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89화 (89/114)
  • 89화

    혼자 남은 방 안에서, 치영은 어느 정도 가이딩을 통솔할 수 있는 기술을 완성해 내갔다. 문제는 이대로 밖에 나가기엔 안색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얼굴이 왜 이래.”

    치영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눈 밑이 푹 꺼진 것도 문제였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끼니까지 거르며 가이딩 컨트롤 연습에만 매진했더니 피골이 상접 해 보였다.

    안쪽에 잠긴 가이딩이 지금은 얌전하다고 해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고이다 못해 무너진 댐 밖으로 흘러나온 물처럼 범람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치영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가 그렇게 사방이 막힌 자신만의 감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손진화로부터 연락이 도착했다.

    작전처장 손진화

    집무실로 와 줬으면 해요.

    …이 사람은 대체 뭐가 문제길래 글자마저 이렇게 느끼할까. 치영은 푹 가라앉은 뺨을 한 채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간단히 씻고 움직일 계획이었다.

    기백한이 숙소에 없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머지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실에 간다고 둘러댈 계획이었다. 간단히 샤워 후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뒤 2층을 벗어나려던 치영은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1층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에스퍼들이 치영이 낸 작은 소음을 어떻게 들은 것인지, 벌떡 일어나 숙소를 나서려던 그를 막아선 것이다.

    “안 소위익!”

    “소위니임!”

    김민우와 허인나였다. 그들은 치영을 둘러싼 채 질문 폭격을 쏟아 냈다.

    “진짜 미쳤나 봐, 왜 이제 나와요! 밥부터 먹어요, 얼른!”

    “아니,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요? 아팠어요? 열나요?”

    치영의 안색이 살짝 더 파리해졌다. 간만에 듣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청각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끼니를 거른 터라 좋지 않은 몸 상태 때문에 청각 기관에 분포된 혈관까지 좁아진 기분이었다. 치영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대답했다.

    “…가이딩실에 좀, 다녀올게요.”

    “아니, 가더라도 밥은 먹고 가야지!”

    “다녀와서 먹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다녀와서 먹겠다는 말에 김민우와 허인나의 얼굴이 삽시에 험악해지는 걸 본 치영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그러자 그들의 기색도 겨우 누그러졌다.

    김민우가 태워다 주겠다는 걸 다소 완강하게 거부한 치영은 겨우 숙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며칠 지났다고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치영은 옷깃을 여미며 센터 중앙부 건물로 향했다. 카트에서 내려 작전처장실로 가는 동안, 다행히 건물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적었다. 처장실에 도착한 치영은 바로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요.”

    안쪽에서 손 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영은 낮게 한숨이 나올 것 같아 얼굴을 굳힌 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손 처장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하길래 치영은 용건만 말하라는 식으로 포문을 열었다.

    “기 중령님이 숙소로 복귀하는 시간이 머지않아, 빠르게 가 보고 싶습니다.”

    “숨넘어가겠네. 알겠어요. 앉아 봐.”

    손 처장은 늘 그랬듯 과하게 다정한 상관 흉내를 냈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에스퍼 파장이 왠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손 처장 역시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는지 치영이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용건부터 말했다.

    “이번에 작전 하나 들어가지.”

    작전명 <탄탈로스의 접시>를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치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작전 등급을 생각했을 때 손 처장이 그 작전에 대해 알고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작전처장이라고 해서 모든 작전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보안 등급상 작전처장이 접근할 수 있는 상위의 작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탄탈로스의 접시>는 꽤 상위 레벨의 임무였다. VIP 경호라는 특수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손 처장이 그 임무에 대해 보고받은 바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때문에 치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보던 손 처장이 씩 웃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작전 세부 내용 묻는 것도 아니니까.”

    “네.”

    개수작 부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스러운 마음에도 치영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런 치영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손 처장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종이를 내밀었다.

    “보고 바로 파쇄해야 하니까 외우도록 해.”

    “이건…….”

    “전에 말했던 소프숍 작전 내용이야. 안 소위가 춘란, 추국대랑 진행하는 작전과 겹쳐서 실행될 거야.”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몸이 하나인데.”

    “그건 걱정 마.”

    손 처장은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소파에 등을 기대며 치영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더 이상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종이에 적힌 것들을 바로 읽고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종이 위에 쓰인 건 대부분 간략한 어투로 작성된 내용들이었다. 작전 시기는 언제인지, 장소와 주의점은 무엇인지, 치영의 가짜 신분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적혀 있었다.

