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치영은 그대로 구르듯이 달렸다. 등 뒤가 오싹거렸다. 아마도 기백한의 살기에 온몸이 저릿거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망설인 순간 바로 뒷덜미를 잡힐 것이 뻔했다. 기백한은 사냥감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헉, 허억—!”
손으로 입을 막은 뒤 코너를 빠르게 돌았다. 좁다란 길이 나와 혹시나 어깨가 스칠까 봐 아예 옆으로 뛰어 들어가 창고와 같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번 조현호와의 일로 미리 알아 둔 직원용 비상 통로였다. 안은 어두웠다. 치영은 통로를 타고 그대로 별채를 나가는 계단을 내려갈까 하다가 어두운 바닥을 더듬거려 바닥에 달린 끈을 위로 들어 올린 뒤, 악어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린 바닥문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숨어 있다가 나가는 것이 나을 듯했다.
안은 작은 창고 같은 것인데 밖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고, 별관에서 쓰이는 티슈 등 여러 잡화를 둔 공간이었다.
초등학생 고학년 정도 되는 어린아이 한 명이 대자로 뻗을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인지라 치영은 그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려야 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끔 서서히 닫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났다. 눈을 꾹 감았다 뜬 후, 그대로 끼익거리는 소리를 조심하며 바닥 문을 아주 조심스럽게 마저 닫았다. 타이밍 좋게 그 직후에 바로 워커의 밑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흐음—.”
예상대로 기백한이었다. 그는 이미 배가 불러 사냥감을 궁지에 몬 뒤, 이내 흥미를 잃은 육식 짐승처럼 천천히 물러났다.
바깥쪽에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치영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살짝 문을 열어 보자 보이는 건 없었다. 안심하고 나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기백한이 더 뒤져 보지 않고 나간 것을 보니 수상한 서버를 쫓아가는 것보단 사진 속 사람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치영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후 다시 문을 닫았다. 속으로 100 정도를 센 뒤 그제야 밖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아예 본관으로 향했다. 어느덧 퇴근 시간이 다 된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친 기색을 숨기며 김 부장에게 이만 가 보겠다고 했더니 그가 물끄러미 치영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울로 접어드는 늦가을에 땀이 난 걸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을 수가 없었다. 김 부장이 그런 치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별관에 별일 없어?”
“네.”
일단은 그렇게 대답했다. 김 부장은 한동안 더 치영을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모레는 일 있다고 했으니까 내일은 꼭 제시간에 출근하고.”
“예, 알겠습니다.”
모레는 탄탈로스의 작전 일이었다. 미리 결근을 보고해 둔 터라 김 부장은 더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고개를 꾸벅이고 나온 치영은 비척비척 걸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주차장 주변을 기웃거리는데 백한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백연과 백한이 평소 타는 차가 아닌, 다른 차로 온 것 같았다.
늦가을 비를 맞은 치영의 옷이 천천히 젖어 들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오던 택시를 잡아탄 뒤, 기본요금이 적용되는 곳에서 내린 다음 다시 다른 택시에 올라타 이번에는 운전병이 데리러 오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차를 바꿔 타는 동안 미행이 붙은 기색은 없었지만 기백한이 마음먹고 붙은 미행을 제가 느낄 수 있을 리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치영은 한숨을 내쉬며 운전병이 운전석에 타 있는 차의 뒷문을 열었다.
경례만 건넨 뒤 오늘도 말없이 출발할 줄 알았던 운전병이 의외로 뒤로 돌더니 치영에게 말을 붙였다.
“이 중사님이 오늘은 이거 드시라고 했습니다. 해제에 필요한 약물이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그냥 전해드리라 했습니다.”
그가 건넨 것은 알약이었는데, 치영은 운전병의 짧은 설명으로 그것이 이능 해제 약물임을 알 수 있었다. 늘 먹던 것이라 의심 없이 먹었다.
운전병이 작은 목소리로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치영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기백한은 자신을 알아보았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저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다 바꿨다. 파장도, 얼굴도.
치영은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 옆 거스러미를 긁다가 피가 나온 뒤에야 멈칫했다. 내일 또 감자를 깎아야 할지도 모르는데 상처 난 손은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운전병이 룸미러로 이쪽을 흘끗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치영은 딱히 고뇌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몹시도 피로했기 때문이다.
속이 울렁거렸다. 차는 생각보다 빨리 서‧경 센터로 향하고 있었다. 좀 더 참을까 하다가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 운전병을 불렀다. 제대로 말이 나가지 않아 몇 번을 중얼거리다가 결국 더듬더듬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은 다음에야 차를 세워 줄 것을 부탁할 수 있었다.
“…잠시 천천히 좀. 속이…….”
“멀미 나십니까?”
