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여름으로 가는 길목, 아침부터 매우 무더운 날이었다.
조례가 끝난 시각, 명휘는 양심전에 있었다. 아직 다 못 끝낸 정사를 돌보기 위해 상서(上書)를 살펴보던 그의 행동이 멎은 것은 얇은 문을 두고 들려오는 태감의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폐하, 기태주가 폐하를 뵙기를 청하옵나이다.”
오랜 붕우의 방문에 명휘는 들고 있던 종이 두루마리를 내려 두었다. 안개처럼 그윽한 목소리로 그가 답하였다.
“들라 일러라.”
이윽고 문이 열리고 또 한 명의 미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서방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사람답게 태주는 보기 드문 서방식 의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양쪽 어깨에는 금색의 술이 달린 견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금실로 장식된 검은색 의복은 허리띠로 꽉 잡아매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선을 한껏 도드라지게 하고 있었다.
격식을 차린 딱딱한 의상과 달리, 그의 얼굴은 따뜻한 기운이 넘쳐 났다. 커다란 눈은 끝이 살짝 처져 한없이 다정해 보였으며, 서방식으로 짧게 자른 곱슬곱슬한 머리는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는 입은 의복에 맞게 한쪽 팔로만 뒷짐을 쥔 채 고갤 숙여 황제에게 예를 차렸다. 명휘는 웃음으로 그에게 답했다. 보기 드문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어서 오게.”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보다시피.”
태주와는 꽤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다. 수현과의 혼례식에서 하객으로 참석한 그를 잠시 보았던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뭐 하는가. 어서 이리 와 앉게.”
명휘가 맞은편의 자리를 가리켰다. 태주는 그가 가리키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어쩐 일로 소인을 부르셨는지요.”
“짐이 자네와 일이 있어야 보는 사이였던가.”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인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농담도.”
황제를 대하는 태주의 말투는 다른 이들과 다르게 편안함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황제와 오래 두고 사귄 벗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때문이었으리라.
“그래, 자네는 그간 어떻게 지냈는가.”
“한량에게 딱히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밥 굶지 않고 되는 대로 지냈지요.”
“자네는 정말 여전하군. 항상 여유가 넘쳐.”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의 얼굴에 햇살 같은 미소가 드리웠다. 농담처럼 주고받은 대화가 어렸을 적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일까.
명휘는 그랬다. 만백성을 호령하며 늘 차가운 성정을 유지해야 하는 자신이었지만, 태주 앞에서는 아니었다. 태주는 늘 정다웠고, 같은 자리에서 저를 바라봐 주었다. 황제가 되었다고 굽실거리지도 않았고, 차갑게 변모해 버린 저를 경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늘 같은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 언제나 한자리에 있는 사람. 그것이 오랜 벗 이상으로 명휘가 태주를 아끼는 이유였다.
“참. 그건 그렇고.”
긴 미소 끝에 명휘가 진지한 얼굴을 해 보였다. 말로는 아니라고 했으나 필시 태주에게 용무가 있던 터, 그는 오랜 친구이자 견문이 넓은 이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던 것이다.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데…….”
그때.
“폐하.”
다시 한번 문밖에서 태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독군어사 장뢰가 폐하를 뵙기를 청하옵니다. 기다리라 이르나이까.”
“아니다. 들라 일러라.”
명휘의 답에 태주의 얼굴엔 의아함이 스쳤다.
“예, 들라 이르겠나이다.”
곧 문이 열리고 온몸을 무장한 갑옷 위로 피풍(披風)을 두른 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장뢰가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는다. 한 팔을 들어 올리곤 고갤 조아린다. 쩌렁쩌렁, 기백이 넘치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진다.
“독군어사 장뢰, 폐하를 뵙습니다.”
명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황제다운 근엄한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온다.
“그간 노고가 많았노라.”
“황송하옵니다.”
“그래, 이리 와 앉거라.”
명휘는 저와 태주가 앉은 탁자의 남은 자릴 가리키며 말했다. 이를 보곤 장뢰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한낱 독군어사 따위인 제가 황제와 동석을 하다니.
“무얼 하느냐.”
하지만 이 또한 황제의 명, 어기는 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잠자코 남은 의자로 가 앉았다. 그가 황제와 마주 앉은 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니, 연이어 황제가 말했다.
“기씨 가문의 장남, 태주일세.”
기씨 가문이라면 장안에 가장 큰 상단을 소유한 집안이었다. 태화에서 황실 다음으로 가장 돈이 많다는 소문이 자자한 집안.
예로부터 그 집안과 황실에 친분이 있다는 건 익히 들어 온바, 장뢰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이리 갑작스레 기씨 집안의 장남과 마주하게 될 날이 올지는 몰랐지만.
“독군어사 장뢰라고 합니다.”
왕이 친히 아끼는 이에게 장뢰가 먼저 통성명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이에 태주는 특유의 다정한 표정과 함께 답했다.
“반갑습니다. 기태주입니다.”
통성명을 끝낸 장뢰가 조심스레 황제에게 아뢰었다.
“두 분이 얘길 나누시는데. 미천한 소신이 자리해도 되는 것인지요.”
“아니다. 자네와 함께할 얘기가 있어 부른 것이니.”
태주와 장뢰의 얼굴에 동시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다름 아닌, 남방의 문제 때문일세.”
황제가 빙긋 웃어 보였다. 뜻 모를 황제의 웃음을 보며 두 사람의 의문만 더욱 깊어졌다.
* * *
화창한 정오의 영화궁. 수현은 침전에서 몇몇 궁인을 곁에 두고 홀로 식사하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정적이 느껴지는 곳에서 오로지 식기에 부딪는 수저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참으로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마?”
영화궁의 정적을 깨뜨린 것은 장 상궁의 목소리였다. 장 상궁은 식사를 멈춘 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상전의 모습에 놀란 모양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또 현기증이 돋은 것입니까.”
걱정스레 물어보는 말에 수현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은 안색이 좋지 못했다.
“아닙니다.”
“마마, 안색이 좋질 않습니다. 요즘 들어 자주 이러시니, 소인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떨리는 손으로 물 잔을 쥔 수현이 메마른 입술을 냉수로 축였다. 요즘 제 몸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갑갑했건만, 지금도 가슴이 꽉 막힌 듯 숨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고 그가 애써 호흡을 내쉬었다.
“마마…… 태의를 들라 이르나이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하오나.”
“상을 그만 물려 주세요.”
“마마…….”
“피곤해서 그런 것뿐이니, 물려 주세요.”
밥은 반절도 먹지 않았으면서, 귀비는 밥상을 물리라 하였다. 요즘 들어 통 먹질 못하시니 장 상궁의 걱정은 깊어만 갔다.
매일같이 시침을 드는 것도 못 견딜 일인데, 저리 먹지도 못하시니 병이라도 든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어서요.”
수현이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장 상궁이 입을 열었다.
“치우거라.”
몇몇 아이가 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네들이 음식이 남은 쟁반을 들고 나가는 동안, 수현은 여전히 가슴을 부여잡고 호흡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마마, 향을 피우겠나이다.”
태의도 밥도 싫다며 도무지 제 몸을 돌보지 않는 귀비를 위해 장 상궁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력을 돋운다는 향초를 태우는 것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귀비도 황후가 선물해 준 향초를 점차 좋아하게 되었다. 향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몸이 나른해지고 편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장 상궁은 그녀의 상전을 위해 항상 향초를 피웠다.
오죽하면 황후가 선물한 향초가 얼마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
“마마, 괜찮사옵니까.”
향초를 태워 방 안에 향기를 퍼뜨리며 장 상궁이 물었다.
수현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도 못 했다. 평소 좋아하는 향냄새를 맡아도 몸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그저 떨리는 손으로 가슴 편에 옷을 꽉 부여잡고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태의를 들라…….”
“아니요.”
수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놀란 장 상궁이 달려와 부축하였지만, 수현은 그마저도 뿌리쳤다.
