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비 온 뒤의 어스레한 숲속은 으스스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듯, 숲에는 초목이 무성했고, 비죽비죽 내뻗은 나뭇가지가 엉켜 흐린 하늘을 가리었다. 소나무 줄기가 뒤덮은 험한 흙길 곳곳에 어둠이 파묻혔다.
“헉, 허억!”
적막을 깨부수며 한 남자가 숲으로 뛰쳐 들었다. 허덕거리는 숨소리가 잠든 숲을 깨운다. 놀란 산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려 차르랑 쇳소리가 났다. 숲 전체가 청승스럽게 우짖고 있는 것만 같다.
“헉, 헉.”
남자의 숨소리가 씨근거린다. 휘달려 치솟은 맥박에 어깻숨을 내쉰다. 몸집이 자그마한 사내의 홍안을 거침 숨결이 뒤덮었다.
땀으로 젖은 얼굴과 길게 풀어헤친 머리는 그의 숨소리만큼이나 다급해 보인다. 겁에 질린 채 정신없이 주변을 훑는 두 눈은 붉게 충혈된 지 오래다.
거친 걸음에 나뭇가지에 걸린 옷가지가 우두둑 뜯긴다.
“저기다!”
곧 서슬 퍼런 고함이 쩌렁쩌렁 숲을 울린다. 곧장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사내가 갈림길에서 풀을 헤치며 나타난다.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은 생김새만큼이나 성난 표정을 하고 무섭게 앞선 이를 따라붙는다.
“흣, 흐윽―!”
갑옷의 무리에 쫓겨 남자가 허덕이며 앞을 막아선 수풀을 헤쳤다. 땀으로 젖은 얼굴에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붙었다. 두 눈이 공포에 절어 희번덕인다.
숲이 우거진 무명고지에서 엎어지고 깨어지다가도 낙엽을 와삭대면서 재빨리 발걸음을 옮긴다.
산짐승들이 개암이 와드득하는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도망친다.
“흡!”
일순, 쫓기던 이의 발걸음이 멈춘다. 눈앞에 들이닥친 풍경에 턱 막힌 숨만큼 정신이 아찔하다.
절벽이다. 막다른 길이다. 더는 발 디딜 곳이 없다.
“흐으…….”
남자의 발끝에 채인 돌멩이가 낭떠러지를 구른다. 남자의 등줄기로 땀 한 방울이 흘러내린다. 추락하는 돌멩이 위로 제 모습이 겹쳐 보이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
남자는 생각했다. 미천한 인생, 차라리 이곳에서 끝내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저 돌멩이처럼 절벽을 구르면 이만 마음은 편해지지 않겠느냐고.
후들거리는 발걸음이 천천히 허공을 향해 내디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그렇게 몸을 내던진다.
“귀비마마!”
찰나의 순간, 남자의 뒤에서 누군가가 뒷덜미를 세게 낚아챈다.
“흐!”
남자가 그대로 중심을 잃는 바람에 한쪽 발이 꺾인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갑옷의 사내와 함께 뒤로 나뒹군다.
“마마!”
남은 사내들이 소리치며 비탈길을 따라 미끄러진다.
너절해진 몸뚱어리는 굴러떨어진 후 꼼짝조차 하지 못한다. 어깨와 등짝이 찢어져 새빨간 피가 하얀 비단을 물들인다.
“귀비마마! 괜찮사옵니까?”
죽일 듯 쫓아오던 그들이 뒤늦게서야 남자의 안위를 살핀다.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어떤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계속 떨기만 했다. 시퍼렇게 변한 입술 색이 무척이나 애처롭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어찌 옥체를 이리도 험히 다루십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는다. 시선을 떨군 채로 떨리는 아랫입술을 짓씹었을 뿐이다.
“마마를 모셔라!”
우두머리의 명령에 갑옷의 사내들이 합심해 남자의 사지를 훔켜잡는다.
거친 손아귀에 남자가 늘어지며 두 팔뚝을 잡힌 채 배칠배칠 끌려간다. 찬바람이 을씨년스럽게 숲을 갈퀴질하고, 숲의 으스름한 형상이 남자를 향해 달려든다.
드문드문 나무 사이로 비쳐 오던 볕이 다시금 먹구름에 가려 자취를 감추어 간다. 창백한 숲만큼이나 남자의 얼굴이 싸늘하다.
* * *
끼이익, 오래된 나무 문이 신음을 토해 내며 열리었다. 저벅, 저벅. 빗물을 단 가죽신이 무심하게 문턱을 넘었다.
곧게 뻗은 흑색의 비단 옷자락 위로 황금색 용이 꿈틀거린다. 남자는 빳빳한 깃만큼이나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걸음걸이로 쥐 죽은 듯 바닥에 누워 있는 이에게 다가섰다.
추적추적 빗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는 그곳에서, 남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지쳐서, 혹은 고통과 공포에 짓눌려서 눈을 감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실신 상태일 수도 있었다. 잡혀 끌려 온 뒤로 반나절을 꼬박 버려 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쓰러진 이의 얼굴은 숨이 붙어 있나 싶을 정도로 창백하였으나, 그런 와중에도 타고난 색기는 빛바램이 없었다. 정녕 타고난 음인이었다. 하다못해 넝마가 된 옷자락조차도 그의 여린 몸을 부각하며 색기를 불어넣을 뿐이었다.
