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5)

9.

그가 들러붙은 수현의 상의를 천천히 들쳐 올렸다. 그러자 은밀한 부위가 기름칠을 한 채로 잔뜩 번들거리면서 단번에 모습을 드러냈다.

명휘는 수현의 뒤태를 한참이고 감상하였다. 특히, 다리 사이에 있는 그곳, 두 개의 알을 달고 길게 내뻗어져 있는 그 음란한 부위를.

이윽고 명휘가 수현의 가랑이 사이를 벌렸다. 둥근 엉덩이 아래, 바닥에 짓눌린 고환이 뭉뚝하게 솟아 있고, 그 아래로는 긴 좆이 빳빳해져 있었다.

평소에도 많이 보아 온 수현의 성기였지만 이렇게 엎드린 상태에서 뒤로 꺼낸 모습을 보니 또 색다른 맛이 있었다. 명휘는 주저하지 않고 수현의 좆을 어루만졌다. 뒤로 넘긴 상태여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명휘는 한 손으로 수현의 좆을 어루만지며 또 다른 손으로는 둥근 고환을 쓰다듬었다. 바닥에 짓눌린 상태여서 알을 굴리는 느낌은 덜했으나, 이렇게 빵빵하게 부푼 느낌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름을 바른 상태여서 미끈거리는 감촉도 좋았고.

한참 동안 수현의 좆과 고환을 매만지던 명휘가 손을 뗐다. 옆에 놓인 향유 병을 들고 그가 수현의 둔부 위에 향유를 쏟았다. 매끈한 살갗이 다시 한번 기름으로 범벅되었다. 반질거리는 엉덩이를 주무르던 그가 검지와 중지를 세워 수현의 구멍 속으로 단번에 찔러넣었다.

“하으읏!”

쫄깃한 수현의 안쪽 살을 느끼며 명휘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수현이 반응하는 지점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명휘였다. 명휘는 위아래로 손가락을 쑤시면서 손목을 꺾어 회음부와 맞닿은 지점을 계속 자극하였다.

명휘가 계속 쑤셔 댈수록 수현의 구멍 안은 질퍽해지고 있었다. 안을 문질러 대던 손가락이 빠져나올 때면 두 개의 손가락을 따라 애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구멍에서부터 흘러내린 애액이 회음부를 타고 고환까지 흠뻑 적시었다.

구멍에서 흘러나온 애액을 끝에 잔뜩 묻힌 손가락이 도로 빠져나와서는 은밀한 문의 입구를 뱅글뱅글 훑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쑥 하고 멍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명휘가 다른 손으로 수현의 좆을 그러잡았다. 역시나 기름으로 미끈거리는 좆을 잡아 문지르며, 구멍 안의 손가락으로는 여전히 수현의 전립선을 찾아 비벼 대기 시작했다.

“흐으…… 흐……!”

앞뒤를 동시에 공략하는 집요한 명휘의 손길에 엎드린 채로 수현이 계속해서 신음을 뱉어 냈다. 귀를 즐겁게 하는 수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명휘의 손길은 더욱 빨라졌다. 그는 수현의 구멍과 좆을 양손으로 쉼 없이 괴롭혔다.

수현의 뒤를 손가락으로 쑤시는 동안 명휘의 좆도 쉼 없이 껄떡댔다. 야한 뒤태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잔뜩 죄어 오며 손가락을 빨아 대는 수현의 속살 느낌이 끔찍하게 좋았다. 찔걱, 찔걱. 애액으로 가득 찬 구멍을 쑤실 때마다 음란한 소리가 마구 터져 나왔다. 명휘는 아예 수현의 골반을 잡고 수현의 구멍을 세게 쑤셔 대기 시작했다.

“하으, 아아! 아! 아아!”

수현이 엎드린 상태에서 몸을 들썩였다. 쾌감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상체를 일으켜 두 팔을 끌어안고 몸부림을 쳤다. 미간은 잔뜩 찡그려져 야한 표정을 자아내고, 크게 벌어진 입에선 빠른 속도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완벽하게 발기한 수현의 좆은 엎드린 상태임에도 그 끝이 위를 향해 치솟았다. 퍽퍽퍽퍽, 빠르고 세게 치대는 손길에 엉덩이를 때리는 소리가 거세게 터져 나왔다.

“으응, 으응, 응. 으응, 하으읏!”

기어이 거친 손길을 이기지 못하고 수현의 좆 머리에서 정액이 쏟아져 내린다. 엎드려 있는 수현의 골반이 마구 진동하며 허벅지까지 떨려 왔다. 하얀 물을 내뿜는 좆처럼 수현의 구멍 안에 존재하는 분비 비관에서도 애액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수현의 구멍은 애액을 뱉으면서도 들어찬 손가락을 정신없이 씹어 댔다. 이렇게 손가락만 넣어 줘도 정신 못 차리고 야해지는 수현이 명휘는 새삼 귀엽게 느껴졌다. 더 야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치솟았음은 말할 것도 없었고.

“으응. 응…….”

사정 후 쾌감에 절어 있는 수현의 몸뚱이 위로 명휘가 올라탔다. 역시 마찬가지로 미끈한 기름으로 범벅인 몸뚱이를 가지고 수현의 몸에 비벼 대기 시작했다. 맨살만 맞대고 있어도 좋은데, 기름칠을 한 채로 마찰하는 살의 느낌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흑마의 것처럼 근육으로 가득 찬 허벅지에 힘을 줄 때마다 명휘의 근육이 살아 있는 듯 꿈틀거렸다. 기름칠한 덕분인지 온몸의 근육이 더욱 생생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엉덩이에 힘을 잔뜩 준 채로 커다랗게 부푼 좆을 수현의 엉덩이 사이에 대고 비볐다. 폭신한 엉덩이 살에 파묻힌 좆이 미끄러질 때면, 수현의 구멍 안에 씹질을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응…….”

성욕에 완벽하게 사로잡힌 수현의 몸을 끌어안고 명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현을 뒤에서 안은 채로 그가 자리에 앉았다. 얇은 옷을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수현의 등짝에 가슴을 문지르며 한 손으로는 향유를 찾아 수현과 저의 몸에 뿌렸다.

완전히 녹아 버린 수현이었건만, 등 뒤에서 스치는 명휘의 가슴 느낌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커다란 가슴이 미끄덩거리며 비벼 댈 때마다, 명휘의 젖꼭지가 수현의 등위에서 뭉개졌다. 명휘가 상체를 돌리는 속도에 맞춰 수현도 허리를 돌렸다.

“하으응……!”

수현의 배와 가슴을 어루만지며 기름을 덧칠하던 명휘가 양손으로 수현의 양 젖꼭지를 잡았다. 이미 많이 흥분한 상태에서인지 명휘가 잡고 몇 번 문지르지 않았음에도 수현의 젖꼭지는 금세 딱딱해졌다.

볼록 튀어나온 두 개의 돌기를 손끝으로 잡고 명휘가 손가락을 놀렸다. 콩알만 한 젖꼭지를 손으로 굴리며 등 뒤에선 계속해서 몸을 비벼 댔다.

수현은 그대로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서는 불끈불끈한 양인의 근육이 느껴지고, 앞에서는 젖꼭지가 희롱당하고 있었다. 허리에 자꾸만 비벼 대는 좆도 그렇고 모든 게 너무 야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명휘가 젖꼭지를 애무하던 손으로 수현의 가슴살을 꽉 쥐었다. 살을 모아 한 손에 쥐니 발기한 꼭지가 빳빳하게 솟아올랐다. 명휘가 그 위로 향유를 또 한 번 뿌렸다. 볼록 선 꼭지 아래로 기름이 좔좔 흐르니, 마치 젖이 흐르는 것만 같아 보였다.

“그대의 젖꼭지가 젖을 흘려 대는구나. 그새 짐의 애라도 밴 게냐?”

희롱하는 말에 수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성욕에 절어 있는 상태에서도 수치스러워 명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는데, 그런 수현이 귀여웠는지 명휘가 볼에 쪽, 소리 나도록 입 맞추어 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음욕에 사로잡힌 수현의 모습은 늘 명휘를 기쁘게 했다.

명휘는 잡고 있던 젖을 몇 번 더 세게 주무르고 놓아주었다. 미끈거리는 가슴과 뱃살을 둥글게 쓸다가 그가 수현의 허리춤에 묶여 있던 허리끈을 잡아 풀었다.

한번 싸지르고도 잔뜩 발기한 수현의 좆이 단단히 발기해 있었다. 명휘는 딱딱해진 좆을 바라보다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늘어지는 수현의 몸을 침상 위에 눕히고, 수현의 가랑이 사이로 앉았다.

“흠.”

