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백령도 포인트 1389 폭발 사고
사건 번호: 가—019876
사건 일자: 20XX년 모월 모일
개요:
춘란대는 당일 서해 상공에 미확인 비행물체에 생체 신호가 감지된다는 관련 당국의 신고를 받고 출동, 미확인 비행체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수상한 인물을 발견함.
춘란대 소속 대위 박형인은 사건 발생 시각 1분 전 공기 중에 미미한 화약의 냄새를 감지, 폭발 ESP, 즉 폭발마의 존재를 의심하여 부대원들에게 이를 고지하지만, 알 수 없는 전파장애로 인해 통신이 끊겨 전 대원은 대위의 경고를 듣지 못함.
사건 발생 시각인 오전 01시 45분. 백령도 야산의 서북쪽에서 큰 폭발음과 함께 화염 기둥이 치솟음.
당국의 조사를 통해 화염 기둥에서 에스퍼의 파장을 발견, 이것이 단순한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 아닌 폭발마의 이능력임을 확인.
그로부터 3분 뒤, 춘란대 대대장 기백한 중령은 산의 동남쪽에서 거대한 ESP 파장으로 만든 투명한 반원구를 발견, 반원구의 정체가 정신계 에스퍼의 파장임을 판별함.
그는 곧 물리력으로 정신계 ESP를 와해시키고, 그 안에 있던 동죽대 소속 안치영 소위를 구출.
이후 조사관을 파견하여 정신계 ESP의 파장에 대한 조사 실시, 파장이 소멸하여 그 흔적을 찾지 못함.
한편, 구출된 안치영 소위는 알 수 없는 오한, 각혈 등의 증세를 겪으며 센터로 이송되어 현재 치료 중에 있음.
춘란대가 추적하던 미확인 비행물체들의 흔적은 현재 오리무중 상태로, 사건 번호 가—019876은 이능력 관련 미확인 사건 해결부서로 송치, 담당자를 배정 중.
임시 사건 담당자 : 작전처장 손진화
* * *
“고생 많이 하고 산다며? 다 들었어. 근데 그게 형의 힘이 약해서일 것 같아?”
남자아이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아니, 그건 그냥 초식동물들이 형을 먼저 알아보고 발악하는 거야. 살아남고 싶으면 형도 깨달아야지.”
뭘 깨달아야 하는데? 치영은 움직이지 않는 혀를 대신하여 사고를 통해 물었다.
“사이야, 네가 아주 강한 아이라는 걸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이 힘을 얼마나 유용하게 쓸지 궁금해.”
무슨 힘, 내가 무슨 힘이 있다는 건데. 나는 아무런 힘도 없어. 힘이 없어서 지금도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안치영 소위.”
“허억—!”
치영은 곧바로 잠에서 깨어났다. 낯선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기 때문이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치영의 두 눈으로 다소 폭력적이다시피 한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다.
“윽—.”
신음이 절로 터졌다. 배 속이 울렁거렸다. 곧바로 구역질이 일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야산에서 각혈 후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흰색 시트를 덮은 채 환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자주 실신하는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기면증 아니야? 뭔가 몸이 안 좋은 거라면 귀찮게 하지 말고 곧 죽는 병에나 걸렸으면 좋겠어.’
치영은 눈도 뜨지 못한 상태에서 혀를 찼다. 그때, 무감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치영을 호명하던 낯선 목소리였다.
“정신 차렸네요. 오늘도 안 일어나면 어쩌나 했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요.”
누군가 눈을 찌푸리고 있는 치영의 눈꺼풀을 아래위로 쩍 벌려 펜라이트를 쏘았다. 안 그래도 뜨기 어려웠던 눈에 집약된 밝은 빛이 닿자, 상이 맺혀 앞이 보이는 대신 밝게 빛나는 원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이상은 없습니다. 동공 반응도 정상이고, 바이탈도…….”
“수고하셨습니다. 나가 보셔도 됩니다.”
펜라이트로 치영의 동공을 들여다보던 군의관이 무감하게 말하자, 치영의 이름을 불러 그의 잠을 깨운 남자가 대답했다. 의관은 치영의 신체를 검사하는 것보다 남자의 의견이 더 중요한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몇 가지를 더 살펴본 뒤, 도시플로를 조정하고는 별말 없이 병실을 나섰다.
