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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10화 (110/114)

110화

그런 뒤, 박형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김이석이 놈들 본거지 캐내면, 너랑 난 저 논문 원본 찾아보는 걸로 하자고. 저놈들 성격에 레퍼런스를 모두 소거했을 리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박형인이 담백하게 대답했다. 턱을 괸 채로 뭔가를 생각하듯 검지로 책상 위를 두들기던 백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자매님 스케쥴 어떻게 되신대.”

“오후에 작전일 현장 조사 나가기로 저희 쪽에 말씀하신 것 외에는 파악된 거 없습니다. 연락해 볼까요?”

이인교의 말에 무언가를 가늠하듯 눈매가 좁아진 백한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자매님한테 저녁에 마실 나가 보자고 하세요. 오늘은 박 대위 말고 자매님이랑 나갈 거니까 박 대위는 손진화랑 조종영 사이 좀 파 봐. 표면적인 거 말고, 좀 더 깊게.”

“네.”

박형인이 짧게 긍정한 뒤로, 이인교가 동죽대와의 연락을 위해 자리를 떴다. 짧은 회의는 그것으로 끝마쳤다.

백한은 책상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작전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 * *

조현호의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 올수록, 치영은 귀가 아팠다.

“…근데 너 끝나고 어딜 가는 건데? 임무란 게 뭐야? 손진화 처장이랑 친해?”

100개의 질문이 들어와도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고 있던 치영은 시간이 되자 조현호를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는 그의 비서에게 이만 일어날 것이니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건넸다.

조현호가 그런 치영을 보고 투덜거리는 애처럼 짜증을 냈다.

“되게 빨리 가네.”

“최 비서님, 그럼 이후부터는 사내 경호 팀에 인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소위님. 걱정 마시고 퇴근하시면 됩니다.”

“너넨 내가 그냥 안 보이지?”

안면을 터 둔 최 비서에게 퇴근 후의 경호에 대해 부탁하자, 최 비서 역시 싱긋 웃으며 답했다. 조현호의 마지막 말에 최 비서는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치영은 상관하지 않았다.

사실 치영이 이곳에 와서 하는 일은 조현호에 대한 경호보다는 조현호의 주변 인물에 대한 파악이 중점이라 콜라숍으로 출근하기 전까지 인적 정보에 대해 계속해서 살펴봐야 했다. 다행히 오늘 치 일은 끝난 참이라 바로 콜라숍으로 출근하면 될 것 같았다.

운전병이 회사 후문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치영은 화장실로 가 옷을 갈아입은 뒤,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로비의 후문은 인적이 드물어서 옷을 갈아입을 때 썼던 볼캡을 꾹 눌러쓴 채 재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얼굴이 익숙한 운전병은 운전석에 앉은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깨우는 게 미안했지만 빨리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바로 올라탔다. 차 문 여닫는 소리에 깬 운전병이 성의 없이 경례 후 바로 출발했다.

치영은 고맙다는 말을 할까 말까 하다가 작게 속삭이듯 고맙다고 말했고, 애석하게도 그 작은 인사는 운행을 시작한 차의 엔진음에 의해 쉽사리 묻혀 버렸다.

퇴근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운전병의 실력이 꽤 좋은 터라 서울 시내를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콜라숍으로 향하는 외각에 가까워질수록 차의 속도는 점점 높아졌다.

치영은 콜라숍으로 가는 길 동안 느낄 수 있는 차 안의 적막이 나쁘지 않았다.

운전병은 치영에게 관심이 없었고, 치영 역시 그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때문에 그 짧은 출근길에는 늘 침묵이 동승했다. 사실 치영은 외롭게 자라고 외롭게 생활했을 뿐이지, 주위가 늘 시끄러웠다.

보육원에서는 12명의 아이들이 한 방에 모여 와글와글 잠을 자야 했고, 이악 부대에 있을 때는 새벽 훈련을 하는 무정부군들의 함성을 들으며 부엌 한편에서 자야 했다.

군으로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치영의 주위는 늘 치영을 두고 시끄러웠다. 그 탓에 이런 짧은 평화와 같은 침묵이 희한하고도 마음에 들었다.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 어느 한편에 내내 도사리고 있는 듯해도 말이다.

차는 막히는 것치고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 운전병이 절 내려 준 곳에, 먼저 온 이 중사와 페르소나 이능력자가 있었다. 얼굴을 몇 번 본 사이라 가볍게 인사한 뒤, 얼굴에 이능이 씌워지는 기묘한 감각을 인내하고 있는데, 이 중사가 대뜸 말했다.

“작전일이 곧이지 말입니다.”

“…….”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진화가 아무리 작전에 대해 대충 알고 있다 한들, 자신의 입으로 세부 사항들을 말하는 건 전혀 다른 의미이기 때문이다. 뭐에 쓰일지 모를 긍정의 답변을 함부로 내뱉기에는 나름 군부에서 구른 경력이 오래되었다.

이 중사는 그런 치영을 보며 의외라는 듯 눈썹을 슬쩍 올리더니, 치영이 보지 않는다 싶자 작게 욕을 중얼거렸다.

얼굴에 완전히 이능이 씌워지고 안치영이 아닌 ‘이창주’의 얼굴이 된 치영은 이 중사의 언짢음을 모른 척하며 이만 가 보겠다 말했다.

