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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94화 (94/114)

94화

잠시 당황한 것처럼 보이더니, 그들은 곧이어 만면에 비웃음을 띠었다. 가이드는 아니고 에스퍼인 듯싶었다. 치영은 그들이 저를 비웃거나 말거나 다시금 물었다.

“그게 무슨 얘기냐고 물었습니다.”

“아니, 근데 뭐냐고 물어보시면 제가 다 대답해드려야 해요?”

목소리를 듣자 하니, 치영의 소문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그 남자인 듯했다. 옆에 있던 에스퍼가 낄낄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냥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치영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답을 기다렸다. 치영이 물러서는 것 같지 않자, 남자가 헛바람을 내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말하는 건데. 그쪽이 막 발현한 에스퍼 이능력 파장 다 조져 놓은 거?”

“…그거 제가 그런 거 아닙니다.”

“그거 쟤가 그렁 거 아뉩니돠. 아, 씨발 어쩌라고요. 그럼 뭐 물건 훔친 새끼들이 그래 내가 훔쳤다, 이 지랄 하는 거 본 적 있어?”

남자가 성큼 다가오더니 치영의 어깨를 툭툭 밀며 말했다. 쫓아온 일행이 피식피식 웃으며 남자를 건성으로 말렸다.

“야, 왜 이래. 가이드 건드려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아, 씨발 놔 봐. 얘가 먼저 말 좆같이 하잖아.”

“얼른 미안하다 하세요. 괜히 시비 걸어서 죄송하다고 해야 우리도 갈 길 가죠.”

그를 말리던 에스퍼가 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쓰레기나 오물을 보는 듯이 깔보는 시선이었다. 치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전 죄송한 거 없습니다. 먼저 남의 말 함부로 하고 다닌 건 그쪽들 아닙니까?”

“와, 근데 진짜 아까부터 너무 말을 막 하네. 뭐야, 너. 증거 있어? 우리가 왜 너 같은 새끼 얘기를 하고 다니겠어. 뭣도 아닌 놈을.”

“이능력 파장 얘기 꺼낼 땐 언제고 증거 없다고 하는 건 뭡니까. 그럼 그쪽이야말로 했던 말도 기억 못 하는 지능이라 기억 안 난다고 하세요. 그래야 저도 갈 길 가죠.”

치영이 그렇게 말하자 에스퍼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전까지 치영을 조롱하고 있던 에스퍼들은 치영의 말이 건방지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목을 꺾어도 반항 한 번 하지 못할 가이드 주제에 심하게 나댄다고 여겼다.

그들이 치영에게 위협을 가하기 직전이었다.

악랄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에스퍼 파장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그들을 휘감았다.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목이 졸리는 기분에 끅끅거렸다.

한 대 내려칠 듯 험악한 분위기던 두 에스퍼가 말을 멈추고 목 졸린 신음을 내자 놀란 치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백한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곧장 치영에게로 와서 물었다.

“밥은.”

“…먹었습니다.”

“뭐 먹었어.”

“햄버거요.”

“김민우 이 새끼는 카드까지 받아 가서 빵 쪼가리를 사 처먹여? 죽여 버릴까.”

그가 이를 아득 간 순간, 앞에 있던 에스퍼들이 끄윽, 하는 소리를 내며 조금 더 괴로운 얼굴을 했다.

센터 내에서 에스퍼끼리의 완력 다툼은 가능해도 이능력 싸움은 헌병대가 거품을 물고 쫓아 올 일이라, 치영은 물끄러미 백한을 올려다보았다.

햄버거가 빵 쪼가리라니. 센터에 처음 들어온 치영에게 가장 먼저 사 주었던 것이 햄버거 아니었나. 저를 아껴 주던 그때에도 백한은 온 마음을 다하지 않았었나 보다.

치영의 시선을 느낀 건지, 백한이 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눈빛이 너무 열렬한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뽀뽀를 어떻게 하니. 나 부끄러움 많이 타.”

“…역겨운 소리 하지 마시고 파장 거두십쇼. 이능 싸움 금지 아닙니까.”

“아, 이것들?”

그제야 눈앞에 두 사람이 생각났다는 듯, 백한이 고개를 모로 꼬더니 앞을 바라보았다. 두 에스퍼는 여전히 목덜미를 부여잡은 채 끅끅거리고 있었다.

백한은 그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더니 다시금 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이능 아니야.”

“말이 됩니까. 저게 이능이 아니면—.”

“그냥 살기 같은 거지, 뭐. 근데 난 이분들 죽일 마음 없고, 이분들 기가 약한 게 내 탓도 아니니까 이대로 어디 한 군데 망가지셔도 내 책임은 아니잖아?”

백한이 그들의 어깨를 턱턱 두들겼다. 말이 두들긴 것이지, 두 사람의 어깨가 그대로 내려앉아도 무방할 정도로 퍽퍽 꺾였다.

살기라는 게 특정인에게만 쏟아져 내릴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치영에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사이 풀려난 두 사람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아 헉헉거렸다. 치영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에도 그렇고 아침에도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길래 괜히 또 저에게 난리 치진 않을까 생각했는데,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에스퍼들의 귀를 잡아당기는 옆얼굴만 해도 그러했다. 간만에 스트레스 풀 건수를 잡아 기쁜 얼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 뭐라던?”