무엇인가 생각하던 그가 수현의 침의를 주룩, 찢었다. 무명으로 만든 천을 들고 명휘는 다시 이등분으로 잘랐다. 그중 하나를 들고 명휘가 수현의 양손을 묶었다. 완벽하게 녹아내린 수현은 명휘가 무엇을 하는지조차 자각 못 하고 그저 야한 얼굴을 한 채, 달뜬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기름에 젖어 미끈거리기는 했으나,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꽉 묶고 나니 수현의 손을 쉽게 속박할 수 있었다. 끈을 당겨 가며 손목이 움직일 수 없다는 걸 확인한 명휘가 그대로 남은 천 조각 하나에 기름을 부었다.

명휘는 기름에 잔뜩 젖은 무명천의 양 끝을 잡고 수현의 귀두에 덧씌웠다. 버섯 모양을 한 예민한 부위에 대고 명휘가 양 끝에서 천을 잡아당기며 기름에 젖은 무명천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흣!”

일순, 수현의 좆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너무도 예민한 상태에서 귀두만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니 단번에 사정해 버린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심한 쾌감에 수현이 상체를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지독한 자극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큰 살덩이가 제 안을 처음 쑤셨을 때도 이 정도로 힘들지 않았는데…… 이번 자극은 너무도 심했다. 온몸의 감각기관이 날카롭게 솟은 것이, 꼭 몸 곳곳이 콕콕 쑤셔지는 기분이었다.

“아으, 아아아, 흐윽, 흑.”

꿀렁꿀렁. 좆 머리를 빠져나온 하얀 물이 무명천에 맺히며 흘러내렸다. 사정이 주는 쾌감과 예민한 부위를 문질러 대는 극심한 자극으로 인해 수현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거의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사정을 끝냈는데, 무심하게도 명휘는 부드러운 천으로 수현의 귀두를 문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아, 싫어. 싫어. 안 돼에…… 흐읏!”

수현이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좌우로 비틀며 흔들었다. 간질이라도 걸린 것처럼 경련하며 두 다리가 쉴 새 없이 후들거렸다. 비명 같은 소리로 울부짖으며 수현이 몸을 뒤틀었다.

허리가 활처럼 굽을 때마다 깡마른 몸에 갈비뼈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치골이 곤두섰다. 고갤 뒤로 꺾어 처박으며 벌어진 입에서 침이 줄줄 흘렀다. 견딜 수 없는 심한 자극에 몸을 어찌나 뒤틀었는지, 침상에 맞닿은 어깨가 벌겋게 물들었다. 귓바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잔뜩 찡그린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흐흑. 싫어. 그만, 그마안. 제발! 하윽.”

괴로워하는 수현을 보며 명휘가 웃음 지었다. 한껏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수현을 내려다보던 그가 수현의 귓가에 쉬, 작게 속삭였다. 그가 몸을 틀며 괴로워하는 수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 수현의 고통이 그에겐 즐거움이었으므로, 수현이 조금 더 버텨 주었으면 하는 터였다.

기름을 먹은 얇은 천이 다시금 수현의 좆 머리를 비벼 대기 시작했다. 일절 다른 부위는 건들지 않고 예민한 좆 머리만 비벼 대는 탓에 수현은 까무러칠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천이 한 번씩 움직일 때면 짜릿하다 못해 찌릿한 느낌이 좆 끝에서부터 배 속 깊은 곳까지 징, 하고 울렸다. 이건 도무지 맨정신으로 버텨 내지 못할 자극이었다.

“아흐윽, 흐윽, 흐윽. 흐아아, 흐으!”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수현이 또다시 사정했다. 수현의 뱃살이 울리며 빠른 속도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내려앉기를 반복했다. 기름칠한 좆이 사정없이 몸통을 뒤흔들며 무명천 위로 좆물을 뱉어 냈다. 쾌감이 지나쳐 고통으로 변한 이 순간에도 명휘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천을 움직였다.

“하으, 하으. 하. 하으. 싫어, 그마안. 하으!”

수현이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싫어. 못해. 싫어…… 제발. 제바알!”

순간.

“흣!”

혼절할 듯 울부짖던 수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명휘에게 입 맞췄다. 살고 싶어서 하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미친 듯 명휘의 혀를 찾아 물고 빨아들이며 눈물로 입 맞췄다.

“하으윽, 흐윽. 흐으윽, 흑.”

수현의 눈가에서 쉼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입맞춤하는 동안에도 계속 흐느끼며 그가 애절하게 명휘에게 매달렸다.

“……!”

명휘는 그런 수현의 행동에 일순 놀란 듯했으나 그새 눈을 내리깔며 수현의 입술을 받아 주었다. 

겁먹은 작은 짐승처럼 떨어 대며 제 입술을 찾는 수현이 보기 좋았다. 명휘의 얼굴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커다란 손이 깡마른 등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그의 손길이 다정하다.

“세 번이나…… 세 번이나 갔어. 더는 못해. 그만…… 제발, 그만…….”

눈물 젖은 목소리로 하는 말.

입맞춤 후에도 애원하는 수현을 보며 명휘는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땀과 얼룩진 머리를 넘겨 주다 다시금 그가 수현의 입술을 찾았다.

급하지 않은, 부드러운 입맞춤. 명휘와 입술을 맞대고 그 감촉을 느끼는 사이 수현의 떨리던 몸이 조금씩 잠잠해졌다.

눈물로 젖은 예쁜 두 눈이 스르륵 감기었다. 두 손이 꽁꽁 묶인 채로 그가 완전히 명휘에게 몸을 기대었다. 색색. 이제껏 본 적 없는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져든다.

그런 수현을 바라보는 명휘의 눈빛엔 애정이 가득했다. 잠든 수현도, 그리고 명휘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분명 연모의 감정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 * *

아침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껴들었다. 잠에 빠져 있던 수현은 눈이 부셔 자리에서 바스스 일어났다. 방 안은 온통 햇살로 따사로운데, 수현의 심정은 그럴 수 없었다. 다름 아닌 제 옆에 누워 있는 이의 모습에 시선이 꽂혔던 탓이다.

‘……미친 거다. 미치지 않고선 그럴 수 없다.’

수현의 머릿속에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고문과도 같은 성행위를 받아 내던 그는 견디다 못해 황제에게 입 맞춰 버렸다. 그것은 분명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살기 위해 그리한 것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황제가 멈추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까. 그렇게 싫다고 뻗댈 땐 언제고 먼저 입술을 들이대다니. 분명 나를 깔보고 있을 거다.’

그때. 불현듯 수현은 욕탕에서 명휘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입맞춤의 느낌이 떠올랐다.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다정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느낌…… 포악했던 그의 평소 행동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입맞춤이었다. 

비단, 입맞춤뿐만이 아니라 관계 자체도 그랬다. 여전히 괴롭히는 와중에도 그는 귓가에 ‘쉬’ 속삭이며 수현을 달래 주었다. 만약 관계하고 있는 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수현은 착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관계하고 있는 이가 나를 소중히 다루고 있다고…….

“……!”

그렇게 수현이 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명휘가 수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온통 당황스러워 수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침부터 대체 무슨 짓인가 싶어서 떨어뜨리려는데, 아무리 밀어도 넓은 어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명휘는 등허리에 얼굴을 파묻으며 앞으로 두른 손으로 수현의 국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데, 허리를 끌어안은 그가 쿡,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일순 수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침부터 뭐 하는 겁니까.”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되어 잠겨 버린 목소리를 하고 수현이 겨우 말을 뱉어 냈다. 그러자 명휘가 허리에 파묻은 채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수현은 시뻘게진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방 안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햇빛을 받으며 명휘가 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은 햇살 아래 가득 빛나고, 빈 곳 없이 근육으로 가득한 몸이 불끈불끈했다. 넓은 등짝을 따라 곧게 선 기립근과 바짝 올라붙은 엉덩이가 참으로 야했다. 빌어먹을 황제만 아니었다면, 가슴이 뛰고도 남을 만한 그런 모습이었다.

“밤새 얼마 자지도 못했을 텐데, 왜 벌써 일어났느냐.”

수현이 밤새 얼마 자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황제 본인이었다. 욕탕에서 침소로 옮겨 와 밤새 괴롭혀 댔던 게 황제가 아니었던가? 일부러 수현을 약 올리려 작정한 게 아니라면 굳이 할 얘기는 아니었다.

“신첩은 충분히 잤습니다. 아침이 되었으니 일어나는 게 맞지요.”

“아닐 텐데. 어제 그리 울어 대느라 힘들었을 텐데.”

“…….”

“아니면…… 아침부터 이리 세우고 있는 걸 보니 또 하고 싶은 게냐?”

“폐하.”

“어제 밤새 쑤셔 댔던 것으로는 모자라서?”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황제의 손을 수현이 쌀쌀맞게 걷어 냈다. 음인이든, 양인이든 양물을 단 사내라면 으레 아침마다 서는 것이 당연한 것을, 괜히 황제는 아침부터 심술이었다.

수현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얘기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황제와 말씨름하느니 차라리 자릴 뜨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그렇게 옷을 추스르고 침상을 벗어나려 하는데.

“흣!”