“아마 침전에만 있어 공기가 탁해서 그런가 봅니다.”
“하오면.”
“잠시 산책을 다녀오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하시겠습니까.”
“네, 잠시 영화궁 화원을 돌다 오기로 하지요.”
“예, 마마.”
수현의 말에 궁인들이 다가와 그의 단장을 도왔다. 아무리 검소하고 저를 꾸미는 데 소홀히 하는 귀비라 할지라도, 보는 눈이 많은 이곳에선 최소한의 단장이라도 해야 했다. 그것이 궐의 법도였으니까.
“마마, 소인이 모시겠나이다.”
그렇게 수현은 장 상궁과 함께 화원으로 향하였다.
태화 황궁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영화궁의 화원은 갖가지 초여름 꽃으로 장식한 채 아름답게 단장해 있었다. 볕은 뜨거웠으나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화원을 둘러 흐르는 연못은 햇빛을 담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확실히 침전 밖으로 나오니 숨이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수현은 어려서부터 늘 그랬다. 자연의 속에 있으면 좋았고, 예쁜 꽃과 나무를 보면 행복했다. 푸르른 잎도, 마음을 달래 주는 바람도,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도 하나같이 사랑스러웠다. 이젠 그나마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지만…….
“마마, 이제 좀 괜찮으시나이까.”
“네, 걸으니 한결 나아진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너무 마음을 놓았던 덕분일까? 수현은 화원을 벗어나 더 먼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궁 안의 구조에 밝지 못한 그였기에, 낯선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그런 수현을 두고 장 상궁은 걱정이 앞섰다.
“마마, 너무 멀리 가는 것이 아니온지요.”
“아…… 그러합니까?”
“예, 이곳은 궁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아니옵니다. 이제 그만 발걸음을 돌리시지요.”
장 상궁의 말대로 수현이 향하고 있는 곳은 궁의 가장 외진 곳이었다. 가꾸어지지 않아 풀이 무성하고, 다 으스러져 가는 폐궁이 자리한 곳.
“마마.”
하지만 어쩐지 수현은 쉽게 발을 돌리지 않았다. 불현듯 그의 시야를 붙잡은 것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강렬한 색의 꽃이었다. 사람을 홀릴 양 붉게 피어난 꽃.
수현은 처음 보는 꽃이었다. 마치 찻잔처럼 얇은 꽃잎이 둥글게 모여 있는 그 꽃은 생김새로만 보아서는 단아했으나, 붉은색 덕분인지 묘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강한 색 덕분이었을까? 수현은 꽃이 잔뜩 모여 일궈진 꽃밭으로 어느새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마마!”
장 상궁이 걱정스레 그를 붙잡았다.
“마마, 이제 그만 영화궁으로 돌아가소서. 여긴 위험하옵니다.”
“태화의 궁 안에 어디 위험하지 않은 곳이 있었습니까.”
“하오나.”
“괜찮습니다. 저 꽃이 마음에 들어 잠시 보고 와야겠습니다.”
“아니 됩니다. 저 꽃이 마음에 드시오면, 아이들을 시켜 꺾어 오라 이르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괜히 꽃을 꺾다니요. 저 혼자 보고 올 터이니, 장 상궁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하오나, 마마…….”
장 상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 상궁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폐궁에 피어난 붉은 꽃이라니,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제라도 제발 마마가 마음을 돌렸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그녀의 말을 들어 먹을 귀비가 아니지 않던가.
장 상궁의 속은 타들어 가는데 수현의 발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렇게 그가 혼자서 붉은 꽃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데.
“마마!”
일순, 멀쩡하던 수현의 몸이 휘청이더니 바닥을 향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마! 귀비마마!”
놀란 장 상궁이 달려가 그를 바닥에서 일으켰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마마!”
품에 안아 흔들며 장 상궁이 소리쳤다. 하지만 간절한 그네의 마음과 달리 수현은 미동조차 없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엔 땀이 잔뜩 맺혀 있고 입술조차 파랗게 질렸다. 덜컥, 장 상궁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마마…….”
장 상궁은 어떻게 해서든 그를 안고 일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궐 안에서 뼈가 굵은 그녀라 할지라도, 의식이 없는 장신의 성인 남성을 혼자서 안아 드는 것은 무리였다. 수현을 안은 채로는 몸조차 일으킬 수 없던 것이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그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수현을 혼자 두고 사람들을 불러오자니,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고, 그렇다고 혼자서 옮기자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저보다 머리통은 하나 더 큰 수현을 끌어안고 어찌할 줄을 몰라 그저 울먹이기 시작했다. 외진 곳이라 지나치는 이도 없건만…….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 갔다. 그런 와중에도 정신을 잃은 상전은 꼼짝조차 하지 않았다.
“마마. 제발…… 마마…… 눈 좀 떠 보십시오. 마마…….”
그렇게 장 상궁이 대답 없는 이를 붙들고 한참 애원하고 있던 그때.
“거기, 무슨 일인가요.”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상궁은 놀라 퍼뜩 고개를 추어올렸다. 수현을 안은 상태에서 뒤돌아 올려 보니, 건장한 남성 하나가 햇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검은색 양복을 차려입은 짧은 머리에 장 상궁은 단번에 그가 황제가 그리 아낀다는 벗임을 알 수 있었다.
“공, 공자님.”
원래대로라면 태주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 옳으나, 장 상궁은 수현을 안고 있어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급한 대로 수현을 끌어안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소인은 영화궁의 귀비마마를 모시는 장 상궁이라 하옵니다.”
장 상궁의 말을 듣고 태주는 곧장 머릿속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귀비마마라면, 얼마 전 명휘와 혼례를 치른 분이 아니시던가.’
혼례식 때 신부는 붉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기 때문에, 얼굴은 알지 못하는 그였다.
“네, 그러한데 어찌.”
“귀비마마께서 산책 중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이리도 애를 먹고 있습니다.”
“귀비마마께서요?”
“네, 갑자기 이리 정신을 잃고 쓰러지시는 바람에.”
장 상궁의 말을 듣고 그가 상체를 낮춰 쓰러진 이의 모습을 살피었다. 두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정신을 잃어서인지 그때만큼 대단한 색향은 뿜어져 나오고 있지 않았으나, 그런 와중에도 미색만큼은 대단했다.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불리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얼굴이었다.
“비켜 보시겠습니까?”
귀한 집안의 자제라고는 믿기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 장 상궁이 놀라며 대꾸한다.
“예?”
“제가 귀비마마를 처소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하, 하오나. 그것이…….”
장 상궁은 망설였다. 아무리 황제와 친분이 있는 이라지만, 귀비마마가 외간 남자의 손을 타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금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도와주겠다는 이의 손길을 물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마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 수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태의에게 모셔 가야 했다. 태주의 도움이 절실했다.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망설이는 장 상궁을 보며 귀공자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서방에서 오래 머물러 있던 터라 쓸데없는 황실의 예법보다 당장 쓰러져 있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여겼던 그였다.
“장 상궁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민 끝에 장 상궁이 비켜났다. 일어선 장 상궁을 대신해 태주가 쓰러진 수현을 안아 들었다. 두 팔로 수현을 받치고 일어난 그는 수현이 꽤 장신임에도 생각보다 가벼워 크게 놀랐다.
‘대체 얼마나 몸을 돌보지 않았으면.’
그렇게 태주가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
몇 걸음도 가지 않아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제가 안아 든 귀비를 내려다보았다.
두 눈을 곱게 감은 얼굴은 핏기가 가셔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옷깃 위로 드러난 목에는 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목이 졸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목에 있는 멍도 멍이었지만, 그가 단지 그것 때문에 발걸음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희미하게나마 수현의 몸에 밴 어떤 냄새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이 아는 냄새가 맞다면, 이건…….
“왜 그러십니까, 공자님.”
한시가 급해 죽겠는데, 갑자기 자리에 우뚝 선 태주를 보고 장 상궁이 애가 타 물었다.
