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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04화 (104/114)
  • 104화

    답답해…….

    치영은 제 옆구리를 짓누르는 듯한 감각과 묘하게 더운 느낌 때문에 잘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뭐야…….”

    등 뒤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났다. 목덜미에 웬 덩치 큰 개가 달라붙어 숨을 색색 내쉬고 있는 줄 알았더니, 기백한이었다. 집채만 한 맹수에게 그대로 껴안긴 것처럼 답답하고 닿은 곳마다 단단해 기분이 나빴다.

    “왜 맨날 내 방에서 자는 거야.”

    제 방 침대를 두고 왜 매일같이 치영의 방으로 기어들어 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좁은 건 아니지만 넓은 편도 아닌 치영의 방에 기백한의 물품들이 늘어나는 것도 기가 막혔다.

    달에 두어 번 면도를 할까 말까 싶을 정도로 체모가 적은 치영은 생전 써 본 적 없는 애프터셰이브와 면도 크림 등이 그러했다.

    가끔 기백한의 속옷이 세탁 바구니에 섞여 있을 때도 있었다. 그걸 손가락 끄트머리로 집어 올리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기본적인 검은색 드로어즈 주제에 치영의 것보다 무식하게 컸기 때문이다. 앞섶의 천이 불룩한 것이 치영의 속옷과는 모양새도 달라 희한했다. 왜 저렇게 천이 많은 거지 혼자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가끔 백한의 양말 한 짝이 나올 때도 있었다. 제 것인 줄 알고 함께 세탁했다가 꺼내어 신어 보면, 양말이 너무 커 천이 남아도는 나머지 뒤꿈치 부분이 치영의 아킬레스건까지 불룩 올라와 꼭 혹같이 보였다.

    치영은 그때마다 제 양말이 늘어났나 싶어 살피다가, 그것이 제 것이 아닌 기백한의 양말이라는 걸 깨닫고 혼자서 내는 짜증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러고 나면 여지없이 양말과 속옷을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

    꼭 동거라도 하는 사이처럼 살림살이가 섞이는 것이 귀찮았다. 팀장이자 대대장이 쓸 방인지라 기백한의 방이 치영의 것보다 더 넓은데도 굳이 건너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아예 기백한의 방을 제가 빼앗는 상상도 했다가, 그것은 부팀장인 박형인에게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형인은 일단 치영에게 상관이니 말이다. 기백한은 뭐… 기백한은 그냥 기백한이었다.

    그가 좁은 제 방으로 건너와 달라붙어 자는 게 가을이라 다행이지, 여름이었으면 체온이 높은 에스퍼가 내뿜는 열에 어지간히 짜증이 났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지난여름에도 내내 제 허리를 붙잡고 자는 통에 식은땀이 흐르면 자는 저를 안아 들고 에어컨이 있는 백한의 방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순전히 제멋대로인 구석에 아주 질려 버린 참이었다.

    치영은 쯧, 혀를 차며 허리에 둘러져 있는 백한의 팔을 치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도 남잔데 팔 하나 들지 못하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골격근량이 상당하여 무쇠와 같은 무게를 자랑하는 그의 팔을 이제 막 자다 깬 터라 힘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치우는 것을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잠들어 있던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지, 두 눈이 뻑뻑했다.

    “…….”

    밖은 이제 막 동이 트고 있었으나, 점점 해가 뜨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는 터라 새벽이 아닌 이른 아침일지도 모른다. 치영은 제 목덜미에 느껴지는 숨소리에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테면, 어제 만났던 조현호에 대하여 말이다.

    “다음엔 그 빌어먹을 넥타이 버리고 와.”

    그렇게 말하던 조현호는 넥타이에서 느껴지던 백한의 파장이 불쾌한 듯 보였다.

