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상념은 전방에 나타난 방지턱에 의해 사라졌다. 속도를 급하게 줄인 탓에 혹시 몰라 팔을 뻗어 치영의 앞을 막았다. 그러나 맹한 안치영은 그저 팔을 치우라는 듯 저를 째려보기 바빴다.
백한은 피식 웃으며 그대로 글로브 박스를 가리켰다.
“글로브 박스 열어 봐. 사탕 있으니까 꺼내 먹어.”
“안 먹습니다.”
“넌 진짜 내가 언젠가는 토실토실 살찌우고야 만다. 지랄하지 말고 빨리 먹어. 가서 존나게 대가리 굴리려면 당분이 있어야 하셔요, 소위님.”
말이라고는 안 듣는 제 가이드를 향해 으르렁거린 백한은 핸들을 살짝 틀어 차선을 변경한 뒤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방향 지시등을 틀지 않고 옆 차선으로 옮겼더니, 뒤따라 오던 911이 개같이 빵빵거리기 시작했다.
엔진 좋은 거 달았다고 유세하는 꼴이 같잖아, 바로 창문을 열어 기다란 팔을 빼낸 뒤 뒤차를 향해 중지를 세우며 낄낄거리다 뒤를 돌아보았다.
지프에서 튀어나온 팔이 본인 생각과 다르게 너무 긴 데다가 또 강인해 보였는지, 911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 오빠 너무 양반이시다. 이게 안 먹히네.”
백한은 시비를 건 것이 먹히지 않아 아쉽다는 표정으로 창문을 닫았다. 몰고 다니는 차에 비하여 벼룩만 한 간을 가진 상대는 이대로 백한을 곱게 보내 줄 작정인 듯했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시는 백한의 옆얼굴에 기가 막혀 하는 시선이 달라붙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생각에 다시금 집중했다.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아, 그래. 안치영에게 적응하려던 자신의 눈물겨운 노력들.
그것은 정말로 칭찬받아야 마땅했다. 속이 뒤집어지는데도 안치영의 부드러운 입술을 비벼 대며 속으로 세뇌하다시피 했다. 안치영이 이악에서 당했을 세뇌 따위는 무색할 정도로 눈물겨운 자기 암시였다.
이건 안치영이지, 남자 가이드 따위가 아니다. 안치영은 안치영이다. 얘는 존나게 귀여운 내 가이드다. 얼굴도 예쁘다. 적어도 안치영이 예쁜 건 사실이었다.
모자란 것들이나 한다고 생각했던 트라우마 극복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러자, 어느 정도 차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딩이 달큼해진 것이다. 아직도 다른 남자 가이드들은 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역겹지만, 오로지 안치영만이 기백한에게 유의미해졌다. 안치영의 가이딩이 기백한에게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안치영의 가이딩은 높은 순도를 갖고 있는지 사람을 무척 돋우는 부분이 있었다. 하, 그렇게 맛있을 줄이야. 당장 떠올린 것만으로 허벅지 쪽으로 갈무리해 둔 것이 뻐근해질 지경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백한은 망설임 없이 팔을 뻗어 옆에 앉아 있던 치영의 손을 잡아채 기어 위에 올린 뒤, 그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어 버렸다. 손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가이딩의 느낌에 척추가 저릿거렸다. 양이 미약해서 그렇지, 느낌만은 최상이었다. 오히려 그 미미한 양이 사람을 감질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
밖에서 좆 빠지게 일하고 돌아와서는 침대에 누워 색색 잠을 자고 있는 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저 역시 잠드는 것이 요즘의 백한에게 새로 생긴 취미였다.
손을 잡자마자 다른 것도 아니고 그 감촉이 먼저 떠올랐다. 제게 안겨 있는 안치영의 마른 듯 탄탄한 몸.
“뭐 하는 개수작입니까.”
“어허, 서방님 큰일 하러 가시는데 괜히 일 치르기 싫어서 임시방편으로 잡는 거니까 순순히 협조하세요.”
치영은 당연하게도 얌전히 협조하려 들지 않았지만, 백한의 손힘을 이기진 못했다. 그것이 제법 분한 듯했다. 귀 끝이 빨개질 정도로 힘을 준 것이 무척 귀여웠다. 빨면 또 단맛이 나겠지.
세뇌에 의한 등급을 회복시키기 전까지는 건들지 않고 둘 계획이었다. 딱히 치영을 생각해서도 아니고, 맛있는 걸 아껴 뒀다 먹는 타입도 아닌데, 이상하게 선뜻 손을 뻗기가 싫었다.
기백한은 자신의 모든 충동을 정의하지 않고 흘러가게 두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는지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아직은 건드리는 게 내키지 않길래, 애들 장난처럼 입술만 좀 빨고 마는 게 다였다. 지금껏 안치영에게 했던 것들은 맛만 보는 축에도 끼지 못한 것들뿐이었다.
일단은 탄탈로스 작전을 시작으로 슬슬 이악 부대의 뒤를 팔 생각이었다. 그곳에 반드시 치영을 기억하는 놈이 있을 것이다. 연구 자료 역시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기백한이 이악의 간부 중 하나라면, 센터 최고 등급 에스퍼의 각인 가이드가 된 실험체의 연구 자료를 파쇄하는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까.
