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98화 (98/114)

98화

그렇게 물었던 치영은 정장을 갖춰 입은 채로도 넥타이 하나 없이 숙소 현관에 서 있어야 했다. 어제저녁 있었던 코드 그린 신호에 대한 일로 기백한과 박형인, 기백연이 모두 중앙부에서 회의 후, 조현호와의 약속 시간 전에 숙소 앞으로 치영을 데리러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치영의 손에는 넥타이 하나가 덜렁 들려 있었다. 에스퍼들은 하나같이 넥타이 하나에 목숨을 걸 수는 없다는 이상한 변명으로 매주는 걸 회피했다.

치영은 이게 대체 뭐라고 그렇게 난리들을 치나 싶어 멍하게 손바닥 위에 넥타이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소리도 딱 저만큼 요란한 지프 한 대가 짐승 우는 소리를 내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기백한의 지프였다.

끼이익, 하며 급정거에 타이어와 노면의 마찰음이 심하게 났다. 치영은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귀찮아서 인상을 찌푸린 채로 백한의 지프를 바라볼 뿐이었다.

백한이 휘파람을 휙, 불며 지프에서 내리더니 치영에게 말했다.

“어떤 씹양아치 새끼가 우리 자기한테 이렇게 야한 옷을 입혀 놨을까.”

“이거 그냥 정장입니다만.”

야한 옷이라니. 노출이 많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꽁꽁 싸매고 있는 것에 가까운데 왜 또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때와 달리 그 개소리가 신경 쓰이기는 했다. 이런 옷을 입어본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많이, 이상합니까……?”

치영은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백한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성큼 다가온 백한이 치영을 뚫어지게 보며 그의 손에서 넥타이를 빼앗았다. 손바닥에서 부드러운 뱀이 빠져나가듯 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견사로 직조된 넥타이가 미끄러졌다.

그는 치영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흠칫 놀랐던 치영은 애써 빠르게 피부에 흐르는 가이딩을 갈무리했다. 다행히도 그의 손은 살갗에 닿지 않았다. 대신 셔츠의 칼라를 위로 올린 채 넥타이를 둘러매 주었다.

“맬 줄 몰라서 들고 있었던 거야?”

“예.”

치영이 간단하게 대답하자, 백한이 피식 웃었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끄트머리에, 치영의 시선이 머물렀다가 금세 떨어졌다. 목덜미에서 스륵 거리는 소리가 스쳤다. 부드러운 넥타이의 섬유가 드레스 셔츠에 문질러지는 소리였다.

기백한은 장난기 가득한 눈을 하고도 웬일로 아무 말 없이 넥타이를 매 주었다. 치영은 멀거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가 금세 어깨 부근에 시선을 주기도 하며 시선을 부산스레 움직였다. 약간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걸 눈치채고 놀릴 줄 알았던 기백한은 오늘따라 아무 말 없이 치영의 목에 넥타이를 매어 줄 뿐이었다. 윈저노트로 맨 넥타이를 툭툭 치며 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치영은 흠, 하고 목을 울렸다.

“괜히 쫄지 말고. 있는 집 새끼라 분명히 성격 더러울 테니까.”

‘너처럼요?’라고 대꾸하고 싶었던 치영은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백한은 치영의 잘 매어진 넥타이를 한 번 보고는 재킷을 툭툭 쳐 정돈해 주었다. 마치 사회 초년생의 첫 출근을 배웅하는 보호자처럼 굴고 있었다. 어쩐지 배 속이 간지러웠다.

작은 다정에도 움츠러들듯 조여 오는 속이 웃기기도 했다. 치영은 언제나 되어야 이런 사소한 것들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모든 희망은 진작 말소된 줄 알았는데 어디 숨어있기라도 했던 걸까. 작게 한숨이 나왔지만 그것도 곧 사라질 거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병 같던 사랑을 뒤로하고, 치영은 점점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가는 중이었다. 지난 몇 년의 눈앞의 이 에스퍼가 제 마음의 주인이었던 날들을 뒤로한 채.

“개지랄 떨면 참지 말고 욕 박아 줘.”

“그러다 일 나면요. 뒷감당은 누가 합니까.”

치영은 어조 없이 대꾸했다. 백한이 그의 머리를 흐트러트리려다가 정돈되어 있는 걸 보고 볼을 꾹 누르는 걸로 대체했다.

치영이 재빠르게 고개를 뒤로 물리려 했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백한은 그런 치영의 어깨에 팔을 올린 뒤 지프의 조수석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지난번부터 이상한 말을 하네. 네 뒷감당을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그래? 그럼 지난 세월 동안, 왜 내게는 감당 못 할 일들이 그렇게나 많았던 건데. 치영은 쯧, 혀를 찼다.

백한은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조수석 문을 열고 있었다. 치영은 말없이 지프에 올라탔다. 그러다 문을 닫기 전에 물었다.

“기 소령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서류 챙겨서 따라온다니까 다른 에스퍼 걱정 그만하세요. 형 서운해서 자X가 다 아픈데 노상에서 세워 봐야 우리 둘 다 좋을 거 없잖아요, 자기야.”

그러더니 차 문을 닫아 주고는 저는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는 막힘 없이 센터를 떠났다.

