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93화 (93/114)

93화

콜라숍인지 뭔지에 출근하는 날이 미뤄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탄탈로스의 접시>의 작전 일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건 어때요?”

“…너무 화려하지 않습니까?”

때문에 치영은 때아닌 정장을 맞추기 위해 센터 밖으로 나와야 했다. 동행인은 자원자인 허인나와 김민우 중 사다리 타기를 했다. 승리는 김민우의 몫으로 돌아갔다. 허인나는 승패에 굴복할 수 없다며 소리쳤다.

“김 중위님 취향 씹구린데!”

그러나 그녀의 항소에도 불구하고 치영의 쇼핑 메이트는 김민우로 확정되었다. 덕분에 치영은 민우가 권해 준 페이즈리 패턴의 정장을 어렵게 거절하는 중이었다.

사복이라고는 이악 부대에서 일할 때 주워 입었던 BE THE RED’S가 프린팅된 붉은색 티셔츠가 다인 데다가, 직접 자신이 입을 옷을 골라 사 본 일이 드물었던 치영에게는 옷을 골라 줄 사람이 필요했다. 다른 옷도 아니고 정장이니 아무거나 고르면 안 될 것 같았다.

센터에 와서는 군 지급용 옷들이 따로 있었고, 누림동에 나가서 고른 옷들이라고는 잠옷 일색이 다였다.

정장은 치영과는 먼 얘기였다. 사회에 나가서 살아 본 적이 너무 오래된 일이라, 치영에게 정장이란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이 입고 나오는 옷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걸 입는다는 상상만 해도 온몸이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 그런 옷 말이다.

치영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열정적으로 옷을 보고 있는 민우에게 물었다.

“근데… 제가 이런 옷이 어울릴까 싶습니다. 좀, 느끼…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예요. 안 소위 키가 몇이죠?”

“177……? 178? 작년 신검 때 그 정도 나온 것 같습니다.”

“키가 큰 건 아니지만 작은 편도 아니잖아요. 그에 비해 다리는 길고. 배꼽 어디 있어요?”

“배꼽 말씀이십니까……?”

치영은 머뭇거리다가 옷 위로 제 배꼽 부근을 가리켰다. 그걸 대충 본 민우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거봐요. 키는 나보다 작은데 다리 길이는 얼마 차이 안 나잖아요. 난 배꼽 여기 있는데.”

그가 가리킨 곳은 치영의 생각보다 꽤 아래였다. 보통 자신의 몸을 기준으로 타인을 판가름하니, 치영은 남들의 배꼽도 어느 부근쯤 있겠거니 생각했다가 놀랐다. 김민우가 그 표정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비율이 좋은 편이란 얘기에요. 안 소위가 키만 더 컸으면 대대장님 정도 비율은 나오지 않았을까? 대대장님도 배꼽 여기 달렸잖아요.”

김민우가 가리킨 곳은 명치쯤이었다. 배꼽이 명치에 달린 사람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걸 흘끗 본 김민우가 물었다.

“…근데, 대대장님 어제부터 기분 졸라리 안 좋던데 뭐 아는 거 있어요?”

어제라면 기백한이 득달같이 치영을 태우러 왔던 그때였다. 숙소에 도착해 꺼져 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 보니 꽤 많은 부재중 기록과 메시지들이 와 있었다.

춘란 기백한 대대장

어디야

이거 밀당?

오후 09:37

안치영

오후 10:15

자기야 설마 형 차단했니

오후 10:17

이 씨발 진짜로?

오후 11:02

춘란 허인나 중위

소위님 어디예요?

오후 08:13

대대장님이 제 폰으로 메시지 보내 보래요

미친 새끼신가 졸라 짱나요. 소위님 언제 와요? 박 대위님이 소위님 준다고 뭇국 끓였는데

오후 11:04

그다음은 인교와 민우에게서였다. 메시지들 모두 치영을 찾고 있었다. 치영은 핸드폰을 끄려다가 백한과의 메시지 창을 위로 올려 보았다.

소령님 무사 복귀 축하드려요.

오전 01:21

몇 년 전 보낸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기백한이 아직 소령이던 시절인 듯했다. 파병을 나갔던 에스퍼들이 돌아오는 시기에 맞춰 군사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는 다른 가이드들과는 달리 치영은 백한의 귀국일에도 마중을 나가지 못했다.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 뻔한데 괜히 마음에 걸려 메시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에 대한 답장이 몇 년 지난 지금에서야 온 것이다. 치영은 그게 웃겼다. 그 뒤로는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핸드폰의 화면을 꺼놨었다.

같이 숙소로 복귀했던 백한이 치영을 데려다준 뒤 바로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치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민우에게 물었다.

“…뭐라고 화를 내셨습니까?”

“딱히 우리한테 뭐라고 한 건 아닌데, 안 소위도 알잖아요. 대대장님 에스퍼 파장 진짜 험악한 거.”

