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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97화 (97/114)
  • 97화

    이 자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치영은 혹시 상대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까 싶어 긴장감에 목이 바싹 탈 지경이었다. 재빠르게 머리를 돌려보아도 이 상황은 말이 되질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노출되는 걱정은 둘째치 고라도, 물까마귀, 조현호는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이곳이 이악 부대의 자금줄이니 말이다.

    아무리 이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려놓았다고 한들, 방심하면 안 될 일이었다. 이곳에서 쥐죽은 듯 지내며 이악 부대가 방문할 때까지 때를 노려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필 이곳에 조현호가 오다니. 경호를 요청해 놓고 경호 시작도 전에 경호 상대가 사라지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부장이 말한 현금 많은 큰손이라는 놈이 바로 지금 기절해 있는 이놈이구나 싶어졌다.

    에스퍼 주제에 가이드의 손날치기 한 번에 기절해 버린 걸 보면 평소 체술 훈련은 하지 않는 듯했다. 인사불성으로 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웬만하면 취하지 않는 에스퍼의 신체로 대체 얼마나 처마셨길래 이렇게 손가락으로 만든 숫자도 못 알아볼 정도인지. 치영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인사불성인 탓에 치영의 얼굴을 기억할 확률도 희박하다는 거였다.

    치영은 기절한 조현호를 두고 바깥의 소리를 듣기 위해 숨을 죽였다. 아직은 아무도 저나 조현호를 찾는 것 같지 않지만, 곧이어 사람들이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조현호를 찾기 위해 나올 것이다.

    그 전에 이대로 귀가시키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조현호의 집 주소를 안다고 해도 치영이 그를 집에다 데려다줄 수는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일단은 제 얼굴을 가린 다음, 조현호를 밖으로 내보내 그의 차에 태운 후 김 부장에게 조현호가 대리운전 기사를 요청했다고 거짓말하는 게 최선의 대책 같았다.

    그런 다음 센터로 복귀하여 조현호가 이곳에 자주 온다는 걸 기백한이나 백연에게 알릴 방법을 강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는 지금 어디…….”

    “…에 있…….”

    한 사람의 목소리는 누구인지 특정이 되지 않지만 익숙한 느낌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김 부장의 목소리였다. 김 부장이 깍듯하게 모시는 듯한 말투로 봐서는 함께 말을 나누는 이가 이악 부대의 사람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얼빠진 조현호를 화장실까지 산책시키는 것보다 창고에 처박은 뒤 바깥 동태를 살핀 것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조용하게 밖을 예의주시 중이던 치영은 아예 숨을 멈췄다. 그때, 조현호가 갑작스레 으음— 하는 침음을 냈다. 곧바로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고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에 집중했다.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치영은 심장이 거세게 뛰는 걸 느꼈다. 며칠간 억눌러 왔던 가이딩이 미세하게 새어 나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긴장감에 아릿할 정도로 저린 등골을 무시하며 계속해서 문을 응시하는데, 누군가 제 손등을 긁었다. 조현호가 의식을 차린 것이다.

    치영은 속으로 기백한이나 할 법한 욕을 내뱉은 뒤, 조현호를 돌아보고는 검지를 입술에 댔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다소 다급하게 나간 그 조용히 하라는 제스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곳은 지금 도서관이니 정숙하시오.’라고 말하기라도 하듯, 조현호가 시끄럽게 구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치영의 단호한 손짓 덕분이었을까, 조현호는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았고, 이내 바깥 복도에서 들리던 발걸음 소리가 차츰 멀어졌다. 그제야 조현호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는 당황한 듯했다. 치영은 그런 조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너 누구야……!”

    간이 창고 안이 무척 어두운 데다가,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등지고 선 바람에 얼굴이 보이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치영은 망설이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다. 조현호가 입고 있던 상의 자락을 그의 바지춤에서 쑥 빼내어 얼굴에 뒤집어씌운 것이다.

    “으억—! 이게 무슨—!”

    그런 뒤 곧바로 창고 문을 박차며 튀어 나갔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이곳이 VIP들을 위한 불법 시설인 만큼 그들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복도에 설치된 폐쇄 회로 카메라가 없다는 것이었다.

    치영은 뒤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뒤에서 조현호가 악을 쓰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구르는 소리가 났다. 창고 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우르르 떨어지는 소리였다.

    복도 끝자락에 도착하고 나서야 치영은 겨우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창고 안에서는 양동이 하나만 굴러 나왔을 뿐, 아직도 조현호는 안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려 아예 밖으로 빠져나왔다. 김 부장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조현호가 룸 안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밑으로 나와 서성이던 치영은 약 5분 전, 자신의 근무 시간이 종료되었음을 깨달았다. 그제야 맥이 탁 풀렸다. 입고 있던 셔츠의 목 부분 단추를 풀어 숨을 내쉬며 김 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웠다는 걸 진작 알았다면 바로 사무실로 향했을 것을. 치영은 살짝 후회하며 걸었다.

