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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03화 (103/114)
  • 103화

    먼저 내려간 줄 알았는데, 백연이 홀로 치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실과 꽤 떨어진 곳에 엘리베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에스퍼라 해도 대화가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치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백연에게 왜 혼자 있냐고 물을 참이었다. 등 뒤에서 이사실 문이 벌컥 열리며 조현호가 다시금 튀어나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야!”

    조현호는 아무렇게나 치영을 부른 뒤, 그의 손목을 잡고 함부로 돌려세웠다. 치영의 두 눈이 커졌다.

    백연이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났다. 웬만해선 빨리 걷지 않는 사람이 구둣발 소리가 장엄할 정도로 보폭을 크게 하여 이쪽으로 향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치영은 돌아보지 못했다. 조현호의 두 눈이 충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잔뜩 취한 사람 같았다.

    “지금, 지금 가이딩 좀 해 주고 가, 응?”

    “잠시만, 이거 놓고—.”

    누가 에스퍼 아니랄까 봐 손목을 잡은 힘이 억셌다. 치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손목을 옥죄는 힘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다가온 백연이 치영에게서 조현호를 떼내려던 순간이었다.

    얌전히 정장 상의 안쪽에 갈무리되어 있던 치영의 넥타이가 저 혼자 쭉 빠져나오더니, 치영의 손목을 잡고 있는 조현호의 따귀를 후려쳤다.

    얻어맞은 조현호가 어안이 벙벙한 듯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어, 어—?”

    말이 되지 않는 마법 같은 상황이라 주위에 염력이나 중력을 다루는 에스퍼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기백한은 주차장으로 내려간 듯했고 이곳에는 백연과 저, 조현호뿐이었다.

    뭔가 싶어 살피는데 넥타이 주위로 에스퍼의 파장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백한의 것이었다.

    “이게 무슨…….”

    어이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백한이 치영의 넥타이에 제 에스퍼 파장을 심어 놓듯 전개해 둔 것이다. 일렁이는 파장이 마치 집 지키는 경비견처럼 조현호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그러나 이상한 건 조현호의 상태였다. 별안간 넥타이에 뺨을 얻어맞았는데도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처음에 어어, 하고 감탄사를 내뱉을 때는 언제고 게게 풀린 눈동자가 희한했다.

    그때, 맞닿은 손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가이딩이 빠져나가려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등급이 알려진 것보다 높다는 걸 들킬까 봐, 치영은 혼신의 힘을 다해 가이딩을 가둬 두려고 애썼다.

    안 그래도 넘칠 듯 찰랑이다가 신나게 빠져나가려던 순간 가로막히자, 안쪽으로 되돌아온 가이딩 파장이 치영의 속을 긁어 놓기 시작했다.

    “욱—!”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조 이사.”

    백연이 조현호의 손을 떼어 놓음과 동시에, 치영의 입에서 헛구역질이 나왔다. 살짝 피비린내도 났다. 안쪽에 내출혈이 있는 듯했다. 목구멍까지 넘어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핏물과 얼얼한 명치에 눈물이 튀어나왔다.

    조현호는 백연이 떼어 놓은 뒤에야 정신을 차린 듯 치영을 보던 멍한 눈에 서서히 이지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 지금…….”

    조현호가 입을 달싹였다. 백연이 치영의 앞을 가로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이드 동의 없이 뭐 하는 겁니까.”

    백연의 말에 조현호가 멍한 눈을 깜빡이다 숨을 훅 내뱉고 말했다.

    “…가이딩 고갈이 심해서 그런 겁니다. 어차피 저쪽이 먼저 나한테 가이딩 해 준다고 했어요. 유난이 심하시네.”

    “안 소위 손목을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 유난?”

    백연의 기색이 험악해지길래 치영은 그녀를 만류했다.

    “괜찮습니다. 그냥 가시죠, 소령님.”

    백연이 그런 치영을 흘끗 보더니 쯧, 혀를 찼다. 더 서 있을 기운이 없는지라 치영은 그저 빨리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앞으로 또다시 조현호에게 가이딩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반드시 방사 가이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라 치영은 조현호에게 인사 없이 등을 돌렸다. 백연이 그런 치영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몇 걸음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런 그의 등 뒤에서 조현호가 소리치듯 말했다.

    “다음엔 그 빌어먹을 넥타이 버리고 와.”

    알 수 없는 집착이 묻은 목소리라, 한 번 더 돌아볼까 싶었던 치영은 그냥 그대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마침 바로 아래층에 와 있던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올라와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며, 치영은 끝까지 조현호를 돌아보지 않았다.

    * * *

    주차장에 기백한이 있을 줄 알았는데 먼저 갔다는 소리만 들었다. 치영은 그날 백연의 차를 타고 센터로 복귀했다.

    조금 쉬고 싶었는데 콜라숍에 출근할 시간이라 어쩔 수 없이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오늘은 또 뭐라고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야 하나 싶던 찰나에 손진화로부터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어, 안 소위. 나예요.

    “예, 안녕하십니까.”

    —주위에 에스퍼들 없지.

    “예, 없습니다.”

    치영은 슬쩍 시계를 봤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인물과 오래 통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손 처장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오늘부터는 소프숍 갈 때 비상 가이딩 당직 선다고 해. 거기 명단에 자네 이름 넣었으니까.

