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기백한은 팔짱을 낀 채 침대에 앉은 치영을 바라보았다.
각혈한 흔적이 있는 이불보는 간호장교가 가져갔다. 흰색의 이불보로 하반신을 덮고 있는 치영은 파리해 보였다.
“지, 지금으로서는 원인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일단은 심박수도 안정된 상태고, 간혹 가이딩 역류 현상 때문에 가이드들이 각혈하는 증세가 있을 수 있어서…….”
치영은 멍한 눈으로 군의관을 바라보았다. 군경찰 소속 김형권 대위가 왔을 때는 무감한 표정으로 저 할 일을 끝마친 채 나가 버리더니, 기백한이 지키고 서 있자 이것저것 허둥지둥거리는 꼴이 볼 만했다.
“안정? 근데 저건 상태가 왜 저런데.”
기백한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군의관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치영의 손목을 잡아 가이딩 측정기 위에 올려 두었다.
치영은 무의식중에 가이딩을 꼭 잠갔다. 체표면을 흐르던 가이딩까지 안으로 응축되어 더욱 괴로워졌다.
온몸에 가이딩이 자맥질하듯 혈관을 돌고 있었다. 전과 같은 양이 아니었다. 애초에 갖고 있는 가이딩의 양이 가이딩의 질을 상호 보완해 주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수치라 F급 판정을 받았던 것인데, 이렇게 되면 수치가 어떻게 나올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치영은 자신의 가이딩 양이 상당해진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시기가 안 좋았다. 김형권은 치영이 괴뢰들에게 정보를 넘긴 것처럼 말했다.
기백한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으나, 치영은 늘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을 살아왔다. 그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치영이 딱 18살 무렵이었을 때뿐이었다.
게다가 이대로 등급 판정이 높게 나온다면 기백한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백한의 성격은 예측 불가능하니 말이다.
사실 기백한은 치영의 가이딩에 대해 문제 삼았던 적이 없다. 그와의 높은 매칭률 덕분에 페어 가이드가 될 수 있었고, 그때도 그는 양이 적니 어떠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다만 치영의 성별이 문제였지.
그러나 가이딩 양이 증가했다는 걸 알게 되면, 더는 성별에 상관없이 치영의 가이딩을 욕심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소원이었던 조용한 전역은 물 건너갈 것이다.
센터 최고의 에스퍼, 군부의 주춧돌이라 불리는 백한이 치영을 원한다는데, 제 전역 희망 신청 따위가 승인될 리 없다. 손 처장이 뒤를 봐준다 한들, 기백한의 입김보다 강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제 가이딩을 빌미로 뭔가 다른 걸 요구하겠지. 대놓고 질이 나쁜 기백한보다 음침하게 질이 나쁜 손 처장 같은 놈들을 더 조심해야 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치영은 온 힘을 다해 가이딩을 잠갔다. 미미한 양이라서 가능한 줄 알았던 그 기술은 양이 방대해진 후에도 자물쇠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문제는 치영의 몸이 견뎌야 할 부하가 심해졌다는 것.
“으윽, 윽—.”
측정기에 올리지 않은 다른 손으로 단전 부분을 부여잡고 헉헉거리는 치영을 보며 기백한이 파장을 부풀렸다. 가이딩 병동에서 에스퍼 파장을 방사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지도 못할 만큼, 기백한은 살기 띤 어조로 군의관을 향해 말했다.
“야, 애 괴로워하잖아.”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안 소위님, 어디가 불편하세요. 네?”
기백한의 닦달에 군의관이 당황하여 치영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방대한 양의 가이딩을 속 안으로 응축시켜 가이딩 측정기를 속이고 있던 치영은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했다. 또 한 번 피를 토하기 전에 기백한이 군의관의 손목을 붙잡아 떼어 냈다.
“가지가지 한다, 씨발. 의사라는 게 환자를 흔들어?”
“으악—!”
잡힌 손목이 아픈지 군의관이 비명을 질러 댔다.
‘골 아파. 시끄러워. 둘 다 나가.’
치영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측정기가 삐빅 소리를 내며 측정을 완료했다. 액정에는 ‘F’라는 글자가 정자로 떠올랐다. 치영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내려다보던 백한이 쯧, 하고 혀를 차며 군의관의 손목을 팽개쳤다.
“다른 검사도 해, 얼른. 안색만 봐도 곧 뒈질 것같이 생겼는데 뭐가 다 멀쩡하다는 거야.”
“네, 네……. 검사 실행을…….”
“우냐? 울어, 이 쪼다 새끼야?”
훌쩍거리는 군의관의 어깨를 퍽퍽 내려친 기백한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치영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치영은 조금씩 편해지는 속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칫솔 사다 주십쇼. 피 토했더니 찝찝합니다.”
그 말에 백한의 한쪽 눈썹이 지그시 올라가더니 곧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어쭈, 이젠 아예 따까리로 쓰시려고요?”
치영은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군의관은 검사를 진행하러 가 보겠다며 백한을 향해 허리를 두어 번 숙였다 펴더니 거수경례까지 두 번을 더해 인사만 4번을 하다가 다 죽은 조상님한테 절하는 거냐고 짜증을 들은 후에야 병실을 나섰다.
백한이 치영의 볼을 쿡 찌르더니 말했다.
“씨발, 그럼 있어 봐. 치약도 아주 딸기 맛으로 사 올 테니까.”
“…….”
