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95화 (95/114)
  • 95화

    기백연은 말을 덧붙였다.

    “정보원의 연락이 왔다. 이악 부대가 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하니, 물까마귀에 대한 경호를 사흘 후, 오전 09시부터 시작한다.”

    물까마귀는 조현호에 대한 작전상 코드네임이었다. 치영은 안색이 저절로 굳으려는 걸 억지로 참아 내야만 했다.

    콜라숍은 다음 주부터 출근인지라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임무가 당겨진 이상, 출근 첫날부터 결근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치영의 뜻대로 된 적이 없었던지라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해야 했다. 백한이 그런 치영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티끌만 한 의심도 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야 하는 처지였다. 치영은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피하려다가, 그냥 백한을 마주 바라보았다.

    빔 프로젝트를 켜 둔 회의실 내부는 회의실 내부의 LED등의 전원을 끈 터라 다소 어두웠다. 꽤 명확한 명암 속에서 백한이 치영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딱히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뚫어지게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의아해 작게 입 모양으로 물었다.

    ‘뭘 봐요.’

    백한은 대답하지 않고 치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치영의 뺨을 슬쩍 밀어 다시금 앞을 보게 한 뒤, 그의 어깨에 제 턱을 내려놓은 채로 저도 회의실 전방의 화면을 주시했다.

    불편한 자세에 움직여 봐도 백한은 턱을 치워 주지 않았고, 치영은 결국 그 상태로 백연의 브리핑에 집중해야 했다. 살이 맞닿는다고 해서 전처럼 떨리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백한이 미워 죽을 것 같던 시절에도 그와 닿을 때면 심장이 거세게 뛰고는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매번 다독였지만, 치영의 높은 자존심은 주인을 잃은 마음에 분노했다. 당시엔 치영의 마음조차 그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그런 마음이 소강된 상태였다. 멍청하게 기백한 같은 남자를 사랑했을 뿐이지, 그 사랑의 방법마저 멍청하지는 않았다.

    치영은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백한과 닿아도 앞에서 진행되는 브리핑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백한은 때로 무척 감이 좋은 편이라, 치영이 그렇게 마음대로 도망갈 수 있도록 놔주지 않았다. 집중하던 치영의 귓불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이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끝나고 야식 먹자. 너 떡볶이 좋아하잖아. 애들 몰래 센터 나가서 사 먹고 오면 되겠네.”

    야자 땡땡이치고 오락실이나 가자고 꼬시는 고등학생처럼 철없는 말투였다. 웃긴 건 그런 말투가 백한과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거였다.

    하지만 치영은 학교를 다녔다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모범생이 되었을 성격이었기 때문에 어깨를 튕겨 짜증을 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기백한이야 저런 브리핑을 듣지 않아도 실무 경험이 많아 즉각 파악이 가능하겠지만, 치영은 이번 작전에 대해 최대한 많이 공부해 놔야만 했다.

    가뜩이나 위장 취업까지 한 마당에 시간이 어긋나 한쪽에 걸리기라도 하면, 성질 더러운 제 각인 에스퍼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치영이 정색하고 짜증을 내는데도 백한은 그의 어깨 위에서 턱을 떨어트리지 않은 채로 치영을 의자째 끌어안고 있었다. 메모도 하고 싶었는데 거슬리기만 했다.

    “이따 내가 설명해 줄게.”

    백한은 계속해서 소곤거렸다. 뭔가 뜻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보다는, 치영의 귓불에 입술이 닿는 감촉이 좋아 그러는 듯했다. 파장이 엉겨 붙으며 너울 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닿은 즉시 가이딩 컨트롤을 해야 하는 치영의 속도 모르고 말이다.

    백연이 그런 제 동복형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쯧, 혀를 차더니 브리핑을 지속했다.

    “내일 오후에 안치영이 물까마귀와 먼저 접촉한다.”

    그 말에 순간 놀라, 티 나게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일 오후…….’

    백연의 말을 되새기며 치영은 아직 출근 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긴장에 저절로 펴진 허리 근육을 누그러트리려 노력했다. 그때, 백한이 드디어 치영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며 짜증을 냈다.

    “나도 낀다.”

    “내일 접선의 현장 치프는 나야. 기 중령은 굳이 올 필요 없다.”

    “자매님, 저 허락 구하는 거 아니에요.”

    백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런 작전에 있어 총괄 책임자는 항상 백한인지라 백연은 길게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셋이 가는 걸로 한다. 나, 기백한 중령, 안치영 소위.”

    “그래. 나 3P 좋아해.”

    공중에서 중지와 엄지를 튕겨 소리를 낸 백한이 엄지를 추켜들었다. 3P? 치영은 그게 뭘까 궁금했지만 부러 묻지는 않았다.

    그날의 브리핑은 당겨진 작전에 대한 간략한 변동 사항과 치영이 조현호와의 접촉 시에 지켜야 할 주의사항 등을 공지한 뒤 해산되었다.

    회의실을 나선 에스퍼들이 치영에게로 따라붙어 지지배배 떠들었다.

    “안 소위! 오늘 산 옷 예쁘다고 말 좀 해 줘요. 인나 새끼가 믿지를 않아.”

    “님 또 패턴 가득해서 개느끼한 옷 골랐죠? 안 봐도 훤하거든요.”

    “이게 진짜—.”

    인나와 민우가 투닥거리는 걸 보며 치영은 작게 웃었다. 그때 어깨가 묵직해지더니 백한의 팔이 치영에게 내려앉았다.

