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99화 (99/114)
  • 99화

    백한은 스포츠를 즐기는 것처럼 같은 성별의 가이드와 붙어먹는 에스퍼들을 수없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간편한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건 비단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뿐만이 아니었다. 에스퍼들은 정조 관념이 희박한 편이라 같은 에스퍼와의 잠자리를 스스럼없이 즐기기도 했다. 감정이 섞이지 않은 편리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시도하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 백한에게도 상대의 성별 따위는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정복욕이 만족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백한에게 남자 새끼랑 자는 게 가능하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백한은 그 물음에 조건을 달아, 전투 후에 아드레날린이 가라앉지 않는 상태에선 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다 되는 관계 속에서도 유일하게 남자 가이드만 역겨웠다. 가이드이면서 여성, 에스퍼이면서 여성, 에스퍼이면서 남성인 이들은 상관없었다. 좀 넓게 보자면 일반인 남성도 나쁘지 않았다. 기백한이 관계에서 추구하는 것은 애정이 아닌 욕구의 해소니까.

    그러나 딱 한 가지, ‘남성’과 ‘가이드’의 조합이 소름 끼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트라우마의 일종이었으니 말이다.

    열등감에 찌든 새끼들은 그런 점을 두고 극복하니 뭐니 개지랄을 떨며 교정하려 노력하겠지만, 백한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단점을 숨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월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배곯는다는 가이딩은 풍족하기만 하고, 센터의 모든 가이드는 백한을 사랑했다. 가이드 남성에게 가이딩을 받지 못하는 건 문제 축에도 끼지 못했다.

    정 안 되면 모양은 좀 빠지겠지만 한 배에서 나온 동복형제인 기백연에게 부탁해도 되는 일이다.

    하여 기백한은 에스퍼이면서도 가이딩에 대한 굶주림, 기갈과 갈증을 몰랐다. 그가 그런 갈증을 목도한 것은 안치영과의 각인을 맺은 이후였다.

    타는 듯한 목마름, 상대의 가이딩 파장이 그리워 뒈져 버릴 것 같은 나날. 모두 다 그 사고와 같은 각인 이후로 백한이 겪는 것들이었다.

    남성 가이드에게 가이딩을 받는 즉시 혼절해버릴 만큼 결벽했던 유년기가 지나도 나아지는 것 없던 백한에게 치영의 존재란 갑작스레 일어난 사고의 후유증과 같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각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백한도 알고 있다. 치영의 잘못은 없다는걸. 치영의 존재 자체가 제게 잘못인 거지.

    그래서 파병을 떠났다. 가능하면 안치영 역시 다치지 않는 각인 해제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그의 죄가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도 했고, 또 몇 년간 살펴본 안치영은 남자 가이드라는 것 외에는 딱히 싫어할 만한 구석이 없었다. 유난한 제 옆에 붙어 있는 것이 치영이라고 좋았으랴.

    기백한은 의외로, 자신의 성격이 무척 더럽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싸가지 없는 걸 고칠 생각이 없어서 그렇지, 본인이 무례하고 이기적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 제 옆에서 무던하게 버티는 안치영을 보면 미인이라 팔자가 사나운가 싶기도 했다.

    두 사람이 만난 지도 햇수로만 8년이다. 정이 붙을 만큼 안치영에게 잘해 준 적은 없지만, 그간의 세월을 싹 무시하고 애가 죽든 말든 각인을 강제로 해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백한의 첫 파병이 시작되었다. 그동안 백한은 각인 해제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수많은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전쟁광처럼 부르면 나아가 기꺼이 무기가 되어 주었다.

    에스퍼를 자주대공포처럼 수출하는 센터장의 수작에 장단을 맞춰 준 것 역시, 다른 나라 에스퍼들이 어떤 식으로 각인을 해제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뭐 하러 각인을 해제해. 그것만큼 에스퍼에게 축복인 게 또 어디에 있다고.”

    상대가 죽지 않는 이상 각인을 해제하지 않는 것이 에스퍼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더 이상 가이딩에 배곯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각인 상대의 가이딩이 해당 에스퍼에게 주는 만족감까지 훌륭했다. 여러모로 에스퍼에게 이득인 거래인 셈이다.

    각인을 통해 가이드가 얻는 것이라고는 성적인 만족감이 좀 더 높아지는 것 외에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기백한에게만은 그것이 행운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의 상대는 남성이자 가이드였다. 백한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혐오하던 조합. 상대가 좋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사실 근래에 백한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용병이 들고 온 자료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백한은 천천히 그가 가져온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논문은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뜻밖에 낯익은 단어가 타이핑되어 있었다.

    이악 부대 실험 번호 142 : 가이딩 파장과 전투 가이딩에 대한 상관관계

    이악 부대라면 치영이 온 곳이었다. 이역만리 먼 땅에 있는 애커만 공화국 출신의 용병이 그 연구 자료를 왜 갖고 있단 말인가.