누워 있던 황제가 단번에 수현을 낚아채 침상 위에 도로 눕혔다. 잔뜩 얼굴을 찡그리며 올려다보니, 염치없는 황제가 양손을 포박한 채로 몸을 짓눌러 대기 시작했다. 저를 바라보는 황제의 시선이 짓궂다. 아마도 어제 밉보인 게 있어 그걸로 또 희롱하려 하는 속셈인 듯했다.

“그대가 그리 좋아할 줄은 짐이 또 몰랐지.”

안타깝게도 안 좋은 예감은 늘 빗겨 나가질 않는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대가 먼저 들이댔을까?”

“들이대다니요!”

참다못한 수현이 처음으로 목소릴 높였다. 벌게진 얼굴이 씨익씨익 숨을 내뿜는다.

“폐하. 농이 지나치십니다.”

“뭐를?”

“폐하께서 신첩을 그리도 괴롭히니, 견디다 못해 그런 것이 아닙니까.”

“짐이 그리했더냐?”

“그럼 아니옵니까?”

“글쎄. 짐은 그대가 즐거워하며 계속 토정하기에 그리했을 뿐인데.”

“…….”

일순, 말문이 막혀 버렸다. 능글맞게 눈웃음을 살살 치면서 말하는 황제의 모습이 어찌나 기가 막힌지 절로 그러했다.

“더는 폐하와 말장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놔주십시오. 그만 일어날 것입니다.”

수현의 단호한 어조에 명휘는 자꾸만 웃음이 실실 흘러나왔다. 얼굴을 잔뜩 붉힌 주제에 쌀쌀맞게 말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그래서 명휘는 조금 더 골려 주고 싶었다. 도도한 수현의 모습은 언제나 깨뜨려 주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으니까.

“읍!”

명휘가 수현의 입을 틀어막았다. 나름 피하겠다며 발버둥을 치며 도리질하는 수현을 짓누르며 집요하게 입속을 파고들었다.

“흐음…….”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흘러들어 오는 진한 체향의 기운을 수현은 이겨 낼 수 없었다. 쥐새끼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명휘는 제 아래서 늘어지는 수현을 기쁜 눈으로 쳐다보았다.

‘체향을 조금만 흘려도 이렇게 늘어지는 주제에.’

짓누르고 있던 손아귀에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이젠 어깨를 압박해 오던 힘도 사라졌거늘, 여전히 수현은 쥐 죽은 듯 꼼짝없이 명휘에게 붙들려 입술을 내주고 있었다. 이 역시 극양인이 가진 체향의 힘이었다.

“정말로 일어날 수 있겠더냐?”

입맞춤이 끝나고 잔뜩 숨을 몰아쉬는 수현을 내려다보며 명휘가 물었다.

그런 명휘를 올려다보며 수현은 그저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 그저 빠르게 차오르는 성욕에 몸을 들썩였을 뿐.

“아무래도 아닌 듯싶구나.”

명휘가 수현의 가슴 위로 얼굴을 묻었다. 손을 아래로 뻗어 음인의 가는 다리 사이로 향한다.

“아침부터 이리도 젖어 앙탈을 부리니.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어야겠지.”

부푼 살덩이를 부여잡고 은밀하게 젖은 곳을 향해 들이민다.

* * *

두 사람은 점심이 지나서야 겨우 피서궁의 침전을 벗어날 수 있었다. 밤새 한 것도 모자라 아침부터 또 잔뜩 해 댄 통에 아침상을 들이려던 나인들만 곤란해졌다. 진귀한 음식으로 가득 채운 상을 들고 문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니, 장 상궁이 다가와 그녀들을 물렸다. 경험상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기에. 계속해서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들으며 그녀는 흐뭇한 웃음을 한껏 지었다.

“마마. 식사는 입에 맞으셨는지요.”

오후 늦게, 식사를 끝낸 수현에게 장 상궁이 물었다. 명휘는 이미 저의 처소로 돌아간 후였다.

“폐하께서 특별히 준비하라 이르셨다 하옵니다.”

“……?”

“마마의 고향이 남방이시어 특별히 특산물로 만든 이 지역 요리들로만 상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들었사옵니다.”

뜻밖에 얘기에 수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마마께서 잘 드시는 모습을 보고 음식을 준비한 상궁들에게 아끼지 않고 칭찬을 하셨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마마께 이곳 음식을 올리라고요.”

‘말도 안 돼!’

수현의 얼굴에 믿기지 않는다는 내색이 역력하였다. 대체 무슨 속셈인가 싶어 그저 혼란스러운데, 옆에서 그를 지켜보는 장 상궁만 그저 뿌듯한 얼굴이었다. 

“마마. 오후에는 폐하께서 함께 들를 곳이 있으시다 하였사옵니다. 이제 슬슬 채비하시지요.”

장 상궁이 한껏 웃으며 그리 말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수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두 사람은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경대 앞으로 향하였다. 

오후 늦은 시간. 다시금 난여를 앞세운 행렬이 줄을 이었다. 남순을 향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기나긴 행렬이었다.

수현은 붉은색 발로 가린 가마에 앉아 멍하니 밖을 쳐다보았다. 발로 가려 명확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길은 어쩐지 낯익어 보였다. 태화의 남방이 수현이 태어나고 자란 곳일 수도 있어서 그럴지도 몰랐고.

그렇게 한 시진을 움직이고 나서야 황제 폐하와 귀비마마를 모신 행렬이 멈추어 섰다.

“마마, 도착하였나이다.”

장 상궁의 아룀에 수현이 조심스럽게 가마 밖으로 향하였다. 그렇게 새로운 곳에 한 발짝을 디디는데.

“……!”

일순, 자리에 선 수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차마 어떤 말조차 꺼내질 못하고 그가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마마.”

그런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이 옆에서 걱정스레 물었다. 굳어 버린 수현의 얼굴만큼, 장 상궁의 표정 또한 굳어 있었다. 잔뜩 그늘진 얼굴로 그가 쓰러질 듯 애처로워 보이는 수현의 몸을 부축하였다.

“귀비마마는 어서 폐하의 뒤를 따르소서.”

환관 한 명이 다가와 귀비마마께 고했다. 이미 가마에서 내린 명휘는 앞서 걸어가는 중이었다.

“마마, 힘드시면 무리하지 않으셔도…….”

장 상궁이 걱정스레 말하였다. 가뜩이나 몸도 좋지 않은데, 혹여나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서.

하지만 수현은 그녀의 권유를 거부하였다. 장 상궁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 하고 그가 발걸음을 옮기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는 어느새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세게 말아 물고 있었다.

“오래 걸렸구나.”

한참을 산길을 오르고 나서야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는 언덕 위에 서 있었다. 얇은 비단으로 지어진 용포가 바람에 휘날리고, 허리에 두른 황금색 띠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그 어떤 이와 견주어 봐도 빠지지 않는 늠름한 양인의 모습을 보며, 수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참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기막힌 상황에 분노하지 않으려고. 폭발할 것만 같은 제 감정을 어떻게든 추스르려고.

“이리 와 보거라.”

하지만. 그런 수현의 노력은 한꺼번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그토록 꿈속에서도 보고 싶었던 저의 잃어버린 왕국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으니까.

언덕에서 바라본 평화로운 도시는 어릴 적 수현이 보아 왔던 그 도시가 맞았다. 북방에서 쳐들어온 침략자에 의해 불타 없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한 채로 다시금 되살아나 있던 것이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하였다. 옛 성해의 땅을 다시 보게 된 것에 대한 기쁨. 되살아나는 어릴 적 기억에 대한 아련함, 애잔함. 되찾지 못할 땅에 대한 슬픔. 그리고…… 십 년 전, 잃어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

실로 참담했다. 너무도 참담해서 외마디 말조차 나올 수가 없었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그날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을음 가득했던 하늘. 불타오르던 도시. 그리고…… 그리고 어린 저를 두고 떠나야만 했던 어머니. 어머니…….

“어떠냐.”

차마 발걸음을 채 옮기지 못하는 수현의 손목을 황제가 잡아끌었다.

“이곳이 옛 성해의 터가 아니더냐.”

잔인한, 너무도 잔악무도한 이가 수현을 붙잡고 웃는다.

“그대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 다시 보니 기쁘지 아니하더냐.”

악귀보다도 못한 자. 사지를 찢어 죽여도 모자란 자.

“그대를 위해 짐이 준비했노라. 그대가 그리워하는 것 같기에.”

“……무슨 얘기가 듣고 싶으신 겁니까.”

여름의 태양이 무색하도록 싸늘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린다.

“……뭐라.”

“신첩에게 무슨 얘기가 듣고 싶어 이리하시는 겁니까.”

“…….”

“신첩이 괴로워하는 모습이 그리 즐거우십니까. 이 먼 곳까지 데려와서 망국의 옛 수도를 보여 줄 만큼. 그렇게 해서라도 신첩이 고통받는 게 보고 싶으셨느냔 말입니다.”

