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기계가 가이딩을 측정하는 것과 에스퍼가 느끼는 게 다를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지만, 기백한이 안치영이라는 가이드에게서 수여받는 가이딩은 그것의 등급과는 무관한 듯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 고양감과 충만함을.
기백한은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좌절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결점에 대해 원망하거나 열등감을 품어 본 적도 없다.
대신, 그 트라우마를 다시 꺼내게끔 만드는 것들을 혐오해 왔다. 그것이 ‘남자 가이드’일 뿐이고, 그의 각인 가이드는 공교롭게도 남성이었다.
안치영이 남자인 게 빡 치는 거지, 그의 가이딩 양이 미미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치영의 가이딩 등급이 높았다면 각인 해제를 하는 것이 더 수월했을 수도 있다. 그 점이 거슬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너무 예뻐, 얼굴이 제일 예뻐.”
기백한은 카오디오에서 나오는 아이돌 걸그룹의 히트곡을 틀어 둔 채 멋대로 개사하여 따라불렀다. 룸미러를 슬쩍 보니 난슬동에 쭉 늘어선 저택들 뒤편에 병풍처럼 세워진 야산 근처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 또 주목받는 거 환장하지.”
어떤 쪼다 자식이 망원경의 렌즈를 조절하지 못하고 반사광을 번쩍인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면 이쪽이 그 먼 거리에서 작은 반짝임을 감지해 낼 줄 몰랐다거나. 두 경우 모두 멍청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글로브박스로 팔을 뻗어 사탕이 든 틴케이스를 꺼냈다. 그것을 열어 입에 털어 넣으며 그대로 난슬동 차량 진입로를 나서 우회전하려는데, 어떤 빡대가리 새끼가 좌우는 살피지도 않고 중앙선을 넘어 좌회전하여 들어오려고 하길래 클랙슨을 깊게 눌러 주었다.
빠아앙—!
경적 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길었다. 상대방은 가다 말고 지프의 창문을 내리고 욕을 해 댔다.
“미친 새끼야! 넌 실수 안 하고 살아?! 어딜 빵빵거리고 지랄이야! 너 소속 뭐야!”
불행하게도, 상대는 클랙슨을 누른 것이 백한이라는 걸 모르는 듯했다. 기세가 등등한 걸로 보니 등급이 꽤 높은 에스퍼 같은데, 백한은 저런 놈들의 콧대를 부수는 것을 취미로 삼았다.
잘 걸렸다 싶어 바로 기어를 주차로 변속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센터 안에서 기백한의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상대 역시 백한이 내리자마자 그를 알아봤는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백한은 지프를 향해 건들건들 다가가며 손을 대충 이마 어디에 슬쩍 붙였다 떼어내며, 성의 없이 거수경례했다.
“충성, 소속 물어보셨지 말입니다?”
“…기, 기 중령님, 그게 아니라—.”
백한은 그대로 손날을 세워 사이드미러를 가격했다. 갑작스러운 타격을 받은 사이드미러가 빠각, 하고 부러져 전선에 매달린 채 덜렁거렸다.
“운전을 개 좆같이 해놓고 소속은 왜 물어봐. 내 번호라도 따려고? 오빠 내 스타일 아닌데.”
낄낄 웃으며 창틀에 기댄 백한이 차 안으로 팔을 뻗어 핸들을 낚아챘다. 부들부들 떨며 핸들을 잡고 있는 남자는 예상처럼 에스퍼였다. 가이드였으면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폭령성이다 뭐다 하고 시끄러웠을 텐데, 상대가 에스퍼라 다행이었다.
‘죽어라 팰 것도 아니고 고작 차 좀 부수는 건데, 뭐.’
백한은 가볍게 생각했다. 그런 다음 씩 웃으며 말했다.
“오빤 씨발, 핸들 압수야.”
가차 없이 남자가 잡고 있던 핸들을 뜯어냈다. 우지끈하는 큰 소리와 함께 대시보드에서 핸들이 부서져 딸려 나왔다. 기백한은 그걸 창틀 밖으로 꺼내 뒤로 휙 던져 버렸다.
“으악—!”
놀란 에스퍼가 망연자실 자신의 뜯겨 나간 핸들을 바라보았다. 후련해진 기분으로 백한은 다시금 흥얼거리며 차로 돌아왔다.
그는 운전석에 앉자마자, 룸미러부터 쳐다보았다. 난슬동 뒷산에서 번쩍거리던 빛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어떨지 보자고.”
시원해진 기분으로 그대로 중앙부로 향했다. 지나가던 에스퍼들이나 가이드들이 짧게 거수경례하는 걸 다 받아 주었다.
센터장실은 중앙부 건물 가장 상위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센터장의 비서인 중사 하나가 벌떡 일어나 인터폰을 들었다. 백한의 방문을 센터장에게 알리려 하기에, 부러 수고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 치며 싱긋 웃었다.
“아, 됐어요, 됐어. 뭘 또 전화까지 해. 영감님이 잠깐 부른 거라 얼굴만 보고 바로 갈 거예요.”
중사가 머뭇거리면서도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길래 검지를 공중에 대고 긋자, 일직선으로 날아간 이능이 중사의 손안에서 수화기를 빼내어 대신 끊어 주었다.
백한은 그대로 센터장실 문을 열며 중사를 향해 말했다.
“커피도 주나? 난 블랙으로.”
백한이 노크도 없이 열어젖힌 문 안으로 들어가며 낄낄거리니, 자리에 앉아 있던 센터장이 미간을 팍 구기며 대뜸 소리쳤다.
“너 뭐 하는 새끼야!”
“뭐야. 인사 한번 다정하시네.”
