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86화 (86/114)

86화

백한의 주위를 둘러싼 그의 ESP 파장이 날뛰고 있었다. 피식자를 쫓는 짐승같이 기색을 부풀린 파장이 일렁거렸다.

가이드가 아닌 보통의 에스퍼라면, 자신의 파장에 닿은 물질을 통해 다른 에스퍼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등급이 높고 예민한 에스퍼라고 한들, 대부분 주위에 누가 있다는 기척을 읽는 정도만 가능하다.

박형인의 경우에는 주위에 누가 있다고 느끼는 게 가능하고, 백연의 경우에는 숨어 있는 적이 몇 명인지 판가름할 수 있다.

그러나 기백한은 그들의 위치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전투 가이드들이 가이딩 파장을 늘려 에스퍼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처럼 세밀한 감지는 아니더라도, 적이 몇 명인지, 그 위치가 어디쯤인지 대략적으로 짚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안치영으로부터 수여받아 저장해 둔 체내의 가이딩을 꽤 많이 소모해야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닌 듯했다.

불길이 타오르는 사이즈를 볼 때, 춘란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애를 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하는 게 명확했다.

“이 새끼들이 누굴 등신 삼룡이로 아나…….”

백한이 미간을 파삭 구겼다. 등신 호구로 아는 것이 아니면 이렇게 티 나게 행동할 리가 없다. 그게 아니면 백한을 상대로도 이길 자신이 있거나.

그러나 기백한은 후자의 명제는 당연하게 소각시켰다. 그는 져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뭐라 하셨습니까?”

박형인이 소음기가 부착된 라이플을 전방에 겨누며 되물었다. 백한은 팔과 어깨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한 뒤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몇 명일까. 파장에 걸리는 기색이 있었다. 전투 가이드도, 탐색 ESP를 지닌 에스퍼도 아닌지라 춘란대 에스퍼들의 파장도 같이 감지되었지만, 총합에서 춘란의 인원만큼을 빼면 될 일이다.

기백한은 계속해서 상대의 파장을 살폈다. 상대도 백한이 자신들을 탐색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듯했다.

적은 총 4명의 에스퍼로 추정되었다. 그때, 인이어를 타고 이인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대장님! 생체 신호는 계속 뜨는데 안 소위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상대는 다섯 명이 틀림없다. 백한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뒤를 돌아 달렸다. 귓가에 바람이 빠르게 스쳤다.

“허인나 포인트 1468, 이인교는 포인트 1723으로 복귀해. 박형인이 폭발마를 맡는다.”

대충 놈들이 있을 만한 곳을 짚어 대원들에게 일러 준 기백한은 파장이 심하게 느껴지는 곳을 향해 달렸다.

그러다 어느 기점에서 멈춰 섰다. 그곳부터 공기의 밀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쳤다면 모를 만큼 교묘한 파장이었다.

백한은 허공을 손으로 잡아보았다. 아주 미세한 감각으로, 무언가 백한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미미한 힘이라 어지간히 감각이 예민하지 않는 이상 식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이지 않는 그 막은 손으로 잡을 수도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정신계 이능력이었기 때문이다.

백한은 반원구의 표면에 손을 대 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피부의 감각과 달리 손끝을 싸고 있는 에스퍼 파장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백한은 그대로 중력의 파장을 얇게 만들어 손을 댄 곳부터 천천히 늘려 보았다. 이능 파장에 닿은 ESP가 서로 상충되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그 스파크는 천천히 넓어져 직경 약 80m짜리의 거대한 ESP 반원구의 모습을 드러나게 했다.

“가지가지 한다, 씹—.”

아주 지랄을 떠는 꼬락서니가 딱 지긋지긋한 게, 이런 일을 벌일 만한 놈들은 특정되고도 남았다. 이악 부대가 틀림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로 사이즈 큰 놈이 나오는 일은 없었는데.

백한은 이를 아득, 갈았다.

상대는 꽤 높은 등급의 최면술사인 듯했다.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이에게 최면을 유도하는 이능력이었다. 김민우가 전개하는 쉴드 ESP와는 또 달랐다.

쉴드 ESP는 볼 수 없어도 만질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것이 제게 닿는 물리력에 저항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김민우의 ESP처럼 주위 공간에 퍼져 있기는 하나, 물질이 없는 정신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이능력인지라 외부 충격에 의해 무너지지 않는 성질의 것이었다.

닿을 수가 없으니 파괴할 수도 없었다. 이능의 시전자인 에스퍼를 죽이거나, 그 에스퍼가 최면을 거는 상대가 자신의 힘으로 최면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이그노잉 ESP를 쓰는 에스퍼가 최면을 파훼한다면 또 모를까, 외부에서는 그 힘을 종식시킬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평범한 에스퍼들의 이야기다. 기백한의 물리력은 시시껄렁한 힘들과는 다르다. 괜히 그 오글거리는 칭호들을 훈장처럼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백한은 곧바로 제 주먹에 이능 파장을 감싸 그대로 무형, 무색, 무감의 반원구를 내려쳤다. 다른 이들 같으면 허공을 때리듯 그대로 스쳐 지나갔어야 할 정신계 이능이 그대로 주먹 아래서 느껴졌다.