순간.

“흡!”

커다란 손이 수현의 목을 단번에 낚아챈다.

“크윽, 큭.”

단번에 목을 사로잡힌 수현이 괴로워하며 숨 막히는 소릴 낸다. 얼굴이 뻘겋게 달아오르고 이마 위로 시퍼런 핏줄이 선다.

“커억. 컥.”

명휘가 손에 힘을 더욱 가하며 수현의 목을 계속해서 짓눌렀다. 숨이 꽉 막혀 버린 수현의 얼굴은 새빨갛다 못해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모자란 숨에, 짓누르는 압박감에 그의 얼굴이 곧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 말하라.”

수현의 코앞으로 명휘가 얼굴을 바짝 들이민다. 맹수의 것과 닮은 날카로운 눈이 수현을 죽일 듯 노려본다.

“네 뭐라 지껄였는지. 다시 말해 보란 말이다.”

쿵! 그대로 수현의 몸이 커다란 나무에 처박힌다.

막다른 곳에 내몰고도 모자랐는지 명휘는 계속해서 수현의 목을 졸라 댔다. 살기를 담은 체향이 수현의 폐 속으로 파고들었다. 꽉 막힌 숨과, 온 신경을 갉아 먹으며 달려드는 체향에 수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끅끅거리는 음인의 목소리가 애처롭다. 그 예쁜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린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황제를 노려보는 눈길이 매섭다. 죽음을 초월한 분노가 그의 눈빛을 타고 번진다.

“그대를 위해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더냐.”

“끅, 끅.”

“짐이. 친히. 그대를. 위해.”

“끅.”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더냐.”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마치 비린 칼을 맞대듯, 두 사람의 시선이 따갑게 얽혔다. 목을 졸라 대는 명휘의 눈빛도, 그런 그를 바라보는 수현의 눈빛도 하나같이 날카로웠다.

“짐의 성의가 그리도 우스워 보였더냐. 네 주제에, 고작 망국의 왕자 주제에.”

치솟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명휘의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대로는 정말 수현도 더는 못 버틸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의 손에 죽는 게 나을지도. 이렇게 매번 치욕을 겪으며 살아가느니 그대로 황제의 손에 죽으면 차라리 마음이나마 편할지도.

“말해 보아라. 왜 말이 없는가. 아까는 잘도 지껄여 대더니. 왜 이제 와 말이 없느냔 말이다!”

순간.

“폐하!”

장 상궁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인들은 물론, 그곳을 지키고 있던 환관들 모두 놀라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의 행동은 정녕 제 목숨을 내다 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기에.

“폐하. 자비로우신 황제 폐하. 부디 귀비마마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소인이 대신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눈물로 호소하였다. 수현의 목을 그러잡은 팔에 매달리며 그녀가 어떻게든 수현을 살리고자 발버둥 쳤다.

“제발, 폐하. 제가 마마의 심기를 편하게 해 드리지 못하여 벌어진 일입니다. 부디 소인의 목숨을 취하시고 귀비마마는 그만 놓아주소서. 부디 소인을 벌하시고, 귀비마마의 목숨만은 부지하게 하여 주소서. 폐하. 제발.”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환관들이 나서서 그녀를 잡아끌었다. 여기저기서 나인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끌어내려는 환관과 장 상궁 간의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궐 안에서 억척스럽게 살아남은 그녀의 의지란 대단한 것이었다. 실로 그녀는 여러 환관이 달려들었음에도 끝까지 명휘의 팔을 잡고 놓지를 않았다.

“폐, 폐하!”

장 상궁의 갸륵한 충성 덕분이었을까. 명휘가 수현의 목을 죄던 손을 풀었다.

“커억. 컥. 흐읍, 콜록. 콜록…….”

숨이 꽉 막혀 있던 수현이 온통 기침을 쏟아 내며 몸을 휘청이는 사이, 명휘가 그대로 시위의 칼집에서 칼을 뽑아 들었다.

“흡!”

명휘의 칼날이 향한 곳은 장 상궁의 목이었다.

“폐하…….”

울부짖던 장 상궁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명휘가 말했다.

“그래. 네년이 그리 말했더냐.”

“…….”

“네 상전 대신 네년의 목을 거둬 달라고.”

“그리…… 말했사옵니다.”

“네년이 정녕 죽기가 두렵지 않은 게로구나?”

스스로 죽겠다 청하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그녀가 황제의 앞에 무릎 꿇어앉았다. 그런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도 마지막까지도 수현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다.

“소인이 그리 청하였으니 할 말이 없사옵니다. 부디…… 소인의 청을 들어주시어 귀비마마의 목숨만은 살려 주시옵소서.”

“오냐. 네년의 소원대로 목숨을 거두어 주마.”

이윽고 명휘가 칼날을 번쩍 들어 올리고 장 상궁의 목으로 내리칠 때였다.

“마마!”

명휘가 휘두르는 칼날이 채 장 상궁에게 닿기도 전, 수현이 그녀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

명휘는 물론,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가 놀랐다. 시종을 위해 제 몸을 버리는 상전은 이제껏 없었다. 태화는 물론, 그 어떤 나라에서도. 그 어떤 이가 천한 이를 살리고자 제 몸을 날린단 말인가?

“마마…….”

장 상궁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마마. 어찌 이러십니까. 저 같은 것에게 어찌하여…….”

차마 또 마마께 누가 될까 장 상궁은 겁이 났다. 마마 대신 죽으려 한 것뿐인데, 이렇게 또다시 마마를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하다니. 혹여나 수현이 또다시 해를 입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지금 뭐 하는 게냐.”

비릿한 목소리. 수현과 장 상궁이 하는 꼬락서니를 지켜보다 명휘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그의 얼굴엔 비웃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분노에 눈동자는 여전히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묻지 않았더냐.”

장 상궁을 끌어안은 채로 수현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마, 마마. 이러지 마시어요, 마마. 눈물로 호소하는 장 상궁의 몸이 한없이 떨리고. 그녀를 끌어안은 수현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분노도, 노여움도, 참을 수 없는 비참함도. 이 순간 그를 괴롭히는 모든 감정보다도 안고 있는 한 사람이 더 중요했다. 더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선 안 되었다. 저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모습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신첩이…….”

쓰디쓴 눈물을 집어삼키며, 벼린 칼로 가슴을 긁어 낸다.

“신첩이 잘못하였나이다.”

그가 얼굴을 들어 올린다. 그러곤 역겹게도, 제 목숨을 쥐고 있는 자를 마주하며 비참하게도 목숨을 구걸한다.

“폐하께선 아량을 베푸시어. 그만.”

그 예쁜 눈으로 눈물을 머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야 만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땡그랑. 날카로운 쇠붙이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바닥에 칼을 떨군 이가 단번에 수현을 잡아 올린다. 그대로 수현의 입속에 파고들며 제 입술을 묻는다. 거친 숨결이 수현의 얼굴을 뒤덮는다. 부드럽지 않은, 폭력과도 가까운 입맞춤에 그가 한 줄기 눈물을 떨군다.

수현의 입꼬리를 타고 붉은 핏줄기가 길게 흘러내린다. 마지막으로 수현의 입술을 찢으며 떨어져 나간 황제가 비릿한 제 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며 노려본다.

“이제 알겠더냐, 그대의 위치를.”

수현은 말없이 황제를 응시한다. 입술을 따라 흐르는 피 따위, 그는 자각조차 할 수 없다.

“잊지 말거라. 그대는 태화 황제의 후궁임을.”

제 입술을 훔쳤던 손으로 수현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 낸다.

“그대의 목숨을 쥔 유일한 사람이.”

얼음처럼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수현의 귓가에 속삭인다.

“짐이라는 것을.”

황제가 자리에서 돌아선다. 수많은 환관과 나인들이 그의 뒤를 따른다.

“마마…….”

여태껏 눈물을 멈추지 못한 장 상궁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또 다른 영화궁의 나인들 더러는 눈물을 훔치고, 더러는 크게 울었다.

“마마. 귀비마마.”

나인들이 통곡하는 소리가 언덕 위를 가득 채웠다.

그녀들의 곡소리에 반응하듯이 화창했던 하늘이 흐려졌다. 잔뜩 몰려든 먹구름은 금세 대지를 적셔 갔다.

그날 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홍수라도 낼 것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지가 온통 물속에 잠겨 드는데 피서궁에는 으스스한 기운만 넘쳐흘렀다.

번개가 한번 번쩍 갈기고 간 하늘에 또 한 번 번개가 내리쳤다. 침전 안이 잠시 번쩍거리다 한순간에 점멸한다. 우르르 쾅, 다시 한번 천지가 진동한다.

침상에 홀로 누운 명휘가 몸을 뒤척였다. 온몸은 땀에 절어 끈적했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다.

그는 홀로 과거의 망령과 싸우고 있었다. 꿈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망령과.

