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88화 (88/114)

88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두 눈이 쑤시는 기분이었다. 그 몸으로 복귀하여 에스퍼 병동까지 가야 했다.

치영의 가이딩이 반쯤 패었던 안구를 원상 복귀 시켜 주었지만, 감염 문제가 있을 수 있어 암도 이겨 내는 에스퍼 주제에 항생제까지 먹어야 했다.

아무리 회복력이 좋은 에스퍼라도 그 정도의 부상을 쉽게 이겨 낼 수는 없다. 백한은 꽤 고생해야 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온몸에 미열도 났다. 이게 열이 난다는 거구나, 하며 신기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그런 것들은 다 시시한 문제였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춘란이 백령도 임무에서 물을 먹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날은 재수가 끝까지 없으려고 그랬던 것인지, 눈이 회복되고도 진물과 눈물이 말라붙어 떠지지 않는 눈을 하고 안치영을 업은 채 겨우 기준점으로 복귀했더니, 박형인과 김민우가 기절한 허인나와 이인교를 각각 들쳐 업고 있었다.

열이 받은 기백한이 지껄였다.

“이 씨발, 이것들이 아주 다 빠져 가지고.”

“그러게 말입니다.”

각자의 등에 기절한 팀원들을 지게 지듯 올린 채로 에스퍼들은 한참 가만히 서 있다가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보고하기 시작했다.

폭발마를 추적했던 박형인은 상대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돌아왔다고 했다.

“얼굴만 이상하게 그늘져 보였습니다. 꼭 고개만 응달로 빼놓은 것처럼. 사방에서 불기둥이 타오르는데 그럴 수 있을 리 없으니, 이능인 것 같습니다.”

최면 이능일 것이다. 놈들은 모두 얼굴을 가린 채 나타났다. 김민우의 설명도 같았다.

“이인교랑 허인나가 날뛰기 시작한 건 대대장님이 안 소위 찾으러 가셨을 때쯤이었습니다. 꼭 뭐에 홀린 놈들처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박 대위님도 그때는 폭발마랑 교전 중이었고, 저도 정신이 없어서. 그나마 불 꺼진 게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에스퍼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뒤, 불기둥 역시 가라앉았다. 박형인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문제는 교전 중에 놈들 중 하나를 사살했는데, 그 시체가 보이지 않는단 겁니다.”

시체까지 들고 튀다니. 설골이 부러져 기도를 압박하던 와중에 그럴 정신이 있었을까. 기백한은 그것이 의문이었다.

어찌 되었건 춘란대는 처음으로 임무에 실패했다. 함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별로 없는 하찮은 임무에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적이 강해서? 그것보다 강한 적은 수도 없이 만나 보았다.

적의 전술이 교묘해서? 그렇다고 하기에는 허점이 꽤 보였다.

기백한은 자신이 그들을 놓친 이유에 대해 다시금 복기해 보았다.

“안치영—!”

그럴 때마다 어둠 속에서 치영을 끌어안고 울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백한은 센터장실 소파에 앉아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소파의 팔걸이를 일정한 박자로 툭툭 내려쳤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센터장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너희 지금 싹 다 징계감이야. 그건 알지?”

센터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한에게 반격해 왔다. 회상에 잠겨 대머리 영감을 잠시 잊고 있었던 백한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얼굴로 센터장을 슥 돌아보았다.

“뭐요?”

“이놈의 새끼가, 말버릇 하고는—. 아, 백령도 어쩔 거냐고!”

백한이 하하 웃었다. 웃을 때마다 안구 뒤쪽이 쑤셨다. 밥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국그릇에 눈알이 툭 빠질 것처럼 묵직하게 뜨겁기도 했다.

안치영의 가이딩을 좀 더 받으면 나을 것 같은데, 퇴원한 이후로는 방에 처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대뜸 입술부터 비빌 수도 없고……. 아니, 왜 안 되지? 지금 당장이라도 그러면 되는 일 아닌가. 여태껏 그럴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저답지 않게 안치영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것처럼.

