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백연이 가이드의 턱을 움켜쥐어 저를 보게 했다. 백한이 소파 등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담배를 입에 문 뒤 낄낄거렸다.
“모르긴 뭘 모르세요. 이 사람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있다는 얼굴인데. 이쪽은 연기력이 영 후지네.”
담배에 불을 붙인 백한이 테이블 위로 다 쓴 라이터를 아무렇게나 던졌다. 콜라숍이라고 쓰인 형광 주황색 싸구려 라이터가 대리석으로 된 테이블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치영은 여전히 숨을 죽이고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른 서버들은 그들이 나누는 말이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지 않았다. 제법 근접한 거리에 있던 치영도 입술 모양을 보고 판단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치영은 기백한과 기백연이 들키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묻고 다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백한의 옆에 앉아 있던 여자 가이드가 벌떡 일어나더니, 백연에게 붙잡혀 있던 남자 가이드를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백연이 그를 손으로 잡아당기자, 남자는 어지간히 근력이 없는지 그대로 휘청거리다 백연의 무릎 위로 넘어져 버렸다.
그도 모자라 중심을 못 잡겠는지, 백연의 무릎에 엉덩이를 붙인 채 백한의 허벅지를 손으로 짚으며 자신의 무게를 지탱하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기백한이 갑작스레 벌떡 일어나 버리는 바람에 그대로 주륵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 씨발. 어딜 만져.”
기백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치영이 수없이 반복하여 마주했던 바로 그 표정.
희게 질린 얼굴, 태생적으로 너와 나는 맞지 않는다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 같은 경악에 잠긴 눈빛, 무언으로 상대의 모든 것이 싫다고 외치는 백한의 반응이 놀랍도록 익숙했다.
“씹, 진짜—. 헉… 허억—.”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기백한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치영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반응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식으로 과호흡에 커다란 어깨를 옹송그린 채 들썩이는 건 처음이었다.
치영은 자신이 남자라는 걸 알게 된 후 그가 보인 반응을 혐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꼭 공포와 닮아 보였다.
무서울 게 없는 인생 아니던가. 치영은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백연이 익숙하다는 듯한 태도로 아이스 버킷을 뒤집어 얼음을 바닥에 쏟고는 그걸 백한에게 건네주었다. 백한은 그걸 받아 들고는 버킷의 작은 구멍을 제 입과 코로 막은 뒤 계속 숨을 색색거렸다.
그가 내는 불길한 숨소리에 벽면에 붙어 있던 서버들이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백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여기 이 가이드 새끼 때문에 연약한 내 일행이 이 꼬라지가 됐는데, 이거 어떡할 거야.”
치영으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말투였다. 꼭 기백한처럼 말하는 백연 때문에 놀라 그녀를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놀란 서버가 옹송그린 채 버킷에 코를 박고 있는 백한의 등 위로 손을 뻗었을 때였다. 챙그랑, 소리가 나며 버킷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기백한이 과장된 표정을 지은 채로 서버의 목덜미 옆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꼭 친밀한 사이처럼 어깨를 짚는 듯 보여도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급소를 눌린 기분일 것이다.
“보면 모르세요? 나 지금 죽을 뻔했잖아, 저 새끼 때문에.”
“윽-!”
“아, 왜 오버 해요. 손에 힘도 안 줬는데. 나 서운해서 이러는 거예요. 그냥 얘랑 얘기할 시간만 더 줘. 그리고 이분은 내보내, 사람이 여유가 없고 바빠 보여서 즐거운 시간 갖기는 글렀어. 얼른 가라고 해요.”
기백한이 얼굴을 굳힌 채 서 있던 여자 가이드를 손짓하며 말을 맺었다. 서버가 여자 가이드의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그녀의 직책이 꽤 높은지, 남자 가이드 또한 여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 가이드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움찔한 남자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백한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어떡할 거야. 얘가 방금 나 죽일 뻔했다고 다 소문내고 다닌다?”
서버는 억울한 얼굴을 했다. 마치 이곳에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너도 좋을 것 없는 입장이지 않냐고 묻는 듯했다. 콜라숍의 뒤편에 있는 이 건물에 입성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잃을 것이 많다는 뜻이니 말이다.
기백한은 허리를 굽혀 테이블 위에 놓인 올리브 알을 집더니,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전완을 팍 쳐 반동으로 튀어 올라온 알을 입으로 받아먹었다.
그의 턱이 움직이는 모양은 야만, 그 외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어떡할 거냐니까? 여기서 밤새우시려고?”
“…됐어. 가자.”
여자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쯧, 혀를 차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만 물러나잔 뜻으로 보였다. 모여들었던 서버들은 순순히 여자의 말을 따르면서도 기백한과 백연이 있는 테이블을 계속해서 흘끔거렸다.
