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106화 (106/114)

106화

“일어나야지.”

그 말에 눈을 뜬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치영은 갑자기 들어온 빛에 찌푸려지는 눈살을 펴지 못한 채로 저를 깨운 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이미 일어나 씻은 것인지 앞머리가 살짝 젖은 백한이 치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뭡니까?”

“뭐긴 뭐야. 너 오늘부터 조 싸가지 경호 나가잖아. 일어나.”

“아.”

치영은 그제야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치영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집어넣어 번쩍 들어 올린 백한이, 아예 치영을 화장실로 안아 들다시피 하여 데려갔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저질스럽기 그지없었다.

“오줌 싸는 것도 봐 줘야 돼?”

“좀, 꺼져요, 제발 좀—.”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치영은 버둥거리며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마구 백한을 걷어찼다. 백한은 타격도 없는지, 킥킥거리며 물러났다. 아, 저 웬수 졸라 싫다. 치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백한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올까 봐 문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씻고 나오자 백한은 아래층으로 내려간 듯싶었다. 치영은 지난번 김민우와 사 왔던 정장을 입고는 방을 나섰다. 아래층에는 박형인만 나와 있었다. 치영은 주방으로 들어가며 형인에게 인사했다.

“대위님, 좋은 아침입니다.”

“안 소위도요. 애새끼들 퍼질러 잡니다. 먼저 아침 먹어요.”

형인이 다정하게 대꾸했다. 치영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뭐 도와드릴 것 없냐 물었지만, 형인은 오늘도 역시 고개를 저었다.

치영이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자 앉아 있으라고 말한 뒤, 죽순이 들어간 중국식 게살 스프가 담긴 접시를 그의 앞에 놓아 주었다.

아무 숟가락으로나 먹으려던 치영에게 도자기 스푼으로 먹어야 맛있다며 안쪽이 꼭 보트처럼 오목한 자기 스푼을 가져다준 형인이 뒤를 돌자마자, 백한이 현관문을 열고 군 내 통신 신문의 헤드라인을 읽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커피 우유 팩이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센터 내 난슬동에는 가끔 우유 아저씨와 야쿠르트 이모님이 오시고는 했다. 오늘은 우유 아저씨 차례인 듯싶었다.

치영이 막 게살 스프를 한입 뜨려는데, 백한이 그의 앞에 커피 우유 팩을 내려놓았다.

“학교 가면서 먹어라.”

무슨 학교. 꼭 어린애에게 말하듯 어르는 것이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윙크를 하는 게 얄미웠다. 게다가 커피 우유라니. 치영은 커피 우유에 알레르기가 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 말 않고 받아 들어 가이딩실 희정 씨에게 주었을 것이다. 더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알레르기가 있다고 하면 그가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할까 봐 굳이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치영은 한숨을 섞어 말했다.

“저 커피 우유 알레르기 있습니다.”

그 말에 백한의 두 눈이 커졌다.

“뭐? 너 전에는—.”

그가 뭔가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허인나가 꺼억— 트림을 하며 주방으로 들어오더니 국자를 꺼내 박형인이 휘젓고 있던 게살 스프를 한가득 떠 입으로 가져가며 크윽, 크윽 소리를 냈다.

“아, 해장 된다.”

“야, 뭐야. 나도 줘.”

그 뒤를 김민우가 비척비척 따라 들어오더니 저도 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치영은 백한이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나 싶어 잠시 쳐다보다가, 그리 궁금하지 않아 그냥 조용히 그릇을 비웠다. 설거지 정도는 제가 하고 싶었기 때문에 얼른 비운 뒤 잽싸게 싱크대로 달려갈 작정이었다.

기백한이 그런 치영의 앞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더니 턱을 괴고는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죽순의 오독거리는 식감을 즐긴 치영은 답지 않은 속도로 빠르게 접시를 비워 나갔다.

백한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누가 너 쫓아오냐?”

치영은 굳이 답하지 않았다. 남은 한 숟가락을 빠르게 입으로 가져간 뒤 자리에서 일어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얼른 싱크대로 가져가 박형인이 저를 발견하기 전에 설거지를 하려는데, 뒤쪽에서 커다란 손이 내려오더니 치영을 껴안다시피 했다. 등 뒤에 단단한 가슴팍이 와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둬. 내가 할 테니까. 정장에 물 묻히면 되겠냐, 이 칠칠아.”

기백한이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제 정장을 내려다보았다. 이번만큼은 기백한의 말이 맞았다. 괜히 옷감이 예민한 정장에 물이 튀어 봤자 좋을 것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형인이나 다른 에스퍼들이 아니라면 누가 설거지를 해도 상관없었기 때문에 알겠다고 끄덕이며 싱크대 앞을 빠져나왔다.

백한은 커다란 등을 옹송그린 채 설거지를 했다. 치영이 들고 있을 때는 그릇이 꽤 컸는데, 백한이 들고 있자 꼭 애들 접시인 양 작아 보였다.

김민우가 덜 뜬 눈으로 스프를 후루룩 먹다가 박형인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한 대 얻어맞은 김민우는 아프단 기색도 없이 제 뒷덜미를 북북 쓸며 치영에게 말했다.

