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치영은 표정을 굳힌 상태에서 부정하려 노력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기백한이 성큼 다가왔다. 치영은 그의 날카로운 기색에 저도 모르게 팔로 얼굴을 막았다. 기백한이 헛웃음을 치며 치영의 허리를 번쩍 들어 짐을 짊어지듯 치영을 한쪽 어깨 걸쳐 멨다. 그러고는 곧바로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때리기라도 할까 봐? 번지수 잘못 찾았어. 네가 아무리 잘못해도 얼굴은 안 때려. 벗겨 놓고 엉덩이를 때리면 모를까.”
또 짐짝처럼 들린 터라 치영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이거 놓으십쇼!”
백한이 대답 없이 치영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짝, 때렸다. 손길이 매서워 치영은 저도 모르게 읏, 하고 신음을 냈다.
“소리 죽이네.”
휙, 하고 휘파람을 분 백한이 치영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치영이 버둥거리는 건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었다.
“이거 놓으라고, 개자식아!”
“애들 깬다. 부부 싸움 하는 거 보여주면 자식들 정서 교육에 안 좋아요, 여보.”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는 것 치고, 백한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서늘했다. 주위에 뾰족하게 일렁이는 파장으로 인해 그가 몹시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근데 그게 뭐. 치영도 화가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치영은 허리가 젖혀질 정도 다리를 쭉 폈다가 고관절을 빠르게 굽히며 기백한의 명치에 제 무릎을 박아 넣었다. 백한은 얻어 맞고도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까부시네요, 여보. 계속 때려 봐. 남편이 지속적으로 폭행하고 있다고 센터 인권위에 찌를 거니까.”
“누가 네 남편이야!”
치영은 아래층에 에스퍼들이 잠들어 있는 것도 잊은 채 꽥 소리를 질렀다. 열 받을 말만 골라 한다.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는데도 먹히긴커녕 비웃음만 산 탓에 귓불이 붉어졌다.
그는 치영의 방에 딸린 욕실 문을 벌컥 열더니 밀어 넣듯 욕실 안쪽에 내려 주고는 뭐라 할 새도 없이 코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씻고 나와. 다 젖은 거, 존나 거슬리거든.”
그의 냉정한 말투에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치영은 문을 열려고 해 봤지만, 문고리만 돌아갈 뿐 도통 열리지 않았다. 어깨로 밀어 봐도 그랬다. 벽을 미는 것 같이 꽉 막힌 터라 답답했다. 밖에서 이능으로 닫아 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숙소 현관에 들어왔을 때는 추웠었는데 이제는 분노로 끓어오른 열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들키지 않으려고 그 노력을 했는데 들킨 것도 짜증 나고, 열심히 해 보려는 일마다 족족 거지같이 변하는 상황에 신물 났다.
이게 다 문밖에 있는 저 에스퍼 때문이다. 자기가 대체 뭔데. 사실 도의적으로 어긋날 뿐, 치영이 손 차장에게 따로 임무를 받은 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치영에게 잘못이 있다면 손 처장이 내민 임무에 대해 직계 상관에게 보고를 안 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치영의 직계 상관은 아직까지 백한이 아닌 기백연이었다. 기백한이 화를 낸다면, 백연에게 보고하지 않은 부분을 화내야 마땅했다. 사실상 그 점 역시, 손 처장이 임무 자체를 비밀에 붙였노라 하면 될 일이었다. 치영은 손 처장의 요구를 상명하복에 의거하여 거부할 수 없는 처지니까.
치영이 그동안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도 손 처장이 이중 임무에 대해 함구하라고 요구했던 것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임무의 성공 보수로 전역을 요구할 거긴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였다.
“…개새끼.”
밖에서 다 들을 걸 알고도 욕을 내뱉은 치영은 화장실 문을 노려보며 젖은 옷을 벗어 던졌다.
늘 옷을 벗으면 바구니에 넣는 것이 먼저였는데 욕실 바닥에 젖은 옷을 패대기치듯 벗어 놓고는 바로 샤워기 아래 섰다. 뜨거운 물을 튼 다음, 전투적으로 몸을 씻었다. 씻으면 씻을수록 울분이 들어찼다.
