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105화 (105/114)

105화

“기 중령이 정보원에 대해 말한 거 없어?”

“무슨 정보원 말씀이십니까?”

치영은 일단 손 처장의 물음에 모르는 척을 했다. 다소 순진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말이다.

눈을 가늘게 뜬 손진화가 그런 치영을 바라보더니 쯧, 혀를 차며 대꾸했다.

“혹시 그런 얘기가 들린다 싶으면 보고하도록 해.”

“예.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치영은 평이한 어조로 물었다. 상명하복이 우선시되는 군인만큼, 그런 물음 자체가 ‘나는 네 부관이 아니다.’ 하는 반항과 같았지만 치영은 얼굴 표정에 신중을 기하여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묻는 신병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 노력이 통한 것인지 손 처장은 불쾌해 보이면서도 치영에게 윽박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쪽 정보원이 이악의 정보를 물어다 준다는데, 그러면 자네가 소프숍에서 잠입하는 날에 이악 부대 대장이 방문하는지 아닌지 알 수도 있는 거잖아.”

간단한 변명이었지만 어린애가 생각한 논리처럼 말이 되질 않았다. 기백한의 정보원이 이쪽에게 이악 부대의 소프숍 방문일을 알려 준다고?

제가 소프숍에 출근하는 것을 기백한에게 비밀로 하라 할 때는 언제고.

누굴 멍청이로 아나 싶어 어이가 없었지만, 치영은 가까스로 기가 막힌 낯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까.”

“그래. …요즘에 그쪽에 매일 나가잖아? 별다른 일은 없어?”

첫날에 조현호를 마주친 것과는 달리 그다음 날부터는 조용했다. 치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내내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조 이사… 그러니까 명성 조현호에게는 제 얘기를 해 두신 겁니까?”

“그럼 말 안 하고 저녁에 그냥 소프숍으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아? 그쪽에 양해를 구해야지. 재벌들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는 듯한 몸짓이었지만, 실로 치영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새끼, 알고는 있었지만 내 안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군.’

조현호처럼 변덕이 심한 성격에게 치영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는 것은 치영의 안위가 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치영은 그게 이상했다. 손 처장이 자신의 안위에 대해 관심 없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아직 그에게 쓸모가 있다.

이악 부대의 대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간단한 임무를 맡긴 했지만, 어쨌든 임무 수행 중이지 않나.

바꿔 말하자면, 치영이 맡고 있는 임무 자체가 손 처장에게는 큰 상관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치영은 손 처장이 저를 소프숍에 출근시킨 것 자체가 복면 임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뭘 원하는 걸까…….’

치영은 고심해 보았다. 손 처장의 행적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치영 같은 경우에는 백한처럼 정보원을 구할 수도 없으니 좀 더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이 말도 안 되는 임무에 휘말려 전역이라는 소박한 꿈은커녕 더 큰 화를 부를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창백해진 낯빛을 숨기며, 치영이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 수고해요.”

손 처장은 어딘가로 연락을 하려는 듯 내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치영은 짧은 경례 후 그대로 작전처장실을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이 중사가 치영에게 페르소나 이능을 받고 가라고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을 바꾼 뒤, 치영은 오늘도 콜라숍으로 향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 * *

웃기는 것은 따박 따박 일급으로 지급되는 돈이 꽤 모였다는 것이다. 똑같은 주방 일을 해도 노동력을 뜯기기만 했던 어릴 적과는 달리, 제 노동이 돈으로 돌아오는 것이 신기했다.

일급은 치영이 가이드로서 받을 수 있는 돈에 비하면 형편없었지만 나름 공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은 이 돈으로 춘란의 에스퍼들과 기백연에게 뭔가 선물을 할까 싶었다. 기백한은 뭐… 돈도 많아 보이니 딱히 거기까지 제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퇴근한 뒤 받은 일급을 잘 숨겨 둔 치영은 당직을 서다 왔다는 핑계를 만들어 두었음에도 묘하게 신경이 쓰여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가이딩 파장을 전개했다.

그냥 오늘 하루 힘들었을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했다.

그렇게 치영은 2층 제 방으로 올라가 샤워를 했다. 콜라숍의 눅눅한 공기에 절여진 머리카락에 혹여나 담배 냄새나 음식 냄새가 배어 있을까 봐 여러 번 샴푸 한 뒤 꼼꼼히 씻어 냈다. 그러고는 젖은 몸을 닦고 잘 때 입는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올라갔다.

“아, 으…….”

피곤함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이불을 덮은 것도 아니고 침대 밖으로 정강이의 반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데도 엎드린 상태에서 그대로 고롱고롱 졸아 버렸다. 오늘도 감자를 두 박스나 깎다 왔으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깜빡 잠이 든 지 얼마 안 되어, 치영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깨어났다.

“헉—!”

“쉬—. 나야.”