치영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정장을 제 손바닥으로 여러 번 쓸어 보다가, 혹시나 손바닥에 난 땀이 옷감에 묻을까 봐 그만두었다. 창밖으로, 센터의 북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 * *

“하니, 네가 말한 걸 찾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말이야.”

애커만 공화국은 힘을 키운 에스퍼군이 국가 원수이던 호르헤 푸글리시를 살해하고 쿠테타에 성공한 뒤 세운 나라였다. 독재자이던 호르헤는 아이러니하게도 에스퍼 군대를 창설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호르헤는 비윤리적인 군부 실험을 강행하여 에스퍼를 생체 실험하고, 가이드들을 탄압하는 등 개 같은 짓거리들만 골라 저질렀기 때문에, 그의 손으로 키운 에스퍼 군에 의해 사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역사적 이유로, 애커만 공화국 출신 용병들은 에스퍼나 가이드를 향한 생체 실험에 무척이나 민감했다.

반면 그렇기에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한 연구적 지식이 높은 나라이기도 했다. 그들은 호르헤의 사형 이후에도 동료를 실험체 삼아 자행한 실험값을 폐기하지 않았다. 앞에서는 동포의 희생을 재로 돌리지 말자고 포장했지만, 결국 딴 주머니를 차겠다는 욕심이었다.

권력과 힘이란 그런 것이다.

호르헤의 독재를 규탄하겠다는 최초의 슬로건조차, 국가 원수를 잃은 뒤 일인자 자리가 비어 버린 나라에서는 소용없어졌다.

그렇게 애커만 공화국의 에스퍼들은 동포의 피와 살 위에서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능의 기술력을 점점 더 키워 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애커만 공화국에서조차 S++급의 에스퍼와 각인한 가이드가 S+급 이하일 때 서로 다치지 않고 각인을 해제하는 법에 대해서는 개발하지 못했다.

기백한의 중동 파병은 그런 식으로 그 목적을 잃고야 말았다. 어떻게든 각인 해제에 대한 실마리를 얻으려 했던 파병이 헛수고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니 심술이 나지 않을 수가.

백한은 저에게 할당된 개인 벙커에 말도 없이 들어 온 애커만 공화국의 용병을 흘끗 보고는 눈알을 뒤로 굴렸다가 공중에서 손을 움켜잡아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나 용병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복장 터질 말만 계속해 댔다.

“오, 문도 닫아 주다니 친절하구나, 하니.”

“용건이나 말하고 꺼져. 내가 네 입 냄새를 더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네 거기를 도려내 개한테 던져 주고 싶은 걸 참느라 남은 인내심을 몽땅 써 버렸거든.”

당시에 백한은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다. 빌어먹게 더운 데다가 모래바람 때문에 샤워를 해도 금세 꺼끌거리는 나라까지 날아온 소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덩치는 커다란 주제에 눈치가 없는 용병이 박수를 짝짝 치며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애커만 공화국 특유의 영어 억양이었다.

“내가 뭘 찾아냈는지 봐 봐. 네가 원하던 건 찾지 못했지만…….”

그래. 그것이 문제였다. 기백한이 원하는 걸 찾지 못한 게.

오만하고 아름다운.

강하고 빛나는.

위와 같은 수식어는 기백한 같은 인간에게 맞춤형처럼 느껴졌다. 그는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쟁취하지 못한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인간 위의 인간. 백한은 자신을 그렇게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태생이 그러했다. 조부는 기백한의 그런 성정을 경계하여 예법을 배우게 하고 엄하게 처벌하였지만, 그만큼 사랑을 퍼부어 주었었다. 덕분에 꽤 화목한 가정이었다. 로봇같이 뚝딱거리는 기백연과 오만하고 냉정한 기백한이 쌍둥이로 태어난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러나 그들의 부모는 감히 불평하지 못하였다. 범의 피에서 범이 나는 것은 자연의 섭리였으니까.

행복한 가정이라고 해서 사랑스럽고 다감한 아이만 태어나란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어쨌든, 기백한의 부모 역시 행복한 토끼보다는 배부른 맹수들에 가까웠기에, 내심 본인의 자식들이 먹이사슬의 최정점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뿌듯해하는 듯했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하여, 혼돈의 화신과 같은 기백한은 태생부터 강인했고, 강인함을 말미암아 오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받은 오만에도 불구하고, 기백한에게도 유일하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안치영.

“하니, 그러지 말고 여기 좀 봐 봐.”

용병이 계속해서 들고 온 것을 백한의 눈앞에 들이밀고 있을 때도, 백한은 고국에 두고 온 자신의 사랑스러운 쓰레기에 대해 생각했다.

백한은 아주 어릴 때, 남자 가이드에게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자세히 말하고 싶지도 않고, 떠올릴 때마다 구토를 유발하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한다. 아무튼 백한은 남자가 싫은 게 아니었다.

에스퍼로 태어나 양성 학원 때부터 쭉 저와 같은 초인들만 모인 곳에서 생활하면서, 백한이 목도한 것은 수많은 동성애자들이었다. 사실, 동성애자라고 볼 수도 없었다.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선 이성과 동성 사이의 관념 자체가 희미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에스퍼와 가이드가 성(性)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에스퍼냐 가이드냐가 더 먼저였다. 그들의 분류는 일반인들이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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