서로를 만나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것은 오히려 백한 쪽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욕먹고 따돌림당하고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건 늘 자신의 몫이었다. 기백한이 치영과의 각인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불이익 중에 인격모독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대체 뭔데 화를 낸단 말인가. 살이 빨갛게 익을 정도로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나온 치영은 수건 하나만 두른 채로 문을 벌컥 열었다.
물줄기가 끊긴 소리를 들은 건지 기백한이 바깥에서부터 문을 닫고 있던 이능을 풀었기 때문이다.
방 한쪽 1인용 소파에 앉아 있던 기백한은 치영이 허리에 수건 하나만 두르고 나오자 한쪽 눈썹을 올린 채로 입을 열었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꼬라지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럼 옷도 안 들고 들어갔는데 어떡하라는 겁니까.”
치영은 백한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벽에 붙어 있는 옷장으로 성큼 걸어가 속옷과 티셔츠를 꺼내고는 잡고 있던 수건을 풀었다. 기백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하얀 나신이 그대로 드러난 치영에게서 등을 돌렸다. 언뜻, 교근이 불뚝 튀어나온 채로 말이다.
백한이 짓씹듯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너, 돌았어?”
“지금만큼 멀쩡한 때가 없었는데, 왜요.”
치영은 빠르게 속옷을 꿰어 입고 티셔츠까지 입은 뒤, 잘 때 입는 짧은 반바지를 꺼내어 입었다.
기백한이 매번 침대로 기어들어 오는 바람에 꼬박꼬박 바지를 입고 자야 했지만, 사실 치영은 잘 때 속옷만 입고 잘 때도 있었다. 답답한 날에는 자다가 옷을 벗기도 했는데 기백한이 불쑥 침실로 들어오는 날이 많아져 그럴 수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또 짜증이 났다.
밤에도 마음 편히 쉬어 보지 못하고 저 새끼에게 언제 가이딩을 들킬까 불안해하며 선잠을 잔 것만 벌써 며칠째다. 애초에 왜 치영의 세계에 침범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남남처럼 살길 원하던 건 본인이었으면서.
전에는 그저 기가 막혔는데, 이제는 그냥 성가시고 짜증이 났다. 저를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멎자 치영이 옷을 다 갈아입었다고 생각한 건지, 뒤를 돌았던 백한이 짜증을 냈다.
“너 진짜 오늘 작정했지? 그게 씨발 바지냐, 티팬티냐.”
“눈깔 없어요? 이게 바지가 아니면 뭡니까? 개소리 지껄이지 말고, 내 방에서 나가요.”
“아니 씨발, 왜 당당하셔요. 너 오늘 네가 어디서 뭘 하다 걸렸는지 씻다가 다 까먹었어? 샤워하랬더니 뇌까지 씻은 거야?”
“내가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는데.”
“음, 반말도 하시게요? 안치영아, 색다른 건 좋은데 매력이 살짝 아찔할 지경이니까 작작 해라. 형도 슬슬 빡치거든?”
치영은 기백한의 말을 비웃었다. 그가 하, 하고 헛바람을 일으키자 백한의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근데 진짜 왜 이렇게 뻔뻔하지? 너 얼굴도 뜯어고쳤더라. 싸구려 이능으로 범벅하고 내 앞에서 뽈뽈거리면서 돌아다니는데 지금 빡 도는 건 나여야 하는 거 아니냐? 얼굴 바꿔 준 새끼가 네 몸에 에스퍼 이능 씌울 동안 넌 뭐 했어. 그 새끼한테 가이딩이라도 대 줬어?”
“남이사 뭘 하든 중령님이 왜 열 받는 겁니까.”
“뭐?”
치영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입을 열었다.
“저 거기 임무 때문에 나간 거고, 누가 내게 그 일로 화를 내야 한다면 중령님이 아니라 기백연 소령님입니다. 중령님이 제게 무슨 권리로—.”
치영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성큼 다가온 기백한이 치영의 뺨을 손아귀로 지그시 눌렀기 때문이다.
억센 악력에 턱을 잡힌 치영은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백한의 손은 거친 만큼 단단했다.
“말을… 꽤 잘하네?”
그의 눈빛이 무척 어두워졌다. 색소가 옅어 밝은 빛을 띠던 백한의 눈동자가 검게 보일 지경이었다.