    마지막에 보였던 행동들이 가이드에게 집착을 보이는 에스퍼들의 전형적인 양상 같기도 한 데다가, 가이딩 민감성이 심해 그런 것인지 치영이 아무리 가이딩 컨트롤을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하는 꼴을 보면 틀림없이 접촉 가이딩을 요구할 테니 방사 가이딩으로 끝낼 수 있게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기백한이 그런 치영의 허리를 불시에 끌어당겼다.

    “윽…….”

    숨이 조여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자, 기백한이 깊게 숨을 내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벌써부터 일어나서 꼼지락거려. 더 자.”

    그가 호흡할 때마다 두터운 가슴팍이 치영의 등에 닿았다가 살짝 떨어졌다. 단단한 팔이 끌어안고 있어 답답했다. 기백한의 손바닥이 치영의 아랫배를 슬슬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이런 습관 때문에 하루 24시간 내내 가이딩 컨트롤을 해야 했다.

    “간지럽습니다. 손 떼세요.”

    “뭐가 이렇게 판판해. 살 좀 찌워야 되는데 좋은 걸 먹여도 그대로고.”

    기백한은 저 좋을 대로만 말했다. 목덜미에 와 닿는 그의 숨결과 막 일어난 탓에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에 소름이 일었다. 그것들이 주는 느낌이 이상해 눈살을 찌푸리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조현호는 기백한의 파장을 싫어하는 듯했다. 넥타이를 빼고 오라는 말에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그러니 차라리 백한의 에스퍼 파장을 옷 같은 곳에 심듯이 전개해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는 기백한 같은 청개구리가 순순히 치영의 요청을 들어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럼 아예 몰래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치영은 백한에게 무언가를 요청해 본 적이 없으므로, 차라리 그 방법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기백한의 파장은 다른 에스퍼의 파장과는 다르게 자아가 있는 것처럼 무작위적으로 행동하고는 했다. 제게 엉겨 붙는 걸 지속적으로 붙잡아 둘 수는 없을까 고민이 되었다.

    치영이 생각에 빠진 걸 알았는지 백한은 이제 아예 치영의 배를 토닥거리기까지 했다.

    “자라니까. 형 오늘 간만에 아침 일 없다.”

    네 일이 없는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인데. 치영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소리 내어 묻지 않았다. 이왕 끌어안겨 있는 김에 파장이 제게 묻을 수 있을까 살피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가이딩 이론을 떠올려 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에 계산을 하는 것에 신중해진 참이었다.

    치영은 손가락 끝에 가이딩을 집중해 보았다. 보통의 가이드들은 신체 한 부분에 가이딩을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치영은 그게 가능하다.

    공용 가이딩실에서 일할 때, 위급한 에스퍼에게 가이딩을 해 주기 위해 손끝에 체내에 산발적으로 퍼져 있던 가이딩을 모아 밀어 넣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그게 가능해진 것이다.

    신박한 기술이었지만 자각은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으니 다른 가이드들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부러 말하는 성격도 아니라 제가 터득한 가이딩 기술들을 남에게 자랑해 본 적도 없기에, 치영이 그런 기술을 쓸 수 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어쨌든 손끝에 집중하여 가이딩 파장을 전개하자, 백한과 함께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에스퍼 파장이 먹이에 이끌리듯 끌려오기 시작했다.

    ‘이게… 되네?’

    신기한 일이었다. 시도만 해 봐야지 싶었는데 에스퍼 본인이 전개하지 않은 에스퍼 파장을 유인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최근에 겪었던 여러 변화로 인해 이런 기술까지 가능해진 걸까. 치영은 제 손에 엉겨 붙는 백한의 파장을 천천히 쥐었다.

    꽤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긴 했다. 그 증거로, 일단 성공하자 갑작스레 졸음이 밀려왔다. 치영은 두 눈을 감고 그대로 까무룩 멀어지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지 않았다.

    등 뒤에서는 백한의 고른 숨소리가 작게 들렸다. 품 안이 꽤 따뜻했다. 그의 온기를 온기라고 느끼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완전히 잠이 들기 직전, 치영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의 사랑이 상대를 신격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사랑받고자 하는 열망은 너무도 큰데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경미한 나머지, 오히려 자신의 짝사랑 상대를 저와 다른 존재로 인식해 버린 건 아닐까.

