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102화 (102/114)

102화

“이제 얼추 인사들 했으니 젊은 사람들끼리 얘기하라고. 우린 얼굴만 보러 온 거니까.”

황현보가 다시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백연이 고개를 꾸벅였다. 내내 표정을 굳힌 채 황현보에게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했던 조현호는 뭔가 못마땅해 보였다. 조필식이 그런 조현호를 엄한 눈으로 한 번 바라보고는 황현보보다 먼저 등을 돌려 이사실을 나섰다.

백한은 그 뒤에 대고 구부정한 경례를 올린 뒤, 문이 닫히자마자 씩 웃으며 조현호를 돌아보았다.

“보셨지? 내 의뢰인은 저쪽인 거. 그러니까 이래라저래라하지 마세요. 관상에 쓰여 있을 텐데, 남 말 안 듣는 새끼라고.”

‘알긴 아는구나.’라고 치영은 생각했다. 치영이 심드렁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현호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적당히 합시다. 그래봤자 우리 회장님 명령으로 온 건 맞잖아.”

“그래요, 맞아요. 정리 한번 잘하시네.”

백한이 따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가 식은 얼굴이었다. 그게 오히려 사람을 무시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조현호는 얼굴뿐 아니라 목덜미까지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가만히 있던 백연이 더는 안 되겠는지 한숨을 쉬며 중재했다.

“아까 언급했다시피, 이쪽이 조 이사님 근접 경호를 맡을 예정입니다. 안치영 소위이고 가이드—.”

내내 표정이 안 좋던 조현호가 씩 웃으며 백연의 말을 가른 채 먼저 대답했다.

“알아요, 가이드인 거.”

치영은 저도 모르게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완벽하게 잠갔다고 생각한 가이딩 파장을 어떻게 읽은 것일까.

조금 뒤에야 미리 자신의 등급과 가이드라는 사실이 보고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냉정해지려고 애쓰며, 치영은 상대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때,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생겼다. 치영은 갑자기 나타난 기백한의 등이 제 시야를 가리는 것을 멍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 컨택 10초 이상 금지.”

“뭐요? 이게 무슨 무례한—.”

“맞아. 나 예의 몰라. 위아래도 없고 참을성도 없어. 아까부터 말했잖아. 관상에 안 쓰여 있냐고.”

“기 중령.”

백연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백한을 만류했다. 백한이 제가 뭘 어쨌냐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더니 제 등 뒤에 숨겨 두었던 치영의 어깨를 끌어당겨 옆구리에 붙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사님도 내 가이드 대할 때는 조심하셔요. 얘 옆에 미친개 한 마리 달려 있다는 걸 꼭 유념하시라고.”

조현호는 모욕을 들은 사람처럼 다시 한번 얼굴이 붉어졌다. 백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치영은 왜 저러나 싶어 어이가 없어졌다.

내 가이드?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 벌써 몇 년 전이고, 지금에 와서 그런 말을 듣는다고 없던 감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두 사람 중 개라고 불릴 만한 짓거리를 한 것은 내내 그의 곁을 떠돌던 자신이 아니던가. 치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그를 향한 미움조차 섞이지 않은 단편적인 감상일 뿐이었다.

요즘은 기백한에 대한 원망마저 희미해져 갔다. 그가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게, 그의 잘못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뒤에는 마음의 정리가 점차 편해졌다. 잘못이 없는 상대를 증오할 정도로, 치영은 사랑에 이성을 잃은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쯧, 혀를 찬 치영이 어깨를 들썩여 저를 잡고 있는 백한의 팔을 떨어트린 다음 조현호에게 꾸벅 인사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스퍼‧가이드 특수군 소속, 소위 안치영입니다.”

“…….”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는지, 조현호는 치영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와중에도 치영을 바라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곧 뭔가를 생각하더니, 백연에게 말했다.

“이상한 짓 안 할 테니까 둘이 얘기할 시간 좀 줘요.”

“왜 저러니, 둘이서 뭘 하겠다고. 그냥 여기서 얘기해요. 좋은 거 있으면 셋이 같이해, 왜 둘이서만 해.”

백한이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 댔다. 기껏 빠져나온 치영을 또다시 제 품으로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치영은 두 눈을 꾹 감고 환멸 난 표정을 숨기려 노력해야만 했다. 조현호는 포기하지 않고 백연에게 말했다.

“시간 얼마 안 뺐습니다.”

“기 중령, 나와.”

백연이 고개를 까딱하며 출입문을 가리켰다. 백한은 이 정도로 침 발라 놨으면 됐다 싶었는지 아니면 그냥 변덕인지 쯧, 혀를 차고는 백연을 따라나섰다. 그러면서도 내내 돌아보며 검지와 중지를 세워 제 눈을 한 번, 조현호의 눈을 한 번 가리키며 뒤로 걸었다.