“권리가 없다고?”
백한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치영은 버둥거리며 그의 팔을 치우려 했다.
“내가 왜 권리가 없어. 네 각인 에스퍼가 난데.”
그 말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져, 치영은 제 턱이 아프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백한의 손을 퍽 쳤다. 치영의 손이 닿기 전, 백한이 힘을 푼 것이 느껴졌다. 잘못하면 치영의 턱이 돌아갈까 봐 손에 힘을 푼 듯한데, 전혀 고맙지 않았다. 치영은 서슬 퍼런 눈으로 제 각인 에스퍼를 바라보았다.
“각인이 뭐. 그게 우리 사이에 뭐 별다른 효능이라도 있습니까.”
“말조심해.”
“너나 조심해. 난 중령님이 내 에스퍼라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그렇게 여길 기회를 준 적이라도 있어요?”
“너…….”
기백한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치영은 열이 올라 붉게 물든 뺨을 한 채 기백한을 온몸으로 부정하려 애썼다.
나도 가능하면 너를 만나기 싫었어. 그런데 내 선택지가 너뿐이었는 걸 어떡해. 그래서 이제 꺼져 준다잖아. 왜 그것도 못 하게 해.
기백한은 가만히 치영을 바라만 보았다. 대답하지 않은 채로 저를 응시하는 눈빛이 낯설었다. 치영으로서는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그의 안광이 흉흉했다. 전투 중에 죽은 시체 더미를 쳐다보듯 무감하고 건조한 동시에, 쇳물을 끼얹은 것처럼 부글거리는 열기가 고인 눈이었다.
왜 저런 눈을 할까……. 치영은 지금 상황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용광로 같은 불길이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치영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듯한 목소리로 짓씹듯 말했다.
“그럼 씨발, 치영아. 안 들키게 했어야지. 네가 손진화 뒤 닦아 주는 수준 없는 새끼인 거, 내가 모르게 했어야지.”
“…….”
치영의 입술이 천천히 닫혔다. 눈에 서려 있던 안광마저 꺼졌다. 저를 상처 입히는 건 이 세상에 오로지 기백한뿐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저를 상처입힐 수 있었던 건, 여태껏 치영이 그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어서 들어오세요. 계시는 동안엔 제 마음을 파먹고 지내셔도 됩니다.
치영은 기백한에게 허락했고, 짐승보다 감이 좋은 남자는 그걸 쉽게 깨달았을 것이다. 기울어진 관계 때문에 내내 비탈길에 서 있던 치영은 뼈아팠다.
치영의 안색이 석죽은 사람처럼 새까맣게 어두워졌다.
“그 새끼가 뭐 해 준대. 너랑 각인하재? 이혼하고 너랑 살겠대?”
백한이 치영의 뺨을 쓰다듬었다. 더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 그러니 치영은 그 감각이 꼭 사금파리를 박아 넣은 강판에 뺨이 쓸리는 것처럼 아리다고 생각했다.
“말해 봐, 자기야. 그 새끼가 너 꼬셔서 뭐 해 준다든. 네 좆 같은 각인 에스퍼랑 각인 끊고, 저랑 각인하재? 그 씹창 걸레 새끼가 너랑 각인이라도 해 주겠대?”
치영은 제 뺨을 쓰다듬는 백한의 손을 힘없이 밀어냈다. 밀리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러나 백한의 손은 의외로 손쉽게 밀려나 주었다. 치영은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그러나 이것만은 꼭 이루고 싶다는 듯이.
“전역입니다.”
“…….”
“제가 바란 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나가서 중령님도 나도 서로를 잊은 것처럼 안 보는 것뿐이에요.”
포기에 가까운 음성에, 백한의 눈물점이 휘어졌다.
치영은 어느 날, 자신이 아주 어렸던 그 어느 날, 식탁 밑에 숨어 있던 제게 ‘까꿍.’ 하며 웃던 백한의 웃음을 기억해 냈다. 그의 눈물점이 딱 그때처럼 휘어졌기 때문이다.
“치영아.”
“…….”
“목표를 씨발, 가능한 걸로 세워야지.”
그가 치영의 목을 쥐었다. 치영은 익숙한 약탈자를 위해 눈을 감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