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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만세-91화 (91/114)
  • 91화

    남자는 자신이 업장의 관리인이라고 소개하며 김 부장이라 부르라고 덧붙였다. 경북쪽 억양이 섞여 있었지만, 일부러 사투리를 고치려 노력한 흔적이 묻은 말투였다.

    치영은 김 부장의 말에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 처장이 언급했던 것처럼, 치영이 해야 하는 업무들은 단순했다. 매춘업을 하는 가이드들을 관리하고, 그들과 손님의 잔심부름을 도맡는 것과 가끔 김 부장이 부르면 자잘한 영수증을 정리하여 엑셀 파일로 만드는 것 외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따로 또 사람을 구하지도 않았는지 경쟁자 없는 면접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작전처가 꽂아 둔 빨대의 소개로 들어온 치영에게 유별난 관심도 없어 보였다.

    김 부장은 다음 주부터 나오라고 말했다. 달이 넘어가는 시점이라 월급 지급이 애매하다는 게 늦은 출근의 이유인 것 같았다.

    치영으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VIP 경호 임무가 시작되면 상황을 봐 가며 출근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이것저것 설명하던 김 부장이 치영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월급은 현금으로 주는데. …알지? 세금 신고는 못 한다는 말이야.”

    “네.”

    이창주라는 이름으로 통장이 개설되어 있는지까지는 듣지 못했던 터라,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이런 업장에서 월급을 계좌로 입금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김 부장은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차비로 쓰라며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치영에게 건네주었다. 이번에는 그냥 감사하다고 말했다. 김 부장은 나쁜 놈인 게 분명했지만, 짚신 한 짝이라도 뭔가를 받은 이상 인사를 하지 않고 가기가 애매했기 때문이다.

    치영은 그렇게 지하실 계단을 타고 올라와 사무실을 떠났다.

    대포폰으로 이 중사에게 면접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전송한 뒤, 가게를 나와 아까 전 그 편의점을 향해 느릿하게 걸었다.

    속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단단히 체한 것인지 어지러운 데다가 손바닥까지 끈적거렸다. 온몸에서 진땀이 났다.

    저 멀리, 이 중사의 준중형 자가용이 보였다. 허인나가 틀어 두었던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인공이 ‘내 전남편은 그 차를 몰았지. 개자식이었어.’라는 대사 속 바로 그 차였다.

    미국에도 한국 차를 파는구나, 하고 생각했었던 치영은 어째서 그 대사가 지금 떠오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이 중사의 차에 올라탔다.

    “할 만하죠?”

    아직 차 문을 닫지도 않았는데, 이 중사가 다짜고짜 물었다.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고 중사는 그의 대답 따위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던 것인지 차를 출발시키며 오디오의 볼륨을 낮췄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근데 거기 가이드들 어떻게 생겼어요? 안쪽까지 들어가 봤습니까?”

    치영은 안 좋은 속을 더욱 못살게 굴어 반드시 이 좆같은 차에 토하고 내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토악질은 나오지 않았고, 차는 착실하게 달려 어느새 서‧경 센터 앞에 도착했다.

    이 중사는 이번에도 치영을 센터에서 좀 떨어진 풀밭에 멈추었다. 처장실에 들어가기 전 입고 있던 옷이 담긴 종이 가방을 건네주며 중사가 말했다.

    “정문 검문소에서 제 이름 대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폰은 아직 들고 계시죠? 자, 이건 이능 해제 약물입니다. 곧 원래 얼굴로 돌아올 겁니다.”

    폰이라는 건 대포폰 얘기였다. 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에서 알약을 받은 뒤, 콘솔 박스에 500ml 페트병을 집어 들어 물을 마신 후 알약을 삼켰다.

    치영이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이 중사는 그새 무감한 얼굴로 돌아가 다음에 보자는 말을 남긴 뒤 센터를 지나쳐 도로 끝으로 사라졌다.

    시간은 벌써 자정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저녁 시간 전에 나왔던 치영은 쯧, 혀를 찼다.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기에 시간이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센터에는 일반인들의 접근이 어렵도록 방해 ESP가 걸려 있는 터라 길을 잘못 들어도 이곳까지 오는 이들이 전무했다.

    정문 앞을 지키고 있던 일반병 중 하나가 치영을 바라보고 바리케이드에서 나와 물었다. 사복 차림의 치영을 보고 혹시나 길을 잘못 든 일반인인가 싶어 경계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대희입니다.”

    치영은 별다른 설명 없이 이 중사의 이름을 댔다. 대뜸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던 일반병이 무언가 페이퍼를 확인하더니 이동형 바리케이드를 치운 다음 치영에게 경례했다.

    치영 역시 마주 경례해 주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센터 내에서 운행되는 카트도 끊길 시간이라, 신도시 마을 몇 개를 합친 면적의 센터를 가로질러 난슬동까지 가려니 막막했다.

    그러나 고민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지나갔기 때문에, 치영은 그저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걸으면서 대충 옷도 갈아입었다.

