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집합 지점에서 대원들과 합류한 허인나는 그대로 바로 정찰을 나섰다. 정찰에 나선 인원은 총 3명. 김민우, 이인교, 허인나였다.
치영은 조용하게 읇조리는 백한의 말에 집중했다. 기백한은 그 자신의 능력뿐만 아니라 작전과 대대 통솔에도 출중했다. 사적으로 볼 때는 개새끼여도 임무에 임하는 걸 한 번이라도 보면 그의 능력에 대해 폄훼할 수가 없었다.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치영은 고요한 형인의 표정을 보며 이런 임무가 그들에게는 예사롭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긴장하지 않는 에스퍼들 사이에서 저만 잘하면 될 것 같아 숨을 짧게 들이마신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안치영이 기준점을 맡는다. 대기하고 있다가 대원들이 복귀하면 바로 가이딩 해 주면서 종합 상황 보고해.”
기준점에 남으라고 한 걸 보면, 아직은 그렇게 유용한 인력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큰 활약을 할 기회는 없어도 작은 임무를 성실히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기백한이 그런 식으로 치영에게 신입 군인을 위한 제대로 된 프로토콜을 밟게 할 줄은 몰랐다. 실전에 투입시키되, 오늘은 견학까지가 치영의 마지노선인 듯했다. 그의 말을 이해한 치영이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네.”
기백한은 곧바로 박형인에게도 무언가를 지시했다. 좌표와 방위를 제시하는 걸 듣자 하니 상대 에스퍼들의 탈출 경로를 미리 차단해두라 하는 것 같았다.
치영은 숨죽이고 백한의 말을 하나하나 새겨들었다. 메모를 할 수 없으니 머리에 남겨 임무가 끝난 뒤 천천히 복기해 보려는 심산이었다.
실전 경험이 있는 가이드와 경험 부족인 가이드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존재한다. 공용 가이딩실에서 담당하던 업무에 불만을 품었던 적은 없지만, 드디어 자신도 에스퍼·가이드 팀에서 제대로 된 임무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조금 뿌듯한 것 같기도 했다.
전역을 간절하게 열망하면서도, 치영은 항상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자 했다. 내일 당장 군을 떠나게 되더라도 오늘 주어진 일에 소명을 다하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백한이 주먹 사이에 좁은 동굴 같은 틈을 만들어 망원경처럼 눈앞에 가져다 댄 후, 한쪽 눈을 감은 채 저 멀리 어딘가를 주시하며 말했다. 그의 물음은 담백했다. 호텔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지금의 그와는 상관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치영은 그것이 자신에게 건네는 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네.”
몸이 조금 떨렸지만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되도록 대답은 단호하게 하려 노력했다.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저 에스퍼에게는 특히나.
어딘가를 유심히 보던 백한이 고개를 돌려 치영을 흘끗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체 신호 느껴지면 그냥 숨어. 방사 가이딩 파장 넓혀서 수색할 생각하지 말고.”
기백한의 말은 치영이 딱 한 번 성공했던 섬만 한 넓이의 방사 가이딩을 뜻하고 있었다.
가상의 섬에서 행했던 훈련은 방사 가이딩의 파장을 아주 엷게, 또 넓게 퍼트려 그 동심원 안으로 들어오는 에스퍼들의 수와 거리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치영은 잘할 수 있다고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보던 기백한이 검지로 치영의 이마를 살짝 밀어냈다.
갑자기 무슨 장난인가 싶어 미간을 좁히자 옆에 있던 형인이 픽 웃으며 대신 대꾸했다.
“대대장님은 안 소위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놈들의 정체 파악 전에 안 소위 위치가 발각될까 봐 그러시는 겁니다.”
그 말은 의외였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박형인을 보자 그가 하하, 웃으며 백한을 향해 핀잔했다.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지 그러셨습니까, 대대장님.”
“시끄러워.”
기백한의 어조는 묻어나오는 감정 없이 깔끔하게 들렸다. 치영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 정도의 걱정은 통솔자로서 자신의 부하 대원에게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대부분 성격이 좆같고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지만, 나쁜 상사는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치영은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대원들도 신입 때는 그 정도 배려를 받았을 것이다. 치영은 자신이 그에게 특별해서가 아님을 되새겼다.
그와 동시에 흉골 위로 덤덤하게 묵직한 통증이 찾아왔다. 전처럼 그렇게 가슴이 빠개질 듯 아프지는 않았다.
사실, 그 말은 틀린 구석이 전혀 없었다. 상대 에스퍼들은 레이더를 피해 높이 비행할 수 있을 정도로 고등급의 ESP를 구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막 가이딩 파장을 확장시킬 수 있게 된 치영이 오히려 위치를 들킬 가능성이 높다.
기백한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는 치영을 내려다보더니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고는 그의 정수리를 커다란 손으로 꾹 눌러 주저앉게 만들었다.