태주는 그런 장 상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뒤를 돌아 수현이 쓰러져 있던 곳을 살펴보았다. 궐 안에서 유일하게 버려진 폐궁, 그리고 그 앞에 자리한 붉은 꽃밭이 눈에 보였다.
“혹시, 마마께서 이곳에 자주 오셨습니까?”
“예?”
“귀비마마가 이곳에 자주 오셨는지 물었습니다.”
“아, 아닙니다. 오늘 처음 오신 곳입니다.”
장 상궁의 말을 듣고 태주는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공자님…….”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역시도 한시가 급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먼저 앞서시지요.”
궐의 내부 구조를 잘 알지 못하는 태주를 위해 장 상궁이 종종걸음으로 영화궁까지 앞장섰다.
이윽고 도착한 영화궁에서 태주가 그를 침상에 눕히는 동안, 장 상궁은 아랫것에게 태의를 모셔 오라 일렀다.
쓰러진 상전을 본 나인들은 놀라 벌벌 떨면서도 한시가 급하다는 장 상궁의 으름장에 퍼뜩 놀라 달려가 버렸다.
“공자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수현을 침상에 눕힌 태주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 상궁의 인사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는 방 안을 살피며 한쪽으로 향했다.
“공자님?”
함부로 귀비의 처소를 휘젓는 무례함에 장 상궁이 의아한 듯 물었으나 여전히 태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방 한구석에 놓인 향로를 유심히 살펴보다 남은 재를 손으로 훑어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
“언제부터 이것을 피웠습니까.”
장 상궁은 그의 의도를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음에 답을 하면서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꽤 되었습니다. 전에 수방재에서 연희가 있기 전에 황후마마께 받은 것이니. 대략 계산해 보면…….”
일순, 귀공자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가 장 상궁의 말을 가로채며 끼어들었다.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예, 예?”
“황후마마께서 보내셨다 하였습니까?”
“아, 예. 그렇습니다.”
“이 향로를 분명, 황후마마가 보내셨단 말이지요?”
“예.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때 문밖에서 들려온 음성이 두 사람의 말을 가로막았다.
“상궁 마마님, 태의를 모셔 왔습니다!”
이윽고 태의가 다급하게 방 안에 들어섰다. 어찌나 달렸는지, 잔뜩 어깻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찌 된 것입니까.”
“오늘 갑자기 산책 도중에 쓰러지셨나이다.”
“산책 도중에요?”
“예, 그전에 현기증이 난다 하시고선 나가셨는데…….”
침상으로 간 태의가 수현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안색을 보고 맥을 짚으며 그렇게 한참을 살피는데.
“몽환화(夢幻花) 때문입니다.”
태의의 뒤에 서서 태주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마마께선 몽환화에 중독되셨습니다.”
“그, 그 무슨.”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 몽환화 때문에 그리된 것일 테니.”
그의 말에 태의가 서둘러 수현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태주의 말을 듣고 설마 했으나, 더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이 틀림없었다.
수현은 중독되어 있었다. 음인들에게 치명적이라는 그 독초에.
수현이 몽환화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은 태의뿐만 아니라 장 상궁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몽, 몽환화라 하심은…… 태화에서 자취를 감춘 독초가 아니옵니까……. 그런데 어찌 귀비마마께서…….”
그녀도 몽환화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어 알고 있었다.
유독 음인들에게만 반응하는 악마의 꽃이 있더랬다.
그 꽃잎을 빻아 말려 불에 태워 연기를 들이마시면, 음인은 몽롱하게 꿈을 꾸는 듯한 환각을 느낀다 하였다. 그것은 그 어떤 때보다도 황홀한 기분을 주어서 한번 맛 들인 음인은 계속 찾게 된다 하였다.
그 중독성만큼이나 무서운 꽃은 연기는 들이마시는 동안 음인의 몸을 파괴하고 기를 말리게 했다.
하지만 그 꽃이 주는 황홀감이 너무나도 자극적인 데다 중독성이 강해, 음인들은 저의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계속 꽃의 연기를 찾았다.
하여, 지난 시절 동안 몽환화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임없었다. 권세가에서는 음인을 성 노리개로 쓰기 위해 몽환화를 계속 권유했고, 수많은 음인들이 이 악마의 연기에 중독되어 죽어 나갔다.
태화에서 몽환화를 금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음인은 형질 중에서도 가장 귀한 형질이었기에, 이대로 그 개체 수가 줄어드는 꼴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 나라에서만큼은 몽환화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그랬는데.
“저는 서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지냈기에. 몽환화의 생김새와 냄새를 알고 있습니다.”
태화와 달리 서방에선 여전히 몽환화를 허용하는 나라가 많았다.
“그럼…….”
“네. 아까 폐궁에서 보았던 꽃이 바로 몽환화입니다.”
“그, 그런.”
“그리고.”
“…….”
“귀비마마의 처소에 있던 향로에 꽂혀 있던 향초의 향 역시.”
“……설마.”
“몽환화의 향이었습니다.”
털썩, 장 상궁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 말도 안 돼. 어찌…… 어찌…… 그런 일이.”
장 상궁의 목소리가 마구 떨리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소인이…… 소인이…… 마마께 향로를 직접…….”
그런 그녀에게 태주가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시선으로 태주를 바라보는 장 상궁을 향하여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장 상궁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오나…….”
“자책하지 마세요. 장 상궁님도 모르고 그리한 것뿐이니.”
“…….”
“지금은 귀비마마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이 우선입니다.”
“……공자님.”
그 따뜻한 말이 장 상궁에게 힘을 불러일으켜 줬다. 그녀는 태주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눈물이 차오르는 가운데 마음을 다잡고 애써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럼, 치료할 방도가 있는 것입니까.”
그녀의 물음에 어쩐지 태의는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의 안색은 수현만큼이나 어둡게 변해 가고 있었다.
“몽환화에 듣는 약재가 있긴 하오나, 궁에는 없습니다.”
“하면. 어디서 그것을 구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것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태의를 보다, 대신 태주가 말을 이었다.
“서방에서 구할 수 있을 테지요.”
일순, 장 상궁이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말이 정말입니까?”
다급히 묻는 장 상궁의 말에 태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태화에서는 정녕 구할 수 없단 말입니까.”
“아무래도 오래전에 몽환화가 금지되었다 보니…….”
“한시가 급한데 어찌 서방으로부터 약재를 구해 온단 말입니까?”
태의가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어 버렸다.
속이 타들어 가는 장 상궁은 이 참담한 지경을 두고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탄식하였다.
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만 같아 이리도 죄스러운데, 병을 고칠 약재 또한 먼 곳에서 찾아야 한다니 눈앞이 깜깜했다. 이러다 마마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리 된다면…….
“지금 있는 약재로,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순 있는지요.”
태주가 조심스레 물었다.
“당분간만이라면 어찌 막아 볼 수 있을 듯하온데…….”
“얼마나 시간을 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나흘에서 닷새 정도까지는.”
“닷새라…….”
태주가 속으로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닷새로는 서방을 다녀오기에 턱없이 모자란 시간이었다. 몇 달이 걸려도 다녀오기 힘든 곳이 서방이었다.
하나, 닷새 안에 약재를 구해 오지 못한다면, 분명 수현의 몸은 되돌릴 수 없게 될 것이다.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찌해야 귀비마마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단 말인가.’
“우선 몽환화에 듣는 약재가 무엇인지 제게 알려 주십시오.”
“공자님.”
“제가 어떻게든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해 봐야지요, 어떻게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장 상궁의 얼굴은 더욱 시퍼렇게 질려 가고 있었다.
귀비마마가 이리된 것이 저의 잘못인 것만 같아 죄스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지한 저를 탓한다고 달라질 일이 아닌데도.
“차라리, 차라리 미천한 이 몸이 대신 아프면 좋았을 것을…….”
다시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갓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궐에 들어와 온갖 모진 일을 당하면서도 기어코 버텨 내던 수현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간 있었던 일을 곁에서 봐 온 이만이 느낄 수 있는 비통함이었다.