    바지는 지나가다가 수풀에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며 갈아입었다. 폐쇄회로 카메라의 사각지대라 다행이었다. 야간 경비 중이던 경비병이 봤다간 미친 변태놈이라고 체포하러 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신발까지 갈아신은 치영은 종이봉투 안에 입었던 옷들을 모두 담은 뒤 가로수 옆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난슬동을 향해 걸어갔다. 쌀쌀한 가을밤 날씨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동문을 통해 들어왔던 치영이 센터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북문 근처에 있는 난슬동에 반 정도 걸어왔을 무렵이었다.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데 저 멀리서 지프 한 대가 요란한 엔진음을 내며 다가오더니 치영의 근처에서 스키드 마크가 찍힐 정도로 급정거했다.

    인도로 걷던 치영은 차가 저를 곧 덮칠 듯 굴자 놀랐다가, 바퀴가 노면에 닿아 찢어지는 소리를 내자 귀를 막았다. 누가 센터 내에서 저런 식으로 차를 모나 싶어 미간에 골이 패었다.

    그러고 나서 치영은 멈춰선 차에서 누군가 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백한이었다.

    귀를 막았던 손을 천천히 내린 치영은 마음 한구석이 선득해졌다. 아직 핑계를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했는데 벌써 마주쳐 어쩌나 싶어진 것이다.

    두 발을 지상으로 가뿐하게 내린 그는 싱긋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을 본 치영은 기백한이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살벌한 기색에 주춤하고 물러섰다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태연히 백한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

    시동이 걸린 채 멈춘 지프의 전조등은 아직도 켜진 상태였고, 그 빛을 등지고 오는 백한의 얼굴이 더욱 어둡게 보여 오히려 오싹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웃음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눈물점이 접히도록 웃고 있는 백한이 치영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미소를 띤 채로도 살기가 엿보여 치영의 안색이 흐리게 질려 버렸다.

    “자기야, 가출이 좀 요란하다?”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낮은 음색이었다. 성큼 다가온 기백한은 어이없는 일을 당해 웃는 사람처럼 입가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였다. 화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기어들어 오세요. 너, 애들한테 희진인지 뭔지랑 밥 먹으러 간다고 구라 깠다며.”

    말투가 장난스러워도 스민 기색이 포악했다. 치영은 어깨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살기와 제 주변을 멋대로 탐색하고 있는 백한의 이능 파장에 힘겨워하며 대답했다.

    “희정 씨입니다.”

    “네, 그분이 애인이라도 되셔요? 이름 한 번 좆같이 다정하게 부르네. 자기야, 그럴 시간에 대답이나 해 봐. 어딜 처다녀오신 건지.”

    파장이 험악하게 날뛰었다. 치영의 주위에 달라붙은 파장은 그가 다른 에스퍼의 파장과 접촉한 건 아닌지 샅샅이 살피는 것처럼 어슬렁거렸다. 파장 주제에 제 의사를 갖고 있는 듯 심하게 불온한 움직임이었다.

    엉겨 붙어 오는 파장들을 밀어낼 기운도 없던 치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손 처장이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더 지껄여 봐.”

    백한이 그르렁거리듯 말했다. 당최 왜 화가 났을까. 집에 얌전히 있지 않아서? 가이딩을 받으려고 했는데 제가 없어 신경질이 났을 수도 있다. 백한에게 치영은 베터리팩 같은 존재니까.

    그게 무슨 이유이든, 치영은 백한이 왜 화가 났는지 더 궁금하지 않아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대신 오면서 지어 두었던 변명을 기계적으로 읊었다.

    “손 처장 가끔 저한테 그런 잔심부름 잘 시킵니다. 저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 백 없는 가이드들한테는 종종 그러는 인간입니다. 그냥 오늘은 제가 걸렸을 뿐이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세요.”

    기백한이 한 발자국 더 치영에게 다가섰다. 옅은 목련향이 났다. 자정이 넘은 센터는 조용하게 가로등만 빛났다. 백한의 파장은 그제야 치영의 몸수색이 끝났는지 다시금 엉겨 붙어 질척거렸다.

    치영은 역광에 의해 가로등 아래서 저를 내려다보는 백한의 눈빛이 어떤지 잘 볼 수 없었다. 어둠에 반쯤 가려진 백한의 두 눈은 치영을 뚫어지게 응시 중이었다.

    명치에 얹혀 있던 음식물이 요동치더니 갑작스레 속이 안 좋아졌다. 오늘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꽤 많이 받은 탓인 듯했다. 울렁거림과 메슥거리는 느낌이 점점 심해졌다.

    그때, 백한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 새끼만큼 누울 곳 보고 다리 뻗는 인간이 없는데 왜 너한테 그 지랄이냐고. 네가 왜 백이 없어, 내가 네 에스퍼인데.”

    “내 에스퍼……?”

    치영은 멍하니 그 말을 따라 하다가, 더 이상 못 견디겠어 백한의 가슴팍을 밀치고 달려가 도로 옆에 뚫어 둔 배수구 구멍에 대고 헛구역질했다.

    체한 거라면 시원하게 안쪽에 든 것들을 게워 내고 싶은데, 며칠 만에 처음 먹은 음식물을 밖으로 내보내기가 싫었던 것인지 몸이 거부했다.

    결국엔 구역질에 의해 위가 횡격막을 퍽 쳐올리는 바람에, 치영의 두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아릿한 아픔에 저절로 나온 눈물이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아무것도 내뱉지 못한 채로 소득 없는 헛구역질을 했고, 치영은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간신히 그 괴로움이 소강되었을 때는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겨우 허리를 편 치영은 눈물을 닦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아래서 백한이 굳은 얼굴로 치영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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