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혐오 만세-80화 (80/114)

80화

바람이 거세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작전복을 입지 않았다면 그대로 얼어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인나가 고글을 쓴 채 바로 뛰어내렸다.

치영은 숨을 삼켰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구분되지 않는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쉬이익, 솨아악—.

미친 듯이 몰아치는 바람 때문에 이대로 인나를 불러 봤자 그녀에게 닿을 것 같지 않았다. 뛰어내린 허인나는 그 어둠 속에 그대로 묻혀 버렸다.

순식간에 그녀가 보이지 않게 되자, 치영은 놀라 그 아래를 바라보다 아찔해졌다.

기백한이 어디서 난 것인지 모를 고글을 치영에게 씌워 주었다. 멍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니, 저를 보며 씩 웃고는 뺨에 쪽 입을 맞췄다. 이지러진 눈물점이 보였다.

치영은 곧바로 백한이 입을 맞춘 뺨을 닦아 냈다. 기백한은 그런 치영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했다.

“안치영 후보생 애인 있습니까.”

“없습니다.”

“애인 이름 외치며 뜁니다. 자, 하나, 둘—.”

“없다니까.”

없다는데도 기백한은 치영의 머리에서 헤드셋을 빼내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린 채, 허리를 껴안고 그대로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다.

중력 가속도를 받은 두 사람의 몸이 끝없이 추락했다. 바람의 저항이 그걸 막는 느낌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끊임없이 요동칠 정도로 바람이 대단했다. 오장육부를 다 밀어내는 느낌이었다.

위에서는 밑으로 내리누르듯 하고, 밑에서는 내려오지 말라며 치영을 밀어내는 바람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끼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아득한 아래는 아직도 어두운 바다였다. 백령도 인근이었다. 이대로 추락한다고 해도 섬 가운데에 내린다는 보장이 없었다.

치영은 비명조차 내뱉지 못하고 자신을 끌어안은 단단한 품에 매달렸다.

쇠아악, 쇠아악—.

바람 소리가 귓가를 미친 듯이 스쳤다. 고글을 썼는데도 그 틈 사이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온몸의 기관들이 치영에게 경고하는 중이었다. 너는 지금 낙하하고 있다고, 떨어져 곧 산산조각 날 운명이라고. 꼬리뼈 근처가 묵직했다. 낙하감이 배 속을 달궜다.

저만 믿으라 했던 주제에 단단하게 받쳐 주지 않는 백한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치영은 저도 모르게 더욱더 백한에게 매달렸다.

그때였다. 귀를 찢을 듯 사납게 굴던 바람이 뚝 멈췄다.

“이거 기분 꽤 좋은데. 우리 안치영이가 먼저 매달릴 때도 있고.”

사위가 조용해지며 치영이, 아니 두 사람이 공중에 멈춰 섰다. 치영은 놀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백한이 치영을 품에서 떼어 냈다. 손을 잡은 채로 서서히 그에게서 멀리 보내 주었다. 마치 돌아보라는 듯이.

“아…….”

치영은 두 눈을 깜빡였다. 보이지 않은 거대한 쇠공이 제 몸을 누르는 것처럼 아래로, 아래로만 꺼지던 몸이 그대로 공중에 멈춘 것이다.

멍하니 밑을 내려다보았다. 백령도 인근에서 빛나는 불빛들이 아주 작은 큐빅처럼 반짝였다. 그러니까 치영은 지금 서해 상공에 가만히 떠 있었다.

“더 좋은 거 보여 줘? 걸어 봐.”

“어떻, 어떻게 걸으라는—.”

백한이 손을 놓으려고 하자, 치영은 저도 모르게 깍지 껴 잡으며 힘을 풀지 않았다. 여기서 그의 손을 놓으면 큰일 날 것만 같았다.

기백한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치영의 손을 놓고는 살짝 밀었다.

“헉—!”

천천히, 지면에 닿기라도 한 듯 치영의 신발 밑창에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기백한이 고개를 까닥였다.

“그대로 걸어서 내려가.”

“그게 무슨—.”

그렇게 되물은 순간이었다. 치영의 오른쪽 발밑이 쑥 빠졌다. 비명을 내지를 시간도 없이 놀라 반사적으로 왼발을 내디뎠다. 왼발 밑에는 완전한 지면이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단단하게 왼발 밑을 받치고 있던 지면이 또 한 번 쑥 꺼진 것이다. 이번에는 오른발을 내디딜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발밑이 쑥 빠지면 다른 발을 내디뎌 마치 저절로 계단을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치영이 하는 꼴을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한이 제게 걸려 있던 중력 ESP를 풀어 그 자리에서 뚝 하고 떨어지며 말했다.

“그대로 달려.”

치영은 처음에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러다 신발 뒤축 부분부터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지면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반대편 끝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 다리를 피해 앞으로 달리는 느낌이었다. 기백한이 치영을 위해 만들어 둔 공중 길은 빠르게 무너지고 또 재조립되었다.

