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차 안의 뾰족한 공기는 경호 대상의 회사 앞까지 지속되었다. 기백한은 말이 없었고, 이따금 치영이 그의 옆얼굴을 바라볼 때마다 굳은 하악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상황 자체가 몹시 불편했던 지난날과는 다르게 치영은 담담하게 오늘 할 일들을 속으로 정리했다. 저렇게 기분 안 좋은 걸 보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수 있게 된 치영은 도착하자마자 수고하라는 말과 함께 벨트를 풀고 지프에서 내리려던 참이었다.
안전벨트를 풀려던 손이 붙잡히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뭡니—.”
까, 라는 마지막 음절은 기백한의 입술이 닿음과 동시에 짓눌려 사라졌다.
“읍—!”
뭐하는 짓이냐는 물음도 그 좁은 틈에 눌려 버렸다. 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뒷덜미를 잡은 손이 억셌다.
치영은 빠르게 간파했다. 기백한은 지금 심술을 부리고 싶은 것이다.
옛날에는 기백한이 어떤 인간인지 몰랐다. 때문에 치영은 이런 때에도 그저 공격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방어라는 것은 단단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고, 저처럼 내면이 나약한 이는 외피에 가시를 세우는 게 최선의 방어라고 여겼으니까.
치영은 늘 있는 힘껏 반항했었다. 기백한을 좋아하면서도 그의 손길에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애완동물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치영은 기백한을 잘 안다. 그에게 익숙해진 만큼 말 안 듣는 짐승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된 건지도 모른다.
‘어디서 또 꼴 받았는지 모르지만 대충 맞춰 주면 이런 건 금세 끝나게 되어 있어.’
치영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사람은 원래 욕심이 많을수록 번민과 고뇌가 많아진다. 지금의 치영에게는 모두 부재한 것들이다. 욕심이 없어 번민과 고뇌가 줄어든 것이다. 지금처럼 해야 할 것들이 명징하던 때가 있었을까. 치영에게는 이제 목표만이 남아 있다. 다른 건 다 빼고 오로지 그것만이 치영을 살게 했다.
한숨을 참으며, 치영은 천천히 목덜미에 힘을 풀었다. 꽉 다물고 있던 입술 틈도 마찬가지였다.
이끄는 대로 끌려가 주었다. 그런 치영의 반응을 느낀 것인지 뒷덜미를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조금 느슨해졌다. 기백한은 치영의 입술을 마치 제 것인 양 파고들었다.
그의 파장이 스파크처럼 일어나 치영에게 엉겨드는 것이 느껴졌다. 치영은 그것들을 받아 주었다. 백한의 손이 치영의 등을 문지르고 있었다. 정장 위로 날개뼈를 더듬고 등골의 위치를 확인했다.
입술이 떨어진 틈 사이로, 백한이 속삭이듯 말했다.
“…옷 위로도 이렇게 뼈가 만져지는 거면 얼마나 마른 거야.”
나름 근력 운동도 열심히 하는데, 치영의 몸에는 지방이고 근육이고 둘 다 잘 붙지를 않았다. 그나마 꾸준히 운동한 덕에 골격에 붙어 있는 근육들이 탄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백한 같이 무기처럼 보이는 신체는 아니었다.
그 부분에 살짝 콤플렉스가 있는 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백한이 치영의 그런 불쾌를 읽은 것인지, 아직도 입술을 맞댄 채로 피식 웃었다. 입술 위에 그의 웃음이 일으킨 작은 실바람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까까지는 좆 빠지게 화가 끓어올랐는데, 좀 나아진 것 같기도 하고.”
“축하드립니다. 그럼 이제 좀 떨어지세요.”
치영이 백한의 가슴팍을 밀며 말했다. 기백한은 그대로 그런 치영의 손목을 붙잡아 더욱 끌어당겼다.
“이상하네. 왜 그렇게 화가 났었을까.”
기백한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더듬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팔을 뻗어 치영의 목울대를 검지로 슬쩍 훑으며 말했다.
“널 죽여도 분이 안 풀릴 것 같아 오히려 오래 살려 두고 싶은 느낌이었는데. 근데 그런 욕구가 또 쉽게 꺼진단 말이야…….”
그래. 이제는 아예 면전에 대고 살인 예고를 하는구나. 치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기백한의 턱을 잡히지 않은 손바닥으로 쭈욱 밀어냈다. 기백한이 그런 치영의 손바닥에 쪽쪽 키스했다.
“좀 꺼지십쇼. 늦었습니다.”
“그래, 들어가 봐.”
말은 그렇게 해 놓고서 여전히 떨어지지는 않는다. 풀지 않은 팔은 여전히 치영의 허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건가 싶어 가만히 바라만 보자 한숨을 내뱉으며 겨우 떨어져 주었다.
“이런 식으로 가랑이에 거미줄 치는 거 수지타산에 안 맞아. 이거 죄 말랑거려서 그냥 삼켰다간 쭉 찢어질 것 같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옆얼굴이 답지 않게 퍽 괴로워 보였다. 기백한 일신상의 제발 안녕 못 할 일 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치영은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기백한이 보조석 창문을 내리더니 치영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자기야, 그 새끼가 꼬리치면 애인 있다고 말해!”
치영은 뒤돌아보지 않고 중지만 접어 손을 치켜든 뒤 그대로 걸어 건물로 들어갔다. 뒤에서 지프가 출발하는 엔진음이 그릉그릉 들렸다.