“저는 당장 약재를 구하러 떠나 보겠습니다.”
태주가 자리에서 돌아섰다.
“장 상궁님.”
눈물을 훔치며 장 상궁이 그를 따라나섰다. 문 앞에 서서, 방을 나서려는 태주를 그녀가 배웅했다.
“저는 한시가 급하여 먼저 떠나오니, 장 상궁님은 폐하께 이 일을 명확히 아뢰어 주십시오.”
“네, 소인 그러하겠습니다.”
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님,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희 마마를 살릴 수 있는 약재를 찾아내 주십시오.”
“그럼, 귀비마마를 잘 부탁드립니다.”
잔뜩 눈물 젖은 얼굴로 장 상궁이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 태주가 방을 나섰다. 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장 상궁이 돌아선다.
영화궁이 온통 침울함에 잠겨 들었다.
* * *
저녁 늦은 시각. 명휘의 앞에 자리한 태감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뭐라 하였느냐.”
“폐하, 그것이…….”
“네 지금 뭐라 지껄였느냐. 다시 말해 보거라.”
꿀꺽.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태감이 다시금 폭군을 향해 고하였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영화궁의 귀비마마께서 몽환화에 중독되어 위태하다 하십니다.”
“…….”
“폐하.”
쾅. 명휘의 주먹이 탁자를 거세게 내리쳤다. 분노에 찬 황제의 얼굴이 한없이 일그러지는데, 죄 없는 태감만 옆에서 벌벌 떨며 계속해서 고갤 조아렸다. 또 한 번 불어닥칠 피바람에 벌써부터 사지가 떨려 와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몽환화라 하였느냐.”
더없이 낮은 목소리로 명휘가 물었다.
“예, 폐하.”
“몽환화라면, 선황께서 씨를 말리라 이르셨던 꽃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한데, 그것이 어찌 귀비를 중독시킬 수 있단 말이더냐.”
“그것이…….”
이제껏 겨우 버텨 내던 태감은 결국,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차마 다음의 말은 폐하께 아뢰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폐하. 소신이 차마 아뢰기 황송하오나, 누군가가 궐에서 몰래 몽환화를 키우고 있었다 하옵니다.”
순간, 명휘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크게 뜨였다. 귀비가 몽환화에 중독되었다는 것도 못 믿을 얘긴데, 그 몽환화를 궐 안에서 누군가 몰래 키우고 있었다는 얘기는 더더욱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건만, 태감이 거짓을 고할 이는 아니었다.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폐, 폐하.”
“그래서, 그걸 누가 키웠단 말이더냐.”
“그게…….”
“어서 말하여라.”
“폐하.”
“당장 네놈의 목을 치기 전에 말하란 말이다.”
낮게 가르릉거리며 내뱉는 말.
잔뜩 살기를 담고 달려드는 목소리에 태감은 결국 눈물이 터졌다. 그가 죽기를 각오하고 끝끝내 황제의 물음에 눈물로 답하였다.
“곤녕궁 소속 나인이 키웠다고 하옵니다.”
“곤녕궁이라 하였느냐.”
“화, 황송하옵니다.”
“황후가 머무는 곤녕궁이 맞느냐 물었다.”
“폐하…….”
“맞느냐 물었다.”
“……그렇사옵니다.”
“…….”
“또한, 황후마마께서 귀비마마께 선물한 향초에도 같은 몽환화가 쓰인 것으로 확인되어…….”
“무어라?”
순간, 앉은 자리에서 명휘가 벌떡 일어섰다. 서슬 퍼런 눈빛을 하고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시위에 다가섰다.
“폐, 폐하!”
챙!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을 울리며 시위의 허리춤에서 칼이 뽑혔다.
“폐, 폐하! 아니 되옵니다, 폐하!”
당장에라도 황후의 목을 치려는 듯 방을 나서는 황제를 숨넘어갈 듯한 소리로 부르며 태감이 뒤따랐다.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빠른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는 명휘를 겨우 따라잡은 그가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매달렸다. 눈꺼풀이 깊게 푹 꺼진 눈을 눈물로 적시며 그가 사정하며 소리쳤다.
“아니 되옵니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놔라.”
“폐하.”
“네놈 목숨이 아깝거든, 당장 놓아야 할 것이다.”
“폐하 제발, 제발 고정하시옵소서.”
“당장 놓으라 하였다.”
“폐하!”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명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바닥에 질질 끌리면서도 그는 절대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참담한 몰골을 하고선 그는 눈물로 호소하였다.
“폐하, 아니 되옵니다. 황후이십니다. 태화의 안주인이십니다.”
“입 닥쳐라.”
“태화의 안주인이 아랫사람을 해하려 했다 한들, 죽음으로까지 몰고 갈 죄목은 될 수 없습니다.”
“닥치라 하였다.”
“그리하실 순 없습니다. 제발 고정하시옵소서. 그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폐하!”
결국, 명휘의 발걸음이 멈췄다. 태감을 당장에라도 죽여 버릴 듯 노려보던 그가 시퍼런 칼날의 끝을 태감에게로 겨누었다.
“폐, 폐하.”
죽기를 이미 각오한바, 태감은 제게 겨누어진 날카로운 칼날을 보며 눈물을 꾹 집어삼켜야 했다.
“그리할 순 없다 하였느냐?”
그런 태감을 보며 명휘는 한층 더 낮은 목소릴 내었다. 궐 안의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였다.
“짐이 곧 태화고, 태화가 곧 짐이다.”
“폐하…….”
“그러한데. 짐이 하지 못할 것이 따로 있단 말이더냐?”
“……폐하.”
“말해 보아라. 짐이 하지 못할 것이 어찌 있을 수 있는지.”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손이 벌벌 떨리었다. 퍼석하게 말라붙은 입술을 겨우 떼어 내며, 그가 말한다.
“폐하께서…… 태화의 하늘께서 하지 못하실 일이 어디 있겠사옵니까.”
“…….”
“다만, 꼭 그리하셔야겠다면. 소, 소인을 죽이고 가시옵소서.”
“…….”
“소인의 불충으로 이를 사전에 막지 못하였나이다. 소인을 죽음으로 벌하시고 곤녕궁으로 향하시옵소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심으로 울부짖는 말.
양심전의 복도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차마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만 있는데, 흐느끼는 태감의 목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왔다.
밤은 점차 깊어 어디선가 올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적만이 남은 양심전을 더욱 으슬으슬하게 만드는 구슬픈 소리였다.
“귀비는.”
긴 시간이 흐르고. 황제의 입술이 다시금 열리었다.
“귀비는 그래서 어찌 된다고 하더냐.”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태감이 바닥에 엎드렸다.
“몽환화에 효험 있는 약재를 구하지 못해 사경을 헤매고 계신다 합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냐.”
“궐 안은 물론, 태화 어디에서도 그 약재를 구할 수 없다고.”
“하면.”
“서방에서 약재를 구할 수 있다고 하온데, 이를 듣고 기태주가 직접 구해 오겠노라 나섰다 하옵니다.”
“……태주가?”
“그것이, 기태주가 우연히 지나치는 길에 귀비마마께서 쓰러진 것을 발견하여.”
명휘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쳐 지나쳤다.
‘어찌하여, 태주가 귀비와 만났단 말인가. 그것도 궁 안에서, 하필 귀비가 쓰러져 있을 때.’
“분명 기태주는 약재를 구해 올 것입니다. 서방에 익숙한 장사치이니, 분명 하루빨리 약재를 구해 올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부디 고정하시어 이번 사건을 해결하시옵소서.”
쨍그랑. 명휘의 손을 떠난 칼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폐, 폐하.”
칼끝이 더는 저를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태감은 끅끅거리며 눈물을 삼켰다. 살았다는 사실보다, 황제가 칼을 들고 곤녕궁으로 향하지 않았음에 더욱 안도하며 그가 마음을 추슬렀다.