“안 소위 또 넥타이 못 맸어요? 오늘도 대대장님한테 부탁해야겠네?”

아무렇지 않게 건네는 말에 치영은 흠칫 놀랐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넥타이 매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제 인터넷 동영상을 찾아 따라 하려고 했는데, 콜라숍에 출근하는 바람에 시간이 없었다.

설거지거리라고는 치영이 먹었던 접시와 스푼뿐인지라 냉큼 그릇을 씻어 둔 기백한이 싱크대 아래 걸려 있던 수건에 손을 닦으며 주방을 나서 거실 쪽으로 가던 치영을 돌아보았다.

“넥타이는 어쨌어.”

“여기 있습니다.”

백한의 물음에 치영은 정장 상의에서 제 넥타이를 꺼냈다. 둥글게 말려 있던 것을 꺼내자 실크로 직조된 넥타이가 스륵 소리를 낼 것처럼 손안에서 축 늘어졌다.

이미 물기를 여러 번 닦은 백한이 아예 제 티셔츠에도 또 한 번 손을 문질러 닦은 뒤 치영에게로 다가왔다.

“줘 봐.”

치영은 드물게 그의 말에 반항하지 않고 그대로 넥타이를 내밀었다. 그가 저번처럼 넥타이에 에스퍼 파장을 숨겨놔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얌전한 치영을 흘끗 내려다본 백한이 피식 웃었다.

“웬일로 조용해?”

“너무 세게 조이면 답답합니다.”

백한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저 할 말만 했다.

“예, 예, 상감마마. 알아서 모십죠.”

백한이 키득거리며 넥타이를 매 주었다.

치영은 정복을 입어 본 적이 드물었다. 제 몫으로 맞춰진 정복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입고 국가의 행사나 표창 수여식에 갈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한은 무수히 많은 훈장을 어깨와 가슴팍에 새긴 만큼 그런 자리에 갈 일이 많았다. 그것이 그와 저 사이에 이런 차이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넥타이 하나 맬 줄 모르는 어른이 된 저와 백한은 달랐다.

문득, 그런 백한을 올려다보았다. 백한이 강한 것은 오만의 이유가 되었다. 그가 아름다운 것 역시 그의 오만이 자라는 훌륭한 텃밭이 되었을 것이다.

각인과 같은 첫사랑이 점점 지고 있었다. 아직 그를 사랑하지만 치영의 감정은 열병의 끝 무렵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마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후련함과 병을 이겨 내느라 쏟아부었던 체력이 돌아오지 않아 탈력감에 숨을 밭게 몰아쉬는 것. 치영의 지금 상태였다.

치영은 어느 시점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백한과 행복할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제게 넥타이를 매 주는 백한이 신기하기만 했다. 남들이 보면 퍽 사이가 좋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기백한은 대체 언제부터 저를 시시콜콜 챙기는 걸 즐거워했을까. 도톰하여 육감적인 선을 자랑하는 백한의 입술 선이 그린 호선을 보면 즐거워하는 게 분명한데.

대체 언제부터인지, 또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어볼 만큼 궁금한 건 아닌지라 그저 그의 입꼬리를 시선으로 훑은 치영은 접촉으로 인해 그의 에스퍼 파장이 제 넥타이에 옮겨붙기를 바랐다.

“뭐야. 오늘 왜 이렇게 얌전해.”

기백한이 기특한 아이를 보듯 씩 웃더니 치영의 볼을 툭 치고는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서로의 가슴팍이 붙자 백한이 입고 있던 티셔츠의 얇은 면 아래로 그의 단단한 복근과 흉근이 느껴졌다.

치영은 말없이 안겨 있었다. 어떻게든 파장을 더 옮겨 놔야 조현호로부터 귀찮은 짓을 당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치영의 반응이 희한한지 백한이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개처럼 킁킁거리며 의아해했다.

“이상하다. 누가 우리 안치영이한테 뭐 잘못 먹였나?”

“…….”

치영은 대꾸하지 않았다. 한동안 치영을 끌어안고 있던 백한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살짝 풀린 백한이 제 아랫입술을 핥더니 그대로 치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뭡니까?”

“…….”

뭔가 싶어 묻는데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백한은 그대로 치영을 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이끄는 속도가 꽤 빨라 치영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단 난간을 잡아야 했다.

“뭐냐니까요.”

백한은 여전히 대답해 주지 않은 채로 치영을 2층 계단에서 제일 가까운 제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백한의 방에 간만에 와 본 치영은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백한의 애프터 쉐이브 향과 에스퍼 전용 향수 냄새에 기분이 묘해졌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목련과 장미 나무의 아로마가 치영을 휘감는 듯했다.

백한은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켠 뒤, 치영을 끌어다 벽에 기대게 만들고는 문을 닫았다.

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대답조차 않는 것이 뭔가 싶었기 때문이다. 역광 탓에 방의 조명을 등지고 선 백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뚫어지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느낄 수 있었다.

“…….”

“…….”

이상한 기분이 갑작스레 들어 치영 역시 입을 다물었다. 백한은 여전히 치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치영이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팔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 이제 그만 가야—.”

그 순간, 백한이 그대로 고개를 내려 치영의 입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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