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87화 (87/114)

87화

반원구 안쪽에 있는 어둠은 마치 액체처럼 움직였다.

“와, 기분 조진다, 진짜. 뭐야, 이 변태 같은 데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연체동물처럼 들러붙는 진흙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늪에 빠진 느낌이나 갯벌에 빠져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사고를 할 수 있는 생명체처럼 백한에게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이능 파장을 제 몸에 덧씌운 백한은 주위의 중력을 무겁게 하여 달라붙는 것들을 떨쳐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어린아이가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왜 나가려고 해. 나랑 놀자.”

발밑이 쑥 꺼지며 암전이 찾아왔다. 최면 이능 시전자의 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한번 발을 들인 이상, 어쨌든 저쪽의 최면에 걸려 주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얼른 빠져나가는 게 좋겠다 싶어 이능 파장을 바닥부터 천천히 뿌리다시피 방출하여 유난히 스파크가 적게 튀기는 부분에 집중했다.

어린아이가 다시금 킥킥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와, 머리가 좋네. 탐지 에스퍼도 아니면서 이런 식으로 이능을 사용하는 거야?”

백한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형이 지금 집중하고 있죠? 말 걸지 말고 있어 봐.”

허공을 잡아 아무렇게나 중력 이능의 파장을 전개하자, 상대의 파장과 상충하는지 손가락 끝에서부터 혈관이 터져 금세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안치영에게서 받았던 가이딩을 최대한 아껴 사용해야 하기에, 부상을 회복시키지 않았다. 저릿한 감각이 올라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는데 누군가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그전까지 들리던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낮고 담백한 웃음소리.

백한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안 다칠 거라고 약속하고 가지 않았습니까.”

“네가 회복시켜 줄 거잖아.”

“대령님은 정말…….”

조곤조곤한 말투에 낮은 음색. 안치영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못내 안타깝다는 듯, 무척이나 속상하다는 듯.

백한은 움찔, 몸을 굳혔다가 그쪽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치영의 앞에 있는 것은 기백한, 그 자신이었다.

백한은 그제야 치영이 자신의 모습을 한 환상의 뺨을 쓰다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가지가지 하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런 치영의 손에 뺨을 기대고 온순한 척 굴고 있는 자신이었다. 백한은 웩, 하고 토 쏠린다는 듯한 제스처를 하며 그 환상을 비웃었다.

그런 백한의 비웃음에 화답하듯, 장면은 금세 바뀌었다.

“안치영—!”

그곳에는 피를 뒤집어쓴 채, 축 늘어진 치영을 안고 절규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전투 중에 사망한 것처럼 치영의 뺨에는 흙먼지와 핏물이 말라붙어 있었고, 옷은 여기저기 찢긴 채였다.

환상 속 자신이 아무리 불러 봐도, 치영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제 환상이 오열하고 있었다. 그 환상은 진심으로 슬퍼 보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백한은 그들을 더 쳐다보지 않은 채로 찐득한 어둠 속을 향해 팔을 쑥 뻗었다. 이윽고 무언가 잡히는 것이 있어 그걸 그대로 잡아 뽑았다. 어린애 하나가 백한에게 머리채가 잡힌 채로 끌려 나왔다.

“야, 너 뭔데 이렇게 재수 없지?”

머리채를 잡은 팔을 그대로 크게 휘둘러 땅으로 메다꽂았다. 어둠이 꿀렁이며 아이의 몸을 받아냈다.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가 꿇어앉은 채 성실히 따귀를 내려쳤다.

“애새끼 얼굴 하고 있으면 뭐. 못 때릴 것 같아? 땡, 틀렸어요, 이 새끼야.”

그대로 따귀를 수차례 휘갈겼다. 아이는 혈관이 터진 눈알과 입술 사이로 질질 흘러내리는 핏물에도 웃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소름이 끼칠 만큼 섬뜩한 웃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기백한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쪼개세요, 개새끼야?”

머리채를 질질 끌고 나가자 찐득한 어둠이 백한에게 더욱 엉겨 붙었다. 끌고 가는 머리채가 점점 더 무거워진다 싶더니, 백한의 허벅지까지 오던 아이가 어느새 성인으로 변해 있었다.

하도 얻어터져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것이 흠이었다. 어둠이 얼굴 주변에 끼어 있는 것도 외모 식별을 어렵게 하는 데 한몫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끌고 가려고 하자, 찐득거리던 어둠이 고체와 액체의 중간 상태인 점탄성 물질처럼 변해 밀도 있게 백한을 사방에서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아이, 진짜 이 변태 새끼 어떡하지? 이능력을 뭐 이렇게 좆같이 써. 너무 징그러워, 정말.”

백한이 짜증을 냈다. 그는 곧 파장을 전개하여 제 몸 위에 얇은 막처럼 중력을 씌운 다음, 파장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며 어둠을 밀어냈다.

중력 이능이 자꾸만 무형체인 최면 이능을 밀어내자, 거기에 맞서 물질화되었던 최면 이능의 파장 주위로 스파크가 튀었다. 백한의 깨끗한 뺨 위로도 스파크가 튀어 살점 타는 냄새가 났다.

그럼에도 백한은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고 그대로 제게 머리채를 잡힌 남자를 끌어올려 목을 조르려 했다.