    다행히, 사무실에는 김 부장이 있었다. 아까 전 별관 복도를 내려가 바로 사무실로 들어온 듯했다.

    치영은 그의 표정이 변함없이 시큰둥한 것을 보고 자신이 벌였던 일을 들키지 않았음을 확인받았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불렀는데 주방에 물어보니까 일도 깔끔하게 잘했다 하대? 차비 얹어 줄 테니까 가져가.”

    “아, 감사합니다…….”

    “그래, 가 봐. 내일도 늦지 않게 오고.”

    “예.”

    치영이 꾸벅 인사했다. 그날의 근무는 그렇게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길, 여전히 말이 없는 운전병의 차를 탄 치영은 차 창문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았다. 센터로 가는 길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꺼져 있어 한없이 어두웠다.

    그 어둠에 침잠해 버리고 싶은 제가 무서웠다. 어서 방으로 돌아가, 약이라도 먹고 다 잊은 채 잠이 들고 싶었다.

    내일의 일은 내일이 해결해 주길 간절히 애원하며 말이다.

    * * *

    그리고 그다음 날, 치영은 또 한 번 자신의 운명이 녹록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도 의뢰인 만나는 첫 자리이니까 지난번에 사 둔 거 입고 가는 게 어때요, 안 소위?”

    오늘이 바로 몇 시간 전 얼굴에 티셔츠를 뒤집어씌운 채 도망쳐야 했던 조현호를 만나는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아침 식사 자리였다. 치영은 김민우의 말에 미역국을 뜨던 숟가락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당장 오늘 저녁에 조현호와의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다. 치영의 얼굴을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지난 새벽, 늦게 들어온 치영이 2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에스퍼들을 마주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농도를 높여 평소 하던 것보다 수 배는 더 많은 양의 방사 가이딩을 전개했다. 덕분에 에스퍼들은 치영이 귀가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푹 잠이 든 듯했다. 다행히 기백한도 복귀 전이었다. 치영은 높아졌던 심박수가 천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안도감에 휩싸이자 긴장에 젖었던 몸이 피로에 좀 먹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피곤함이 가시지 않아 빠르게 씻은 뒤 머리를 말리고 자리에 눕자마자 백한이 들어왔다. 치영은 곧바로 자는 척했다.

    백한은 방 주인도 아니면서 당당하게 치영의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이 따로 있는데도 그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치영의 욕실은 치영에게나 맞는 사이즈지, 기백한 같이 무식하게 큰놈에게는 비좁을 텐데 말이다.

    뭐 하는 짓일까 궁금해 잠도 오지 않았다. 피곤한 마음에 녹진하게 풀어지던 신경줄이 다시금 팽팽해지는 기분이었다.

    잠시 뒤, 백한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침대로 기어들어 왔다.

    “예쁜아, 자냐.”

    “…….”

    기백한의 머리카락에서 톡 떨어진 물방울이 치영의 뺨에 닿았다. 움찔 놀랄 뻔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이딩을 잠갔다. 서서히, 가이딩 컨트롤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백한은 한동안 치영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뭘 보나 싶어서 뺨이 간지러울 지경이 되었을 때, 그가 자는 척하던 치영의 허리를 감아 당겨 제 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

    “따끈하네.”

    잠든 사람을 상대로 저 혼자 지껄이는 폼이 꽤 익숙한 걸로 봐서는, 치영의 방으로 기어들어 와 침대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지난날에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치영은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아 오히려 그냥 잠에 들자 싶었다.

    한 번 생각하고 나니 수마에 잠기는 느낌이었다. 치영에게는 하루가 유독 길기도 했다. 그렇게 깨어나 보니 아침이었고, 기백한은 침대 위에 없었다.

    인교의 아침 먹으라는 말에 내려와 상차림을 거들려다가 허인나에게 일을 시키려고 벼르고 있던 김민우에 의해 쫓겨나야 했다.

    그렇게 아침 식탁에 겨우 앉을 수 있었는데 말 몇 마디에 체하게 생겼다. 치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 저 넥타이 못 매는데.”

    “아이고, 정말요? 이를 어쩌나.”

    박형인과 기백한은 보이지 않고, 식탁에는 김민우와 이인교, 허인나뿐이었다.

    치영은 김민우가 꽤 당황스러워 보이자, 그들 역시 넥타이를 맬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넥타이 맬 줄 아시는 분이 없으신 겁니까.”

    정복 역시 넥타이를 착용해야 하는데 저야 정복 입을 일이 잘 없지만 훈장 받을 기회가 많은 그들이 넥타이를 착용하지 못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묻자 그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저희가 매어드리는 게 좀 그렇습니다.”

    “맞아요, 개지랄 떨 분 계시잖아요.”

    이인교의 말에 허인나가 장조림의 계란을 숟가락으로 툭 가른 뒤 그 위에 간장 소스를 끼얹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사소한 일에 지랄할 이라면 기백한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넥타이에 무슨 잘못이 있다고 발동이 걸려 난리를 친단 말인가.

    “중령님이 왜 난리를 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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