군의관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남자는 치영을 돌아보았다. 치영은 생리적인 눈물이 나오는 걸 닦아 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인상을 찌푸린 상태로 제 침대 옆에 선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정복을 입고 있었다. 계속해서 눈이 부셨기 때문에 그의 소속 센터가 어딘지 말해 주는 가슴팍의 명찰이나 어깨에 붙은 견장을 보지 못해 계급과 소속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안 소위, 이제는 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정신 차렸습니다. 말씀하십쇼.”
치영은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남자는 중간 키에 냉막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얼굴이라, 그가 이 병실을 지금 바로 나가 버린다면 치영은 5분 후에 그의 생김을 싹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는 더 지체할 것 없다는 듯이 거침없는 어조로 말했다.
“저는 에스퍼‧가이드 특수군 군경찰국 감찰과 소속 김형권 대위입니다. 헌병대의 상위 기관이라고 보면 됩니다.”
“…소위, 안치영.”
“군경찰이라도 행정관에 가까워 굳이 본관에게 관등성명을 댈 필요는 없습니다, 안 소위.”
김형권이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파리한 안색에 이 방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조용히 병실 한쪽에 있는 스툴을 끌고 오더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정모를 벗고는 헝클어진 적도 없는 짧은 머리를 다시 한번 정돈하며 입을 열었다.
“짧게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안 소위는 현재 백령도 폭발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네?”
치영은 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말인지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폭발이 일어나고 그 후에 각혈과 동시에 정신을 잃은 건 기억합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 폭발이 일어나기 전, 적의 ESP가 안 소위에게 접촉되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뢰가 안 소위로부터 가이딩을 수여 받은 흔적이죠.”
“그게 무슨…….”
다시 한번 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치영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파리해지자, 김형권은 눈동자만 굴려 그런 치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뱀 같은 눈이었다.
“물론 붙잡혀 억지로 가이딩을 수여하는 상황에 놓였을 시에는 군사 재판소에서도 안 소위에게 무죄를 선고할 겁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재판소와 무죄, 선고, 무거운 단어들이 치영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치영의 병실 문이 열렸다.
“까고 있네. 뭔 무죄를 선고해. 애초에 기소도 안 될 텐데.”
기백한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며 이죽거렸다. 품 안에는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는데 포장이 뜯어진 채였다.
그의 다른 손에 들린 애플망고에 한 입 베어 먹은 흔적이 남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기백한이 병문안 선물이랍시고 들고 오다가 도시락처럼 까먹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백한이 제 손에 들린 망고를 다시 한번 크게 베어 물고는 와그작 씹으며 말했다.
“경찰국 하이에나 새끼가 무슨 냄새를 맡고 여기까지 오셨어? 요즘 아주 좆빠지게 심심한가 봐. 작전하다 쓰러진 가이드 문병도 다 오고. 언제부터 우리 안치영이를 이렇게 아끼셨을까.”
백한은 두 입 만에 해치운 망고의 씨 부분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더니, 과즙이 잔뜩 묻은 손으로 김형권의 어깨 견장을 짚어 그의 정복 가슴팍에 손바닥을 문질러 닦아 냈다. 그도 모자라 손목을 돌려 앞뒤로 열심히 닦아 내더니 씩 웃는다.
김형권은 그걸 내려다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백한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과일의 과육을 끝내 짓씹어 삼킨 듯했다.
“뭐 얻어먹으려고 어슬렁거리는지 모르겠는데, 품바 새끼들 재롱 받아 줄 정도로 우리 자기랑 내가 한가하진 않거든.”
이 방에 네 자기가 어디 있어. 치영은 아연한 얼굴로 생각하며 김형권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이곳에서 싸우게 된다면 병실에는 소란이 일 것이고, 그렇다면 치영은 또 한 번 원치 않는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가이드 병동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김형권은 그대로 일어나 정모를 쓰고는 치영을 향해 말했다.
“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아직 확정된 건 없지만 그리될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러 온 거라…….”
낮게 한숨을 내쉰 김형권이 백한을 향해 작게 묵례하고는 병실을 떠나려 했다. 백한이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치영의 침대 옆 콘솔에 올려 두며 그의 등 뒤를 향해 말했다.
“경찰국 빡대가리 새끼들한테 전해.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지 말라고. 나 참을성 없어. 우리 병권이도 그거 잘 알아서 찾아온 거지?”
‘저 사람 이름은 형권인데…….’
