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놀란 치영이 구덩이 밖으로 달려 나갔다. 지축이 크게 흔들리며 굉음이 한 번 더 들렸다. 그 충격에 발이 걸려 넘어졌던 치영은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일어서 달렸다.
자신이 그곳에 간다고 해도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달리고 있었다. 바빌론 탑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화염 기둥의 세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사방이 대낮같이 환했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인이어를 타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히 있어, 지금 여기……. 야…, 누가…….
—…가 가 보겠……. 포인트 13…….
누구의 목소리인지 식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잡하게 들렸다. 치영은 숨을 들이 삼켰다. 매캐한 냄새가 났다. 아직 추수를 끝내지 않은 논이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그쪽으로 향하려면 하산할 필요가 있었다.
발밑을 살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달려 나가려던 때였다.
“어디 가, 형.”
치영은 자신이 공중에 멈춰 선 것을 깨달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는 것 정도는 허락하겠다는 듯, 치영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치영은 자신을 부른 목소리를 그제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안녕.”
작은 어린아이였다. 언젠가 본 듯한.
하지만 어디서 봤더라, 하고 계속 되뇌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최근에 이런 느낌을 받은 적 있었다. 어디에서 그랬더라. 이번엔 금세 떠올랐다.
바로 오늘 저녁, 서울의 한 호텔 로비에서였다. 모르는 남자와 부딪힌 치영은 그의 얼굴을 보고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지만 확실하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렸었다.
그를 보던 느낌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그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치영이 오늘 처음 가 본 호텔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름 모를 남자와 말이다.
그게 말이 되는 얘기일까. 치영은 소름이 돋았다.
“이제 조금 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남자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피식 웃었다. 치영은 여전히 공중에 멈춰 있었다. 꼭 이 세상의 모든 물리력이 치영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눈앞의 남자아이는 에스퍼인 듯했다. 아이의 파장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며 영역권을 확장시켰다. 치영은 정확히 아이의 파장권 안에 들어와 있었다.
“눈치가 빠르네. 내가 그런 기능도 넣었던가?”
아이는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노쇠한 영혼이 어린아이의 몸 안으로 들어가 아이의 흉내를 내는 것 같은 역겨움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위의 반사작용까지 틀어막은 것은 아닌지 우욱, 소리가 절로 나오며 치영은 몇 번 더 헛구역질이 나왔다. 아이가 지척으로 다가오더니 씨익 웃었다.
“형은 내가 역겨워? 왜지? 외양은 저 양아치랑 별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나도 예쁘지 않아?”
그때, 인이어를 통하여 목소리가 들렸다.
—안치영!
백한이 치영을 찾는 목소리였다. 치영은 그제야 자신이 기준점에서 아주 멀리 떠나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느새 이렇게 멀리 이동한 것일까?
사위가 조용했다. 치솟던 불기둥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아니면 흐르지 않은 것인지 도통 판가름이 되지 않았다.
거대한 검은색 구슬 안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돔처럼 생긴 공간을 감싸고 있는 것은 물리적인 어둠이었다. 어둠은 신기하게도 촉감이 있었다. 그 어둠이 서서히 치영을 좀먹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ESP인가 싶어 에스퍼의 파장을 살펴보았지만, 치영이 뚜렷하게 알 수 있는 파장은 제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이능의 파장뿐이었다.
더불어 이것이 모두 눈앞에서 아이의 흉내를 내고 있는 남자의 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가 잘했다는 듯 치영을 칭찬했다.
“옳지. 이제 알아보는구나, 사이야.”
사이……?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다. 치영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치영은 이 감각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것은 공포의 감각이다. 영혼에 새겨진 무언가가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러나 대체 왜? 치영은 대체 어떤 걸 무서워하고 있는 걸까.
“오늘은 선물을 주려고 온 거야. 네 동생들도 이제 힘이 다 빠졌을 건데 얼른 주고 돌아가 볼 생각이다.”
아이는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내는 것처럼 노숙한 소리를 내더니, 어느새 키가 커져 호텔에서 마주쳤던 남자의 모습으로 변하였다.
“……!”
그가 아이에서 어른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ESP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다. 외모를 변형하는 페르소나 ESP를 갖고 있는 에스퍼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치영은 소리 내어 묻지 못했다. 그가 입을 여는 걸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영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끈질기네.”
남자가 치영의 이름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턱을 악문 상태에서 나온 웃음이라 다소 기괴하고 험악해 보였다. 남자는 한참 어딘가를 응시하더니, 천천히 치영의 근처로 다가왔다.
‘오지 마, 오지 마—!’