    백한이 미워 죽겠는 그 순간마저도, 치영의 안에서 기백한은 신과도 같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이 번갈아 도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게 없었다. 백령도의 그 밤 이후로 치영은 백한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온전히 저와 다를 뿐, 백한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고 여겨졌다. 그와 저 사이에 아주 커다란 벽 같은 건 없다는 걸 인식하자, 백한의 체온도 그저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치영은 그날 아침, 기백한에게 안긴 상태로도 아주 푹 잠이 들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팀원들이 다 함께 모인 식사 자리는 꽤 오랜만이었다. 백한이 하품을 쩍, 하며 물었다.

    “아침부터 누가 빵 먹자고 했냐?”

    김민우가 냉큼 대답했다. 선생님에게 짝꿍을 고자질하는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만큼 유치한 목소리였다.

    “허인나요!”

    “되게 꼽 주네. 제가 다 먹을게요, 대대장님은 처먹지 마세요.”

    식탁 위에 오른 것은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과 크루아상, 오렌지 마멀레이드와 가염버터, 두툼한 베이컨과 반숙으로 구워진 달걀 프라이 등이었다. 달걀 프라이를 만드는 데 달걀 한 판 하고도 반이 쓰였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진동하자 치영은 모처럼 식욕을 느꼈다. 버터를 넣고 구운 크루아상을 살짝 찢어 입가로 가져가다가 허인나에게 들켜 버렸다.

    “저 봐요! 안 소위님도 좋아하잖아요! 그냥 먹읍시다!”

    “우리 자기 빵 좋아해? 처음 알았네. 진작 말하지.”

    기백한은 의외라는 듯이 제 옆자리 의자를 뒤로 젖히며 치영을 불렀다. 엉덩이를 붙여 앉으며 치영은 새집이 된 머리를 하고 찢어 먹던 크루아상을 가져와 마멀레이드를 발랐다. 그러다가 문득 박형인이 아직 소시지를 삶고 있는 걸 보고 놀라 일어났다.

    “박 대위님, 뭐 도와드릴까요?”

    치영이 형인의 뒤에서 기웃거리자, 기백한이 팔을 쭉 뻗어 그런 치영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넌 앉아서 먹기나 해. 도와준다고 얼쩡거리지 말고.”

    “그래요. 앉아 있어요, 안 소위. 저 새끼들 시키면 됩니다.”

    박형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집개로 인교와 민우, 인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소분 포장된 버터의 포장지를 까 버터 나이프도 없이 식빵 모서리로 내용물을 파내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던 인교가 뜨끔했는지 볼에 잔뜩 빵을 물고는 도와줄 것 없냐고 다 뭉개진 발음으로 물었다.

    기백한이 김민우가 내린 커피를 잽싸게 훔쳐 먹으며 형인의 뒤에 대고 말했다.

    “정보원 새끼 잘 숨어 있대?”

    정보원? 무슨 정보원을 얘기하는 걸까. 치영은 제가 먹던 빵 위에 퍼석해서 어떻게 먹냐고, 사람이 기름져야 한다며 버터를 대신 바르고 있는 인나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네. 은신처로 복귀했답니다.”

    “한 번 더 외출이니 뭐니 지랄하면 그냥 내가 먼저 목을 따 버린다고 전해.”

    백한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포크로 베이컨을 죽 찢어 치영에게 건넸다. 치영은 포크째로 받아 들려 했지만, 백한이 포크를 뒤로 물리며 씁, 하는 소리를 내자 하는 수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예, 알겠습니다.”

    형인이 간단하게 대답하며 대접시 두 개에 산처럼 쌓인 소시지를 들고 식탁으로 왔다. 치영은 그들이 말한 ‘정보원’에 대해 계속해서 곱씹었다.

    그리고 치영은 그날 오후, 똑같은 단어를 손 처장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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