쾅—! 하는 커다란 소리가 산기슭에 울려 퍼졌다.

저 멀리서는 아직도 화염이 타오르는 중이었다. 야외에 불을 켜 둔 듯 환해 활동하기에는 좋았다. 어둠 속에 숨은 적을 판별하기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저 화염 기둥이 민가를 덮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기 전에 어떻게든 안치영이 있을 법한 이 반원구를 깨트려야 한다.

박형인 이하 춘란대 대원들의 실전 경험이 적지 않으니 알아서 잘 해낼 테지만, 어째 기분이 더러운 게 예감이 썩 좋지 못했다. 안치영이 안쪽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백한은 힘을 주어 다시금 반원구를 내려쳤다.

“하여간, 가만히 있으라니까, 말을, 안 듣지.”

치영을 향한 짜증과 함께 섞어 치자, 말이 드문드문 끊겨 나왔다. 산기슭을 덮고 있던 거대한 반원구가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반원구 위를 덮은 백한의 이능 파장이 스파크를 튀어가며 안쪽에 있는 걸 압박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팔 하나가 튀어나와 백한을 노렸다. 살기가 느껴지자마자 피한 백한은 허리를 틀어 바로 상대의 악관절에 손날을 박아 넣었다. 윽 소리 한 번 내지 않은 상대가 풀썩 쓰러졌다.

이인교였다.

“뭐야, 이 새끼.”

어이가 없어 쓰러진 인교의 다리를 군화로 툭 건드리는데, 인이어를 타고 김민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대장님! 최면 이능입니다! 허 중위와 이 소위가 당했습니다.

재미있는 놈이었다. 백한을 상대하는 동시에 ESP를 뒤로 보내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이인교와 허인나를 공격하다니. 그걸 백한 모르게 해냈다는 것이 깜찍했다.

최면 이능에 당한 이인교가 이대로 일어나지 않고 얌전히 있으면 좋을 텐데, 어째 예감이 영 별로였다. 아무래도 일을 좀 더 빨리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다.

백한은 파장을 부풀렸다. 너무 강한 중력 이능에 의해 손끝이 눌린 탓에 뼈가 부서져 수지 말단부가 얇아졌다가, 체내에 남아 있는 가이딩과 회복력에 의해 수복되고는 했다. 그대로 중력 이능으로 만든 볼링공 같은 것을 반원구에 때려 박았다.

쾅, 콰앙—!

커다란 굉음이 지축을 흔들었다.

인이어를 통해 박형인이 폭발마를 놓쳤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최면에 걸린 허인나가 박형인과 김민우를 동시에 공격하는 바람에, 동료가 다치지 않게 제압하려다가 상대하던 적을 놓친 것이다.

조금씩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안치영.”

백한은 치영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금 반원구를 내려쳤다. 쩌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원구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어딘가가 부서지면 그 부분을 다시 수복하며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깨어진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 메꾸느라 그런 듯했다.

이런 질척거리는 유형의 이능력은 그냥 죽어라 때려 대는 것 외에는 장사가 없다.

반원구의 주인은 무척이나 변태 새끼임이 틀림없다. 제 몸을 깎아 망가진 부위를 회복시키고 크기를 줄여 가는 반원구에서 집착적이고 징그러운 성격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여간 안치영. 또 어디서 쓰레기 하나에게 걸렸구나, 싶어졌다. 쾅쾅거리는 소리가 나도록 계속 때린 덕에, 안쪽이 조금 더 갈라지더니 무저갱처럼 어두운 안쪽이 엿보였다.

“안치영!”

백한이 치영을 불렀다.

여전히 최면 이능은 실체화되지 못하고 떠돌다가, 백한이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그제야 외피를 굳힌 갑각류처럼 딱딱해져 저항했다. 피부에 들러붙는 파장이 짜증 났다.

반원구의 안쪽으로는 치솟는 불기둥에서 나온 빛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웠는데 그저 명암이 아닌, 촉감이 있는 어둠이었다. 질척거리는 어둠이 군홧발에 달라붙었다. 백한은 희미한 피 냄새를 느꼈다.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발을 디뎠다. 쩡, 하는 느낌과 함께 다시금 스파크가 튀었다.

반원구는 더 이상 백한이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했다. 반원구를 이루고 있는 ESP 파장이 백한의 이능 파장과 닿자마자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스파크가 터졌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백한의 살갗이 타고 있었다.

화기에 저항하는 소재로 된 전투복을 입은 부분까지는 태우지 못했지만, 뺨이고 손등이고 긁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정도 상처는 안치영 입술만 좀 빨다 보면 바로 회복되는 터라, 굳이 막아 낼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뒀다. 머리카락이 타들어 가면 빡빡 밀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두상도 잘생긴 편이니 뭐 어떠랴 싶었다.

기백한은 박수를 짝, 쳤다.

“염병 그만 떠시고 나오세요.”

그러자 어둠 속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이의 웃음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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