소리도 나오지 않는데 치영은 맹렬히 저항했다. 생리적 거부감이 들었다. 오늘 처음 본 남자가 왜 이렇게 끔찍하게 싫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를 알 수도 없이, 치영은 남자가 제게 다가오는 것이 싫어 죽을 지경이었다.
남자가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반응이 그게 뭐야. 섭섭하게. 어쨌든 오늘은 나도 더 못 있어. 저건 좀 강력한 편이거든.”
남자가 엄지로 제 등 뒤를 가리켰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나타났다.
쿵—.
거대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돔의 벽을, 바깥에서 누군가 쿵쿵 치고 있었다. 그 힘이 어찌나 대단한지 공간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남자가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얼마나 무식하게 강하면 정신계 ESP를 물리적으로 때릴 수 있을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이 거대한 돔이 정신계 이능력으로 만들어진 허상의 공간이라는—.’까지 생각한 치영은 방금 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두 잊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치영은 다시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 골몰했다. 누군가 쿵— 하며 구슬의 벽을 치고 있었다.
누굴까. 치영은 어지러웠다.
“얼른 주고 가야겠다. 네 동생들이 많이 다쳤어. 너 선물 주려고 온 건데. 미안하지 않아?”
미안하지 않은데도, 미안하다고 빌고 빌어야 할 것 같았다. 가슴이 쪼개질 듯 죄책감이 차올랐다. 왜 이런 죄책감이 느껴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가 웃으며 얼어 버린 토끼처럼 가만히 떠 있는 치영의 단전을 짚었다.
“네가 이 힘을 얼마나 유용하게 쓸지 궁금해.”
“…….”
“다음에 만날 때는 꼭 알려 줬으면 해. 이 힘을 어떻게 썼는지, 힘을 갖게 된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말이야.”
남자가 웃으며 다가와 치영의 뺨을 매만졌다. 애정이 깃든 손길이었다.
치영은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익숙한 생김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와 형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닮은 얼굴이었다.
남자가 치영의 뺨을 만지던 제 손바닥에 입을 맞춘 뒤 턱을 문지르며 웃었다.
“그래, 내가 그랬잖아. 나도 예쁘다고.”
치영의 눈동자가 얼어붙었다. 그는 기백한을 닮아 있었다. 기백한처럼 야성적인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드러운 생김이었고, 다정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백한과 형제처럼 닮아 있었다. 그의 쌍둥이 누이인 백연이 백한을 닮은 것보다 더욱.
치영의 표정은 굳은 그대로였으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남자가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잘했어. 드디어 생각해 냈구나.”
그는 봄바람을 베어 문 것처럼 따스한 웃음을 흘렸다. 그때, 남자의 등 뒤에서 다시 한 번 쾅— 하는 굉음이 울렸다.
치영은 자신이 움직이지 못한 처지가 된 것도 잊은 채 놀라 몸을 떨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조금씩이나마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남자는 치영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음, 아무래도 이제 정말 가 봐야 할 것 같네. 네 동생 중 한 명이 방금 죽었거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치영은 혈혈단신의 고아였다. 태어났으니 부모는 있을 테지만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동생이 있을 리가 없다. 동생이 있었다면 함께 버려졌을 테니까.
그러나 남자는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을 뻗어 치영의 단전을 문질렀다.
쾅—.
콰앙—.
둔중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남자가 쯧, 혀를 찼다.
“넌 저렇게 야만적인 새끼가 좋니? 너한테 잘해 주는 사람을 좋아해야지. 전에는 내가 제일 좋다고 했잖아.”
그런 적 없어.
치영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남자의 그 말만은 부정하고 싶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다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쩌적 하고 천지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가 다시 한번 아쉽다는 듯 말했다.
“다음에는 절반 정도만 기억해 보자. 박사님은 그거면 돼.”
남자는 자신을 박사라 자칭했다. 치영은 미간을 구겼다. 그때, 남자가 다시 치영의 단전에 손바닥을 대었다. 자리를 가늠해 보는 듯 문지르더니 안쪽으로 어떤 힘을 밀어 넣었다.
“우욱—!”
치영은 그대로 헛구역질을 했다. 아니, 헛구역질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왔다. 잘 먹은 저녁이 올라온 것일까?
“안치영—!”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방금 전까지 앞에 있던 남자는 이미 오간 데 없이 사라진 후였다. 치영은 입을 틀어막았다. 기백한이 놀란 얼굴로 치영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욱—!”
또다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치영은 풀 위에 피를 토했다.
그 순간 자신이 누구와 말하고 있었는지, 또 어떤 대화를 했는지 모두 잊었다.
치영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딱 한마디의 말뿐이었다.
“네가 이 힘을 얼마나 유용하게 쓸지 궁금해.”
또 한 번, 핏물이 올라왔다. 백한이 치영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