곧이어 그가 병실을 나서는 기척이 났다. 치영은 문 쪽을 보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누운 뒤,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자 위에서 티슈를 빼냈다.
치영은 입안에 고여 있던 혈액을 뱉어내고 그걸 몇 번 더 티슈로 감싼 뒤 휴지통에 버렸다.
“흑—.”
숨을 뱉을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천천히 나아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여전히 고통은 존재했다.
그는 누구일까. 왜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한 걸까.
그의 말이 이상했다. 분명 자신에게 힘을 돌려준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원래 치영의 힘이었다는 소리다.
그럴 수 있는 걸까.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치영은 늘 F급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달라지다니. 말이 되지 않는다.
몸이 오한에 부들부들 떨려 왔다. 치영은 더 큰 힘을 갖고도 암흑 속이었다.
* * *
센터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안치영이라는 가이드가 에스퍼의 파장을 없애고, 나아가 에스퍼들의 이능력을 소멸시켜 그를 일반인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이능자로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개 좆 같은 소리죠. 그때 그 공익 기억해요? 그 새끼가 퍼트리고 다닌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뭣도 아닌 공익 새끼가 나불거리는 말이 이렇게 빨리 퍼질 수 있나?”
“…백령도에서 있었던 일들도 조금씩 말이 돌았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있어요? 뭣도 모르면서 입털고 다닌 새끼들 다 군법으로 처리해야 해. 어딜 작전 내용을 함부로 떠벌려.”
춘란의 에스퍼들은 분개했다. 백한은 검지로 턱을 쓸며 무언가를 떠올렸다. 이를테면 파리했던 안치영의 안색을 말이다.
“…박형인은 소문 출처부터 알아봐.”
“예, 대대장님.”
“그리고 애새끼들아, 아가리 좀 여미세요. 안치영 들으라고 아주 광고를 하시든지, 씨발.”
안치영은 오늘 낮에 퇴원하여 2층 제 방으로 올라가 잠을 청하고 있다. 종알종알 이것저것 묻겠지 했는데, 가이드 병동에서 난슬동으로 오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이상했다.
“손 처장 좀 파 봐. 백령도 사건 번호 아는 새끼가 그 새끼밖에 더 있어?”
기백한의 말에 김민우가 엄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아예 목을 딸갑쇼?”
“지랄 좀, 민우야. 너 뭐 건달이니? 군인이야, 너.”
‘대대장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쓰여 있는 얼굴이었지만, 김민우는 두 번 토 달지 않았다.
위층은 아직도 조용했다. 백한은 오늘 퇴원한 치영의 검사 결과지를 펴 보았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가이딩 등급에는 변함이 없고, 파형도 여전했다.
철분 부족이라고 뜨긴 했지만, 그 정도의 피를 쏟아내고도 적혈구가 남아돈다면 그건 그거대로 질병을 의심해 볼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뭐가 좀 거슬린단 말이지.’
기백한은 느른한 눈으로 2층 언저리를 훑으며 제 턱을 쓰다듬었다.
뭘 놓치고 있는 느낌인데.
죽여 주게 기분이 더러웠다. 숨어 있던 적에게 찐따 새끼처럼 멍 때리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기 직전인 것 같은 예감. 기백한의 동물적인 감각은 이런 예감을 틀려 본 적이 없다.
“…나 센터장 영감 만나고 올 테니까, 애 깨면 밥 먹여.”
“넵.”
“아니다, 죽 먹여.”
“알아서 하지 말입니다. 저희가 뭐 대대장님처럼 안 소위 상태도 안 살피고 아무거나 욱여넣겠습니까.”
허인나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저것도 거슬렸다. 언젠가부터 춘란의 에스퍼들은 안치영이란 새끼 새를 둘러싼 어미 새들처럼 삐약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제 둥지 안에서의 일이다.
백한은 힘을 주어 허인나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눌려 끅, 소리를 낸 허인나가 곧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백한은 그대로 숙소를 나섰다. 지프에 올라타려는데 옆 숙소 저택 마당에서 백연이 낙엽을 쓸다 그를 발견했는지 빗자루질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안치영이는.”
“나랑 *구리 뜨고 방전돼서 쳐 잔다. 남의 가이드는 왜 찾으세요, 할 거 하셔요, 자매님.”
“성질머리하고는.”
백연이 쯧, 혀를 차고는 다시금 비질을 시작했다. 기백한의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졌다. 백령도 임무를 나가기 전부터, 그의 기분은 한없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사실 행동했던 것과 별개로, 백한은 그날 호텔에서 치영을 좀 떠볼 생각이었다. 각인을 나눈 에스퍼 가이드 사이인데도 두 사람은 아직 한 번도 관계를 맺지 않았다.
‘형이 지켜 줄게.’ 이딴 생각으로 떠보려던 것은 아니다. 저도 딱히 쫄쫄 굶은 처지는 아니라 싫다는 애 붙잡고 마지막까지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게 고깝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반쯤은 놀려 줄 생각도 있었고.
무엇보다, 백한은 거지 같은 가이딩 측정 검사기 말고 제 몸으로 치영의 가이딩을 검사할 계획이었다.
‘오차 범위 0.001%? 좆 까는 소리 하네. 그런데 왜 번번이 등급이 그 지랄로 나오냐 이거야.’
기백한은 글로브박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지프의 시동을 켰다. 구식 모델이라 아직 키 박스가 달려 있었다.
열쇠를 시계 방향으로 돌리자 자고 있던 지프의 엔진이 우르릉거리며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