“반드시 살려야 할 것이다.”
“폐하.”
“반드시 살려 내야 할 것이야, 무슨 짓을 해서든.”
“…….”
“혹여나 귀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날엔.”
“……폐하.”
“네놈의 목숨도, 황후의 목숨도 보전치 못할 테니.”
그렇게 명휘가 뒤를 돌았다.
멀어져 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태감이 소리쳤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양심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태감의 목소리는 명휘의 귀에 닿지조차 않았다. 그는 그저 속으로 염원하듯 생각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이제 겨우 제 손에 넣은 장난감이 그리 쉽게 망가질 리 없다고.
저가 버리기 전까지는 반드시 저의 품에 있어야 한다고.
* * *
이튿날 이른 아침, 곤녕궁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황후와 오반을 함께 들 터이니 준비하라는 명이 양심전으로부터 전해졌기 때문이다. 황제가 실로 오랜만에 황후를 직접 찾은 것이었다.
“마마, 실로 기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그 여우 같은 영화궁 귀비가 몸져누웠다더니, 바로 황제 폐하의 관심이 황후마마께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경사스럽고 또 경사스러운 일이옵니다.”
늙은 상궁의 간사한 말을 들으며 황후는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더 화려하고 과하게 몸을 치장하였다. 갖은 향유를 뿌려 향을 덮어썼다. 누구처럼 몸에서 꽃향기가 나질 않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향을 풍기고 싶었던 것이다.
“마마, 준비가 모두 끝났사옵니다.”
분으로 잔뜩 뒤덮인 얼굴을 경대에 비춰 보며 황후가 한껏 미소 지었다. 오늘따라 입술에 바른 연지가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마마, 폐하께서 당도하셨나이다.”
준비를 끝낸 황후가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폐하를 맞기 위해 마지막으로 옷을 단정히 하고 문 앞에 섰다. 나인들이 열을 맞춰 방 안 한구석에 섰을 때, 얇은 창호지 너머로 거구의 그림자가 비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윽고 문이 열리며 그리운 이의 얼굴이 보였다. 무심한 듯 내려앉은 눈꺼풀. 언제나 그래 왔듯이 무뚝뚝한 얼굴로 황제가 방 안에 들어섰다. 하늘 아래 최고 미남자라 불리는 이를 마주하는 황후의 볼에 살짝 붉은 기운이 돌았다.
“폐하를 뵈옵니다.”
황후가 먼저 예를 갖추자 방 안의 나인들이 따라 고창하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명휘는 그들은 유유히 지나쳐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그를 따라 황후가 이동하자 늙은 상궁이 아랫것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반상을 준비해 오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뵈는 것 같사옵니다.”
황제의 맞은편에 앉은 황후가 그리 말했다. 명휘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일관한 채로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
잠시 후, 나인들이 줄지어 음식을 가지고 방 안에 들어섰다. 그들은 원형으로 된 식탁을 각지에서 올라온 온갖 귀한 찬으로 가득 채워 나갔다.
향이 좋은 음식 냄새가 순식간에 방 안을 뒤덮었다. 황후가 애써 뿌린 항유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서 드시지요.”
황후가 권하자 명휘가 숟가락을 먼저 들었다.
달그락달그락. 어쩐지 평소보다 더 말이 없는 황제는 덕분에 식사 자리는 참 조용했다. 나인들은 모두 숨죽여 둘을 지켜보고 있었고, 황후 또한 평소보다 더 말이 없는 황제에 의아하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그녀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었다. 분명 무언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인데…….
“영화궁의 얘기는.”
밥공기를 반쯤 비웠을 때, 황제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전해 들으셨습니까.”
그러자 황후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도 무척이나 속상하다는 듯 그녀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네, 듣다마다요. 귀비가 많이 아프다지요.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보탬이 될까 하여 사가에 음인에게 좋은 약재를 구해 달라 일러두었습니다. 신첩이 후궁 중에 가장 아끼는 아이인지라 마음이 매우 안 좋습니다…….”
“황후의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갸륵합니다.”
“아니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귀비는 신첩이 가장 아끼는 후궁인지라.”
“그러합니까.”
그녀의 말을 듣고 황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식사를 이어 나갔을 뿐.
“혹, 황후는 귀비가 쓰러진 연유에 대해 들은 것이 있는지요.”
명휘가 지나가는 얘기처럼 물었다. 이에 황후는 뻔뻔하리만큼 아무렇지 않게 답하였다.
“아니요. 신첩은 들은 바가 없사옵니다. 원래도 몸이 허약하였으니…… 혹, 지병이 돋은 것은 아닌지요.”
명휘는 계속해서 식사를 이어 나가며 대답했다.
“궐 안에서 산책을 하다 쓰러졌다 합니다.”
“산책…… 이요?”
“네, 궐 안에서 처음 보는 꽃향기를 맡고 그대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처음 보는 꽃이요……?”
“황후는 그 꽃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십니까.”
“네? 신첩이 어찌 그 꽃에 대해 알겠사옵니까.”
그때, 명휘가 불현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는 황제의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당황하는데, 이윽고 방 안에 금군위가 들이닥쳤다. 황후의 눈이 커다랗게 뜨여졌다.
“폐, 폐하?”
명휘는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황후를 응시했다.
“이, 이자들이 어째서 여기에…….”
이윽고 황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군위장의 칼집에서 시퍼런 칼이 뽑혀 나왔다. 갑옷을 벗은 칼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황후의 옆에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늙은 상궁의 등으로 꽂혔다.
“커억.”
등에 칼이 꽂힌 상궁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촤악. 상궁이 토한 피가 상 위로 흩뿌려졌다. 온갖 곳에서 공수해 왔다는 산해진미가 피로 물들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황후는 물론, 방 안을 지키고 있던 나인들까지 차마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눈앞에서 가장 아끼는 이의 죽음을 목도한 황후는 사고가 멈추어 버린 것만 같았다. 눈앞에 흩뿌려진 피가 공포 이상의 공포를 전달해 주었다.
“무얼 하십니까. 마저 드시지요.”
그런 황후를 두고 명휘는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권하였다.
“참으로 산해진미가 아닙니까. 이런 귀한 음식을 두고 남길 수야 없지요.”
황제는 사람이 죽어 나가며 흩뿌린 피로 뒤덮인 음식을 두고 산해진미라 표현하며 황후에게 먹으라 하였다.
젓가락을 쥔 황후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황제의 명이기에 앞에 놓인 것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먹어야 했지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가장 아끼는 상궁이 눈앞에서 죽었다. 하물며 그이의 피로 범벅 진 음식을 어찌 입에 가져갈 수 있을까.
“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습니까?”
명휘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사늘하게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겨우 열었다.
“폐, 폐하. 대체, 왜, 왜…… 신첩에게…… 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냐 물었습니다.”
“……폐하.”
“아니면, 상궁 한 명의 피로는 부족한 것인지요.”
“……폐하!”
일순, 명휘가 다시금 팔을 들어 올렸다. 다시 한번 칼부림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한 명 아닌 여러 나인이 잘 차려진 오반상 위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제 아랫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후의 손이 격하게 떨려 왔다. 새빨갛게 칠해진 입술이 덜덜 떨려 도무지 바로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 색만큼이나 짙은 붉은빛의 피가 식탁 위, 여기저기에 낭자했다. 도무지 식사는커녕, 가만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 그런 광경이었다.
“폐, 폐하. 대체 왜 이러시는지요. 신첩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리도…….”
황후가 눈물로 호소하였다. 도무지 황제가 왜 이러나 싶어 받아들이기 힘든데, 명휘는 여전히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표정 변화 없이 싸늘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황후께선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황후가 무엇을 잘못했냐니요.”
“폐하…….”
“황후는 아는 것이 없는데, 어찌 잘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다만.”
그윽한 목소리가 황후의 가슴을 후벼 파며 꽂혀 들었다.