기백한의 에스퍼 파장? 치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그의 파장이 험악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질척거리면서 달라붙는 건 있어도 치영을 향해 날을 세웠던 적은 없었다. 김민우는 치영이 반응하지 않아도 말을 이었다.

“거실에 온통 대대장님 파장만 날아다니는데 피부 따가워 죽을 뻔했어요.”

…그랬었나. 그 정도로 파장이 난리 났었다면 저도 알았을 텐데 전혀 기억이 없었다. 핸드폰을 확인한 후 바로 씻으러 가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꾸만 욕지기가 올라오길래 변기를 부여잡고 욱욱거리다가 그냥 씻자 싶어서 샤워까지 하고 나왔을 때는 새벽 3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다음에 치영은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든 사이 백한이 들어온 흔적도 없었다.

때문에 일어나자마자 백한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바로 정장을 구매하러 나왔는데, 김민우의 말에 의하면 백한은 아침 일찍부터 기분이 그다지 좋지 못했으며, 일어나자마자 바로 숙소에서 나갔단다.

치영은 거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민우는 자신의 취향과 치영이 입을 수 있을 만큼 얌전한 정장 사이에서 옷 몇 벌을 골라 주었다.

하나같이 다 타이트한 나머지 이게 정말 정사이즈인가 궁금했지만, 민우가 그렇다고 하니 더 덧붙일 말이 없었다.

계산대로 가 조용히 제 카드를 내밀려는 치영에게 민우가 뭐 하는 짓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허? 일할 때 쓸 건데 왜 안 소위가 돈을 내요? 이럴 때 사용하라고 상관 카드가 나오는 겁니다.”

“중위님이 결제하시는 건 좀…….”

“아, 제 카드는 아니에요. 아무튼 안 소위가 돈 내는 건 진짜 아니라니까요.”

치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작게 실망했다. 이번에야말로 제 돈으로 누림동이 아닌 바깥에서 뭔가를 구매해 보나 싶었는데 돈을 쓰지 말라고 하니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혹시나 싶어 챙겨 왔던 카드가 그대로 지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김민우는 치영에게 햄버거를 먹고 들어가자고 말했고, 햄버거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추억이 없던 치영은 다른 걸 먹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바깥에서 파는 음식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그러자고 했다.

두 사람은 햄버거 세트를 포장해 군용 지프에 올라탔고, 센터로 복귀하는 차 안에서 버거를 먹었다.

김민우는 감자튀김을 밀크쉐이크에 찍어 먹어야 맛있다고 주장했지만, 치영은 그게 괴식이라고 생각해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게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회의실이 있는 본청 건물로 향했다. 탄탈로스 작전이 가까워진 만큼 갑작스레 2차 회의가 잡혔기 때문이다.

본청 건물 주차장에 도착한 뒤 김민우가 담배 한 대 태우고 올라간다길래 치영은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실로 올라가기 전, 손에 묻은 햄버거 기름이 거슬려 화장실을 찾는데 치영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시선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소곤거리고 있었다. 치영은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들은 치영의 시선을 피했다.

때마침 화장실을 발견한 치영은 손을 닦기 전에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소변기가 따로 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그렇게 든 터라 일부러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때였다. 화장실 문 안으로 들어온 일행 두 명이 치영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한 것은.

“춘란에 가이드 하나 왔다고 하지 않았어?”

“아, 그 사탕 껍질?”

화장실로 들어온 두 명이 분명 모르는 목소리인데도 너무나 익숙하게 저를 화제에 올리기 시작하자, 버클에 손을 가져다 대던 치영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이 지긋한 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이제는 기백한이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만 하면 치영은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었다.

치영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두 사람은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이번에 웬 공익이 에스퍼 발현했다가 걔 때문에 능력 다 빨렸잖아.”

“그게 가능하냐? 개소리하고 있어.”

“아, 진짜야. 걔랑 접촉하고 바로 발현과 동시에 이능력 잃었대. 왜, 무정부군 가이드들 중에 그런 능력 있는 애들 있다고 하지 않았냐? 에스퍼한테 가이딩 파장 이상하게 보내서 이능 파장 좆창 내 놓는 새끼들.”

“진짜로?”

“응. 시발, 속고만 사셨어요?”

남자들은 한동안 더 떠들어 댔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자면 치영은 그날 기적처럼 적은 확률을 뚫고 발현한 전도유망한 에스퍼의 인생을 작살낸 인물이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얘긴데도 소문이 퍼진 것이 이상했다.

그들은 곧이어 화장실을 나갔고, 치영은 멍하니 있다가 그들을 쫓아 나갔다. 소문의 출처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들은 화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치영이 그들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그들은 처음에 치영이 자신들을 부르는지 몰랐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본 후에야 치영의 얼굴을 천천히 알아보았다.

치영이 표정 없이 물었다.

“방금 하신 말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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