찢긴 천 사이사이로 보이는 살결은 어둠 속에서도 시선을 끌었다. 빨갛게 군데군데 물든 새하얀 피부가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찢긴 입꼬리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남자는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한 손을 들어 옷자락 끝을 잡았다. 사르륵, 피로 붉게 물든 옷자락이 슬며시 들춰진다.
진흙이 잔뜩 튄 버선의 목에서 종아리로, 종아리에서 허벅지로. 상의가 걷힐 때마다 비에 젖어 살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바짓자락이 깡마른 두 다리를 훤히 드러낸다.
뼈대만 남은 다리와는 다르게 살이 붙어 뭉뚝한 볼기짝까지 온전히 드러나고 나서야 남자는 손짓을 그만두었다.
음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입술에 살포시 미소가 얹어졌다. 비죽, 한쪽 끝을 틀어 올린 제 입술 위로 남자의 혀가 징그럽게 지나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고개를 비틀어 뻐근한 목을 손으로 문질렀다. 기다란 목선을 타고 손이 슬며시 움직이는 동안, 나른한 남자의 눈빛이 묘한 감정을 내보인다.
“으음…….”
의식을 되찾기라도 한 것인지 음인의 입에서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힘겹게 들어 올려진다. 반쯤 들어 올려지다 이내 닫히고, 다시 열리기를 반복하던 눈꺼풀은 저를 감싸고 있는 진한 향기에 각성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확 치켜 떠진다.
“흡!”
음인의 눈에 공포와 두려움이 뒤덮인다. 음인이 경련하듯 앙상한 사지를 떨어 댄다. 맞닥뜨린 공포에 얼굴이 점점 일그러진다. 어두운 공간 안에 흘러넘치는 향기에 곧 질식할 것만 같다.
“정신이 드는 것이냐.”
나른한 목소리에 음인의 등짝으로 소름이 사악 돋아난다. 이제 겨우 말 한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그대로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대의 얼굴이 이리도 상하니 짐의 마음이 아프다.”
남자는 몸을 숙여 아래 있는 음인의 얼굴을 쓸었다. 얼굴선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던 손끝이 터져 버린 입가에서 한참을 머무른다.
기다란 손가락이 찢긴 입꼬리를 문대듯 문질러 댄다. 창백한 피부에 핏빛이 번져 나간다.
“아마도 목이 마를 테지.”
감히 어둠 속에 가려진 형상을 좇기조차 무서워 음인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남자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구석으로 향했다.
남자가 빛이 적어 흙탕처럼 보이는 물을 바가지에 하나 가득 떠 올린다. 철렁철렁. 넘칠 듯 가득 담긴 물을 든 채 남자는 음인에게로 다시 다가선다. 자리에 선 채로 음인을 향해 바가지를 기울인다.
천천히, 천천히. 박을 반으로 갈라 만든 둥근 물체로부터 물줄기가 쏟아진다. 어둠 속에서 은빛을 내뿜으며 흘러내린 차가운 물줄기가 목마른 이의 입술을 적시었다.
두려움에 떨며 질끈 감았던 눈이 차가운 물줄기에 확 뜨인다. 본능을 이기지 못한 음인의 입술이 절로 벌어진다. 입안에 흘러 들어오는 물을 받아 마시며 고개를 꺾고 턱을 추어올린다. 갈증에 지친 몸뚱이는 물줄기가 생명수라도 되는 양 처절하고도 필사적으로 움직인다.
“흐으…….”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는 물줄기는 음인의 입술을 적시고 넘쳐흘러 아래로 향한다. 핏물에 닿아 빨갛게 변해 여린 턱으로 길게 선을 그린다. 목선을 지나 빗장뼈에 고여 든 물이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려 옷깃을 적신다.
“흠…….”
물을 갈구하는 음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자가 작게 탄성을 내뱉는다.
바가지를 거꾸로 든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남자의 손을 따라 차가운 물줄기가 옆으로, 옆으로 이동한다. 어느새 음인의 입술이 아닌 몸을 적신다.
“흣.”
차가운 물이 어깨에 닿자 음인의 작은 몸이 움츠러든다. 어깨를 타고 물이 가슴팍으로 번져 간다.
반투명한 재질의 저고리가 살갗에 달라붙어 하얗고 봉긋한 가슴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저고리를 홀딱 적시고도 물줄기는 계속 움직인다. 젖어 드는 천에 얇은 허리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아름다운 곡선이 만들어진다. 가는 다리는 젖은 천에 달라붙어 색스러운 자태를 자아낸다.
“이상하지.”
음인의 몸을 다 적신 남자가 빈 바가지를 바닥에 떨구며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그대의 몸이 젖어 들수록 짐의 목은 더 목말라 오니까.”
남자가 다시 향해 몸을 숙였다. 땀과 물에 젖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오랫동안 미동이 없다.
“그리도 짐에게서 벗어나고 싶더냐?”
다시금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흑룡포를 감싼 허리띠가 그의 손에서 풀려 나간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아라.”
커다란 손이 바지춤으로 향한다. 비단으로 지은 바지가 무심하게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빗줄기가 우짖는 소리는 더욱 커지고, 스산한 기운이 흘러넘친다.
“짐의 손아귀에 들어왔을 땐, 다시 못 기어나가도록 그대의 아래를 갈가리 찢어 줄 테니.”
남자가 음인의 옷을 거칠게 풀어 헤친다. 깡마른 다리를 그가 거칠게 붙잡는다. 가는 다리 사이로 거대한 몸뚱이가 비집고 자릴 잡는다.
그대로 남자가 허리를 추어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