기백한은 그대로 센터장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아 두 다리를 탁자에 올려 둔 뒤 쭉 뻗어 꼬았다. 군화 뒷굽이 탁자 유리에 닿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대로 등받이에 편하게 척추를 기댄 백한이 두 손을 깍지 껴 뒷덜미에 받친 뒤 흥얼거리듯 말했다.
“왜 불렀어요. 용건 말하셔요.”
“이 미친놈이……. 너, 너, 왜 애먼 차는 박살 내. 네가 깡패야?”
아하, 그 일이 그렇게 빨리 귀에 들어가셨어? 백한은 자동으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잡아 내리며 투덜거리듯 말했다.
“센터장님, 나 그냥 전역할까 봐. 분노 조절 장애 있는 거 같아. 못생긴 새끼들만 보면 막, 지금도 센터장님 얼굴 보니까 막…….”
“이 새끼가 근데!”
“아, 농담이지. 왜 정색을 하고 그래요. 사람 무섭게. 근데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보고가 벌써 올라갔나?”
의아하다는 듯이 기댔던 척추를 바로 세우며 묻자, 센터장은 뜨끔했는지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앉아 버렸다.
백한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올 때 먹었던 사탕은 이미 다 녹은 뒤였지만 미미한 단맛이 입술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것들 봐라. 아주 지랄들 떨고 있네.
작전처장 손진화는 센터장의 사위다. 그러나 센터장의 딸은 일반인이다. 에스퍼가 가이드와의 각인을 포기하고 일반인과 결혼했다는 건 박형인처럼 권력에 욕심이 없는 케이스거나, 아예 손진화처럼 권력의 개처럼 살겠다는 뜻이다.
손진화는 기껏 센터장의 사위 위치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딱 봐도 구린 냄새를 풍기게 생겼는데 여태껏 조용하다는 건 뒷공작이 장난 없을 거란 얘기와 같다.
손진화가 공들여 작업하고 있는 구석은 뻔했다. 안치영이겠지. 그 말랑하고 뽀얀 등신이 쪼다같이 여기저기 쏘다니며 다 썩은 손 처장 줄을 잡은 게 틀림없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거래가 오고 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지금부터 파 볼 생각이었다.
문제는 손 처장의 장난에 센터장이 동참하고 있다는 거였다. 난슬동 뒷산에서 반짝이던 무언가. 그건 춘란에 붙여 둔 꼬리가 틀림없었다.
센터장이 난슬동 정문에 붙은 구형 폐쇄회로 카메라가 송출해 주는 영상만 24시간 쳐다보며 X이나 치는 변태 새끼가 아닌 이상,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기백한이 애먼 에스퍼에게 난동 부린 일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백한은 소파의 팔걸이를 주먹으로 툭툭 내려치며 웃었다. 센터장이 그의 눈치를 흘끔 보길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어떻게 방구석 폐인 새끼들이 백령도 일로 입을 터는 거예요. 그거 센터장님이 흘렸어요? 경찰국 개까지 쫓아와서 안치영한테 지랄해 대던데.”
“…군경찰국?”
씨이팔, 저렇게 연기가 오질 거면 배우를 하지 왜 군인이 됐을까. 센터장의 모른 척 되묻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어디까지 하나 싶어 백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걔들은 뭔 냄새를 맡고 온 건데. 그게 가이드 하나가 어쩔 수 있는 일인가. 하여간 감이라고는 씨가 말랐지, 아주.”
“흠, 경찰국 놈들이 센터까지 치고 들어오게 할 수는 없지.”
놀고 자빠졌네. 먼저 나서서 군경 놈들 옆구리 푹 찔러 치영에게 뒤집어씌우고 재판을 통해 안치영의 신변을 인도받아 수작을 부리려던 게 틀림없다.
백한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또 한 번 소파의 팔걸이를 툭 쳤다.
백령도에서 기백한은 똑같은 주먹으로 정신계 ESP를 다루는 에스퍼가 만들어 낸 무형의 반원구를 내려쳤었다.
* * *
포인트 1389. 백령도에 폭발이 일어난 지점이었다. 때아닌 불기둥이 솟아오르자 놀라 튀어나온 주민들의 기억을 지우려면 망각 이능이 있는 에스퍼들이 이틀은 밤샘 야근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화염 기둥에는 ESP의 파장이 섞여 있었다. 그것이 일반 폭발물에 의한 게 아니라, 폭발마의 이능에 의한 불길이라는 걸 뜻한다.
백한은 곧바로 인이어에 대고 말했다.
“안치영, 거기 가만히 있어.”
안치영의 대답이 없었다. 백한은 욕을 짓씹은 채 빠르게 말했다.
“지금 여기로 박형인이 온다. 야, 안치영. 대답 안 해?”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답하지 못할 상황이거나 통신 자체가 끊어진 듯했다. 다른 대원들의 목소리는 들려오는 걸로 보아 전자일 확률이 크다.
“야, 누가 가 봐라. 우리 등신 어디서 또 기절한 건 아닌지.”
백한은 쯧, 혀를 찼다. 폭발마가 있다면 최소한 박형인이나 자신이 상대해야 한다. 허인나는 같은 화염계 에스퍼라 이능이 상충되어 자칫하다간 섬을 날려 먹을 수도 있고, 김민우는 백령도 주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쉴드를 개방해야 한다.
자리를 뜨지 못하니 영 찝찝했다.
—제가 가 보겠습니다. 안 소위님 현재 위치 포인트 1328 맞습니까?
이인교가 대답했다. 기백한의 GPS 시계에도 같은 위치가 떴다.
“움직이지 말라니까 그새를 못 참고 어디까지 간 거야.”
백한은 미간을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