    가이딩을 매춘에 연계한 소프숍에는 가이드들의 경호 비슷한 일을 하는 종업원들이 필요하다. 간혹 가이딩 약물에 중독된 에스퍼들이 난동을 피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에스퍼를 고용하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경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에스퍼의 몸값이 장난 아닌지라 주먹 좀 쓰는 일반인들이나 새끼 조폭 등을 고용하기도 했다. 치영은 체술을 익혀 이 부분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완력 차이가 있어 에스퍼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수는 없어도, 일반인을 공격하면 반드시 수배 명령이 떨어지기 때문에 웬만큼 정신 나간 에스퍼가 아닌 이상 가이드도 아닌 일반 경호원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 미친놈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치영이 위장 신분으로 소프숍에서 일하는 동안 해야 할 임무는 간단했다. 그저 이악 부대의 우두머리가 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이악 부대 대장의 얼굴을 기억한 뒤, 그의 몽타주를 제작하는 것에 도움을 주면 작전 완료였다.

    쉽고도 간단하지만, 다른 작전에 나가서까지 어떻게 소프숍에 눌러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 처장은 치영의 의문을 모두 해결해 주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알려 주었다.

    “일단은 소프숍에 출근하는 부분에 대해서 춘란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전과 연계시킬 거야. 말은 다 해 뒀으니, 그쪽 VIP가 자네를 24시간 상주하는 경호원으로 고용하겠다 나설 거고, 그럼 그때 소프숍에 출근하면 돼.”

    “…그쪽에서 저를 어떻게 알고…….”

    “그 점은 본관이 정리할 일이지. 자네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야.”

    손 처장은 마땅치 않다는 듯, 쯧 혀를 찼다. 더 묻지 말라는 태도였다.

    미심쩍은 게 있으니 따로 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영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손 처장이 말한 작전 시작일이 머지않았다. 일단은 당장 오늘 밤 면접을 보러 가야 한다고 했다.

    치영은 초조하게 처장실 벽에 붙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기백한이 언제쯤 숙소에 복귀할지는 모르지만,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단 우리 이 중사가 데려다줄 거야. 올 때도 마찬가지니까 너무 걱정 말고. 옷은 이걸 입도록 해.”

    손 처장은 종이봉투에 담긴 사복을 내밀었다. 생활감이 느껴지는 옷가지와 신발은 놀랍도록 치영의 몸에 잘 맞아 약간 찝찝할 정도였다.

    당장 이렇게 면접을 보러 가게 될 줄은 몰랐던지라 낮게 한숨을 내쉬며 옷가지가 든 봉투를 들고 일어서려는데, 손 처장이 그를 만류했다.

    “여기서 갈아입어도 될 일을 어딜 가려고.”

    “…….”

    치영은 기가 막혀 말을 멈췄다. 손진화가 가이드도 아니고 에스퍼인 이상, 아무리 성별이 같다고 해도 에스퍼 앞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지는 가이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처장실에서 그냥 옷을 갈아입으라니.

    지난번부터 느낀 것이지만 손 처장은 꽤 징그러운 성희롱을 일삼는 편이었다. 치영이 대꾸 없이 그냥 서 있자, 손 처장은 농담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인권위에 찌르려는 건 아니지? 우리끼리 가벼운 농담이잖아. 자네 얼굴이 너무 굳어 있어서 분위기 환기 좀 시켜 보려고 했던 거라고.”

    그 말에 굳이 대꾸하지 않고 처장실을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대답했다가는 ‘너도 기분이 나쁘지 않구나.’ 하는 개소리로 달려드는 놈들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짧은 인생 동안 무수히 많은 모욕들을 들어 온 치영은 개자식들을 무시하는 일에는 도가 텄다.

    그렇게 화장실로 들어간 치영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검은색 볼캡이 들어 있길래 눌러쓴 채로 빠져나오자, 손 처장이 말한 이 중사로 보이는 사람이 화장실 앞에 서 있다가 치영을 비상문으로 인도했다.

    “처장님이 바로 가면 될 거라 하십니다. 밖에 차량이 대기 중입니다.”

    “네.”

    치영은 짧게 대답하며 이 중사가 건넨 마스크를 썼다. 이 중사가 핸드폰을 끄라고 했다.

    “적당한 핑계를 춘란대 대원에게 남긴 다음, 핸드폰 전원을 종료하고 계시면 됩니다.”

    적당한 핑계가 뭘까. 치영이 이 시각에 외출해 만날 친구 한 명 없다는 건,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지 않은 춘란대 사람들이라고 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치영은 결국 가이딩실 희정의 이름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제일 말랑한 이인교에게, 희정과 누림동에서 밥을 먹고 귀가할 계획이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핸드폰을 껐다. 두 사람은 곧이어 비상구 계단으로 통하는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타악—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했으나 간신히 정면을 응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멀미가, 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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