“곤녕궁의 나인들이 궐 안에서 몽환화를 키워, 법도를 어기고 귀비의 목숨을 위협했으니, 그들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끝낸 명휘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방금 여러 목숨을 앗으라 명했음에도 태연히 웃음 지어 보이는 그 끔찍한 모습에 황후는 오금이 저리고 피가 말라붙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애초에 명휘는 모든 걸 알고 있던 것이다. 저가 몽환화로 만든 향초를 귀비에게 선물한 것도, 황후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던 것이다.
‘어찌, 어찌 황제 폐하께서 알게 되었단 말인가. 하필 귀비가 몽환화 밭까지 찾아가게 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궐 안에 몽환화의 생김새를 아는 자가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태화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꽃이거늘. 어째서, 어째서…….’
궐 안에 몽환화의 존재를 아는 이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어떻게 발각된 건지 그녀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그 사실이 어찌 황제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는지도…….
“그러니 황후는 개의치 마시고 식사나 마저 하시지요. 귀비의 몸도 좋지 않은 지금, 황후까지 몸져눕는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다정함을 가장한 협박.
명휘는 마치 황후가 피로 물든 밥을 떠먹는 꼴을 기어코 보고야 말겠다는 듯, 황후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황후가 아니었으나, 그녀는 도무지 피 묻은 밥을 떠먹을 수 없었다.
“황후.”
다시 한번 명휘가 그녀를 불렀다. 송곳 같은 목소리. 칼날 같은 눈빛. 그가 황후에게 던지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대는 것 같았다.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여기서 이 밥을 떠먹어야 한단 말이더냐. 내 손으로, 내 손으로 직접, 이 밥을……. 어찌 내가 그리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황제의 명을 어긴다면…….’
“…….”
결국, 파르르 떨리는 손이 어렵게 밥 한 숟갈을 떠 올린다. 피로 붉게 물든 쌀밥을 황후가 입으로 가져간다. 붉은 연지로 치장한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열리고, 수많은 이의 피로 범벅이 된 쌀밥이 들어간다.
“욱!”
쌀밥을 입에 넣자마자 구역질이 올라온다. 역한 피비린내가 입안에 퍼진다. 밥알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이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다. 감히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는 것을 넘기는 동안, 처절한 괴로움이 황후의 온몸에 사무친다.
“참으로 맛있지 않습니까.”
피로 물든 쌀밥을 삼키고 괴로워하는 황후를 보며 명휘가 미소 짓는다.
“황후가 그리 아끼는 귀비의 목숨을 해하려 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의 피로 물든 밥이니, 이 어찌 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숟가락을 그러쥔 황후의 손이 허공에서 사정없이 떨린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화장이 징그럽게 번진다. 얼굴이 추악하게 일그러진다.
“아니 그렇습니까, 황후.”
대답하지 않는 황후.
그런 황후를 보며 여전히 미소를 띤 채로 명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황후를 스쳐 문으로 향했다.
황제가 떠나 버린 방 안. 비릿한 피 냄새만 가득한데 달려와 치워 줄 사람이 없다. 그녀의 아랫사람은 모두 금군위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으므로…….
“우웩.”
황후가 조금 전 겨우 삼킨 밥알을 게워 낸다. 눈물 콧물을 쏟아 내며 경련하듯 발작을 일으킨다.
미칠 것만 같다. 미치지라도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듯했다.
제 사람을 잃은 것도 모자라 그들의 죽음을 제 목구멍으로 삼켜 넣었다.
“우웨엑.”
다시금 목구멍을 타고 토사물이 쏟아진다. 눈에서 뜨겁게 솟구치는 것이 마치 피눈물인 것처럼 온몸이 괴롭다.
아마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황제가 안 이상 이제 죽음보다 더한 지옥만이 그녀에게 남았을지니…….
“…….”
부축해 줄 이 하나 없는 와중, 울다 지친 그녀가 정신을 잃고 기어코 쓰러지고야 만다.
대낮의 햇빛이 둥근 창을 타고 곤녕궁을 가득 비추고 있었다.
피로 물든 방이 무색하리만큼 따뜻한 빛이었다.
* * *
오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궐에 비까지 내리니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았다.
언젠가 수현이 며칠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고 누워 있었던 그때처럼 명휘는 양심전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득한 빗소리가 무색하리만큼 양심전은 고요했다. 하늘은 치자색으로 물들어 어두웠고, 눅눅한 기운이 궁 안에 스며들었다.
근심 어린 제 상전의 눈치를 살피던 태감이 결국 말을 꺼냈다. 이제 막 어둠이 드리운 궐 안에 등불이 훤히 켜지던 참이었다
“폐하, 이러다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그만 침수에 드심이 어떠신지요.”
의자에 앉아 한쪽 팔에 얼굴을 깊게 묻은 명휘는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윽하게 가라앉은 눈은 먼 데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굳게 닫은 입술은 수많은 말을 삼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폐하…….”
다시금 태감이 그를 불렀을 때, 어찌한 일인지 명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주는.”
“예, 폐하.”
“태주는 아직 기별이 없다 하더냐.”
“송구스럽게도 아직 어떠한 기별도 없다 하옵니다.”
태감이 고갤 조아리며 답했다.
“그럼 약재는, 약재는 어찌 구할 길이 없는 것이라 하더냐.”
“혹시 몰라 사람들을 보내 전국 각지에서 양재를 찾아오라 명하였나이다. 서국으로도 이미 사람을 파견하였으나, 이는 오래 걸릴 터.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기태주밖에 없나이다.”
태주는 오래전부터 서국에 드나들며 무역을 해 온 상단 가문의 자제였다. 당장 서국에 다녀올 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면 태화에서 약재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는 이는 태주밖에 없었다.
그 말인즉, 수현의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어찌하여, 이리도 황실에서 일하는 자들이 이리도 무능하단 말이더냐.”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그깟 약재 하나를 못 구해 궐 전체가 이리도 난리라니…….
‘나는 천자가 아니었던가. 하늘의 뜻을 받아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이거늘. 어찌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폐하.”
“잠시 영화궁에 다녀와야겠다.”
의외의 말에 태감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명휘는 영화궁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지 않았던가?
“예, 폐하.”
하지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황제를 가장 측근에서 모셔 온 이만이 느낄 수 있는 감 때문이었다. 그의 감이 맞다면 아마도 황제는 귀비를…….
명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뒤로 태감과 나인들이 줄지어 섰다. 귀하신 분이 혹여나 비에 맞을세라, 한 나인이 커다란 우산을 황제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기나긴 행렬은 영화궁에 다다르고서야 멈추어 섰다. 기별도 없이 도착한 이를 보고 영화궁의 나인들이 잔뜩 긴장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오늘 곤녕궁에 피바람이 불었다던데, 혹여나 그 불똥이 저들에게도 튈까 불안했던 터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명휘가 영화궁의 침전 안으로 향했다. 이제껏 수현의 침상을 지키고 있던 장 상궁과 태의는 황제의 행차에 놀라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폐하를 뵈옵니다.”
장 상궁과 태의가 예를 갖추며 황제께 고했다.
“귀비는 차도가 있는가.”
“저, 그것이, 아직…… 약재가 도착하지 않아서…….”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태의가 겨우 답하였다. 장 상궁은 참담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그의 곁을 지켰다. 의식이 없는 귀비를 두고 두 사람의 심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게.”
말없이 서 있는 명휘를 대신해 태감이 말하였다. 장 상궁과 태의가 예를 갖추며 물러났고, 태감 또한 그들과 함께 방을 나섰다.
빗소리가 쓸쓸하게 들려오는 밤. 어두운 방 안에 침전을 밝힌 등불만이 형형했다.
홀로 남은 명휘는 귀비의 침상 옆에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았다. 수현은 세상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미동도 없이 고운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아픈 와중에도 잃지 않은 미색이 그를 그리 보이게 만든 것이리라.
“…….”