그리 생각하며, 치영은 김형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병실을 떠났다. 그가 문을 닫고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병실을 완전히 떠나는 걸 본 치영은 맥이 풀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백한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말입니까.”
“별일 아니니까 신경 끄셔.”
“어떻게 신경을 끕니까.”
“서해 상공에 미확인 비행 물체가 떴다는데 공군이고 해군이고 식별도 못 했어. 그게 에스퍼‧가이드 특수군까지 넘어온 거야. 그럼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중에서 네가 제일 만만하다는 거야.”
“그럼…….”
치영의 안색이 흐려졌다. 과일 바구니를 뒤지던 백한이 그런 치영을 돌아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자기 쫄았어? 걱정하지 마. 형이 있는데 뭘 쫄고 그래.”
그가 침대에 한 다리를 걸치고 앉아, 은근하게 말했다. 음색에 끼어 있는 미묘한 분위기를 읽지 못한 치영은 심란한 표정이었다. 기백한이 그의 뺨을 툭툭 두들겼다.
“너는 미남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너무 많이 해. 걱정하지 말라니까. 네 소속이 동죽대고 머무는 곳이 춘란인 이상, 군경찰국이고, 군경찰국 할아버지고 너 어떻게 못 해.”
그 말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치영은 낮게 한숨을 내쉰 채로 백한에게 자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 어떻게 된 거냐 물었다. 누군가의 음성이 계속해서 생각났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돼. 일단 너 퇴원하면 말해 줄 테니까 있어 봐.”
백한은 침대에서 일어나 콘솔 위에 올려 두었던 과일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커다란 등이 굽어지며 바구니를 들여다보더니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야, 이거 애들이 보낸 과일이다. 뭐 좀 깎아 줘?”
그가 치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치영은 고개를 저으며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에게 힘을 돌려주겠다는 낯익은 음성,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 봐도 그의 얼굴만은 떠올리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치영의 안쪽에서 무언가 팍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욱—!”
목구멍에서 비릿한 녹슨 철의 향과 함께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구토인 줄 알고 입을 막았던 치영은 손바닥 사이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이런 씹, 얘 또 왜 이래! 이봐—! 군의관!”
백한이 빠르게 일어나 병실 문을 열고 군의관을 불렀다. 그가 병실에서 나가자마자, 치영은 제 발밑부터 차오르는 무언가를 느꼈다.
손끝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동시에 폭발할 것같이 팽창되기도 했다.
그것은 가이딩이었다. 간과 비장에서 생성되어 단전에 모여 이루어진 가이딩 핵이 점차 크기를 부풀리고 있었다. 마치 이제야 기지개를 켜겠다는 듯이, 미뤄 둔 성장을 지금 막 마쳤다는 듯 거침없이 세력을 확장시켰다.
“우욱—!”
또 한 번 피가 터졌다. 치영은 물을 토해 내는 것처럼 핏물을 쏟아냈다. 위가 조이는 기분이었다. 가이딩의 파장이 넘실거렸다. 다행히 기백한은 군의관을 부르러 병실 밖으로 나간 상태였다.
치영은 빙글빙글 돌아버릴 것 같은 눈을 감았다.
“안 소위는 현재 백령도 폭발 사건의 유력 용의자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네가 이 힘을 얼마나 유용하게 쓸지 궁금해.”
안 돼.
그 생각부터 들었다. 치영은 이것이 어디에서 온 힘인지 깨달았다. 치영이 원천적으로 갖고 있던 바로 그 힘이었다. 가림막에 가려져 조용히 담겨 있던 가이딩이 더는 지루해 못 견디겠다는 듯 넘실거렸다. 단전이 부풀어 터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이딩 양이 넘치기 시작한 것이다.
안 돼.
지금 이것을 다른 이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이 괴뢰를 만나 가이딩 양이 폭증하게 되었다는 걸 다른 누구에게라도 들키면…….
그게 설사 기백한이라 해도…….
치영은 계속해서 올라오는 핏물을 침대 시트에 뿌리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멀리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여러 개 들렸다. 군의관이 날아오듯 공중에 띄워진 채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군가 군의관을 공처럼 병실 안으로 던져 넣은 것 같은 형국이었다.
곧이어 기백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병실 문으로 군의관을 따라 들어왔다.
“다음에 만날 때는 꼭 알려줬으면 해. 이 힘을 어떻게 썼는지, 힘을 갖게 된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이야.”
치영은 그 말을 기억해 냈다.
자신은 절대, 이 힘을 들켜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