    백한이 그를 바라보자, 용병이 씩 웃으며 말했다.

    “거 봐, 하니. 내가 이건 네가 봐야 한다고 했잖아.”

    그가 연구 자료를 빠르게 넘기더니 형광펜이 쳐진 구절을 다시금 눈앞에 들이밀었다. 백한은 천천히 글자를 읽었다.

    최면을 통한 가이드 등급 조절의 이론과 실재

    소제목으로 처리되어 있는 구절이 백한의 뇌리에 깊숙하게 박혔다. 가이드 등급, 등급……. 백한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치영의 출신, 치영의 가이딩, 두 사람 다 원한 적 없던 각인, 치영의 가이딩이 보여 주는 독특한 파장의 형태, 그리고 그 문서에 쓰여 있던 그다음 구절.

    고등급의 가이드를 저등급의 가이드로 세뇌하는 것에는 최면 에스퍼의 ESP가 필요하다.

    전율이 이는 기분이었다. 등골이 오싹했던 그 감각. 이악 부대에 최면 에스퍼가 존재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다급히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려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백한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지난 일에 대한 단편적인 것들을 떠올리던 백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프의 전면 창을 바라보다가 옆자리에 다소곳하니 앉아 있는 치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의외로 김민우에게 감각이 있었는지, 그가 골라 온 짙은 남색의 정장이 아주 잘 어울렸다. 치영에게는 이탈리아제 정장이 추구하는 남성성보다 프랑스 브랜드의 옴므 라인이 더 잘 맞는 듯했다.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몸의 선을 부각시켜 도리어 절제된 아슬함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는지라, 비슷한 분위기인 치영과 무척 잘 어울렸다.

    치영의 늘씬한 몸에 재단하여 맞춘 듯 깔끔하게 떨어지는 부분 역시 칭찬할 만한 요소였다.

    다음에는 아예 테일러숍에 데리고 가, 처음부터 그의 몸에 맞춘 정장을 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적당한 키와 평균 비율보다 긴 다리 덕분에 옷이 웬만큼 이상하지 않은 이상 얼추 소화해 내는 것이 귀엽기도 했다. 백한은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의 검지로 핸들을 두들겼다.

    그러다가 지금도 치영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저를 인식했다.

    인정한다. 분명히 시작은 안치영에 대한 감시였다. 그의 옆자리에서 안치영이 실험체라는 걸 확실히 할 수 있는 증거를 모으려고 했다. 지금도 백한은 치영이 이악 부대의 실험체였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의 의심은 지난번 백령도에서 최면 이능을 다루는 에스퍼와 접전을 벌인 뒤 더욱 짙어졌다.

    파병에서 돌아온 후, 백한은 일부러 치영과의 접촉을 늘려 그의 가이딩이 에스퍼에게 주는 ‘느낌’에 대해서 세밀히 관찰하였다.

    예전이었다면 파병에서 돌아온 뒤에도 최소한의 가이딩만을 수여받고 바로 떨어졌겠지만, 지난 귀국부터는 태도를 달리했다.

    백한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안치영은 절대 F급 따위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상했다.

    지붕의 슬레이트가 내려앉아 자욱한 먼지에 쌓인 이악 부대의 열악한 식당 안에서 안치영이 전개한 미미한 가이딩 파장이 제게 와 닿은 그 순간부터, 백한은 치영의 가이딩에 흥분했다. 고등급의 에스퍼를 흥분시킬 수 있는 가이딩을 전개하는 가이드가 고작 F급일 리가 없다.

    진작 깨달았어야 했는데, 그동안은 각인 해제의 방법을 알아보느라 애먼 시간을 보냈다. 백한이 생각하기에, 안치영은 최소 이악 부대에 의해 세뇌당한 가이드가 분명했다.

    그러나 안치영이 아직도 이악과 내통하고 있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진화 같은 찐따 새끼한테 휘둘려 이악 쪽으로 다시금 빨려 들어간다면 모를까.

    그렇게 치영을 의심했던 백한의 첫 목적은 변질된 지 오래였다. 치영에게 전투 가이딩을 익히게 했던 이유 역시 용병이 건네준 연구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뭔가를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치영이 가상의 섬에서 보여 주었던 가이딩 파장은 백한의 추측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백한은 그동안 치영의 옆에 붙어 그의 세뇌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파악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가이딩 파장이 뇌파와 연관성이 있는 이상, 뇌가 주물러진 상태인 치영의 가이딩에 더욱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백한은 제 나름으로 노력이라는 걸 해 보았다. 기백한 생애 최초의 노력은 그렇게 치영을 위해 쓰였다.

    안치영에게 적응하기.

    모든 남자 가이드에게 적응할 필요는 없다. 안치영에게만 적응하면 되는 일이다. 그의 각인 가이드는 안치영뿐이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