소년이 있었다. 누구보다 해맑은 눈을 가진 아이였다.

일국의 왕자로 태어난 아이는 부왕의 바람과는 달리 여린 심정을 갖고 있었다. 그런 소년의 성정을 그의 아비는 무던히도 싫어했었다. 조금 더 저를 닮아 냉혹한 양인으로 성장하길 바랐거늘…… 아이는 그저 순수하고 해맑기만 했기에.

하여, 그의 아비가 선택한 길은 소년을 담금질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불에 달궈 망치로 내리쳐 저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그의 아비가 택한 길이었다.

부왕은 어린 소년에게 한 쌍의 꾀꼬리를 선물해 주었다. 노란색의 깃털을 가진 작고 사랑스러운 새였다.

아비의 선물에 소년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작은 몸으로 어여쁜 소릴 내는 그 새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으랴. 소년은 밤낮으로 찾아가 그들의 노랫소릴 청해 듣고, 때 되면 직접 모이를 챙겨 새장에 뿌려 주었다.

그렇게 애정으로 보살피며 일 년이란 시간을 보낼 즈음이었다.

소년의 생일날이었다. 부왕은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소년은 저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불편하였으나, 그런 속내를 내색할 수는 없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저, 부왕이 시키는 대로 자릴 채우며 버티고 있었어야 했을 뿐.

그러다 잔치가 거의 끝나갈 즈음이었다. 소년의 아비는 궐의 중앙을 가득 메운 무희들을 물렸다. 무희가 물러난 자리. 그곳을 대신 채운 것은 소년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한 쌍의 새가 담긴 새장을 들고 나인들이 찾아왔으니까.

“아바마마…….”

소년은 얼이 빠져 부왕을 바라보았다. 왜 저의 아끼는 꾀꼬리 한 쌍이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인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소년을 보며 부왕은 한없이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껏 들은 적 없는 따뜻한 목소리로 그가 소년에게 말했다.

“저 한 쌍의 새를 너의 손으로 죽이거라.”

실로 충격적인 말이었다. 소년이 혹여 잘못 들었길 바라며 답하지도 못하고 멍하니 있는데, 다시 한번 부왕이 말하였다.

“무얼 하느냐. 짐을 실망시킬 참이더냐.”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모진 일을 시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바마마. 부디 그 명을 걷어 주세요. 소자는…… 소자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직접 기른 저 작은 짐승들의 목숨을 어찌 소자의 손으로 거두라 하십니까.”

소년의 눈물 어린 목소리에 부왕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그 따뜻해 보이던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차갑게 얼어붙는 눈빛만이 존재했다.

“그래서. 짐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단 말이더냐?”

“아바마마…….”

“못난 놈.”

부왕이 자릴 박차며 일어섰다.

“성정이 그리 물러터져서야! 어찌 짐이 마음 놓고 너에게 이 나라를 물려준단 말이더냐.”

서리발처럼 차디찬 목소리가 소년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다. 부왕의 커다란 그림자가 아이의 온몸을 집어삼켰다. 부왕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생각과 제 손으로 저 사랑스러운 것들을 죽일 수 없다는 마음이 소년 안에서 뒤엉켜 충돌했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손길이 벌벌 떨린다. 온통 불안으로 뒤덮인 눈이 애처롭다.

“무릇 사내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서는 안 되는 법. 어찌할 테냐. 네 손으로 저 새들을 죽일 테냐. 이대로 짐의 눈 밖에 날 테냐.”

안타까울 정도로 떨었지만, 소년의 아비에게 자비란 없었다. 그는 외려 단정하고 있었다. 이 정도도 못할 정도로 약해 빠진 녀석이라면, 애초에 왕세자의 자격도 없는 거라고.

시간은 점점 흐르고……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숨죽여 지켜보는 이들만 침을 꿀꺽 집어삼켜야 했다.

“아바마마.”

순식간에 생일잔치가 아닌 초상집으로 변한 분위기 속에 결국 소년이 입을 열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듣는 것만으로도 가여웠다.

“소자는…… 소자의 손으로는, 절대로…… 저 새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부왕이 소년에게서 돌아섰다. 그가 손짓하자 이제껏 잠자코 제 자릴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몸을 움직였다.

“끌어내어 궤짝에 가두거라.”

말도 안 되는 폭군의 명령에 소년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놀랐다. 왕세자로 책봉되기 직전인 어린 왕자를 갑자기 궤짝에 가두라니. 그것도 새를 죽이지 못한다는 이유, 그 말도 안 되는 이유 하나로.

“아바마마.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했나이다. 아바마마.”

놀란 소년이 울부짖으며 아비의 다리에 매달렸다. 시위에 손에 끌려가지 않으려 발버둥 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아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하나, 부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얼어붙은 눈빛으로 소년을 노려보았을 뿐.

“그 안에서 잘 생각해 보아라.”

“아바마마.”

“네 녀석의 손으로 직접 죽일 수 있다고 하면 꺼내 줄 터이니.”

그렇게 소년은 끝내 궤짝에 갇히게 되었다.

궤짝에 갇혀 소년은 계속해서 부왕을 찾으며 울부짖었다. 궤짝 안은 너무도 비좁고 더웠으며, 어두웠고 무서웠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궤짝 안에 갇힌 소년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먹고 마신 것이 없어 생명은 꺼져 가는데, 제가 싸지른 오물이 한가득하여 온몸이 썩어 가는 것만 같았다. 희미한 머릿속은 미쳐만 가고…… 입은 그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이나 뇌까리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그날은 지금처럼 비가 오고 있었다. 단지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아닌 폭우였다. 굵은 빗방울은 나무로 만들어진 궤짝을 잔뜩 적셨고, 좁은 공간 안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우르르쾅. 쏟아지는 빗속에서 천둥과 번개가 내리쳤다. 귓가를 때려 대는 천둥소리가 한번 지나갈 때마다 소년은 날카로운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것과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쯤 소년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 작은 상자 안에서 이미 그는 죽은 것과 진배없어, 생명일랑 언제 끊긴들 이상함이 없었으니…….

“끌어내라.”

소년이 거의 의식을 잃어 가던 그때, 비로 젖은 궤짝의 문이 열리었다. 시위들의 손길에 나무 궤짝에서 꺼내진 소년은 세차게 내리치는 빗줄기를 맞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우르르쾅. 천둥소리가 천지를 울려 대고, 번쩍거리는 번개에 앞에선 부왕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소년은 입조차 열 수 없어 그저 죽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있는데, 부왕이 먼저 말을 건네었다.

“생각해 보았느냐.”

“…….”

“분명, 네 녀석의 손으로 죽일 수 있다 하면 꺼내 준다 하였지 않느냐.”

우르르쾅. 다시 한번 천둥소리가 온 세상을 때렸다.

소년은, 그대로 생명의 불이 꺼져 가던 소년은 힘겹게나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저를 뒤덮은 부왕의 그림자를 보며. 저의 앞을 지키고 있는 악마의 얼굴을 보며.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소자…… 받들겠나이다.”

차가운 빗줄기가 썩어가는 육체를 씻겨 낸다.

“아바마마의 명을…….”

죽음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공포가 빗줄기에 씻겨 내려간다.

“소자가 받들겠나이다.”

우르르 쾅.

또 한 번의 천둥소리에 질끈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인다. 숨을 몰아쉬며 명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허억, 헉. 허억. 허억.”

방 안을 가득 채운 격한 숨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어두운 공간을 채운다. 땀으로 얼룩진 얼굴은 잔뜩 찡그려져 있고, 건강해 보이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다. 꿈에서 깨어났건만, 여전히 제 몸을 갉아 먹는 공포에 그가 옅게 몸을 떨었다.

“폐하.”

상전의 잠자리에 혹 무슨 일이 생겼을세라 그새 태감이 황제의 침전에 들었다.

“꿈자리가 편치 않으셨나이까.”

태감은 말없이 부드러운 무명천을 찾아 들고, 땀으로 얼룩진 황제의 얼굴을 닦아 나갔다. 오래도록 황제의 곁을 지켜온 그는 알고 있었다. 간혹 천둥이 요란한 밤이면 황제가 오늘처럼 악몽에 시달려 잠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을.

태감은 황제를 괴롭히는 것이 아마도 왕세자로 책봉되던 해의 기억이 아닐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사흘 동안 궤짝 안에 갇혀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명휘가 아니었다면, 극양인으로 태어난 이가 아니었다면 사흘도 못 버티고 죽었을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상자 안에서 굶주리며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그대는 알고 있는가.”

빗소리에 파묻혀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땀으로 젖은 무명천을 내려 두며, 태감이 황제의 앞에 몸을 조아렸다.

“무엇을 말씀이옵니까, 폐하.”

“부황이 짐에게 했던 말을 말이야.”

“선황께서 뭐라 하셨나이까.”

“그때, 부황이 짐의 손에 그 작은 새들의 피를 기어이 묻히고 나서 짐에게 그런 말을 했지.”