대뜸 쪼개다가 치영의 생각에 다시금 웃음을 멈추니, 무시당했다고 여긴 건지 센터장의 기색이 날카로워졌다. 백한은 그린 듯한 미소로 다시금 입꼬리를 올리며 일어나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센터장의 데스크 양 끄트머리를 향해 손을 짚은 채 상체를 숙여 기대고는 말했다.

“그거야 씨발, 우리 영감님이 의리있게 커버 쳐 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뭐? 너 이 새끼—.”

“아니, 그렇잖아요. 그거 어차피 서해 상공 감시하던 탐지 에스퍼들, 용병 장사 하겠답시고 중동 보내서 최초 발견이 늦어진 거 아니야.”

“너…….”

“나도 한 번 팔려 갔었지, 아마?”

백한의 경우는 자진해서 간 것이었지만 이럴 때 은근슬쩍 상대의 빚으로 달아 두면 나중에 좋은 일이 생긴다.

센터장의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텅 빈 정수리까지 빨개졌다. 삶은 문어 같다고 생각한 백한은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나 어쩌지, 이러다 막 정신 감정 에스퍼들 와서 자백받아 낸답시고 고문하면 어떡해? 헌병대 쪽에 그런 애들 많잖아요. 아, 그 뭐냐. 경찰국? 아까 들어 보니까 센터장님이랑 사이 그냥저냥이던데. 걔들이 나 잡아가서 조사하면 어떡해. 아무래도 다 부는 수밖에 없겠지? 나 정말 아픈 거 너무 싫거든요. 허벅지만 꼬집혀도 바로 불어 버릴 거야, 싹 다 그냥.”

“야, 기백한!”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씨발, 애 떨어질 뻔했네.”

백한이 짜증을 내며 센터장의 책상을 쾅쾅 내려쳤다. 센터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한 채로 백한을 노려보았다.

백한이 씩 웃었다. 이제 달래 줄 타이밍이었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또 의리가 으리으리하잖아요. 말한다는 게 아니라, 응? 그냥 센터장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보고서에 들어갈 몇 줄만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싶네요. 그 정도는 그 뭐야, 사위분 이름이 어떻게 되더라? 손찐따? 아무튼 손 처장이 슥삭 해 줄 수 있는 문제잖아. 그쵸, 센터장님?”

능글거리게 웃을 때마다 눈물점이 예쁘게 접히는 기백한의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뱀의 그것처럼 동공이 좁혀져 있었다.

센터장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나가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였다.

“고마워요, 센터장님. 나 정말 센터장님밖에 없다.”

“얼른 꺼지지 못해?!”

마지막은 고함으로 마무리해야 그 자존심에 면이 서겠지. 중년 남성은 고질적으로 앓는 발* 부전 때문에 뭐든지 세우는 걸 좋아하니까.

백한이 어느 정도 센터장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것도 필요한 일 중 하나라는 얘기다. 당분간은 납작 엎드려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힘으로 누르면 끝인 군부에서 살아남을 방법이니까 말이다.

* * *

“아니, 어쩌려고 저래. 밥도 안 먹고.”

“속상해 죽겠네. 지금 벌써 며칠째지. 야, 인교야 며칠째냐.”

“이틀하고도 8시간, 37분째입니다.”

“…뭐야, 너 지금 약간 소름 끼쳤다?”

치영의 방 밖에서 웅성거리는 에스퍼들의 소리가 났다. 대답해 줄 수 없는 미안함에 머뭇거리다가도 곧 입술을 말아 물어야 했다.

며칠 전, 백령도의 일로 인해 치영은 크나큰 비밀이 생겼다. 아직도 단전 밑에서 가이딩이 들끓고 있었다. 치영은 이것을 아직도 완전하게 조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방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문만 열면 득시글거리는 것이 에스퍼인데, 제 가이딩 양이 방대해진 것을 들키지 않을 리 없다.

약간 이상한 점은 있었다. 누군가 안쪽에 있는 무언가를 깨트린 것처럼, 원래 있던 게 고여 있다 흘러넘치는 것처럼 치영의 가이딩은 놀랍도록 원래의 파장과 잘 맞았다.