치영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곧이어, 문이 닫혔다. 그가 자신을 알아볼 순 없을 것이다. 혹시나 싶어 셔츠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지 않았나.

치영은 어깨를 펴려고 노력했다. 가슴이 떨려 왔지만, 그동안 에스퍼들을 속이며 살짝 늘어난 담력을 믿었다.

조현호는 그런 치영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긴가민가하는 표정이었다. 개처럼 취해 있던 그의 경미한 기억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치영의 기대와는 달리 조현호는 정확히 말했다.

“그때 얼굴은 잘 못 보긴 했는데… 분명 이런 생김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치영이 입을 다문 사이, 조현호는 혼자 중얼거렸다.

“어제는 못생긴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아니란 말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영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런 치영을 물끄러미 보던 조현호가 머뭇거리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비밀 임무, 같은 거였나?”

“…….”

저절로 숨이 멎었다. 치영이 대답하지 않자, 조현호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태도가 조급하고, 말투 역시 정제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 그의 평소 성격 자체가 그런 듯했다.

“아니, 내 말은… 내가 가이딩 민감성이 심해서… 알레르기 수준이거든. 근데 어제 그 뺑소니범한테 느낀 가이딩이 딱 그쪽 가이딩 파장 같은데.”

가이딩에 민감하다고만 들었지, 파장에 대한 판별력까지 높을 줄은 몰랐다. 가이딩을 잠그려 했던 제 노력이 쓸모없어진 건 아닌가 하는 충격과 상대에게 너무도 쉽게 들켰다는 치욕이 섞여 입술에 아교처럼 달라붙어, 치영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남들보다 한 걸음 부족한 건 태생일까. 절망스러웠다. 치영은 단 한 번도 운 좋게 뭔가를 거저 얻고 싶다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노력한 만큼 보상받으면 족한데, 그조차도 요원해 보였다.

조현호는 그런 치영을 두고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기 바빴다.

“근데 비밀 임무면, 나한테 말할 수 있는 건 없겠네.”

순순한 말투에,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치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조현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그런 상식이 통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는 듯, 조현호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손 처장이 그쪽 비밀 임무 나갈 거니까 밖에 저 싸가지들한테 입 좀 맞춰 달라고 하던데. 그 인간 와이프랑 내가 대학 동기거든.”

치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백한과 기 싸움을 하던 때와 달리, 조현호는 소파 손잡이에 걸터앉아 팔짱을 낀 채 편한 태도로 말하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조현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그럼 경호해 주는 동안 나한테도 가이딩 해 줘야 한다는 거 들었지?”

“예?”

치영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치영이 들었던 것은 그가 C급 이하에 체술을 익힌 가이드를 구한다는 것이었지, 가이딩을 해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그 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이드 인권에 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부터 센터는 가이드가 원치 않은 가이딩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걸 막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눈앞에서 가이딩 고갈로 죽어 가는 에스퍼를 외면하는 가이드는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라 에스퍼들의 반발이 심했었다.

그 때문에 유명무실한 법률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효력을 갖고 있기는 하다. 정확히는 사회적인 약속에 가깝다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가이딩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무례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눈앞의 재벌 4세는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조현호를 볼 때마다 미묘한 기시감이 들었는데, 이제야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기백한의 오만함을 닮았다. 있는 집 자식들, 그것도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놈들은 다 이렇게 저밖에 모르는 건가.

치영은 멀거니 생각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실랑이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가이딩, 그게 뭐라고.

예전에는 가이딩이라는 것이 치영에게 큰 의미를 가졌던 것 같은데.

여전히 춘란의 에스퍼들이 칭찬을 건넬 때는 나름 뿌듯하다. 그러나 그뿐이다. 치영의 간절함은 서서히 동나고 있었다.

“그런 지시는 들은 적 없지만 가이딩을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등급이 낮아 가이딩 양이 미미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의례적으로 묻는 얘기였다. 지금 치영은 소진되지 못한 가이딩이 체내를 돌고 돌아 가끔 모세혈관을 파괴시키는 통에, 간혹 허벅지 안쪽처럼 여린 살에 멍이 들고는 하는 상태였다.

이럴 때는 누군가에게 가이딩을 해 줘서 조금이라도 체내에 도는 걸 소진시키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치영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조현호의 안색이 환해졌다. 웃는 것은 아닌데도 아까보다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백한의 말대로 저렇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사업은 어떻게 하는 건가 싶어졌다. 혹시 저도 저렇게 얼굴에 생각이 티 나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됐어, 그럼. 가 봐.”

조현호는 귓등까지 붉어진 주제에 좋은 기색을 그제야 숨기고 싶은 건지 손을 휘휘 저어 치영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치영은 고개를 꾸벅한 뒤 군말 없이 이사실을 나섰다.

…일단은 들키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치영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묻지도 않는 허술함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한숨을 내쉰 치영은 먼저 내려간 에스퍼들을 따라잡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깨가, 몹시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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