룸미러를 통해 치영을 돌아본 운전병이 놀란 듯 속도를 천천히 줄였다. 치영은 그가 주었던 물병을 다시금 집어 들어 병의 주둥이에 입술을 붙였다. 물을 마셔도 속이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구역질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 내려—. 내릴…….”
“토하실 것 같습니까?! 내려드리겠습니다!”
놀란 운전병이 비상등을 켠 뒤 갓길에 차를 세웠다. 치영은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차 문을 열고 기듯이 뛰어내려 토악질했다.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저 괴로울 뿐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속은 여전히 울렁거리는데도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한이 복귀하는 중일 수도 있으니 최대한 빨리 숙소로 들어가야 했다.
얼굴을 만져 보니 그대로였다. 아마 서‧경 센터에 도착해 운전병과 헤어진 후에야 효과가 적용될 것 같은데 뭔가가 이상했다.
아직 ‘이창주’의 얼굴을 하고 있던 치영은, 갑자기 헛구역질하는 상관의 등을 두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뻘쭘한 얼굴로 곁에 서 있던 운전병을 지나쳐 차에서 아침에 입고 갔던 정장이 담긴 봉투를 꺼냈다.
“…여기선 얼마 안 머니까 혼자 복귀할 겁니다. 수고했어요.”
운전병은 더 권하지도 않고 깔끔한 태도로 경례한 뒤 차를 끌고 사라졌다. 서‧경 센터의 검문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약 1km 남짓이라 밤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도 걸을 만했다. 오히려 아까보다는 훨씬 속이 나은 것 같았다.
오늘도 이 중사의 이름을 대고 검문소를 통과한 들어 온 치영은 검문소에서 몇 발자국 더 떨어진 다음에야 얼굴이 천천히 원래의 제 것으로 돌아옴을 느꼈다.
북문에서부터 난슬동은 멀지 않은지라 바지런히 걸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려 기어이 외투가 모두 젖어 버렸다. 정장이 젖으면 안 될 텐데 하는 생각에 품 안에 끌어안은 채로 계속 걸었다. 차 안에서 느꼈던 피로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현호의 경호와 콜라숍 출근을 동시에 하려니 체력이 부치는 게 느껴졌다. 훈련으로 다져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사실, 체내에 넘쳐나는 가이딩이 밖으로 증폭되지 않도록 잡고 있느라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도 단전이 쿡쿡 쑤시는 기분이라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후에야 난슬동에 도달할 수 있었다.
북문과 가까워도 상대적인 거리이기 때문에 치영이 난슬동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폭삭 젖은 후였다. 젖어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 올린 치영은 물기에 젖은 이마를 닦은 뒤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하는 몸으로 숙소 저택을 찾아 들어갔다.
오늘도 불은 꺼져 있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지 않도록 도어 록을 열었다가, 자동 잠금 장치가 기계음을 내며 잠기는 소리가 날 것 같아 방사 가이딩부터 풀며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모르니 에스퍼들이 숙면을 취할 수 있게끔 하는 게 나을 듯했다.
‘양말 빼고 다 젖었네.’
그렇게 한 걸음 더 현관을 지나 2층으로 가는 층계참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치영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자기야, 나 의부증 있으니까 일찍 다니라고 했지.”
어조는 장난스러운데 내뱉는 목소리가 무감하고 서늘하게 들려, 오히려 등 뒤에 소름이 일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새된 숨을 삼킨 채 뒤를 돌아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기백한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장대한 신장이 천천히 높아져 어느새 그 세를 모두 회복하자, 불 꺼진 거실에 끼쳐 들어오는 난슬동 주택가의 희붐한 가로등 빛이 그를 꼭 속을 알 수 없는 거인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콜라숍의 별채에서 봤던 바로 그 차림이었다. 그는 위험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것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저런 웃음을 지을 때마다 저에게는 늘 어떤 일이 일어났었지? 치영은 아찔함에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처음 든 생각은 들켰다, 였다.
안치영은 기백한을 무척 잘 알고 있다. 저것은 뭔가를 알고 있는 눈이다. 위험한 호선을 그리고 있는 저 입술 사이에서 이제부터 나올 말을, 치영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아까 나 보고 왜 도망갔어?”
…것봐. 이쯤 되면 죽도록 운이 없는 자신을 탓해야 하는 건지, 저 후각이 예민한 사냥개와 같은 에스퍼를 탓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치영이 간신히 대답했다.
“…아까 언제요.”
“시치미 떼면 재밌어? 어쩌지? 자기야, 난 웃음이 안 나와.”
이윽고 기백한이 치영에게로 걸어왔다. 저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더 부정해야 할까?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할까? 기백한에게는 심증뿐일 것이다. 현행범으로 잡히지 않은 이상 자신은 무고하다. 그 죄가 여실하더라도.
안치영, 제발 머리 좀 굴려. 치영은 자신을 다그쳤다. 그것만이 치영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