치영은 아래로, 아래로 뛰어 내려가며 밤바다 위의 허공을 밟았다.

백한이 그대로 둥실 떠오르며 휘파람을 휙 불었다. 공중에 발라당 누워 버린 에스퍼는 깍지를 낀 손으로 제 목덜미를 받친 채 유유자적하게 하강을 즐기고 있었다.

“헉, 허억—!”

숨이 턱 끝까지 받치는데도 미치게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저 멀리 하현달이 구름 사이로 살짝 나왔다가 들어가 달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일부러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비행하여 날아왔을 에스퍼들을 생각하며, 치영은 계속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듯 허공을 밟았다.

그리고 그때, 허리에 단단한 팔이 감겼다. 기백한이었다.

“이게 뭐라고 뺨까지 붉어질 정도로 재미있어 해. 귀엽네, 안치영이.”

기백한이 치영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헉, 허억—.

한라산보다 높은 고도의 찬 공기가 폐부 깊숙하게 들어갔다가 빠져나왔다.

흉곽을 부풀리며 치영은 저도 모르게 백한에게 매달렸다. 치영의 오금 아래 팔을 두른 채 단단히 받쳐 안은 백한이 그대로 수직으로 낙하했다.

어마어마한 속도감이었다. 백한이 치영을 한 손으로 받쳐 안은 채 제 손목의 시계를 보여 주었다. GPS 기능 등 여러 정보를 알 수 있는 시계의 액정이 반짝거리며 치영이 지금 위치한 고도를 알려 주고 있었다.

상공 6km, 5.3km, 4.1km, 2.2km, 0.9km…….

그리고 곧이어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백한은 치영을 안은 채로 방금 전 치영이 허공을 걸었던 것처럼 뛰어 내려갔다. 바람이 쇄액, 소리를 내며 치영을 스쳤다. 백한의 품에 안긴 채로, 치영은 멀어지는 상공을 뒤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유롭게 걸었던 창공이 멀어지고 있었다. 기백한은 매일 이런 걸 보는 걸까. 그가 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게 없는 상태에서 이런 광경 속을 평지처럼 걷는다면, 치영이라도 그렇게 오만하게 살 것 같았다.

기백한의 오만은 아름다웠다. 미치도록 잘 어울리기도 했다. 치영은 제가 기백한의 옆자리에서 내내 괴로웠던 이유를 알았다.

기백한은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외로움과 고독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치영은 처음으로 백한을 이해했다. 그의 몰애정이 어디서 기원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무언가,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 느낌이 외롭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천천히 백령도의 산기슭 옆 평야에 착륙했다. 치영은 바닥에 닿자마자 백한에게 매달려 있던 팔을 풀어 제 발로 섰다. 기백한도 이번에는 군말 없이 그를 놔주었다.

두 사람은 정확히 낙하산을 정리하고 있던 허인나 옆에 착륙했다. 허공에서 허인나의 GPS를 확인하여 내려온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인나가 수신호를 했다. 그녀는 섬의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팀원들이 있는 방향을 말하는 것 같았다. 기백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두둑 꺾었다.

치영은 살짝 긴장했다. 허인나가 메고 있던 군용 백팩에서 인이어 두 쌍을 꺼냈다. 각각 치영과 백한의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녀가 건넨 인이어를 소리 없이 나눠 꼈다. 그사이, 낙하산을 수풀 사이에 숨겨 둔 허인나가 산기슭을 향해 뛰어 올라갔다.

백한이 이번에도 치영의 허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

놀라 저도 모르게 버둥거리자 백한이 혀를 쯧, 찼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전 시에는 에스퍼가 가이드 들고 다니는 거 몰라? 힘 풀어. 형 힘들다.”

“…….”

뭔가 불만스러웠지만 딱히 항변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백한이 말한 것처럼, 빠른 이동을 위해 임무 시 에스퍼가 가이드를 안거나 업고 다니는 것이 행동 강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한 번 치영을 안아 올린 백한이 빠른 속도로 산을 뛰어 올라갔다.

쉬익, 쉬이익—.

이번에도 바람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스쳤다.

백한은 야전용 오토바이처럼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앞서 뛰어간 허인나를 그녀의 인형이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따라잡았다.

그러더니 몇 초 뒤, 금세 그녀를 빠르게 지나쳤다. 두 명의 에스퍼와 한 명의 가이드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산 두 개를 넘었다.

백령도의 자잘한 산맥에는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서쪽 맨 끝 섬인 백령도는 군사 공항을 갖추고 있다. 그들은 공항과 정확히 공항의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산 하나를 더 넘었다 싶었을 때, 멀리서 희끗희끗하게 춘란대 대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박형인이 그들을 알아보고 수신호를 보냈다. 허인나 역시 화답했다.

혹시나 페르소나 ESP를 사용하여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에스퍼가 섞여들었을까 봐 사전에 미리 짜 둔 암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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