“숨어 있어. 형 금방 올 테니까.”
알겠다니까.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은 말을 담아 올려다보자 피식 웃더니 금세 박형인과 나란히 선다. 두 에스퍼는 몇 마디를 나누더니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두 사람의 인영이 저 멀리 사라지자, 치영은 그제야 백한이 왜 이곳에 숨어 있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살짝 파인 구덩이를 발견한 것이다.
백령도에 주둔하는 일반군이 훈련을 위해 파 둔 구덩이인 듯했다. 주위에 국방색으로 된 그물이 쳐져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간 치영은 가만히 숨죽이고 전방을 응시했다.
기준점으로 돌아온 에스퍼들에게 가이딩을 수여하면 되는 간단한 일을 맡았으니, 은닉이라도 잘 해내고 싶었다. 다른 대원들이 맡은 임무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난이도였다.
그것은 기백한이 치영에게 별다른 기대 없이 그저 현장의 분위기를 익히게끔 임무에 투입시켰다는 말과 상통했다.
그런 생각에 반전을 일으켜 기백한에게 자신을 증명하거나 돌아보게 만들 생각도, 이곳에서 무언가 공을 세울 생각도 없었다.
치영은 백한이 말한 것처럼 잘 숨어 있다가 에스퍼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접전은 어떤 식으로 치러지는지를 보고 배울 생각이었다. 고지식하고 모범적인 성격이라 오히려 백한보다 치영이 군인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얼마간 더 숨죽이고 있었을까. 인이어를 통해 대원들의 대화가 흘러들었다. 가장 처음은 김민우였다.
—이쪽에는 파장 감지기가 일 안 하는데요. 누구 개미 새끼라도 발견하신 분.
—이쪽도 조용합니다.
이인교가 대답했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치영은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구덩이 밖을 쏙 내다보았다가 다시금 몸을 웅크렸다. 보고서에서 본 내용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허가 없이 백령도에 착륙한 에스퍼는 총 4명에서 5명. 아직까지 그들의 목적을 알 수 없는 데다가, 그들 모두 비행 능력을 갖고 있는 에스퍼인지, 그도 아니면 등급이 꽤 높은 비행 에스퍼 한 명이 나머지를 데리고 비행했는지조차 파악할 수 없었다.
치영은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에스퍼의 파장을 느껴 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대신, 은신을 강화하기 위해 체표면에 미세하게 도포되어 있던 가이딩을 안쪽으로 꽉 잠갔다.
다른 가이드들은 할 수 없는 치영만의 능력이었다. 보통 다른 가이드들은 체표면에 흐르는 가이딩을 의식적으로 조절하지 못한다. 혈류의 흐름을 대뇌의 생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치영은 처음 센터에 들어왔을 때, 그것이 의식적으로 통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걸 쉽게 해낸다고 해서 별다른 재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이딩량이 현저하게 작아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렇게 체표에서 뛰놀던 가이딩을 안으로 응축시켜 숨기자 살짝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숨을 멈춘 것처럼 약간 가쁘긴 했으나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인이어에서 또 한 번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인나였다.
—포인트 1456, 전방에 희끄무레한 생물체 감지했습니다. 추적 중……. 아, 뭐야. 백로잖아. …잘 날아가네.
인나의 허탈한 말투에 치영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백령도에 백로가 많이 서식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다. 인이어 속에서 박형인이 질린다는 듯 대꾸했다.
—인나야, 집중하자.
—옙, 집중 빡세게 갑니다. …어? 이번엔 진짜 대박 수상한 거 발견. 포인트 1498, 움직임 확인된 곳으로 이동해 보겠습니다.
—허가한다.
마지막은 기백한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둔중하게 인이어를 타고 흘렀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숨죽였다. 인나가 만난 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에스퍼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치영은 바로 접전이 시작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비상용으로 챙겨 온 신호탄이 잘 있는지 괜히 점프슈트의 앞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쪽에서는 감지되는 움직임도 없고 생체 반응 또한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인나를 대신하여 치영이 긴장했다. 쓸데없이 허둥거리던 그는 숨을 깊게 쉬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팽팽한 현장의 공기를 다들 어떻게 견디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정작 치영은 멀리 떨어져 라디오 듣듯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같이 뛰는데.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산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새가 우짖고 있었다. 밤에 우는 새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 보던 치영은 등골에 소름이 일었다.
저 멀리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치영은 숨을 죽인 채 구덩이 안에서 천천히 뒤를 돌아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허인나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백로일 수도 있다. 이름 모를 새가 우짖는 소리도 듣지 않았나. 치영은 먼발치를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식은땀이 났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렸다. 치영은 땅바닥에 갑자기 나타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닫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백한이 달려간 쪽에서, 산보다 커다란 화염 기둥이 치솟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