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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101화 (101/114)
  • 101화

    치영은 그제야 그 재떨이를 던진 사람이 조현호임을 알아보았다. 백한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저런 놈에게는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조현호에 대한 첫인상이 안 좋았던 치영은 낮에 본 지금도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씩씩거리고 있던 조현호가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선 백한 일행을 보고 꽥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들은 또 뭐야—!”

    “이사님, 센터분들이십니다.”

    옆에 있던 비서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속삭이는 게 작게 들렸다. 치영은 백한과 백연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 없이 기립해 있을 뿐이었다.

    백연은 그렇다 쳐도 백한까지 무감한 표정이라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경호 임무라 그런 듯했다. 치영 역시 그들을 보며 표정을 지우고 두 손을 모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비서가 조현호에게 설명을 덧붙이는 것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에스퍼들에게는 모조리 들릴 것이다.

    장교 남매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는 것을 보니, 적어도 욕은 아니겠구나 생각할 뿐이었다.

    조현호는 흐트러진 머리를 슥, 쓸어 올리며 잔뜩 찌푸렸던 인상을 갈무리했다. 저렇게 멀쩡한 걸 보니 인사불성으로 취했던 모습과 괴리가 상당했다.

    말끔한 스리피스의 정장을 갖춰 입은 조현호는 에스퍼라더니 골격이 꽤 장대한 편이었다. 기백한과 기백연 정도는 아니더라도, 일반인 사이에 있으면 확연히 눈에 띌 것이다.

    치영이 그렇게 이사실 안 분위기와 조현호에 대해 살피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어제 작게 뺑소니를 당했는데 사고 내고 튄 놈을 아직 못 잡아서.”

    치영은 뜨끔했으나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무리 봐도 본인 얘기 같았기 때문이다. 표정이 드러날까 봐 아예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해야 했다.

    조현호는 낮게 헛기침을 하며 백한 무리를 소파로 인도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상석에 자리를 잡은 조현호가 넥타이를 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경호 일을 좀 빨리 시작하신다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조현호는 그렇게 말하며 쯧, 혀를 찼다.

    “회장님이 괜히 오버하는—.”

    조현호가 그렇게 말한 순간 기백한이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제 두 발을 소파 앞 탁자 위에 길게 뻗으며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그쪽이나 우리나 상관은 따로 있는데 그런 말 해 봤자 입만 아프고—. 오늘은 그냥 우리 팀원 얼굴 구경시켜 주러 온 겁니다.”

    치영은 백한의 말본새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이사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그가 성질을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의외인 점은 백연 역시 아무런 표정 없이 비서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기백한을 말리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지만, 백연이 그렇다면 저도 상관할 바가 아닌지라 허리를 곧추세운 채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조현호는 백한의 말투를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근데 말을 이상하게 하시네. 예의도 약간 없으시고.”

    “약간만 없어 보여요? 사람 보는 눈 없어서 큰 사업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네.”

    “—이봐요.”

    “안 소위야, 뭐 하니. 인사나 해. 얼른 나가게.”

    백한이 이번에도 조현호의 말허리를 뚝 잘라 먹으며 옆에 앉아 있던 치영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로 하고 있다가 반항 한 번 못 해 보고 품 안으로 끌려간 치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백연이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치영 역시 백한에게 미쳤냐고 되물을 수가 없었다.

    조현호는 짜증이 잔뜩 난 얼굴로 백한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내려 그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치영을 내려다보았다.

    한동안 치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치영은 혹시나 조현호가 저를 알아보았을까 봐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천천히 인사했다.

    아무리 얼굴을 변형하고 가이딩 파장을 숨겼어도,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전문 스파이들의 심장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로 심박 수가 크게 올라갔다.

    주위에 청각이 비약적으로 예민한 에스퍼만 세 명이라, 치영은 짧게 심호흡하며 혹여나 그들에게 제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빨라진 제 심장박동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안녕하십니까, 가이드 안치영 소위입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현호는 아무런 대답 없이 여전히 치영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역시나 저를 알아봤나 싶어 등골에 땀이 주륵 흐를 지경이었다. 그런 치영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있던 백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내려다보더니,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어. 저런 양아치 페이스가 네 식성이었던가?”

    밥상 앞도 아닌데 웬 식성 타령이야. 치영은 미간을 살짝 구기며 제 어깨를 꾹 누르는 백한의 팔에서 벗어나 허리를 세우려 노력했다.

    그때, 그 꼴을 모두 보고 있던 조현호가 팔을 뻗어 치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분이 제 경호 담당을 맡아 주실 분입니까?”