그러고는 콜라숍을 향해 걸었다. 그 거리는 여전히 매캐한 느낌이 났다. 다른 곳과 똑같은 대기에 같은 날씨인데도 어딘지 음습하고 미묘한 싸구려 단내가 나는 거리.

치영은 그 거리 속으로 익숙하게 섞여 들어갔다. 여기저기 은근한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터라 치영은 앞만 보고 걸었다. 골목 입구에서 조금 더 걷자, 치영의 비밀 일터가 나왔다.

가게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지하로 내려가 김 부장에게 출근했노라 하는 얼굴도장을 찍었다.

“어, 왔어. 가 봐라. 오늘은 주방 들렀다가 홀일 좀 봐 줘.”

“예.”

치영은 짧게 대답했다. 유니폼으로 환복한 뒤 주방으로 가자 오늘도 깎아야 할 감자가 산더미였다. 세척이 되어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싹이 난 부분을 살짝씩 도려내 가며 깎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할당량을 채운 뒤 주방장에게 꾸벅 인사하며 이만 홀로 가겠다고 말하자, 주방장이 배고프면 들러서 간식을 먹고 가라고 했다.

어쩐지 조금 쑥스러워 고개를 젓다가 또 끄덕이자, 주방장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먹겠다는 거야, 안 먹겠다는 거야.”

“…바쁘지 않으면 내려오겠습니다.”

“그래. 가 봐.”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이고 주방을 나서 별채로 향했다. 김 부장이 말한 홀이란 지난번 조현호를 마주친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현호는 여기서 일하는 것에 대한 질문도 꽤 많이 했다.

“무슨 작전인데 그런 데서 일해?”

“언제까지 일해야 하는데?”

“손님 접대도… 씨발, 아니다. 됐다.”

그러면서 꼭 끄트머리에 욕을 남겨놓고 저 혼자만의 질의응답 시간을 끝마쳤다. 그 시간 동안 치영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현호의 책상 뒤에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치영은 별채로 가는 좁은 계단을 지났다. 공기를 타고 미적지근한 단내와 연기 냄새가 났다. 아마 물담배를 피우는 것 같았다. 불순물이 함유된 연기 냄새에 코끝을 절로 찡긋거리며, 치영은 계단의 가장 위로 올라섰다.

복도는 한산했다. 룸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치영은 룸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이 복도에 내놓은 이동식 트레이를 끌어다가 접시를 내려보내는 소형 엘리베이터에 넣는 작업을 반복했다. 다 먹은 접시도 있었고, 음식이 새것 같이 깨끗한 접시도 있었다.

두 경우 모두 다 약에 절여진 에스퍼들이 있는 방에서 나온 것이었다. 에스퍼들이란 보통 해독력이 무척 좋아 일반인들에 수 배, 수십 배에 달하는 용량의 약을 복용 해도 쉽게 환각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때문에 그럴 때 필요한 것이 가이딩이다.

가이드의 가이딩과 함께 복용한 환각 물질이 가이딩에 민감도가 높은 에스퍼들로 하여금 약에 대한 역치를 현저히 줄여 주는 것이다.

그렇게, 가이딩 불법 성매매 업소에는 자연스레 에스퍼를 위한 환각제들이 돌기 시작했다.

치영은 이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악 부대의 주 살림원이 이런 항정신성 약물들과 가이드를 이용한 매춘 사업이었으니까. 치영의 등급이 조금이라도 높았다면 치영 역시 이런 곳으로 팔려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치영이 복도에 놓인 트레이들을 치우던 때였다. 어떤 룸의 문이 열리더니 치영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그를 불렀다.

“야, 너 새로 온 애지?”

치영은 행주로 트레이 위를 닦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이 다소 조급한 얼굴로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저 룸에 좀 대신 들어가 줄 수 있어? 나 화장실이 급해서…….”

“아, 네.”

별일이 아니었는지라 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종업원은 고맙다고 연신 말하면서도 이미 등을 돌려 화장실이 있는 쪽을 향해 경보하듯 걸었다. 그 다급한 뒷모습을 잠시 보던 치영은 행주를 내려놓고 종업원이 나왔던 룸 안으로 들어갔다.

별채에는 커다란 룸이 여러 개가 있는데, 종업원이 나왔던 곳은 다른 룸보다는 크기가 좀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다른 룸들이 워낙 큰 편이라 그보다 작다고 해도 족히 30평은 넘어 보였다.

조명의 조도는 다른 룸과 마찬가지로 어둡기만 했다. 치영은 겹겹이 늘어져 있는 모슬린처럼 얇은 직물로 된 휘장을 일일이 걷어 가며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룸 중앙에 도착했을 때, 치영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낯익은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술이 씨발, 싸구려밖에 없네.”

한 손으로는 술병의 목을 잡은 채 다른 손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의 라벨을 툭툭 쳐 가며 불평하고 있는 남자. 그의 산맥 같은 콧대에 방 안의 희끄무레한 조명 빛이 날아와 부서지고 있었다.

곧이어, 병목에 얹어져 있던 끝부분이 작게 코르크 처리된 마개가 그의 손에 의해 부서지듯 떼어졌다. 남자는 그대로 병목을 들어 올려 술병의 주둥이에 입을 맞췄다. 중력을 따라 내려온 호박색 액체가 그의 굵은 목울대를 오르락내리락 움직이게 만들었다.

이윽고, 남자가 치영을 돌아보았다. 허공에서 시선이 산란하듯 부딪쳤다.

기백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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