“…….”

“이제 온 세상이 너의 것이 될 것이라고.”

너는 곧 천자가 될 것이라고. 태화가 세상을 지배하고, 곧 그 태화를 네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 말씀하셨습니까.”

“그리고 부황께선 또 말씀하셨지. 이제 네가 못 가질 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세상의 모든 것이 너의 앞에 무릎 꿇을 테고, 너는 그들을 내려다보게 될 것이라고.”

“그리되셨습니다. 폐하께선 천하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것이 선황제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명휘의 눈꺼풀이 낮게 내려앉았다. 생각에 잠긴 듯, 그는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한데.”

무표정하던 황제의 얼굴에 동요하는 기운이 맴돌았다. 어느덧 그러쥔 빈주먹이 부들부들 떨리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분노로 뒤덮이며 벌겋게 달아오른다.

“이 세상에 짐이 갖지 못할 것은 없는데. 어이하여, 어이하여 그리한단 말인가.”

황제는 뒷말을 집어삼켰으나, 태감은 그가 누구를 생각하며 그리 말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을 두고 하는 말씀일 테지.

“폐하.”

“그렇지 않은가.”

“…….”

“감히 제가 뭐라고. 제까짓 게 뭐라고.”

이득, 명휘가 이를 갈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또 괘씸했다. 기껏 저를 위해 이곳까지 데려왔거늘. 감히 저가 뭐라고. 저따위가 뭐라고!

“부숴 버릴 것이다.”

“…….”

“짐이 차라리 갖지 못할 바엔. 부숴 버리고 말 것이다.”

“폐하.”

“그럼 저도 깨닫는 게 있겠지. 제가 무릎 꿇어 빌고 매달려야 할 이가 누구인지 그제야 알게 되겠지.”

그 옛날, 궤짝에 갇힌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걸 포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오겠지.”

악에 받친 황제의 말에 태감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분노에 물든 황제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오만하게도 황제가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는 게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법을 배운 적 없는 사람이기에.

“그리하면 되지 않겠느냐? 아니 그러하더냐?”

하지만 태감은 감히 입 밖으로 제 생각을 내뱉진 않았다. 지금 그 말을 꺼낸다 한들 황제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터였다.

“과연 그러하옵니다. 결국, 모든 것은 폐하의 뜻대로 될 것이옵니다.”

우르르 쾅. 다시금 천지를 뒤흔들며 천둥이 울렸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져 황제의 침전을 마구 두드려 댔다.

비에 젖은 태화 남방의 산하가 어스름한 미명에 물들기 시작했다. 날이 새도록 빗줄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 * *

그날 이후, 명휘는 한동안 수현을 찾지 않았다. 함께 찾아온 황제와 귀비가 따로 떨어져 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피서궁의 나인들만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피서궁에서의 마지막 날 밤이 되었다. 오늘은 성대한 연회가 있을 것이라고 수현은 장 상궁으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황제가 다시 도성으로 떠나기 전, 지방 관리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푸는 것이라고.

물론 연회에 수현도 참석해야 했다. 둘 사이가 껄끄럽기로서니 황실에 속한 사람으로서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빠질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길게 펼쳐진 주안상을 남방의 특산물이 가득 채웠다. 성대한 연회라고 했지만, 피서궁의 연회는 황궁에서 진행되는 연회와 규모가 달랐다. 황제와 귀비가 기나긴 상의 상석에 앉았고, 양쪽으로 신료가 자리를 채웠다.

그들은 대부분이 남방의 고위 지방 관리자였으나, 아닌 사람이 단 한 명 있었다. 바로 황제의 가장 가까이에 앉은 한 사람, 태주였다. 그는 관직자는 아니었으나, 황제의 특명을 받고 남방에 순찰을 와 있는 탓에 오랜 벗의 얼굴을 보고자, 겸사겸사하여 황제가 부른 것이었다.

“오황. 만세, 만세. 만만세.”

자리를 가득 채운 이들이 소리높여 황제를 칭송하자, 연회의 막이 올랐다. 아름다운 복장을 차려입은 무희들이 줄지어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남방은 본디 미색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남방에서도 제일간다는 음인들로만 구성된 무희들의 춤사위는 보는 이들이 넋을 놓게 하기 충분하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쩐지 신료의 시선은 무희가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수현이었다. 소문으로만 무성한 귀비를 실제로 볼 기회가 흔할 리 없는 터. 지금 아니면 구경조차 못 할 귀비를 두고 그들은 힐끔거리기에 그저 바빴다.

술잔이 오가고.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고.

명휘는 물론이고 연회에 참석한 이들 모두 술기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간신들은 귀한 제물을 황제께 바치며 온갖 아부를 늘어놓았다. 흥에 겨운 분위기는 계속되었고, 냉혹하기로 유명한 황제마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는 며칠 동안 얼굴조차 보지 않았던 귀비를 옆에 끼고 술잔을 건네며 은근히 손을 만지고 가는 허리를 휘감아 희롱하였다. 황제가 귀비를 만져 댈 때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대신들은 아래가 뜨끔뜨끔하였다. 저리 옥같이 고운 손을 저도 한번 만져 보면 좋을 텐데, 저 촛대같이 얇은 허릴 한번 끌어안아 봤으면 소원이 없을 텐데……. 그들의 은밀한 상상도 술기운처럼 점점 농익어 가고 있었다.

“폐하. 폐하의 은덕이 망극하니, 소신들은 영광, 또 영광이옵니다.”

“부디 폐하, 바라옵건대 만수무강하시어 천년만년 태화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간신들의 목소리가 간지럽다. 술에 취한 황제에게로 다가가 그들이 술병을 집어 든다.

“폐하, 소신이 한잔 올리겠나이다. 부디 받아 주시옵소서.”

백성들의 피를 짜 만든 곡주가 하얀 잔을 채운다. 투명한 액체를 가득 담은 잔을 들고 황제가 제 입술에 가져간다. 이미 취할 대로 취해 미각을 잃은 혀를 타고 알싸한 술이 넘어간다.

한창 무르익은 분위기에 기예를 선보이던 무희들이 춤사위를 멈추었다. 흥겨운 음악은 계속 흐르고 춤을 선보이던 음인들은 각자 상을 채운 신료의 사이에 껴 앉았다. 그들이 술상에 자리하자 안 그래도 은근히 달아올라 있던 신하들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반겼다.

“어디 한잔 따라보거라.”

술 시중을 드는 음인을 옆에 끼고 관리들은 온갖 희롱을 해 댔다. 술에 취해 음인을 끌어안고 팔뚝과 허벅지 살을 주물러 대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역한 양인의 체향이 흘러나왔다. 더러운 냄새가 연회장을 가득 뒤덮었다.

자리에 앉은 이 모두 익숙한 연회 분위기에 흥청망청하였으나, 태주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이 자리가 영 꺼림칙하게만 느껴졌다. 거북한 체향만으로도 역겨운데, 음인을 희롱하는 양인들의 손길은 더 못 봐줄 것 같았다.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왔지만, 그는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싫어했다. 누군가는 지배하고 누군가는 지배되어야 하는 세상, 그것은 그가 혐오하는 것 중 하나였다. 비록 그의 절친한 붕우가 그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황제라 할지라도…….

“공자님, 소인이 한 잔 올리겠나이다.”

태주의 옆에 앉은 음인 또한 자리에 있는 여러 음인처럼 술 시중을 자처하며 술을 권하였다. 이에 태주는 최대한 음인이 무안해하지 않을 만큼 예의를 갖춰서 정중하게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그는 술과 웃음을 파는 천한 음인일지라 하여도 절대 천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태주가 홀로 술잔을 들어 올리는데.

“…….”

불현듯 그의 시선에 귀비의 모습이 들어왔다. 

온갖 웃음을 섞어 아양을 떨어 대는 다른 음인들과는 달리 초연히 자릴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태주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감추고 있는 것 같은 눈. 조금도 웃지 않는 입술.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다워 감히 이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싶은데, 그 아름다운 얼굴이 무색하리만큼 그가 내보이는 감정은 너무도 쓸쓸한 것이었다.

떨어지는 꽃잎처럼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너무도 안쓰러워 그대로 손을 내밀고만 싶었다.

감히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분이기에. 저를 가장 아끼는 친우의 첩이었기에. 차마 무슨 일이냐, 물을 수조차 없었지만.

귀비를 향해 있던 시선이 조심스레 떠난다. 태주는 제가 든 잔을 보다 그대로 입안에 술을 털어 넣는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훑고 지나치는 순간, 머릿속엔 그날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왜 나를 다시 지옥으로 불러들였나요.’

“기태주.”

술에 취한 황제의 목소리가 태주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예, 폐하.”

굳어져 있던 얼굴을 풀고 그가 대답했다.

“어떠한가. 이곳에 도착해 자네도 남방 미인의 맛을 많이 보았는가.”

저속한 농지거리.