    씨익 웃는 얼굴이 사감 가득해 보였다. 잘 걸렸다, 같기도 하고. 치영은 속이 다 드러나는 표정을 짓는 상대치고 대하기 까다로운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악수에 응하기 위해 팔을 뻗었다.

    불쑥 나타난 손이 치영의 손목을 잡아 그대로 끌어내리지만 않았어도 두 사람 사이의 악수는 성사되었을 것이다.

    “아, 뭘 또 서로 친근하게 굴려고 해? 일하는 사이에 쿨하게 일만 하면 되지. 됐고, 우리 쪽에서 보낸 경호 자료 확인했죠, 조 이사.”

    “언제 봤다고 이사, 이사 하는 겁니까?”

    조현호가 미간을 좁히며 백한에게 으르렁거렸다. 백한은 심드렁한 얼굴로 하품을 쩍, 하더니, 다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꼬우면 너도 내 이름 부르세요. 백한아, 해 봐. 그게 내 이름이거든.”

    조현호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백연을 바라보았다. 치영 역시 덩달아 백연의 눈을 바라보았다가 저도 모르게 놀라고야 말았다.

    대화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있던 건지, 늘 총명하던 백연답지 않게 살짝 초점 없는 얼굴로 이사실 구석에 세워진 서양란을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영은 오늘따라 이들이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뢰인 만나는 자리라고 정장을 사 입힐 때는 언제고 말이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벌떡 열리며 안쪽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풍채 좋은 노인 둘이었다.

    “자네들 왔는가!”

    그 소리와 함께 백한과 백연이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백한의 옆구리에 끼워져 있던 치영 역시 앉아 있던 곳에서 번쩍 들려지듯 서는 수밖에 없었다.

    백한과 백연이 앞가슴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시선은 살짝 위를 바라보는 정석 자세를 취하더니 손날을 눈썹 끄트머리에 절도 있게 가져다 대며 경례했다.

    “충성.”

    그들의 그런 행동에 치영도 얼결에 따라 경례할 수밖에 없었다.

    이사실로 들어온 두 노인 중 안경을 쓴 쪽이 허허, 웃으며 “쉬어.” 하고 짧게 경례를 받아 주었다.

    치영은 그제야 그 노인이 센터장실 복도에 나란히 늘어선 역대 센터장들 사진 속, 전전대 센터장의 액자 자리를 차지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그의 옆에 선 인물은 조필식인 듯했다. 둘 다 노인네들치고는 기백이 대단하여 치영은 긴장감에 실수로라도 가이딩을 전개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단전 밑을 돌고 있는 가이딩이 역류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대 센터장이 말문을 열었다.

    “그래, 이쪽이 망나니네 가이드구나. 계급이 뭐지?”

    “안치영 소위입니다.”

    마지막은 백연을 향해 물은지라, 치영은 입을 다물고 그녀가 제 소개를 대신해 주기를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백연이 무감한 얼굴로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가워요, 황현홉니다. 그냥 퇴역 군인이에요.”

    웃으며 건네는 말에 치영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가벼운 어조였지만 그가 내뿜는 분위기가 묵직해, 치영은 어깨가 저릿할 정도였다. 노인이 그러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자마자, 백한이 심드렁하게 지껄였다.

    “무슨 퇴역 군인 팔뚝이 그럽니까. 뻥도 정도껏 치셔야지.”

    “이 자식이 또 사람들 앞에서 까불어.”

    황현보가 굵직한 눈썹 사이를 좁히며 백한을 툭 쳤다. 치영은 그제야 황현보와 백한, 백연 사이가 꽤 가까워 보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치영의 짐작을 입증이라도 해 주듯, 그가 제 옆에 서 있던 조필식에게 말했다.

    “얘가 말은 이렇게 해도 서‧경 센터에서는 제일 일 잘해.”

    “…….”

    조필식은 대답하지 않고 제 손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이의 시선을 느낀 조현호가 흠칫 놀라더니 흠, 목을 가다듬은 뒤 황현보에게 인사했다. 황현보 역시 반갑게 마주 받아 주었다.

    그 와중에 기백한이, “서‧경 센터에서는? 영감님 기억력 오락가락할 때가 됐나. 잘 생각해 보셔요. 동아시아 씹어 먹은 지가 언젠데.” 하며 중얼거리다가 황현보에게 어지간히 버릇이 없다고 핀잔을 들었다.

    주변에 나이가 든 사람이 없어 어른 대하는 게 어색한 치영만 안색을 굳힌 채 안절부절못했다. 조현호만으로도 신경이 타들어 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초에 만났을 당시에도 가이딩 파장을 잠그려 노력했고, 지금도 아주 단단하게 묶어 놓은 상태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어제 만난 이가 자신을 알아볼 확률이 0에 수렴하는 것은 아니니 방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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