 중얼거렸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이에, 귀 밝은 장 상궁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엇을 말씀하시옵니까, 마마.”
여전히 꽃에 시선을 묻은 채로, 혼잣말처럼 수현이 답하였다.
“중양절 말입니다.”
“아. 그렇지요.”
“중양절엔 폐하께서 먼 길을 떠나신다지요.”
“예. 매년 선황 폐하의 능으로 떠나시니. 이번에도 그리하실 것입니다.”
장 상궁의 말을 들으며 수현은 어쩐지 다른 이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중양절. 제사를 지내고 선황의 능으로 향할 것입니다. 마마께선 이때를 노리셔야 합니다. 혹여나 폐하가 마마를 찾아오셨을 때, 마마께서 자리에 없다면 바로 발각될 테니까요.’
“선황의 능은 꽤 멀리에 있다지요.”
“그야, 당연히…….”
답을 하려던 장 상궁은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능으로 향하는 폐하가 걱정되는 것은 아닐 테고,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한단 말인가.
“마마.”
“예.”
“혹, 무슨 생각이 있으신 것인지요.”
“무슨…….”
“갑자기 선황의 능이 멀리 있다는 말씀은 왜 하신단 말입니까.”
수현이 국화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천천히 장 상궁을 올려다보는 그의 머릿속엔 또 다른 말이 떠올랐다.
‘믿을 수 있는 심복에게 평상복을 준비해 두라 하십시오. 장 상궁님은 충심이 지나쳐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그분께는 비밀로 해 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장 상궁님.”
짐짓 진지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이 의아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이 이어졌다.
“상궁께서는 사가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것이 언제입니까.”
뜻밖에 질문에 장 상궁은 잠시 당황하는 듯했으나, 머릿속으로 수를 헤아려 곧장 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아뵌 날로부터 딱 다섯 해가 지났나이다.”
궐에 속한 이들이 사가를 찾아가는 것이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나 나이 어린 초임자일수록 어려웠고, 그나마 상궁 정도의 직분이 되는 이들만 특별히 상전의 허락을 받아서 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상궁께선 이번 중양절에 사가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예?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다섯 해나 가족을 못 만나 보았다고 하니 내가 다 속상하여 그러합니다.”
“하오나, 어찌 소인이 마마를 두고.”
“마침 폐하께서도 중양절 동안 궐을 비운다고 하시니. 별일 없을 터입니다.”
“마마.”
“그러니 이참에 상궁께서도 사가에 다녀오시지요.”
“소인은 괜찮사옵니다. 마마를 곁에서 모시는 것이 소인의 기쁨이온데 어찌, 마마를 떠나 사가를 다녀오라 하시나이까.”
애초에 장 상궁의 의견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란 듯, 수현이 고갤 돌렸다.
“여봐라. 있느냐.”
상전이 소리 내 부르니,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나인이 대답하였다.
“예, 마마. 찾으셨나이까.”
“잠깐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나인이 들어와 몸을 조아렸다.
“옷 지을 사람이 필요하다.”
수현의 말에 장 상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황궁에는 황실의 의복을 담당하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 그럼에도 옷 지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수현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던 터였다.
“장 상궁이 사가에 입고 갈 옷을 지을 터이니, 사람을 한 명 들여오너라.”
하지만 그녀는 곧 저를 위한 명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장 상궁이 잔뜩 황송해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마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황송할진대, 어찌 옷까지 해 주신다고 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랜만에 사가에 가는데, 좋은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미소와 함께 그리 말하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은 차마 가지 않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 당장 들이거라.”
“예, 마마. 분부를 받잡겠나이다.”
나인이 물러갔다. 어안이 벙벙한 장 상궁만 얼이 빠져 이 상황이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데,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수현이 말했다.
“내가 장 상궁님에게 고마운 것이 많아 그러합니다.”
“마마.”