백연이 다시금 남자 가이드를 제 옆에 앉힌 뒤 아직 서 있던 백한을 향해 말했다.
“너도 앉아. 그림자 진다.”
기백한의 장대한 키가 방 안에 얼마 없는 조명 빛을 그대로 가린 모양이다. 그러나 백한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아니, 방금 존나 좋은 냄새가 났거든? 희한하네.”
기백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이내 테이블 위 진수성찬이 생각난 듯 남자 가이드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이제 확연하게 눈에 띌 정도로 벌벌 떨고 있었다.
치영은 그가 그렇게 떠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 것 같았다. 백한과 백연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이라기보다는 잘 제련된 병기 같아 보인다. 인간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두 에스퍼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남자는 두 사람에게 무언가를 숨겨야 하는 입장인 듯했다. 그들이 그가 숨기는 걸 원하는 이상, 남자는 밤새 꽤 괴로운 일을 겪어야 할 것이다.
“표정 좀 풀어 봐. 쟤들이 우리 쳐다보잖아. 좆같아도 웃는 게 사회생활이라는 거 안 배웠어?”
그런 의미의 사회생활이라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백한이 다시금 실실 웃으며 남자를 향해 말했다.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리는 남자를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그와 자신의 처지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연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 치영은 그녀의 입술에 집중해야 했다.
“위험한 거 아니……. …협박 같은 것도… 그냥 이 사람이 현재 어디……. …보호해 줄 거… 여기서 빼 줄 수…….”
남자를 회유하는 듯했다. 공포에 질려 있던 그의 두 눈이 미심쩍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백한이 다시금 올리브 한 알을 짚으며 말했다.
“저희 좀 믿어 주세요. 의심이 많으시네. 아니면 그냥 지금 바로 현금으로 줄 수도 있고. 대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치를 거니까.”
백연과 같은 크기의 목소리를 내는데도 치영에게 백한의 목소리는 너무나 잘 와 박혔다. 이제 와서야 각인한 에스퍼라는 티를 내기라도 하듯.
그러나 가이드에게는 각인에 대한 특징적인 징후가 별로 없다. 그러니 착각이겠지. 안치영은 기백한과 아주 사소한 무언가로도 연결되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남자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뭔가를 작게 속닥거렸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치영은 그가 그들의 제안을 승낙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백한의 한쪽 눈매가 가늘어지며 눈물점이 살짝 이지러졌기 때문이다. 오래 그를 겪은 사람만 알 수 있는 기백한의 만족한 표정 중 하나였다.
거기까지 본 치영은 더 망설이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들이 지금 여기서 무엇을 얻었든, 남자의 확답을 들은 이상 자리를 이동할 것이다. 치영은 무조건 그 전에 센터로 복귀해야 한다.
그들이 남자에게 요구한 게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쓰다간 이대로 모든 걸 망치게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치영은 일단 벽 사이의 틈에서 나와 다른 테이블로 향한 뒤, 다른 서버에게 조용히 손짓하여 이동용 트레이 위를 가리켰다. 빈 그릇을 가지고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서버는 기백한 쪽 테이블을 주시하느라 치영에게는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치영은 약에 취한 채 입을 맞추고 있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지나쳐 빈 그릇을 조용히 옮긴 뒤 그걸 끌고 문 쪽으로 향했다.
천천히 급할 게 없는 사람처럼 걷다가, 마지막 테이블이었던 기백한 쪽을 지나치는 순간 트레이의 아래 칸을 정리하는 척 테이블과 반대 방향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몇 걸음 더 천천히 걷다가, 다시 느릿하게 허리를 편 뒤 문고리를 잡았다.
‘됐다…….’
치영은 작게 안심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서 그런 안락한 감정은 모두 빼앗아 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운명이 치영을 또다시 배신했다.
“근데, 거기 오빠.”
…씨발.
치영은 작게 욕을 지껄이며 익숙한 목소리를 등 뒤에 남겨 둔 채 그대로 문을 벌컥 열고는 밖으로 튀어 나갔다.
서늘한 시선이 등을 베일 듯이 날아와 꽂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치영은 문을 닫은 뒤 바로 트레이로 문을 막고는 그대로 복도 반대편을 향해 뛰었다. 종아리 근육이 터질 것같이 지면을 박찼다. 지금 이 순간 이곳을 벗어날 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기백한의 짐승 같은 촉이 저주스러울 정도였다. 치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아마 기백한이 이능으로 날려 버린트레이가 반대편 벽에 처박혀 부서지는 소리겠지. 그 큰 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뒤편에 메두사라도 남기고 도망가는 양 돌아볼 수가 없었다.
아찔했다. 치영은 지금 피식자가 된 기분이었다. 지난 몇 년간 죽도록 느꼈던 감정인데도 불구하고, 그중 오늘이 가장 선명했다. 치영은 운명을 두고 도망치려 노력했다.
출구가,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