적이 멍청한지 똑똑한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머리가 있다면 자료를 말소시키는 일은 없겠지. 백한은 이악을 급습하여 그 자료들을 빼내 올 계획이었다.
치영의 뇌에 세뇌를 심어 둔 놈도 찾아야 한다. 놈을 생포하여 치영의 뇌파와 엉겨 붙은 세뇌를 직접 제거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기억상실 등 관련된 여러 후유증이 없을 테니 말이다.
아직은 정보를 모아야 할 때였기 때문에, 이번 임무가 여러 가지의 초석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세뇌를 풀면 치영 역시 고등급의 가이드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치영의 의지로 각인을 풀 수도 있을 것이다.
백한은 그 부분에 대하여 잠깐 자문했다. 자신이 각인의 해제를 원하는지 말이다.
…의외로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백한은 작게 흠, 하고 목을 울렸다.
“한 알 드려요?”
“응, 먹여 줘.”
흠— 하는 소리에 백한의 목이 잠긴 줄 알았는지, 얌전히 글로브 박스에서 사탕을 꺼내 먹던 치영이 순한 눈으로 백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리 날 세우는 척을 해 봐도 안치영은 늘 기백한에게 무르기만 했다. 무용한 벽과 말랑거려 힘없는 담장을 넘어 기백한은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치영을 침범해 왔다.
그게 기꺼워 씩 웃으며 입을 아— 벌리자 짜증을 내면서도 입안에 사탕 한 알을 넣어 주고 있지 않나. 백한은 눈물점을 휘어가며 제 가이드를 향해 씩 웃었다.
그렇게 각인을 나눈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한 차에 올라타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목적지까지 예정 도착 시간은 앞으로 21분.
그들의 운명이 정해 준 갈림길도 딱 21분 남은 시점이었다.
* * *
미팅 장소는 명성의 사옥 중 하나였다. 테헤란로가 고스란히 내려다보이는 역삼의 고층 빌딩으로, 치영은 지하 주차장에 주차한 백한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오는 길에 혹시나 정장이 구겨질까 봐 몇 번이나 엉덩이를 들썩거렸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다친다고 기백한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은 게 치영의 인생에서 가장 어이없는 일 순위에 올랐다. 그렇게 주행 중 안전을 운운할 것이면 저는 왜 뒤차에 대고 중지를 치켜세웠단 말인가.
어쨌든 치영과 백한은 백연과 만나기 위해 로비에서 잠깐 내렸다. 백연은 먼저 도착하여 리셉션 데스크에서 방문증을 받고 있었다. 군내에서 사용하는 아이디 카드와 비슷한 듯 다른 모양이라 치영은 그걸 유심히 보다가 목에 걸었다.
백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백한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중이었다. 백한 역시 평소와는 다르게 표정이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짧게 대답하기도 했다.
일부러 나서서 정장을 사 입으라고 치영에게 지시한 것과 달리, 남매는 검은색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를 입은 심플한 차림이었다.
두 사람이 입은 건 같은 브랜드의 같은 셔츠와 바지인 것 같은데, 묘하게 차림이 달랐다. 백연은 셔츠의 단추들을 단정히 채운 채였지만, 백한은 위의 단추 두어 개를 풀어 헤친 채로 소매는 둥둥 걷어 전완근이 다 보이게끔 고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라 날씨가 쌀쌀한데 춥지도 않나 보다.
그렇게 그들이 잠깐 말을 나누는 사이,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치며 흘끔거렸다. 그들의 뒤에 멀찍이 선 채로, 치영은 사람들이 남매를 흘끔거리는 게 당연하단 생각을 했다.
190cm가 넘는 장신의 남자는 평생 신실하게 살아온 교황마저 홀려 버릴 듯 화려한 미인에다가 그의 맞은편에 있는 여자는 기골이 장대하며 무척이나 단정하고 준수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동안 두 사람이 서로 닮은 구석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밖에 나와 보니 분위기가 꽤 비슷했다. 타인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묵직한 기운을 뿜는 것이 특히 그러했다.
군인들 틈에서 생활해 온 자신도 가끔은 압도당하는데 민간인들이야 오죽하랴. 화려한 겉껍데기에 속아 다가가고 싶어도, 미묘하게 느껴지는 전쟁 신들의 살기에 눌려 중압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본인들은 무의식중에 흘리고 있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전투에 임할 때 상대에게 수를 읽힐까 봐 더 철두철미하게 살기와 파장을 갈무리하는 듯했다.
한숨을 쉬며 기다리던 치영은 흘끗 로비의 벽면 시계를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가, 방문증을 받았으면 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 대면부터 늦으면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안 좋을 게 뭐가 있어. 아쉬운 건 그쪽인데.”
기백한이 치영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예의범절을 중요시하는 기백연 소령도 드물게 입을 다물고 백한의 말에 동조했다.
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도 의뢰인인데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고층으로 향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조현호가 있는 이사실로 들어가자마자 깨어졌다.
“당장 안 나가!”
고함 소리와 함께 치영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오다가 바로 눈앞 공중에서 뚝 멈췄다.
치영은 놀라 백한을 바라보았다. 그가 ESP로 날아온 크리스털 재떨이를 멈춰 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