명휘는 아무 말 없이 수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빗소리는 계속 잔잔히 들려오는데, 등불 아래로 얼굴을 밝힌 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처음으로…… 이리 편안해 보이는구나. 그대가 여태 이런 표정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눈 감은 아름다운 음인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손끝에 닿아 오는 살결이 거칠다. 안쓰럽도록 야윈 얼굴을 훑으며 손끝이 천천히 움직인다.
“그대는 지금 무슨 꾸고 있는가. 내게서 벗어나 행복을 취하는 꿈을 꾸고 있는가.”
얼굴을 쓰다듬던 손이 멈추었다.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명휘의 얼굴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진다. 그런 그의 머릿속엔 어느새 수현을 처음 보았던 그날이 떠오른다. 두 눈을 꼭 감은 얼굴 위로 그날의 얼굴이 겹쳐진다.
참으로 꽃 같은 이였다. 처음 본 순간 그 향과 미색에 완전히 홀려 버렸으니까.
봄날의 바람에 흩날리는 꽃보라처럼, 그가 만들어 내는 동작 하나하나는 가히 시선을 거둘 수가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화려한데 청초하고, 청초한 가운데 색기를 품고 있었다.
누구보다 매혹적인 향을 내뿜으며 처연하게 내리깐 눈길을 도무지 가만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손을 내밀어 안고만 싶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당장에 끌고 가 그 향을 품고만 싶었다.
그랬는데, 그러했는데.
“그대는 기억하는가, 내가 그대에게 죽음보다 더한 지옥을 보여 주겠다고 했던 것을.”
그 말을 했던 건 저 꽃의 숨은 가시에 찔렸던 날이었다. 저토록 예쁜 꽃에 그런 가시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기에 사경을 헤매야 했다.
간신히 깨어난 뒤에는 곧장 왕부정으로 향하였다.
여전히 꽃 같은 얼굴을 하고 노려보는 이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댔다. 당장 죽여 버리겠노라고. 네놈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 버리겠다고.
그때 수현은 처음으로 죽음을 입에 올렸다. 살려 달라 빌고 애원하는 대신 저를 죽여 달라 그리 말했다. 그 예쁜 입술로 삶에 미련이라곤 없는 듯 처연하게 죽여 달라 그리 말했다.
결국, 꽃을 향해 겨누어진 칼날은 그대로 바닥을 향해 떨구어졌다. 그리 쉽게 꺾기에는 아까운 꽃이었으니까. 곁에 두고 서서히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그대는 늘 그래 왔지. 삶에 미련 없다는 듯, 늘 짐의 품에서 지는 꿈을 꾸고 있었지.”
명휘의 기억은 어느덧 이화원의 석가루에 올랐던 날로 향했다. 수현이 누각에 몸을 기댄 채, 붙잡은 저의 손 하나에만 의지해 매달리던 그때로.
불어오는 바람에 긴 흑발이 흩날렸다. 앞섶을 풀어헤친 붉은 옷은 흩날리는 꽃잎처럼 흔들렸고, 안식을 갈구하는 눈길은 제 손을 잡은 이를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눈빛이 아니었다면 잡은 손을 놓았을지도 모른다. 낙하하는 꽃잎처럼 그렇게 절벽 아래로 그의 몸을 곤두박질치게 했을지도 모른다.
죽여 달라는 그의 눈빛을 보지 않았더라면, 죽음을 열망하는 그 눈빛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대는…… 내 품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 그리도 바라던 죽음으로부터 따뜻한 안식을 맞이하는 그런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가.”
일순, 싸늘하게 식어 있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마 위로 핏줄이 서고, 수려한 미간에 주름이 인다.
수현의 뺨에 얹어진 커다란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얼굴을 차마 힘주어 쥐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고만 있다.
화가 났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수현은 이렇게 죽음을 맞이해선 안 되었다. 그의 손에서 벗어나 수현이 따뜻한 안식을 맞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저여야만 했기에, 그의 목숨 줄을 쥔 자는 반드시 저여야만 했기에.
이리 남의 손에 허무하게 져 버리는 꽃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고작 황후의 손 따위에 꺾일 꽃이 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
바들바들 떨리던 손이 서서히 멎는다. 황제가 그대로 손을 거둔다. 일그러졌던 얼굴이 펴지고 곤두섰던 핏줄이 가라앉는다.
차갑게 눈을 내리깔고 그가 다시금 수현을 응시한다. 달빛이 내려앉은 창밖은 어느새 빗소리마저 잦아들어 고요함이 맴돌고 있다. 향기로운 꽃향기 대신 비릿한 비 내음이 방 안을 채운다. 스산한 기운이 황제의 폐 속을 파고든다.
“그대는 그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겠지. 짐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두툼한 아랫입술이 윗니에 짓눌린다. 허공에 붕 뜬 손이 빈주먹을 그러쥐며 파르르 떨린다.
“하지만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다. 내 기어코 그 단꿈에서 그대를 꺼내 올 테니.”
반드시 너를 살려 내고야 말 것이다.
다시 내 손아귀에서 고통받을 수 있도록, 내 품에 명이 다할 때까지 안길 수 있도록.
너의 꿈속까지 쫓아가서라도 너를 살려 낼 것이다.
너는 내 것이니까, 너의 심장을 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니까.
그렇게 명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누워 있는 귀비를 등지고 그가 돌아섰다.
문가로 향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달빛을 삼킨 밤하늘의 먹구름처럼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은 좀처럼 거두어지지 못했다.
* * *
귀비가 의식 없이 누워 있은 지도 벌써 닷새가 되었다. 궁 안의 분위기는 초상집과도 같았다. 황제는 닷새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지 않았으며 어전회의 또한 진행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침울한 곳은 단연 영화궁이었다.
수현의 처소를 지키는 장 상궁과 나인들 그리고 태의는 기별조차 없는 태주를 기다리며 그저 속을 끓이고 있었다.
이제 궁 안에 있는 약재들로 수현의 고비를 늦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제 상황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아직 공자님께선 연락이 없단 말입니까.”
속이 타들어 가는 장 상궁의 말에 태의는 그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귀비마마께서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하신다면, 그리한다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장 상궁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녀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현이 쓰러진 뒤로 밥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한 그녀였다. 귀비를 대신해 제 목숨이라도 바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로 다할 수 없이 가슴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다.
“마마! 마마!”
그때, 멀리서부터 급하게 장 상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웬 소란이냐.”
엄한 목소리로 장 상궁이 답하자, 잔뜩 어깻숨을 내쉬며 나인 한 명이 아뢰었다.
“그것이, 그것이, 공자님께서, 공자님께서…….”
“……!”
장 상궁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 *
하얀 나비가 꽃밭을 날고 있었다.
꽃밭을 누비는 나비를 따라 수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사박사박. 수현의 발걸음을 따라 풀잎들이 가볍게 밟혔다. 사방은 꽃으로 가득하고 따뜻한 햇볕에 마음이 포근했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풀꽃 내음이 날아와 코를 간지럽혔다.
어여쁜 날갯짓을 한창 이어 가던 나비는 한 송이 노란 꽃 위에 내려앉았다. 하얀 날개를 고이 포개고 꽃술에 얼굴을 묻는다.
나비가 꽃인 듯, 꽃이 나비인 듯 아름다운 풍경을 두고 수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고요히 꽃 속에 파묻힌 나비가 혹여나 날아갈까 그리한 것이다.
그는 오래도록 먼 데서 나비를 쳐다보았다. 고즈넉한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도.
그렇게 수현은 한참 동안 멍하니 나비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은 나비가 하얀색의 날개를 바삐 움직이며 다시금 날아가기 시작했을 때였다
수현은 혹여나 나비가 제게서 멀어질까 황급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다급한 그의 발걸음에 풀잎들이 채이며 바스락 소릴 내었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나비를 보며 수현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더 멀리, 더 먼 곳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를 향해 수현이 손을 내밀었다.
하나, 그럴수록 나비는 더 멀어져만 간다. 하늘 높은 곳을 향해, 수현의 손이 닿지 못할 곳을 향해 더 멀리, 더 멀리.
