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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09화 (109/114)

109화

그리고, 조현호의 표정이 갑작스레 굳어졌다. 성격이 개차반인 것치고 잘 갈무리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에스퍼 파장이 넘실거리는 걸로 봐서 감정의 동요가 큰 것 같았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몹시 분노한 상태 같기도 했다. 그의 감정 변화가 인상적이라 눈여겨 보고 있을 때, 문을 벌컥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나이가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의 뒤로 키가 큰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뒤따라 온 남자는 꽤 잘생긴 편인데 희한하게도 인상이 흐릿했다. 높다란 콧대와 아몬드형 눈매, 짙은 눈썹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남이었는데도 얼굴을 전체적으로 인식하려고만 하면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눈은 눈, 콧대는 콧대로만 보면 분명히 그 생김을 알겠는데도 합쳐서 기억하려고 하면 안개 속에 불뚝 솟아 있는 첨탑처럼 희미한 외모였다.

‘어디서 봤더라…….’

치영은 그와 같은 느낌을 분명 알고 있었다. 그의 외모처럼 흐릿한 가운데 명징한 것을 찾고 있던 치영은 옅은 두통을 느꼈다. 상념을 방해한 것은 조현호의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회사에 다른 사람 들어왔다길래 와 본 거다.”

중년 남자가 치영을 보며 답했다. 치영은 기립한 채로 조현호와 남자 사이의 거리만 가늠하고 있었다.

보고서를 읽은 기억을 더듬어 보면 중년 남자는 아무래도 조종영 같은데, 뒤에 따라 들어온 인물이 수상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대낮이라고 납치가 어려운 것은 아니니, 치영은 조용히 움직여 남자와 조현호 사이를 비스듬히 가로막았다. 조종영이 납치 협박의 배후라고 알려진 상태에서는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외부인을 끌어들이신 건 부회장님이 먼저인 걸로 아는데요. 뒤에 있는 저분 말입니다.”

조현호는 불쾌감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부자 사이가 극에 달했다는 말이 딱 맞았다. 그와 조종영이 대치 중일 때, 뒤편에서 내내 가만히 있던 남자가 나와 인사했다.

“이사님, 김이협입니다.”

그는 조현호를 향해 웃으며 손을 뻗었다. 악수하자는 듯한 손짓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조현호가 혀를 찼다.

“뭐 하는 개새끼시길래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여기저기 냄새나 맡고 다니십니까?”

“조 이사!”

조현호의 날 선 말에 조종영이 호통을 치듯 그를 나무랐다. 조현호 주위에 에스퍼 파장이 일렁였기 때문에, 백한의 이능 파장이 스며든 치영의 넥타이까지 움찔거렸다. 주변에 다른 에스퍼의 파장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경비견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살벌한 기색 속에서, 남자가 씩 웃으며 말했다.

“아, 방금 말씀드렸는데요. 김이협이라고.”

개새끼라는 욕을 면전에서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싱긋 웃으며 제 소개를 하는 것이 어이 없었는지, 조현호가 혀를 찼다. 김이협이란 남자는 내민 손을 거듭 무시당하자, 이번엔 치영에게로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김이협입니다.”

조현호의 조부인 조필식이 경호원으로 군을 끌어왔다는 얘기는 새로울 게 없었기 때문에, 치영은 간단히 대답하며 손을 뻗었다.

“안치영 소위입니다.”

딱히 그 만남이 안녕할 건 없는지라 인사는 되돌려 주지 않고 자기소개만 했다. 맞잡은 손에서 에스퍼 파장이 희미하게 스며 나왔다.

치영은 어렵사리 그 실마리를 붙잡았다. 남자의 얼굴이 희미한 이유를 그가 ESP를 다루는 에스퍼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추측했었는데, 역시나 악수를 해보니 그에게서 이능 파장을 느낄 수 있었다.

김이협이라는 남자는 싱긋 웃고 있었지만, 여전히 얼굴을 알아보는 것이 힘들었다. 그때였다.

“손은 왜 잡아!”

조현호가 두 사람의 악수를 방해하며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낸 것이다. 치영은 조현호가 미친 건 아닐까 싶어 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는 귓등까지 붉어진 채로 쯧, 혀를 차며 조종영을 향해 말했다.

“데리고 나가세요. 어차피 경호원 구경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조현호를 흘끗 본 조종영이 치영을 뚫어지게 응시하더니 김인협을 향해 말했다.

“됐습니까?”

“충분합니다.”

뭐가 충분하다는 건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두 사람은 조현호에게 인사조차 없이 떠났다. 그들이 나가자 조현호가 치영을 바라보며 꽥 소리를 질렀다.

“너는 왜 또 거기서 악수를 다 하고 있냐! 인사성이 아주 발라? 무척 의외다?!”

조현호가 꽥꽥거리는데도 치영은 대답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백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종영 옆에 있던 남자의 특징에 대해서.

조현호가 옆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며 그럼 지난번 자신과 악수할 때는 왜 흔쾌히 하지 않았냐고 따지는 동안, 메시지 창 옆에 숫자 1은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 * *

“아빠 출근하셨으니까, 우리 자식 새끼들 모여서 엄마랑 일 좀 해보자.”

기백한이 씩 웃으며 본인을 엄마라 자칭하는 말에 허인나가 대놓고 웩, 하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김민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 어머니 수원에서 갈빗집 하시면서 잘 계십니다. 누구보고 우리 엄마래. 진짜 모친 모독하기 있습니까? 가족 건들지 맙시다.”