“그러니 사양 말고 다녀오시지요.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결국, 장 상궁이 눈물을 글썽였다.
“마마…….”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노란빛을 뽐내며 송이송이 피어 있는 국화 화분으로 그가 다가섰다. 손수 몸을 숙여 노란 꽃잎에 얼굴을 파묻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코끝을 타고 폐로 전해졌다.
“참으로 은은한 향입니다.”
“그러하시옵니까.”
“궁에서 맞는 중양절이 참으로 기대됩니다.”
“…….”
“분명. 더없이 아름다운 날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 말을 끝으로 수현이 몸을 일으켰다. 등을 지고 있었기에 장 상궁은 볼 수 없었지만, 수현의 얼굴에는 언뜻 비장한 각오가 엿보였다.
* * *
날은 흘러 어느덧 중양절이 되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맑디맑던 하늘에는 어쩐 일인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천으로 인해 어렵게 진행된 제사를 끝으로 공식 일정을 끝낸 장 상궁은 수현의 독려로 인해 출궁을 준비하고 있었다. 빗속에서 우산을 받쳐 쓴 장 상궁이 수현의 앞에 섰다.
“오랜만에 사가를 찾는 날인데 비가 와서 어찌합니까.”
“이 정도 비야 금방 그칠 것입니다.”
“그리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렴요. 그보단 마마, 마마의 곁을 떠나는 소인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불충이라니요. 내가 그리하라 명한 것을.”
채비를 끝내고도 장 상궁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수현의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였다. 이상했다. 분명, 큰 명절을 맞이하여 사가에 다녀오라 하는 상전의 말이 기뻐야 정상일 텐데,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쪽이 욱신거리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혹여나 소인이 필요하시면 사람을 바로 보내십시오. 마마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달려오겠나이다.”
“예. 그리할 테니, 그전까지는 마음 편히 있다 오시지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시간을 끌던 장 상궁은 그마저도 할 수 없어 발길을 돌렸다. 마마께서 하사한 고운 비단의 의복을 걸치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건만. 어쩐지 걸음걸음마다 땅끝에서 손이 비집고 튀어나와 잡아당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옷 말고도 수현이 하사한 갖가지 귀한 것들을 보자기에 싸 품에 안고 장 상궁이 발걸음을 옮겼다. 빗속에서 영화궁을 벗어나 점점 멀어지는 그녀를 바라보며, 수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속여서 미안해요, 장 상궁님. 하지만 진심으로 나를 보필해 준 상궁님께 해를 끼칠 순 없습니다.’
“마마, 그만 가시지요.”
빗줄기에 가려져, 이제는 하나의 점같이 보이는 장 상궁의 모습을 뒤로한 채, 수현이 뒤돌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내딛는 그는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태주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밤에 출궁하는 것은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평상복으로 환복하시고, 신분을 속이시어 시종과 함께 나오십시오. 귀비마마의 명을 받아 시전에 가는 길이라 하시면 될 것입니다.’
자리에 멈춰 선 그가 그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인을 바라보았다. 지난번 태주에게 투예를 전달해 준 그 나인이었다.
“너는 오늘 나와 잠시 궐 밖으로 갈 것이다. 그러니 출궁을 준비하거라.”
“예, 마마. 그리하겠습니다.”
빗속에서 다시금 수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수현의 위로 우산을 씌운 나인이 그를 따라 종종 발걸음을 옮겼다.
‘궐을 빠져나오셨다면 도성 성곽으로 오십시오. 저는 그곳에서 마마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느덧 빗소리는 점점 거세지고, 하늘에는 잔뜩 먹구름이 뒤덮였다.
‘바라옵건대 부디 성곽까지만 무사히 오소서.’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인 양 수현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였다.
‘그때부턴 소인이 마마를 모시겠나이다.’
이제부터 펼쳐질 모진 운명을 알기라도 함일까. 수현의 얼굴은 좀처럼 밝아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