태주는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걸 참으며 애써 웃어 보였다. 상대는 명휘였다. 태화의 황제이자, 세상에 하나뿐인 저의 소중한 벗.

“폐하께 어찌 소인의 사사로운 사(事)를 다 고할 수 있겠나이까. 다만.”

“다만.”

“폐하께서 소인을 왜 이곳으로 보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나이다.”

재치 있는 농에 명휘가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두 사람 사이에 술잔이 한 번씩 오가고. 흥에 취한 명휘가 태주에게 일렀다.

“혹, 자네는 이 자리에 마음에 드는 이가 있는가.”

태주는 흠칫하였다.

“이리 남방에서 난다 긴다 하는 음인들이 즐비하니 자네의 눈에 드는 이가 없을까 해서 말이야.”

이에 태주가 고갤 숙였다. 잠시 어두운 그늘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주안상 위로 귀신이라도 지나친 듯 잠시 소란이 멎었다. 이제껏 은근히 태주를 힐끔대던 음인들이 숨죽여 주목하는 가운데 태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제나 그랬듯, 그가 소중한 벗을 위해 희미한 웃음을 내보였다.

“소인이 아직 그럴 경황이 없어.”

“아니지, 아니지.”

“폐하.”

“이렇게 좋은 날 짐이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

“말해 보아라. 짐이 자네에게 특별히 그 음인을 내줄 터이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음인들은 저마다 저가 선택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태주의 대답만을 다들 기다리는데.

“폐하의 말씀이 황송하기 그지없사오나 소인, 금일은 몹시도 피곤하여 폐하의 뜻을 받들기 어렵사옵니다. 폐하께선 부디 이를 헤아려 주시옵소서.”

태주의 태도는 완강했다. 감히 폐하의 명을 어기고서 살아남을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어찌한 일인지 명휘는 개의치 않아 했다. 태주의 성격상, 이리 대답하고도 남으리란 것을 예상했으므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명휘가 뜬금없이 태주 옆자리의 음인을 보며 물었다. 연회에 참석한 무희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터였다.

“소인, 백가성이라 하옵니다.”

“그래, 가성아.”

“예, 폐하.”

“오늘 밤, 네 옆의 공자님을 성심껏 모셔야 할 게야.”

황제의 명에 음인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른 이들이 은근히 질투의 눈빛을 보내는 와중에 가성이란 음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여부가 있겠나이까.”

태주는 명휘의 명이 당황스러웠으나, 여기서 더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인 것 같아 말을 아끼었다.

“이만 자리를 폐하노라.”

나름 태주를 생각해 짝을 정해 주고 명휘가 그리 선포하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신료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황은이 망극하나이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기 위해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신하들과 음인들, 악공들이 자리에서 물러나 발걸음을 옮기는데.

“기태주.”

다시금 명휘가 태주를 불렀다.

“오늘 밤은 늦었으니 피서궁에서 자고 가게. 자네와 자네에게 하사한 음인에게 근사한 침실을 내줄 터이니.”

“폐하, 그것이.”

무엇인가 대꾸하려던 태주는 황제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현과 눈이 마주쳐 버렸다. 순간 그는 곧장 입을 다물었다. 귀비마마도 있는데 황제의 체면을 깎아내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알겠사옵니다.”

하는 수 없이 답하는 태주를 보고 명휘는 꽤 흡족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렇게 태주가 마지막으로 황제와 귀비에게 인사를 올린 뒤 음인과 함께 연회장을 나섰다. 사람으로 북적하던 연회장에는 명휘와 수현, 단둘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한잔 따라 보거라.”

모두가 떠나 버린 주안상에 앉아 명휘가 수현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제 앞에 내밀어진 잔을 빤히 쳐다보다 수현이 입을 열었다.

“이미 밤이 깊었사옵니다. 더욱이 폐하께선 이미 만취하셨습니다.”

명휘가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비릿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이미 만취한 몸에 술 한 잔을 더한들, 무엇이 그리 해가 될까.”

더는 대꾸할 생각이 없었는지 수현이 술병을 잡아 들었다. 빈 잔을 청아한 향의 술이 채웠으나 명휘는 그것을 받아만 두고 마시진 않았다. 손에 든 술잔을 슬며시 돌려 가며 그가 비아냥거렸다.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더냐.”

“…….”

“남방의 난다 긴다 하는 음인들을 모아 놓았거늘 하나같이 그대만 쳐다보더구나. 이 어찌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수현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것을, 어찌 그리 미련하게 구는 것인지.”

또다시 시작된 황제의 심술은 수현에게 대답할 의지마저 상실케 하였다. 

그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대는 황제를 보며 입술만 짓씹는데, 난데없이 명휘가 빙그르르 웃어 보였다. 수현의 고개를 잡아 돌리고, 그가 눈을 바로 마주했다. 입 모양과 달리 일말의 웃음기도 없는 매서운 삼백안이 수현을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아니 그러한가? 그대에게 좆을 물릴 수 있는 사내는 오직 짐뿐인 것을.”

비소하는 명휘를 바라보며, 수현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 생각하십니까.”

뜻밖에 반문에 명휘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쳐 간다.

“무슨 소리더냐.”

“신첩이 평생 폐하만을 모셨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순간, 명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르릉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변했다.

“하면 아니란 말이냐.”

“폐하를 모시기 전, 신첩은 이미 사내의 양물을 본 적 있나이다.”

“……뭐라.”

“그뿐만이겠습니까? 사내의 양물을 입에 물고 빨며, 쏟아 내는 씨물을 받아 목구멍으로 삼켰나이다. 신첩이 폐하께 그랬듯. 밤새도록 사내의 가랑이 사이에 매달려서.”

순식간에 폭발하는 분노. 우악스러운 명휘의 손이 단번에 수현의 고운 얼굴을 상 위로 처박는다.

“흡!”

와장창. 음식과 술잔이 쏟아져 내리며 요란한 소리가 빈 연회장을 울렸다.

수현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도로 일으키더니, 명휘는 분노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시뻘겋게 핏줄이 선 눈동자가 이글거린다. 섬뜩한 그 눈빛에도 수현은 그저 초연한 얼굴로 일관한다.

“네놈이 실성한 게냐.”

“있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죽고 싶어 환장한 것일 테지.”

“말로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죽이시지 않으셨습니까.”

진심으로 죽고자 하는 말.

쾅! 다시 한번 수현의 얼굴이 상에 처박힌다. 분을 참지 못하고 명휘의 목소리가 마구 떨린다.

“네놈은 천한 흥청의 무희였지. 그래. 그리 천한 몸뚱이로 황실을 더럽히니 기분 좋더냐?”

“…….”

“말해 보아라. 고작 그 나이에. 사내들 좆이나 빨면서. 얼마나 기분 좋았는지 말해 보란 말이다.”

명휘가 수현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렸다. 상에 부딪친 높은 콧대가 잘못되었는지 그의 콧구멍에서 새빨간 피가 한 줄기 흘러나왔다.

“말해.”

“…….”

“말하란 말이야.”

“…….”

“말하라고!”

명휘가 수현의 머리채를 잡고 뒤흔들었다. 온통 시야가 흐려져 머릿속이 희미한 가운데, 수현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흘렀다.

“……지 않습니까.”

들릴 듯 말 듯 간신히 이어지는 목소리.

“이미 폐하께선…… 신첩의 답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매서운 삼백안이 정처 없이 흔들린다.

“음인인 제게…… 양인의 씨물만큼…… 맛있는 것이 또 있겠습니까.”

“…….”

“폐하의 것을 받아먹을 때만큼.”

“…….”

“딱 그만큼…… 황홀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불덩이가 되어 명휘의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우당당탕. 수현의 몸이 상 위를 뒹군다. 발칙한 음인을 상 위에 던지고 명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냐. 정녕 네 죽는 것이 소원이라면, 이 자리에서 죽여 주마.”

화기로 뒤덮인 얼굴이 시뻘겋다. 피로 물든 인중과 입술, 턱. 그 모두를 훑은 황제가 그대로 수현의 몸 위로 올라탄다.

어두운 방 안에 등불만이 희미했다. 

음인과 마주 앉은 태주는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기름 타들어 가는 소리만 자글자글한대, 침묵은 너무도 무거웠다. 

“공자님. 한 잔 더 하시렵니까.”

무거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음인을 술을 권하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태주는 거절하였다. 그는 그저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공자님께선.”

“……?”

“왜 소인을 취하려 하지 않으십니까.”

음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껏 저와 침방에 들어 이리 점잔 떠는 양인은 본 적 없기에. 

“혹, 소인이 별로이신 겁니까. 아니면 향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이에 태주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뜻하지 않게 음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나 싶어 그가 다정스러운 목소리로 답하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단지.”

“단지…….”

“이런 것이 낯설어서 그렇습니다. 절대 임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것이 아니니, 심려치 마시지요.”