    닿을 때마다 조심해야 해서 신경줄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치영은 입 모양으로만 욕을 달싹이며 백한과 닿은 부분의 가이딩을 조절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방대한 양이 밖으로 세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조절하느라 머리가 어질할 지경이었다.

    속도 모르는 백한은 치영에게만 조용히 속삭였다.

    “떡볶이집 가자니까. 빙수도 사 줄게.”

    방과 후 초딩도 아니고. 게다가 애늙은이 같은 구석이 있는 치영은 이 날씨에 차가운 빙수는 먹고 싶지 않았다. 속이 차가워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쯧, 하고 혀를 찼지만 백한은 치영에게 달라붙다시피 걸으며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걸음 더 걸었을 때였다. 치영의 핸드폰에 진동이 옴과 동시에 백한의 호출기에 코드 그린이 떴다. 급하진 않지만 까다로운 일이 벌어졌다는 신호였다.

    “이런 씨발, 맘먹고 좀 꼬셔 보려 하면 왜 이렇게 잡것들이 끼어들어.”

    호출기를 들여다보던 백한이 혀를 차며 짜증을 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호출기에서 파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얇은 과자처럼 부서진 게 틀림없었다.

    치영은 한숨을 내쉬며 백한이 쓰레기통에 호출기를 처박는 걸 바라보았다. 철로 된 동그란 쓰레기통 안으로 호출기가 꽂히듯 처박히자, 깡 소리를 내며 쓰레기통의 한쪽 면이 툭 튀어나왔다. ‘분리수거도 안 하네.’ 하고 생각하고 있던 치영에게 백한이 말했다.

    “형 돈 벌어 올 테니까 방에 얌전히 계셔.”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한이 그런 치영의 뺨을 검지로 툭 건드린 뒤 자세를 낮추며 시선을 마주한 채로 말했다.

    “네가 새로 사 온 바디클렌저 향 좋던데 씻을 때는 꼭 그거 쓰고.”

    …남이사 뭘 쓰든 말든? 치영이 멀뚱멀뚱하게 올려다만 보자, 백한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치영의 짧은 머리를 흩트려 놓은 뒤 복도 반대편으로 향하며 박형인에게 짧게 뭔가를 말했다. 그의 말에 박형인 역시 백한과 나란히 복도 반대편으로 향했다.

    인교가 치영에게 저들도 이만 숙소로 가자고 말했다. 치영은 백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냈다.

    김 부장: 사정이 생겨서 그러는데, 지금 당장 출근해 줄 수 있어?

    오후 06:10

    액정을 내려다보던 치영이 조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저는 가이딩실에 들렀다 가야겠습니다. 먼저들 들어가세요.”

    심장이 갑작스레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 *

    오늘은 이 중사가 보내 준 운전병이 모는 차를 타고 왔다. 이 중사가 몰던 바로 그 차였다. 갑작스러운 김 부장의 연락에 치영이 이 중사에게 연락한 결과였다.

    치영은 운전병이 일반병 군복을 입고 있길래 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는 콜라숍에서 꽤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더니, “이 중사님이 미리 알려 주신 네비게이션 주소가 여깁니다.” 하고 말했다.

    치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려 곧장 콜라숍으로 향했다.

    콜라숍은 면접을 보러 왔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치영은 입구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했다.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코피를 흘리는 것도 모자라, 입에서 피 섞인 침을 퉤, 뱉고 있는 남자의 주위로 여러 명의 에스퍼들이 서서 담배를 태우며 낄낄거렸다.

    “뭘 봐요, 가던 길 가셔.”

    막 담배에 불을 붙이던 에스퍼가 인상을 찌푸리며 치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파장이 꽤 날카로워, 치영은 그녀가 가이딩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고 추정했다.

    “아니 왜. 저 형도 예쁘다. 같이 놀자고 해 보자.”

    다른 일행이 낄낄 웃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치영을 바라보며 휙,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그들의 희롱에 치영은 기분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무시하는 수밖에 없어 치영은 그대로 콜라숍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은 여전히 어두컴컴했지만, 일전에 방문했을 때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전에는 성인 콜라택 같은 분위기였는데, 오늘은 꼭 TV에서 본 시내 한복판에 있는 클럽 같았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EDM 사운드가 치영의 귀를 자극했다.

    긴장되는 맘에 여유를 주고자 짧게 심호흡한 뒤, 치영은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좁았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사람들로 꽉 찬 플로어에 비해, 문 하나를 사이에 두자마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벽을 타고 여전히 음파가 울리긴 했지만 멍멍한 정도였다.

    김 부장이 치영을 발견하고는 손짓했다.

    “어휴, 살았다. 오늘 현금 왕창 뿌리고 가는 놈이 갑자기 와서 일손이 달리더라. 바로 일해 줄 수 있지?”

    “네.”

    백한이 걸리긴 했지만 코드 그린 정도면 오늘 새벽에야 들어올 것이다. 치영의 근무도 그때쯤 끝날 것이다.

    운전병은 치영의 퇴근 시간에 맞춰 내려 준 장소에 차를 대고 서 있겠다고 했다. 못해도 치영이 백한보다 센터에 더 먼저 도착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 유니폼 줄 테니까 입고 나와.”

    김 부장은 정말 바쁜지 치영 쪽으로 유니폼을 툭 던졌다. 검은색 바지와 흰색 셔츠였는데 누군가 입던 것인지 아니면 캐비닛에 오랫동안 박혀 있던 것인지 약간 쿰쿰한 냄새가 났다.

    김 부장의 갑작스러운 연락에 긴장했던 치영은 그가 정말 바빠서 연락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안심이 되었다.

    김 부장이 탈의실을 가리키며 빨리 움직이라고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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