꼭 소리꾼이 득음을 할 때 목에서 피가 터지는 것같이, 치영의 단전에서 흘러나온 핏물에 의해 안쪽에 있던 가이딩이 수문을 열고 쏟아지는 것 같았다.

덕분에 치영은 요 며칠간 그것을 컨트롤해 보려고 애를 써야 했다. 에너지 소모가 심한 일이라 조절하다 보면 바로 기절해 움직이지 못하기도 했다.

요 며칠간 눈이 계속 아팠는데 그건 또 백한이 부상당한 부위와 같았다. 백한과의 각인에 의해 치영은 백한이 강한 아픔에 휩싸이면 그걸 약간이나마 느낄 수 있는 듯했다. 확실하진 않다. 그저 제 착각일 수도 있고.

그가 다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치영은 그때마다 미미한 통증을 느끼고는 했다.

가이딩의 양이 방대해진 지금, 백한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예민도가 상승이라도 했는지, 이전보다 더욱 명확하게 고통이 느껴졌다.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오로지 치영만이 백한의 아픔을 느끼는 듯했다.

때문에 치영은 아픈 눈을 부여잡으며 기절했던 상태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에는 또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로 가이딩을 조절하는 연습을 했다.

방 밖에서는 에스퍼들이 자신을 기다리며 걱정하고 있었고, 벌써 며칠째 가이딩실에는 출근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빠르게 가이딩을 조절해 내야만 했다.

* * *

백령도 포인트 1389 폭발 사고

사건 번호: 가—019876

사건 일자: 20XX년 모월 모일

개요:

춘란대는 당일 서해 상공에 미확인 비행물체에 생체 신호가 감지된다는 관련 당국의 신고를 받고 출동, 미확인 비행체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수상한 인물을 발견함.

최면 ESP를 쓰는 추정 등급 S급 이상의 에스퍼는 가이드 소위 안치영을 납치, 약 37분간 억압함.

춘란대 소속 대위 박형인은 사건 발생 시각 1분 전 공기 중에 미미한 화약의 냄새를 감지, 부대원들에게 폭발 ESP, 즉 폭발마의 존재를 의심하여 부대원들에게 이를 고지하지만, 알 수 없는 전파장애로 인해 통신이 끊겨 전 대원들은 대위의 경고를 듣지 못함.

사건 발생 시각인 오전 01시 45분. 백령도 야산의 서북쪽에서 큰 폭발음과 함께 화염 기둥이 치솟음.

당국의 조사를 통해 화염 기둥에서 에스퍼의 파장을 발견, 이것이 단순한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 아닌 폭발마의 이능력임을 확인.

박형인 대위는 폭발마를 추적하여 접전을 벌임. 그 과정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상대 에스퍼 한 명이 사망하지만, 적군은 에스퍼의 시신을 빠르게 수습한 후 도주함.

그로부터 3분 뒤, 춘란대 대대장 기백한 중령은 산의 동남쪽에서 거대한 ESP 파장으로 만든 투명한 반원구를 발견, 반원구의 정체가 정신계 에스퍼의 파장임을 판별함.

그는 곧 물리력으로 정신계 ESP인 최면 이능을 와해시키고, 그 안에 있던 동죽대 소속 안치영 소위를 구출.

이후 조사관을 파견하여 정신계 ESP의 파장에 대한 조사 실시, 파장이 소멸되어 그 흔적을 찾지 못함.

한편, 구출된 안치영 소위는 알 수 없는 오한, 각혈 등의 증세를 겪으며 센터로 이송되어 현재 치료 중에 있음.

당국은 최면 ESP 반원구에 안치영 소위의 가이딩 파장이 섞여 있음을 발견, 이를 조사 중에 있음.

춘란대가 추적하던 미확인 비행물체들의 흔적은 현재 오리무중 상태로, 사건 번호 가—019876은 이능력 관련 미확인 사건 해결부서로 송치, 담당자를 배정 중.

임시 사건 담당자: 작전처장 손진화

수정 시각: 모월 병일 오후 16시 08분.

수정 협의 진행자: 중령 기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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