“별말 안 했습니다. 그보다 회의 시간에 늦은 것 같은데 중령님은 1층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너 데리러 왔지.”

기백한은 담백하게 대답한 뒤, 치영의 소문을 흘리고 다니던 에스퍼의 뺨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만만하면 건들고, 쫄리겠다 싶으면 입 다물고. 선택적 분노 장애 오져 버렸죠? 부랄값도 못 하고 사시는데 가운데 물건 똑 따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제군?”

“기, 기 중령님—.”

“너네 쟤가 ‘아무 일 없었어요. 별일 아니었어요.’ 한다고 해서 나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주변 증언이랑 저기 위에 있는 CCTV만 파 봐도 니들이 뭐라고 지껄였는지 다 나와. 나 존나 끈질긴 새끼니까 두 분 모두 기대하셔요.”

거기까지 말한 백한이 에스퍼들이 입고 있던 군복의 왼쪽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잡아 뜯었다. 오버로크 되어 있는 명찰이 옷감째로 쭉 찢겨 나갔다.

무식한 악력에 치영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백한이 상쾌한 얼굴로 허리를 편 다음 치영에게 가자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먼저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 그를 바라보던 치영도 걸음을 옮겼다.

“아악—!”

주저앉아 있던 에스퍼가 갑작스레 허공에 대고 꽥 소리를 질렀다. 다들 놀랄 정도로 큰 소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치영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흘끗 보던 백한이 큭큭거리며 치영에게 말했다.

“너 저 새끼 손 밟았지.”

“모르겠습니다.”

“뭘 몰라, 일부러 존나게 밟아놓고.”

“뭐가 물컹한 것 같기는 했습니다.”

표정 없이 대꾸하는 치영의 말에 백한이 씩 웃더니 그를 끌어당기며 제 옆구리에 바짝 붙였다.

“야, 근데 너 방에는 왜 처박혀 있었던 거야. 그사이에 쪽 말랐네. 너 지금 까시다, 까시.”

“…….”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으로 인해 가이딩이 울컥 새어 나가려는 걸 참느라 눈시울이 붉어졌기 때문이다.

백한의 기분은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어 보였다. 김민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백한의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 제 신상에는 이로운 일이라, 치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백한은 여전히 치영을 제 옆구리에 낀 채로 걸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회의실이 있는 층에 내렸다. 전에 잡아 두었던 그 회의실과는 반대편 복도에 있는 곳이었다.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때 보았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번 회의에는 동죽의 김한나 대위와 추국의 이승균 대위도 함께였다.

단순한 경호 업무로만 보자면 센터 내 상위 대원들이 모두 투입된 것이 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조종영의 의뢰를 맡은 것이 이악 부대인 이상 작은 전쟁이 일어난다고 봐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와요, 안 소위.”

식사 자리에서 본 적 있는 이승균 대위와 붙임성이 좋은 허인나 대위가 마주 인사했다. 치영은 경례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김이석은 치영의 경례에도 표정 없는 서늘한 얼굴로 고개만 까딱하는 것이 다였다.

그를 보고 허인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얼레, 김 소령님 어쩐 일로 우리 안 소위님한테 고로코롬 친절하시다요? 과한 관심 끄세요. 안 소위님 춘란 소속입니다.”

그때, 백연이 회의장으로 들어오며 무감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안치영이는 동죽 소속이다. 아직 춘란으로 보직 이동 허가하지 않았어.”

그 말에 백한이 피식 웃었다. 그는 백연을 한 번 보고는 제 옆에 비어 있는 옆자리 책상을 툭툭 치며 치영에게 까딱 고갯짓했다. 그쪽으로 와 앉으라는 뜻 같았다.

백한과 한 칸 떨어져 앉아 있던 치영은 대답하지 않고 앞만 쳐다보았다. 그때 백한이 제 옆에 있는 의자를 치우더니 치영의 의자를 끌어당겨 제 옆자리로 붙였다. 순식간에 끌려 온 치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본 이석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등신 육갑하는 거 더 보고 싶지 않으니까 기 소령님 회의 진행하시죠.”

백연에게 하는 말이었다. 백연도 백한을 흘끗 바라보았다. 백한은 쌍둥이 누이에게 윙크하며 치영의 의자를 끌어당겨 아예 뒤에서 안아 버리는 자세를 취했다.

백연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회의에 앞서 주요 전달 사항이 있다. 작전 일이 계획보다 당겨졌다.”

치영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 소리가 가까이 앉은 예민한 에스퍼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졌다.

작전 일이 당겨졌다니. 정‧재계 인사들이 참석하는 기념행사에 경호를 맡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연회의 날짜 자체가 당겨졌다는 소리일까.

때마침 백연이 그 의문에 대답해 주었다.

“조필식 쪽에서 경호 업무를 빠르게 시작해 달라는군.”

그 말에 치영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손 처장이 말했던, 알아서 한다는 소리가 이 내용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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