추가 로비로 들어가 이사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탄 뒤, 백연이 일러 준 작전 개요에 대해 다시금 떠올리며 숙지했다.
“작전 개시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간략하게 말하겠다. 안 소위는 그날 내내 조현호에 옆에서 근접 경호를 맡는다. 경호 대상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위급 시 이쪽의 지시 사항을 따라 주지 않는다면 무력을 불사해도 좋다.”
“하지만 그는 에스퍼가 아닙니까. 제 힘으로는…….”
“가이딩 거부 증세 때문에 A급 에스퍼 치고는 신체 능력도, 이능력도 제대로 발휘를 못 한다더군. 안 소위의 체술 능력만으로 충분히 누를 수 있을 거다.”
기백연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누가 봐도 치영에 대한 칭찬을 하고 있었다. 상관의 말을 자르고 아닙니다, 하고 부정할 수 없는 노릇이라 치영의 귓등만 붉어졌었다.
어쨌든, 백연의 말을 요약하자면 조현호의 경호 임무에 굳이 조현호의 기분을 생각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작전일이 가까워지자 춘란, 추국, 동죽, 세 부대는 모두 제각각 바빠 보였다.
춘란이 작전의 사령탑을 맡으며 현장에 투입되는 조라면, 동죽대는 작전일에 현장을 엄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추국대 역시 현장의 엄호를 맡는다고 하는데, 치영이 생각하기에 그 정도 실력의 인원들이 모두 현장 엄호를 맡는 건 이상했다.
애초에 작전의 난이도 등급 자체가 높지 않은데 말이다. 서‧경 센터에서 가장 강한 3중대가 한꺼번에 덤빌 만큼 대단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엘리베이터가 이사실이 있는 층에 멈춰 섰다. 누가 왔나 확인하기 위해 이쪽을 바라본 조현호의 비서가 치영의 얼굴을 보고 살짝 묵례했다. 치영 역시 인사를 돌려주자, 비서가 지금 바로 이사실로 들어가도 된다고 안내했다.
노크와 함께 문을 여니 담배를 태우고 있던 조현호가 치영을 바라보았다.
“일찍 왔네.”
조현호가 황급히 재떨이에 아직 장초인 담배를 눌러 끄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치영은 고개를 꾸벅이면서도 실내 금연법이 실행된 지 꽤 오래인데 저래도 되나 싶었다.
살짝 상기된 얼굴로 창문까지 여는 걸 바라보다가 용건을 꺼냈다.
“금일부터는 정해진 시간까지 제가 근접 경호를 맡게 되었습니다. 설명은 미리 들으셨을 겁니다.”
“어, 어…….”
조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더듬는 것이나 제 목덜미를 연신 손으로 문지르는 게 이상해 뭔가 할 말이 있나 싶어 가만히 서 있자, 이쪽을 흘끗 보다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저번에는 내가 좀… 가이딩이 매번 모자란데 네 가이딩은 거부감이 없는 게 이상—.”
꼭 남들이 들으면 민망할 만한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말하더니, 배회하던 시선이 치영에게 머물자마자 무언가 충격적인 걸 본 사람처럼 말을 멈추고 급하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너—!”
그러더니 치영에게 손을 뻗었다. 치영은 반사적으로 조현호의 팔을 내치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뭡니까?”
“…그 새끼한테 가이딩 해 줬어?”
영문 모를 소리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새끼가 기백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쨌든 그는 제 페어 에스퍼니 가이딩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뜸 저렇게 묻는 게 불쾌했다. 에스퍼들이란 하나같이 이런 개자식밖에 없나 싶었다.
그러나 춘란대 사람들을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그냥 제 주위에 저런 놈들이 유달리 많다는 걸 깨달았다.
“일 얘기만 하시면 됩니다.”
치영은 딱 잘라 말했다. 게게 풀려 가던 조현호의 눈동자가 천천히 돌아왔다.
“…그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한 조현호가 쯧,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동선부터 맞춰 보자고. 밖에 있는 애한테 그날 내 동선은 받았지?”
비서를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이사실에 딸린 비서실에서 조현호의 작전일 동선이 넘어온 참이었다.
회장에 들어가 누구와 인사할지 순서를 정해 둔 것인데, 보통 사업과 기업의 중요도에 따라 짧은 인사라도 순서를 정해 두는 듯했다.
조현호는 머리가 어지러운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소파에 앉더니, 치영에게 맞은 편을 권했다. 치영은 방사 가이딩을 전개했다. 안색이 창백해져 있던 조현호가 놀란 듯 치영을 바라보았다.
“너…….”
“오늘부터는 방사 가이딩을 전개하겠습니다. 가이딩 거부증에 대해 알아보니 수술 후 환자의 첫 식사로 미음을 주는 것처럼 미량의 양을 전개하라고 되어 있던데, 이 부분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냐니, 존나게 좋은—. 아니, 근데 왜 미량이야. 나는 네 가이딩을 좀 더 먹고 싶…….”
조현호가 다급한 어투로 말했다. 소파에 붙어 있던 엉덩이를 떼어 아예 테이블을 넘어 건너올 기세였는데, 그때 마침 삐— 소리가 들리며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내선전화에 불이 들어왔다.
조현호는 작게 욕을 지껄이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성질을 냈다.
“손님 계신데 웬 방해야.”
저쪽도 성질머리가 어지간히 더럽구나. 치영은 단순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