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왜 저래.
치영은 아직도 아린 명치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정확히는, 백한이 서 있는 쪽이 난슬동으로 향하는 방향이라 그러했다.
그의 표정이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왜 갑자기 말을 멈추고 저를 뚫어져라 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러냐 물을 힘도 남지 않은 터라 그대로 그를 지나쳐 걸으려는데, 백한이 치영의 손목을 잡아챘다. 악력이 무척 거셌기 때문에 치영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픕, 니다.”
그 말에 백한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심술 한 번 특이하게 부린다?”
“무슨 소리를, 아파요. 이것부터 놓으십쇼.”
치영은 백한의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빼내려 애를 썼다. 웬만한 성인 남성의 완력을 자신도 갖고 있을 텐데 그의 앞에서는 꼭 어린애처럼 힘을 못 쓰는 것이 짜증 났다.
그가 자신을 발견한 후부터 계속해서 가이딩 컨트롤을 하고 있던 치영은 다시 한번 속이 울렁거렸다.
등급이 높아 예민한 에스퍼인 기백한을 속이는 것에는 상당한 계산이 필요했다. 체표면을 떠도는 가이딩 파장의 양이 전과 비슷하게, 많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숨 쉬듯 흘러나오던 가이딩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지만, 치영은 최선을 다했다. 노력이야말로 치영이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였으니.
그게 통한 것인지 백한은 화가 나 있을 뿐, 치영에게서 별다른 기색을 읽지 못한 듯 다른 말은 없었다.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뭔가 작은 실마리라도 잡았다면 그 성격에 그냥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넘치는 가이딩 양을 컨트롤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지 고작 사흘 만에 모든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백한은 여전히 험악한 기색으로 치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노가 담겨 표정이 없어진 그의 얼굴엔 기이한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치영은 낮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얼른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속이 안 좋습니다. 체한 것 같으니까 가서 약이라도 먹고 싶어요.”
“…뭐?”
백한이 한쪽 눈썹을 올리고 치영을 빤히 내려다보더니 하, 하는 소리와 함께 혀를 찼다. 그러고는 다시 치영을 한참 보더니 그의 손목을 당겨 지프로 향했다.
“너는 씹, 하루 종일 뭘 주워 먹고 다녔길래 또 체해서—. …그럼 그거 때문에 헛구역질한 거야?”
“네. 속이 계속 안 좋습니다.”
백한에게 잡힌 손을 따라 가이딩이 너무 많이 전해지지 않게끔 조절하며 치영은 순순히 끌려갔다.
그래도 각인으로 묶인 짝 에스퍼라고 닿은 부분을 통해 온몸에 폭발할 정도로 고여 있던 가이딩이 미세하게 빠져나가자, 속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며칠 못 먹어 기운이 없는 몸으로 가이딩을 조절하느라 당장 쓰러져 버리고 싶었는데 닿은 부분부터 편안해지기 시작하는 게 어이없었다.
그러나 딱 그 정도였다. 전처럼 비참하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그저 어이가 없는 정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는 얼마가 걸릴까. 치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뭘 멍하게 있어. 안아 올려 줘?”
“…됐습니다.”
조수석 문까지 열어 줬는데 멍하게 있자 백한이 치영의 이마를 검지로 톡 쳤다. 치영은 고개를 저은 뒤 차에 먼저 올라탔다.
조수석에 앉은 뒤 문을 닫으려고 팔을 뻗으려는데 백한이 치영을 안으려던 팔을 뻗은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치영이 뭐 하냐는 듯 무언의 물음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자, 백한은 히죽 웃으며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움켜쥐듯 양손을 주물럭거렸다.
“우리 소위님 힘드신 거 같아서 형이 잘 달래 주려고 했는데 기회를 안 주네.”
치영은 듣기 싫다는 얼굴로 그대로 팔을 뻗어 차 문을 닫아 버렸다. 코앞에서 차 문이 휙 닫히자, 이크 하는 추임새와 함께 물러난 백한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방금까지 살기가 등등하지 않았었나? 또다시 제멋대로 기분이 바뀌어 버린 기백한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다. 신장 190cm가 넘는 근육형의 남성이 올라타자, 지프가 한쪽으로 기우는 느낌이 들었다. 하체가 좋은 차인데도 말이다. 치영은 이럴 때마다 느껴지는 그와 자신의 차이에 대해 반쯤 질린 상태였다.
백한이 기어에 커다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근데 자기야, 희진이랑 뭐 했는데 체하기까지 했어요?”
웃으며 물어보는 말에서 또 살기가 느껴졌다. 백한이 딱히 살기를 거둘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밥 먹었습니다. 얘기도 하고…….”
“무슨 얘기?”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게 들렸다. 꼭 누굴 살살 달래듯이. 백한의 개수작이라는 개수작은 전부 꿰고 있는 치영은 그를 슬쩍 보고는 무감하게 말했다.
“희정씨 애인이 센터 밖에 분이라 고민 상담 같은 거 했습니다.”
지난번 희정이 점심시간에 치영에게 했던 얘기니,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 말에 백한이 핸들을 잡고 있던 검지로 툭툭 두들겼다.
“이 시간까지 고민 상담을 했다고.”