기백한은 허인나의 헛구역질과 김민우의 짜증을 말끔히 무시한 채 시원하게 쭉 찢어진 채 웃고 있는 입매로 작전의 개요를 설명했다.

“손진화, 이 새끼네 빨대 얼마나 꼽아 뒀어? 넉넉하게 해드렸지? 우리 작전처장님 서운하지 않게 잘하란 말이야.”

“그거야 뭐, 여부가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감시 중인데 진화 새끼 성격만 더러운 줄 알았는데 아랫도리도 더럽기 그지없어서 매일 가는 가이딩 매매 업소가 바뀌고 있습니다.”

손진화는 불법 가이딩 매매 업소, 속칭 쇼프숍을 다니는 걸 취미로 삼았다. 백한은 손진화의 정력을 믿었다.

“딱 봐도 정력 달리는 놈이 그렇게 열일하고 다닐 리가 없다. 더 파 봐. 소프숍들이 다 다른 업장 같아도 관리하는 새끼들은 한통속일걸.”

“옙.”

김민우가 구부정한 손날을 눈썹 옆에 붙이며 대충 경례하는 척을 했다.

이인교가 들고 있던 태블릿 PC의 액정을 스와이프하며 보고했다.

“조종영이 이악 부대의 뒤를 제대로 받쳐 주는 모양입니다. 본인 경영 승계권이 달린 문제기도 하고, 불법 에스퍼 용병을 이용해 제 3 세계에서 벌어들인 돈을 비자금으로 사용한 정황이 있는데 이건 일단 킵해 둘까요?”

“그 물건은 딱 봐도 관상이 그럴 새끼야. 지금은 보류해 놔. 아직 너무 약하니까 물 좀 주고 어떻게 자라나 보자고. 그리고 다음은… 인나야, 새끼야. 좀 일어나 봐라. 대대장님이 네가 조사해 온 거 듣고 싶어서 애가 닳는다.”

기백한이 팔을 쭉 뻗어 책상 앞에서 졸고 있던 허인나의 목덜미를 콱 붙잡았다. 침까지 흘려 가며 졸고 있던 인나는 졸지 않은 척하며 서류철을 잡았지만, 거꾸로 드는 바람에 실패했다.

“음, 아… 제 차례예요, 벌써? 아니, 다른 분들이 너무 시원찮았던 거 아닌가. 뭔 벌써 내 차례가 돌아와. 이래서 우리 남성분들 나이 한 살, 한 살 드실 때마다 시무룩해지시는 거 조심하셔야 한다니까요.”

“상관들 성희롱하지 말고 얼른 보고나 해.”

인나의 말에 박형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인나는 내내 졸다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조사해 온 것을 읊었다.

“이악 부대가 몇십 년 전 자행한 실험에 대한 논문입니다.”

그녀가 레이저포인터를 눌러 벽면에 띄워져 있던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는 논문의 제목과 저자명, 초록이 쓰여 있었다.

[가이드의 신체 구성별 복제 성공 사례]

“으웩, 저게 뭐야. 인간 복제라도 했다 이거야?”

김민우가 대뜸 미간을 찌푸렸다. 기백한은 혀로 한쪽 볼살을 밀어냈다. 부관이 찾아온 자료가 잃어버렸던 퍼즐 한 조각처럼 딱 맞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가늘게 뜬 기백한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전문 내놔.”

그 말에 허인나가 드물게 안색이 흐릿해지더니 대꾸했다.

“그게 말입니다……. 지금은 논문이 아예 폐기된 상태라는데요. 학회에서도 삭제되고 1저자, 2저자 할 것 없이 교통사고로 사망, 심장마비로 사망, 지류로 남아 있는 것들도 전부 파쇄당해서 원본의 행방이 불명하다고 합니다.”

“네가 못 찾으신 건 아니고요?”

기백한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리며 말했다. 허인나는 억울하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아닙니다. 진짜 백방으로 다 뒤져 봐도 없는 게 아무래도 이악 쪽에서 청소한 모양입니다.”

대원들은 기백한이 그 논문의 행방에 대해 찾는 이유가 그저 이악 부대가 자행해 온 가이드들을 향한 비인륜적인 실험에 대한 증거 찾기인 줄로만 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하나, 백한에게는 다른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근데 왜 이런 회의를 안 소위 빼놓고 합니까. 그래도 팀원인데.”

김민우의 불퉁한 말에 백한이 그의 뒷머리를 툭 치고는 다시금 벽 위에 띄워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논문의 초록은 반쯤 잘려 나간 상태였다.

[본 연구는 가이드별 신체 구성이 복제 성공에 대한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본 연구의 대상은 10대, 20대, 30대 가이드들(150명)로, 이 중 75명을 실험 집단으로, 다른 75명을 통제 집단으로 배정하였다. 실험 집단의 가이드들에게는 약물 투여를 1일 2회 이상 실시하였고, 약물은 아세틸콜린을 변형시켜 만든…….]

기백한이 궁금한 것은, 저 논문 속 실험군들이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에 버려졌냐는 것이었다.

“150명…….”

백한은 화면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듯 중얼거렸다.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기분 더럽게 머릿속을 갉아먹는 벌레가 스멀스멀 움직이는데 그 위치를 찾지 못해 잡아 죽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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