‘아…….’
나비는 내리쬐는 햇볕에 숨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떠나가 버린 나비를 바라보며 수현이 한숨지었다.
그렇게 수현이 허망한 마음으로 뒤를 도는데.
‘……!’
그간 그의 곁에 펼쳐져 있던 꽃밭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화마라도 만난 듯, 잔뜩 불타 버린 꽃밭은 온통 그을음만이 가득한 채 폐허로 변해 버린 채였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수현은 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눈길로 변해 버린 들판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몸으로 그가 한 발짝 발걸음을 내디뎠다.
폭신했던 풀잎들은 오간 데 없고, 딱딱한 흙만이 그의 발끝에 닿아 왔다. 흙먼지가 사방에 흩어지고 달콤했던 꽃향기 대신 그을음만이 가득했다.
시야가 아득한 가운데 수현은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황망한 들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수현의 마음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잊고 있던 것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무얼 위해서, 대체 무엇을 위해.
털썩.
수현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어 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왜 이곳에 왔는지, 여기는 어디인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머릿속을 아무리 헤집어 봐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뿌옇게 시야를 덮은 흙먼지처럼 새까맣기만 했다. 그대로 두려움이 온몸을 덮쳤다. 공포가 그의 몸을 순식간에 잠식해 왔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그때, 절망에 잠긴 수현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현은 고갤 들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흙먼지에 가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키가 꽤 큰 사내였다.
‘누, 누구시오!’
저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수현이 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수현을 향해 묵묵히 다가왔을 뿐.
‘누구시오! 여긴, 여긴 어디란 말이오!’
떨리는 목소리로 수현이 다시금 소리쳤다. 두려움에 땅을 짚은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리었다. 어느덧 눈물이 차올라 볼을 뒤덮고, 불안에 뒤덮인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겁에 질린 사슴처럼 그렇게 수현이 떨고만 있던 그때.
‘……!’
뿌연 흙먼지 속에서 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정으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뾰족한 턱선, 방금 벼린 칼날을 닮은 날카로운 콧대.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오금을 떨게 만드는 삼백안.
순간, 수현은 가슴속에서부터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 들었다. 공포감은 배로 증폭되어 그의 온 신경을 아프게 찔러 댔다.
‘흣, 흐읏.’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못 견디게 괴로운데, 사내는 보란 듯 수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울고 있는 수현의 얼굴 위로 사내의 손이 스친다. 떨고 있는 작은 짐승을 다루듯, 커다란 손이 그를 쓰다듬는다.
다정한 손길에도 어쩐지 수현의 떨림은 멈추지 않는다. 고장이 난 듯 쏟아져 내리는 눈물로 두려움의 대상을 응시한다. 차가운 눈 속에 그대로 제 몸이 갇혀 버리는 것만 같다.
‘왜 울고 있지.’
사내가 수현에게 묻는다.
‘왜 여기서 울고 있었지.’
말라붙은 수현의 입술이 겨우 떨어진다. 눈물에 젖은 목소리로 그가 대답한다.
‘모르겠소.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소.’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수현을 향해 몸을 낮춘다. 차가운 눈빛이 가까워지자 수현의 몸은 더욱 얼어붙는다.
감히 똑바로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눈동자가 천천히 수현의 몸을 훑는다. 가늘게 떨리는 그의 어깨를, 등을 사내의 커다란 손이 훑는다. 손길이 스쳐 가는 곳마다 가시가 돋는 듯 괴롭다.
‘…….’
흐느끼는 수현의 턱을 사내가 들어 올린다. 턱을 잡은 커다란 손을 타고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냄새가 풍겨 온다.
어찌 맡으면 달콤하기도 하고, 어찌 맡으면 지독한 그 냄새에 숨이 막혀 온다. 눈물로 젖은 두 눈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더냐.’
그리고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 사지를 얼어붙게 만드는 잔혹한 목소리.
‘정녕 모른단 말이더냐.’
수현의 동공이 크게 뜨인다. 심장이 세차게 요동친다.
‘이곳이 그대의 지옥임을.’
그대로 심장이 내려앉는다.
“마마! 마마! 정신이 드시옵니까! 마마!”
귓가를 때려 대는 고음에 곱게 감겨 있던 두 눈이 조금씩 뜨인다. 깜빡깜빡.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몇 번 느릿하게 움직이고, 기어이 감긴 눈이 완전히 뜨인다.
“마마, 소인을 알아보시겠습니까, 마마.”
여럿으로 갈라진 잔상이 허공을 떠돌다 마침내 하나로 뭉쳐졌다.
수현이 처음 눈을 떠 마주한 것은 눈물로 온 뺨을 적신 채 저를 내려다보는 장 상궁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태의의 모습도.
“마마! 마마! 무슨 말씀이라도 해 보셔요. 마마!”
눈은 떴으나 입을 떼지 않는 수현을 보며, 장 상궁은 애가 타 계속해서 소리쳤다.
“마마, 닷새 동안 계속 누워 계셨나이다. 기억나시나이까? 산책 중 쓰러지셨습니다. 그로부터 꼬박 닷새나 지났습니다.”
그제야 수현은 모든 것이 기억났다. 왜 제가 이리 누워 있는지, 왜 장 상궁이 저를 보며 소리쳐 우는지도.
“마마께서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그때, 울먹이는 장 상궁의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공자님.”
장 상궁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자에게 자릴 내주며 그녀가 물러섰다. 눈물을 훔치며 수현을 향해 말했다.
“마마, 마마께서 의식을 잃으신 동안 여기 공자님이 약재를 구해 와 마마의 목숨을 구하셨나이다.”
장 상궁의 말에 이어 처음 보는 남자가 수현의 앞으로 다가섰다.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근사한 웃음과 함께 수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예의를 갖추었다.
“귀비마마께 인사드립니다, 기태주라 하옵니다.”
태주의 인사말에도 수현은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그저 두 눈을 끔뻑이며 빤히 쳐다보았을 뿐.
“아직 정신이 없으실 테지요. 어찌 편찮으신 곳은 없으시옵니까.”
태주는 수현의 곁에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기다림 끝에 그렇게 수현의 입술이 열리었는데.
“왜 나를 깨웠나요.”
그랬는데.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왜 나를 다시 이 지옥으로 불러들였나요.”
수현의 입술 사이로 나온 첫 말은 태주에겐 너무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게, 무슨…….”
순간, 태주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스쳐 지나갔다. 닷새 전, 귀비를 꽃밭에서 안아 들고 왔을 때 그의 목에 선명하게 나 있던 멍 자국.
태주의 미간이 접혔다. 그가 수현의 두 눈을 바로 응시했다.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귀비와 눈을 마주하며 그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무엇일까, 무엇이 귀비께 죽음을 원하게 했단 말인가. 대체 무엇이.’
그때.
“황제 폐하 납시오!”
문밖에서 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곧장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 들어섰다. 다름 아닌 황제였다. 귀비가 의식을 되찾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폐하.”
장 상궁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폐하, 마마께서, 마마께서 방금 눈을 뜨셨나이다!”
수현의 침소를 지키고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비켜났다. 성큼성큼. 빠른 보폭으로 침상에 다가온 명휘가 수현의 머리맡에 섰다.
공허한,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눈빛을 마주하며 황제가 단박에 수현을 끌어안았다.
“폐하…….”
그 모습에 장 상궁이 기뻐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녀가 눈치껏 조용한 목소리로 황제께 아뢰었다.
“그럼, 소인들은 이만 나가 보겠나이다.”
대답조차 하지 않는 황제를 두고 장 상궁이 몸을 물리었다. 그녀와 함께 영화궁의 침전을 지키고 있던 수많은 사람이 방을 나섰다.
그렇게 태주 또한 그네들과 함께 귀비의 처소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귀비의 마지막 말이 맴돌고 있었다.
왜 다시 지옥으로 불러들였냐는 그 말이…… 오래도록 그의 머릿속에 잔상을 남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