나는 무슨 나야. 왜 또 내 방에 들어 온 건데.

치영은 제 허리를 옭아맨 기백한의 팔을 밀어내려고 노력하며 생각했다. 하지만 기백한에겐 치영의 반항이 너무나 미미하게 느껴진 건지, 그는 치영에게 “갑자기 내 팔은 왜 만지작거려?” 하는 열 받는 소리나 늘어놓았다.

치영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짜증을 냈다.

“제발 중령님 방 가서 주무십쇼.”

“응. 그러려고.”

한 번에 들어 먹는 꼴을 본 적이 없다. 치영은 짓씹듯이 말했다.

“네 방으로 꺼지라고.”

“목소리 가라앉은 거 섹시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머리가 띵한 기분이었다.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문 치영을 대신하여 백한이 키득거렸다. 치영을 잔뜩 끌어안은 탓에 목덜미에 와 닿는 백한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간지러워 움츠리자, 하품 섞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형 피곤하다, 치영아.”

“존나 어쩌라고요.”

“깼으면 뽀뽀해 주고 자.”

치영은 어둠 속에서도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 건지, 백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입술을 붙여 왔다. 안쪽으로 들어오는 살덩이에 이마를 쭈욱 밀어내자, 의외로 순순히 물러나 준다.

“자다 깨워서 화났구나, 우리 고양이.”

“누가, 고양이야…….”

“너. 존나 고양이 같아. 안아 들면 쭉 빠져나가려고 하고, 뽀뽀하면 뺨 후려치고, 성질 못돼먹고, 주인 아닌 놈들한테 애교 부리고. 예뻐서 죽여 버리고 싶은 게 딱 고양이지.”

“…미친놈인가, 진짜로.”

“나한테 그런 말 대놓고 하는 놈은 너밖에 없는 거 알아?”

‘다른 놈들이 너처럼 대놓고 하면 다 죽여 버려서 그런가 봐.’ 백한이 치영에게 그렇게 속삭이며 키득거렸다. 그가 웃을 때마다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치영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조현호를 경호하려면, 아예 백한의 파장을 온몸에 휘감고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생각났다. 개발한 기술이 아직 불안정한 탓에 에스퍼의 파장을 붙잡아 두는 힘이 약해 이렇게 몸이 닿아 있을 때만 옮겨 올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치영은 몸에 힘을 쭉 뺐다. 앓느니 죽는다고, 어차피 이 품에서 도망치지 못할 거라면 제게 이득이 되는 구석이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치영이 얌전히 기대어 오자 백한이 반색했다.

“오, 웬일로 착 안겨?”

“아가리 좀.”

“너 은근히 입이 험하더라.”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내 입이 더러운 것도, 성격이 개 같은 것도 다 네 탓이지 내 탓이겠니.’ 싶었다. 치영의 속마음을 모르는 백한이 그를 잔뜩 끌어안은 채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호흡이 와 닿는 목덜미와 귓불이 간질거렸다. 백한의 파장이 치영에게 엉기는 것이 느껴졌다.

꼭 거대한 맹수가 치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그 점은 백한과 똑 닮아 있었다. 치영은 잠이 다 깬 눈을 깜빡였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가 방 안의 것들을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요즘 왜 이렇게 늦게 다니십니까.”

치영은 제 심박수가 높지 않기를,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라며 물었다. 백한에게는 아무것도 들키기 싫었다.

“오, 이번엔 관심까지?”

“…….”

“형 바빠서 외로웠어? 그럼 왜 입술 빨아 줄 때 밀어냈어.”

백한이 치영의 두 다리 사이로 제 굵은 허벅지를 밀어 넣으며 은근히 속삭였다. 치영은 제 허리를 꽉 끌어안아 서로의 가슴팍이 맞붙은 상태에서 허벅다리가 다리 사이로 들어오기까지 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파장이 아까보다 더 미친놈 널뛰듯 난리를 쳐 댔기 때문에 가만히 안겨 있는 중이었다.

엉겨 붙는 파장이 가지 못하게 체표면에 미세한 가이딩 파장을 도포하듯 전개해 붙잡자, 오히려 좋다는 듯 피부 위를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에스퍼 파장이나 그 주인이나 집요하고 질척거리는 구석이 있었다.

치영이 대답하지 않자 백한이 그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응?” 하고 치영의 대답을 재촉했다.

뭔 대답을 원하길래 되묻기까지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자, 백한이 피식 웃었다.

“이거 언제 말랑해져서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는 거 볼까.”

“…중령님 장례식 때…….”

치영은 졸려 늘어지는 말투를 굳이 붙잡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백한이 다시금 픽 웃었다. 왜 저렇게 잘 쪼개……. 멀어지는 의식 속으로, 치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백한이 제 뺨을 쥔 채 그 위에 쪽쪽 입술을 붙이는 감촉을 느끼면서도 치영은 수마에 빠져 버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