    비상 가이딩은 보통 병동에서 근무하는 가이드들이 돌아가며 야간 당직을 서는 시스템을 말한다. 치영의 등급으로 병동에서 근무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없지 않기에 나름 승진이었다. 가짜로 등록된 것이지만 말이다.

    알겠다는 말에 손 처장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조현호에게 비밀 임무에 대해 정확히 뭐라 언급한 것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쳤다.

    기백한은 아직도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고, 박형인 역시 숙소에 없었기 때문에 치영은 김민우에게 손 처장이 알려 준 핑계를 꺼냈다.

    김민우의 두 눈이 커지더니 박수를 짝짝 쳤다.

    “오, 그거 승진 아니에요? 축하해요, 안 소위. 그럼 이제 공용 가이딩실은 안 나가는 건가?”

    “…아니요. 공용 가이딩실에도 출근해야 합니다.”

    “뭐야, 센터 일은 혼자 다 하네. 센터장님도 그렇게 업무가 많진 않을걸요. 쉬엄쉬엄해요. 근데 그거 대대장님한테는 말했어요?”

    치영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말해 달라는 뜻이라는 걸 눈치챈 김민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 안 그래도 그 인간 안 소위가 공용 가이딩실 출근하는 것도 싫어하는데.”

    “…기 중령님이요?”

    의외의 말이었다. 제가 어딜 다니는지 기백한은 상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래 들어 어디가 좀 돌아 버렸는지 치영의 일에 참견하기도 했지만, 치영은 저에 대한 그의 흥미가 곧 사그라질 불씨와 같다 생각했다.

    공용 가이딩실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필요해 손을 뻗었는데 주위에 제가 없을 때 느끼는 사소한 불편함이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했다.

    김민우는 뭔가 생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승진이라는데 앞길 막을 수도 없고. 안 소위가 아예 춘란 수석 가이드로 와 주면 좋은데.”

    “…저는 등급이 낮아서…….”

    “등급이 낮은 게 무슨 상관이에요. 안 소위 가이딩 질 진짜 좋다니까요. 이러다 안 소위 정말로 병동에 뺏기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춘란의 에스퍼들을 모두 책임지기에 치영의 가이딩 양은 너무 적고, 또 수석 가이드로 위임되기엔 등급이 낮았다.

    F급 가이드가 S급 에스퍼들로만 이루어진 팀의 수석 자리를 차지하면 센터 내 반발이 상당할 것이다.

    치영이 동죽에 소속되어도 별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기백연이 동죽의 수석 가이드이자 팀장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에 김민우가 그렇게 말이라도 해 주는 것이 기뻐 치영은 부스스 웃었다.

    김민우는 그 웃음을 보고 “어어, 진짠데?” 하고 반색했다. 치영은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당직실에 가 보겠다며 숙소를 나섰다.

    그런 다음 바로 이 중사를 찾아가 가상의 인물인 이창주의 모습으로 센터를 나섰다. 다행히, 그날 밤은 평범한 일을 맡았다.

    어제와 달리 룸은 한산했고, 치영은 빗자루질이나 좀 하다가 주방 일을 도와야 했다. 주방장이 치영의 설거지 실력을 칭찬했기 때문이다.

    “배고프면 핫도그 하나 데워 먹어.”

    자정을 조금 넘겼을 무렵, 주방장이 치영에게 포장된 레토르트 핫도그를 내밀었다. 치영은 감사하다고 대답한 뒤 전자레인지에 그것을 돌려 먹었다. 그날의 업무는 그렇게 종료되었다.

    이악 부대 사람들은 언제 오는 걸까. 치영은 다 먹은 핫도그 막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툭툭 흔들며 주방 밖을 바라보았다.

    콜라숍 안의 사람들은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었다. 치영의 업무는 그렇게 끝이 났다. 오늘도 운전병이 모는 차를 타고 이대희라는 이름을 대며 복귀했다.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가이딩 파장을 전개했다. 김민우의 방을 향해서는 파장의 진폭을 조금 짧게, 허인나와 이인교의 방을 향해서는 조금 길게 각각 맞춰 전개했다.

    접촉 가이딩 시 받았던 느낌만으로 조절해 본 건데 성공할 줄은 몰랐던지라, 새로운 방사 가이딩 기술을 익히게 된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좋아졌다.

    방으로 바로 올라간 치영은 세탁 바구니에 입었던 옷들을 집어 던진 뒤 바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기백한은 지난번처럼 복귀 전인 듯했다.

    요즘엔 매일같이 새벽에 들어와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 같은데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지 모르겠다.

    관심이 있어야 다른 에스퍼들한테라도 물어볼 텐데 어딜 가든 궁금하지 않을뿐더러,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치영과 관계없이 지내 온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에 자신이 물어본다고 해도 다른 이들이 명확히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안치영은 기백한에게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인물이니 말이다.

    전에는 그가 뭘 하고 지내는지 센터 내 소식만으로 알음알음 들어 파악했기 때문에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요즘은 그런 것도 없었다.

    치영은 머리를 감으며 백한에 대한 생각을 거품과 함께 씻어 보냈다. 곧이어 든 생각이라고는, 오늘 먹었던 핫도그가 혹시 누림동 PX에서도 파는 제품일까 하는 것이었다. 냉동 핫도그를 쟁여 두고 다른 에스퍼들과 나눠 먹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것이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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