“아뇨. 진작 헤어졌는데 소화가 안 돼서 걷고 싶었습니다.”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딱히 양심에 찔리지도 않았다. 이런 거에 양심이 아플 정도라면, 각인 상대인 백한을 두고 전역하겠다고 마음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그런 자질구레한 것들은 왜 묻나 싶어졌다. 그러다가 더 급한 질문이 남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춘란대… 사람들이 걱정 많이 했습니까?”
다녀와서 밥을 먹겠다고 했는데 밥때는커녕 자정이 훌쩍 넘어 버렸다. 그들을 실망시킨 것 같아 미안했다.
뭐라고 달래야 할지 모르겠어서 물었는데 기백한이 운전 중인 주제에 고개를 돌려 스산한 눈으로 치영을 바라보았다.
“이 쪼다가 뭘 묻는 거야. 너 찾느라 좆뺑이 친 건 나거든요.”
대답해 주기 싫으면 말지 왜 또 짜증이야.
치영은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끼익, 하고 차가 급정거하느라 치영은 안전벨트에 졸려 윽, 하고 숨을 토해야 했다.
그때, 백한이 치영의 턱을 잡아 저를 보게 했다.
“야, 진짜 가지가지 해라. 넌 꼭 정 붙일 곳 찾느라 애를 쓰더라. 그냥 나만 보고 살아. 하던 대로 하자니까.”
“…….”
뻔뻔한 놈. 치영은 백한의 손을 찰싹 때려 제 턱에서 치웠다. 제가 정 붙일 곳을 찾는 떠돌이 개처럼 여기저기 킁킁거리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는 게 밉고 원망스러웠다.
백한이 한 대 얻어맞은 제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 쳤어?”
“그냥 넘어가려고, 어차피 말 섞어 봤자 내 손해니까 넘기려고 했는데.”
치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백한을 쏘아보았다. 저 역시 에스퍼라면 지금 백한을 보는 눈빛에서 살기가 나왔을 것이다.
“뭘.”
“중령님, 대체 왜 갑자기 저한테 이러는 겁니까.”
“그러니까 뭘. 제대로 말해야지, 자기야.”
백한이 실실 쪼갰다. 핸들을 안은 팔에 기댄 고개를 돌려 치영을 바라보았다. 다 장난처럼 느껴져 물으려던 의욕조차 꺾였지만, 말을 꺼낸 이상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한테서 뭐 얻어 내실 게 있습니까? 전에는 분명 없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뜯어낼 구석이 있냐고 묻는 겁니다.”
“그러면?”
백한이 피식 웃었다. 질감 좋아 보이는 입술이 호선을 그리자 눈매까지 사르륵 접혔다. 껍데기 하나는 훌륭한 기백한.
그러나 치영은 그 어느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저 얼굴에 속은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저를 상처입히도록 놔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렇다고 하면 어떡할 건데, 치영아.”
“…….”
그것이 치영의 사랑이었으니까.
기백한은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다. 그가 아무리 이 세계에 꼭 필요한 인물이고, 존재만으로도 눈부신 가치를 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치영은 그래서 그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다.
치영의 사랑은 착각과 함께 시작되었다. 한 톨 기댈 곳 없이 태어난 자신도 누군가의 걱정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의지하고 의지 받고 이 사회에 일원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기백한은 그 조건에 적합한 남자였다. 그의 주변엔 모든 것이 넘쳐흘렀다. 사람이든, 재화든, 능력이든 마르지 않는 댐처럼 찰랑거렸다. 그가 그렇게 가진 것이 많다면, 제게도 조금쯤 나눠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 치영의 사랑은 다소 계산적인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치영은 사랑이 처음이었고, 당시에 너무 어리기도 했다. 어린 영혼들은 물불 가리지 않는 구석이 있어 무엇이 자신의 무덤으로 변하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백한이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일말의 애정도 나눠 주지 않을 걸 알지 못한 채로 사랑을 시작했다. 이해타산적인 마음으로 시작된 사랑이었기 때문에, 치영은 지난 세월 동안 인내했다.
벌을 받는 거라 생각했다. 사랑이란 건 치영 같이 외따로 떨어져 태어난 사람이 받기에는 무척 어려운 것인데도, 주제도 모르고 그저 계산적인 마음에서 시작했기에 받는 벌.
그러나 치영의 사랑은 무기징역이 아니었다. 벌도 곧 끝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으니까.
저를 둘러싼 모든 게 넘칠 듯 찰랑거리는 눈앞의 이 남자는 알지 못하겠지. 유한한 마음을. 곧 끝나는 덧없는 모든 것들을. 그런 건 저만 알면 되는 것이다.
치영은 조용히 읇조렸다.
“기쁩니다.”
치영의 대답이 의외인지, 백한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저도 중령님께 드릴 게 생겼다는 것이 기쁘단 뜻입니다.”
“…….”
“그동안 저한테 뭘 빼앗긴 것처럼 억울해하지 않았습니까. 제게서 뭘 가져갈 게 남았다면, 가져가시면 됩니다.”
백한이 치영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센터의 가로등과 대시보드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비친 눈동자가 맑았다.
“그럼 드디어 비긴 게 되니까요.”
치영은 자신이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다시금 창밖을 쳐다보았다.
백한은 말이 없었다. 에스퍼 파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치영은 돌아보지 않았고, 곧이어 차는 다시금 조용히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