괜히 믿고 싶어지는 목소리. 예의상 한 말일지라도 음인은 어쩐지 그의 말이 진심이라 믿고 싶어졌다. 이토록 근사한 목소리로 저를 달래는 양인을 만나 본 적 없기에.

“공자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오나 공자님께서 저를 취하지 않으신다면, 이는 소인의 흠이 될 터. 아침에 해가 밝아 오면 소인은 어떤 얼굴을 하고 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

“폐하께 임자의 정성을 충분히 말씀드릴 터이니, 분명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태주의 말에 음인은 크게 안심하였다. 황제가 친히 잘 모시라 명한 터라, 정작 모시지 못하였다는 얘기라도 돌면 제 목이 나가떨어질 수도 있었다. 한데, 공자님께서 친히 하룻밤을 보내었다고 말씀해 주겠다 하시니 이 어찌 안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한 시진 정도가 지난 것 같군요.”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공자님…….”

“먼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시겠습니까.”

태주가 상 위로 적당한 화대를 내려 두었다. 

“소인은 한 것이 없으니 화대는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저 때문에 시간을 버리게 되셨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하오나.”

우물쭈물, 더는 말을 잇지 못하는 음인을 두고 태주가 서방의 방식대로 인사했다. 음인의 얼굴이 그새 붉어졌다. 서방의 의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이가 한쪽 팔을 뒤로 두른 채 허릴 숙여 인사해 오는 모습이 어찌나 멋있던지. 

“공자님께선 언제 장안으로 떠나시는지요.”

“아직 정해진 것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연이 된다면 공자님과 다시 뵙길 바랍니다.”

“연이 있다면 그렇게 되겠지요.”

그렇게 태주가 방을 나섰다. 태주가 떠난 방. 붉게 달아오른 음인의 얼굴은 여전히 가라앉을 줄 몰랐다. 태주가 남긴 박하 향의 알싸함을 느끼며 그가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침방을 나와 태주는 피서궁의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벽,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뾰족한 초승달만 오도카니 떠 있고, 어두운 길을 밝힌 작은 등불들은 마치 별처럼 길목, 길목을 밝혀 주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길을 걸으면서도 어쩐지 태주의 눈엔 그 예쁜 것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같은 이의 얼굴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슬픔을 집어삼킨 듯한 눈을 가진 음인. 황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서도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귀비의 얼굴만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처음엔 단지 궁금했다. 어째서 제게 지옥으로 불러들였냐고 물어본 것인지 그 이유가 궁금해서. 하지만 단순한 호기심은 점점 그의 마음을 잡아끌게 했고, 또다시 마주한 그의 슬픈 표정은 의문을 넘어서 어떤 또 다른 감정을 느끼게 했다.

‘연민. 그렇게 말하면 비슷하려나.’

연회에 앉아 있던 그 긴 시간 동안. 그리고 연회가 끝난 후부터 지금까지, 태주는 저의 감정을 그렇게 정의하였다. 연민이라고.

아마도 귀비가 그리 슬퍼 보이는 이유는, 그가 옛 성해의 왕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황제의 후궁으로 사는 것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행복한 것만은 아닐지 모른다. 사람들은 간혹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그 근거 없는 믿음을 퍼뜨리곤 하니까.

그래서 그가 이해되기도 하였다. 만약 저가 귀비의 처지였더라도 그리했을 터였다. 어찌 가족을 몰살시키고 제 왕국을 무너뜨린 이와 동침을 할 수 있겠는가. 무슨 이유로 후궁의 자릴 받아들였을지는 몰라도,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옥을 감수하고라도 궁에 남은 이유이겠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태주는 문득 저가 있는 곳이 어딘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어느덧 연회장으로 향하는 돌담길에 당도한 것이다. 어서 출구를 향해 가야 하는데, 어찌한 일인지 그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땅속에서 무언가가 저의 발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왜 이런 기분인지를 몰라 태주가 당황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바람을 타고 어떠한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전해졌다. 그것은 정확하진 않았으나 듣기 좋은 소린 아니었다. 귀신 소리 같기도 했고, 짐승이 우짖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을 때, 태주는 어떠한 확신이 들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연회장 쪽이라는 확신이.

무엇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연회장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의 실체는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이것은 사람의 목소리다. 사지가 찢겨 나가는 괴로움에 처절히 몸부림치는 그런 한이 맺힌 소리다.

연회장으로 이용되었던 누각에 가까워질수록 태주의 얼굴은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울부짖는 기분 나쁜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숨 막히는 사향. 사람의 목숨을 끊고자 살기를 담은 지독한 사향이 사방에 진동하던 터였다.

등불이 밝힌 길을 따라 길게 그림자가 늘어졌다. 양인의 발끝에서 시작된 그림자의 머리가 기어이 누각의 끄트머리에 걸쳐진다. 굳은 얼굴로 태주가 누각 앞에 선다. 감히 들여다 봐선 안 될 것 같은 그곳으로…… 태주의 시선이 꽂힌다.

“……!”

순간, 태주의 얼굴에 경련이 일기 시작한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에 경악스러움이 떠오른다. 동공이 있는 대로 팽창하고 정처 없이 흔들린다. 조금씩 떨리던 입술에서 기어코 탄식이 새어 나온다.

상 위에 아무렇게나 누운 귀비는 몸을 늘어뜨린 채 황제를 받아 내고 있었다. 양인인 태주조차도 견디기 힘든 사향에 갇힌 그의 얼굴은 온통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엔 피가 흥건하였고, 턱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상위로 고여 들었다. 

터져 나오는 비명만 아니었다면 그가 죽은 것은 아닐지 의심했을 거였다. 실로 살아 있는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죽은 이보다 더한 몰골이었으니까.

황제는, 귀비 위에 올라탄 황제는 늘어진 귀비의 두 가랑이 사이에서 미친 사람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내뿜는 체향만큼이나 광기로 가득한 눈빛을 띤 채, 옷조차 온전히 벗지 못해 앞섶을 풀어헤치고 거대한 가슴근육을 씰룩인다.

제 좆을 귀비한테 틀어박는 와중에도 우악스러운 손길로 귀비의 입아귀를 잡아 벌린다. 피로 얼룩진 입술이 벌어지고 황제가 그 안으로 침을 뱉는다. 괴로워하며 뒤트는 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마구 흔든다.

하릴없이 흔들리는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 황제는 두 손으로 그 가는 목을 졸라 댄다. 거친 허리 짓을 따라 졸라맨 손아귀에 힘이 더 거세진다.

“아아윽!”

비명이 또 한 번 어둠을 가르고.

격분한 황제가 수현의 몸통을 들어 올린다. 상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제 것을 꽂아 넣으며 수현의 몸을 잡아 흔든다. 

“커억!”

넘쳐 나는 분노를 배설하듯 황제가 사정한다. 그가 온몸을 경련하듯 떨어 대며 욕망을 배출해 내는 동안 수현의 몸이 또한 함께 흔들린다.

허공에 붕 뜬 손이 애처롭게 파닥이고, 수현은 입으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사정을 끝낸 황제가 수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물어뜯는 동안 수현의 몸이 늘어진다. 뒤로 고갤 꺾은채 제 허릴 잡은 명휘의 팔에 의지해 시체처럼 상체를 늘어뜨린다. 긴 머리카락처럼 두 팔도 함께 늘어지고…… 생기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눈이 허공을 향한다.

일순, 수현의 몸을 먹어 치우던 황제가 시선을 들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태주를 바라본다. 그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태주와 시선을 마주한다.

광기에 사로잡혀 이성을 완전히 지워 버린 눈빛.

미동조차 하지 않는 태주를 바라보며 명휘는 계속해서 수현의 몸을 물어뜯는다. 사정을 끝냈음에도 그는 여전히 하반신을 수현 안에 꽂아 넣은 채였다. 마치, 갓 잡은 작은 동물을 먹어 치우는 포식자인 양…….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눈빛을 보며 태주는 꼼짝하지 않았다. 걷는 법을 까먹기라도 한 사람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눈앞에 놓인 이 기가 막힌 상황에 충격받아서만은 아니었다. 기가 막힌 꼴을 한 황제 때문도, 두 사람의 정신 나간 정사 장면 때문도 아니었다.

그를 붙잡고 있는 건, 그를 자리에 묶어 둔 것은 다름 아닌 수현이었다. 

수현은 웃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웃고 있었다. 

시체 같은 몰골로 제 몸을 황제에게 내주곤 죽을 듯이 괴로워했으면서 그는 또 웃고 있었다. 마치 가까워지는 죽음이 제겐 행복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제 몸을 갉아 먹는 황제를 느끼며 웃고 있었다.

왜 나를 다시 지옥으로 불러들였나요.

왜 나를.

다시.

지옥으로.

불러들였나요…….

피 칠갑을 한 채로 눈앞에 웃음 짓는 귀비를 보면서, 태주는 그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오래도록 태주는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평생 잊지 못할 그 모습을 망막에 새겨 넣는 중에도 그의 심장은 뜨거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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