그가 웃으며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대로 손아귀에 힘을 줘 설골을 부서트렸을 것이다.

“하하, 왜. 이게 진짜 최면 같아? 너는 저 상황이 되면 네 페어 가이드를 붙잡고 울지 않을 것 같은가 보지.”

남자의 뒤로부터 어둠이 스멀스멀 퍼져 나왔다. 점탄성 물질이 된 어둠이 백한의 어깨 위에 올라타 그를 꾹꾹 눌렀다.

중력을 다루게 된 아주 어린 날부터, 무언가에 눌려 본 적이 없는 백한이 씩 웃었다.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웃음을 보며 남자가 쯧, 혀를 찼다.

“어쩌다 너 같은 거한테 걸렸을까, 저 가이드는.”

“까고 있네. 그렇게 걱정되시면 곱게 돌려보내 주세요. 왜 애를 뺏어가서 돌려주질 않으셔요.”

“너처럼 이기적인 에스퍼들은 꾸준히 있었어. 걔들이 제 가이드를 잃고 어떻게 되었을 것 같아?”

백한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설골을 쥔 채 손아귀에 힘을 꽉 주었다. 호두 껍질 부서지는 소리처럼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 안쪽에서 설골이 부서졌다.

남자는 저항하지 않았지만, 생리적으로 괴로워하는 신음과 손바닥 아래서 펄떡이는 맥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백한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으며 킬킬거렸다.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참견하시냐고.”

그때였다. 누군가 콜록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백한은 그것이 치영의 기침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백한의 눈길이 그리로 향하자, 남자가 부서진 설골에 성대가 짓눌려 나는 기괴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네가, 끄윽, 어떻게 될지, 윽, 힉… 궁금하긴 해.”

안치영의 목소리가 들린 쪽에서 희미하게 그 애의 가이딩 파장이 느껴졌다. 백한의 ESP 파장이 그쪽으로 향하려 난리를 치고 있었다. 꼭 세 달 만에 주인 만난 개새끼 같이 날뛰는 통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치영을 찾았으니 인제 그만 이곳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최면 이능을 쓰는 놈이 백령도에 착륙한 에스퍼들 중 가장 고등급인 것 같으니, 적어도 중간급 이상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이대로 놈을 잡아다 후송시키고, 치영을 데리고 나가면 되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여전히, 끄윽, 윽— 욕심이 많아. 하나를 …얻으려면, 끅 …하나는 포기해야지. 네 친절한 조부님은, 그, 런 것도… 안 알려 주디?”

조부? 백한이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윽—!”

칙 소리가 나며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두 눈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좀먹혔다. 살이 타는 냄새와 함께 유황 냄새가 났다. 꼭 황산을 뿌린 것처럼.

“아하, 하. 다음에 또, 끅, 보자, 백한아—.”

상대의 화를 돋우려 이름을 부른다기엔 너무나 친근한 말투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두 눈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백한은 어둠 속을 더듬거렸다. 찐득했던 어둠은 어느새 물러간 것인지 손에 닿는 것이 없었다. 놈이 도망친 것이다.

“씨발.”

백한은 하는 수 없이 주위를 더듬거려 바로 치영의 가이딩 파장을 찾아냈다. 평소보다 더 쨍하게 일렁이고 있는 치영의 파장을 찾아가는 동안에도, 눈에서는 쉴 새 없는 고통이 몰아쳤다. 턱을 악다문 채 참느라 어금니에 금이 갈 것 같았다.

“…드디어 찾았네.”

그리고 그때, 백한의 발치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치영이었다. 백한은 허리를 숙여 치영을 잡은 다음, 그대로 그 애의 목을 받치고 안아 든 뒤 고개를 내렸다.

“아, 씨발, 안치영아. 형이 급해서 이래요. 분위기 애매해지니까 중간에 눈뜨지 말자.”

눈물인지 핏물인지 모를 것들이 두 눈에서 계속해서 흘러내려 뺨을 적시고 있었다. 백한은 그대로 치영의 입술 위에 제 것을 가져다 댔다. 맞닿은 입술에서부터 광활할 정도로 깊은 만족감이 올라왔다.

치영의 입술에서는 피 맛이 났다. 꼭 피라도 토한 것처럼. 잘 뛰고 있는 맥박과 멀쩡한 각인 때문에 치영이 살아 있는 걸 알 수 있음에도 눈이 안 보이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문득 백한은 아까 전 환상 속 자신이 치영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입맞춤이 더욱 깊어졌다. 혀가 섞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그 애의 입속에 있던 핏물을 모두 받아 마셨다.

치영의 파장에 전과 다르게 이상한 구석이 있었지만, 기절한 상태고 아직 최면에서 깨어나지 못해 그런 건 아닐까 추정했다.

타들어 가던 백한의 두 눈이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시신경까지 좀먹던 황산을 밀어내며 신경세포의 말단까지 다시금 재생시킨 가이딩은 놀라울 정도의 기적을 보여 주었다. 그 기적은 공평하게 백한의 속눈썹 한 올, 한 올에까지 닿아 일그러졌던 모든 것들을 살려내고 있었다.

이러니 에스퍼들이 가이드라면 환장을 하지.

백한은 만족감에 목울음을 냈다. 품 안의 치영이 살짝 떠는 게 느껴졌다. 치영의 체향이 피비린내에 섞여 흘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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